언더 시티의 마피아 조직, 노스트라. 그곳에는 지금 피의 바람이 불고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숙청’의 과정이다.
과거 언더 시티 이면에서 벌어진 노스트라와 헤니르 사이의 대접전이 비교적 평화로운 방향으로 종식된 뒤, 두 조직은 서로의 ‘표면적인’ 우호관계를 위해 그간 조직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던 인재들을 암묵하에 처벌하자는 조약을 맺었다. 헤니르 측에서 어떤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노스트라는 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상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조직의 중추에서 벌어지는 일에 간섭할 수 없는 어소시에이트들은 더욱더 그러했다. 그들은 그저 조직 내 지극히 낮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서로의 목숨을 걱정하며 언제 어디서 소리없이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들의 운명을 비관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헤니르 측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스트라에서는 하급 조직원들의 목숨을 몇 개 가져간 것 정도로 헤니르와의 우호 조약을 충족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 같았다. 즉 노스트라 측의 ‘숙청’은 어디까지나 행동대장인 솔져 이상의 계급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 된다. 며칠 뒤 노스트라 내에서는, 특히 목숨을 부지한 어소시에이트들의 사이에서, 불온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숙청’ 대상에 속해 있는 조직원들의 명단이 그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명단 맨 위에 올라가 있는, 노스트라에서도 헤니르에서도 유명하기 그지없던 솔져의 이름. 테리어드 W. 매저즈. 미스 티아. 통칭, 노스트라의 상어.
과거 헤니르 조직원과의 친분을 의심받아 한 번 청문회에 섰던 그녀가, 이번에는 헤니르와의 우호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숙청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노스트라 내의 불온한 분위기에 박차를 가하기 충분한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미스 티아, 테리어드는 그 리스트가 어소시에이트들 사이에 나돌아다니기 시작한 시점부터 전혀 노스트라의 아지트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용모를 지니고 있기에 그녀의 부재는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영향인지, 어소시에이트들 사이에서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쥐도새도없이 살해당해 강에 버려졌을 거라느니, 워낙 외모나 몸매가 우월했으니 간부들의 장난감으로 돌려졌을 거라느니, 혐의를 부정했기 때문에 노스트라 본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느니 하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물론 그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자들 중에 테리어드가 정말 그렇게 된 것을 본 자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이 몇 가지 있어, 그 소문을 부채질했을 뿐이다.
하나. 그녀의 성이었던 술집 몬도 카네가 ‘휴업’이 아니라 완전히 폐업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 하나. 그녀의 직속 상관이었던 카포레짐 류상이 테리어드에 관련된 화제에는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 하나. 그녀의 동료였던 니콜라이 페드로프나 부하인 후안 에반스의 입에서 테리어드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
고작 그것만으로도 어소시에이트들 사이에서 테리어드 W. 매저즈라는 전설적인 여성 솔져가 노스트라 내에서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우…….”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벽에 두 팔을 구속당한 채 매달려, 빛이라곤 전혀 들어오지 않는 형식적인 창문을 들여다보며, 테리어드 W. 매저즈는 가만히 날짜를 센다. 앞으로 며칠만 기다리면, 일주일이다.
Talk About T
1. 그녀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다
“명목상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거든, 형씨.”
불만스레 자신의 총을 손질하며, 남자는 불만스런 눈빛으로 제 눈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을 노려본다. 청년은, 아직 ‘뒷세계’라 불리는 암흑의 공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이 한 행동이 눈앞의 남자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똑바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을 찾으며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것도, 막 꽃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사장이 가게의 소란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에게 덤벼들어 ‘미스 티아’의 일로 할 말이 있다고 울부짖었던 것도, 그 나름대로는 이유를 갖추고 있기에 한 짓이었다.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는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스 티아’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동기가 있었고, 노스트라에 갓 발을 들인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얼마 없었다. 덕분에 그는 이 상황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설명하기 위해 사장이 준비한 변명대로, ‘중요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황급히 피앙세에게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는 머리 빈 의사’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제게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방법이 없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별로 아는 게 없어. 애초에 미스 티아는 고객일 뿐. 나는 그 여자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해.”
그 점은 알고 있다. 청년, 칼릭스 바스커빌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남자가 자신에게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작 베링거. 언더 시티의 곳곳에 있는 수많은 꽃집 중 한 곳의 사장. 주된 고객은 꽃집이 위치한 주택가에 사는 주부들과 가끔 아내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고 싶어 하는 회사원들, 그리고 미스 티아- 즉 테리어드 W. 매저즈. 마지막 고객이 ‘주된 고객’ 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튀는 존재인 것을 고려해 보면, 이 남자가 결코 평범한 꽃집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 베링거는 뒷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히트맨이었다. 성공률도 제법 뛰어나다. 다만 변덕이 강하고 무엇보다도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노스트라 내에서도 그를 히트맨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테리어드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테리어드는 남자에게 있어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고객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단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눈에 띄니까 제발 꽃을 사 가는 척이라도 하라는 충고를 그녀가 매번 무시한다는 것 정도일까. 게다가 아이작은 칼릭스와도 그렇게 큰 접점은 없었다. 굳이 인연을 찾아보라면 과거 테리어드가 칼릭스를 경호한다는 ‘귀찮은’ 임무를 떠맡았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일조를 해 주었다는 점과, ‘꽃은 제 인생에서 단 한 송이로 충분합니다’ 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두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유로 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협조할 이유가 없고 당신도 내게서 얻어갈 이야기는 별로 없을 거라는 아이작의 결론을, 칼릭스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들어야 했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조직의 ‘숙청’에 말려들어가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칼릭스 바스커빌의 여신을 위해서.
“미스터…… 당신이라면 이해해 주실 것 아닙니까.” “뭘 말야.” “제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생사도 알 수 없을 정도의 일에 휘말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직에서 큰 입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가 위험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무력한 상황을 그저 견뎌내야만 하다니. 당신이라면 그런 괴로움을 버틸 수 있을까요.” “우리 아가씨는 내가 평생 지켜줄 테니까 상관없는데.” “저도 그러고 싶은 겁니다.” “…….”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뭐든, 정말 뭐든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그녀의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면, 알 만한 사람이라도 소개시켜 주십시오. 조직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알려주십시오. 제발.”
무릎에 손을 얹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칼릭스를 보고, 아이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이거 안 되겠구만’ 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칼릭스는 고개를 들려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고개 숙인 칼릭스의 머리 위에서 들려온, 총이 조립되는 소리였다.
“그럼, 테스트를 하자고.” “예?” “아까도 말했듯이 난 노스트라 사람이라면 미스 티아밖에 몰라. 그러니 노스트라 조직에 대한 일은 내 입에서 나올 수 없지. 다만 형씨가 원하는 것 중 하나…… 조직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우리 아가씨는 아주 비싸거든? 아무나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지. 그러니까 테스트를 해 보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아이작은 막 조립한 리볼버를 칼릭스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처음 느껴보는 것이 아닌 리볼버의 차가운 총구 끝자락이 이마에 닿자, 저도 모르게 소름과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한 번 겪어보았던 죽음의 위기가 코앞에 다가온 것을 직감한 청년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아이작은 씩 웃었다.
“6분의 1 확률이다. 총알을 피해간다면 우리 아가씨를 만나게 해 주지. 총알이 걸린다면, 그냥 여기서 죽으면 돼.”
어떻게 할래? 아이작의 그 질문에 칼릭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테리어드 W. 매저즈의 생사에 대한 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더해진 것은 그녀가 노스트라에서 모습을 감춘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바쁜’ 일이 생겨 테리어드의 보조를 할 수 없게 된 후안 에반스 대신 일시적으로 그녀에게 붙어야 했던 불운한 어소시에이트가, 그녀의 ‘숙청’ 과정에 대해서 입을 연 것이었다. 그가 딱히 입이 무거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위에서 입을 막으려 했다는 정황도 포착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털어놓을 이 정보가, 동료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을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어소시에이트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상황이 바뀌고,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주목되는 순간을.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가 묘사한 과정은 테리어드 W. 매저즈가 정말로 숙청당했을 거라는 어소시에이트들의 추측에 가까운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줄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테리어드에게 무기를 배달하러 왔었다. 청문회 이후로 묘하게 주목을 받게 된 테리어드는 자신에게 무기를 조달해 주는 카포레짐의 가게에 자주 찾아갈 수 없게 되었다. 청문회에서 노스트라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훌륭하게 증명해 보임으로서 노스트라 간부들의 눈에 든 그녀가, 언젠가는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카포레짐으로 승격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부풀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찌 됐든 자신이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카포레짐으로 추천해 줄 수 있는 자신의 상사에게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고, 죽어나는 건 어소시에이트 뿐이었다. 나이프로 총알을 막아내는 터프함 때문에 그녀의 무기는 언제나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였고, 그는 불운하게도 일주일에 몇 번씩 류상의 가게에 찾아가 그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테리어드를 위한 무기를 조달해야만 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그는, 후안 에반스가 복귀하기만 하면 내 이 짓 그만두고 만다, 라는 일반 샐러리맨의 대사를 속으로만 던지면서 테리어드의 집을 찾았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의 노고에 ‘수고했어요’ 라는 말 외의 인사는 하지 않은 채 나이프를 점검했다. 문제가 없다면, 이대로 퇴근이다. 빨리 끝내주세요, 미스 티아. -라는, 말로는 할 수 없는 불만을 속에만 담아둔 채 그는 테리어드의 옆에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가 오늘 정시퇴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테리어드의 말에 달린 셈이었다. 만의 하나라도 나이프의 질에 문제가 있다면 다시 류상의 가게로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억울해서라도 빨리 승진하고 말지. 투덜대던 그의 귀에 운명을 가르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저, 미스 티아. 누가 왔습니다만.” “나가지 마세요. 나는 혼자 사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방문 판매나 뭐 그런 걸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추측은 정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의 수입을 늘려보려고 온갖 집을 찾아오곤 하는 방문 판매원이라면, 벨을 눌러 사람이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바로 다음 집으로 넘어가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니 몇 번이고 벨을 누르고, 이윽고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하는 방문자의 행패는 그에게는 물론 테리어드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이프를 만지작댈 뿐 몸을 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소시에이트는 조용히 자리를 떠, 감히 누가 노스트라의 상어의 집 문을 부서질 듯 두들겨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그가 문 앞으로 다가가 불청객을 파악하기 위해 한 쪽 눈을 문에 가져다 댄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 나갔다. 불운하게도 그는 부서져 나간 문에 얼굴을 정확히 부딪혀 이마가 찢어지는 불상사를 겪어야만 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일으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외치려던 그는 구둣발로 집을 침범하는 다섯 명의 남자가 자신의 동료라는 사실과, 그들의 뒤에 서 있는 남자가 테리어드와 모종의 대립 관계를 세우고 있던-물론 그녀 쪽에서는 상대도 하지 않았겠지만- 솔져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테리어드가 앉아 있는 거실 소파까지 겁없이 침입한 그들은 그녀를 향해 저마다 총을 들이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할 말을 잃은 그의 코앞에서 사건은 전개되고 있었다.
“미스 티아. 청문회 연락은 받았을 텐데, 어째서 출석하지 않았지요?”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기에 그랬을 뿐입니다.” “일개 솔져가 간부들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이전에 있었던 건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을 텐데요. 무엇 때문에 다시 청문회를?“ “그런 건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일어서서 동행해 주십시오.” “싫다고 한다면?“ “……강제로 끌고 가야겠지요.”
그는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 조직의 명령에 대놓고 반항하는 테리어드와 저 노스트라의 상어 앞에서 ‘강제로 끌고 가겠다’는 발언을 하는 솔져 중 누가 더 무모한 것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테리어드의 정신이 나간 것이다. 감히 노스트라 상층부의 명령을-그 명령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그가 알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제아무리 주목을 받고 있다지만 일개 솔져에 불과한 그녀가 거부하다니. 어소시에이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가져다 준 나이프를 쥔 채 흉흉한 적의를 감추지도 않고 있는 저 노스트라의 상어에게,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총을 들이댄 채 위협을 가하고 있는 솔져의 정신상태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이, 알고 있어? 저 여자는 빡이 치면 이 자리에 있는 여섯 명 정도는 순살해버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여자라고! 팽팽한 긴장 상태에 그는 저절로 군침을 삼켰다.
그리고 테리어드가 나이프를 든 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 그 긴장 상태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동시에 발사된 다섯 대의 총알이 정확하게 테리어드를 습격했던 것이다. 두 발은 양 팔의 관절에, 두 발은 그녀의 허벅지를 꿰뚫고 지나갔다. 남은 한 발은 어떻게든 튕겨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집 천장에 파고들었을 뿐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던 나이프는 또다시 망가진 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당장 목숨까지 빼앗을 순 없습니다, 미스 티아. 당신에게는 들어야 할 말이 있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다섯 명의 어소시에이트가 덤벼들어 테리어드의 전신을 구속했다. 붙들린 채 자리에서 끌려 나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소시에이트는, 긴장으로 떨려오던 다리를 그제야 해방시킬 수 있었다. 피 냄새가 흐리게 풍기는 그녀의 집에 혼자 남아 그는, 자신이 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절대 위에 반항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진리를 머릿속에 깊게 새겼다.
2. 그녀는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란다.
“저는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요…….”
역시나 냉정한 반응이었다. 아니, 냉정하다기보다는 망설이는 반응이라고 해야 좋을까. 칼릭스의 앞에 앉아서도 소녀는 계속 뒤에 서 있는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이작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나 어디까지 말해야 해요?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아이작은 그런 소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가씨가 아는 만큼만 말해주면 된다’고 말했고, 소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빠는 뭘 어디까지 알고 싶어요?” “저…… 그것보다, 옷을 제대로 입어주시면 안 될까요…….”
칼릭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소녀는 맨몸에 헐렁한 셔츠 한 장 외에는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 지 좀처럼 알 수 없을 정도지만, 처음 소녀가 현관으로 나와 그들을 맞이했을 때보다는 나은 복장이었다. 처음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소녀는 맨몸에 슬립 하나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소녀의 그런 모습을 눈에 담았을 때 칼릭스는 바로 등을 돌리고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는데, 그것은 사실 그의 목숨을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만약 그가 소녀의 몸을 바라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면 아이작은 당장 그의 눈을 파 버렸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릭스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가 과거 메리켄너클을 달고 그의 목숨을 빼앗으러 왔었던 헤니르의 옛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째서 소녀가 노스트라에게 고용된 히트맨의 집에서 살고 있는지, 소녀와 아이작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런 것을 추리할 만한 시간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길게 얘기할 것도 아니고, 옷 갈아입기도 귀찮아요. 이걸로 충분해요. 그렇죠, 아저씨.” “응? 아, 뭐. 아가씨가 그걸로 좋다면야!”
아니, 말려 주세요. 제발요. 칼릭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는 칼릭스와, 그렇게는 말했어도 소녀의 몸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아이작 간의 타협안으로 이불을 꼼꼼히 둘러 몸을 완전히 감춘 뒤에야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그 언니가 지금 조직의 숙청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 그렇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몰라요.” “예?“ “그야 저는 노스트라의 조직원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몰라요. 헤니르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게 오빠한테 도움이 될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니까 알려주십시오.”
칼릭스의 부탁에 소녀는 흐음, 하고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도움이 된다면 말하겠지만, 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점으로 보아 그녀 역시 자신의 말에 자신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칼릭스의 심장을 떨어지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헤니르에서 조직원이 그런 일에 휘말렸다면 일단 죽이는 게 일반적이에요. 여자 조직원이면 약에 절게 만들어서 사창가에 팔아넘길 수도 있겠죠. 물론 그 언니는 실력이 워낙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저처럼 문제를 일으킨 곳이 아닌 다른 크루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야 있겠지만…… 오히려 뛰어난 실력의 사람이니까 더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없애다니…… 죽이는 겁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래요. 헤니르에서는 그런 일 없지만, 노스트라에서는 명분을 만들려고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명분은 있어야 할 테니까, 나름대로 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하겠죠. 예를 들어 적 조직이랑 내통을 했다거나, 혹은 횡령 같은 걸 저질렀다거나. 노스트라는 배신을 제일 해서는 안 될 일로 치죠? 그럼 배신자라는 이유를 만들어서 죽이는 게 가장 빠를 거예요. 그리고 그 적당한 ‘이유’가 언니 입에서 나올 때까지 고문을 한다는 식으로 살려둘 수도 있어요.” “세상에…….” “그리고 그 ‘고문’ 말인데…… 어떤 일을 당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알려줄 수도 있어요. 어디까지나 헤니르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웃어보였다. 일반인의 상식을 일탈하고도 남은 그 미소에서 칼릭스는 저절로 오싹함을 느꼈지만, 그 오싹함이 소녀의 입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타임 오버! 라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손이 칼릭스의 목덜미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 미스터?!” “처음부터 5분만이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 “내가 알 바냐.”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그랬어? 아가씨랑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지. 그것도 5분만. 이제 끝이야. 타임 오버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릭스를 현관까지 질질 끌고 간 아이작은 현관문을 열고 그를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바로 문을 닫아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어느새 그들의 뒤를 따라온 소녀가 아이작의 팔 뒤에 숨어 얼굴을 삐쭉 내밀자 아이작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혹시라도 아이작을 말려주려나, 하는 칼릭스의 기대는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그들을 맞이했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순수한 표정으로,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칼릭스를 향해 이 말만 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만약 조직 간의 사정에 휘말린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거든요. ……하지만 전 그 언니가 살아있었으면 좋겠어요. 저하곤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해린 언니가 아직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소녀의 말과 함께 문이 세게 닫혔다. 망연자실한 칼릭스의 머리에 남은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해린.
테리어드 W. 매저즈가 끌려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조직원의 증언 이후 노스트라 내에서 테리어드의 ‘숙청’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들은 거의 사라졌다. 원인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노스트라 상층부가, 그 테리어드조차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녀를 소환한 것만은 분명했다. 어소시에이트의 증언 속에서 테리어드 본인이 말했듯이 과거 있었던 헤니르와의 관계를 추궁하는 청문회에서-그 청문회도 사실은 비밀에 붙여졌어야 했으나 어째서인지 어소시에이트들 사이에서 테리어드가 그런 혐의로 청문회에 불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숨길 기색도 없이 돌고 있었다-결백을 증명했음에도, 그녀는 다시 논란의 한가운데 선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헤니르 조직원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간부들 사이에서 선언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여론은 들썩였다. 오랜 분쟁에 지쳐 헤니르와의 우호관계를 꾀하고 있는 노스트라 상층부가 헤니르 조직원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솔져를 가만히 둘 리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노스트라에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한 말이 그녀의 목을 조르게 된 셈이었다. 몇몇 어소시에이트들은 그녀를 동정했다. 그녀는 단순히 노스트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것뿐인데,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먹듯 죽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 몇몇 어소시에이트들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충성심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녀의 높은 투쟁심과 권력욕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테리어드는 그 말을 함으로서 간부들의 눈에 들었고,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던 간에 조만간 다른 간부를 밀어내고 카포레짐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기반을 다져 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런 의견도 당연한 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어소시에이트들은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마주했다. 아주 늦은 밤, 지하감옥에서 한 명의 여자가 거의 다 죽어가는 상태로 끌려 나와 아지트 밖으로 추방당했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하감옥에서 끌려나온 여자는 피가 말라붙은 탐스러운 금발과 갈색 피부로 이루어진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눈은 오랜 고문 끝에 제대로 뜨지도 못할 정도였고,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는 끔찍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이프를 잡고 휘두르던, 곱게 뻗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는 온존한 형태를 유지한 손톱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언제나 하이힐 속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고운 발도 난도질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게, 테리어드 W. 매저즈는 노스트라에서 ‘숙청’ 당했다. 그녀의 존재는 더 이상 노스트라에 없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어소시에이트들의 흥미는 급격히 식어버렸다.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 끝에 남는 것은 테리어드 W. 매저즈가 사라졌으니 헤니르와의 우호관계는 확실히 다져질 거라는 추측뿐이었다. 그러나 노스트라 상층부의 여론은 어소시에이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 간부는 목소리를 높여, 테리어드 W. 매저즈를 필두로 한 ‘헤니르 반대파’를 거의 숙청했으니 헤니르도 반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헤니르는 방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언더 시티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할, 가장 확실한 상황 아닙니까. 이를 갈듯 말하는 그 간부야말로 자신이 말하는 ‘헤니르 반대파’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부들이 모를 리 없었다. 상층부에서는 한동안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대로 헤니르와의 우호관계를 굳힐 것인가, 방심하고 있는 헤니르를 습격해 완전한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그리고 오랜 토론 끝에 노스트라의 보스가 입을 열었다. 거기서 그가 내린 결론이 노스트라 내에 불어닥칠 피바람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어소시에이트들 사이에서 퍼지는 것은, 테리어드 W. 매저즈가 자신의 자택에서 끌려나가는 해프닝이 벌어진 지 정확히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3. 그녀는 그녀를 높게 평가한다
“내게 할 말은 없습니다.”
칼릭스 바스커빌이 마지막으로 기댄 곳은 명함이었다. 그 명함의 주인은 겉으로는 각종 업계의 저명인사를 호위하는 경호원이라는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에서는 헤니르의 조직원이라는 제 2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이해린. 과거 칼릭스가 한 번 만난-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적이 있으며, 그를 보호하고자 앞으로 나섰던 테리어드의 입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나온 적이 있었던 이름이었다. 칼릭스는 이후 테리어드에게서, ‘내게는 필요없는 물건’ 이라며 해린의 명함을 건네받았다. 그게 없었더라면 해린에게 닿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건, 당연하게도, 해린에게는 꽤나 민폐였던 모양이다. 다짜고짜 자신의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테리어드 W. 매저즈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고 말한 칼릭스를 향해 해린은 쌀쌀맞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 그래도, 미스 티아가…… 그녀가 살아있는지만이라도 알 수 없겠습니까?” “내가 그런 요구에 답해줄 것 같나요?” “부,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제 당신에게밖에 기댈 수가 없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어째서 노스트라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묻는 겁니까?” “그건…….” “당신도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죠. 조직 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조항을. 잘은 모르지만, 노스트라에서라면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사실조차도 ‘배신’의 일환이 됩니다. 물론 지금이야 노스트라와 헤니르 사이에 우호 조약이 맺어졌으니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이 이상 파고들어오면 당신에게도 분명 불이익이 생깁니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한심한 생각이군요.”
전화 너머로 들려온 해린의 목소리는, 칼릭스가 여태까지 마주한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로웠다. 실제로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런 불쾌함과 거기서 나오는 살의를 전혀 감추지 않은 채 칼릭스를 노려보았으리라. 딱 한 번 보았던 해린의 얼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이대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칼릭스가 공포에 몸을 굳힌 사이 해린은 그에게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나는 경호원 일을 하면서, 내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을 목숨 바쳐 지킵니다. 당신을 호위하던 때의 그 여자도 그건 마찬가지였겠죠. 명령이라는 이유는 있었겠지만, 그 여자는 전신에 총을 맞아가면서도 당신을 지킨 전적이 있습니다. 구원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는 거기서 죽었어요. 그렇게까지 해서 지켰던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이런 어리석은 짓에 선뜻 내어놓는다고 생각하면 그 여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그건…….” “당신의 그 발언은 그 여자를 모욕하는 발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불쾌하기 그지없군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길게 늘어지는 통화음을 들으며 칼릭스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여신을 구할 힘도, 능력도,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전신을 지배하는 좌절감에 천천히 영혼을 죽여가던 그가 이윽고 하나의 결심을 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그는 그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의 여신은 그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지 않으며, 애초에 그의 행동 자체가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사실을.
테리어드 W. 매저즈가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노스트라 아지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숙청‘의 피바람이 한바탕 불고 난 뒤의 일이었다.
4. 그녀는 조직에 충실하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요.”
전화를 끊는 해린의 뒤에서, 그녀의 그런 행동을 비꼬는 것 같으면서도 내심 매우 감탄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몸을 돌린 해린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이 자신의 ‘고용주’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임을 그녀라면 아주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그들 사이에서는 그런 감정이 묵인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해린의 매서운 눈빛을 받는다고 움츠러들 만한 여자가 전혀 아니었다. 방금 전, 아이작 베링거와의 통화-“말해두지만 나도 우리 아가씨도, 이런 일에 협조하는 건 이번뿐입니다.”-를 끝낸 해린의 현재 고용주- 테리어드 W. 매저즈는, 험악한 시선의 해린에게서 고개를 돌려 달력을 흘깃 쳐다보았다.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해린은 그렇게 말했지만, 테리어드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해도 그녀가 챙겨야 할 것은 이 일주일 동안 정성껏 손질했던 나이프뿐이었다. 제 3자의 앞에서 조직에 끌려간다는 ‘연기‘를 펼쳐 보였을 때 류상이 ‘소품’으로 마련해 주었던 나이프와는 질이 다른 물건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날이 선-물론 해린이 얌전히 죽어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나이프를 곱게 정돈해 재킷 안쪽에 찔러넣고, 테리어드는 얼얼한 손끝을 주물렀다. 손톱이 빠져버린 자국은 빈틈없이 치료한 뒤 붕대까지 감아 두었으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픔을 잊기 위해 그녀는 가만히 일주일 전, 류상에게 불려갔던 일을 떠올렸다.
헤니르와의 우호 조약을 맺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 간부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헤니르 반대파의 움직임이었다. 헤니르와의 대립이 극대화되었을 때, 노스트라는 두 개의 여론으로 나뉘었다. 온건파와 반대파가 그것이었다. 언더 시티의 평화를 위해 언젠가는 서로의 조직을 삼켜버리려고 격돌하게 되더라도 지금은 잠시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낫다는 온건파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헤니르를 뿌리 뽑고 노스트라의 위상을 내세워야 한다는 반대파의 대립은 노스트라의 뿌리를 흔들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기실 테리어드 본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보스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이었으며, 오랜 고민 끝에 보스가 우호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류상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도 그 어떤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여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한동안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을 잠시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반대파는, 보스의 그런 결정에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했어도, 저마다 조심스럽게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연할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헤니르와의 분쟁으로 자신들의 영역에 큰 손해를 입었거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헤니르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무리들이었다. 다만 테리어드가 그들의 그런 심정을 이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노스트라 조직원들에게 있어 절대적이어야 할 보스의 결정에 불만이나 반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은 큰 문제였다. 간부들의 대다수는 온건파였지만, 반대파의 세력도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그들이 만약 뜻을 모아 보스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면 노스트라가 두 개의 조직으로 갈라지고 말 위험이 있었다. 이에 보스를 포함한 상층부에서는 하나의 계획을 짰다. 헤니르와의 우호 조약을 받아들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온건파의 일부를 배제하는 식으로 ‘틈’을 만들고, 그 기회를 노려 보스의 명령에 반기를 들 만큼의 존재들을 솎아내자고. 그리고 그 계획에서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테리어드 W. 매저즈였다.
그녀가 선택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일단 그녀는 보스의 명령에 복종하고는 있었어도, 조직에서는 암암리에 ‘헤니르 반대파’로 규정된 존재였다. 거기에 테리어드 본인의 의사는 없었다. 그저 청문회에서 헤니르의 조직원을, 눈앞에 서 있는 저 이해린을, 노스트라의 명예에 걸고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한 바 있기 때문이라는 가당치도 않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 스스로의 영달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스가, 혹은 상층부가, 해린을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그렇게 한다. 살려두라고 한다면 또 그렇게 한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테리어드 W. 매저즈가 우직할 정도로 보스에게, 노스트라에게 충성을 바치는 조직원이라는 점. 언제나 보스의 명령만이 테리어드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류상이, 매우 힘든 일이 될 거라고 말하며 내심 그녀의 승낙을 말리는 듯한 말을 했을 때도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카포. 보스께서 하라고 하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자택에서 총을 맞고 끌려가, 반대파들을 속여 넘기기 위해 아무 거짓 없는 고문을 당했음에도 그녀는 끝까지 버텨냈다. 그 과정에서 뽑혀버린 열 개의 손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다시 자랄 테니까,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다만 문제는 ‘숙청’ 당한 것으로 처리되어 밖으로 끌려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계획상 테리어드는 일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어딘가에 몸을 숨겨야 했으나, 자신의 자택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만한 조직원을 헤니르와의 우호 관계 때문에 잘라낸다는 얼토당토않는 상층부의 결정이 어쩌면 온건파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반대파에서 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조직원들의 집에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숨겨줄 만한 지인은 거의 없었다. 제 일 후보였던 아이작 베링거는 동거인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테리어드의 은닉을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테리어드가 떠올린 것은 두 사람이었고, 그들 중 테리어드가 택한 것은 이해린이었다. 일단 그녀는 노스트라의 조직원이 아니며, 테리어드와는 대립관계를 세우고 있는 입지에 있었다. 반대파의 허를 찌르고 진정한 숙청이 끝날 때까지 몸을 의탁할 만한 곳으로 해린만큼 적당한 상대는 없었다. 테리어드는 바로 해린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테리어드의 나이프 다섯 자루가 쓰지 못할 물건이 되고 해린의 총알이 전부 떨어지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지만, 결국 해린은 테리어드가 지하감옥에서 나온 뒤 사건이 종료될 때까지의 사흘 동안 그녀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와 함께 호텔에서 지내는 것을 승낙했다. 고문의 끝에 너덜너덜해진 채 약속 장소에 나타난 테리어드를 보고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건 물론이다.
-그래서는 한동안 나이프도 못 잡겠군요.
인상을 찌푸리고 그렇게 말한 해린은 사흘 동안 거의 거동을 하지 못한 테리어드를 위해 식사와 담배를 조달해 주거나 그녀의 상처를 치료할 의사를 데려오는 등의 일을 했다. 물론 그에 준하는 보수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내심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느냐는 불만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끝까지 자신을 돌보아 준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평생에 한 번 만날까말까한 호적수를 이런 일로 잃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적용된 것이었으리라. 만약 해린이 반대 상황에 처했다면 자신도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하며, 테리어드는 사흘 동안 해린이 보여준 ‘헌신’을 납득했다. 물론 그것을 서로 말로 주고받는 일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 남자는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요.”
해린이 말하는 ‘남자’ 란 것이 누군지, 테리어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칼릭스 바스커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를 자신의 여신으로 규정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다녔던 그가 테리어드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할 뻔자였다. 사실 그 이유 때문에 테리어드는 자신의 몸을 의탁할 곳으로 해린과 함께 그를 떠올렸음에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조직이 노스트라의 휘하에 있으니 반대파의 눈에도 당연히 들어가 있을 거라는 사실 역시 한몫하기는 했으나, 그녀는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특유의 냉정한 시선으로 그런 감정적인 이유에서 등을 돌렸다. 칼릭스가 자신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돌아다닐 가능성을 생각해 크루 사람들과 아이작, 해린에게까지 입조심을 시켰다. 그런 철저한 행동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도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린 역시 그 사실을 눈치 챘기에 굳이 테리어드에게 칼릭스에 대한 일을 언급한 것이리라.
‘정말, 싫은 사람이야.’
해린에게도, 칼릭스에게도 해당되는 그런 감상을 늘어놓고, 테리어드는 침대로 향했다. 이만 쉬고 싶으니 오늘은 퇴근해도 좋다는 그 제스처에 해린은 방에 걸어두었던 자신의 윗도리를 걸쳤다. 이제 이 방을 나가면 그녀의 임무는 끝난다. 고용주와 경호원이라는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 나고, 원래의 관계- 언제 어디서든 대립하는 장소에서 만나면, 또 다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테리어드도 해린도 그런 관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날이 오는 것을 기대할 정도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죽이겠어요.” “그건 이쪽에서 해야 할 말이군요.”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해린이 호텔 방문을 열었다. 그런 해린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테리어드가 막 돌아누웠을 무렵이었다.
“아, 그리고. 그 남자에게는 사과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문이 닫혔다. 테리어드는 해린을 돌아보지도, 그녀의 말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것을 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의 행동은 노스트라의 명령에 따라, 노스트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 행동일 뿐이었다. 거기에 칼릭스 바스커빌이라는 존재가 끼어들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일주일 동안 그가 노심초사하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친 일 따위는 테리어드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칼릭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나를 포기해요, 미스터.”
그녀는 칼릭스 바스커빌이 그녀에게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없다. 그럴 생각도 없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는 존재이다. 만약 노스트라에서 그의 존재를 말살하라고 명한다면 테리어드는 어떠한 저항감도 없이 그의 심장에 나이프를 꽂아넣고,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노스트라의 상어. 노스트라가 명하는 대로 타겟을 물어뜯는 짐승이었다. 그런 존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언젠가 그 사랑이 그녀에게 닿을 것이라 믿고 있는,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제 마음을 접을 생각이 없다고 하는 그 남자는 어찌나 어리석은지. 똑바로 누워 천장을 보고, 테리어드는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수면 시간은 다섯 시간이다. 다섯 시간 뒤에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어디에도 아픈 곳이 없다는 듯, 노스트라 아지트에 모습을 드러내어 보스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조직원들에게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여유 속에서, 그녀는 입술을 열어 언젠가 부른 적이 있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It‘s not to easy, to loving me…….”
본격적인 후기를 쓰기 전에, 아이작 씨와 해린양의 출연을 허락해주신 숫자님과 스피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처음 합작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노스트라가 티아를 희생해서 헤니르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는 점이었는데, 기실 티아가 조직 내에서 그 정도의 위치는 아니어서(물론 노스트라에서 유명한 히트맨이기는 하지만) 페이크를 쳐서 반대파들을 솎아내는 방향으로 선회했음. 그 와중에 티아하고 썸을 타는 중인(일방적인 썸이라 해도 전혀 문제없지만) 칼릭스도 등장시키고 아이작 아저씨랑 새 삶 시작한 제레미도 등장시켜주고... 는 사실 제레미 로그는 하나도 안 썼는데 초장부터 거한 네타바레wwwwwwwwww 이대로 괜찮은가wwwwwwwww
모든 자캐에게 애정을 듬뿍 담고 있지만 티아는 정말 개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라, 이런 식으로 다시 쓰게 된 게 너무 기뻤다고나 할까... 과거 언씨 분위기도 만끽해 보고! 근데 합작 공개된 거 보니까 티아랑 해린양만 빼고 죄다 커플이었다는게 함정 합작 열어주신 스피나님 감사드립니다 흡흑흑흐윽윽 사랑해요... 제가 해린양 가지면 정말 안 되나요? ()
간만에 1차 업데이트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마녀사냥 로그도 슬슬 정리해야 되는데... 오늘은 좀 바빠질 거 같으다... ㅇ<-<...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인식한 것은 새하얀 천장이나 제 몸이 파묻힌 침대의 어중간한 푹신함보다,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가 먼저였다. 흔히 병원에서 맡아 볼 수 있는 그 냄새에 카게야마 토비오는 바로 양호실을 떠올렸다. 방금 전까지-물론 기억이 없으므로 방금 전이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었겠지만-체육관에서 공을 만지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단시간 내에 병원으로 실려왔을 리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물론 카게야마의 정상적인 사고는 딱 거기까지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쩌다가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게 된 것인지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다. 일단 부활동 도중에 머리에 엄청난 쇼크를 받고서 기절했다- 정도까지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어슴푸레한데, 정작 그에 이르는 자세한 과정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 그러니까. 와아, 굉장해! 하고 소리치는 히나타 그 멍청이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왕님 말야-“ “으악?!”
그리고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부웅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움직인 그의 머리가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어디까지나 그 공격을 받았을 뻔했던 사람의 몸놀림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1초만 움직임이 늦었더라면 카게야마의 머리-그 목소리의 주인이 ‘돌머리’ 라는 단어 외의 적당한 표현이 없다고 표현하는-와 부딪힐 뻔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위기를 간신히 벗어난 상대, 츠키시마 케이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시선에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눈을 떴다 했더니, 왕님, 사람 죽일 일 있어? 그 돌머리에 부딪히면 난 최소 즉사야. 낯익은 빈정거림이 귀에 들려오자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츠키시마의 머리를 가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지. 이 녀석은 머리를 부딪쳤더라면 아파 죽겠다면서 또 나름대로 핀잔을 줬을 만한 녀석이니, 오히려 피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돌머리’ 라는 말은 들을 운명이었겠지만.
“머리를 그렇게 세게 부딪혀 놓고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럽지 않아? 아, 혹시 돌머리라서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건가?”
너는 기절했다 눈 뜬 사람에게 꼭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해야 하냐. 카게야마는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고 츠키시마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한껏 노려봐 주었다. 그것으로 카게야마가 그나마 제정신임을 파악했는지, 츠키시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뭐, 괜찮으면 다행이고. 라고 말했다. 흘깃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어느새 부활동이 거의 끝나 있을 시간이었다. 한참 연습하던 도중에 쓰러진 거니까- 적어도 30분은 지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츠키시마는 계속해서 기절한 제 옆에 붙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뭐야, 기억 안 나? 정말 성대하게 넘어졌었는데. 니시노야 선배가 필살 리시브를 가르쳐 준다고 히나타하고 야마구치를 붙잡아두고 있었는데, 왕님은 거기 휘말렸어. 히나타가 공중에서 3회전은 했지, 아마.”
그 설명에 어느 정도 기억이 되살아났다. 니시노야가 가르쳐 주는 리시브를 따라하려다가 발이 미끄러진 히나타가 거칠게 회전하며, 그것을 말리려 다가가던 자신과 크게 충돌했고 그 바람에 뒤로 튕겨나가 머리를 바닥에 박은 일이 떠오르자 카게야마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걸 하필이면 츠키시마가 코앞에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반년은 놀림 받아 마땅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카게야마는, 내일 아침 연습 때 히나타의 머리 위에 커다란 혹을 다섯 개는 만들어 놓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들도 안색이 창백해졌지 뭐야. 히나타는 멀쩡하게 일어서는데, 너는 머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완전히 맛이 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나한테 실어 나르라고 한 건 좀 너무했지만.”
츠키시마는 저렇게 말하지만, 사와무라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선책을 택한 것이었다. 일단 카라스노 배구부 안에서 카게야마를 옮길 만한 체격을 갖춘 것은 아사히와 야마구치, 그리고 츠키시마 단 셋뿐이지만, 카게야마라는 환자를 옮기는 데 가장 적합한 건 츠키시마였다. 일단 만사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사히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환자를 나르는 일을 맡길 만큼의 신뢰라고는 전혀 없었을 것이고, 한참 점프 플로터 서브 연습에 열중하는 야마구치를 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츠키시마가 당첨되어, 부주장인 스가와라와 둘이 카게야마를 이리로 옮겼다- 뭐 이런 정도일 것이다. 그래, 그건 고맙다고 치자. 제아무리 카게야마가 츠키시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그 사실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정도의 개념은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30분 넘게 여기 앉아 있었던 건데? 의문이 피어올라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뭐,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배려라고는 체육관의 먼지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든 츠키시마가 굳이 카게야마를 걱정해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연습이 귀찮아 땡땡이를 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정말로 츠키시마다운 이유라고 생각하면서도, 카게야마는, 연습을 땡땡이 쳤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나빴다. 츠키시마 케이는 상당한 인재다. 본인이 조금만 의욕적으로 행동하면 블로킹도 스파이크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천재’ 라 불리는 카게야마보다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변함없다. 그런데도 영 의욕이랄 게 없는 것이다. 카게야마가 보기에는 다듬으면 아름다워질 원석이 땅에 묻혀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츠키시마의 그런 태도를 보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 영 의욕이 없어 보였던 팀메이트의 얼굴 같은 것을.
“……이봐, 왜 나한테만 말을 시키는 거야. 왕님도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어…….”
무슨 말을 하라고? 멍청이, 왜 이런 데서 멍 때리고 있어? 당장 연습하러 돌아가! 따위의 말을 하라고? 이미 연습도 끝났을 시간인데? 게다가 카게야마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츠키시마는 또 이죽대며 어이쿠, 왕님이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 서민은 그저 받잡겠사옵니다- 따위의 말이나 지껄일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데 그런 식으로 말다툼을 해서 스트레스 지수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 히죽히죽 웃는 기분 나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문 것이었지만, 츠키시마는 그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저기요, 왕님? 내 말 들려? 이거 보여? 손가락 몇 개?” “세 개잖아! 남을 환자 취급하지 마!” “뭐야, 멀쩡하잖아.”
약간 안심한 듯한 목소리였다. 남을 비웃으려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둘 중의 하나만 확실히 해 줄 수는 없나, 이 자식은. 그야 물론 ‘비웃는다’ 쪽의 비중이 더 높기는 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츠키시마니까. 하지만, ‘환자 취급하지 말라니, 왕님, 방금 전까지 환자였거든요?’ 하고 반문할 뿐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는 츠키시마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부활동도 끝날 시간이겠다, 왜 집에 안 가고 여기 붙어 있는 거지? 아니면 아직 연습이 안 끝났나? 선배들이 상태를 보러 오지 않는 걸로 봐선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사와무라나 스가와라 정도는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자신의 상태를 진지하게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경 너머에 자리한 츠키시마의 두 눈동자가 카게야마의 뒤통수나 이불 위에서 일어나지 않으려 하는 점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이나, 여전히 기분 나쁜 말투를 사용하고 있어도 대놓고 빈정거리지는 않는다는 사실 등등이 그 추측을 뒷받침하는 요소였다. 아, 그런가. 이것도 이 녀석 나름대로 걱정하고 있단 얘기일까. 하지만 대놓고 걱정했냐? 고 물어보면 분명 이리저리 말을 돌려 빠져나갈 것이었다. 뭐, 딱히 걱정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떡할 거야? 더 잘 거야? 아니면, 집에 갈 거야?”
그리고 츠키시마가 그렇게 물었을 때 카게야마의 머릿속에는 아주 단순한 장난이 떠올랐다. 평소의 카게야마가 장난이란 것과 거리를 두고 사는 만큼, 갑작스레 떠오른 충동을 숨기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카게야마는 이렇게 묻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너 뭐야?” “……엉?” “체육관에 얼굴을 비치기는 할 건데,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냐고. 내 옆에 붙어 있었던 것도 그렇고. 너 누구야? 배구부 사람이냐?”
그래, 장난. 단순한 장난이었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너에 대한 기억이 전부 날아가 버렸어- 라고 말했을 때 츠키시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그저 단순하게 궁금해져서 던진 말이었을 뿐이었다. 츠키시마가 놀라서 사와무라나 스가와라를 불러오게 되더라도, 그때는 그때에 맞춰서 기억이 되돌아왔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예 놀라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평소처럼, 머리 한 번 부딪히더니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렸나 보네, 하고 질린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거짓말이지?”
하지만 츠키시마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일단 놀란 것은 확실했다. 웬만해서는 흐트러지지 않는 웃음 띤 얼굴이 순식간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으니까. 하지만 그 놀람의 정도는- 카게야마의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사람의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님, 나 기억 안 나?” “기…… 기억 안 나. 너 누구야?” “츠키시마 케이. 1학년 4반. 왕님의 팀메이트잖아.” “그, 그렇게 말해도 기억 안 나는 걸 어쩌라고.” “진짜냐…….”
그렇게 말하며 츠키시마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것만 봐도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이 농담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무척 놀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어라? 이거 좀 아니지 않나? 카게야마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츠키시마는 이마에서 손을 뗀 채 무척 진지한 눈빛을 카게야마 쪽으로 돌렸다.
“정말 기억 안 난다고?” “으…… 으응.” “그럴 수가…… 왜?” “왜, 왜냐고 물어도…… 머리를 부딪혀서?” “다른 사람은? 야마구치나 히나타나, 스가와라 선배는? 기억해?” “기…… 기억나.” 아니, 사실 네가 누군지도 아는데 말이지. 츠키시마 케이. 1학년 4반. 카라스노 배구부의 미들 블로커에, 늘 자신에게 시비만 거는 기분 나쁜 녀석. 그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 잊혀진 것 정도로, 그렇게 충격 받는 표정을 짓는 거야? -카게야마는 바로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츠키시마라면, 적어도 카게야마 토비오가 기억하고 있는 츠키시마 케이라면, 카게야마가 자신을 잠시 잊어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건 장난이 좀 심했나. 지금이라도 사실 뻥이었다고 말하면, 핀잔만 듣고 끝낼 수 있으려나? 카게야마는 제 양심이 배구공으로 마구 얻어맞는 기분을 느끼며 츠키시마의 반응을 관찰했다. 한숨을 푹 쉬는 츠키시마는, 왜 나만,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왕님이랑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겠네?” “과, 관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새로운 키워드에, 눈을 크게 뜨는 것은 카게야마 쪽이 되었다. 관계랄 게 있나. 그냥 사사건건 말다툼이 잦은 팀메이트 1 정도인데. 그러나 츠키시마가 이후 한 말은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그를 기절하게 만든 바닥보다 세게 때리는 것이었다.
“난 왕님의 남자친구인데.” “……뭐어어어?” “진짜 충격이다……. 겨우 고백해서 사귀게 됐다 싶었더니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버리다니…….” “거, 거짓말…….” “거짓말 아냐. 참고로 고백한 건 내가 먼저, 받아준 건 왕님이고, 매일같이 방과 후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 참고로 첫키스는 부실 당번을 맡았을 때 했어. 부들부들 떨면서, 엄청 귀여웠는데-“ “무, 무슨 헛소릴 하고 있는 거야, 츠키시마 이 멍청이가!”
소리를 질렀을 때는, 아차 싶었다. 언제나 하듯이 츠키시마를 멍청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그 호칭을 ‘기억해’ 냈다는 것이 무척 감격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이거 뭐지? 무슨 상황이지? 날 놀리는 건가? 아니면, 저게…… 전부 진심인가? 카게야마는 순간 자신의 기억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머리를 부딪혀서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츠키시마와 나는 정말 사귀는 상황이고, 내가 잠시 그걸 잊어버린 거라고? 웃기지 마, 그런 일은 만의 하나라도 있을 수 없어! 저건 다 거짓말이야.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리얼리티가-
“그런데도 정말…… 내가 기억 안 나? ……토비오.”
그리고 츠키시마가, 이름을 부르며 카게야마의 손을 세게 쥐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손의 열기와 크기에 카게야마는 당황해,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완전히 얼이 빠져버린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손을 꼭 붙잡은 채 제게 몸을 기울여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 것을 보고서도 전혀 움직이지 못하다가, 바로 코앞까지 츠키시마의 얼굴이 다가왔을 때에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리고-
“……는, 거짓말.”
-이라는 말과 함께,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의 말까지 합쳐져, 쇼크가 두 배로 커지기에는 충분했다. 어? 뭐? 눈을 깜박이는 카게야마에게서 얼굴을 떼고, 츠키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그의 얼굴에 가득 담긴 비웃음에, 카게야마는 지금까지 자신이 츠키시마에게 놀림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딜 봐도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거기 잠시 어울려 준 것뿐인데, 왕님 반응 진짜 웃기다.” “츠, 츠키시마, 너 이 자식……!” “먼저 거짓말을 한 건 왕님 쪽이었으니까 쌤쌤이네. 오늘 성대하게 넘어진 거하고 방금 전 반응, 확실히 기억해 둘 테니까.” “웃기지 마! 너 같은 거 모른다고 했잖아!” “네- 네. 참고로 난 왕님이 나 기억 못 해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바닥이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두지 그래?” “너, 너……!” “왕님도 멀쩡한 것 같고,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 내일 보자고, 왕님.”
안녕- 그렇게 말하며 츠키시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을 흔들며 커튼 너머로 사라지는 그 큰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카게야마는 터질 듯한 얼굴을 붙들고 양호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츠키시마 이 자시이이이익!!!!!!!”
“……츠키시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스가와라의 목소리에, 양호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츠키시마는 고개를 들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스가와라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것을 보고, 츠키시마는 쳇,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아마 지금쯤 자신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져 있을 것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양호실 안은 왜 저렇게 소란스럽고?” “아니요…… 카게야마는 깼으니까 돌려보내지 그러세요.” “츠키시마, 또 카게야마 놀린 거야? 적당히 좀 해 둬라, 너희. 다이치가 보면 화낼 거야.” “……먼저 시작한 건 왕님 쪽이었어요.”
불만스레 말해 놓고, 츠키시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영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굴리는 스가와라를 뒤로하고, 츠키시마는 평소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양호실 앞을 벗어났다.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멀어져 가자, 잊고 있었던 가슴의 격통이 되살아났다.
「너 누구야?」
왕님이 잘못한 거야.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잖아. 만의 하나라도,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흘깃 양호실 쪽을 돌아보고, 츠키시마는 교사 밖으로 나섰다. 부실 앞에서는 아마 야마구치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부실에 도착할 때까지, 붉어진 얼굴도 벌렁벌렁 뛰는 심장의 고동도 어떻게 해서든 가라앉혀야만 한다. 평정심, 평정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츠키시마는, 키스하려 다가갔을 때 얼굴을 붉히며 눈을 감아버리던 카게야마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토비오.」
언젠가는 꼭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은, 츠키시마의 고동을 키우기만 할 뿐이었다.
인생 처음의 츠키카게 로그는 고작 1시간 만에 써제꼈다고 한다... 원고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쨌든 츠키카게 데이를 맞이해 쓴 첫 로그, 당당하게 업데이트 완료했습니다!
일단 츠키카게는 기본적으로 깐죽대는 츠키시마X그것에 과민반응하는 카게야마 구도지만, 아주 가끔 카게야마가 반격을 시도하려고 해도 츳키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도를 품고 있다는 게 좋아 죽겠음. 녹적 파느라고 많이 묻힌 사실이지만 나는 배틀호모를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게 피터지게 싸우는 게 아니라 딱 남자 고등학생의 구도로 놀리고 놀림받는 구도면 진짜 귀여워서, 어떤 상황으로 누구를 화나게 만들까! 하고 생각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된다... 특히 츠키시마와 카게야마는 상성이 극악이다 싶을 정도로 성격이 반대라서 더욱 쓰는 재미가 있음.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좀 약한 구도로 써봤지만 나중에는 진지하게 두 사람의 감정선을 파고드는 글도 써 보고 싶다.
그리고 이 로그의 뒷이야기를 써보자면... 아마도 츠키시마 쪽은 자기가 카게야마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도 남았을 것 같지만 카게야마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태. 아마 이 에피소드 뒤에는 서로 의식해서(더 정확히 말하면 카게야마가 츠키시마를 더 의식해서)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나중에 카게야마가 뒤통수 치지 않을까. 좋아합니다, 이 자식아아아아!!! 같은 느낌으로. 거기에 얼빠진 츳키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참 좋아지지만... 나는... 묘사를 정말 못 하잖아...? 그러니까 누가 좀 그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묘사 존잘님이 써주셔도 좋아요...
덧붙여서 하이큐 최애커플은 다이스가아사인데(다이스가 아사스가 빠지지 않고 좋아하므로 셋이서 사귐이 좋다) 첫 로그가 츠키카게라는 데 제법 놀랐지 말입니다. 스가네 얘기도 써보고 싶고 우시오이도 써보고 싶은데 왜 내 시간은 없는가... 앞으로 더 없어지겠지...
어쨌든 츠키카게 행쇼!! 니네는 좀ㅋㅋㅋㅋㅋㅋㅋ 사귀어 봐랔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어려울 것 같지만ㅋㅋㅋㅋㅋㅋㅋ
아카시 세이쥬로는, 특별하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전원이 동의할 만한 그 명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미도리마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특별함’을 그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를 아는 사람 중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올해 테이코 중학교에 입학한 수많은 재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던 아카시는, 입학시험 전 과목 만점의 기록을 세우며 신입생 대표 자리에 섰고 160cm도 되지 않는, 지극히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서도 중학 농구계의 최강이라 불리는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1군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뿐이었을까. 그의 타고난 리더십을 눈여겨보고 있던 감독은 그가 입부한 지 1주일 만에 그를 부주장으로 발탁했다. 주장이었던 니지무라 슈조는 새파란 1학년이 다른 2학년생들을 제치고 부주장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 지 단 사흘 만에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약간의 심술로 몰아준 일들-부원들의 연습량 체크와 일지 정리, 부 지원 보고서 작성 등-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하게 처리한데다 그 도중 연습도 전혀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감탄스럽다고까지 했다. 중학생이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잖아, 그건. 거의 회사원 수준이지. 그런 니지무라의 평가에 모든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재능 있어, 저 녀석. 아주 훌륭한 리더가 될 것 같군. 그것은 사회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내리고 있는 평가와 정확히 일치했다. 명문가의 후계자, 정재계의 거물인 아버지를 뛰어넘을 거성이 될 재목. 아카시 세이쥬로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적당한 말은 없었으리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리마는 니지무라와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아카시를 슬쩍 바라보았다. 확실히 미도리마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을 저 작은 몸으로 그 정도의 일을 소화해 내고 있다는 건 대단하기 그지없다.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다. 언젠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느냐고 경외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봤을 때 아카시는 웃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 대답을 들은 학생은 역시나 아카시답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미도리마는 그와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말하면,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서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 있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농구를 잘 하고 싶거든 연습을 하면 될 일이고,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면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면 되고, 건강을 챙기고 싶다면 골고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된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한 사람이 어떠한 성과를 내는 데에는 특정한 노력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라고 해서 그 당연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카시 세이쥬로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굳이 아카시를 깎아내리는 듯한 평가를 내리는 자신이 어찌보면 지극히 옹졸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도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늘 혼재하고 있었고, 때문에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피했다. 아카시를 마주하면 그의 천재성을 어떻게든 폄하하고 싶어진다. 그런 식으로 ‘치사해지는’ 제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방금 전 설명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가치관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카시를 이길 수 없어 분하다면, 그만한 노력을 하면 된다.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인간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친해질 수 없는 상대로군,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러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알지 못했다. 아카시의 모습에서 시선을 뗀 채 공을 던지며 한 그 생각이,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뒤집혀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계기가 된 것은, 언제나처럼 부활동을 끝내고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 체육관을 나오던 어느 날이었다. 어라, 비 오는 거 아니냐? 하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정말 어둑어둑한 하늘 위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강수확률은 10%! 라던 일기예보의 예고를 완전히 배신하는 빗줄기였다. 당연히 수많은 학생들이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을 터였고, 그 대부분이 머리를 손으로 가린 채 운동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학생들 틈에 섞이는 것 대신 교사 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그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언제나 우산을 교실에 두고 다녔다.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그의 철저한 좌우명이 빛이 나는 순간이었다. 텅 빈 교실 사물함에서 손잡이에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이름이 적힌 우산을 들고서 교사 밖으로 나오던 미도리마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자판기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먼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은 분명 아카시 세이쥬로의 것이었다.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밀크 티 캔을 꺼낸 아카시는 교사 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잠시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우산이 없는 건가. 왠지 허전해 보이는 아카시의 손과 그 뒷모습, 그리고 제가 들고 있는 우산을 번갈아 바라보던 미도리마는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들린 발소리에 빠르게 반응해 고개를 돌린 아카시는 여어, 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미도리마에게 미소를 보였다.
“안녕, 미도리마. 아직 남아 있었네.” “아아. 교실에 우산을 두고 왔던 게 생각이 나서. 너는?”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텅 빈 두 손을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애교 있는 동작이었다.
“미도리마는 전철로 통학하던가?” “응. 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만, 아무래도 비를 맞고 가는 건 싫어서 말이지.” “준비성이 좋구나.” “너는? 아카시 저택은 아마 여기서 상당히 멀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말에 아카시는 놀란 듯 눈을 뜨고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아? 라고 묻고 있다는 걸 깨닫고, 미도리마는 겸연쩍은 듯 턱을 살짝 긁었다.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아카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는 그 미도리마 선생님의 아들이었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아카시의 아버지 정도는 아니어도, 미도리마의 아버지 역시 의학계에서는 상당히 이름있는 인물이었다. 오랜 세월 병원을 운영하며 지역의 유지 정도의 이름을 갖고 있는 미도리마 가문의 일원이니, 아카시 역시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었다. 그런 것치고 집안 사이의 교류가 그리 깊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정작 미도리마가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입학식 다음날의 일이었다. 신입생 대표의 이름을 들려주었을 때 아버지가 아, 그 아이 말이구나, 하고 약간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역 앞에서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아예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라고 할까 싶네.” “왜 굳이 역 앞에서? 처음부터 학교 앞에 세워두면 편한 것 아닌가?” “그건 너무 눈에 띄잖아.”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던가. 의외다.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지금 미도리마의 앞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다’ 고 말하고 있는 이 소년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에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 ‘천재’ 말이지. 어쨌든 차가 데리러 온다면 사서 걱정을 한 셈이 된다. 미도리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단팥죽을 뽑았다. 그럼 내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역 앞까지 데려다 줄까?”
우산을 펴던 미도리마는, 막 작별인사를 건네려고 입을 열던 아카시의 말문을 완전히 막히게 했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그 제안에 무척 놀란 듯 보였지만, 사실 제일 놀라고 있는 것은 미도리마 자신이었다. 왜 굳이 아카시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가 있는가. 돌아갈 방법이 없어 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만 걸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다, 우산도 사물함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것이라 두 사람이 쓰기에는 부족할 텐데. 아카시에게도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제안이었다. 분명 웃으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고 내일 보자고 인사하겠지.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카시의 대답을 기다렸고,
“……정말?”
그렇게 반문한 아카시의 눈이 뜻밖에도 무척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치 손해만 볼 것이 뻔한 미도리마의 제안을 실제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눈을 보자 차마 자신이 그 제안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도로 어깨에 맨 아카시가 쪼르르 미도리마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럼 신세 좀 질게. 웃으면서 미도리마의 우산 안으로 들어온 아카시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제 왼쪽 어깨가 젖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기분이 저렇게 좋아 보이는 걸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발걸음에 맞춰 발을 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응? 그래 보여?” “그야…… 유난히 싱글벙글한 기색이고.” “그런가? 응, 그럴지도. 사실 난 이렇게 친구하고 우산을 쓰고 가 본 적이 없거든. 초등학생 땐 매일 학교 앞으로 차가 데리러 왔었고.”
친구라니.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서 서슴없이 나온 단어에 미도리마는 당황했다. 친구? 언제부터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친구였던가. 그들은 그저 농구부 동료에 지나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는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미도리마는 알지 못하며, 아마 아카시 쪽도 미도리마가 평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었다.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생각보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더 알기 어려운 존재 같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는 상대 앞에서 ‘우리가 친구였던가?’ 라고 직접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친구’ 라는 말에 아무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아카시는, 여전히 신이 난 기색으로 미도리마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미도리마는 언제나 단팥죽을 마시고 있네. 그거, 맛있어?” “응? 아…… 으응.” “이전까지 난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는 맛이 없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어.”
그야 그럴 것이다. 지금 아카시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뽑은 따뜻한 밀크 티는, 평소 아카시 세이쥬로가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싸구려일 테니까. 솔직히 말해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스포츠 음료 외의 음료수를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것을 지금까지 본 일이 없었다. 그저 옆에서 걸어가는 아카시와 그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밀크 티 캔을 보면서, 저런 것도 마실 수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건 아닌 듯, 아카시는 몇 번이고 캔을 입술에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 가끔 몸이 추운 듯 캔을 두 손으로 세게 쥐기도 했다. 흘깃 건너다 본 아카시의 왼쪽 어깨는 이제 완전히 비에 젖어 있었다. 가방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미도리마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아카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어? 아…… 응. 고마워.”
미도리마에게 이끌려 우산 안쪽으로 몸을 붙인 아카시가 입을 다물자, 순식간에 어색한 공기가 우산 안에 맴돌았다. 그것은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어깨를 끌어당긴 손을 계속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왼손의 테이핑이 물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그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손을 떼면 아카시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원위치로 올려둘 것 같았고, 비에 젖어가는 어깨를 방치한 채 추위에 떨며 밀크 티 캔을 몇 번이고 어루만질 것 같았다. 나 지금 추워, 라고 미도리마에게 시위하는 것처럼.
‘……아니, 착각이야.’
그래, 착각일 것이다. 대체 왜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그런 것을 시위하듯 보여주어야 한단 말인가.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한 덕분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를 감싸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봤다면 참 이상한 풍경이겠지, 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그다지 오래 맴돌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평소 집에 가면 뭘 해?” “일단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치면 숙제 같은 걸 끝내 놓지. 일찍 끝나면 책을 읽다가, 시간이 되면 잔다는 것이다.” “예상대로지만 정말 규칙적이네.” “규칙에 맞춰 생활하면 바이오리듬이 깨질 일은 없으니까.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피아노는 안 쳐?”
‘친구’ 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을 가져다 줄 만한 키워드였다. 피아노? 반문하며 아카시를 쳐다보자, 무언가 잔뜩 기대한 듯한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방금 전 들었던 뜻밖의 키워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날려버릴 법한 눈빛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눈동자. 미도리마 신타로가 기억하기에 아카시 세이쥬로가 누군가에게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쳤던 걸 네가 어떻게 알지?” “아……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나, 초등학생 때 네 연주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어. 대기실에도 갔었는데.” “뭐?”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순간 우산이 흔들려, 아카시와 미도리마의 가방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바람에 제 얼굴에까지 튀어버린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미도리마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발걸음은 길 한가운데 멈춰 서, 정말로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만큼 아카시의 발언이 뜻밖이라는 뜻도 되어, 미도리마는 눈을 깜박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미도리마의 반응에 아카시가 조금 쓸쓸한 듯 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 한때는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불릴 정도의 피아노 신동이었지. 우리 어머니가 네 팬이었어. 나도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네 연주를 듣고 완전히 반해버렸지 뭐야. 콩쿠르도 빠짐없이 보러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나서 포기해야 했지만.” “패, 팬이라니…….” “그래서 농구부에서 널 만났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피아노를 치지 않고 농구를? 이라고 말이지.”
전혀 기억이 없다. 미도리마는 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카시가 다시 발걸음을 앞서나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엉겁결에 쫓을 뿐이었다. 그런 미도리마의 충격을 외면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카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연주회는 아직도 눈에 선해. 첫 곡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었지. 아무리 연주 발표회라고 해도 그런 곡을 당장 첫 타자로 고르지는 않으니까, 참 놀랐어. 피아노는 나도 당연히 배웠지만, 그 어려운 곡이 그렇게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건 처음이었어. 그 다음 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난 그 곡의 오르골을 가지고 있는데, 역시 피아노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르더라. 세 번째 곡은 재즈를 연주했었지? 클래식 발표회라고 생각하고 갔다가 선곡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 그 뒤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연주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이야. 쇼팽의 환상 즉흥곡. 고작 4분 남짓의 연주였는데 푹 빠져버려서, 끝난 뒤에도 한참을 헤어나오질 못하고……,” “자, 잠깐, 잠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말들이 한꺼번에 아카시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와, 미도리마는 얼굴을 붉히며 아카시를 저지했다. 왜 말리는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아카시의 두 눈동자가 미도리마의 얼굴에 닿았을 때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을 붉힌 뒤였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이 제 손이 아니었더라면, 얼굴을 감싼 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정도의 부끄러움이었다. 저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는 걸로 보아, 아카시가 제 연주회를 보러 왔다는 것과 거기에 감명을 받았다는 건 아마도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야 얘기하는가. 보통 좋아하던 피아니스트를 중학교에서 만났다면, 당장 달려와 말을 꺼내는 게 맞지 않은가. 너, 그 때 이러저러한 곡을 연주했던 사람이지? 라고.
“……왜 내가 이제 이런 얘길 하는지 궁금해?” “아, 그래! 그거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왜 이제…….” “그야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는걸.”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의 얼굴이 순간 쓸쓸함으로 물든 것을, 미도리마는 눈치 챘다. 이 쓸쓸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미도리마가 대기실에까지 찾아왔다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카시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미도리마는 그날의 만남이 제 뇌리에 깊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카시가 말하는 그 연주회는 피아노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갖는 리사이틀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도 제 이름을 내걸고 열린 리사이틀에서는 그 누구라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당시 미도리마는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성인이라도 당연히 긴장할 만한 상황에서, 연주가 끝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날 대기실을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은 대부분 어머니가 상대를 했다. 아카시가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냐고 핀잔을 준다면 분명 할 말이 있었다. 좋아, 반박의 재료는 갖춰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각오를 다진 미도리마였지만, 아카시가 다음에 한 말은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그리고…… 난 미도리마가 왜 피아노를 그만뒀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제야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담긴 쓸쓸함이 미도리마 신타로를 향한 것이 아님을 눈치 챘다.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제 3의 이유를 가지고 이렇게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도리마의 집안은 유명한 의사 집안이잖아? 미도리마가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둔 거라면, 그 일을 입 밖에 꺼내는 건 미도리마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래서 손쉽게 말할 수가 없었어.” “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피아노는 오래 칠 생각이 아니었어. 의사가 되는 건 내가 선택한 일이고…….” “응.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건 고작 얼마 전이었어. 그래서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아아- 말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아카시는 가방을 한 번 더 고쳐 멨다.
“다행이야, 미도리마가 주변 압박으로 피아노를 포기한 게 아니어서.”
아, 그것인가. 미도리마는 그제야 아카시가 무엇을 걱정했고, 무엇에 쓸쓸해 했는지 알아차렸다. 아카시 세이쥬로.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 그는 태어나서부터 그 짐을 지고 살아왔다. 아카시 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아카시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운명이었고, 거기에 아카시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아카시 세이쥬로도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리더십이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면모를 보았을 때, 교사 같은 것도 어울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 제 2의 선택지를 허락해 줄 리 없었을 테니, 그는 분명 어떤 꿈을 포기한 채 중학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감명 깊게 연주를 들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친다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스포츠 중 하나인 농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무엇을 생각했을지는 지금의 미도리마라도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도리마는 어떠한 사실-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평생 알아차리지 못할 사실을 눈치 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동안, 미도리마 신타로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천재에 대한 불신을 품고 미도리마가 그의 지위를 폄하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칠 때도, 아카시는 늘 미도리마의 안색을 살피며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날을 기다려 왔던 것이겠지. 미도리마가 결코 눈치 채지 못할 범위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미도리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채, 몇 달 동안 계속. 그 사실을 깨닫자 미도리마는, 이전의 옹졸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함께 새롭게 피어난 어떤 감정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다. 매우……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그건 참 다행인걸.”
생긋 미소 지으며 아카시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역이 코 앞이었다. 그리고 역 앞에는 어딜 봐도 아카시 가문의 차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고급 롤스로이스가 한 대 서 있었다. 아차, 헤어질 시간이네.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라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말을 입에 올리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 쭉 하고 싶었던 얘기도 했고, 응. 만족스러워.” “나도…… 뜻밖의 칭찬을 들은 데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 환상 즉흥곡, 언제 한 번 다시 듣고 싶은데. 시간 내 줄 수 있어?” “얼마든지.” “후후, 기대할게. 그럼 난 여기서 이만. 뛰어가면 금방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교복 윗도리를 머리 위에 쓰고 우산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붙잡지 않았다. 그저 아카시가 횡단보도를 건너 차가 서 있는 건너편까지 뛰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이었다.
“아카시!”
길 건너에서 소리쳐 들려온 제 이름에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막 차에서 내린 운전 기사가 씌워준 우산 아래에서 미도리마를 쳐다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고 빛나 보였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이 던진 말에 대한 아카시의 반응에서, 주변 사람과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또 하나의 면모를 보았다.
“내일도 같이 집에 가자는 것이다!”
그 말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놀란 듯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얼굴 한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그 순간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테이코 중학교 설립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칭호도, 신장에 맞지 않는 능력을 자랑하는 농구부의 기대주라는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소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먼저 본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째서인지, 견딜 수 없이 기뻐지는 것이었다.
이 글을 다 쓴 지금 내 소감은게임 하고 싶ㄷ 테이코 녹적데이를 2년차 기념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것이다...
녹적데이가 보통 캐릭터 등번호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등번호가 조금씩 바뀌면서 기념일이 두 개 생겼는데, 테이코 편에서는 또 등번호가 달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년에 세 개의 로그를 써야 하는(사실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생일을 포함하면 다섯 개의 로그지만) 나로선 상당히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지만은, 뭔가 중학교 1학년의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본편에 비하지 못할 만한 풋풋함이 잠들어 있는 기분이라 쓰면서 늘 즐겁고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이랬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저렇게 피터지게 싸운단 말인가 하면서 정말 쿠로바스다운 앵스트 전개에 대한 희열을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하기도... 하하하 녹적 행쇼.
미도리마와 아카시가 어린 시절에도 만난 적이 있을 거라는 건 모든 녹적충들이 한 번쯤은 하고 넘어가는 망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이야기가 원작에서 전혀 밝혀지지 않은 만큼(애초에 그런 설정이 있는지도 미지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서 매우 즐거움.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는 보통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먼저 인식했고, 미도리마는 그 존재를 중학교 입학 전까지 거의 눈치 채지 못한 전개로 가는 건 원작에서 그만큼 미도리마←아카시에 대한 감정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보충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는 느낌이다... 괜찮아! 녹적충이니까! 어쨌든 두 사람 다 명문가의 자손이고 하니 어디에선가 접점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후지마키가 제발 좀 보충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에피소드 하나만 터져도 녹적 팬덤이 폭발할 텐데... 우우...
윈터컵 결승전이 끝났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자축연을 열며 기뻐한 지도 어느새 사흘이 지나, 세이린 고등학교 농구부는 언제나의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겨울방학 내내 진행되는 혹독한 연습은, 감독인 아이다 리코의 일침-“우리가 우승하기는 했지만, 내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법은 없어! 모두들, 이번 승리는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도록 해!”-과 함께 시작되었다. 덕분에 농구부의 사기는 다시 잡혔고, 그것은 부원들을 위해서는 당연히 최선의 선택이었다. 덧붙여서 이번 시합에서 후보로 머물렀던 1학년들은 이번에야말로 스타팅 멤버에 들어가겠다며 연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후리하타 코우키가 그랬다. 윈터컵 준결승과 결승이라는 큰 시합에 두 번이나 나갈 수 있었던 그는, 오히려 그 경험으로 자신의 실력이 아직 모자라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쿠로코 테츠야는 패스 연습에 매진하며 PG로서의 실력을 키워가는 그를 위해 후리하타와의 콤비 연습을 하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쿠로코 테츠야 본인을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후리하타 군, 아직도 패스 타깃 찾는 게 늦어! 다시 한 번!”
“히이익, 네에!”
리코에게 한 소리 듣고 절로 몸을 움츠리는 후리하타를 보고 싱긋 웃다가, 쿠로코는 문득 팀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세이린 고교 농구부는 평균 신장이 상당히 낮아진 상태였다. 우선 팀의 기둥이었던 키요시 텟페이가 무릎 치료를 위해 팀을 잠시 떠났고, 그보다도 더 듬직했던 에이스가 지금 연습에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제아무리 팀플레이에 서툰 후리하타라도 한 번쯤은 패스를 성공시킬 수 있었으리라.
카가미 타이가는 일주일 전부터 체육관 출입을 금지 당했다.
일단 가장 큰 원인은 부상이었다. 윈터컵 결승전에서 명실공히 고교 최강인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에 맞서 고군분투한 끝에 카가미는 체력 저하와 심각한 근육통에 시달렸다. 게다가 점프에 꼭 필요한 무릎 힘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리코는 ‘한동안 휴식을 취할 것’ 이라며 카가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만약 경고를 어기고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개인 연습을 한다면 사타구니를 걷어차 주겠다는 협박에는, 제아무리 카가미가 농구바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해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일주일의 휴식- 그랬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너라면 어떡할 거냐, 쿠로코?”
카가미에게서 그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카가미가 연습중지 명령을 받은 지 이틀쯤 지났을 때였다. 평소처럼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카가미의 전화를 받은 쿠로코는 그가 털어놓은 사정에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수화기 너머의 카가미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쿠로코는 거울에 비친 제 찌푸린 표정을 보고서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다.
“왜…… 그런 걸 제게 묻습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감출 수 있던 것은 표정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나와 버린 차가운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의 카가미를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었다. 아, 그게. 말을 멈춘 카가미가 제 반응에 놀랐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결코 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는 것도 빠르게 알아차린 쿠로코는 황급히 목소리를 바꾸었다.
“만약 저라면 평생 가도 그런 얘긴 못 들을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제게 상담이라니…… 약 올리는 건가요?”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어, 음…… 미안해.”
바보입니까, 너는. 대체 뭘 사과하고 있는 건가요. 쿠로코는 주먹을 쥐었지만, 그것은 카가미에 대한 분노 때문은 아니었다. 만약 카가미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었더라면 그를 대하기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뭐, 장난이지만요.”
“엥? ……야, 쿠로코! 너 진짜!”
“미안합니다. 카가미 군이 너무 진지하게 나오기에 그만.”
“너 진짜 성격 나쁘다…….”
“그래서, 그 건 말인데요. 카가미 군에게 주어진 기회니까 카가미 군이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쪽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보고, 무엇이 정말 카가미 군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좋은 결정 내리리라고 믿습니다. 그럼 전 이만 쉬어야 해서. 끊을게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전화를 황급히 끊어버린 이유를, 카가미는 아마 죽어라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머리를 감싸 안고 쿠로코가 왜 저러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 카가미에게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쿠로코 테츠야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생각으로 행동을 취하는지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행동을 정하는 쿠로코 본인이 제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카가미가 둔하다거나, 멍청하다거나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늘 덤덤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어려운 제 특유의 표정 속에 쿠로코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는 했다. 그것은 무슨 일에서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쿠로코 테츠야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만사에 진지한 미도리마 신타로나 모든 일에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만큼은 아니었어도 쿠로코는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마다 늘 공정하고 이성적이기를 바랐다. 그럴 때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그의 ‘빛’ 들이 그를 더욱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쿠로코 테츠야의 버릇은, 자신의 현재 파트너이자 연인이기도 한 카가미 타이가가 미국의 청소년 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이 사실 앞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너는 그 성격 때문에 언젠가는 손해를 볼 거야, 쿠로코.」
그를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걱정하는 기색은 감추지 않은 채 아카시 세이쥬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요, 아카시 군. 정말 맞는 말입니다. 쿠로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게로 날아온 공을 빠르게 후리하타 쪽으로 쳐냈다. 너무도 갑작스런 패스 중계에 볼을 떨어뜨리고 만 후리하타가 리코에게 크게 혼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연습하러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아오미네 군.”
그런 권유를 하며 나타난 쿠로코 테츠야를 보고, 아오미네 다이키는 정말로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금 전까지 제가 읽고 있던 잡지를 얼굴 위에 얹어놓았다.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좀 가라- 라는 의사임을 쿠로코가 모를 리 없었으나, 그는 완고히 아오미네의 얼굴에서 잡지를 치웠다. 사람이 말할 때는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그런 잔소리에 아오미네는 또 아무 말 없이 쿠로코에게서 잡지를 빼앗으려 들었다. 물론 누워 있는 아오미네에 비하면 아직 쿠로코의 반응이 더 빨랐다. 볼 컨트롤 요령을 살려 잡지를 왼손으로 옮긴 쿠로코는 그것을 바로 옥상 저편으로 던져버리려 했으나, 돌연 몸을 일으킨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손을 떠난 잡지를 빠르게 낚아챘다.
“아직 멀었구만. 너, 이게 볼이었으면 1점 뺏겼다.”
“그렇군요. 아오미네 군의 말이 맞습니다. 멋진 인터셉트였어요. 그러니까 이제 체육관으로 돌아가서, 공으로 한 번 더 해 보죠.”
“흥미 없어.”
“아오미네 군…….”
“내게서 공을 뺏지도 못하는 녀석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그건…… 제 임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오미네 군 같은 선수의 역할이죠.”
“비단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다들 약해 빠졌잖아. 해봐야 재미도 없어.”
“그런…… 바보 같은 소리도 적당히 하십시오. 키세 군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고, 1대 1에서 아직 아카시 군을 이겨보지도 못했잖아요. 안 그래도 아오미네 군을 데려오면 아카시 군이 3대 3 연습시합을 꾸려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봐야 그 녀석들 전부 어차피 같은 팀이잖아.”
알고 있었다. 아오미네 다이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는 진검승부 속에서 자신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진짜 라이벌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기겠다고 발버둥치는 키세 료타도, 절대적인 승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도 지금 상태로는 그의 무력함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쿠로코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1대 1, 3대 3 등은 아오미네의 무료를 일시적으로 달래줄 뿐 결코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쿠로코 테츠야는 그 일시적인 달램조차도 아오미네에게 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때의 쿠로코 테츠야에게는, 아오미네 다이키를 설득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소망뿐. 아오미네 다이키와 함께 농구를 하고 싶다고 하는, 쿠로코 테츠야 개인의 욕심뿐이었다.
그리고, 쿠로코는 그런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 이만 가겠어요. 하지만…… 농구가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같이, 농구하고 싶어요.
“계속 기다릴 테니, 꼭 와줘야 합니다.”
조금 더 같이, 아오미네 군과, 농구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못 자겠잖아.”
그러나 결국 쿠로코는 그런 본심을 아오미네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 다시 잡지를 얼굴에 덮는 아오미네를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옥상을 터덜터덜 나와 아무런 수확 없이 체육관으로 돌아온 쿠로코를 맞이하며, 아카시는 무슨 말을 해도 아오미네를 설득시킬 수 없다는 쿠로코의 침울한 말에 후우,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오지 그랬어. 아오미네와 같이 농구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그건 단순한 어리광입니다. 그런 걸 말할 수는 없어요.”
“때로는 그런 어리광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완벽히 설득할 필요가 있을까?”
“일시적인 방편으로 설득해 봐야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잖아요. 아카시 군도 그걸 아니까 아오미네 군을 설득하는 데 나서지 않는 거고요.”
“나와 네 입장은 완전히 달라, 쿠로코. 나는 주장이고, 코치가 아오미네를 연습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정했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어. 게다가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아오미네가 들어줄 리도 없고. 난 결과가 뻔한 일에 내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너는 나보다 아오미네를 잘 알고 있고, 아오미네가 마음을 여는 몇 안 되는 상대지. 어리광을 부려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런 걸로는 아오미네 군의 마음을 붙들어놓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도돌이표만 돌고 있다. 그 문답 끝에, 아카시는 자신의 논리가 쿠로코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후, 하고 다시 짧은 한숨을 쉰 아카시는 쿠로코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려 주면서, 덧붙였다.
“난 네 의지를 존중해. 그래서 네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아오미네를 데려와 보라는 명령은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는 그 성격 때문에 언젠가는 손해를 볼 거야, 쿠로코.”
그것은 경고였을까, 아니면 미래 예지의 일종이었을까.
실제로 쿠로코 테츠야의 본질은, 아오미네 다이키의 무기력함을 해결해 준 뒤에도 전혀 변하지 못했다.
* * *
“어? 카가미! 어쩐 일이야?”
후리하타의 외침에, 쿠로코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타월을 살짝 걷어 올렸다. 체육관 문으로 들어오는 카가미를 보았을 때 쿠로코는 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어질어질한 것은 결코 체력고갈 탓만은 아니리라. 금방이라도 그의 급소를 걷어찰 듯 살기등등한 리코-“내가 무릎 회복될 때까지는 체육관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아-? 그렇게 고자가 되고 싶어, 카가미 군?”-에게 멱살을 잡혀 끙끙대는 카가미-“아, 아니, 오늘은 연습하러 온 거 아니니까! 요! 이거 좀 놔! 줘요!”- 에게서 시선을 피한 쿠로코는 카가미의 시야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체육관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타월에 가려져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던 탓일까. 그는 구석에 쌓여 있던 수건더미를 건드려 무너뜨리는 바람에 카가미의 시선을 산 것은 물론이고 그 광경을 본 휴가에게도 한소리 듣고야 말았다. 끙.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 쿠로코는 제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드는 카가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카가미 군…… 어떻게 할지 정했을까?’
자숙기간인 카가미가 리코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체육관에 올 만한 이유라고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선 쿠로코는 굳어진 표정을 풀려 애쓰면서 카가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여어, 하고 인사를 건네는 카가미에게는 겨우 웃는 낯을 보여줄 수 있었다.
“저기, 쿠로코. 할 얘기가 있는데.”
“아직 연습 도중입니다만…….”
“딱 봐도 휴식시간이구만, 뭐. 감독, 괜찮죠?”
동의를 구하는 카가미에게 리코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럴 때는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감독님. 다소 원망스런 시선을 리코에게 던지고는, 쿠로코는 카가미의 뒤를 따라 체육관을 나섰다. 카가미가 지금 자신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 그런 건 정해져 있었다. 예상대로 체육관 뒤뜰로 돌아간 카가미는,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로 저번의 그 일 말인데, 라며 운을 띄웠다.
“어제 타츠야랑 같이 스카우터를 만났어. 순 머리 아픈 이야기뿐이었지만, 뭐, 안 듣는 것보다는 낫더라.”
“히무로 씨가 같이 가 줘서 다행이네요.”
“아, 그래요. 어차피 난 바보입니다. 어쨌든, 고등학교 2년 동안은 그 팀에서 뛰고, 나 하기에 따라서 대학 추천입학이나 실업팀 입단을 주선해 주겠다더라.”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다. 일본인이라도 카가미는 체격이 받쳐주는데다, 영어도 할 줄 알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보다는 다루기 편하다는 계산이겠지. 그래서-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쿠로코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을 견뎌내며,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자신을 애써 억제했다.
“주말에 다시 와서 계약 문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
“……그 자리에서 답한 게 아니었습니까?”
“어. 제대로 대답하기 전에, 아무래도 네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내, 의견. 쿠로코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 아무리 카가미가 바보라도 그 조건이 미국 내에서 아무런 실적도 없는 아시아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치고는 무척 파격적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터였다. 설령 그가 눈치 채지 못했다 해도, 히무로 타츠야가 동석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귀띔은 해 주었을 게 분명했다. 쿠로코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래도 카가미가 의견을 묻고 있으니, 답은 해주어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의견을.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이 제안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메리트에 대해서.
그래, 그것이 당연할 텐데도.
어째서인지 쿠로코는 묻고 있었다.
“제 의견이 왜 필요합니까.”
“그야 넌 지금 내 파트너고, 내 그림자고…… 또 우린 사귀고 있잖아. 네 의견만큼 중요한 게 어딨어?”
그래, 그럴 것 같았다. 상냥하고, 단순하고, 그만큼 솔직하고, 쿠로코를 무척 좋아하는 카가미 타이가라면 분명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할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의지해주는 것이 기뻤다. 자신을 향한 그의 애정을 확인하는 이 순간이 가슴 벅차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카가미 군. 정말 고마워요. 나를 필요로 해 줘서 고마워요.
“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사실은 네가 어디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독님 입장에서는 에이스가 순식간에 없어져버리는 거니까, 곤란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카가미 군의 미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를 신뢰하고, 따르면서,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카가미 군으로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걱정마세요. 누가 반대한다면, 제가 카가미 군의 편에서 변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마요. 나하고 계속, 쭉 같이, 내 옆에서 농구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건 역시 말할 수 없다. 쿠로코는 이번에도 본심을 숨긴 채, 카가미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말만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늘어놓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그림자로서, 파트너로서, 그리고 그의 연인으로서 가장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딱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자 카가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그 목소리에 담긴 서운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쿠로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카가미는 지금, 그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카가미가 아무리 바보라도 이 조건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를 모르지는 않을 게다, 그랬다. 그럼에도 굳이 쿠로코의 의견을 물으러 온 시점에서 답은 나와 있었다.
‘바보군요, 너는. 정말로.’
그러면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이 남아달라고 하면, 그는 정말 남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쿠로코 테츠야의 어리광이, 카가미 타이가의 빛나는 미래를 막아버린다. 그런 어리광 따위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로는 그런 어리광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왜 여기서, 아카시 군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거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못 하는 거예요.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판단을 내려야만 하니까.
「너는 그 성격 때문에 언젠가는 크게 손해를 볼 거야.」
닥쳐요, 아카시 군.
머릿속의 아카시의 목소리를 애써 밀어냈을 때, 카가미가 쿠로코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쿠로코. 그의 낮고, 가슴 설레게 만드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심장까지 내려갔다. 쿠로코, 날 봐. 내 눈을 보고 말해봐. 깊이 고개 숙인 쿠로코의 안색을 살피듯, 카가미의 눈동자가 쿠로코를 쫓았다. 그러지 마요, 카가미 군. 난 지금 네 얼굴을 볼 순 없어요. 만약 잘못했다간, 나는.
나는-
“……싫, 습니다.”
바보처럼, 참지 못하게 되어버릴 텐데.
“뭐가 카가미 군을 위하는 길인지, 너무 잘 아는데…… 그래도 싫습니다. 카가미 군이 떠나는 건 싫습니다.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내년에도 여기서, 내 옆에서, 내 빛으로, 농구를 계속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말해버렸다.
쿠로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심하다. 카가미를 위해서라도 격정에 얽매이는 건 참았어야 했는데. 한심하다. 카가미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 없다. 윽, 하고 눈물을 삼키는 소리를 내자 카가미가 쿠로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울지 마. 그는 그렇게 위로하며 웃겠지.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알았어, 안 갈게. 어디에도 안 갈 테니까. 그런 말을,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막아버린 상대에게 할 게 분명-
“아, 다행이다. 네가 그렇게 말 안 했으면 괜히 손해만 볼 뻔 했잖아.”
“……예?”
뭐라고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겸연쩍다는 듯 웃는 카가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웃음에서 쿠로코는 혹시나 하는, 하지만 너무도 카가미다운 답을 읽어내고야 말았다.
“설마 카가미 군…… 스카우트를 거절한 겁니까?”
“응. 어제 그 자리에서. 타츠야가 기겁하더라.”
“예?!”
“그치만 생각해 봐! 윈터컵에서 우승한 건 사실이지만 나 혼자만의 힘도 아니었고, 아직 아오미네한테는 1대 1로 붙으면 깨지기 일쑤고, 키세나 미도리마나 무라사키바라나 아카시나 내년 대회에 또 나온다고 하고, 그 녀석들하고 다시 농구하고 싶고! 어쨌든 이대로는 쪽팔려서 못 간다고.”
이…… 바보 멍청이가!
쿠로코는 할 말을 잃고, 카가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대 치더라도 죽지는 않을 텐데, 때리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남은 그 말을 듣고 죽어라고 고민했는데, 이 바보 천치는 남을 실컷 고민하게 만들어 놓고 답은 혼자서 내려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 기회를 송두리째 걷어차는 방향으로!
“다, 당장 다시 연락해요!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아니, 늦었어. 스카우터는 그 자리에서 귀국했거든.”
“너는 정말 바보입니까?!”
“그러니까 바보라고 했잖아! 방금 전엔 가지 말라면서 울어놓고는!”
“그, 그건…… 그러니까, 잠시 정신이 나간 겁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이 이야기는 이제 끝! 됐어!”
큰 소리로 선언한 카가미는 다시 쿠로코를 부둥켜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카가미는, 일주일 만에 보는 건데 잠시만 안고 있자느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느니, 내일부터 다시 연습에 나올 테니 무시하지 말라느니 하는 시덥지않은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 카가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가미의 품은 여전히 따뜻하고, 상냥한 기운으로 넘쳐흘러서,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행복하다’ 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때로는 그런 어리광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말을 한 아카시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이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이지, 상식으로 대할 수 없는 녀석이네, 너의 새로운 빛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어버릴 아카시를 떠올리자 쿠로코도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가미 군은 정말 바보네요…….”
“아, 왜. 보태준 거 있냐.”
“할 수 없지요. 제가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 허락 없인 어디에도 못 갈 줄 아세요.”
“……응. 그래.”
카가미의 품을 감싸 안으며 쿠로코는, 내심, 아카시 세이쥬로가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아카시 군. 나는 그와 있으면 이 성격 때문에, 평생 손해만 보고 살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보 멍청이니까요. 정말 바보인 사람 앞에서는 이성적인 생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고 아무 소용없는 거였네요.
하지만, 아카시 군. 그건-
정말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생각이 너무 많은 쿠로코와 생각이 너무 없는 카가미의 조합이라 화흑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뻘한 생각을 해본다.
사실 녹적의 조합처럼, 둘 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리 얽히고 섥히는 관계도 좋아하지만 화흑처럼 단순한 해결책이 있는데 빙 돌아가는 관계도 취향이라고나 할까 녹적은 화흑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나 할까... 는 왜 화흑 로그 후기에 녹적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원점으로 돌아가자.
카가미의 단순함에 대해서는, 동급의 바보로 일컬어지는 아오미네나 키세하고는 차이를 좀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오미네는 그렇게 보여도 의외로 복잡한 성격이라서 단순하게 제 좋은 일만 하지는 못하는 타입, 좀 더 나가자면 머리도 안 좋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많은 걸 놓쳐버리는 타입의 바보랄까. 아오미네가 이런 타입으로 성장하는 데는 모모이가 옆에서 누나 노릇 하면서 이것저것 가르친 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 아오미네를 위해서는 이 루트 안 타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 자기가 하고픈 대로 하면 될 애가 이것저것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중학교 때 그 사단이 난 거. 또 키세는 머리 굴리는 건 정말 잘 하는데, 본인이 바보라는 사실을 자각을 못 해서 망하는 타입.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엄청 고민하고 생각하는 편. 오히려 쿠로코하고 가까운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죽어라고 고민하고, 그에 맞는 자신을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 얘도 그냥 본능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날뛰었으면 더 괜찮은 애가 됐을 수도 있다. 카사마츠가 그 개고생하면서 애를 잡으려고 안 했어도 됐을 거야... 문제는 얘 본능이 오직 아오미넷치 핥는 데만 적용된다는 거지만. 키세의 그런 성격엔 분명 모델 생활이 영향을 미쳤을 거다.
그에 비하면 카가미는 순도 백프로의 바보. 단순하고, 솔직하고, 생각해서 행동해야지 하고 생각은 하는데 그걸 절대 실전으론 못 옮길 타입. 그래서 쿠로코와의 상성이 가장 좋은 것도 카가미 쪽. 왜냐면 내 쿠로코는 상당히... 해석하면 할수록, 얘는 땅을 파고 내려가면 진짜 끝까지 가겠구나 싶은 애라서... 성적은 나빠도 쿠로코는 절대 바보가 아니고, 오히려 바보가 아닌 만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단체로 망하는 느낌이 있다는 걸 고려하면... 응... 힘내라 싶기도 하고... 본인은 냉정하고 쿨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엄청 노력하는데 속은 사실 열혈소년이라서 고생하는 게 딱 쿠로코 타입. 아오미네한테도 직접 감정을 부딪혀서 주먹으로 해결했으면 어떻게든 됐을지 모르지만 아오미네 배려하랴, 제 멘탈 추스리랴, 주변 사람들(특히 아카시) 눈치 보랴 눈코뜰 새 없이 바빠서 결국 고등학교 때 가서야 아오미네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쿠로코는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 하는 타입이라서, 대놓고 싸우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게 아카시 상대로는 잘 안 되었던 것도 있는데...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녹적 로그에 쿠로코가 비중있게 나오면 다시 하기로 하자.
덧붙여서 화흑을 본격적으로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얘네는 뭘 연성하던 간에 언젠가는 나왔던 패턴이라서 애매하다. 내 식으로 소화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아직도 2프로 부족한 느낌이야... 청황은 똑같은 패턴이라도 키세 캐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어서 오히려 쓰기 편한데. 이것이 메이저의 폐해인가... 아니면 내 카가미-쿠로코 해석이 아직 부족한 건가... 음... 정진하겠습니다.
타카오 카즈나리의 지적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제야, 제가 공을 든 채 골대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겸연쩍게 손을 내렸다. 신- 쨩? 불안한 듯, 그러면서도 그 낌새를 미도리마에게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목소리로 타카오가 미도리마의 눈앞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신 들어? 이거 몇 개게? 그런 타카오의 ‘배려’ 에도 미도리마는 쓴웃음을 짓거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등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듯, 혹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가장하여 비키라는 것이다, 라고 냉정하게 말해주는 편이 미도리마 신타로답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답지 않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면 타카오는 백이면 백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터였고, 신임 주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미도리마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미야지 유우야는 분명 감독에게 보고부터 해야겠다며 그 호들갑에 편승할 게 분명했다. 미도리마는 자신이 원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도, 남에게 ‘걱정’ 이라는 이름의 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 문제다. 혹은, 심적인 문제. 자신 개인의 문제가 부 전체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분란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타카오는 ‘쳇, 걱정해서 손해 봤네’ 라며 입술을 대자로 내밀고는 저 멀리 가버렸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도리마는 다시 포즈를 잡고, 골대를 향해 슛을 쏘았다. 부드럽게 링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은 그의 컨트롤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발치로 굴러온 공을 주워들며 미도리마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꿈인가?
아니면, 환상?
타카오가 걱정하며 말을 걸기 직전까지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의 의식이 체육관이 아닌, 수수께끼의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곳은 빛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어두캄캄한 공간이었다. 그러다 그 어둠을 가르고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어디선가 불씨가 피어오른다. 희미한 불빛으로 시작해 점차 밝아지는 그 공간이 길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촛불 불빛이 어지럽게 섞인 공간 속에 빛이 날 리 없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빛을 발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회색 셔츠 목깃에 새하얀 냅킨을 정성스레 꽂은 채 정갈한 동작으로 은식기를 움직이는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아카시 세이쥬로.
‘방금 먹고 있었던 것은…… 샐러드, 겠지.’
미도리마의 아에 앉은 아카시 세이쥬로는 진갈색 테두리가 선명한 상아색 접시 위에 청명한 색의 야채를 가득 쌓아 놓고서 포크로 그것을 찍어 한 입 한 입 넣고 있었다. 적막이 깔린 공간 안에는 아카시가 포크로 야채를 찍는 소리나 간혹 접시를 긁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 입 야채를 넣고 꼭꼭 씹어 삼키면, 또 한 입 야채를 먹는다. 양손잡이인 아카시는 왼손으로도 포크를 능숙하게 다룬다. 아무 말 없이 야채를 입에 넣어 씹고, 삼키고, 다시 포크를 움직이는 동작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미도리마가 타카오의 목소리로 그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 아카시는 접시에, 포크에, 야채에,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럼에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한 주홍빛의 프렌치 드레싱이 한가득 묻은 브로콜리를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 탓에, 아카시가 그것을 어떻게 입에 넣고 무슨 표정을 지으며 씹어 삼켰는지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 그지없을 정도다.
‘……아니, 아쉽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 광경인데, 다음 장면을 궁금해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어.’
미도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워든 공을 들고 다시 슛을 쏘는 자리에 섰다. 골대를 마주하고 있는 힘껏 점프해 던진 슛은, 평소보다 1cm 정도 크게 빗나가 아슬아슬하게 링을 통과했다.
* * *
아카시 세이쥬로의 식사 장면을 꿈에서 보게 된 것은 닷새 전의 일이었다. 아니, 윈터컵 결승전이 끝난 지 3주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까. 고교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적의 시합을 두 눈에 새겨넣었던 당시의 충격도 어느새 다소 흐릿해지고, 오오츠보와 미야지, 키무라를 필두로 한 슈토쿠 고교 농구부 3학년들의 은퇴식과 세대교체 연습경기까지 모두 끝나 겨울방학도 이미 끝난 뒤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 목욕을 하고, 다음날 있을 수업을 대비해 그 날분의 공부까지 모두 끝낸 미도리마는 메일이 들어왔다는, 핸드폰의 안내등을 무시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해 빠져든 꿈의 세계에서 미도리마는 식사하는 아카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배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어둠 속에 놓인 기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과 끝단에 자신과 아카시가 앉아 있었다. 셔츠 목깃에 냅킨을 꽂고서 식기를 집어 든 아카시는 상아색 그릇 위에 놓인, 붉은 빛 감도는 거위 간을 알맞게 썰어 한 입 물었다. 매우 부드러운 음식인 듯 입에 넣고 씹어 삼키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촛불 너머로 오물오물 움직이는 아카시의 작고 붉은 입술을 본 순간의 충격- 그것의 정체를 미도리마는,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침에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 본 건 대체 무엇이었지. 나는 무엇을 보고, 그것에 무엇을 느낀 거지? 그리고 그 의문은, 안경을 쓴 미도리마가 반사적으로 확인해 본 핸드폰 화면 속 짧은 메시지에 순식간에 지워졌다.
[오는 1월 31일, 테츠 군의 생일에 모두 테이코 중학교 근처에서 만나지 않을래? 오랜만에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모모이 사츠키]
그것이 시작이었다.
미도리마는 그 다음 날도 아카시의 꿈을 꾸었다. 두 번째 꿈에서 아카시의 앞에는 수프가 나와 있었다. 아카시는 첫 번째 꿈에서 전채 요리가 놓여 있던 접시와 같은 디자인의 볼에, 진한 크림색의 수프를 가득 담아두고는 한 숟갈씩 떠먹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면 그것이 어떤 수프인지 더 알기 쉬웠을 테지만, 식탁 앞에서 예의 없는 행동임을 감안하면서도 코를 킁킁대 보았을 때 미도리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공간은 시각과 청각 외의 감각은 모조리 차단된 모양이었다. 당황을 금치 못하는 미도리마의 맞은편에서 아카시는 크림색 수프를 한 숟갈 떠서는 한참 동안 후후 불어가며 식히다가 겨우 한 입씩 삼키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카시의 그런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아카시는 마치 자신이 먹고 있는 모든 음식이-아카시의 주변 환경을 생각해 봤을 때 무척 고급 요리일 것이 분명함에도-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맛을 가진 요리라도 되는 듯, 감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상을 쓴 것도 미간을 찌푸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묵묵한 표정과 함께 진행되는 아카시의 ‘식사’는 식사가 아니라 마치 고행과도 같아 보였다.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눈을 뜬 그날,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 미도리마는 키세 료타로부터의 메일을 받았다.
[미도리맛치, 31일 동창회 올 검까? 난 좀 늦을 거 같아서 큰일이에요- 쿠로콧치 생일 축하해줘야 하는데! 아, 선물은 뭐 살까요? 나는…….]
거기까지만 읽고, 지워버렸다.
설마 그런 꿈이 사흘이나 계속되겠냐는 뻔한 생각과, 아직 메인 요리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한참은 더 계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반반씩 겹쳐 맞이한 사흘째 밤, 아카시는 생각대로 생선 요리를 앞에 두고 앉았다. 메뉴는 해산물로 만든 찜처럼 보였다. 그날의 아카시는 이전까지의 식사보다 더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으로, 접시에 놓인 찜 요리의 이곳저곳을 티 나지 않게 뒤적여 가며 새우나 오징어만을 골라 먹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앉아 있는 곳은 테이블의 끝단이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카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위치였으나,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무엇을 골라내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맛을 더하기 위해 들어간 해조류를 골라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문득 그의 그런 식습관을 보고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했었던 잔소리 가떠올라,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입 밖에 올렸다.
—편식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아카시가 식기를 움직이는 아주 미세한 소음이 들릴 정도니 아카시라고 미도리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여전히 아무 미동 없이 심드렁하게 해산물을 골라 입에 넣을 뿐, 미도리마의 잔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카시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확인한 채 잠에서 깨어난 미도리마는 자신이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때 아카시가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잠시 후 떠오른 답은,
「괜찮아. 난 미도리마의 앞에서만 이러는 거니까.」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네 번째 꿈을 꿨을 때, 미도리마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 기묘한 꿈은 아카시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모양이었다. 풀코스로 치면 오늘은 메인 요리로군. 그 생각대로, 그날 밤 꿈속의 아카시는 스테이크를 씹고 있었다. 용케도 저 많은 요리가 다 위장으로 들어가는군. 저도 모르게 감탄한 것은, 쿠로코 테츠야만큼은 아니었어도 아카시 역시 상당한 소식가라는 사실을 미도리마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인 요리쯤 되니 역시 위에 부담이 간 것인지 아카시의 식사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냄새는 맡지 못해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스테이크에서 떨어지는 육즙은 충분히 식욕을 자극하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표정 하나하나, 입술과 이빨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정신이 팔려 배고픔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다. 아니, 설령 배가 고팠다 하더라도 아카시의 얼굴을 보면 식욕이 생기다가도 사라질 판이었다. 그만큼 아카시는 이 ‘식사’ 시간이 지겨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왜, 저런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떠오른 의문에 미도리마는 의자를 좀 더 바싹 끌어다 앉았다. 어젯밤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오늘은 좀 더 큰 목소리로, 좀 더 분명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거다.
—아카시.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고깃점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카시의 손이 순간 멈칫한 것 같았다. 아니, 비록 그랬다 해도 그것은 미도리마의 눈으로는 차마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한 동요였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그 짧은 ‘동요’의 순간을 확신한 이유는 단 하나, 아카시가 목에 두른 냅킨에 육즙 섞인 스테이크 소스의 자국이 작은 원을 그리며 남았기 때문이었다. 제 냅킨에 소스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카시는 잠시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미도리마가 보는 앞에서 옆으로 내던졌다. 마치 그 순간만 슬로우 모션을 건 듯, 냅킨은 아주 천천히 펄럭이며 식탁 옆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아아, 저 냅킨은, 마치.
나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미도리마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안경을 쓰고, 미도리마는 버려진 아카시의 냅킨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모모이 사츠키로부터 두 번째의 메일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좋은 아침, 미도링! 저기, 저번에 말했던 동창회 말야, 못 오는 거야? 그럼 그렇다고 답장 줘. 지금 미도링 외에는 모두 대답해줬단 말야. 기다릴게!]
그 메일을 보고 미도리마는, 나 외에 전부 대답했다면, 아카시도 말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 * *
그리고 닷새째가 되는 오늘, 정확히는 어젯밤, 미도리마는 일부러 잠을 자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활 리듬을 망치는 행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모모이에게서 온 메일엔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사려 깊은 모모이니만큼 분명 미도리마의 사정을 생각해서 기다려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문제의 동창회는 바로 내일이다. 언제까지고 메일에 답을 하지 않으면 분명 전화가 걸려 올 것이었다. 적어도 그 ‘동창회’에 갈지 말지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아카시의 꿈을 꾸는 것도, 그 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런데 설마 연습 중에 졸아버릴 줄이야…….’
어쨌든 오늘 꾼 꿈을 보아하니, 아카시의 식사는 거의 끝이 난 모양이다. 남은 것은 디저트와 와인 정도겠지만, 미성년인 아카시가 와인을 마실 리 없다. 식사는 아마 오늘 밤 꿀 ‘디저트’ 로 끝이겠지. 내일이 바로 쿠로코 테츠야의 생일이자, 그 ‘동창회’ 당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유 있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가방 안의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휴식 시간에 살짝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모모이가 정한 동창회 시각은 내일 아침 11시다. 미도리마를 제외한 전원이 온다고도 했다.
그래. 아카시 세이쥬로도 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시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면 미도리마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동창회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참석할 아카시를 보는 것도, 그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 꿈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망설이게 만드는 것일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꿈이 날 이렇게 만든 건가?
대체 왜?
그저 아카시가 식사를 하고 있는 걸 내가 보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 꿈은 내게 무얼 전하려고 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미도리마는,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제 안의 어떤 감정이 아카시 세이쥬로와의 재회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꿈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고 아카시를 만나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 그건 안 될 말이라는 것이다.’
결국 꿈을 마주하는 수밖에 답이 없는 것일까.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모모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마 못 갈 것 같다.]
* * *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디저트 접시를 앞에 두고 앉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맞은편에서, 미도리마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아카시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늘로 이 식사가 끝난다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알아내 주마. 그런 각오로 미도리마가 노려보고 있는 디저트 접시에는 몽블랑이 올라와 있었다. 아카시는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티스푼을 집어들고,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크림을 살짝 떠서 입에 넣었다. 티스푼을 문 입술은 어쩐지 처음 이 꿈을 꾼 날보다 훨씬 붉게 보였다. 연한 갈색의 크림과 부드러운 케이크를 한번에 뜬 아카시가 그것을 입에 넣는 순간, 또다시 슬로우 모션이 걸렸다. 새빨간 혀가 수저를 휘감듯이 입 안으로 끌어들여, 티스푼의 오목한 선을 따라 입술이 훑고 지나간다. 크림을 빨아먹듯 입안에 넣은 케이크를 음미하고, 삼키고, 입술에 살짝 묻은 크림의 잔해를 혀가 살짝 핥고 지나갔다. 그 광경에 미도리마는 퍼뜩, 처음으로 이 꿈을 꾸었을 때 아카시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고- 그리고, 이번에는 그 정체마저도 확실히 깨달았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수프 냄새를 맡으려 할 때는 전혀 기동하지 않았던 후각이, 왠지 지금은 민감하기 짝이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몽블랑에서 나는 단내. 그것을 입안 가득 문 아카시 세이쥬로의 입술에서 풍기는 단내.
아, 그것이다.
나는.
미도리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넘어지는 소리에도 아카시는 미동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그대로 아카시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아카시. 불러보았지만 아카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지금 나는 이렇게 생생하게 네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아카시의 턱을 붙들고, 제 쪽으로 거칠게 돌렸다. 놀란 듯 미도리마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미도리마의 눈을, 코를, 입술을, 천천히 그 안에 담았다. 그래, 아카시. 너는- 나를 이 자리에 앉혀놓고,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내가 찾아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턱을 추켜올렸다. 드러난 붉은 입술에는 몽블랑의 크림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을 떴을 때 미도리마는 핸드폰의 불빛을 통해 메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모이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어제 ‘가지 못하겠다’고 한 미도리마의 메일에 아쉬움 가득한 답장을 보내왔었다. 타카오일 리도 없다. 오늘은 주말이라 학교도 쉬고, 농구부 연습도 없는 날이다. 그럼, 발신자는 누구일까. 꿈 탓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미도리마에게는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열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아카시 세이쥬로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기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과 끝단에 자신과 그가 마주앉아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 채, 그를 제 손으로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든 어리석은 친애의 대상. 그는 자신이 따라 준 붉은 빛 액체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자, 식사는 끝났어.
아카시는 턱을 괴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식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의 기다림의 시간도 이걸로 끝이다. 그 결말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카시 세이쥬로가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끝이다. 모두 끝인 것이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가 결론을 내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할 이 순간.
—있지, 미도리마. 그건 내 피야.
그래, 그건 내 피이자, 너를 원하고 원했던 내 감정의 찌꺼기야. 아카시 세이쥬로는 웃었다.
자, 너는 그것을.
—어때? 마실 수 있겠어?
아카시 세이쥬로는 눈앞의 상대를 조롱하듯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아직 망설이고 있을 테니까. 자신을- 아카시 세이쥬로를 뛰어넘겠다고, 그에게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고, 그렇게 선언했던 자신의 약속에 묶여,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겁쟁이이다.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투쟁심인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의지인지도 모르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미도리마 신타로.
그러나 그는 아카시의 예상과는 달리, 잔을 집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붉은 액체를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놀라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된 아카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웃었다.
“날 얕보지 말라는 것이다, 아카시.”
아, 그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 살점 한 덩이, 피 한 방울, 또 하나의 인격까지, 모두-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100번 달성표의 스타트는 역시 최애커플이 끊어줘야 제맛! ㅇㅅ< 물론 녹적은 스타트 안 끊어도 이 달성표의 반 이상을 채울 게 뻔하긴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책으로 내볼까- 싶어서 예전부터 구상해두고 있었던 건데 아무리 봐도 책 내용으로 하긴 짧고(복붙해 봤더니 A5 8~10장 분량 나옴) 그렇다고 살 더 붙이기도 애매한 이야기고 만화 스토리로 구상하자니 그려주실 분이 없어서(mm) 짧게나마 써서 1번 타자를 끊어보았다. 손으로 썼더니 공책 4페이지 분량이 나왔는데(물론 글씨가 작고 엉망진창인 것도 고려해야 함) 간만에 하는 손연성이라 애매했다고 한다...
전개나 상징 같은 걸 넣어도 다분히 설명해 주는 내 글치고는 상당히 불친절... 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는데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유. 일단 여기는 후기니까 밝혀두자면 아카시 세이쥬로의 저 고행과도 같은 식사는, 자신을 쓰러뜨리겠다고 선언한 미도리마가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기까지 기다리는 과정이었기에 아무리 맛있는 요리('투쟁심'으로 대표되는 미도리마의 진심)가 나와도 하나도 즐겁지 않고,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어서 그저 기계적으로 흡수할 뿐이었던 4년간의 아카시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미도리마가 짝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니에요! 사실은 아카시가 하고 있었거든요! 녹적은 왠지 그런 구도가 좋다. 이전까지 사랑이라는 감정, 연애감정이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고 자랐던 아카시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달리고 마는... 네 취향타는 구도죠 압니다. 덧붙여서 미도리마는 되게 늦게 아카시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지만, 한 번 깨닫게 되면 인사를 다해서 거기 매달릴 성격이기 때문에 녹적은 결국 쌍방향 의존의 완전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
덧붙여서 윈터컵 결승전이 끝나고 쿠로코 생일에 키세키즈가 다같이 모이기까지의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이야기는 존재증명이라는 장편으로 따로 쓸 생각이긴 한데, 이 이야기도 그 시기가 배경이라 조금 애매한 감이 없지않아 있기는 함. 물론 존재증명은 애초에 이거랑 주제가 다르지만. 어쨌든 녹적은 윈터컵 끝나고 고교 2학년 때부터 원거리연애 시작해서 해피엔딩 맞이해라~~ 마지막에는 결혼해라~~ 두번해라 세번해라~~~
파는 장르가 갑자기 늘어난 까닭에 커플링관을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 대충이나마 써보기로 함.
솔직히 내가! 내 스스로가! 혼파망을! 짙게 느끼고 있다고! 이건! 정리를! 해야해! (좌절)
물론 개인적인 커플링관이니만큼 그저 동인설정에 지나지 않으니 다른 분들은 심심풀이로 읽으심이 좋다. 음슴체 주의.
쿠로코의 농구: 녹적, 화흑, 청황, 홍실+실우, 홍재, 궁고, 목꽃, 빙자 등등
-녹적
부동의 No.1 최애커플. 어쩌다가 이렇게 빠져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무진장 좋아함.
일단 기본적으로는 원작 중심으로 아카시에 대한 투쟁심 속에 아카시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미도리마와,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절대로 꺾이지 않을 미도리마를 좋아하는 아카시의 관계. 그러다 보니 녹→←적의 양방향 짝사랑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음. 중학교 시절 연인 뺨치게 붙어먹는 두 사람도 좋아하는데 이럴 경우 거의 서브커플.
전체적인 애정도는 미도리마가 더 높지만, 순수한 연애감정으로 두고 봤을 때는 아카시가 더 순수한 편. 미도리마의 애정은 아카시에 대한 호의와 우정+집안 사정을 아는 데 대한 연민+투쟁심으로 구성된 것이라 생각하는 만큼 순수한 정도는 아카시보다 낮을 수밖에 없음. 반면 아카시는 사람을 그런 의미로 좋아해 본 건 아마 미도리마가 처음일 것이고 마지막일 것임. 애초에 아카시라는 캐릭터가 남에게 호의를 갖는 법을 잘 모르고 자랐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어머니가 거의 유일했던 만큼, 미도리마에게 우정 이상의 애정을 품게 된다면 무척이나 순수해질 수밖에 없음. 반면 미도리마는 자식을 믿어주고 아껴주는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고 본인이 무척이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만큼 거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므로, 순수하게 아카시만 좋아한다는 건 불가능함. 만약 이 두 사람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된다고 치면 아카시는 집과 모든 인연을 끊겠지만 미도리마는 가족과 어떻게든 연락하고 지낼 거임. 뭐 그 정도의 차이랄까. 사실 애정도 차이가 아니라 어떤 느낌의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임. 내안의 녹적 애정도는 정말로 비등비등함.
어릴 적 한 번 이상 만나거나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전제하의 관계를 좋아함. 아카시의 집안 사정과 아카시가 보쿠카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고, 이에 어떠한 감정(연민과 공감, 혹은 부정과 경멸 등)을 품고 있는 건 미도리마 한 사람뿐이라고 확신하는 중.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였던 중1→본격적으로 친해져서 어울려 다닌 중2→행복의 절정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중3을 거쳐 보쿠카시가 득세했던 고등학교 1년 동안 앵슷앵슷하고 거리감 쩌는 관계를 유지하다가, 원작 완결 시점인 지금은 조심스레 서로에게 다시 접근 중이라는 뇌내 동인설정 보유. 미도리마가 워낙 포기를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몇 번을 지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덤벼 오기 때문에, 연인이든 친구이든 라이벌이든 제 안에서는 친해지기만 하면 완전체가 됨. 버틸 수가 없다…!
둘이 잘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녹적은 훈훈함이 다른 커플을 압도할 수준이지만 사실 앵스트로 만들 수 있다면 또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커플임. 무엇보다도 아카시가 한 번이라도 졌을 때 어떻게 될지(아버지의 승리주의 원칙이라던가, 집안 사정이라던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카시를 이기려고 했다는 점 때문에 고1 녹적의 앵스트함이 배가 됨. 왜냐면 이 점은 세이린과 라쿠잔의 결승전에 당위성이 없다고 사람들이 두고두고 후지마키를 까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쿠로코가 대체 아카시의 무엇을 알기에 얘를 이기겠다고 나서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견? 그걸 뒤집어 보면 모든 걸 알면서도 아카시를 이기려 드는 미도리마는 존나 이기적인 놈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길게 풀자면 복잡하니까 요약해 보면 미도리마는 이기적인 놈 맞음. 겁나 이기적임. 그러나 그 이기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아카시가 구원받길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으니까 이 관계가 모에롭다고 생각함. (덧붙여서, 아카시의 사정도 모르면서 아카시를 이기겠다고 나서는 쿠로코로 흑적의 관계 역시 존나 꼴림 요소가 있다고 생각함. 타커플 배척발언으로 들릴까봐 말해두는 건데 흑적... 좋아합니다...)
게다가 미도리마가 자신이 패배를 가르쳐 줌으로서 아카시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 하고 있었다면 더 좋음. 왜냐면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구원의 왕자로는 보고 있지 않아서. 아버지에 대한 일이나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 등, 아카시의 앞을 가로막은 난관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걸 뛰어넘는 건 오직 자신의 힘이어야 한다고 생각함. 미도리마의 역할은 그 벽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하는 아카시가 힘에 부쳐 잠시 쉬고 있을 때 다가와서 응원해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역할, 더 나아가 그 벽을 뛰어넘었을 때 웃으면서 맞이해 주는 역할 정도랄까.
메인 커플로 팔 때는 티가 안 나지만 다른 커플(화흑/청황 등)이 메인이고 서브커플로 등장할 때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으로 활약함. 유님 글에 녹적이 나오는 건 인간이 숨을 쉬는 거랑 거의 비슷한 레벨이라면서요? 일단 다른 커플링 메인으로 나오는 책의 대부분(거의 99%의 확률을 자랑함)은 녹적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전제거나 양방향 짝사랑을 죽어라고 하고 있거나 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음.
-화흑, 청황
왜 둘을 엮었냐면 아오미네-쿠로코-키세의 관계 때문에. 정확히는 아오미네와 쿠로코의 관계.
기본적으로 화흑이든 청황이든 테이코 시절에 아오미네가 좋아했던 건 쿠로코, 쿠로코가 좋아했던 건 아오미네라는 구도를 띠고 있음. 즉 테이코 청흑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관계가 고교 화흑과 고교 청황. 그렇다 유님은 테이코 청황을 제대로 못 보는 것이어따. 고교 시점에 와서 쿠로코는 카가미와 서로서로 메가데레 상태, 아오미네는 가끔 테츠를 보면 씁쓸해하는 편, 키세는 몇 년째 아오미네 짝사랑 중. 생각해보면 얘가 미도리마만큼이나 질기다
카가미랑 쿠로코는 주변에서 보면 쟤네 왜 안 사귀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잉꼬부부. 감히 부부라고 표현해 보겠습니다. 부부가 맞는 거 같으니까. 사실은 메인으로 쓰기보단 청황의 서브커플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티가 잘 안 나지만 정말 좋아함. 카가미도 쿠로코를 무척 좋아하고 쿠로코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얘네는 서로를 좋아한다고 한 번 자각하면 어떤 고난도 문제도 없이 순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백화 기미가 있음. 그러니까 사실은 얘네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하는데 왜 녹적이 그걸 차지하고 있는지는 진짜 미지수인 것이다 화흑으로 굳이 앵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오미네를 억지로 끼워넣지 않으면 안 될 지경임. 아니면 히무로와 카가미의 관계를 끌어오거나, 혹은 화흑 일본 동인에서 한때 유행했던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릴지도 모르는 카가미에 대한 불안감'을 쿠로코에게 더 많이 부여하거나.
아오미네랑 키세는 안타깝게도 아직은 키세의 일방적인 짝사랑. 원작 완결난 시점에서도 일단 아오미네←키세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왜냐면 지금 내 아오미네 머릿속의 부동의 넘버원은 테츠, 넘버투는 새로운 라이벌로 대두된 카가미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음. 키세가 죽어라고 어필을 하든 몸으로 꼬시든 메가데레를 보이든 간에 일단 아오미네와 키세가 잘 되는 건 원작 이후. 2학년쯤 되어야 함. 물론 그 사이에 키세가 엄청 많이 힘들 거고 엄청 많이 울기도 할 거지만, 일단 내 안의 키세는 그걸 다 뛰어넘을 정도로 아오미넷치를 좋아하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함. 아오미네 입장에서도, 쿠로코를 제외하면 농구나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상대는 키세일 테니까.
-홍실+실우, 홍재
정확히는 니지무라/미부치 중심이라고 볼 수 있겠음.
홍실은… 아마 국내에서 얘네 얘길 꺼낸 건 내가 처음일 거 같은데, 정말 다른 거 안 따지고 비주얼 하나보고 파기 시작한 커플. 흑발미인 둘이 붙어먹는다니 존나좋군??? 일본에선 그 포지션을 히무로가 가져갔지만 내 히무로는 카가미 일편단심이라. 그런데 히무로 관련으로 파는 건 빙자라는 아이러니함 사실 원작에서 접점은 커녕 서로의 존재를 아는지도 의심되는 커플이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근실이나 엽실, 먹실에 비해서 캐해석이 좀 얕은 편. 오히려 얘네 성격을 가지고 창작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게 더 편할 지경… 하지만 아카시를 매개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좋아함.
근실 엽실 먹실은, 사실, 라쿠잔적으로 흥한 관계를 그대로 미부치로 돌려놓은 느낌. 정확히 말하면 내 안의 라쿠잔은 아카시라는 신이 강림하고 있는 가운데 그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미부치이고, 나머지는 미부치에게 맞춰주거나(네부야) 미부치보단 덜하게 아카시를 좋아하거나(하야마) 아카시보다 미부치가 더 신경 쓰이는(마유즈미)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음. 라쿠잔의 아카시교에서 아카시가 신이라면 미부치는 교주 같은 느낌이랄까. 후지마키 입으로 라쿠잔의 빛과 그늘이라 인증때려준 마유즈미는 마이너인 거 아니까 됐지만 일단 네부야와 하야마는 아카시보다는 미부치와 감정적으로 더 가까웠을 거란 게 내 생각.
홍재는 홍실 다음으로 좋아하는 니지무라 관련 커플링인데, 이건 개인적으로 니지무라가 테이코 시절 가장 신경 쓰였던 후배가 하이자키(단 가장 예뻐했던 후배는 아님. 그건 미도리마라고 생각함)이고, 하이자키가 테이코 시절 가장 좋아했던 팀메이트가 니지무라라는 전제하에 진행됨. 즉 서로 신경은 쓰고 있었지만 주변 환경이라던가, 아직 서툰 남자 중학생들의 풋풋함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다가 어른이 되어서 재회하는 느낌. 내안 홍선배의 장래는 형사이기 때문에(일단 공수도 유단자라는 점에서... 유도, 공수도, 검도 유단자는 경찰채용시험 때 특혜받을 수가 있음) 분명 비뚤어진 인생을 살고 있을 하이자키하고 잘 어울리지 않나 싶음. 물론 하이자키가 아오미네한테 주먹 맞은 뒤 개심했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후지마키가 하이자키 얘길 전혀 안 그렸기 때문에! (와장창)
-궁고
내 안의 타카오는 녹적에 짝사랑 구도로 붙여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가장 좋은 친구.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도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미도리마한테 버림받은, 혹은 차인 타카오가 미야지 선배에게 치유받는 구도도 좋아하지만 처음부터 타카오가 그런 의미로 좋아한 건 미야지 선배라는 동인설정이 있음. 타카오는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고, 미도리마가 워낙 원탑이라 잊혀지는 사실이지만 미야지 선배는 중증 아이돌 덕후… 미유미유 부채 같은걸 상시 구비하고 다니는데 안 웃길 리가 있나! 어쨌든 좀 가벼운 기분으로 아 이 사람 재밌다 좋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미야지 선배한테 목줄 붙들려서 어라…? 하고 있는 느낌이 좋다. 그리고 이게 페달에선 아라토도에게 그대로 계승됨. 일단 앵스트보다는 둘이 붙어먹으면서 에로카와이하게 노는걸 좋아함. 앵스트를 만들려면 뭔가 다른 설정을 추가하지 않는 이상 녹←고 구도를 끌어오지 않을 수 없는데 난 지들끼리 장난치고 노는 챠리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이 구도… 쓰기 어렵다…매우… 그래서 궁고는 서로 좋아하고 사귀고도 있지만 미야지가 질투심 만렙,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의처증 증세가 심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연출되는 러브코미디가 좋음. 참고로 주 희생자는 당연히 미도리마. 나… 애인 있다는 것이다ㅁ"ㅁ…….
정말 사소한 사실이지만 내 안에서 타카오는 슈토쿠 감독의 사생아? 랄까 그런 비슷한 위치인데(정확히는 타카오 어머니가 미혼모이고, 지금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렸으므로 타카오와 여동생은 아버지가 다른 오누이라는 설정), 이걸 미야지가 알게 되는 것도 좋음. 굳이 앵스트로 끌고 가자면 이 점일 거 같기는 한데, 이게 과연 미야지와 타카오의 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목꽃
녹적은 그나마 마음이 통하면 완전체라도 되겠지만 얘네는 정말 답이 없는 앵스트함을 자랑한다고 생각함. 물론 하나미야의 자업자득이지만.
일단 내 안의 키요시 텟페이가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게 목꽃의 전제인데, 이게 사실 국내/국외 통틀어 키요시 설정을 죄다 와장창하는 요소인지라… 그치만 어딜 봐도 이기심 끝판왕으로 보이잖아. 올해 지나면 다시는 농구 못 할 몸으로 하나미야와 무라사키바라한테 우리 다음에도 농구하자! 라니. 무라사키바라는 원래 감화될 애였으니 괜찮다 쳐도 하나미야는, 그 하나미야 마코토는 자기 다리를 부러뜨린 장본인인데. 물론 이걸 의도하고 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키요시는 대인배가 맞지만 그 뒤 하나미야에게 닥칠 영향을 생각해 보면 애매함.
어쨌든 내 목꽃은 의도가 아니었지만 하나미야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버린 키요시와 비뚤어진 제 전략을 믿고 나대다가 뒤통수 세게 얻어맞고 만 하나미야의, 잘 사귀는 듯하면서도 앵스트도가 쩔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지경의 조합이 되겠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걍 하나미야가 평생 키요시한테 봉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구도임.
-빙자
더블에이스의 훈훈한 모습과는 달리 내 안의 빙자는 기본이 앵스트. 목꽃만큼이나 심함.
가장 큰 이유는 일단 내 안의 히무로 타츠야가 상당히 비뚤어진 인간이기 때문이랄까. 히무로는 아카시 못지않게 전형적인 애정결핍을 보여주고 있음. 훈훈한 우정의 상징이라고 생각되는 카가미와의 커플링도 그렇지만, 알렉스를 대하는 태도라거나 무라사키바라를 돌봐주는 포지션을 자처하는 느낌이라거나, 어딜 봐도 카가미 타이가로 대표되는 '의동생' 의 존재에 무라사키바라를 억지로 투영하고 있는 게 보임.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무라사키바라와 카가미가 완전히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물론 챙겨줘야 할 부분이 많고+먹보인 건 같지만 성격이나 주변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다름) 무라사키바라로 카가미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던 히무로는 이 두 사람의 갭에 더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심지어 다시 만난 타이가는 웬 까게 하나가 데리고 카가미킁*ㅍvㅍ* 쿠로코*쿤v툰* 이러고 있으니 더 속터짐.
무라사키바라로 말할 것 같으면, 얘도 애정결핍인 건 마찬가지지만 본인이 자각을 못함. 외로움을 먹는 걸로 다 푸니까 당연한거. 중학교 시절에는 아카시나 미도리마 사이에 끼어서 그나마 텅 빈 마음을 채우려 했겠지만 일단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너무 자기들끼리 놀았고(장기를 두는 시간이 있다거나, 주장-부주장의 회의 자리가 있다거나) 화과자조라고 불리는 녹적자 세 명의 조합은 사실 미도리마와 아카시가 무라사키바라를 '끼워줬다'는 느낌이 강함. 결정적인 건 후지마키가 그린 미도리마의 피아노 연주 도비라. 미도리마는 피아노를 치러, 아카시는 음악을 감상하러 왔다는 목적이 뻔한 반면 무라사키바라는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음. 피아노에 관심도 없는데 미도리마랑 아카시 따라 무작정 왔다는 추측이 가능함. 문제는 이게 2년 반동안 계속되다 보니 얘가 그걸 보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임. 무라사키바라는 자기가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카가미에 투영해 보고 있는 히무로에게도 아무런 불만이 없음. 무로칭? 옆에 있어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고-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좋아- 이 수준으로 끝난다는 말임.
요약하자면 빙자는 겉으로는 겁나 훈훈해 보이는데 속으로는 엄청나게 썩어들어갔지만 해결할 방법이 거의 없는 커플. 무라사키바라에게 그가 자각하지도 못하는 외로움을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면 영겁의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히무로가 바뀌는 수밖에 답이 없는데, 히무로도 사실 카가미-알렉스와의 앙금이나 제 어정쩡한 재능에 대한 괴로움 등등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음. 아마 더럽게 오래 걸릴 거임.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는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그것이 방금 전 자신이 토해낸 욕망의 흔적이라는 것을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굳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 냄새 사이에 섞인 살의 달콤한 맛과 자신이 가한 무자비한 폭력의 결과로 터져나온 피의 알싸한 향도 후회 끝에 묻어버리기에는 아직 너무도 아쉬웠다. 부실 바닥에 널부러진 새하얀 몸은 그가 아직도 제 몸에 묘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분명 분노하리라. 물론 적어도 그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먼지 쌓인 바닥에 얼굴을 대고 누워 아무 반항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저 두 눈동자에 '두려움'이나 '절망' 외의 감정이 다시 어릴지도 의문이었다. 바람이 구름을 움직여, 창문 너머로 들어온 달빛이 쓰러진 자의 몸을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각종 흔적들이 방금 전 행위의 격렬함과 잔인함을 그대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깨문 상처, 그 위를 적신 타액과 정액. 그 모두가 자신이 남긴 흔적이었다. 씨발, 나라고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잘못한 건 이 새끼잖아. 내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몇 번이나 도망가지 말라고 했지. 씨발."
나지막이 읊조린 욕설은 분명 쓰러진 자의 귀에도 들렸을 터다. 아무 미동도 없던 토도 진파치의 어깨가 살짝, 아라키타의 기분을 무척 상하게 만드는 떨림을 보였다. 화가 났다. 그에게 자신은 언제까지나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 토도를 이끈 것은 전부 아라키타 자신이었기에, '자업자득' 이라는 네 개의 한자가 절로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라키타는 발치에 널부러진 토도의 교복 셔츠를 들어 만신창이가 된 몸 위에 덮어주었다. 천의 감촉이 몸을 스치자 다시 토도가 몸을 움츠렸다. 손목을 잡아채어 인간 세계로 떨어진 산신은 언제라도 다시 제 다리를 거칠게 벌릴 수 있는 한 인간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 잡아먹어, 씨발. 이를 갈았지만 토도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눈동자에는 초점이라는 게 없었다. 있었다 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으리라. 목을 붙잡고 바닥에 밀어붙여 억지로 유린하는 동안 토도는 평소에는 그렇게 시끄럽게 돌아가던 입의 모터를 완전히 정지시키고 있었다. 윽, 흡. 가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슬픈 목소리는 아라키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마키쨩. 갑작스레 토도의 앞에 나타나 어느샌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토도 진파치 최강의 라이벌은 토도의 앞에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났다. 듣자하니, 인터하이가 끝나면 영국으로 가는 것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던가. 사실 거기까지는 아라키타와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토도도 웃으면서 마키시마를 배웅했다고 했고,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에도 이런저런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연락은 통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별 상관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질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토도 진파치에게 마키시마 유스케는 확실히 특별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게 뭐? 토도 진파치는 남들이 흔히 하는 '연애' 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인기가 그렇게 많은데도 "미안! 나는 산이 연인이라!" 라는 웃기지도 않는 드립을 쳐가며 고백을 피하는 것도 아라키타는 하루이틀 본 게 아니었다. 어차피 제 마음을 전해봤자 똑같은 이유로 거절당할 게 뻔했다. 그런 토도를 오랫동안 봐 왔기에 아라키타는 '자전거=클라이밍=마키시마 유스케' 라는 웃기지도 않는 공식이 오직 토도 진파치에게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 생각했다. 적어도 몇 시간 전까지는.
「읏…… 마, 키쨩…….」
아무도 없어야 할 조용한 부실 안쪽에서 토도가 토해내는 목소리는 아라키타가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무언가였다. 문 너머로 바라본 토도는 부실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누워서 무언가를 얼굴에 댄 채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아라키타는 토도가 얼굴에 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키시마가 영국으로 떠난 날 이후로 토도가 줄창 자랑해댔던 것이었다. 클라이밍 할 때 쓰던 마키시마의 장갑. 기념 선물로 받았다던가. 기념도 참 젠장맞을 기념이지. 아라키타는 주먹을 쥐고 토도가 허공으로 희뿌연 액체를 뿜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토도 진파치는 토도 진파치가 아니었다. 그 언덕광 마나미 산가쿠라도 언덕이나 산을 오르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마스터베이션 따위는 하지 않을 게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이미 아라키타가 세워두었던 확고한 명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토도 진파치에게 마키시마 유스케는 확실히 특별한 인간이었다. 오롯이, 그의 존재만으로도.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토도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가,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아라키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 이건 말이다, 아라키타, 그게- 답지않게 말을 더듬는 그 얼굴에 짜증이 났다. 아라키타는 제게 모종의 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멱살을 잡고 바닥에 쓰러뜨려, 아직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하의를 모조리 벗겨내고, 뭐 하는 거냐고 반항하는 입에 손수건을 쑤셔넣어 틀어막는 과정에서 토도의 힘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 지장도 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 웃음이 나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자 토도의 어깨가 다시 움찔 하고 떨렸다. 어이, 토- 도. 일부러 말을 늘려 이름을 부르자 눈물 고인 눈이 아라키타를, 아라키타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응시했다. 크게 떠진 눈동자가 공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라키타는 알고 있었다. 그만 둬- 몸을 일으켜 손을 뻗은 토도는 단번에 아라키타에게 제압당했다. 다시 부실 바닥에 엎어진 토도의 턱을 붙잡고 제 얼굴 가까이로 끌어들이면서 아라키타는 이빨을 세웠다. 혀를 물어뜯어버릴 기세로 입술을 맞추면서 버튼을 누르자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을 찍고 난 직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토도는 찢어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이로 악물고 아라키타를 노려보았다.
"마키시마의 메일 주소, 아직 안 바뀌었지?"
순간 토도의 눈에 어린 절망과 공포를 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아라키타는 웃었다. 약 2년간의 짝사랑이었다. 그 종착역이 이 정액 냄새 나는 부실이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너편 플랫폼으로 가기 위해 뛰어내려, 그대로 차에 치어버린 것 같은 형국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둘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 어떤 질 나쁜 방법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쨌든 아라키타 야스토모가 토도 진파치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도 없는 소망.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
널 좋아한다. 옆에 있어 줘.
단지, 그뿐이었는데.
「도망치지 마.」
릴님이 트위터에서 아라토도 ㄱㄱ썰을 푸시기에 후다닥 갈겨썼던 글. 소재가 좀 야할 뿐이지 19금까지 갈 레벨은 아니라서 과감히 비밀번호 안 걸고 올려보는 것이다! ...는 아직 겁페 구금 로그는 무슨 비밀번호로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 비밀번호를 만드는 일입니다. 하하하 아청법 씨발. 그래도 괜찮아! 자위하는 장면이 나온 거 가지고는 아직 19금 타이틀을 달면 안 되는걸! 그건 누구나 하는걸!
쨌든 아라키타→토도→마키시마 전제로 썼는데 이미 토도한테 마키시마가 장갑 주고 떠난 시점에서 마키토도←아라키타 같다... 미안해 아라키타... 사실 산신제 신간이나 각종 마키토도 썰들 보고서 마키토도가 차애로 급부상한 시점에서 쓴 글이라서 마키토도가 반영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RT된거 보고 좋다고 해주신 분들 많았는데 미묘하게 면목이 없다... (mm)... 저런 느낌의 아라토도 앵스트 한번쯤 보고싶기는 하지만 그건 잘하는 분들 있으니까 떠넘김. 또 제목은 아라키타 말투 느낌으로 써봤는데 한국어로 번역하니 뭔가 절박한 느낌이 든다... 굳이 아라키타 말투로 의역하자면 "어딜 도망가?" 일 텐데... 아 모르겠다 저 미묘한 뉘앙스 살리기가 힘드니 그냥 CV. 욧칭으로 봐주세요. (...)
덧붙여서 이걸 처음 트위터에 올렸을 시점에는 마키시마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할 부분에 아라키타 이름이 들어가 있었던 대참사가(...) 있었다는 후문. 물론 이 글에서는 수정했으므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