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9.
帝光1年緑間真太郎x帝光1年赤司征十郎
아카시 세이쥬로는, 특별하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전원이 동의할 만한 그 명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미도리마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특별함’을 그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를 아는 사람 중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올해 테이코 중학교에 입학한 수많은 재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던 아카시는, 입학시험 전 과목 만점의 기록을 세우며 신입생 대표 자리에 섰고 160cm도 되지 않는, 지극히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서도 중학 농구계의 최강이라 불리는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1군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뿐이었을까. 그의 타고난 리더십을 눈여겨보고 있던 감독은 그가 입부한 지 1주일 만에 그를 부주장으로 발탁했다. 주장이었던 니지무라 슈조는 새파란 1학년이 다른 2학년생들을 제치고 부주장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 지 단 사흘 만에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약간의 심술로 몰아준 일들-부원들의 연습량 체크와 일지 정리, 부 지원 보고서 작성 등-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하게 처리한데다 그 도중 연습도 전혀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감탄스럽다고까지 했다. 중학생이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잖아, 그건. 거의 회사원 수준이지. 그런 니지무라의 평가에 모든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재능 있어, 저 녀석. 아주 훌륭한 리더가 될 것 같군. 그것은 사회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내리고 있는 평가와 정확히 일치했다. 명문가의 후계자, 정재계의 거물인 아버지를 뛰어넘을 거성이 될 재목. 아카시 세이쥬로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적당한 말은 없었으리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리마는 니지무라와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아카시를 슬쩍 바라보았다. 확실히 미도리마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을 저 작은 몸으로 그 정도의 일을 소화해 내고 있다는 건 대단하기 그지없다.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다. 언젠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느냐고 경외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봤을 때 아카시는 웃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 대답을 들은 학생은 역시나 아카시답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미도리마는 그와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말하면,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서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 있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농구를 잘 하고 싶거든 연습을 하면 될 일이고,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면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면 되고, 건강을 챙기고 싶다면 골고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된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한 사람이 어떠한 성과를 내는 데에는 특정한 노력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라고 해서 그 당연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카시 세이쥬로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굳이 아카시를 깎아내리는 듯한 평가를 내리는 자신이 어찌보면 지극히 옹졸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도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늘 혼재하고 있었고, 때문에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피했다. 아카시를 마주하면 그의 천재성을 어떻게든 폄하하고 싶어진다. 그런 식으로 ‘치사해지는’ 제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방금 전 설명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가치관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카시를 이길 수 없어 분하다면, 그만한 노력을 하면 된다.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인간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친해질 수 없는 상대로군,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러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알지 못했다. 아카시의 모습에서 시선을 뗀 채 공을 던지며 한 그 생각이,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뒤집혀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계기가 된 것은, 언제나처럼 부활동을 끝내고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 체육관을 나오던 어느 날이었다.
어라, 비 오는 거 아니냐? 하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정말 어둑어둑한 하늘 위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강수확률은 10%! 라던 일기예보의 예고를 완전히 배신하는 빗줄기였다. 당연히 수많은 학생들이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을 터였고, 그 대부분이 머리를 손으로 가린 채 운동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학생들 틈에 섞이는 것 대신 교사 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그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언제나 우산을 교실에 두고 다녔다.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그의 철저한 좌우명이 빛이 나는 순간이었다. 텅 빈 교실 사물함에서 손잡이에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이름이 적힌 우산을 들고서 교사 밖으로 나오던 미도리마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자판기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먼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은 분명 아카시 세이쥬로의 것이었다.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밀크 티 캔을 꺼낸 아카시는 교사 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잠시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우산이 없는 건가.
왠지 허전해 보이는 아카시의 손과 그 뒷모습, 그리고 제가 들고 있는 우산을 번갈아 바라보던 미도리마는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들린 발소리에 빠르게 반응해 고개를 돌린 아카시는 여어, 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미도리마에게 미소를 보였다.
“안녕, 미도리마. 아직 남아 있었네.”
“아아. 교실에 우산을 두고 왔던 게 생각이 나서. 너는?”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텅 빈 두 손을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애교 있는 동작이었다.
“미도리마는 전철로 통학하던가?”
“응. 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만, 아무래도 비를 맞고 가는 건 싫어서 말이지.”
“준비성이 좋구나.”
“너는? 아카시 저택은 아마 여기서 상당히 멀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말에 아카시는 놀란 듯 눈을 뜨고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아? 라고 묻고 있다는 걸 깨닫고, 미도리마는 겸연쩍은 듯 턱을 살짝 긁었다.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아카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는 그 미도리마 선생님의 아들이었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아카시의 아버지 정도는 아니어도, 미도리마의 아버지 역시 의학계에서는 상당히 이름있는 인물이었다. 오랜 세월 병원을 운영하며 지역의 유지 정도의 이름을 갖고 있는 미도리마 가문의 일원이니, 아카시 역시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었다. 그런 것치고 집안 사이의 교류가 그리 깊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정작 미도리마가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입학식 다음날의 일이었다. 신입생 대표의 이름을 들려주었을 때 아버지가 아, 그 아이 말이구나, 하고 약간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역 앞에서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아예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라고 할까 싶네.”
“왜 굳이 역 앞에서? 처음부터 학교 앞에 세워두면 편한 것 아닌가?”
“그건 너무 눈에 띄잖아.”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던가. 의외다.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지금 미도리마의 앞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다’ 고 말하고 있는 이 소년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에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 ‘천재’ 말이지.
어쨌든 차가 데리러 온다면 사서 걱정을 한 셈이 된다. 미도리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단팥죽을 뽑았다. 그럼 내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역 앞까지 데려다 줄까?”
우산을 펴던 미도리마는, 막 작별인사를 건네려고 입을 열던 아카시의 말문을 완전히 막히게 했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그 제안에 무척 놀란 듯 보였지만, 사실 제일 놀라고 있는 것은 미도리마 자신이었다. 왜 굳이 아카시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가 있는가. 돌아갈 방법이 없어 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만 걸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다, 우산도 사물함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것이라 두 사람이 쓰기에는 부족할 텐데. 아카시에게도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제안이었다. 분명 웃으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고 내일 보자고 인사하겠지.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카시의 대답을 기다렸고,
“……정말?”
그렇게 반문한 아카시의 눈이 뜻밖에도 무척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치 손해만 볼 것이 뻔한 미도리마의 제안을 실제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눈을 보자 차마 자신이 그 제안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도로 어깨에 맨 아카시가 쪼르르 미도리마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럼 신세 좀 질게. 웃으면서 미도리마의 우산 안으로 들어온 아카시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제 왼쪽 어깨가 젖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기분이 저렇게 좋아 보이는 걸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발걸음에 맞춰 발을 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응? 그래 보여?”
“그야…… 유난히 싱글벙글한 기색이고.”
“그런가? 응, 그럴지도. 사실 난 이렇게 친구하고 우산을 쓰고 가 본 적이 없거든. 초등학생 땐 매일 학교 앞으로 차가 데리러 왔었고.”
친구라니.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서 서슴없이 나온 단어에 미도리마는 당황했다. 친구? 언제부터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친구였던가. 그들은 그저 농구부 동료에 지나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는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미도리마는 알지 못하며, 아마 아카시 쪽도 미도리마가 평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었다.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생각보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더 알기 어려운 존재 같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는 상대 앞에서 ‘우리가 친구였던가?’ 라고 직접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친구’ 라는 말에 아무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아카시는, 여전히 신이 난 기색으로 미도리마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미도리마는 언제나 단팥죽을 마시고 있네. 그거, 맛있어?”
“응? 아…… 으응.”
“이전까지 난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는 맛이 없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어.”
그야 그럴 것이다. 지금 아카시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뽑은 따뜻한 밀크 티는, 평소 아카시 세이쥬로가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싸구려일 테니까. 솔직히 말해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스포츠 음료 외의 음료수를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것을 지금까지 본 일이 없었다. 그저 옆에서 걸어가는 아카시와 그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밀크 티 캔을 보면서, 저런 것도 마실 수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건 아닌 듯, 아카시는 몇 번이고 캔을 입술에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 가끔 몸이 추운 듯 캔을 두 손으로 세게 쥐기도 했다. 흘깃 건너다 본 아카시의 왼쪽 어깨는 이제 완전히 비에 젖어 있었다. 가방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미도리마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아카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어? 아…… 응. 고마워.”
미도리마에게 이끌려 우산 안쪽으로 몸을 붙인 아카시가 입을 다물자, 순식간에 어색한 공기가 우산 안에 맴돌았다. 그것은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어깨를 끌어당긴 손을 계속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왼손의 테이핑이 물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그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손을 떼면 아카시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원위치로 올려둘 것 같았고, 비에 젖어가는 어깨를 방치한 채 추위에 떨며 밀크 티 캔을 몇 번이고 어루만질 것 같았다. 나 지금 추워, 라고 미도리마에게 시위하는 것처럼.
‘……아니, 착각이야.’
그래, 착각일 것이다. 대체 왜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그런 것을 시위하듯 보여주어야 한단 말인가.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한 덕분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를 감싸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봤다면 참 이상한 풍경이겠지, 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그다지 오래 맴돌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평소 집에 가면 뭘 해?”
“일단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치면 숙제 같은 걸 끝내 놓지. 일찍 끝나면 책을 읽다가, 시간이 되면 잔다는 것이다.”
“예상대로지만 정말 규칙적이네.”
“규칙에 맞춰 생활하면 바이오리듬이 깨질 일은 없으니까.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피아노는 안 쳐?”
‘친구’ 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을 가져다 줄 만한 키워드였다. 피아노? 반문하며 아카시를 쳐다보자, 무언가 잔뜩 기대한 듯한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방금 전 들었던 뜻밖의 키워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날려버릴 법한 눈빛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눈동자. 미도리마 신타로가 기억하기에 아카시 세이쥬로가 누군가에게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쳤던 걸 네가 어떻게 알지?”
“아……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나, 초등학생 때 네 연주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어. 대기실에도 갔었는데.”
“뭐?”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순간 우산이 흔들려, 아카시와 미도리마의 가방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바람에 제 얼굴에까지 튀어버린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미도리마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발걸음은 길 한가운데 멈춰 서, 정말로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만큼 아카시의 발언이 뜻밖이라는 뜻도 되어, 미도리마는 눈을 깜박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미도리마의 반응에 아카시가 조금 쓸쓸한 듯 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 한때는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불릴 정도의 피아노 신동이었지. 우리 어머니가 네 팬이었어. 나도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네 연주를 듣고 완전히 반해버렸지 뭐야. 콩쿠르도 빠짐없이 보러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나서 포기해야 했지만.”
“패, 팬이라니…….”
“그래서 농구부에서 널 만났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피아노를 치지 않고 농구를? 이라고 말이지.”
전혀 기억이 없다. 미도리마는 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카시가 다시 발걸음을 앞서나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엉겁결에 쫓을 뿐이었다. 그런 미도리마의 충격을 외면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카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연주회는 아직도 눈에 선해. 첫 곡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었지. 아무리 연주 발표회라고 해도 그런 곡을 당장 첫 타자로 고르지는 않으니까, 참 놀랐어. 피아노는 나도 당연히 배웠지만, 그 어려운 곡이 그렇게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건 처음이었어. 그 다음 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난 그 곡의 오르골을 가지고 있는데, 역시 피아노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르더라. 세 번째 곡은 재즈를 연주했었지? 클래식 발표회라고 생각하고 갔다가 선곡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 그 뒤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연주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이야. 쇼팽의 환상 즉흥곡. 고작 4분 남짓의 연주였는데 푹 빠져버려서, 끝난 뒤에도 한참을 헤어나오질 못하고……,”
“자, 잠깐, 잠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말들이 한꺼번에 아카시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와, 미도리마는 얼굴을 붉히며 아카시를 저지했다. 왜 말리는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아카시의 두 눈동자가 미도리마의 얼굴에 닿았을 때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을 붉힌 뒤였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이 제 손이 아니었더라면, 얼굴을 감싼 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정도의 부끄러움이었다. 저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는 걸로 보아, 아카시가 제 연주회를 보러 왔다는 것과 거기에 감명을 받았다는 건 아마도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야 얘기하는가. 보통 좋아하던 피아니스트를 중학교에서 만났다면, 당장 달려와 말을 꺼내는 게 맞지 않은가. 너, 그 때 이러저러한 곡을 연주했던 사람이지? 라고.
“……왜 내가 이제 이런 얘길 하는지 궁금해?”
“아, 그래! 그거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왜 이제…….”
“그야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는걸.”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의 얼굴이 순간 쓸쓸함으로 물든 것을, 미도리마는 눈치 챘다. 이 쓸쓸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미도리마가 대기실에까지 찾아왔다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카시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미도리마는 그날의 만남이 제 뇌리에 깊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카시가 말하는 그 연주회는 피아노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갖는 리사이틀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도 제 이름을 내걸고 열린 리사이틀에서는 그 누구라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당시 미도리마는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성인이라도 당연히 긴장할 만한 상황에서, 연주가 끝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날 대기실을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은 대부분 어머니가 상대를 했다. 아카시가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냐고 핀잔을 준다면 분명 할 말이 있었다. 좋아, 반박의 재료는 갖춰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각오를 다진 미도리마였지만, 아카시가 다음에 한 말은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그리고…… 난 미도리마가 왜 피아노를 그만뒀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제야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담긴 쓸쓸함이 미도리마 신타로를 향한 것이 아님을 눈치 챘다.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제 3의 이유를 가지고 이렇게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도리마의 집안은 유명한 의사 집안이잖아? 미도리마가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둔 거라면, 그 일을 입 밖에 꺼내는 건 미도리마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래서 손쉽게 말할 수가 없었어.”
“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피아노는 오래 칠 생각이 아니었어. 의사가 되는 건 내가 선택한 일이고…….”
“응.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건 고작 얼마 전이었어. 그래서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아아- 말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아카시는 가방을 한 번 더 고쳐 멨다.
“다행이야, 미도리마가 주변 압박으로 피아노를 포기한 게 아니어서.”
아, 그것인가. 미도리마는 그제야 아카시가 무엇을 걱정했고, 무엇에 쓸쓸해 했는지 알아차렸다.
아카시 세이쥬로.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 그는 태어나서부터 그 짐을 지고 살아왔다. 아카시 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아카시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운명이었고, 거기에 아카시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아카시 세이쥬로도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리더십이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면모를 보았을 때, 교사 같은 것도 어울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 제 2의 선택지를 허락해 줄 리 없었을 테니, 그는 분명 어떤 꿈을 포기한 채 중학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감명 깊게 연주를 들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친다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스포츠 중 하나인 농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무엇을 생각했을지는 지금의 미도리마라도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도리마는 어떠한 사실-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평생 알아차리지 못할 사실을 눈치 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동안, 미도리마 신타로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천재에 대한 불신을 품고 미도리마가 그의 지위를 폄하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칠 때도, 아카시는 늘 미도리마의 안색을 살피며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날을 기다려 왔던 것이겠지. 미도리마가 결코 눈치 채지 못할 범위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미도리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채, 몇 달 동안 계속. 그 사실을 깨닫자 미도리마는, 이전의 옹졸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함께 새롭게 피어난 어떤 감정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다. 매우……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그건 참 다행인걸.”
생긋 미소 지으며 아카시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역이 코 앞이었다. 그리고 역 앞에는 어딜 봐도 아카시 가문의 차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고급 롤스로이스가 한 대 서 있었다. 아차, 헤어질 시간이네.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라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말을 입에 올리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 쭉 하고 싶었던 얘기도 했고, 응. 만족스러워.”
“나도…… 뜻밖의 칭찬을 들은 데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 환상 즉흥곡, 언제 한 번 다시 듣고 싶은데. 시간 내 줄 수 있어?”
“얼마든지.”
“후후, 기대할게. 그럼 난 여기서 이만. 뛰어가면 금방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교복 윗도리를 머리 위에 쓰고 우산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붙잡지 않았다. 그저 아카시가 횡단보도를 건너 차가 서 있는 건너편까지 뛰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이었다.
“아카시!”
길 건너에서 소리쳐 들려온 제 이름에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막 차에서 내린 운전 기사가 씌워준 우산 아래에서 미도리마를 쳐다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고 빛나 보였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이 던진 말에 대한 아카시의 반응에서, 주변 사람과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또 하나의 면모를 보았다.
“내일도 같이 집에 가자는 것이다!”
그 말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놀란 듯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얼굴 한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그 순간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테이코 중학교 설립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칭호도, 신장에 맞지 않는 능력을 자랑하는 농구부의 기대주라는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소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먼저 본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째서인지, 견딜 수 없이 기뻐지는 것이었다.
이 글을 다 쓴 지금 내 소감은 게임 하고 싶ㄷ 테이코 녹적데이를 2년차 기념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것이다...
녹적데이가 보통 캐릭터 등번호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등번호가 조금씩 바뀌면서 기념일이 두 개 생겼는데, 테이코 편에서는 또 등번호가 달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년에 세 개의 로그를 써야 하는(사실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생일을 포함하면 다섯 개의 로그지만) 나로선 상당히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지만은, 뭔가 중학교 1학년의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본편에 비하지 못할 만한 풋풋함이 잠들어 있는 기분이라 쓰면서 늘 즐겁고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이랬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저렇게 피터지게 싸운단 말인가 하면서 정말 쿠로바스다운 앵스트 전개에 대한 희열을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하기도... 하하하 녹적 행쇼.
미도리마와 아카시가 어린 시절에도 만난 적이 있을 거라는 건 모든 녹적충들이 한 번쯤은 하고 넘어가는 망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이야기가 원작에서 전혀 밝혀지지 않은 만큼(애초에 그런 설정이 있는지도 미지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서 매우 즐거움.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는 보통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먼저 인식했고, 미도리마는 그 존재를 중학교 입학 전까지 거의 눈치 채지 못한 전개로 가는 건 원작에서 그만큼 미도리마←아카시에 대한 감정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보충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는 느낌이다... 괜찮아! 녹적충이니까! 어쨌든 두 사람 다 명문가의 자손이고 하니 어디에선가 접점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후지마키가 제발 좀 보충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에피소드 하나만 터져도 녹적 팬덤이 폭발할 텐데... 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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