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Community'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5.03.07 [UnderCity] Talk about T. 1
  2. 2013.09.13 [UnderCity] Tarot · The Tower
  3. 2013.09.13 [UnderCity] commitee
  4. 2013.09.13 [UnderCity] hope
  5. 2013.09.13 [UnderCity] concealed
  6. 2013.09.13 [UnderCity] endless
  7. 2013.09.13 [UnderCity] Overflow · The man
  8. 2013.09.13 [UnderCity] Overflow · Removal
  9. 2013.09.13 [UnderCity] DEAD END?
  10. 2013.09.13 [UnderCity] Extraordinary

2015.3.7.

Under City 합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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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Mission 03.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총알을 피하면서 바닥에 구른 테리어드는 나이프의 잔량을 체크했다. 투척용 나이프를 제법 많이 갖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왼쪽 팔에 장치해 둔 두 개가 마지막이다. 그 외에 근접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사냥용 나이프가 두 자루 더 있지만 무겁고 커서 투척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불리하다. 평소의 그녀라면 나이프의 개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한들, 그녀의 실력이라면 나이프 한 자루만으로도 그들을 제압하기는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그녀에게 불리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지원사격을 하던 조직원 한 명이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뒹구는 그의 이마 한가운데는 피가 흐르는 구멍이 훤하게 뚫려 있었다. 그의 가슴팍을 뒤져 나이프를 챙기고, 총격이 잦아든 틈을 타서 상대의 팔을 향해 던졌다. 으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어소시에이트 한 사람이 당한 모양이었다. 대체 몇 명이 죽거나 다쳤을까. 그녀는 혀를 찼다.


  '정말…… 짜증날 정도로 수지가 안 맞는 싸움이네.'


  그러나 지금 그녀가 고전하고 있는 까닭은 부하들이 부족하기 때문도, 무기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단 두 가지. 하나는 작전상 아직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 자체가 '공격'이 아니라 '수비'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뭔가를 지키는 것에는 약했다.


  #미스 티아, 자네들 조가 이제 마지막이라던데. 지금 어디까지 왔지?

  "현재 라스트 포인트에서 약 20미터 앞까지 왔습니다. 대치하고 있는 헤니르는 다섯 명에서 여섯 명. 그 중 상처 없이 전투를 속행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남은 전력은 저를 포함해서 셋입니다."

  #좋아, 이쪽은 잔당 처리를 모두 끝냈다. 행운을 빌어.

  "감사합니다."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류상의 목소리에는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웬만한 일로는 잘 동요하지 않는 남자지만, 적어도 크루원의 생존은 확인된 거나 다름없었다. 투척용 나이프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자 부상을 입은 조직원들이 여럿 보였다. 속히 전투할 수 있는 인원은 이제 테리어드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가 대치하고 있는 헤니르의 조직원들은 도발에 쉽게 넘어오는 편이었다. 적이 여성이고, 그것이 자신들과 맞서 싸우고 있으며, 동시에 무기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감정적 도발을 거의 못하는 그녀로선 지극히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데, 그녀의 주변으로 아직 살아 있던 어소시에이트 두 명이 모였다.


  "미, 미스 티아, 저희는 이제 한계입니다. 총알이 다 떨어져서……."

  "어떡할까요?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면전에 돌입할까요?"

  "엉뚱하게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라스트 포인트에만 끌고 가면 되니까요. 그래서, 남아 있는 무기는 얼마나 되죠?"

  "각자 권총을 한 정씩, 그리고 나이프를 갖고 있습니다."


  턱없이 부족하다. 테리어드는 자기가 갖고 있는 권총을 떠올렸다.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니는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무기이자 아직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무기이기도 했다. 물론 매일 밤 총을 분해해 닦는 작업은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본 적은 없었다. 그걸 이들에게 넘겨주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최후의 보루다.

  테리어드는 자기 권총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주변 지형을 살폈다. 저격수가 위치하기엔 너무 낮지만 전황을 살피기에는 적당할 만한 폐건물이, 운 좋게도 근처에 있었다. 저곳이라면 아마 잠복하더라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에게 섬광탄을 쥐어주고, 그녀는 작전을 제시했다.


  "내가 혼자 적들을 도발하죠. 라스트 포인트로 가기 직전에, 내가 눈을 감고 몸을 숙이면 바로 섬광탄을 던져요. 그 뒤 총을 난사해서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세요. 단, 1초라도 타이밍을 놓쳤다간 내가 죽을 테니 잘 해줘야 합니다. 알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내 목숨은 두 사람에게 달려 있어요. 그것만 명심해 줘요. 자, 먼저 라스트 포인트로."

  "예!"


  두 명의 조직원들이 총과 섬광탄을 가지고 앞으로 먼저 나아갔다. 라스트 포인트로는 몇 명이나 끌어들였을까.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살육을 적들에게 들키면 작전은 소용이 없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팔이 한 짝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데서는 죽을 수 없었다.


  '……가볼까.'


  테리어드가 나이프를 쥐고 그들의 앞으로 뛰어드는 데는 그리 큰 결심이 필요 없었다.

  '살아남겠다'.

  오직 그뿐이었다.

  헤니르 조직원들 사이에 혼자 뛰어든 것은 제법 무모한 짓이었다.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은 목이 단번에 베여 죽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들이 총을 쏴대기 시작하자 도저히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들의 진영이 흐트러졌다는 걸 안 헤니르 조직원들은 급속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앞에 '희생양' 으로 던져진 것이 그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노스트라의 상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짧은 순간, 테리어드는 그들의 눈에 전투욕과 승리에 대한 열망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자신이 상대인 이상 헛된 꿈이었지만.

  능숙하게 그들의 총격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에 상처를 입혔으니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들의 발걸음이 훨씬 빨라졌다. 도망치던 테리어드의 눈에 저격수가 눈에 들어왔다. 라스트 포인트가 이제 저 앞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그녀는 두 눈과 귀를 감고 그 자리에 엎드리고 앉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빛이 번쩍였는지 아닌지, 그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상하네. 왜 총을 못 써? 기껏 사격장에 데려와 줬더니.


  투덜거리며 말한 것은 그녀의 선배 어소시에이트였다. 옆에서는 니콜라이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갓 조직에 들어온 테리어드의 교육을 떠맡은 그들은, 사격을 아무리 가르쳐 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테리어드를 보고 조금 기막혀 하고 있었다. 총을 잡은 채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 몰랐던 테리어드는, 그저 '죄송합니다' 라고 짧게 대답했다.

  처음 사격을 배운 날 그녀는 발군의 재능을 보여 표적의 머리와 심장을 단번에 궤뚫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날 밤엔 엄청난 구토와 고열에 시달렸다. 눈을 감으면 총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떠오르고, 그녀가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는 모습이 떠오르고, 같은 총 때문에 이미 숨이 끊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남자가 떠올랐다. 땀에 흠뻑 젖어 침대에서 일어나 목을 상하게 할 정도로 강한 위액을 변기에 뱉어내고 몸을 씻은 다음,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자리에 다시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꿈 속에서 벨은 여전히 테리어드를 보고 울고 있었고 아서의 몸에서 나오는 피 냄새는 방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른 채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맞이한 아침, 테리어드는 총을 쏘는 자신을 상상만 해도 손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에 총을 사용 못하는 마피아라니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고. 알아듣겠어?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길은 너한테 안 맞아. 포기해.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강자가 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으로 강자가 되기는 무리라니까? 실전에 투입하면 바로 목숨 날아가. 아서, 아서. 지금이라면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가다니, 어디로?

  남자의 경박한 말투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병원을 떠나 언더 시티로 온 뒤 그녀에게 돌아갈 곳이란 이미 없었다. 벨의 곁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을 남기고 간 테리어드를 아직 원망하고 있을 테니. 그래서 테리어드는 주먹을 쥐고 자신이 갖고 있던 총을 남자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저는 총을 쓰지 않겠어요. 평생, 평생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뭐라고? 너 내 말 듣고 있었냐?

  -나이프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된다는 겁니다. 두 분의 역할은 절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테리어드의 총을 받아든 남자는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니콜라이만큼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각오를 정했다니 다행이군. 오늘부터 지독하게 구르게 될 테니 각오하라고. ―라고 말하는 듯. 그리고 그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쳐다보는 테리어드에게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억해둬, 아가씨 Kitty. 세상이란 살아남는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이 강자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리어드는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바닥에 던졌다. 이제는 무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라스트 포인트는 완전침묵. 적어도 테리어드 자신이 끌어들인 헤니르 조직원들은 전부 그녀의 발밑에 시체로 변해 널부러져 있었다. 그들 뿐 아니라, 여태까지 죽은 노스트라 조직원들의 수에 필적하는 헤니르 조직원들이 죽어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티아. 담당하던 적들의 완전침묵을 확인했습니다. 저 외에 2명의 어소시에이트가 생존했습니다."

  #수고했어. 예정 집합 장소로 모이도록. 다음 분쟁 장소로 이동한다.

  "저어…… 카포, 다른 조직원들은?"

  #꽤 많이 죽었지. 하지만 솔져급 조직원들과 우리 집 고양이는 살아남았어. 다음 장소에서의 전력은 충분해.

  "……알겠습니다. 저희 세 명도 전투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강자다.

  그 말을 되새기며 그녀는 시체들을 밟고 걸었다. 죽는 것을 각오하면서 싸우고, 이처럼 수많은 이들의 시체를 밟고 걸어가면서도, 그녀에게는 살아 있어 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이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기왕이면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에 그녀는 여전히 강자다.








  그리고 이것은, 어찌됐든 좋은 이야기.


  테리어드 W. 매저즈는 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핸드폰으로 전송되어 오는 스팸 문자메시지에 반응해 볼 생각이 든 것은, 그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오늘 운명, 알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버튼을 눌러주세요!]


  헤니르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뒤부터 그들의 일은 정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카포레짐 이상의 간부들이 아니라 자신 같은 선봉 담당 조직원들의 목숨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한 것일까.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다수의 전화 통화료를 감안하고 접속하자 랜덤으로 타로카드를 뽑아 운세를 알려주는 사이트가 나타났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뒤집힌 카드 밑에 있는 키를 눌렀다. 갑자기 카드가 빙빙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그 속도를 낮추어 정체를 드러냈다. 상세운세 보기를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녀는 핸드폰 전원을 껐다. 탑 위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는, 덜도말도 할 것 없이 좋지 않은 카드였다.

  나중에 알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그 카드는 '끝이 없는 절망'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 카드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카드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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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01.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울려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늦게 들어와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몸의 솔직한 반응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서 손만 빼내 핸드폰을 잡은 그녀가 여보세요, 하고 말을 건넸을 때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재차 물었지만 역시 답은 없다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전화가 끊겼다. 잘못 걸려 온 전화인가? 아니면― 그녀의 시선이 방 구석에 쌓아 둔, 지독한 냄새를 내고 있는 장미 꽃다발에 닿았다. 바싹 말라버린 장미는 이제 썩어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메시지 카드와 섬뜩한 꽃다발과 이제는 무언 전화인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공을 들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한 기분으로 물을 마시려 침대를 나오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서 자동응답기가 깜박이고 있는 게 보였다. 새 생수병을 따서 입술에 대고 응답기 재생버튼을 눌렀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메시지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스 티아. 익일 오후 6시 30분까지 회사 건물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H' 와의 접촉에 관련하여 청문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자리를 비우거나 무단으로 이탈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는 변명도 불가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사항이므로, 불이행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02.


  "어머, 그게 웬 거야?"


  그날, 유난히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꽃다발을 하나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 색만큼이나 선명한 핑크빛의 장미 꽃다발이었다. 평소에 이 대기실에 꽃다발이 오는 경우는 가수인 그녀에게 바치는 꽃들 뿐이었으니, 스타일리스트인 그녀에게 꽃을 주는 사람은 몇 없을 터였다. 그야 제이나는 미인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남자도 많았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테리어드가 가진 가수라는 직업과 그 화려함에 늘 묻히기 일쑤였던 것이다.


  "혹시 애인이 주고 간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 사람, 요즘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 ……이건 다른 사람."

  "흐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 애인이 질투할 거야."

  "어, 어마, 내가 그렇게 기분 좋아 보였어?"

  "무척."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하는 제이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테리어드는 가발을 고정한 핀을 떼어냈다. 그래도 바로 앞에 거울이 있어 제이나의 행동이 전부 보였다. 거울 너머에 비친 제이나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 '애인'을 만나러 나갈 때나 '애인'과 데이트를 하고 돌아왔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이. 제이나는 아마 그 애인에게서 꽃을 받아본 일은 한 번도 없을 터였다. 테리어드는, 그 꽃을 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이어지는 것이 제이나에겐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는 비참한 현실로 이어졌을 때 테리어드는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03.


  "어서 오게, 미스 티아. 가운데 놓인 의자에 자리하도록."


  콘실리에리의 무거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청문회라는 단어만 던져주고 남을 덥썩 부르다니 무슨 일일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 '청문 대상'은 테리어드 자신인 모양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테리어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부재중 메시지는 청문회 내용이 'H와의 접촉'― 즉 헤니르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테리어드에겐 짚이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있는 것은 보스와 콘실리에리, 카포레짐을 포함해서 전부 테리어드보다 직급이 위인 간부들이었다. 솔져급 조직원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솔져 계급을 가진 테리어드에 대한 예의일 터였다. 어둠 속에서 류상의 모습을 찾으려 했으나 일부러 조명을 낮게 한 듯 테리어드 쪽에서는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면 그녀가 앉아야 하는 자리는 조명이 뜨거울 정도로 밝아서, 상당히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테리어드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지나치게 덤덤한 그녀의 태도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카포레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결백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 내용이라면 좋을 텐데.


  "미스 티아, 어째서 자네가 이곳에 불려 왔는지 아는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청문회의 내용은 아는가?"

  "헤니르와 관련된 건이라는 것은 메시지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그것이 저와 무슨 관계가?"

  "건방지게 어디서 입을 놀리나? 질문은 우리 쪽에서 하네. 자네는 충실하게 대답만 하면 돼."


  콘실리에리의 재제가 있기 전에 카포레짐 쪽에서 불만의 말이 터져나왔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자 곧 불만도 잠잠해지고, 콘실리에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헤니르 조직원과 사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네."

  "……예? 그게 무슨―"

  "제보자의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그가 말한 정보와 가지고 온 '증거물'의 신빙성을 높게 친다는 결과가 어제 회의에서 나왔어. 다만 이 건에 대한 자네의 변명을 들어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옳다는 의견도 다수 있어서 이 청문회가 열리게 된 걸세."


  당황했다. 아까, 피고가 자신임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헤니르 조직원과의 사적인 접촉?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제보자? 증거물? 그녀의 머리가 혼란으로 치달았을 때 저 구석에서 에헴,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이나 느낌을 보아 그 소리의 주인은 류상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한 명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정신을 번쩍 차릴 수 있었다. 청문회에 참석하는 카포레짐의 호위로서 크루의 누군가가 이 장소에 따라왔다면― 류상의 크루에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솔져 계급을 가진 사람은 자신과 니콜라이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을 노스트라에 천거한 그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로 마음먹고 주먹을 꽉 쥔 테리어드는 고개를 들었다.


  "제보자에 의하면 헤니르의 조직원이란 사람은 금발에 큰 키. 양복을 입은 여자였다던데. 그 여자는 두 번 정도, 혼자서 펍에 찾아왔고 자네에게 개인적인 접촉도 취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자네는 며칠 전, 그 여자를 개인적으로 고용해서 사흘 동안 데리고 다녔다는데― 이하의 사실에 짚이는 바가 없나?"

  "……!"


  테리어드는 동요를 숨기려 애썼다. 짚이는 바―  물론 있다. 지금 콘실리에리가 말하고 있는 헤니르의 조직원이란 이해린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헤니르의 관계자이자, 몇 번을 마주했지만 결국 죽이지 못한 상대. 그 여자가 헤니르의 조직원이었던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지금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물론 테리어드는 그녀를 통해 헤니르와 접촉한 적이 없을뿐더러 노스트라를 배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딜 봐도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인 것이다. 무엇보다 해린이 헤니르의 관계자임을 알면서도 보디가드로 고용했다는 상황은―


  '……당했다.'


  어떤 말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한 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끝이 없고, 꼬투리를 한 번 잡혔다가는 그 시점에서 유죄 확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 사실을 긍정해도 유죄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을 늦게 하면 할수록 좋지 않은 이미지를 쥐어줄 수 있다. 신중하게 대답을 고른 뒤, 테리어드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저는 상대가…… 헤니르의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제보자는, 자네와 그 여자가 싸우는 장면을 봤다고 하네."

  "제게는 적이 많습니다. 노스트라의 미스 티아로서 죽인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그 관계자도 많습니다. 제 외양이 눈에 띠는 덕분인지 그 중에서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무척 많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죽일 각오로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그 날 그 여자가 펍에 찾아온 것은 결판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그 펍에 다니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그 여자는 펍 근처에 잠복하다가 제가 펍으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은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제게 접근하여, 결투를 원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상대해 준 것뿐입니다. 다만 죽이기 전에 결투가 중지되었고, 그 대가로 그 여자는 사진을 태웠습니다. 필름은 제 손에 있으며, 아직 처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에 그 여자를 경호원으로서 고용한 건 어째서지?"

  "그것은……."


  그건, 해린과 테리어드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테리어드의 타겟은 해린의 경호대상이었다. 그러나 12시 종이 울리면서 둘은 결착을 내지 못했다. 그 다음 만남은 파티장이었었지. 노스트라의 주주 대리로서 온 것이라 험악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그 다음 해린이 펍에 찾아와서 사진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했고, 이에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테리어드는 우연히 들어온 해린의 지갑을 가지고 해린을 협박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상대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그 정도의 관계였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증오와 자존심 싸움 뿐, 어떤 감정도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하면 신뢰일까. '상대는 나의 정체에 대해 절대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다'는 신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해린을 굳이 보디가드로서 고용한 건 그런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다만 그것은 상대에 대한 살의와 등을 진 신뢰일 뿐이었다.


  "최근 제게…… 아니, 펍의 가수에게 따라다니는 스토커를 퇴치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제게는 직속 어소시에이트도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조직고 관련된 일이 아니면 조직의 인력을 끌어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반면 그 여자는 사설 경호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용한 것뿐입니다."

  "상대가 자네를 죽이려 들 거라곤 생각 못 한 건가?"

  "적어도, 의뢰로 묶여 있는 동안에는 목숨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 여자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도 그 여자는 의뢰 기간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의뢰인을 가차없이 버렸습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맞서 싸웠다면 전 그 임무를 온전히는 수행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 여자는 그런 인간입니다."

  "호오, 상대를 믿었다 이 말인가? 거 참 눈물나는 이야기로군. 동양에선 그런 걸 인의라 한다지? 자네는 그렇다 치고, 고작 헤니르의 조직원 주제에 그런 걸 충실하게 지키는 인간도 다 있었지 뭔가. 상대가 그런 사람인 걸 잘 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 아닌가, 그건?"


  카포레짐 사이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까부터 테리어드의 유죄가 명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상대가 있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대임은 분명했다. 여성으로서 솔져의 자리에 오른데다 노스트라 내에서 꽤 신임을 받고 있다보니 반감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차마 위 직급의 인간에게까지 경계당할 줄은 몰랐다. 테리어드가 살아 있으면 제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는 머저리가, 설마 존재했다는 말인가?


  "세 번이나 본 사람에 대해서 판단을 못할 정도로,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습격을 당한다 해도 쉽게 죽어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서 보디가드를 고용했나?"

  "스토커가 붙은 상대는 제가 아니라 펍의 가수입니다. 저는 가수로 있을 때만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뿐 평범한 여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자가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떤 대책도 취하지 않는 게 납득이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다' 는 추측도 가능하며, 그런 식으로 파헤치다 보면 펍 뒤에 노스트라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날 수 있기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상대가 자네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은가. 노스트라의 조직원이 그 펍에서 노래부르는 여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펍이 노스트라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그건…… 제 불찰입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한 사과의 말에 고함을 질렀던 카포레짐이 조용해졌다. 설마 이 타이밍에서 사과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변명이 서툴러질 것 같으면 솔직히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테리어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것으로 판도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테리어드를 다시 콘실리에리의 말이 막아섰다.


  "그러니까, 문제의 여자와 자네 사이에 호의가 오갈 만한 여지는 전혀 없다는 말인가? 확신할 수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콘실리에리가 슬쩍 눈짓을 가하자, 어둠 속에서 한 명의 남자가 파일을 하나 가지고 왔다. 파일 속에는 두 장의 익숙한 쪽지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해린의 단정한 글씨로 쓴 신청곡 쪽지. 자신이 불러준 두 개의 곡. 쪽지가 없어진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 '제보자'는 이것을, 해린과 테리어드 사이에 호의가 오가고 있던 증거라고 주장한 게 분명했다.


  "자네는 상황이 자네에게 지극히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군. 신빙성 있는 증언과 증거가 갖춰져 있어. 발뺌할 수 있는 상황 같은가?"

  "……저는 이것이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몬도 카네의 가수로서 서면, 저는 신청곡이 그 어떤 노래든 부릅니다. 거기 적혀 있는 메시지 따위는 일일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누가 신청한 곡인지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곡명 정도는 기록합니다만."

  "그래서, 이 두 곡이 그 여자의 신청곡임을 부정할 셈인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곡을 신청한 사람이 그 여자인 걸 안 건 둘 다 그 여자 쪽에서 자신을 알려왔기 때문이지 알고서 부른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게 어떻게 '호의의 증거'가 되는지 궁금하군요.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곡을 고르고, 제게 건넸는지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가수는 신청이 들어온 곡을 충실히 부를 뿐이니까요."


  정적이 찾아왔다. 아마 청문회 측에서 내세울 증거는 이게 전부일 것이다. 그 외에 해린의 흔적은 그 무엇 하나 테리어드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다고 하면 해린이 남기고 간 필름뿐이지만, 그 필름은 어디서 숨어 찍었다는 걸 선명히 알 수 있었기에 오히려 테리어드 쪽에 유리한 증거였다. 그걸 알기에 그 '제보자'도 필름까지는 훔쳐가지 않았으리라.


  "자, 이쯤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 쪽지 두 장이 내통의 증거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한데요. 아마 저걸 받은 날, 미스 티아는 저와 함께 내통자를 잡아내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자기도 헤니르의 조직원과 내통을 하다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류상의 반론에 정적이 깨졌다. 그의 목소리엔 이 상황이 지극히 재미없으며,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없다는 의지가 제대로 박혀 있었다. 그 결단이 테리어드로서는 상당히 고마웠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계속 자신을 유죄로 몰려 한다면 남은 길은 해린의 모든 정보를 털어놓고, 그녀를 이리로 불러 대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해린 사이에 쌓인 '신뢰'는 테리어드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결국 남은 길은 '신뢰'를 지키고 죽는 것밖엔 없었던 것이다.


  "연막작전이었을 수도 있지요. 듣자하니 그 내통자란 것들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소 조직에서 파견한 놈들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놈들은 넘겨주고 자기가 정보를 전달하는 게 더 나을지도……."

  "그러니까 미스 티아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그걸 확신하냔 말입니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미스 티아는 저희가 제시한 증언, 증거에 대해서 충실하게 대답했습니다. 청문회의 의미는 거기서 끝나고, 나중에 다른 증거가 나왔을 때에야 처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드는군요. 이런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처음엔 다들 못 믿었을 정도로 그녀는 노스트라에 충직했습니다. 물론 제 크루에 속한 솔져라 이렇게 말하는 건 좀 부끄럽지만요."


  마지막 류상의 말로 콘실리에리의 표정은 바뀌었다. 확실히, 하고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아까부터 아무 말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보스― 가이의 입이 열렸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그리고 그 공간을 전부 지배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네, 미스 티아. 만약 자네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 순간 테리어드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이자 최후의 기회임을 알았다. 그녀는 가이의 얼굴만 바라보며, 자신의 살의를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죽일 생각입니다."




        04.


  그들의 관계에 종언을 찍은 사람은, 사실 테리어드가 아니었다. 가계 장부를 작성하면서 눈치 챈 횡령과 몬도 카네에서 맡고 있던 조직의 일―간부들의 사교장과 회의장을 제공하는 일―이 밖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을, 테리어드가 조금 미심쩍게 여기고 있을 때였다. 테리어드가 분장을 하기 전에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은 점장인 비트였다. 그는 두 손을 꽉 모으고, 뭔가를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제이나가 사귀고 있는 남자 말인데…… 그 남자의 건축 사무실에 헤니르 간부들이 몇이고 드나든다는 정보입니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제이나가 이곳의 정보를 빼가고 돈을 횡령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05.


  "늦은 밤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그런데, 미스 티아가 절 부르시다니 뜻밖이네요……."


  청문회장을 나와 같이 식사하자는 류상의 제안도 뿌리친 채, 테리어드는 몬도 카네의 점장인 비트 레이어를 불러냈다. 뭔가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로 나온 그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테리어드의 시선을 자꾸 피하려고 했다. 그것이, 이미 확실한 그의 '배신'을― 증명해 주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오늘 노스트라의 청문회에 다녀왔어요. 내가 헤니르와 내통하고 있다고 제보한 자가 있다더군요."

  "……."

  "나는 그게 당신이라고 생각해요. 덧붙여 내게 말라붙은 장미꽃이나 그 메시지 카드를 보낸 사람도 당신이라고 생각해요.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 주겠어요?"


  그 장미 꽃다발을 이상하게 여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처음 그 꽃다발을 받았을 때 꽃을 수거해 오는 역을 맡은 비트가 '쓰레기' 라 판단하지 않은 점. 두 번째, 몬도 카네의 문을 잠시 닫자마자 '보낼 필요가 없다'는 듯이 꽃다발이 오는 것이 끊긴 점. 그건 가수 벨을 비뚤어진 방법으로 사랑하는 상대가 보낸 것이라기보다는, 테리어드에 대해 잘 알고 그녀의 가까이에 있으며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꽃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보낸 것이라는 증거와도 같았다. 신청곡 쪽지를 훔치는 것도 그렇다. 언제나 그날 받은 신청곡은 대기실에 같이 뒀다가 가지고 가지만, 비트라면 대기실을 제 집 드나들듯 왔다갔다하니 해린의 신청곡 쪽지만 빼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게다가 해린이 처음 몬도 카네에 왔을 때, 그녀와 해린이 싸우고 있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도 비트였다. 이쯤 되면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으나, 그 결론을 테리어드가 여지껏 내리지 않고 있던 것은 비트 레이어라는 남자를 어느 정도는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답하세요. 왜 내게 이런 짓을 했죠?"

  "……."

  "부정할 생각이라면,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당신을 구속할 수박에 없어요. 오늘 청문회에선 '보류'라는 결말이 났어요. 무죄를 증명할 수 없다면 나는 죽습니다. 하지만 노스트라의 조직원으로서,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고 죽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자신을 죽일 자격이 있는 사람의 손이 아니면 죽어줄 생각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을 때였다. 테리어드는 비트가 품속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는 것도, 그것이 불을 뿜어 자신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 것도, 불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는 테리어드를 보고 비트는 어디까지나 냉혹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권총을 든 그의 손은 오히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 당신을, 죽이고 싶었어요. 기왕이면 노스트라의 손으로…… 배신자라는 명목 하에……. 하지만, 보류라면, 그리고 내가 꾸민 일이라는 걸 들켰다면― 할 수 없어도, 내 손으로……."

  "어째서……?"

  "적어도 내 손으로…… 그녀의, 원수를……."


  배신자. 그녀. 바싹 마른 핑크빛 장미 꽃다발. 단어와 사람의 얼굴과 있었던 일들이 머리를 휩쓸었다. 당신, 하고 테리어드는 말끝을 흐렸다.


  "제이나의 복수인가요……?"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남자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방아쇠를 더 당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날, 제이나에게 꽃다발을 준 사람은― 이 남자였던가. 순박하고 남을 속일 줄 모르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라면, 아마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말로 제이나에게 마음을 전했으리라. 그녀가 연인이 있는데도 꽃을 받고 좋아했던 건 그런 이유인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라면, 그녀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속고 있는 것뿐이니까, 절대로 구해줄 거라고…… 도와줄 거라고…… 그런 남자와는 손을 끊고, 노스트라에 솔직히 사과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식의…… 그런 처분이 내려질 거라고…… 그래서 당신에게 얘기했는데……. 그런데 당신은, 그녀를, 직접, 죽이고…… 그녀가 실려 나가는 걸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고……."

  "……그랬습니까."


  그토록 가까이 있었으면서, 빈틈을 수도 없이 보고 있었으면서, 해린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었으면서, 굳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전부 배신자라는 이름하에 죽은 제이나 때문이었다. 같은 입장, 같은 상황에서, 같은 절망과 함께 죽는 것을 원했으리라. 제이나는 테리어드를 믿고 있었다. 아니, 가수 벨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거라고, 그렇게 굳게―

  그것이야말로, 해린과의 사이에 있는, 살의에 연결된 '신뢰'가 아닌 진짜 '신뢰'였다. 테리어드도 알고 있었다. 제이나가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만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테리어드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을 거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날 죽일 자격이 있군요."


  그녀를 무척 사랑했을 사람. 순수하게, 순수하게, 그녀에 대한 마음을 품고, 계속 살아왔을 사람. 고백해서 거절당했을 게 분명함에도 그 마음을 접지 못하고,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녀를 구제해 주고자 했을 사람. 다만 의지할 곳을 잘못 찾아 비극을 벌이고 말았지만― 제이나 크롬데른이라는 여자, 테리어드에게 죽은 그 여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그 사람. 그 남자가 지금 테리어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다가, 테리어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신 뜻대로 처분될 생각은 없어요. 대신 당신이 날 쏘는 건 상관 없습니다. 총을 잡아요. 당신이 여기서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당신을 청문회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어요. 노스트라의 배신자로서 죽고 싶지는 않고, 내가 그렇게 죽는다면 분명 카포나 날 천거한 사람에게도 불똥이 튑니다. 그런 죽음만큼은 딱 질색이에요. 그러니까 복수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겨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남자는 다시 총을 잡았다. 제 손과 테리어드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며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치켜 세웠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이를 악물었다. 흑, 윽, 흐윽, 울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고 눈물과 콧물이 남자의 얼굴을 더럽혔다. 테리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총알이 심장을 궤뚫을 것을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탕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06.


  "축하하네, 미스 티아. 무죄 확정이군. 곤란한 일에 끼어들게 되어 고생꽤나 했겠어."

  "그렇지 않습니다, 카포.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말했지. 나는 자네를 믿는다고. 그리고 정말로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 다음 날, 콘실리에리에게 류상으로부터 은밀히 자료가 전달되어 왔다. '제보자'와 테리어드가 만나 나눈 대화를 녹음한 파일이었다. 옷에 묻혀 있어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음성은 확실하게 '제보자'가 테리어드를 함정에 빠트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증언과 증거가 신빙성을 잃은 순간 테리어드의 혐의는 사라졌고, 위협적인 솔져를 한 명 해치우려 했던 노년 카포레짐의 허무한 욕심도 사라졌다. 콘실리에리의 입으로 무죄가 선언됐음을 알리러 온 류상은, 테리어드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채고 의아하게 여기는 듯 했다.


  "설마 제보자가 헤니르와 내통하고 있었다니 몰랐어."

  "……저도 그렇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테리어드에게 총을 들이댔던 비트는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으나 그 총알이 그녀의 몸에 맞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총알은 테리어드의 뺨에 작은 상처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고개를 떨군 비트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경박한 말투를 쓰는 남자가 등장해, 그녀를 죽이지 못한 남자를 매도했다. 노스트라의 상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해서 가짜 스토커까지 준비해 줬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슬프게, 슬프게 결정했다.


  -그 메시지 카드는 당신이 보낸 건가요?

  -아아, 그거? 멋진 러브레터였지? own 소유하다 을 kill 죽이다 로만 바꿔주면 내 진심이 되지.


  I love you. I want to kill you myself.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바로 내가 죽이고 싶어요.

  메시지의 문구를 떠올린 순간 테리어드는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움직였다. 부상은 입었지만,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상대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이런 흉계를 꾸밀 정도니 당연했겠지만, 정면승부에는 지극히 약한 상대였던 것이다. 나이프가 번쩍였을 때 경박한 남자의 목숨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피 묻은 나이프를 잡고 비트의 앞으로 돌아온 테리어드는, 그의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압수했다. 그리고 나이프를 그에게 들이댔다.


  -유감이군요. 당신이 그저 '개인적으로' 날 죽이러 왔다면 죽어줬을 텐데…… 하필이면 헤니르의 손을 잡으려 했다니. 정말 유감이에요.


  "그래서 그 제보자는 어떻게 됐어?"

  "……노스트라의 룰에 따라, '내통자' 로서 처리했습니다."

  "헤에, 죽인 거구나. 그렇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심지어 한 번 죽어줄 생각까지 했던 남정네를 말이지……. 자네는 정말 대단해. 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칭찬이야."


  망연자실한 비트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심장에 나이프를 꽂아넣었을 때, 테리어드는 아주 잠깐이지만 후회했다. 비트를 죽여 버린 것이 아니라, 제이나의 심장을 찌를 때 쓴 나이프를 그녀의 관에 넣어줬던 것을. 제이나를 죽였던 것과 같은 나이프로 생을 마감했더라면 이 욕심 없는 남자는 좀 더 행복하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눈물 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을 옷깃으로 닦아주면서, 테리어드는 '일상'이 끝나버릴 기회를 놓친 것을 아주 잠시, 슬프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존 본능이란 것은 이런 상황에도 남아 있는 것이어서, 테리어드는 증거를 잡으려고 가지고 갔던 녹음기를 그대로 류상에게 제출했다. 비트의 시체는 화장되어, 뼈가 집으로 날라져 왔다. 제이나의 무덤은 언더 시티 내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땅이라도 작게 파고 묻어줄 생각이었다.


  "이번 건으로 자네 오히려 인지도가 올랐어. 보스나 콘실리에리께서 많이 기대하고 계시던데. 자네에 대해서. 그 뭐더라? 청문회 마지막에. '이번에야말로 죽일 생각입니다.' 였던가? 그게 아주 큰 임팩트를 남겼어. 다른 카포레짐들도 자네에겐 두손 두발 다 든 모양이던데."

  "과찬이십니다. 전 진심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진심의 상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건가?"


  무죄를 증명받은 이후, 테리어드는 그 헤니르 조직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하라는 콘실리에리의 요구를 들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비틀어진 '신뢰'만큼은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경호원 연락처로 알고 있던 것은 핸드폰을 폐기했는지 연락이 되질 않는다고 말했다. 콘실리에리는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해린이 헤니르의 조직원이라는 정보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진 이상 그 정보에 대해 알아둘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 진심이 남에게 전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걸요."

  "하하하. 새로운 태클 방법인가? 로맨틱하게 받아친다는 작전? 괜찮은걸? 새로운데? 뭐…… 내가 굳이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자네가 알아서 죽여줄 것 같으니 괜찮겠지. 대신 또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물론입니다, 카포. 명심하겠습니다. 이번 일에선 정말 신세를 졌습니다."

  "나만 자네 편을 든 것도 아니니 나한테만 감사하다고 말하면 곤란한데. 뭐, 다른 카포들에겐 내가 잘 말해두지. 애초에 이런 쓸데 없는 청문회, 내 힘으로 막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귀찮았지?"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카포께 염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저,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은 공론화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카포와 저만 알고 있는 것으로……."

  "그래, 떠들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지. 어소시에이트들한테도 체면이 안 살고 말야. 아, 그런데 우리 집 고양이는 이미 아는데 어쩌지?"

  "……와일드캣에게도 함구령을 내려두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아, 그래? 그거 다행이군. ……하긴, 자네가 알리고 싶지 않은 상대는 따로 있겠지."


  씩 웃으면서 류상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긴 채 먼저 자리를 떴다. 텅 빈 회사 로비에 서서, 테리어드는 류상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라면 입을 다물어줬을까? 그랬을 것이다. 괜히 자신의 카드만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나이프― 어제 비트의 심장을 찔렀다 나온 그 나이프가, 왠지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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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2013. 9. 13. 11:25



        #1. 임시휴업



  펍 근처에서 서성이는 남자를 푸른 시선이 쫓았다. 그러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조심스레 꽃다발을 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 꽃의 색을 확인한 순간 테리어드는 다시 카페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장미 꽃다발. 볼 것도 없이 펍의 가수에게 바치는 꽃다발이다.


  '이게 벌써 몇 명 째지……? 저런다고 저 꽃다발이 전해지는 것도 아닌데…….'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그녀는 괜히 들고 있는 신문을 접었다 폈다 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순간 몇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다섯 시 반.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저 건물 뒤쪽의 대기실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메이크업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테리어드가 왜 몬도 카네 맞은편 카페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홀짝이며 제 펍을 지켜보고만 있는가. 그 답은 펍 입구에 걸린 'Closed' 라는 팻말과 관계 있었다.

  헤니르와의 전면전쟁이 결정된 이후, 그녀는 몬도 카네를 일시적으로 휴점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한 카포레짐의 지시는 '마음대로 하게'. 그래서 사흘 전, 점장을 불러놓고 그녀가 휴점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것은 이미 확정 사항이 되어 있었다. 점장은 석연찮아했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휴가를 주는 방식으로 몬도 카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단골들에게도 편지로 알렸으니, 이곳을 찾아오는 자는 어지간히 수상한 자가 아니면 없는 것이다. ―라고 사흘 전의 그녀는 판단했으나, 의외로 그렇지가 않았다. 벨에게 가지고 오는 꽃다발을 문 앞에 두고 가는 사람은 꽤 많았다. 물론, 테리어드가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그들이 가지고 오는 꽃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거기서 자신의 '목표'를 찾아내려면, 가끔씩 한 번 와 보는 정도로는 안 되었다. 종일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테리어드가 기다리고 있는 '목표'―

  바싹 마른 장미 꽃다발을 두고 가는 남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상해……."

  "예, 예? 뭐가 말씀이십니까, 손님? 저희 집 음식에 뭔가 문제라도……?"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의문을 입밖으로 내뱉어버린 경솔함을 원망하며 테리어드는 커피 한 잔을 더 청했다. 만족한 웨이터가 카운터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다시 펍 앞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시들어버린 장미 꽃다발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 몬도 카네가 폐점하는 사흘 전까지만 해도 대기실에는 그 꽃다발이 왔었다. 꽃다발은 정확히 열세 개가 되었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것과 가장 먼저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버렸다. 집 안에 장미 꽃잎이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장미향을 싫어했다. 그것이 지나치게 여성적이라,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까지 알고 장미 꽃다발을 전달해 온 거라면 상대는 지나치게 고단수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신경을 긁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백이, 아니야……?'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 그녀는 서류들 사이에 끼어 있던 '취조록'을 꺼냈다. 재빨리 훑어보고 자신의 추측을 증명하려던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는 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결국 서류를 집어넣고 전화를 받았다.


  "예, 카포. 티아입니다."




        #2. 취조록



  어두운 방에서 남자는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입가에서 침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 몇 번 물을 쏟아부으니 남자 본연의 모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복부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를 '취조'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 남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 터― 그러나 그들은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에게 있어 진상의 규명 따위는 어찌되든 좋았다. 그들은 그저 상사가 내린 명령을, 불만스레 생각하면서도 충실하게 따를 뿐. 낄낄대고 웃고만 있는 남자를 짜증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던 어소시에이트 한 명이, 그 배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거기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미친 듯이 웃기만 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자, 피에 묻은 장갑을 벗으면서 어소시에이트는 혀를 찼다.


  "이 상처, 어쩌다가 이랬다고 했지?"

  "미스 티아의 보디가드한테 찔렸다나 봐."

  "헤에, 그런 여자한테도 보디가드 같은 게 필요하구나."

  "그런 여자라니?"

  "몰랐나? 노스트라의 상어잖아. 예전부터 난폭하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그…… 스프링이랬나? 건축 기사였는지 뭔지, 그게 헤니르의 말단 조직원이란 걸 알아냈을 때 그 사무실을 초토화시켰잖아. 혼자서."

  "이봐, 서기가 기록하고 있잖아. 어이! 그 기록은 싸그리 지워! 그게 미스 티아한테 들어가는 날엔 네 손톱을 하나도 남김없이 뽑아주겠어. 알아 들었어?"


  서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모든 내용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그대로 옮긴다는 제 사명을 위해서 눈은 남자에게, 손은 키보드 위에 고정한 채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불꽃이 터졌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남자를 보며, 그는 냉정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심문을 해도 얘기하지 않고 제 상처에 손을 쑤셔넣음. 비명 소리가 지나치게 크기에 총살. 마약 중독으로 보이며, 저지른 일은 전부 정신 착란으로 보임.]


  그리고 이하의 '기록'은 테리어드의 손에 들어가기 전 그 방의 어소시에이트들에 의해 한 번 '수정'되었다.




        #3. 리스트



  점점 부를 곡이 사라지고 있군. 한숨을 쉬면서 리스트를 뒤적였다. 꽤 옛날의 팝송부터 쭉 뒤졌는데, 신청곡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합치면 웬만한 노래는 다 불렀다고 봐야 옳았다. 더이상 부를 노래가 없다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뮤지컬 쪽까지 뒤져야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해 뮤지컬까지 뒤지기 시작하면 언젠가 겹치는 곡을 부를 때가 올 것이다. 아니, 잠시 펍은 운영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펜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테리어드는 책꽂이 맨 위에 꽂혀 있는 붉은 파일첩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테리어드가 개인적으로 모은 외국 곡들이 들어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가사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혀를 차면서 파일을 던져놓고 다시 펜을 잡았다. 흩어진 신청곡 쪽지를 날짜별로 정리하고 노트에 기록해서 많이 겹치지 않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번거로웠지만, 쪽지를 관리하는 건 테리어드 자신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문득 이상한 것을 느낀 건 그때였다.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았던 곡이, 리스트에는 물론이고 쪽지로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앨리샤 키스 Alicia Keys의 If I Ain't Got You. 자극적인 사진과 문장을 신청곡 뒤에 써서 보내, 테리어드에게 난폭한 댄스를 요청했던 여인의 신청곡. 그 날의 기념으로, 평소보다 더 엄중히 보관해 두고 있었던 것이나, 어째서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버린 걸까?


  '……설마.'


  혹시나 싶어 쪽지를 보관해뒀던 파일을 다시 뒤졌다. 사흘 전, 스토커가 잠입해 왔을 때의 기록을. 그때 역시 테리어드는 신청곡을 받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신데렐라를 위해서, 끔찍하리만큼 로맨틱한 러브 송을 불러줬던 것이다. 그 곡은 분명히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그 쪽지도 보이지 않았다. 신청곡과 함께 메시지도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해린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큰 위협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것들 중 하필이면 해린이 보낸 쪽지만 사라졌다는 것엔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테리어드에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몬도 카네의 휴점은 엄밀히 말하면 테리어드 자신이 제안한 것이지만, 노스트라에서 그걸 받아들인 것은 몬도 카네의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헤니르와 맞닿은 구역에서 노스트라의 간부가 운영하는 펍. 그리고 그 펍 안에 노스트라의 간부가 숨어 있으며, 전투가 발발하면 언제든지 나와서 대응할 수 있다― 는 것이 몬도 카네의 장점이었으나, 실제로 그 구역에서 헤니르와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테리어드는 제 크루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항구로 나가 있었다. 해린과 있었던 일은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지만 헤니르의 관계자가 제 주변을 떠돌고 있다는 보고를 류상에게 한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점장에게 말한 대로 몬도 카네를 다시 운영하기 위해서는 몬도 카네가 유용하다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위해서라도 서류를 말끔히 정리해야만 했다. 지금 정리하고 있는 신청곡 리스트 같은 것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한 것이고, 운영자로서 파악해야 하는 사항은 꽤 높았다. 수입의 손익 계산, 직원의 고용 현황과 직원의 신분 증명, 그리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온갖 트러블― 예를 들어, 횡령 같은 것.


  '횡령…….'


  테리어드가 몬도 카네를 운영하기 시작한 지 4년. 횡령 사건이 일어난 건 단 두 번 뿐이었다. 한 번은 횡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좀도둑 수준이어서 쫓아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다른 하나는…… 운영자인 테리어드의 바로 옆에서 자신의 연인에게 가게의 수익과 노스트라의 정보를 빼내 갔던 여자의 범행이었다. 물론 그 여자는 배신자로 점찍혀 상부의 명령을 받고 테리어드에게 살해되었다. 자신이 매번 화장을 해주던 여가수가 노스트라의 간부이자 그 펍의 실제 주인이었다는 사실은 아마 죽을 때까지 몰랐으리라. 그녀의 행위 때문에 펍에 찾아온 손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제이나 크롬데른이 남기고 간 것은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누군가가 부정해 주지 않는 이상 절대 변하지 않을 일상.


  "……제이나."


  턱을 괴고, 테리어드는 자신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일을 떠올렸다.




        #4. 시체



  사무실은 피냄새로 가득했다. 익숙한 것이었지만, 유난히 비린 냄새가 났다.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역겨운 자의 피였기 때문이겠지. 테리어드는 웃으면서 칼날에 가득한 피를 제 바지에 닦았다. 그러나 잠시 후 바로 실수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선 여기서 나갈 수 없잖아. 아, 어차피 나갈 수 없나. 이 꼴로는.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는 원래대로의 테리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카락도 얼굴도 옷도 새빨갛게 물들어, 마치 붉은 포도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여자의 모습이 서 있었다.


  "네가 보면 뭐라고 했을까."


  그런 짓을 하면 머릿결이 나빠지잖아! 라며, 버럭 화를 내며 물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줬을까. 화를 내면서, 이런 일은 그만하라고 말해줬을까? 울어줬을까? 자신을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건 그만하라고? 그런 식의 대화가, 그녀를 죽여버린 지금도 가능할까.


  "당신이 보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과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노스트라에 들어온 이후로 대체 몇 명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냐. 지금 이 모습을 보인다 한들 과거에 자신이 한 일들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웃었다. 큰 소리로 웃었다. 사무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시체들 사이에서, 지극히 유쾌하다는 듯.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서 피를 닦아냈다. 완전히 깨끗해진 것은 아니고 겉보기에만 피의 흔적이 사라진 것뿐이지만 일단 밖으로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잠그자 자연스레 냉기가 전신을 덮쳤지만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걸어나갔다.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 시체들을 밟으며 사무실을 나가면서, 테리어드는 천천히 시체의 숫자를 셌다. 총 일곱 명. 그들의 애인이나 가족,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친우들은 서른 명을 훨씬 넘겠지. 그 서른 명 넘는 사람들은 그녀를 죽일 자격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 와 줄 터였다. 분명히.

  이 변함없는 일상에 종지부를 찍으러.

  그녀는 사무실을 나갔다. 다음 날 신문에는 한 건축기사 사무실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가 2면, 3면을 차례대로 도배했으나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꼬박 이틀을 앓아누운 다음날 펍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점장은 왠지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신문을 들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답지 않게 강경한 태도였기에, 테리어드는 자신이 제이나의 복수를 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점장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테리어드로선 알 수가 없었다.




        #5. 결정



  -그래서, 자네는 그 구역도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카포의 명령에 부합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헤니르와의 접전지인 만큼 분명 움직임이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기고에 문제가 생긴 점은…… 저보다는 카포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저는 나설 막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그렇긴 하지. ……좋아. 마음대로 하도록 해. 난 자네를 신뢰하고 있으니 말이야.

  "용인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그리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와 줘야 되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카포의 연락을 받으면 즉시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지, 하는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류상의 전화가 끊겼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몬도 카네의 입구를 다시 바라보았다. 좀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던 덕에 꽃다발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홍색 장미에서부터 백합, 글라디올러스, 붓꽃, 아네모네 등등…… 꽃의 종류는 다양했으나, 바싹 마른 장미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꽃다발들을 품에 안고서, 근처의 맨션으로 향했다. 집 안에 가득 퍼져 있을 지독한 꽃향기에 새 향기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next.



  펍 몬도 카네의 점장, 비트 레이어 Bet Rayer가 테리어드와 계약을 맺을 때 약속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1. 경영권에 간섭하지 말 것

  2. 펍 안에서 일어난 어떤 사소한 것도 보고할 것

  3. 노스트라에서 내린 결정사항에는 반드시 따를 것

  이를 숙지하고 계약서에 사인한 뒤로부터, 레이어는 단 한 번도 테리어드의 일방적인 선언이나 자신을 부려먹는 태도에 불만을 취하지 않았다. 그가 성실하고, 상냥하며,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엔 지나치게 착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테리어드는 언제나 레이어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하려 노력했고, 자신의 꼭두각시가 아닌 '공동 경영자'로 생각할 수 있도록 대접해 주려 했다. 그 노력 덕분에 가게를 꾸려나가면서 이들 사이에 트러블이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레이어는, 한동안 가게를 닫아야겠다고 테리어드가 말했을 때 급속도로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이렇게 물었다.


  -꼭…… 폐점해야만 되겠습니까? 조금만 더…… 열어두면 안 되겠습니까?

  -폐점이 아니라 임시 휴업입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 다시 문을 열 거예요. 조직이 관리하라고 준 펍이니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죠.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을 포함해서 직원들의 월급은 이전과 같은 금액으로 챙겨 줄 생각이에요. 물론 당신을 점장에서 해고하지도 않아요.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다 오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문제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직원들에게 말해두지요.


  그러나 레이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오히려 불안함마저도 느껴지는 얼굴색이었다. 몬도 카네에서 그와 함께 일해 온 것은 4년째였다. 여태까지 레이어가 테리어드의 결정에 그 어떤 불만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지금의 이 태도는 석연찮을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으나― 직장을 잃기 직전에 선 남자의 두려움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아니 '초조함'이 테리어드에겐 있었다.

  '이 일은 신경 쓸 것 없다'는 여유.

  '이 일에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다'는 초조함.

  그녀는 그 판단 때문에 사건이 터지기 전에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를 날려버렸고, 그 대가로 이 일이 있은 지 열흘쯤 뒤 노스트라의 청문회장 한가운데 서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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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피 냄새가 대기실에서 빠지지 않던 그 날. 점장은 테리어드에게 열 한 개째의 꽃다발을 가지고 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말라서 뻣뻣해지고 색이 바랜 장미 꽃다발. 그것은 가수에게 전하는 꽃다발 속에 섞여 있었다고 했다. 바싹 말라버린 꽃다발에서는 짙은 장미 냄새가 났다. 장미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일부러 바싹 말린 꽃을 가지고 온 것을 호의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첫날의 그 카드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테리어드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나 혼자 차지하고 싶어요.

  첫 꽃다발에는 그런 내용이 적힌 카드가 첨부되어 있었다. 미군의 눈을 피해 무기 밀수를 성공시키고, 본의 아니게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된 뒤부터였다. 카드는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로 들어오는 수많은 꽃,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꽃다발 속에 꽂혀 있었다. 그것을 대기실로 날라온 점장도 그것을 받아든 테리어드도 찜찜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받은 선물이 바싹 마른 장미 꽃다발과, 거기 적힌 내용만큼이나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러브레터'였으니 당연했다. 처음 그 카드를 보았을 때 테리어드보다 놀란 것은 점장이었고, 더 안절부절 못한 것도 점장이었다. 그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걱정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증거를 가지고 싸움을 걸어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점장에게 전부 해 준 것은 아니었으나, 헤니르의 관계자가 테리어드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만은 점장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보낸 자가 '그녀'가 아닌가 의심하는 모양이었지만, 테리어드는 바로 고개저어 부정할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그 꽃은 하루에 한 번씩 대기실로 날라져 왔다. 처분해 버리라는 명령을 하지 않아서인지 점장은 우직하게 그 꽃을 대기실로 들고 왔고 테리어드는 대기실 구석에 그것을 쌓아두었다.


  "……난 바보인가?"


  손을 쓰려면 처음 꽃을 받았던 그때여야 했다. 테리어드는 진심으로 후회하며 열한 개째의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피냄새와 장미 냄새가 뒤섞여 대기실은 하나의 가스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꽃다발 옆에 구겨진 반창고 포장지가 있었다. 거기서 테리어드는, 그 반창고를 붙이고 대기실을 나간 여자를 떠올렸다. 이 대기실에 피냄새를 풍기게 한 장본인을.



**



  그 이야기는 꽃다발이 오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그러니까 사흘 전에 시작됐다.


  "미스 티아, 그러고보니 요즘 펍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소매치기를 붙잡았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라뇨? 당신이 점장이잖아요."

  "그, 그러지 마시고. 저는 아무 권한도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권한이 없어도, 손님들에게 지갑을 돌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걱정스런 표정의 점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지갑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지 않을까, 그 실수가 몬도 카네의 영업실적으로 이어지고 직업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직업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험한 건 아닐까…… 등등. 눈앞에 선 이 남자가 대담한 짓을 못 하고 쓸데없는 걱정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테리어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점장'으로 고용한 이유는, 그 성격이라면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일일히 테리어드의 허가를 얻으려 하는 점은 역시 불편했다. 소매치기가 훔쳐간 지갑을 돌려준다고 해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석연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테리어드는 지갑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점장이 잔뜩 안고 온 것은 저마다 꽤 비싸 보이는 지갑들이었다. 몬도 카네에서만 훔친 것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주변은 노스트라의 구역이니 찾아준다면 얼마든지 찾아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리어드는 지갑을 열었다. 연락처를 찾아서 기록한 뒤 심부름꾼을 시켜 전달해 줄 생각이었다. 이 정도 작업은 자기가 해도 될 텐데, 하면서 점장에 대한 불만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삼켰다.

  그러다가 세 번째 지갑을 열었을 때였다.

  그녀는 운명의 장난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지갑 주인은 몇 장이나 되는 명함을 카드 끼우는 곳에 끼워서 갖고 있었다. 전부 한 사람의 명함이니, 그 이름이 바로 지갑 주인일 것이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단 중요한 것은, 그 명함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테리어드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전 그 명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기억에 새겨 넣고 찢어서 버리긴 했지만.

  이해린.

  그 명함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한참을 웃느라, 테리어드는 그 뒤에 적혀 있던 이니셜과 전화번호를 차마 보지 못하고 명함을 지갑에 돌려 놓았고, 그것은 또한― 해린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며칠 뒤 테리어드는 해린을 만났다. 일부러 후안이 일하는 카페로 자리를 잡았으나, 배달을 갔는지 쉬는 시간인지 후안의 그 유쾌한 모습은 눈에 띠지 않았다. 물론 해린이 공공 장소에서 난리를 칠 정도로 무모한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후안이 없어도 괜찮다는 계산은 했다. 그녀가 이곳으로 해린을 불러낸 건 어디까지나 이 카페가 노스트라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해린은 시종일관 매우 불쾌해 보였다.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면 화를 내는 타입일지도 몰랐다. 테리어드가 유쾌한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이전 이 여자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서,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도발을 해 온 적이 있었다.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 사건이 없었더라도 눈앞의 여자에게 쉽게 지갑을 돌려줄 만큼 그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연락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처분하셨으면 될 텐데요. 굳이 연락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 말은 당신이 떨어뜨린 유리구두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군요."


  강하게 나가자, 해린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짐짓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지갑이 어찌 되든 좋았다면, 테리어드가 부른 이 자리에 해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갑이란 것은 그 주인의 신분과 사적인 부분까지 짐작하게 해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안에 들어 있는 신분증은 물론이요, 신용카드로 개인정보도 알 수 있으며 소지한 현금으로는 금전 상황도 알 수 있었다. 신데렐라에게 있어 유리구두가, 왕자님과 자신의 관계를 증명하는 소중한 물건이었듯이.

  신데렐라.

  그녀는 자신을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 그 호칭은 해린에게 더 어울렸다. 해린의 지갑을 가지고 온 소매치기 아이를 추궁해 보니, 어떤 카페에서 해린이 깜박 잊고 간 지갑을 자기가 슬쩍했다고 말했었다. 그녀가 떨어뜨린 유리구두를 주운 사람은 왕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마녀에게서 돌려받으려고 필사적이었어요.

  존재할 리 없는 동화에 한 줄을 추가했다. 이 이야기는 마녀의 승리로 끝날까, 신데렐라의 승리로 끝날까. 잠시 시덥잖은 생각을 하던 테리어드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이 위험한 거래일지도 모른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정체가 어찌되었든, 자신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상대는 헤니르의 관계자였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탓하던 테리어드의 머릿속에, 아직도 품에 갖고 있는 편지의 존재가 떠올랐다. 좀 더 자세한 조사를 해보기 위해 찢어 버리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것. 그리고 눈앞의 여자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기억해 낸 순간 테리어드는 변명을 쉽게 찾아냈다.


  "스토커에게서 나를 지켜주는 것."


  '스토커?' 하고 의아해 하는 해린의 얼굴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노스트라의 관계자를 헤니르의 관계자가 경호해야 하는, 삼류 코미디와도 같은 상황이 펼쳐졌으니까. 하지만 그 촌극을, 해린은 기꺼이 제 몸으로 연기해 보일 생각이었나 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갑 안에 있는 물건을 보지 말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제는 지갑을 돌려받고 싶다는 마음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테리어드도 그 안에 있는 물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갑 자체가 중요했다. 이해린의 물건이라고 인식되어 있는 이 지갑 자체가.


  "그럼 계약은 성립됐군요. 지금이 세 시니까, 다섯 시까지 펍으로 오세요. 사흘 뒤 새벽 2시까지, 당신은 가수로서의 나만 지키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불만스런 표정 하지 말아요. 이 커피도 내가 사는 거잖아요. ……나는 갈 데가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어차피 그럴 기분도 아니겠지만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운터에서 그들을 살피고 있던 종업원이 냉장고에서 마켓 오의 비닐봉지를 꺼내 가지고 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테리어드는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이제 이걸로 점장의 지나친 걱정도 사라지겠지 하는― 그녀 답지 않게 상당히 긍정적인 판단이었다.



**



  사흘간, 끈질기게 꽃만이 배달되어 왔다. 카드가 더 이상 꽂혀 있지 않았던 것이 석연찮았고, 실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경우 스토커의 흔적은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꽃보다는 카드에 더 많이 남아 있으리라. 하지만 사흘 전, 해린을 고용하고 니콜라이의 집에 다녀오면서 그녀는 카드를 버렸다. 같은 것이 또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수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흑장미 다발을 만지작거리는 테리어드의 뒤로 해린이 다가왔다.


  "경호의 의미가 없군요."

  "그러게요."


  그녀의 경호는, 솔직히 100점 만점에 1000점을 줘도 모자랄 정도로 완벽했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예외였지만, 정말 어디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대기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옆에 있었으며, 화장실에 갈 때는 먼저 들어가 상태를 체크한 뒤 들여보냈고 '벨'이 '테리어드'가 되는 그 순간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키는 것은 가수로서의 나 뿐'이라는 테리어드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점장의 걱정도 가뿐히 사라진 듯, 그는 꽃다발을 대기실로 가져오면서도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실력의 경호원을 어디서 데려왔냐며 싱글벙글이었다. 좀 지나친 칭찬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다가 거울 너머로 해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굳어진 표정이 테리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살의를 모를 정도로 테리어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의 얼굴은 경호원이 아니군요."


  나 참. 속으로 칭찬하자마자 이 꼴이라니. 아무래도 해린과는 뭔가 잘 풀리지 않을 운명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리어드의 지적을 해린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만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입니다."


  프로답지 않은 행동을 지적당해 기분이 안 좋아진 건지, 아니면 아직 살의를 다스리지 못한 것인지, 사과하는 해린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하긴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오늘로 해린과의 사흘이 끝난다. 시계를 바라보며 슬슬 나갈 시간이라 생각했을 때 점장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린은 약간 거리를 두어 걸었다. 그녀의 굳어진 얼굴이 어둠 속에 섞여들었다. 지극히 냉정한 경호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해린의 걸음걸이는 마치 로봇 같았다. '나를 지켜라'는 명령을 입력당해, 그것만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가진 로봇. 그런 해린을 보는 건 재미가 없었다. 처음 하루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아이러니를 즐길 수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흥미는 떨어졌다. 오히려 생사를 건 전투에서 나이프를 치켜든 해린이 좀 더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제 적에게 약점을 잡혀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던 그 모습이 더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청곡이 무대로 전달되어 왔다. 종이 위의 단정한 글씨는 이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테리어드에게 지극히 불쾌한 감정만을 상기시켰던 그 필체가, 이번에는 약간의 즐거움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당신의 그림자. 그녀는 내 옆에서 일하면서, 그 시간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바로 피아노 반주자에게 곡을 돌리고, 테리어드는 마이크를 잡았다. 입구 근처에서 팔짱을 낀 해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명과 시끄러운 소리 속에 해린의 마음을 그리 쉽게 읽을 수는 없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난 감상적인 이유로 당신을 사랑해요

  I hope you do believe me

  난 당신이 나를 정말로 믿었으면 좋겠어요

  I'll give you my heart

  난 당신께 내 마음을 드릴 거예요


  I love you and you alone were meant for me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혼자만이 나를 위한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Please give your loving heart to me and say we'll never part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내게 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 말해주세요


  지나치게 달콤한 노래였다.

  해린에게도,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



  "계약은 이제 끝입니다."

  "네, 수고했어요."


  지갑을 건네주자, 해린은 그것을 재빨리 낚아챘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주머니 속에 바로 그것을 넣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별 중요하지 않은 척 하고 있겠지만, 초조해 하고 있다는 게 바로 보였다. 가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계약 종료' 라는 선언에 홀가분해졌는지 해린은 재빨리 대기실을 벗어났다. 세게 닫히는 문을 보면서 테리어드는 클렌징 크림을 잡았다. 화장을 지우고 '테리어드'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경호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지간히 초조했나 보지? 새삼스레 들여다 보지 않은 그 지갑 안이 궁금해졌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헤니르와 어떻게 관계 되어 있는지 증명하는 서류 같은 것은 물론이요, 돈도 그리 많이 들어 있지 않았다(단, 그건 소매치기 아이가 제멋대로 써버려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체 뭘 감추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라던가.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에 테리어드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이해린이 그럴 리가 없었다(애초에 사진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애초에 테리어드는 지갑 안에 그리 중요한 것을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담을 만한 중요한 것이 없었다. 쓰디쓴 추억만을 떠올리게 할 사진은 전부, 언더 씨티 밖에 있는 그 집과 병원에 버리고 왔다. 벨이 그 생을 마감하고 땅에 묻힐 때, 친절한 간호사들이 전부 관 안에 넣어 주었으리라. 어디 있을지 모를 무덤을 파헤치지 않는 한 테리어드에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노스트라에 들어오고 나서는 사진 찍히는 것을 특히 피했고, 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소중한 사람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도, 그저 눈으로만 담았고 마음에만 보관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고 있다가, 테리어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린도 단순히 자신의 물건이 숙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게 싫었을 것이라고, 그런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뒤로 천천히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에 테리어드는 해린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 화장을 지우기 전까지는 경호원. 그 조항을 그녀가 이제야 떠올린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제 눈앞에서 반짝이는 나이프를 보았다.

  큰 소리와 함께 나이프가 화장대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약이라도 맞은 듯 눈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편지의 존재를 떠올렸다. 나이프가 드레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끈이 끊어져 드레스가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침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열렬한 고백을 쓰기에 어디의 문학 청년인 줄 알았더니……."


  어느 쪽이든 받아줄 마음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남자의 공격이 날아오기 전 테리어드는 허벅지에 감춰둔 제 무기를 꺼내려 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한 명의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것으로 남자의 숨을 끊었으리라. 그 상황에 끼어든 해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남자를 밀치고 테리어드의 앞을 막아섰다. 나이프가 휘둘러졌고 피가 튀었다. 그것이 여자의 목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테리어드가 알았을 때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해린의 나이프를 맞고 쓰러진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해린은, 경호원이 아닌 '이해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기실이 엉망이 됐군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왜 미안해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여기엔 무슨 일인가요? 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에 해린은 남자를 처리하기 위해 한 발자국 움직였다. 살려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손을 뻗는데 열린 문으로 점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미스 티아! 다급한 듯 그녀를 부르는 점장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언제나 한 발자국 늦게 나타나는 그에게, 원인을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구급상자를 가져와요."


  점장은 명령에 충실했다. 구급상자를 받아든 테리어드는 해린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얌전히 있어요. '명령'하고 몸을 숙여 피를 닦았다.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해린은 그 시간조차도 불편한 듯 보였다. 해린의 치료까지 직접 해 준 것은, 엄밀히 말하면 보답이었다. 테리어드를 막아서고 스토커를 퇴치해준 것은 일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해린의 호의였다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호의를 보였으니 이쪽 역시 호의로 대답해주는 게 옳다는 생각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다. 목에 밴드까지 붙여 주자 얌전히 있던 해린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듣는 말로는 정말 낯설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해린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청곡 잘 들었어요. ……취소할 수 있었는데도 불러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 말씀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테리어드는 구급상자를 닫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혹은 흔적이라. 절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추측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곡을 선정한 이유를 물어볼까 망설이는 사이에 해린이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린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테리어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작별인사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해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마지막 곡을 다시 한 번 흥얼거리는 테리어드는 아직도 반창고 포장지를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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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그가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감기 탓이라 했다.

  집에서 앓아누워 완전히 못 움직이고 있다는 어소시에이트의 보고를, 그녀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녀보다 17년이란 시간을 더 살아왔지만 그만큼 완전하지는 않은 남자. 삐걱이는 침대 위에 누워서 제 애완동물과 함께 TV를 보고 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아프다'는 키워드 하나만 던져놓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걸 보면 이걸 기회로 오랜만에 푹 쉬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답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에 넣질 않았다. 그랬으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을 사람이었다. 아니면 집으로 구급차를 부르거나. 남자를 알아온 시간 동안, 그가 제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 고생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감기 같은 잔병을 꽤 자주 달고 지내서 병약하다는 이미지를 갖고는 있어도, 그만큼 집에는 비상약이나 동양에서 들여왔다는 건강 식품 등이 빼곡했다. 분명히 약을 챙겨먹고 잘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녀는 그 소식을 가져온 어소시에이트에게 한 장의 쪽지를 건넸다.


  "마켓 오에서 이걸 좀 사다 주세요."


  어소시에이트가 건네받은 쪽지에는 '브라우니 1세트, 바닐라 아이스크림 1통' 이라고 적혀 있었다.



***



  니콜라이는 제법 멀쩡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양복을 입고 있는 테리어드의 모습을 보자, 조직에서 보냈다고 생각했는지 내일부터는 회복될 예정이라는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비겁한 변명이에요, 하고 웃자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침대가 흐트러져 있고 그 위에서 로빈이 자고 있었다. 이 집을 전에 찾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7년 전이었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 있었고, 저 품에 안겨 울었다. 그때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니콜라이에게 들고 온 것들을 건넸다. 처음에는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짓던 그는 봉지를 열어보자 얼굴색이 변했다.


  "오옷, 마켓 오의 브라우니! 난 이 녀석을 살 때마다 우리 집에 전자렌지가 있는 걸 감사하지."

  "그럴 줄 알고 사왔어요. 여기, 아이스크림도."

  "어, 그건 우선 냉장고에 넣어둬. 조금 얼면 먹자고."


  생각보다 집안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다만 TV는 침대를 향해 돌려져 있었고, 그것마저도 예상대로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소파에 앉자 침대에서 자고 있던 로빈이 껑충 뛰어올라 소파 위로 올라왔다. 이 앙칼진 너구리가 그녀와 제 주인만큼은 꺼려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로빈은 제가 고양이라도 되는 듯 그 손에 달라붙었다. 이 아이는 7년 전 일을 기억할까. 제 주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한 여자의 눈가를 핥으려고 덤벼든 일이나, 그 때문에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만 일을.


  "커피 마실래? 아니지, 자네는 홍차 파였던가? 티백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아뇨, 차는 됐습니다. 전 그것만 드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요."

  "그건 아깝지. 기왕 온 김에 팍팍 노동하고 가라고. 브라우니 나눠 줄 테니까."

  "노동이요?"


  그렇게 되묻자 노란 주머니가 날아왔다. 받아들고 보니 홍차 티백이었다. 이어서 테이블 위에 잔이 놓였다. 뜨거운 물만 담긴 머그잔이었다. 할 수 없이 티백을 뜯어 물에 담갔다. 하얀 머그잔 속에 붉은색이 퍼지고, 얼그레이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고급 홍차는 아니었지만 정작 향을 맡아 보니 잔으로 손이 갔다. 이 빠진 부분을 피해가며 입술을 대자, 따뜻한 물에 녹아난 홍차가 참 맛있었다. 로빈은 빠르게 테리어드의 무릎을 지나 주인의 침대로 돌아갔고, 그 침대에 몸을 눕힌 니콜라이가 열에 찬 숨을 뱉었다.


  "몸이 이 꼴이라서 제대로 대접도 못 해주고 미안하네. 저녁이라도 먹으러 나가야 되는데 말야."

  "뭐라도 좀 드셨어요?"

  "적당히 챙겨 먹기는 했지. 아― 하지만 싱크대가 좀 엉망이군. 설거지감이 많아서."

  "그럼 치워두죠."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노동' 하라면서요. 어차피 아이스크림이 얼 때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팔을 걷고 일어서는 테리어드를, 니콜라이는 말리지 않았다. 싱크대가 엉망이라는 그의 말도 거짓은 아니어서, 정신없이 그릇을 닦고 뒷정리까지 하고 보니 방 안엔 색색대는 숨소리만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침대 옆에 굴러다니는 물컵과 약 봉투가 보였다. 그녀가 여기 오기 전에 약을 먹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 옆에 가서 섰다. 남자가 그녀에게 꽃을 갖다 주었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 그녀였다.  그 꽃은 남자가 돌아간 뒤에 간호사에게 꽃병을 받아 꽂아두었다. 살아 있는 것을 자른 꽃이라 당연히 오래 가지는 않았으나, 점점 말라가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침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장난으로 생각했던 '꽃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하는 말이, 진심이었다는 게 기뻤다. 마침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여서 기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남자는,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그 의미는 뭐였을까.'


  뭐였던간에, 테리어드가 바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랑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의 남자의 반응을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전혀 몰랐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면서도, 결코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었던 그녀에게는 조직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의 마피아로서 보내 온 시간에 치이고 주어지는 임무에 온 정신을 쏟아부으면서, 결국은 모든 희망을 완전히 버렸다. 남자에게도 그녀에게도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 상상이 결코 현실에서 재현될 리 없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떤 말도 남자에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으로 좋았다. 변하는 것도, 끝나는 것도 없다. 그러니 평생 마음속에 묻어두고 갈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머그잔에 손을 뻗었다.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두어 짙은 붉은색으로 변해버린 차는, 쓰고 미지근했다. 그래도 남김없이 비우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니콜라이가 일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집 앞을 떠나기 전에 그녀는 품 안에 들어 있던 카드를 한 장 꺼냈다. 며칠 전 흑장미 꽃다발과 함께 대기실로 배달되어 온 장미 모양의 카드에는 그녀를 향한 열렬한 고백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나 혼자 차지하고 싶어요. 그것은 그녀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붉은 글씨의 초대장이었다.


  "정말, 쉽게도 말하네."


  어떻게 하면 그 말을 그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나 어려운데.

  그녀는 손에 든 것을 길거리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구겨져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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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to. The only man of my whole life.











  그날 몬도 카네는 분주했다. 손님들이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점장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화장을 마치고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점장이 하듯 허둥대지도, 당황함을 얼굴에 드러내지도 않았다. 회의에서 그런 말을 꺼낸 이상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점장이 드디어 '귀빈'을 맞이한 것은 첫 번째 곡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양복을 입고 들어서는 여섯 명의 남자들은 차례대로 몬도 카네의 귀빈실로 들어갔고, 맨 마지막에 조금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들어온 그는 점장의 안내를 무시한 채 무대 위의 그녀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화답할 뻔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만두었다. 무대 위에 있는 한 그녀는 노스트라의 미스 티아가 아니라 가수 벨이었다. '위장 직업에 맞는 행동을 충실히 취할 것', 카포레짐이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던 그것을 그녀는 정말 우직하리만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카포레짐에게 보고해 줄 것도 아닌데도.

  첫 번째 곡을 마치고 박수를 받으며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환상이 깨진 양 감쪽같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맨 앞자리에서 자신에게 장미를 내미는 청년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러 주었다. 가수의 서비스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청년의 손에서 장미를 받아 가슴골에 꽂았고 청년은 결국 감격에 겨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런 청년의 모습에 어째서인지 감격보다는 환멸을 먼저 느꼈지만, 예전만큼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무대의 여왕다운 모습으로 돌아가 마이크를 잡고 섰다. 미리 정해둔 반주가 흘러나오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난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I'm thinking of you……. 그 소절을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다.



♂♀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자고 있었던 양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Hello, 하는 그 익숙한 인사에 왈칵 눈물이 났던 건 왜였을까. 발신자가 표시되었으니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련만, 그는 짖궂게도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십니까 Who's there? 하지만 그 짖궂은 질문을 웃음이나 냉정한 대답으로 받아칠 여유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았지만, 짧은 신음은 수화기를 타고 분명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진지해진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닥터 베넷이 해준 전문적인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만큼 정신이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딱 한 마디, 지금 그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도와줘요."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야, 하고 묻고, 정확히 10분 뒤에 택시를 타고 성 버나드 병원 앞까지 왔다. 전화부스를 가만히 열 때까지 그녀는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전화부스 문을 열어준 그는 자신이 왔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택시에 태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찾아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택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하자 복통이 찾아와 아이러니하게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찢어질 듯 아픈 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고통을 어떻게든 감해보려고 팔로 배를 감싸고 몸을 숙이자 재깍 괜찮아? 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으로 돌아갈까요? 하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배가 아프다는 말을 입밖에 꺼내는 순간 그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갈 테고, 다시 닥터 베넷을 만나 수술 날짜를 상의하게 될 터였다. 고집스레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할 수 없이 택시 기사에게 제 집 주소를 댔다. 그녀를 배려한 듯 차는 거의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나아갔지만 배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번 자각한 고통이 끊임없이 그 칼끝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진통제를 대신하는 아스피린이 들어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을 터였다. 다시 한 번,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미소를 떠올린 순간 택시가 멈췄다.

  먼저 차에서 내린 그는 그녀가 앉아 있는 쪽 문을 열었다. 내릴 수 있겠어? 고개를 들어 그가 내민 손을 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슬쩍 움직일 때마다 다양한 부위에서 창이 배를 찔렀지만,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을 뿐 신음이나 눈물은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손을 잡고 간신히 택시에서 내리자 앉아 있을 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자 그가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다급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회갈색 털뭉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너구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너구리는 제 주인이 온 것을 알고 신나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그녀를 보고서는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에게서 희미하게 나는 피냄새를 눈치 챈 것이리라. 대체로 집은 깔끔했지만 방금 갈아입고 나온 듯한 잠옷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발로 대충 그것을 치우고 소파까지 그녀를 안내해준 뒤, 그는 굳어진 얼굴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갑자기 전화해서 울음을 터뜨리다니, 너답지 않잖아."

  "죄송…… 합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뭐, 조직 내에서 너하고 교류가 있는 사람이라곤 나 정도니 그건 이해해. 하지만 몸이 안 좋은 거라면 나한테 의지해도 곤란한데. 기껏 병원 앞에 있었는데 왜 가질 않은 거지?"

  "그건……."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삼키고 그의 녹색 눈동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랬다. 그녀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조언은 필요 없었다. 죽거나 수술을 받거나 하는 두 개의 선택지가 전부였으니까.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을 골라야 할 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을 골라야 더 '이득'인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그저 그 장소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처음 공중전화로 그 병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미안하게도, 밀리아는 갑자기 끊어진 전화 때문에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위급한 환자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을 테고,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 목록을 몇 개 뒤지고 걱정되는 환자들의 무사를 확인한 뒤에야 장난전화구나 하며 웃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심 켕기는 게 남아 있어, 사흘간 잠을 설치게 되리라. 그녀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간호사였으니까. 여하튼, 그녀는 그에게도 뭔가를 바라고 전화를 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병원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그의 전화번호였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그뿐이었다.


  "아― 좋아, 좋다고. 일단 어째서 병원에 갔는지부터 들어보지. 이틀 전, 보스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며 카포에게 와인 맡겼었지? 어째 그때부터 안색이 안 좋다 싶었는데, 그거랑 관계 있어?"


  그의 질문은 꽤 정확한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벌써 희끗희끗해지고 있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곤란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태도였다. 그는 잠시, 그렇다면 더더욱 병원에 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까 병원을 거부했던 걸 떠올리고는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혀를 가볍게 찼다. 그 태도 때문인지 오히려 입을 열기가 편해졌다. 정색하고 이쪽을 걱정하는 표정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 병원에는 다녀왔어요. 그렇게 말하자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조금 색이 변했다. 그는 고개 든 그녀가 아까보다 안색이 좀 더 편해졌음을 알고 눈에 띠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표정이 무색하게도, 그나마 가라앉았을 마음을 순식간에 다시 흔들 만한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데, 자궁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는 놀람조차 표현하지 않았다. 놀란 것이나 경악을 뛰어넘어 아예 굳어져 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는 마치 눈앞의 그녀를 시한부 환자를 보듯 보고 있었다-사실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단 경고를 받았으니 마찬가지겠지만-.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황급히 수술해서 자궁을 들어내면 살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제야 납득한 듯 굳어진 표정을 풀고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이야길 왜 나한테 하나. 그거야말로 의사와 상의해야 할 문제지. 지금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에겐 답할 말이 없었다. 구원을 바랐을 때,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게 무서워서 울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 성격으론 안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는 그녀를 엄청나게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오해할 만도 했다. 제 가슴에 닿은 총구 앞에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던 여자 아닌가. 자신을 죽이겠다 선언하는 남자에게 아무 동요 없이 자신을 살려달라고 한 여자가 아닌가. 사실 그녀에 대한 그의 '진단'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약함과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노스트라에 들어온 순간 이미 그녀의 사전에 실려 있어서는 안 되었고, 그 점을 똑똑히 인식시킨 것이 바로 그였다. 그러니까 그의 앞에서 무서웠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완전히…… 똑같아요."

  "뭐가."

  "벨과…… 제 어머니와, 같은 병이에요."


  어머니.

  오랜만의 호칭이었다. 벨이 자신을 딸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의사'의 입으로 들은 그 날로부터 그녀는 한 번도 벨을 어머니라 칭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벨이 입원한 병원에서 언더 시티로 떠나던 날 그는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간호사들과 벨의 얼굴을 봤지만, 그녀는 벨을 '어머니'라 소개하지 않았다. 제 유일한 가족이에요. 그런 설명으로도 그는 납득해주었다. 아니, 애초에 궁금해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그 때 휠체어에 앉아 있던 가녀린 여인과 그녀가 꺼낸 '어머니'라는 키워드를 연결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벨과 그녀는 쏙 빼닮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비극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이 계속되는 한 그녀를 옭아맬 것이었다. 지독한 연결고리. 얼굴이 쏙 닮은 어머니와 딸. 마치 유전이라도 된 듯 이어진 병. 심지어 살 수 있는 방법까지도 같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신의 장난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우연'은, 마치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가 결코 바라지 않는 운명이었다.


  "나, 아팠어요. 지독히. 얼마 진행되지 않은 나도 그런데, 분명…… 어머니는 더 아팠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런데도…… 벨은, 언제나, 웃고 있었어요. 한 번도 아프다고, 괴롭다고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별 게 아니라고 여겼는데…… 정작 내가 당해보니 무척 아프더군요."


  그랬다. 생리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덮치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목욕할 때 제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르는 걸 봤을 때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분명 이틀 전에 생리는 끝났는데,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낙태의 흔적과 같은 핏자국.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그녀는 제 다리 사이로 부정함의 결실을 토해 내야만 했다. 수술날짜를 잡아 주었던, 그리고 딸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병실 밖에서 기다려 주었던 벨은 그때 울지 않았다. 그 이후 딸과 남편의 관계가 계속되는 걸 알았어도 딸의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아서를 쏘아 죽인 뒤에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러워하는 자의 눈물을 보여줬지만, 그 뒤로부터는 찡그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도둑고양이.

  그 말을 들은 건 벨이 정상이 아니었을 때였다. 벨은 딱 한 번 독기 어린 시선을 보냈을 뿐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딸을 원망하는 말을 던진 적도 없었다. 원인은 몰라도 딸― 아니, 그녀가 울고 있으면 등을 두드려 주었고, 자신과 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면 행복하다는 듯 웃으며 잠들었다. 그 와중에도 벨의 뱃속에는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고통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마냥 자신의 신세가 괴롭고 서글퍼 눈치 채지 못했다. 그 고통을 벨은 몇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안고 있었다. 미소라는 장막으로 교묘히 덮어버린 그것을 그녀는 눈치챌 래야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엄마의 납골당이 어딘지도 몰라요. 미안하다고, 찾아가서 말하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엄마를 두고, 당신을 따라서 이곳으로 왔을 때…… 모든 걸 끊어버려서, 그래서……."


  어느새 제 앞에서 눈물을 흘려버린 그녀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 양팔을 벌렸다. 지금부터 나는 벽이야. 조금 푹신푹신하고 말랑말랑한 벽이지. 눈도 귀도 입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가 가만히 시선을 주었을 때, 그가 퉁명스레 한 번 더 말했다. 팔 떨어지겠다. 그제야 그녀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소파에서 조용히 몸을 기울여, 그의 목에 매달렸다. 쾅. 벽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우는데, 팔이 어깨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벽, 이라면서, 요……?"

  "음, 물론 난 벽이지. 그런데 벽돌의 성분에는 남성 호르몬이 섞여 있다는 걸 몰랐나 봐? 그 녀석들이 우는 여자는 위로해주라고 하는걸. 아, 걱정은 말아. 흑심은 없으니까."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팔은 따뜻했고, 어깨에서는 그의 냄새가 났고, 마음은 차차 편해졌으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이 감정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 건, 그 순간부터였을까.



♀♂



  "저, 미스 티아. '손님' 들이 슬슬 돌아가시려는가 봅니다."


  화장을 다 지운 뒤 가발을 고정한 핀을 떼어내던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점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타이밍도 좋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드레스를 벗었다. 마피아로서의 복장을 갖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평소처럼 단추를 끝까지 채운 단정한 복장은 아니었다. 가슴골 사이에 꽂혀 있는 장미 한 송이 때문이었으리라. 평소라면 그런 것을 끼우고 다니지 않겠지만, 그날따라 왠지 버리기가 아까웠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단정히 빗은 뒤, 그녀는 대기실을 나와 펍 안쪽의 귀빈실로 향했다. 텅 빈 방 안에 그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가 자리를 뜨지 않은 이유는 아직 술잔에 술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자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고 그가 씩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그녀의 입가도 천천히 따라 움직였다.


  "아무리 카포가 직접 내린 명령이라지만 교섭 같은 건 귀찮다니까. 아, 혹시 보고서 대신 써줄 수 있어?"

  "그런 일은 스스로 하세요."

  "너무 그리 차갑게 나오지 말라고. 나는 전에 네 메신저도 해줬잖아. 다섯 시간이나 똑같은 내용을 떠들어대는 건 이제 지쳤다고.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건방지게, 저들 이득만 따지고 드니 말야. 교섭의 스펠링을 알고 있는지나 모르겠어."


  그 투덜거림에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을 뒤로하고 몬도 카네를 나서는 '새파랗게 어린 것들'은 아무리 젊게 잡아줘도 30대 후반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잖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손사래를 치면서 그는, 제 나이가 되어 보면 한 살 차이도 십년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농담처럼 덧붙였다.


  "난 좀 더 빨리 끝내고 술 한 잔 하면서 노래를 듣고 싶었다고. 그런데 저놈들이 이쪽이 제시한 조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지 뭐야. 기가 막혀서."

  "그것도 저희 쪽에서는 최대한 사정을 봐준 게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건방지다고 말하는 거야. 정말이지, 나 같은 늙은이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부려먹는 게 아냐. 근로법 위반 아닐까?"


  원래대로라면 이 즈음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어야 했다. 아직 정정하세요, 하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정말로 피곤해 보였기에, 평소 보여지는 나이보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 전까지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19년이란 나이 차이가, 살짝 변한 표정 하나만으로 제 눈앞에 드러난 것을 알았다.


  "……듣고 싶으시면 불러 드릴까요?"

  "호오,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려고 친히? 그래도 될까? 팬들에게 들키면 곤란하지 않겠어?"

  "괜찮을 겁니다. 폐점 시간이라 아무도 없으니까."


  남자의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실컷 불렀을 텐데도 아직 목이 멀쩡한가봐? 젊은 사람은 부럽구만. 그렇게 낄낄대고 웃는 남자의 태도는 그리 싫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오늘의 마지막 곡은 그녀가 나름대로 남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과 들려 주기 싫다는 마음이 뒤섞여, 왠지 엉망진창인 무대였다. 물론 적당히 술이 들어간 취객들이야 노래 가사나 오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노래였다.

  지금의 그녀가 사랑을 노래하는 다른 여자들과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뜻을 남자가 읽든 읽지 못하든 간에 상관 없다는 것 정도일까.

  남은 위스키를 제 잔에 전부 쏟아 붓는 그를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피아노를 능숙히 치는 남자의 귀에 멜로디가 들리기를 바라면서. It's not so easy to loving me 날 사랑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가 나이 타령을 하면 자신이 받아치고, 핑퐁 볼 같은 대화가 오고가고, 결국 자신이 꺾이듯 대화의 끈을 양보하는, 그런 동료의 선에서 머물러도 좋았다. 오히려 그런 관계가 그녀에겐 편했다. 너무도 짙게 상대를 원하게 되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Don't ask me why I'm crying 내가 왜 우는지 묻지 말아요. 'Cause when I start to crumble you know how to keep me smiling 왜냐면 당신은 내가 부서지려 할 때 날 계속 웃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그의 술잔 속 갈색 액체가 점점 줄어가고, 방에 걸려 있는 시계 초침이 피아노 반주 대신 째깍거리며 움직이고, 노래는 점점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You're gonna save me from myself

  당신은 나 자신에게서 나를 구해줄 거예요

  I know it's hard, it's hard

 난 그게 매우 어렵단 걸, 어렵단 걸 알아요

  But you've broken all my walls

  하지만 당신은 내 모든 벽을 부숴 왔잖아요

  You've been my strength, so strong

  당신은 나의 힘이 되어줬어요, 매우 강한 힘이요

  And don't ask me why I love you

  그러니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지 말아요

  It's obvious your tenderness is what I need to make me a better woman to myself

  분명한 건 당신의 그 부드러움이 나를 좀 더 나은 여자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에요

  To myself, myself

  내게는 그래요, 내게는

  You're gonna save me from myself

  당신은 나 자신에게서 나를 구해줄 거예요


  7년 전 그날부터, 니콜라이 페드로프의 존재 자체가 테리어드 W. 매저즈에게는 구원이자, '사랑'이라는 또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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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조용한 방 안에 잔잔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알람은 설정해둔 적 없으니, 분명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게 분명했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굳이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막 잠에서 깨어나 무척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 새벽 다섯 시에 집에 들어왔다. 몬도 카네에서 나온 것은 펍이 문을 닫는 새벽 2시경이었으나, 이전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무기 밀매 루트에 대한 미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함정을 파는 작전을 위해 사전 회의를 가졌던 것이다. 미리 정해놓은 루트에 함정을 파놓고 일부러 꼬리를 밟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전이었어도 사소한 잘못 하나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테리어드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 결벽증과 비슷한 성격이 여태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피해를 끼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녀는 피곤함을 감수하고 회의에 참여했으며 늦게 귀가해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귀찮다는 듯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하자, 익숙한 숫자의 나열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고 앞머리를 쓸어올린 채, 그녀는 목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입을 떼자 친절하기 그지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귀를 찔렀다.


  "안녕하세요, 성 버나드 병원 산부인과의 닥터 버넷입니다. 오늘이 정기 검사일인 건 알고 계시죠?"

  "아…… 그랬나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자, 오늘 날짜 위에 붉은 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달력을 사서 체크할 때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즘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무기 밀매 루트에 미군이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함정을 판다는 일은, 솔져가 된 지 4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제안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리어드에게 맡겨버린 카포― 류상의 짖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테리어드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닥터. 제가 혹시 예약까지 잡았었나요?"

  "아뇨, 사실 시간을 상의하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날짜는 잡았지만 그 날 시간이 될지 안 될지는 두고봐야 알 것 같다면서…… 그래서, 몇 시쯤 오시겠어요?"


  테리어드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반. 들어온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잤으니 이제 일어날 때도 되었다. 한 시 반쯤, 어떨까요? 그렇게 묻자 수화기 너머에선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때 뵐게요, 하고 전화가 끊어지자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만사 깔끔하고 단정하게 살 것 같다― 는 인상을 받을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 그녀이지만, 사적인 공간은 지극히 깨끗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방이 더러운 건 아니었다. 침대와 소파, TV를 포함해 그야말로 일반적인 '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제품만 갖춰진 집이라, 사실 더럽힐 만한 물건이 없기도 했다. 다만 싱크대 안에 칵테일 잔과 술병이 그대로 굴러다니고 있다거나, 아직 버리지 않은 쓰레기가 현관 앞에 세 봉지 정도 쌓여 있다거나 하는 점은 평소 테리어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시 파출부를 고용할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물론 자신의 집이 그림동화 속에 나오는 '예쁜 집'일 필요가 없어진 뒤로는 파출부 건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그래서인지 그녀는 집을 치워야 한다는 의무감도, 좀 더 깔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질 않았다.

  싱크대에 뒹굴고 있는 컵들 중 아무 거나 잡아서 물로 씻어낸 뒤 냉장고를 열었다. 일주일 전에 산 오렌지 주스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선명한 노란빛이 유리잔에 가득 찼다가, 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 맛을 음미하다가 한 번 더 유리잔을 채웠다. 왠지 신 것이 마시고 싶었다.



-



  성 버나드 병원 산부인과 소속, 닥터 리리아 버넷은, 7년 전부터 테리어드의 주치의였다. 그녀가 마피아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과 노스트라 소속인 것도 알고 있고, 예약 날짜를 잊어버릴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묵인해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거나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둥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하튼, 테리어드에게 있어서는 좋은 의사였다. 오늘도 약속한 한 시 반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는데도 아랑곳없이, 스스로 탄 맛없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테리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요, 하고 싱긋 웃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지시하에 검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처음 이 병원에 들어와 닥터 버넷을 만난 지 7년이 지나 몸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기에,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기 위해 테리어드는 제 몸을 스캔하는 기계 안에 들어가면서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제 눈앞에 닥쳐온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음, 상태는 아주 좋아요. 장기 착상도 순조롭게 잘 되었고…… 이젠 정말 1년에 한 번 정밀검사만 받으러 오면 되겠네요."

  "다행이네요."

  "뭐예요, 남의 일처럼 말하기는.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심한 복통이 오거나 하혈을 하게 되면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해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녀의 진심어린 충고에 테리어드는 미소로 답했다. 그 정도야 그녀가 일깨워주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테리어드에게 있어서 건강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이상 몸을 망쳐서 조직에 폐를 끼치는 것만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전에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는 꼬박 3주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퇴원한 뒤에도 여러 번 병원에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았어야 했기에, 테리어드는 순간 자신이 조직에서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걱정하기도 했었다.


  "일단 처방되는 약을 좀 먹고, 일주일 뒤에 전화로 경과보고를 해 주세요. 그 안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병원으로 오면 되고요."

  "걱정 마세요, 닥터. 벌써 몇 번째 듣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대꾸에 닥터 베넷은 쿡쿡 웃었다. 그야 그렇지요, 하고 대답하는 듯, 여전히 평온한 미소였다. 좀 더 담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테리어드는 그날 다섯 시 이전에 몬도 카네에 도착해야만 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간호사가 다음 환자의 소식을 알리러 와서, 테리어드는 자연스레 자켓을 들고 일어섰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닥터 베넷과 미소로 작별하고 병원의 복도를 걸었다. 또각, 또각, 또각, 하는 힐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간단한 검사였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평소처럼 신고 왔던 하이힐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무시한 채 발걸음을 떼었다. 7년 전 그날, 스무 살의 그녀가 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회색 실선이 그려진 검은 정장에 군청색 넥타이를 매고, 너무 굽이 낮아 소리조차 나지 않는 로퍼를 신고,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목표는 복도 끝에 있는 닥터 베넷의 사무실이었다. 그날 용건은 수술 날짜를 잡는 것이었다. 그 전날 닥터 베넷은, 안색이 창백해진 테리어드의 두 손을 꼭 잡고 최대한 빨리 수술하는 게 좋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가 해준 말은 7년이 지난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수 있었다. 진정해요, 매저즈 양. 분명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당신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해요. 당신은 아직 젊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해요― 누구의 말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공황상태였는데도, 어째서인지 살아야 한다는 닥터 베넷의 간절한 목소리만은 귀에 남았다.

  테리어드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7년 전의 테리어드가 힘없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



  "자궁에 종양이 생겼어요."


  닥터 베넷은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검사 결과를 선언했다. 결과를 들으면서도 테리어드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소리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차트는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 다른 사람의 것일 거야. 자신은 단순한 생리 불순이고, 생리통이 심해지는 건 피곤이 쌓였기 때문이고, 어제 갑자기 대량의 피를 쏟은 이유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제 손만 멍하니 보고 있는 테리어드의 어깨에, 닥터 베넷의 손이 닿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들어내기만 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그런 그녀의 말이 테리어드를 한 번 더,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발끝에서부터 차가워지는 자신의 몸에 테리어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입을 여는 자신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궁을 들어내야만 한다는 말이네요."


  그 말에 닥터 베넷은 정말 슬픈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테리어드가 기대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테리어드는 제 몸이 진창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진득하고 차가운 것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손을 뻗어도 거절당할 것 같았다. 진흙이 눈과, 코와, 귀와, 입을 막았다. 볼 수도 숨을 쉴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살려달라는 말 한 마디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엄청난 절망이었다. 죽는다는 것 이상의 고통이었다. 테리어드는 눈을 질끈 감고,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을 세게 쥐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언더 시티로 이주한다 했을 때 미소를 지었던 한 명의 여인이었다. 테리어드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의 병명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받아야 하는 처방도.


  "진정해요, 매저즈 양. 분명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당신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해요. 당신은 아직 젊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해요."

  "살아야……."


  그렇게 낮게 중얼거린 말에, 닥터 베넷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렇다느니, 기회가 있으니 앞으로 더 살 수 있을 거라느니, 지금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말이 제 환자의 한쪽 귀에서 다른 한쪽 귀로 빠져 사라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환자의 굳은 표정을 걱정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일주일 안에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좋겠군요. 언제 시간이 되죠? 최대한 당신의 시간에 맞출게요. 발견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빨리 상태를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일이나 모레는 어때요?"

  "그건…… 안 돼요."

  "안 된다니, 무슨 뜻이죠? 설마, 수술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바로 그 뜻이다. 테리어드는 주먹을 아까보다 더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닥터 베넷과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매저즈 양,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닥터 베넷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테리어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나이든 여의사의 얼굴에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게 보였다. 매저즈 양, 설마― 닥터 베넷이 그렇게 입술을 열었을 때 테리어드는 닥터 베넷의 진료실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병원을 뛰어나왔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두 개의 전화번호였다. 언더 시티 내에 있는 집 전화번호와, 언더 시티 바깥에 있는 병원의 전화번호. 핸드폰에 단축번호로 등록되어 있는 번호와, 너무나 자주 눌러봐서 외우고 있는 번호. 어느 쪽에 전화를 걸지 망설이던 테리어드는 병원 근처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천천히 외우고 있는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았고, 바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크롬웰 병원 산부인과입니다.


  그 병원은 저주스럽게도, 아직 그 이름을 쓰고 있었다.



-



  벨은 언제나 웃는 여자였다. 제가 남편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온, 그런 웃음이었으리라. 그리고 테리어드는 그녀의 공범이었다. 테리어드에게는 그녀의 웃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모든 과업을 그녀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웃어야 했다. 남편의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던 그날의 그녀는 더이상 없었다. 없어져야만 했다. 이후 자신이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벨은 웃고 있었다. 테리어드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미소를 지었는지. 벨의 뱃속에 잠들어 있는 그 무시무시한 병이, 그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을지를.



-



  내장을 칼로 휘저어 놓은 듯 아팠다. 한 번 '암'임을 자각하고 나니 고통이 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를 악물고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 테리어드는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테리어드가 놓치고 만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상대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로 미뤄볼 때 그녀는, 여성 병동에서 일하고 있던 밀리아인 것 같았다. 벨이 뭔가를 먹다 흘릴 때마다 짖궂게 대답하면서도 손수건을 한 번 움직여 모든 것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재주가 있는, 싹싹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테리어드가 떠나올 때쯤, 두 달 뒤에 원무과 직원인 스미스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으니 지금쯤은 밀리아 스미스가 되었으리라. 미소가 예쁜 여자였기에,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되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순간 동전이 다 떨어짐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전화부스를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테리어드의 머릿속에 있던 환영도 사라졌다. 뚜― 뚜― 뚜― 귀를 가득 메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녀는 잠시 두 팔을 감싸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검은 구름 같은 종양 앞에 테리어드는 무력했다. 그녀는 구원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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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Mission 02.








#1. 


  "그래서,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기려고 해."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새삼. 난 자신이 믿지 못하는 부하에겐 이런 말은 안 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연한 남자의 목소리는 또 골치 아픈 일을 말했다. 전화를 검과 동시에 남자가 보내준 명단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여섯 개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섬뜩하게도 그 이름들을 수놓은 색은 빨강이었다. 막 인쇄되어 나온 종이는 따뜻했고 잉크는 손에 묻어났지만, 테리어드는 굳이 그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개중 두 명은 그녀도 아는 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던 건 와일드캣 혼자인가? 후안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소가 나왔다. 그는 테리어드가 알고 있는 어소시에이트들 중에서도 일을 참 잘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 능력이 가져온 정보와 그로 인해 발생한 상황은 그녀를 한없이 귀찮게 만들었다. 미간이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녀는 무릎 위에 펼쳐뒀던 지도 위에 잉크 묻은 손가락을 얹었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는 이미 바싹 말라 지도에는 묻어나지 않았지만, 당일이 되면 다른 것이 이 장소에 번지리라. 그때의 순간을 머릿속에 천천히 시뮬레이션하면서,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상상했다. '그들'의 비명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찔했다. 심장에 꽂은 칼을 점점 몸 안쪽으로 찔러넣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그녀의 손에 죽어간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와는 4년이 넘게 함께 일하면서,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나 이야기를 잔뜩 함께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죽어가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녹색 눈동자가 가슴에 깊게 남아, 갑자기 가슴을 짙게 짓눌렀다. ―미스 티아.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꾸짖듯 들려오는 카포레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계속 어두운 생각만 하고 있었으리라. 예, 카포.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벽에 걸려 있는 자켓을 쥐었다. 나이프 네 자루가 들어 있는 자켓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웠다. 묵직한 자켓을 몸에 걸치자 나이프들이 서로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그락. 참 유쾌한 느낌의 형용사였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가벼운 목소리가 테리어드의 귀를 스쳤다.


  "자네에게 선물한 나이프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비싸게 구한 거거든."




#2.


  죄송합니다, 카포.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바라보면서 테리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작정 총부터 쏴대는 상대가 눈앞에 있으면 이렇게 사용하는 게 정답이다.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전장'에서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상대였다. 사실, 아직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지 원래대로라면 벌써 질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애초에 타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 임무로 알게 된 자 외의 타인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은 테리어드의 성격상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성격임에도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겐 쉽게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총을 들고 덤벼오기에 방심하고 있었더니 나이프를 던져서 제 어깨에 피를 냈다. 살짝 스친 정도여서 나이프를 휘두르는 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어깨끈이 끊어져 드레스가 흘러내리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제 겉모습을 신경 쓰다간 눈앞의 여자를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 아니었어도 테리어드는 벌써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테리어드가 펍의 가수 벨이라고 증명하는 사진과 필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걸로 자신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안위는 그렇다치고, 이곳― 몬도 카네가 노스트라의 소유라는 사실을 헤니르에 알릴 수는 없었다. 처리하고, 돌아간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도로 홀스터에 돌려놓고, 새 나이프를 꺼냈다. 상대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미소지은 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그녀는 힘껏 발을 내딛어, 앞으로 나아갔다.




#3.


  총성이 컨테이너가 잔뜩 늘어선 부둣가에 울렸다. 아무리 범죄자를 상대하고 있다지만 바로 발포하다니, 미군도 진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을 끌기'는 커녕 오히려 당하고 말지도 모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암담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브로커에게서 무기를 건네받는 임무로 부두에 왔다가 미군을 발견한 지 세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관이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는지 옆에 선 어소시에이트가 그녀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불안을 해소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리어드는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의 어소시에이트를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카포레짐에게서 들은 지령을 머릿속에 되살리며 그녀는 나이프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이런 현장에서 총을 전혀 쓸 수 없는 자신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기서 세 팀으로 갈라진다. 제 1팀은 와일드캣, 네게 맡기지. 몇 명을 선발해서 창고 쪽으로 이동해. 네 임무는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제 2팀은 저격반. 한 사람이…… 그래, 당신이 가서 반대쪽 컨테이너에서 발을 묶도록 해. 모든 타이밍은 내가 지시하지. 제 3팀은 운반을 맡는다."

  "하지만 저격하라고 해도 무기가 없습니다만……?"

  "비상사태니까, 물건 중에 하나를 꺼내 쓰도록 해. 라이플 정도는 다룰 수 있을 거 아냐?"


  평소보다 차갑고 딱딱한 명령이었다. 개의치 않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후안뿐이었다. 그와는 임무를 수행하러 나오기 이전부터 상의했던 것이 있었다. 그가 유능하며, 명령대로 움직여 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 테리어드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아까부터 나이프 대신 꽉 쥐고 있는 핸드폰이 울리기를.

  후안이 어소시에이트 세 명을 데리고 창고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 역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저격이라는 큰 임무를 떠맡게 된 어소시에이트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한심하기는. 오히려 활약할 찬스라 생각하면 될 텐데. 뭐,

  ―애초에 활약할 틈도 주지 않겠지만.

  저격수가 자리를 잡자 후안의 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숨어 있던 무리가 튀어나오면서 일제히 흩어지자, 미군들이 분산되어 그들을 따라갔다. 테리어드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레 테리어드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 티아, 적이 저렇게 흩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불리합니다. 잘못하면 저격수의 위치가 눈에 띨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와일드캣에게 지시를 내려서 저격 시기가 될 때까지 총격전을 벌이는 정도로―"

  "착각하지 마세요. 와일드캣은 내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입 다물고 지켜보기나 하세요."


  차가운 시선을 주자 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앗차 싶어 얼굴을 옆으로 돌렸지만, 상대는 상관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했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약간의 분노도 깃들어 있었다. 저보다 어린데다, 여자인 테리어드의 악의 섞인 명령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리라. 쯧. 테리어드는 혀를 찼다. 어차피 길지 않을 목숨이니 집착은 버리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앗, 하고 두 명의 남자가 혀를 차는 게 들렸다. 위쪽에서는 그들의 동향이 훤히 보였다. 후안 조의 세 사람이 자신들을 따라오는 미군을 따돌리고 다시 창고에 모이는 참이었다. 저게 미스 티아의 작전이었습니까? 하는 질문엔, 아까와 달리 존경심이 섞여 있었다. 테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저것은 후안의 작전이었겠지 하고 생각했다. 부하의 공적을 가로채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점점 이 고착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빨리……."

  "예?"


  제발, 카포.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마침 벨소리가 울렸다. 예, 카포. 그 대답에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리하자고― 그 나른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카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테리어드를 바라보는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는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리라.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집어넣는 것과 동시에 나이프를 두 개 꺼내,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목에 찔러넣었다. 그들의 단말마는 억, 단 한 마디였다.

  정말 짧게도 끝나 버린 그들의 인생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컨테이너 위에서 뛰어내렸다.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혀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를 냈지만 테리어드는 지극히 냉정했다. 창고 안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 명의 표정이 변했다. 숨어서 지시를 내려야 할 최고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 한 사람, 후안만큼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랬다.


  "카포께 연락이 왔다."


  이 말만 해두면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대로, 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한 정 꺼냈다.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어소시에이트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는 걸 보고 테리어드는 창고를 나섰다. 총성을 들은 미군이 몰려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4.


  가까이서 본 해린의 눈은, 적어도 테리어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깔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는 묵묵히 해린의 목을 노렸다. 핏줄이 선명히 드러난 하얀 목에서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피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이 아닌 열. 피가 끓어 얼굴을 붉게 만드는 열기와는 다른. 순간 테리어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직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에 지독히 자존심이 상했으나, 내심 안심했다. 기왕이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분명 테리어드의 머릿속에도 있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지 않은 그 이유가, 자신과 해린에게 있어 조금 달랐을 뿐.

  테리어드는 제 쪽에서 거리를 벌렸다. 해린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띠었지만 생각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두 다리를 벌려 착지하자 드레스 사이로 투척용 나이프가 우수수 떨어졌다. 해린이 테리어드를 향해 총구를 치켜든 것과 나이프 여덟 자루가 한꺼번에 해린을 노리고 날아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5.


  같은 시각, 테리어드의 지시를 받고 저격을 준비하고 있던 어소시에이트는 괜히 주변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지시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10분 정도 몸을 차가운 컨테이너에 밀착하고 있으면 어깨가 삐걱거려서 쏠래야 쏠 수가 없게 된다. 젠장, 그런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는 여자라니.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내며 삐걱거리는 어깨를 살짝 가다듬었을 때였다. 갑자기 강한 힘이 그의 머리를 눌렀다. 윽,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라이플을 놓쳤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줄도 놓쳐버린 셈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를 떠올리려 했다. 미군 중 누구 하나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소리없이 뒤쪽으로―


  "안 되죠. 아무리 저격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자기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언제나 주변에 신경을 쓸 것. ―저격수의 행동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는 제 시선 끝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다. 남자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누른 채 그 몸 위에 걸터앉은 테리어드는 제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댔다. 미, 미스 티아,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는 물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속삭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여기서 죽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분을 밝히고 투항하겠습니까?"

  "시, 신분……?"

  "그래요. 당신의 그, 벌레 같은 조직 이름을 대라는 뜻입니다."


  남자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차가운 나이프가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듯 빛났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잔혹하다. 한 번 정도 같이 일해본 적이 있었지만, 남자인데다 시체를 수없이 봐온 자신도 흠칫 놀랄 만큼의 잔인한 살해 방식을 취했다. 노스트라의 상어. 그 이빨이 이번엔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도 같은 꼴을 당했을 거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6.


  총알이 맞춘 것은 테리어드도 그녀의 나이프들도 아니었다. 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제 옆에 있는, 건물이라면 어디든 설치되어 있는 소화기임을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뿌드득 이를 갈며 나이프를 손에 쥐는데, 흰 연기 속에서 날아온 총알이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튕겨냈다. 이후 해린이 취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왼손을 제 머리로, 오른손을 가터에 돌려놓았던 나이프로 옮겼다. 금색 실을 한 줌 손에 쥔 순간 구둣발이 튀어나와 테리어드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급소에서 비껴나간 곳을 얻어맞아, 테리어드는 벽으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하얀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해린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볼 일 없다 생각했던 적은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테리어드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해린은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들이댔다.


  "이걸로 체크메이트예요, 신데렐라. 이제 어쩔 건가요?"

  "……글쎄요, 아직 체크메이트는 이르죠."


 테리어드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해린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금색 실― 아니, 머리카락? 그 정체를 깨달았어도 해린의 시야는 일순간 가려졌다. 그리고 그 일순간만으로도 테리어드는 충분했다. 틈을 노려 해린의 가슴을 힘차게 걷어찬 테리어드는 벽과 해린 사이에서 몸을 빼어 튕겨져 날아간 나이프를 주웠다. 공격은 적중했으나, 해린의 데미지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까 테리어드가 잘라낸 제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해린의 시선이 잠시 그것을 향했다가, 테리어드의 짧아진 머리카락 끝으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됐네요."

  "미용실에 가서 손질하면 돼요."

  "가발을 쓰시기 편하겠는걸요."

  "그러게요."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의 대화가 오고간 뒤, 총알과 나이프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7.


  테리어드는 시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미군은 저격수를 포함한 네 사람이 투항하자 더 이상 적이 없다고 굳게 믿은 모양이었다. 시간을 벌 때도 후안이나 자신은 뒤에 숨어 있고 되도록이면 그들이 나서도록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입을 모아 이곳에서 무기 밀매를 하던 것은 노스트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직이라 말하고 있을 터였다. 네 명의 증언이면 신빙성이 있다. 만약 배신하고 엉뚱한 말을 입에 올릴 경우엔 당장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들에겐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된 것이다. 후안이 창고에서 사라진 것을 파악하고 테리어드 역시 몸을 피했다. 그 날 임무의 마무리는 류상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뿐이니, 후안은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분명 매우 장난스런 문자메시지를 보냈겠지.

  오늘 임무에는 테리어드와 후안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 중에서 이 비밀 작전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테리어드와 후안 두 사람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테리어드에게 있어 남은 일곱 명 중 믿을 사람은 후안 한 명뿐이었다. 후안을 제외한 여섯 명의 이름은 오늘 아침 테리어드가 받은 명단에, 단 하나의 공통점에 묶여 실려 있었다. 그 공통점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배신자'.

  그 여섯 명 중 네 사람은 다른 조직에서 노스트라에 들어온 스파이였고, 나머지 즉 테리어드가 죽인 두 사람은 원래 노스트라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 좀 더 큰 이익을 위해 제 신분과 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긴, 진짜 '배신자'들이었다. 그것도 노스트라의 가장 큰 적인 헤니르가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은 조직. 후안이 회의에서 보고한 사실들― 미군이 무기 밀매 루트에 주목하기 시작한 일, 몇몇 브로커의 행동이 이상해졌던 일들의 주모자는 바로 그 조직이었다.신분증명서가 든 지갑은 이미 테리어드가 회수한 뒤였다. 아마 두 사람의 시체는 저들의 동료로, 자수하자는 말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한 것처럼 되어 있으리라.


  '……여하튼, 임무 완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오케이 사인이 내려졌어도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바쁠 것이다. 대신 메시지만 한 통 보내놓고 테리어드는 죽은 자들의 지갑 내용물을 꺼냈다. 한 명의 지갑엔 정말 돈밖에 없었고, 나머지 한 명의 지갑엔 운전면허증과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죽인 남자는 자신과 똑닮은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은,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라이터를 꺼내 운전면허증을 태운 뒤에도 테리어드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제이나도 가지고 있었지. 환하게 웃고 있는 남동생의 사진을. 그때도, 그 사진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아들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겨 놓고는, 사진을 찢었다. 사진 조각이 테리어드의 손에서 바람을 향해 흩어졌다. 그 사진도 이렇게 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 청년의 얼굴은 이미 외우고 있는데.

  짧은 체념과 회한을 안고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후안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기 위함이었다.




#8.


  "미스 티아!"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점장의 발소리에 해린은 총을 거두었다. 물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테리어드는 여전히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해린은 정말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품에서 필름과 라이터가 나왔다. 해린의 손끝에서 타들어가는 필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부터 필름을 태웁니다' 하고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무척 눈에 거슬렸다. 물론 그녀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테리어드에게 보내 온 도전장과 사진에 복사본이 없다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이게 문제의 필름입니다. 헤니르에는 알리지 않을 거예요."


  그 말로 적어도 눈앞의 여자가 노스트라와 헤니르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고, 자신의 정체도 알고 있고, 헤니르 쪽에 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도 큰 수확이겠지. 그래서 테리어드는 굳이 해린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해린도 즐거웠다는 말만 남긴 채 깔끔하게 뒤로 돌아섰다.


  "그러니 안심하고 노래하세요, 신데렐라."


  또각, 또각, 또각. 단정한 발소리가 사라지자 테리어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달려온 점장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귀에 닿질 않았다. 신데렐라, 신데렐라라. 해린이 남기고 간 마지막 단어만 반복하며, 테리어드는 제 손에 들린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12시가 지난 지 꽤 됐으니, 이제 마법은 풀렸겠지. 그녀에게 걸려 있던 것은 무슨 마법일까.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는 집으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간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데리러 온다. 하지만 그 왕자가 가지고 오는 것은 유리구두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목숨을 끊어놓을 비수이리라. 사진으로 본 두 명의 소년. 오늘 죽인 남자의 아들과, 제이나의 남동생. 그들 중 누구라도 복수하러 온다면 기꺼이 맞이해줄 생각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얌전히 죽어줄지 아닐지는, 테리어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짧아진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잘라버린 머리에 당연히 미련은 없다. 길게 자란 머리는 동경했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줄만한 상대는 없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목에 닿아, 맥이 그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두근, 두근, 두근. 아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리어드는 나이프를 품 안에 돌려놓았다.


  "It's not dead end……."


  아직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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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Mission 01.







  "그전에 일단 앉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후안을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나름대로 친절을 베푼다고 한 일이었는데, 카포레짐이 앞에 있다 보니 절로 표정을 굳히는 바람에 오히려 더 긴장시킨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눈 딱 감고' 앉으려다가 제 무릎에 앉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눈앞에서 류상과 니콜라이가 웃음을 터트리자, 테리어드는 얌전히 그를 들어 제 자리에 앉혀주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한 웃음이었겠지만, 후안의 표정은 테이블 전체에 흐르는, 미묘하게 긴장된 분위기에 경직되어 있었다. 가엾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솔져가 된 지 4년차인 테리어드는 이제 카포레짐인 류상의 회의 진행 방식도, 가끔씩 치고 들어오며 진지한 농담을 하는 니콜라이의 태도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 이 크루의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괴로움을 지금의 후안도 겪고 있는 것이리라. 긴장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 줘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던 테리어드의 생각을 회의로 돌려놓은 건 류상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우선은 들고양이가 물어온 정보부터 들어볼까?"




**




  "아까는 정말, 정- 말 실례했습니다, 누님!"

  "됐어. 긴장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 ……그리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이제 적당히 코드네임으로 불러줬으면 하는데."

  "에이, 왜 그러십니까. 이 호칭이 더 정감있고 좋잖아요. 아, 싫으시면 그만둘게요!"

  "싫은 건 아니야."


  애초에, 테리어드는 자신보다 어린 존재들에게 꽤나 상냥했다. 정확히는 상냥하게 굴려고 하는 편이었다. 남자를 기피하는 그녀의, 알 수 없는 현상도 사실은 연상의 남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인상이 차가워서 그런 건지 가까이 하려는 존재들은 적었다. 그러니 후안의 이 싹싹한 태도는 그녀에게도 꽤 안심이 되었다. 잠시 테리어드의 옆에 서서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사교성 멘트를 던지던 후안은 테리어드의 잔잔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그럼 용서하신 걸로 아는 겁니다? 라고 말하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테리어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었다. 아직도 스파클링이 선명한 샴페인이었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좋았다. 술이 지나치게 들어가면 사람은 방심하게 된다. 그건 펍에서 4년을 보내면서 테리어드가 얻은 절대적이고, 결코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 가만히 발걸음을 옮기자 드레스 자락이 발목에 스쳤다. 또 이런 불편한 옷을 입게 될 줄이야. 허벅지에 찬 가터와 거기 꽂힌 나이프 세 자루는 무심하게도, 테리어드가 입고 있는 에메랄드빛 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어소시에이트들의 시선을 피한 채 칵테일 잔에 조심스레 입술을 갖다댔을 때, 툭 하고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건드렸다. 칵테일 잔에 선명하게 남은 입술 자국을 장갑 낀 엄지손가락으로 지우면서, 테리어드는 자신에게 이런 복장을 하도록 명령한 직속 상관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쏟을 뻔 했잖아요, 카포."




**




  문제는 산더미 같았다. 후안이 가져온 정보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의 긴장을 풀어주자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테리어드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확실한 건가? 그렇게 묻는 류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무기상을 하고 있는 류상의 걱정은 테리어드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후안의 정보 수집 능력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테리어드는 꼼짝없이 그를 길거리의 소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를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후안 같은 상대에게라면 제아무리 군기가 바싹 선 사람이라도 쉽게 경계를 풀고 말리라. 오히려 그들 크루가 이 정도로 빠르게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이 테이블에서 후안을 의심할 자는 없었다. 류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턱을 괴고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작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준 후안은 입을 가만히 다물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긴장해서 깨물은 듯 약간 부르튼 입술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나중에 립밤이라도 건네 줄까.


  "그럼, 대책을 내어 보지."


  정적 끝에 류상이 입을 열었다. 후안은 한시름 놓은 듯 부르튼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그 역시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빙빙 돌고 있을 터였고, 옆에 앉은 니콜라이 역시 그럴 터였다. 물론 테리어드도 그랬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무기 밀수는 엄연한 범법. 아무리 범법적인 일을 일상처럼 하는 마피아일지라도 '노스트라' 라는 '기업'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것은 금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급한 사항일수록 생각을 정리하는 건 되도록이면 빠르게. ―를 신조로 삼고 있는 테리어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바로 글로 정리해 입을 열었다.


  "이 사안에서 만만히 볼 게 못 되는 것들 중 하나는 브로커와의 접선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우선 무기를 들여올 수 없으니까요. 밀매 루트에 시선을 돌렸다는 건, 이름난 브로커들에게는 거의 감시가 붙어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렇지, 와일드캣 Wildcat?"

  "아, 넵. 그건 거의 확실합니다."

  "게다가 몇몇 브로커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들에게서 정보가 새어나가면, 카포에게 바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배신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감시하에 둘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저희의 영역으로 거래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글쎄. 겁에 질린 토끼가 호랑이 굴로 순순히 기어들어올까?"


  니콜라이의 입에서 나온 반대 의견은, 그의 평소 말투가 그래서 그랬지 결코 비꼬려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나름 선배로서의 충고였다. 그는 어쩌면 테리어드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읽었는지도 몰랐다. 옛날부터, 그런 점에 있어선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입을 떼었다.


  "노스트라 간부들 외에는 누구도, '몬도 카네' 가 노스트라의 소유라는 걸 모르니까요."




**




  "잘 어울려. 역시 명령은 하고 볼 일이군."

  "덕분에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만."

  "자네는 그래도 괜찮아. 우리 크루의 꽃이니까."


  하긴, 가시가 좀 많지만.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테리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상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난끼 많고 기본적으로 웃는 낯을 유지하는 카포레짐은, 테리어드에겐 제일 대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녀가 속한 크루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소시에이트 두 사람을 제외하면 전부 그런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그들끼리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가능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여자인데다 싹싹함을 갖추지 못한 테리어드로선 그들의 화제에 끼어드는 건 조금 어렵기도 했다. 만약 넷이서 노래방이라도 간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탬버린을 치거나 음료수 심부름을 하고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라는 게, 류상이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힘일 터였다.


  "펍에서는 쓸데없는 서비스 정신 발휘하느라고 고생하지? 드레스도 야한 것만 입어야 하고 말야. 뭐, 어울리긴 하겠지만. 일단 지금 이 장소에선 점잔 빼고 있어도 괜찮네. 그러라고 그나마 노출이 덜한 걸로 골라서 입혀 놨으니까."

  "예, 안 그래도 덕분에 목이 다 아프네요. 너무 목을 뻣뻣하게 세워서 그런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지자 핫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은 류상은 잠깐 콘실리에리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언제 들어도 사람 좋은 웃음소리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새로 솔져로 승급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율리아 세스트라, 지아Zia. 공적을 인정받아 어소시에이트에서 솔져가 된 셈인데다, 성별도 같으니 좋은 말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축하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 파티의 주연 비슷한 몸이니만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혹시 날 찾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까 류상이 어깨를 건드렸을 때보다 더 큰 동요였다. 뒤를 홱 돌아보는 바람에 그의 옷에 샴페인을 쏟을 뻔했다. 황급히 잔을 붙잡은 덕에 그 안에 든 칵테일은 단 1mm도 흘리지 않았지만, 니콜라이는 마치 샴페인 날벼락이라도 맞은 양 어쿠쿠쿠, 하면서 과장된 동작으로 뒤로 물러섰다. 놀랐잖아요.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그는 웃었다.


  "이것 참, 실례. 하지만 자네는 젊으니까 말야, 이 정도로 심장 마비를 일으키지는 말아달라고. 드레스 입은 아가씨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그녀는 독을 마시지도 않았고 심장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죽었을까? 우리는 이 사실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알고 보니 그녀의 코르셋이 너무 허리를 졸라매서 질식사한 거였다! ―하는 싸구려 전개는 사양이야."

  "저야말로 갑자기 죽는 건 사양입니다."


  부탁이니까 법의학 드라마 일을 현실로 가지고 오지 말아달라고,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할 뻔했다.




**




  좋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톡톡, 하고 니콜라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지막히 속삭인다고 하긴 했지만, 좁은 테이블에 정적까지 흐르고 있어서 류상이나 후안의 귀에도 들렸을 터였다. 니콜라이는 아까 전,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임시루트를 쓰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낸 참이었다. 후안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금 미군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을 메인 루트를 그대로 이용하는 건 위험하다는 지극히 타당한 판단을 기초로 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테리어드는 방금, 그의 의견에 살을 덧붙여 그 루트 중 하나에 함정을 파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시선을 임시 쪽으로 돌리자는 건가?"

  "예. 저희가 정규로 이용하고 있는 루트를 A, 임시로 이용하는 루트 중 하나를 B라고 치고, A를 통한 거래가 마치 B에서 있었던 것처럼 조작을 해놓는 겁니다. 효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A에 대한 감시의 눈은 어느 정도 사라지겠지요."

  "좋은 방법이지만, B 루트를 A 루트처럼 꾸민다는 건 결국 경찰에게 틈을 보여준다는 소리지? 그를 위해 잃어야 할 손해도 상정하고서 얘기한 건가?"

  "물론입니다, 카포.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류상이 이 제안을 솔깃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니콜라이도 후안도 류상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이것으로 끝내지. 나올 만한 방안은 다 나온 것 같군."


  긍정적이라는 건지, 부정적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답안이었지만, 니콜라이가 이쪽을 보며 씩 웃는 게 보였다. 턱을 괸 채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모양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He means, nothing bad. 나쁘지 않다는 뜻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So do I.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에게 듣는 칭찬은 언제나 그녀의 어깨를 조금은, 으쓱하게 만들었다.




**




  "넥타이가 비뚤어졌어요."

  "아, 괜찮아. 내버려둬. 나이 먹어 잘 차려 입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래봤자 마흔여섯이에요.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아무리 설쳐봤자 나이 든 건 나이 든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누가 들으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아 대화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7년 전부터 그랬다. 새삼스런 일이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어, 하는 말을 던졌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푸석푸석한 피부나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한 주름은 그를 좀 더 심술궂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딱히 그런 성격도 아닌데, 오해가 생긴다는 건 피곤한 일이라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는 말해도 심술궂은 건 맞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꼬투리를 잡아서 놀리곤 하는 성격은, 아무리 익숙해져 있어도 조금 짖궂다고는 생각하니까. 그와 어울려서 임무를 수행하던 7년 동안, 온갖 일이란 일은 다 겪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또한 재미있었다. 괜히 그때를 생각해내자 테리어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충동을 입밖으로 툭, 하고 내뱉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네."

  "뭐야, 그런 드레스 입고? 그거, 여기 있던 거 아냐? 냄새 배면 큰일이잖아."

  "무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그래, 좀 참으라고. 폐암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젊은 애는 오래오래 살아야지?"

  "……암으로는 안 죽어요."


  종양은 이미 들어냈다. 아니, 종양이 자리잡고 있던 부분을 포함한 전부를 들어냈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건, 이곳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그저 자리를 대체하듯 존재할 뿐, 그 안에 무언가를 품을 수도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니콜라이는, 보기 드물게 입을 다물었다. 그 무덤덤한 배려 때문인지 흡연 충동이 더 심하게 들었다. 결국 테리어드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다 비우고는 뒤로 돌아섰다.


  "뭐야, 역시 피우러 가는 거냐?"

  "이만 돌아가겠어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고. 카포에게 먼저 간다고 전해주세요. 로빈에게도 안부인사 부탁하고요."

  "아, 그래. 이 늙은 몸 기꺼이 움직여 메신저가 되어주마."


  잘 가라. 짖궂은 웃음과 함께 니콜라이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다른 재미있는 것을 찾아 가 버린 것이리라. 뒤로 돌아서면서 테리어드는 일단 옆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핀부터 떼어냈다. 장갑을 벗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드레스룸에 몸을 옮겼다. 더 이상 드레스는 입고 싶지 않았다. 진저리가 날 정도는 아니었고 드레스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여자의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조금 다급하다 싶을 정도의 손놀림으로 옷을 척척 갈아입은 그녀는 넥타이 끈을 조이려다가, 손을 놓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 느긋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래, 보는 사람은 없지. 셔츠 위에 그대로 자켓만 걸쳐입고 그녀는 드레스룸을 나섰다. 또각,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 위에 울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 건물을 나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자켓을 열고, 안주머니에 있는 철제 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서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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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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