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30.
荒北靖友x東堂尽八
1. 투닥대는 것도 애정싸움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당장 그거 내놓지 못할까!”
“아, 젠장. 시끄러워! 던져서 부숴버린다!”
“그럼 네놈이 배상해줄 테냐! 돌려줘!”
카나가와 하코네 학원, 줄여서 하코가쿠의 로드사이클 부실은 오늘도 어김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 원인으로 따질 것 같으면 부실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달려들어 제 전리품을 빼앗으려 하는 토도 진파치의 이마를 손으로 밀어붙이며 끝까지 제 전리품을 놓지 않으려 하는 아라키타 야스토모다. 그리고 그런 싸움의 시발점이 누구였냐 하면, 여느 때처럼 연습을 끝내고 부실 한가운데서 타올을 목에 두른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건 토도였다.
“와하하하! 잘 지냈어, 마키쨩?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지? 참고로 나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났다! 평소라면 일곱 시에 일어나겠지만, 아무래도 평소보다 아침 연습을 빨리 시작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응? 왜냐고? 무슨 소리야! 우리의 마지막 결전의 장이 앞으로 사흘 뒤에 펼쳐질 예정이잖아! 나는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어!”
토도 진파치가 본인의 말로는 본인 인생 최고의 라이벌이자 동반자인 마키시마 유스케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 연습을 막 마치고 돌아온 부원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한 칸씩 늘리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자신의 후배들에게도 건네 주지 않는 따뜻한 충고- 예를 들어 하루 세 끼 제대로 챙겨 먹으라거나,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라거나, 연습과 휴식을 균형 있게 반복하라거나 하는 말을 일일이 늘어놓는 토도를 보면 누구나 짜증 섞인 눈초리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전화로 다음 시합에 대한 기대나 라이벌 의식 철철 풍기는 말만 뱉었더라면 다행이었을 것을 마치 보모가 할 법한 충고까지 섞어 말하는 까닭에, 마키시마에 대해 잘 모르는 부원들 중에서는 라이벌에게까지 저런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할 정도로 마키시마 유스케가 게으른가 하는 의문까지 생길 지경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물론 그 모든 짜증의 장본인인 토도 본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들을 어느 하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둔한 사람이었던 탓에 말로 지적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로 지적한다 해서 제대로 들어줄지도 의문이다. ‘천재’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 ‘무신경한’ ‘제멋대로인’ ‘자신의 재능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등등의 수식어가 정확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토도 진파치 아니었는가. 그 탓에 주장인 후쿠토미도 토도의 이 소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터였다. 어차피 말로 해 봐야 들을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임마, 토도! 당장 옷 안 갈아입고 뭐 하는 거야! 시끄러우니까 전화 끊어!”
그러나 그러한 토도에게 유일하게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라키타 야스토모였다. 다만 오늘은 아라키타가 연습장 청소 당번이었던 탓에 그 개입이 평소보다 한참 늦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아라키타가 땀에 젖어 부실로 돌아와 아- 덥다! 를 시전한 순간 부원들은 전부 아라키타에게 기대를 걸었다. 아라키타 선배, 제발 토도 선배 입 좀 닥치게, 아니, 다물게 해 주세요. 그리고 아라키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후배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부실에 들어오자마자 한가운데서 호탕하게 웃고 있는 토도를 발견한 순간 아라키타는 얼굴에 짜증이 난 기색을 가득 띠웠다. 이전까지의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도의 저 소란에 부원 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라키타였을 테니까. 물론 그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뭐냐, 아라키타! 난 지금 선전포고를 하는 중이라고! 방해하지 마.”
“선전포고는 무슨! 그 선전포고 오늘 이 통화로 벌써 서른 번째다! 됐으니까 그거 이리 내놔!”
“아앗, 하지 마!”
이번에는 꽤나 센 방법으로 나선 모양이다. 토도의 손에서 억지로 핸드폰을 빼앗은 아라키타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토도를 손으로 막은 채 수화기 너머의 마키시마에게 미안하니 전화를 끊겠다는 요지의 말을 짧게 건네 놓고 바로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그러한 행동은 전화 상대인 마키시마를 요만큼도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적어도 부원들에게는 구원의 신호탄이었다. 다만 토도가 이 무례한 행동을 그냥 넘길 리 없다는 후쿠토미의 생각 그대로, 이제는 아라키타와 토도의 제 2차전이 시작되었다.
“아앗-!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아라키타!”
“됐으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감기 걸린다고!”
“너무해! 가뜩이나 요즘 마키쨩은 전화하면 잘 받아주지도 않는데! 이것도 간신히 연결된 거였는데! 내놔-!”
“당연하지! 나 같아도 그러겠다! 하루에 다섯 시간 간격으로 전화해 봐, 귀찮아서 받겠냐고!”
“후후, 미안하지만 틀렸다! 내가 마키쨩한테 전화를 거는 건 하루에 세 시간 간격이니까!”
“의기양양햐게 말하지 마, 새꺄! 세 번이든 다섯 번이든 끔찍하다고! 됐으니까 이제 그만해!”
딱 잘라 토도의 반응을 거부한 아라키타는 제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변에서 눈치만 보던 이즈미다에게 잽싸게 떠맡겼다. 곧 토도의 원망스런 시선이 이즈미다에게 향했지만 소용없었다. 운동부 특성 상 선배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후배가 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아라키타가 험악한 표정으로 협박하면-물론 아라키타 본인은 협박 같은 걸 할 마음이 요만치도 없었겠지만-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강심장의 소유자는 하코가쿠에 단 네 사람 뿐이었다. 그 중 세 명이 후쿠토미와 신카이, 토도 세 사람 즉 아라키타와 동급생인 부원들이며,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후배이기는 해도 본인이 워낙 자유로운 탓에 아라키타의 무언의 위협을 요만치도 느끼지 못하는 마나미 산가쿠이니 말 다 한 거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즈미다는 발버둥치며 제게 손을 뻗는 토도를 무시하고 얌전히 아라키타가 손짓하는 대로 토도의 핸드폰을 재빨리 토도의 라커 안에 집어넣었다.
“자, 반항은 이제 끝! 옷이나 갈아입어!”
“자, 잠깐만! 그 전에 메일 딱 한 통만 보낼게! 전화 끊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 되잖아!”
“그건 방금 전에 내가 했잖아!”
“「미안하지만 토도 새끼가 시끄러우니까 이만 끊는다」의 어디에 사과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거냐!”
“마키시마가 귀 병신도 아니고, 그 정도 말하면 알아들어!”
“그러면 다음에 전화 안 받아줄 거 아니냐! 마키쨩과 나의 교류를 끊어 놓을 셈이냐, 네 녀석은!”
“내가 알 바냐, 씨발! 마지막으로 말한다, 옷 갈아입어!”
이제 보모의 포지션은 아라키타 쪽으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아라키타는 토도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마나미 쪽으로 던지고-마나미는 그것을 캐치해 빠르게 빨랫감 더미에 던져넣었다- 아직도 반항의 기색이 만연한 토도의 유니폼 지퍼를 억지로 내리기 시작했다. 꺄악! 하지 마! / 닥쳐! 얌전히 벗어! / 살려주세요! 여기 변태가 있어요! / 그 입 안 닥쳐?! -와 같은, 마치 선량한 여학생을 골목길에서 덮친 변태가 나누는 대화 같은 것이 부실을 가득 메웠다. 물론 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선량한 여학생도 변태도 아닌, 고만고만한 남자 고등학생 두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부실 안의 위기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태반의 부원들은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부실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은 더는 저 꼴을 못 봐 주겠다- 라는 무언의 행동이었지만 어느새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아라키타와 토도에게는 엑스트라 부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좋아, 벗겼다! 마나미, 교복! 교복 갖고 와!”
“어? 제 거요?”
“아, 저 새끼가 또 빡치게 하네. 당연히 토도 교복이지! 넌 발가벗고 수업 들을 거냐!”
“그건 안 돼요. 그럼 감기 걸리는데. 반장도 잔소리 할 거예요.”
“당연하잖아! 얼른 갖고 와! 내가 위부터 아래까지 깨끗하게 입혀 줄 테니!”
“시, 싫어!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갈아입는다!”
“좋은 말 할 때 얌전히 있어라, 토도-? 속옷까지 벗겨버리기 전에.”
“아니, 야스토모. 아무래도 그 대사는 위험하다고 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태클을 걸고 신카이가 마나미 대신 토도의 교복을 꺼내 아라키타에게 건네주었다.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그가 부실을 떠나지 않는 걸 보면 신카이가 이 상황을 말릴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조용히 수업 들어가기는 글렀군. 후쿠토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의 말을 잘 듣는 아라키타지만 ‘이쯤에서 그만하고 들어가자’ 라는 말을 해 봐야 제대로 들어줄 확률이라고는 제로에 수렴한다. 오히려 토도 새끼 편 들어주지 말라고 큰 소란이 일어나면 또 모를까.
“자, 입어! 팔 벌려!”
“위험해, 야스토모. 그거 ‘팔’을 ‘다리’로 바꾸면 엄청 무서운 발언이 돼.”
“넌 입 좀 닥쳐줄래?!”
“아라키타, 너! 후회하게 될 거다! 아무리 내가 아름답다고는 해도 억지로 옷을 벗겨서 몸을 아무렇게나 만지작대다니!”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말고 입어! 얼른! 다 입으면 핸드폰 돌려줄 테니까!”
억지로 토도의 팔을 벌려 셔츠 안에 끼워넣어 주자, 드디어 토도가 반항을 멈추고 얌전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물론 마키쨩에게 메일 보낼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느니, 이러다가 소호쿠의 수업이 시작되면 메일 답장도 못 받을 거라느니 하는 불만은 계속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라키타는 완고하게 그 모든 불만을 무시했다. 결국 토도가 교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땀에 젖은 유니폼을 빨래 더미에 넣고 난 뒤에야 이즈미다가 아라키타에게 토도의 핸드폰을 전해주었고, 그것을 빼앗아들듯 낚아챈 토도는 곧 장문의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메일은 용건만 간단히 해! 하고 마지막까지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아라키타를 보고 이즈미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 토도 선배가 조금 가엾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 새낄 왜 동정해? 내가 이 자식 뒤치다꺼리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어? 고생하는 건 안 좋아요, 아라키타 선배. 가만히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웃기지 마. 나 아니면 누가 이 새낄 챙겨?”
얼굴이 새빨개져가지곤 그렇게 대답하며 셔츠 안에 팔을 끼워넣는 아라키타를 보며 부원들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토도 진파치의 뒤치다꺼리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 맡겨둘 수 없다는 의지나 마찬가지인 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네는 이 녀석한테 손 대지 마’ 라는 으름장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이 보모 다툼은 모종의 사랑싸움인 셈이다. 어느 러브 코미디에서나 볼 법한 기막힌 풍경을 바라보며 부원들은 한 마디, 차마 아라키타와 토도에게는 들려줄 수 없는 자신들의 감상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민폐다…….’
2. 본인들은 감추려고 애를 쓰겠지만 주변인들에게는 들키고 만다
“앗, 마키쨩한테서 전화 왔다-“
여느 일과와 다를 것 없었던 하루가 끝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네 사람의 침묵을 깬 것은 토도 쪽이었다. 그의 철저한 마이페이스는 자신의 그 외침으로 인해 부원들의 시험 공부가 방해당했다는 사실은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에 당연히 불만스런 시선을 던지던 아라키타는 후쿠토미가 보낸 시선- 여긴 공공장소이고 사람들도 많으니 싸우는 건 그만둬라, 는 무언의 명령에 곧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좋을 것을. 신카이는 쯧쯧 혀를 차며 볼펜을 돌렸다. 그러나 역시 아라키타는 아라키타여서, 즐거운 기색으로 당장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토도를 제압하고 이를 갈았다.
“너, 전화 받는 건 좋은데 밖에 나가서 받아. 시끄럽다고.”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야! 후쿠, 하야토, 잠깐 실례. 금방 돌아오겠다!”
“10분 안에 안 돌아오면 잡으러 나갈 거야!”
아라키타의 으름장을 뒤로하고 토도는 재빨리 패밀리 레스토랑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라이벌이 걸어준 전화 한 통이 그렇게나 좋을까. 생각하며 신카이가 아라키타 쪽을 흘깃 쳐다보니, 방금 전까지 풀고 있던 수학 공식을 마치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 없다는 건 아라키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저 무서운 눈빛의 원인은 아마 다른 데 있으리라. 결국 아라키타는 볼펜을 세게 쥔 채 자리에 엎드려 젠장, 이라고 중얼거렸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야스토모.”
“시끄러워. 수학이 더럽게 어려워서 그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풀고 있었으면서?”
“아, 어렵다면 어려운 거지 뭐 말이 그리 많아. 갑자기 안 풀린다고!”
그럴 법도 하지. 신카이는 폭소하고 싶은 기분을 뒤로 제쳐두고 아라키타가 자리에 엎드린 채 공책 위에 무언가를 잔뜩 써갈기는 것을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들이 보면 엎드려서라도 문제를 풀고 있는 거라 착각하기 십상이었지만 아라키타가 휘갈겨 쓰고 있는 것은 태반이 욕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차마 후쿠토미 앞에서는 그보다 심한 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잔뜩 욕을 퍼부어 주고 싶은 욕망은 전부 죄없는 공책이 떠맡았다. 간혹 보이는 ‘토도’나 ‘마키시마’ 등등의 단어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토도가 공부하던 도중 마키시마의 전화를 받고 뛰쳐나간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네가 이해해, 야스토모. 메일 답장도 제대로 못 하는 유스케 군이 전화를 걸었는걸. 기쁜 게 당연하지.”
“그게 왜 당연해? 네 말대로 메일 답장도 제대로 못 하니까 전화로 하는 거지.”
방금 그 말로 아라키타는 자신이 불쾌해진 원인이 수학 문제가 아니라 토도 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지만, 그 말을 부정하느라고 튀어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인정해 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세상에, 그 아라키타 야스토모가 말이지. 후배들, 특히 쿠로다가 봤더라면 아마 기절했을 게 분명했다. 세상에 자전거와, 에이스 어시스트로서의 역할과, 기인 비율이 높은 하코가쿠 로드사이클부의 유일한 잔소리 담당이라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아라키타 야스토모가 고작 전화 한 통에 기분이 상해 투덜대는 모습이라니. 물론 신카이나 후쿠토미 같은 이들은 아라키타의 이러한 ‘특이함’ 을 진작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태클도 걸지 않았지만. 그리고 아라키타의 그러한 상태는 토도가 자리로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댈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귀환했다! 어떠냐, 아라키타! 정확히 10분이다!”
“웃기고 있네. 통화 시간이 10분이지! 네가 자리 뜬 시간까지 따지면 10분 넘었어!”
“고작 10초 20초 차이로 그럴 거냐? 쪼잔하다, 아라키타여!”
“닥쳐!”
그렇게 말은 해도 아라키타는 토도가 돌아오자마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켜더니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토도가 돌아올 때까지 일부러 자리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라키타는 감춘다고 했겠지만 신카이의 눈에는 아라키타의 핸드폰 화면에 스톱워치 어플리케이션이 떠 있는 것이 똑똑히 들어왔다. 이쯤 되면 훤히 보여서 괴롭다니까.
“아, 아라키타. 갔다 오는 김에 내 몫의 커피를 부탁한다!”
“네가 갖다 드세요, 좀!”
“기왕 일어서는 김에 갖다 주면 어디가 덧나는 거냐!”
“그럴 거면 전화 끊고 올 때 갖고 오면 좋았잖아! 왜 사람을 부려먹어!”
“아라키타, 여기 공공장소.”
다시 언쟁으로 번지려는 두 사람을 후쿠토미가 빠르게 중재하고 나섰다. 후쿠토미는 이제껏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아무리 많이 봤어도 부실에서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으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공공장소라는 점은 역시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후쿠토미의 중재는 아라키타에게 아주 빠르게 먹혀든 듯, 아라키타는 아무 불만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드링크 바에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토도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왜 그래, 진파치? 더워서 그래?”
“그런 게 아니야…….”
“조금만 참아라.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얌전히 자신을 달래는 후쿠토미의 말에 엎드려 있던 토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짝 부루퉁해 있는 그 얼굴은 아라키타에 대한 원망과, 그리고, 후쿠토미에 대한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신카이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점은 곧 토도가 우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로 증명되었다.
“후쿠는 좋겠다. 아라키타는 내 말은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고.”
“뭐, 그건 주이치가 주장이니까.”
“아라키타는 아마 후쿠가 주장이 아니었어도 순순히 말 들었을 걸.”
“그건 부정하기 힘들군.”
사실이 그러했다. 폭주하면 토도만큼이나 시끄러워지는 아라키타를 중재할 만한 재목이라고는 하코가쿠 내에서는 후쿠토미밖에 없을 터였다. 신카이는 괜히 말리려 나서다가 아라키타의 화를 돋구는 역할이었고, 마나미는 너무나도 천연이라 애초에 도움이 안 되고, 다른 후배들은 아라키타가 소란을 피울 때 그 사이에 끼어든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라키타가 폭주하는 가장 큰 원인일 토도는 애초에 논외. 확실히 토도는 지나칠 정도의 마이페이스로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으나 적어도 눈치는 있었다.
‘뭐, 그런 주제에 유스케 군 때문에 야스토모가 화를 내는 건 이해 못 할 것 같지만 말이지…….’
어찌됐든 신카이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토도가 하는 것처럼, 볼펜을 집어 죄없는 공책에 아라키타의 이름을 마구 써갈기는 모습 같은 거 말이다. 어째 방금 전 야스토모가 하던 행동이랑 똑같지 않아? 공책을 서로 보여주고 싶어진다니까. 큭큭 웃으며 신카이는 잠시 후 토도가 마실 커피를 타 온 아라키타와, 그 커피가 아이스커피가 아니라며 화를 내기 시작하는 토도를 흥미 깊게 지켜보았다. 다시금 벌어진 두 사람 사이의 언쟁을 말릴 재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다문 후쿠토미는 제 몫의 야채 주스만 홀짝대며 제 과제인 작문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신카이는 그런 후쿠토미에게 시선을 돌려, 아라키타와 토도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물론 평소처럼 말했어도 두 사람은 전혀 눈치 못 챘을 테지만-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 주이치? 야스토모랑 진파치 말야.”
“……부 내의 연애관계를 막을 권한은 주장에게 없으니까.”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해?”
“으음. 아마 저 둘은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뿐이기만 하랴. 그들은 아마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줄다리기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을 터다. 겉에서 보면 서로에게 있어 서로를 제외하고 소중한 다른 사람- 즉 마키시마나 후쿠토미에게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데도. 물론 마키시마나 후쿠토미는 그들을 갈라놓을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테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사랑에 빠져 버린 두 사람 뿐이겠지. 끌끌 혀를 차며 신카이는 제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알아서 해라.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여.
3. 고백부터가 이 모양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라키타, 여자 소개시켜 줄까?”
“아앙?”
이 머저리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라키타는 짜증 섞인 기색으로 제 침대에 앉은 토도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아라키타의 방에 쳐들어온 토도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마시면서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보통 남학생들은 눈길도 안 줄 법한 소녀 취향의 잡지다. 분명히 그 안에 ‘남자친구를 사귀는 법’ 이라거나 ‘이런 남자, 인기 없다!’ 등등의 특집이라도 실려 있었던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토도가 저렇게, 자신이 가여워 견딜 수 없다는 목소리로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 라는 말을 할 리가 없다.
“필요없어.”
“글쎄, 필요할 거 같은데. 괜히 빼지 말고. 그러다가 올해도 동정으로 해를 넘긴다!”
“아, 쓸데없는 참견 마셔!”
“뭐냐, 동정이라는 점은 부정 안 하는 건가.”
“사돈 남말하시네!”
“아, 물론 나는 동정이지. 지금은 자전거가 제일 좋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 미형을 봐라! 나는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겠지만, 가엾게도 네게는 가능성이 제로다! 이 내가 소개시켜 주지 않은 한은!”
“웃기고 있네. 죽어도 네 도움은 안 받아!”
닥치고 잡지나 계속 보라고. 으름장을 놓고 아라키타는 TV 채널을 마구 돌려댔다. 연애 드라마에, 연예계 뉴스에, 농구 시합. 이야기를 돌릴 만큼 재미있는 내용은 어느 하나 없다. 결국 아라키타는 맨 마지막 채널의 농구 시합에 채널을 고정해 놓고 다 마신 펩시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애초에 자신이 동정으로 고등학교 3년 생활을 졸업하든 말든, 토도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 토도 진파치는 팬이 많다. 그 팬의 팔할은 여학생들이다. 같은 남자 입장에서 보면 짜증나는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이지만, 여학생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드러나는 그의 진면목 말고도 인기를 끌 만한 요소가 많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토도 본인이 자랑하듯-물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외모도 그렇고, 여자를 대하는 매너 있는 태도도 그렇고, 신카이가 ‘팬 서비스‘라고 부르는 온갖 제스쳐도 현란하게 해낸다. 지금이야 토도 본인 말처럼 자전거를 타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에 여자 사귀는 일 따위에 집중하지 않으니 여자친구가 없는 거겠지만, 언젠가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여학생을 옆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거닐 게 뻔했다.
그리고 아라키타는 그런 토도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아라키타.”
“아, 뭐야 또! 시끄럽게 떠들 거면 니 방에 가서 혼잣말이나 하셔!”
“여자가 싫으면 말이야.”
“누가 여자가 싫대? 니 신세지는 게 싫다고!”
“내가 대신 사귀어 줄까?”
아마 지금 토도의 말을 비유하자면, 그거다. 자판기에서 뽑아 가지고 온 펩시를 마시려고 딴 순간 그 내용물이 얼굴 위로 튀어오르는 상황. 그 발언은 그 정도로 아라키타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덕분에 아라키타는 토도의 그 제안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세게 맞받아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저 멍한 얼굴로 침대 위의 토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뭐냐, 그 표정은. 이 아름다운 토도 진파치님이 사귀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무, 뭐, 뭐,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그런 농담은 신카이한테도 안 통해!”
“농담 아닌데.”
“뭐어?”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인 걸까. 농담이 아니라고? 엉? 제대로 일하고 있냐, 내 귀?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토도의 말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토도의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었으니 또 그랬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평소의 왁자지껄하고 짜증나기 마련인 토도 진파치 그대로인데, 얼굴만큼은 자전거에 타고 있을 때만큼이나 진지하다. 상대 팀의 어택을 눌러버리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페달을 밟을 때의 바로 그 표정인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상대가 그 토도 진파치라는 것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얼굴. 어느샌가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여, 도저히 뗄 수 없게 만드는 얼굴.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라키타의 다음 고민은 토도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로 넘어갔다. 여자를 만나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가, 싫다고 하자 자기는 어떻느냐고 물었다.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라는 말은 마치 아라키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처럼.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아라키타가 자기 제안을 받아들이면 팬 중 아무나 소개시켜 준다. 아라키타가 자기 제안을 거절하면 자신과 사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토도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그 청사진을 생각하자, 솔직히 말해 열이 받았다. 그러니까, 뭐냐? 지금 날 시험해 봤다 이거야? 날 떠봤다고? 순식간에 사고가 그리로 뛰어넘어간 아라키타는 침대 위로 뛰어들어 토도의 멱살을 세게 붙잡았다.
“웃기지 마, 이 자식! 지금 누구 놀려?”
“놀린 게 아니라 진심인데.”
“진심은 개뿔!”
“하지만 아라키타, 넌 날 좋아하잖아.”
순간 토도의 얼굴을 치려 날아가던 아라키타의 주먹이 허공에 멈추었다.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인 걸까 그 두번째. 하지만 아라키타가 놀란 진짜 원인은 토도의 말이 뜻밖이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아라키타는 토도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의문에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알고 있었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하면 너고, 마키쨩이랑 전화 하고 있으면 무시무시한 얼굴로 끼어들어서 끊으라고 그러고, 연습 끝나면 바로 타올 갖다바쳐서 매니저 할 일을 없애고, 내가 방에 쳐들어와도 짜증만 내지 내쫓지도 않고, 결국 자러 가기 전까지 같이 있어주고.”
“무, 무슨 헛소리야.”
“그만 인정하지 그래. 네가 날 지나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 마나미 빼고 다 알 걸.”
그 녀석은 언덕밖에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고 토도는 제 멱살을 잡은 아라키타의 손을 떼어놓았다. 망연자실한 채 다시 토도의 손을 잡을 생각도 못 한 채 아라키타는 눈만 깜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씨발. 망했네. 그러니까 지금, 다 들켰다 이거지? 그리고 이 자식은 그걸 다 알면서도 여자를 소개시켜 주니 어쩌니 하는 말로 사람 빡치게 만들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귀어 주겠다는 소리나 지껄였다 이거지? 씨발,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인 거야!
“그러니까 사귀어 주겠다는 거다, 아라키타. 순수하게 기뻐하면 어때?”
“동정은 집어쳐라…… 나 지금 기분 엄청나게 더럽거든.”
“왜 그게 동정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당연하잖아!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안다는 새끼가 여자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을 해?! 그게 나랑 사귀고 싶다고 지껄인 녀석 입에서 나올 말이냐?!”
“그야 난 너한테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야. 다짜고짜 사귀어 주겠다고 말해봐야 부끄러워하면서 피할 게 뻔한데? 그런 손해보는 짓은 안 해. 난 확실한 게 좋으니까.”
“그래서 지금 나보고 네 헛소리를 믿고 감동의 고백씬을 연출하라 이거냐? 씨발,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흔들렸다. 토도가 기댄 벽을 세게 내리친 아라키타는 덤덤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토도에게 이전까지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을 담은 시선을 던졌다. 토도가 저 정도까지 말했으니 아마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쭉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람을 떠보는 말과 함께 그 사실을 지적해 왔다. 씨발, 잔인한 새끼. 사귀어 주겠다는 말 해봐야, 진심도 아닌 주제에. 사람을 실컷 휘둘러 놓고, 일희일비하게 만들어 놓고, 더 빠지게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 않게 발을 뺄 새끼가. 장난이라면 그 질이 심각하다.
“개새끼…….”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건, 그런데도 토도 진파치를 ‘싫어한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아라키타 야스토모 자신이었다. 그래, 씨발. 좋아해, 좋아한다고. 입부했을 때는 솔직히 이 짜증나는 새끼는 뭔가 싶었지만, 그 생각을 완전히 깨부술 만한 능력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걸 보고 정신이 나갔지. 곧 삿대질을 하면서 지 자랑을 하니까 한 번 걷어차 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다시 네 클라이밍에 넋을 잃는 내가 있었어. 헬멧을 벗으며 크게 웃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리다가도,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매달려 오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씨발, 씨발, 씨발! 난 이런 적 없었단 말이다. 단 한 번도. 야구에, 자전거에, 그저 그것만 보며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런 걸 알아 버린 거야. 왜. 왜 내 심장을 지배하는 건 네 클라이밍이고,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건 네 웃는 얼굴이고, 내 심장을 아프게 만드는 건 날 부르는 네 목소리냐고. 왜 하필이면 토도 진파치야. 자전거에 미쳐서 나 따위는 결코 돌아보지도 않을 새끼한테. 너도 너야, 토도. 왜 그런 말을 해. 왜 사귀어 주겠다는 말로 사람 머릴 복잡하게 만들어. 산신은 산신으로 있어 주면 좋았잖아. 거기 경외심을 느끼는 한낱 인간한테, 왜 손을 뻗으려고 들어. 개새끼가. 나쁜 새끼가.
“아라키타.”
“하지 마.”
“내 말 들어, 아라키타.”
“씨발, 내가 하지 말랬지. 그 자랑스런 얼굴 물어뜯기고 싶냐?”
“네 마음을 안 것만으로 사귀어 준다고 말한 거 아니야.”
“그럼 뭐.”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해봐. 그럼 내 대답도 들려주지.”
“내가 미쳤어? 난 너 같은 새끼 안 좋아해. 자뻑도 적당히 해라.”
“눈물 줄줄 흘리면서 그런 말 해 봐야 설득력 없는데.”
진짜 미쳤나 보다. 울기는 왜 울어, 저딴 새끼 말 하나 때문에. 아라키타는 황급히 제 얼굴을 팔로 문질렀다. 어느새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쪽팔렸다. 그간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낸 것도 모자라서 울기까지 하다니. 그것도 저 토도 진파치 앞에서. 대대손손 쪽팔린 에피소드 제 1호로 길이 남을 거 아냐, 씨발.
“아라키타.”
부르지 마, 개새끼야. 가슴 설레니까.
“날 좋아하지?”
묻지 마, 망할 새끼야. 다 알고 있으면서.
“아라키……,”
“씨발, 그래! 좋아한다! 존나 좋아한다고, 됐냐? 내가 돌았지, 어쩌자고 너 같은 새끼한테 홀랑 빠져서는! 씨발, 안 해! 잊을 거야! 너도 잊어버려!”
“그건 싫은데.”
그렇게 말한 토도가 아라키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순간 뭔가가 와 닿았다 떨어졌다. 그것이 토도의 입술이라는 데 아라키타는 제가 방금 마신 펩시를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라키타에게 살짝 입맞추고 손을 뗀 토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있잖아, 아라키타. 이상하게 난 언제부턴가 네 시선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더라고. 어느새 마키쨩에게 전화할 때면 네 앞에서 하게 되고, 네가 나한테 타올을 줄 수 있도록 일부러 네 가까운 곳에서 연습하게 되고, 매일같이 네 방에 쳐들어오게 되고, 같이 있다 보면 내 방에 돌아가는 게 싫어져.”
“그래서 그게 뭐.”
“둔한 것도 어지간히 해둬라. 내가 널 좋아한다는 얘기라고.”
이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 당장 철회한다.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인 걸까 그 세번째.
“……좋아한다고?”
“그래, 이 멍청한 놈아. 못 믿겠으면 또 한 번 말해줘?”
“니가 날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도는 아라키타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는 토도의 뒷모습을 바라볼 생각도 못 하고 아라키타는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서도 나와 사귈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이 얘긴 없었던 걸로 해.”
달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가버린다. 토도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라키타는 침대에서 튀어올라 문을 열고 나가려는 토도를 잡아끌었다. 말이 좋아 잡아끈 것이지, 거의 낚아챈 거나 다름없었다. 토도의 팔을 잡아당겨 제 품에 가둔 아라키타는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심장이 뛴다. 미친 듯이. 인터하이 레이스를 다섯 번은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매우 열이 받는 건 토도의 심장에서는 저와 비슷한 소리가 전혀 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씨발, 이 새끼 나 좋아한다고 한 말 거짓말인 거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끌어안겼으면서 왜 반응이 이래. 이를 갈다가도 아라키타는 토도를 끌어안은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글렀다는 걸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토도.”
“음.”
“좋아해.”
“알아.”
“사귀자.”
“그래.”
정말 멋없는 고백과 정말 멋없는 대답이다. 정말, 정말로. 연애 소설 같은 거라도 좀 읽어 둘 걸. 엄청 로맨틱한 말로 상대를 감동시키고, 심장 박동수를 올려서,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에 키스해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적어도 아라키타 야스토모와 토도 진파치 사이에는 그런 로맨틱한 분위기는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글러먹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고백을 받은 시점에서 이미 폼 잡을 분위기는 작살난 것이다. 아라키타는 토도를 놓은 채 그에게 등을 돌렸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토도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 오늘은 내 방에서 자고 가라.”
“음, 그건 좋은데 동정 탈출은 좀 더 기다려라. 뭐니뭐니해도 이 나는 마키쨩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있으니까 말이야. 만전에 만전인 상태로 임하지 않으면 마키쨩한테 실례지!”
아, 이 새끼가 뭐래. 순식간에 달콤한 분위기가 작살났다. 고백하고 고백받은 지 고작 1분만에 다른 남자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짜증이 차올라 토도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라키타는 그의 얼굴 가득한 당당함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씨발, 너 역시 나보다 마키시마가 좋은 거지?!”
“무슨 소리! 너하고 마키쨩을 비교할 수 있을 리가!”
“그게 뭐야?! 너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새끼 맞냐?!”
“당연하지! 자전거와 사람을 비교해서 어따 쓰겠나!”
“……네 안에서 마키시마는 자전거랑 동급이냐……?”
“바로 그렇다! 미안하지만 평생 마키쨩은 이길 수 없을 거다, 아라키타! 왜냐면! 그 남자를 이기는 건 바로 이 몸이기 때문이지!”
아, 글렀다. 글러먹었다. 평소에는 저 새끼 입에서 마키시마 이름이 나오는 게 짜증나서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다 귀여워 보여. 고백 때문에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씐 모양이다. 이마를 짚고 한숨처럼 킬킬 웃음을 흘린 아라키타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토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런 반항 없는 토도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 불을 끈 아라키타는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려는 듯한 토도를 다시 침대에 메다꽂았다.
“아, 아라키타! 네놈은 사람 말을 들은 거냐! 동정탈출은 인터하이 뒤로 기다리라니까! 난 마키쨩과 진검승부-”
“아-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됐으니까 오늘은 얌전히 이렇게 자!”
으름장을 놓고 토도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아라키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완전한 어둠에 파묻히자 그제야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조심스레 제 등을 끌어안는 토도 진파치의 왼쪽 가슴에서 들려오는,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크기의 심장소리. 이런 상태에서 얌전히 잠만 자라는 건 정말 고문이다. 폭주하기 직전인 제 이성을 끝끝내 억누르며 아라키타는 멍하니 생각했다. 인터하이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일주일. 더럽게 길게 지나갈 그 일주일 동안은 어떻게든 참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씨발…… 넌 인터하이 끝나면 죽었어…….”
“……부디 살살 해주길 바란다.”
“꺼져.”
아, 됐어. 뭐 어때. 이 새끼가, 토도 진파치가, 날 좋아한다는데.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런 생각에 절로 흐뭇해져서 끅끅 웃는 아라키타의 웃음소리에, 토도가 기겁한 듯 “미안, 아라키타. 네 웃음 소리 더럽게 기분 나쁜데, 역시 방에 가서 자도 될까?” 라는 소리를 해 끝끝내 매를 벌고 만 건 그날 밤의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
제목은 걍 그대로.
왠지 페달을 쓰게 되면 하나같이 제목을 길게 쓰게 되는데... 어... 착각일까... 그냥 우연에 불과한 것인가... 어쨌든 공통점: 재미없음.
어쩄든 첫 아라토도 연성. 아라토도! 아라토도! 사실 토도 관련으로 원작&애니에서 제일 밀어주는 건 일억이천 마키시마인테 토도 오른쪽 커플 애정도를 늘어놓으라고 하면 아라토도>>>>마나토도>>마키토도 순이라 매우 애매하다. 그래서 왜 그런가 했는데 그 이유는 3. 에 잘 나와 있다... 내 안의 토도는 마키쨩=자전거라서... 클라이밍 라이벌이니까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거지 그거 아녔음 그냥 소호쿠의 거미남자로 기억하고 말았을 듯.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토도는 은근히 칼같이 쳐내는 면이 있어서... 미도스지한테도 그렇게 대했었고.
모처에서 리퀘받아서 쓴 건데 리퀘 내용인 '연애 초심자인 아라키타랑 토도가 투닥투닥대는 이야기' 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어째 글 내내 싸우기밖에 안 하니... 내심 토도가 소녀처럼 안 보이게 하려고(소녀 토도는 좋아하지만 쓰고 싶진 않음) 엄청 노력했다. 물론 남는 건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기는 일 뿐이지만 여튼... 나에겐 그래... 물론 아라키타가 도가 넘게 멋있어 보이면 소녀 모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연애 초기인걸? 아직은 아닌걸? 한 번 자고 나면 인상도 바뀌겠지! (...)
또 페달이 인터하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인터하이 끝난 뒤에도 소호쿠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게 당연하다 보니 인터하이가 끝난 여름부터 졸업하기까지의 몇 달간의 하코네를 상상해 보는 건 매우 재밌다. 나중에 그 시점으로도 한 번 써보고 싶음. 졸업을 앞둔 아라키타와 토도의 이야기라던가... 뭐 쓰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손이 안 움직여서 고생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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