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감기 탓이라 했다.

  집에서 앓아누워 완전히 못 움직이고 있다는 어소시에이트의 보고를, 그녀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녀보다 17년이란 시간을 더 살아왔지만 그만큼 완전하지는 않은 남자. 삐걱이는 침대 위에 누워서 제 애완동물과 함께 TV를 보고 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아프다'는 키워드 하나만 던져놓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걸 보면 이걸 기회로 오랜만에 푹 쉬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답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에 넣질 않았다. 그랬으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을 사람이었다. 아니면 집으로 구급차를 부르거나. 남자를 알아온 시간 동안, 그가 제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 고생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감기 같은 잔병을 꽤 자주 달고 지내서 병약하다는 이미지를 갖고는 있어도, 그만큼 집에는 비상약이나 동양에서 들여왔다는 건강 식품 등이 빼곡했다. 분명히 약을 챙겨먹고 잘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녀는 그 소식을 가져온 어소시에이트에게 한 장의 쪽지를 건넸다.


  "마켓 오에서 이걸 좀 사다 주세요."


  어소시에이트가 건네받은 쪽지에는 '브라우니 1세트, 바닐라 아이스크림 1통' 이라고 적혀 있었다.



***



  니콜라이는 제법 멀쩡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양복을 입고 있는 테리어드의 모습을 보자, 조직에서 보냈다고 생각했는지 내일부터는 회복될 예정이라는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비겁한 변명이에요, 하고 웃자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침대가 흐트러져 있고 그 위에서 로빈이 자고 있었다. 이 집을 전에 찾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7년 전이었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 있었고, 저 품에 안겨 울었다. 그때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니콜라이에게 들고 온 것들을 건넸다. 처음에는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짓던 그는 봉지를 열어보자 얼굴색이 변했다.


  "오옷, 마켓 오의 브라우니! 난 이 녀석을 살 때마다 우리 집에 전자렌지가 있는 걸 감사하지."

  "그럴 줄 알고 사왔어요. 여기, 아이스크림도."

  "어, 그건 우선 냉장고에 넣어둬. 조금 얼면 먹자고."


  생각보다 집안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다만 TV는 침대를 향해 돌려져 있었고, 그것마저도 예상대로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소파에 앉자 침대에서 자고 있던 로빈이 껑충 뛰어올라 소파 위로 올라왔다. 이 앙칼진 너구리가 그녀와 제 주인만큼은 꺼려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로빈은 제가 고양이라도 되는 듯 그 손에 달라붙었다. 이 아이는 7년 전 일을 기억할까. 제 주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한 여자의 눈가를 핥으려고 덤벼든 일이나, 그 때문에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만 일을.


  "커피 마실래? 아니지, 자네는 홍차 파였던가? 티백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아뇨, 차는 됐습니다. 전 그것만 드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요."

  "그건 아깝지. 기왕 온 김에 팍팍 노동하고 가라고. 브라우니 나눠 줄 테니까."

  "노동이요?"


  그렇게 되묻자 노란 주머니가 날아왔다. 받아들고 보니 홍차 티백이었다. 이어서 테이블 위에 잔이 놓였다. 뜨거운 물만 담긴 머그잔이었다. 할 수 없이 티백을 뜯어 물에 담갔다. 하얀 머그잔 속에 붉은색이 퍼지고, 얼그레이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고급 홍차는 아니었지만 정작 향을 맡아 보니 잔으로 손이 갔다. 이 빠진 부분을 피해가며 입술을 대자, 따뜻한 물에 녹아난 홍차가 참 맛있었다. 로빈은 빠르게 테리어드의 무릎을 지나 주인의 침대로 돌아갔고, 그 침대에 몸을 눕힌 니콜라이가 열에 찬 숨을 뱉었다.


  "몸이 이 꼴이라서 제대로 대접도 못 해주고 미안하네. 저녁이라도 먹으러 나가야 되는데 말야."

  "뭐라도 좀 드셨어요?"

  "적당히 챙겨 먹기는 했지. 아― 하지만 싱크대가 좀 엉망이군. 설거지감이 많아서."

  "그럼 치워두죠."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노동' 하라면서요. 어차피 아이스크림이 얼 때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팔을 걷고 일어서는 테리어드를, 니콜라이는 말리지 않았다. 싱크대가 엉망이라는 그의 말도 거짓은 아니어서, 정신없이 그릇을 닦고 뒷정리까지 하고 보니 방 안엔 색색대는 숨소리만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침대 옆에 굴러다니는 물컵과 약 봉투가 보였다. 그녀가 여기 오기 전에 약을 먹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 옆에 가서 섰다. 남자가 그녀에게 꽃을 갖다 주었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 그녀였다.  그 꽃은 남자가 돌아간 뒤에 간호사에게 꽃병을 받아 꽂아두었다. 살아 있는 것을 자른 꽃이라 당연히 오래 가지는 않았으나, 점점 말라가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침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장난으로 생각했던 '꽃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하는 말이, 진심이었다는 게 기뻤다. 마침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여서 기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남자는,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그 의미는 뭐였을까.'


  뭐였던간에, 테리어드가 바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랑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의 남자의 반응을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전혀 몰랐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면서도, 결코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었던 그녀에게는 조직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의 마피아로서 보내 온 시간에 치이고 주어지는 임무에 온 정신을 쏟아부으면서, 결국은 모든 희망을 완전히 버렸다. 남자에게도 그녀에게도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 상상이 결코 현실에서 재현될 리 없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떤 말도 남자에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으로 좋았다. 변하는 것도, 끝나는 것도 없다. 그러니 평생 마음속에 묻어두고 갈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머그잔에 손을 뻗었다. 티백을 너무 오래 담가두어 짙은 붉은색으로 변해버린 차는, 쓰고 미지근했다. 그래도 남김없이 비우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니콜라이가 일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집 앞을 떠나기 전에 그녀는 품 안에 들어 있던 카드를 한 장 꺼냈다. 며칠 전 흑장미 꽃다발과 함께 대기실로 배달되어 온 장미 모양의 카드에는 그녀를 향한 열렬한 고백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나 혼자 차지하고 싶어요. 그것은 그녀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붉은 글씨의 초대장이었다.


  "정말, 쉽게도 말하네."


  어떻게 하면 그 말을 그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나 어려운데.

  그녀는 손에 든 것을 길거리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구겨져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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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