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냄새가 대기실에서 빠지지 않던 그 날. 점장은 테리어드에게 열 한 개째의 꽃다발을 가지고 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말라서 뻣뻣해지고 색이 바랜 장미 꽃다발. 그것은 가수에게 전하는 꽃다발 속에 섞여 있었다고 했다. 바싹 말라버린 꽃다발에서는 짙은 장미 냄새가 났다. 장미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일부러 바싹 말린 꽃을 가지고 온 것을 호의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첫날의 그 카드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테리어드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나 혼자 차지하고 싶어요.

  첫 꽃다발에는 그런 내용이 적힌 카드가 첨부되어 있었다. 미군의 눈을 피해 무기 밀수를 성공시키고, 본의 아니게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된 뒤부터였다. 카드는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로 들어오는 수많은 꽃,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꽃다발 속에 꽂혀 있었다. 그것을 대기실로 날라온 점장도 그것을 받아든 테리어드도 찜찜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받은 선물이 바싹 마른 장미 꽃다발과, 거기 적힌 내용만큼이나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러브레터'였으니 당연했다. 처음 그 카드를 보았을 때 테리어드보다 놀란 것은 점장이었고, 더 안절부절 못한 것도 점장이었다. 그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걱정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증거를 가지고 싸움을 걸어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점장에게 전부 해 준 것은 아니었으나, 헤니르의 관계자가 테리어드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만은 점장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보낸 자가 '그녀'가 아닌가 의심하는 모양이었지만, 테리어드는 바로 고개저어 부정할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그 꽃은 하루에 한 번씩 대기실로 날라져 왔다. 처분해 버리라는 명령을 하지 않아서인지 점장은 우직하게 그 꽃을 대기실로 들고 왔고 테리어드는 대기실 구석에 그것을 쌓아두었다.


  "……난 바보인가?"


  손을 쓰려면 처음 꽃을 받았던 그때여야 했다. 테리어드는 진심으로 후회하며 열한 개째의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피냄새와 장미 냄새가 뒤섞여 대기실은 하나의 가스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꽃다발 옆에 구겨진 반창고 포장지가 있었다. 거기서 테리어드는, 그 반창고를 붙이고 대기실을 나간 여자를 떠올렸다. 이 대기실에 피냄새를 풍기게 한 장본인을.



**



  그 이야기는 꽃다발이 오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그러니까 사흘 전에 시작됐다.


  "미스 티아, 그러고보니 요즘 펍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소매치기를 붙잡았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라뇨? 당신이 점장이잖아요."

  "그, 그러지 마시고. 저는 아무 권한도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권한이 없어도, 손님들에게 지갑을 돌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걱정스런 표정의 점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지갑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지 않을까, 그 실수가 몬도 카네의 영업실적으로 이어지고 직업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직업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험한 건 아닐까…… 등등. 눈앞에 선 이 남자가 대담한 짓을 못 하고 쓸데없는 걱정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테리어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점장'으로 고용한 이유는, 그 성격이라면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일일히 테리어드의 허가를 얻으려 하는 점은 역시 불편했다. 소매치기가 훔쳐간 지갑을 돌려준다고 해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석연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테리어드는 지갑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점장이 잔뜩 안고 온 것은 저마다 꽤 비싸 보이는 지갑들이었다. 몬도 카네에서만 훔친 것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주변은 노스트라의 구역이니 찾아준다면 얼마든지 찾아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리어드는 지갑을 열었다. 연락처를 찾아서 기록한 뒤 심부름꾼을 시켜 전달해 줄 생각이었다. 이 정도 작업은 자기가 해도 될 텐데, 하면서 점장에 대한 불만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삼켰다.

  그러다가 세 번째 지갑을 열었을 때였다.

  그녀는 운명의 장난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지갑 주인은 몇 장이나 되는 명함을 카드 끼우는 곳에 끼워서 갖고 있었다. 전부 한 사람의 명함이니, 그 이름이 바로 지갑 주인일 것이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단 중요한 것은, 그 명함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테리어드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전 그 명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기억에 새겨 넣고 찢어서 버리긴 했지만.

  이해린.

  그 명함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한참을 웃느라, 테리어드는 그 뒤에 적혀 있던 이니셜과 전화번호를 차마 보지 못하고 명함을 지갑에 돌려 놓았고, 그것은 또한― 해린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며칠 뒤 테리어드는 해린을 만났다. 일부러 후안이 일하는 카페로 자리를 잡았으나, 배달을 갔는지 쉬는 시간인지 후안의 그 유쾌한 모습은 눈에 띠지 않았다. 물론 해린이 공공 장소에서 난리를 칠 정도로 무모한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후안이 없어도 괜찮다는 계산은 했다. 그녀가 이곳으로 해린을 불러낸 건 어디까지나 이 카페가 노스트라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해린은 시종일관 매우 불쾌해 보였다.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면 화를 내는 타입일지도 몰랐다. 테리어드가 유쾌한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이전 이 여자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서,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도발을 해 온 적이 있었다.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 사건이 없었더라도 눈앞의 여자에게 쉽게 지갑을 돌려줄 만큼 그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연락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처분하셨으면 될 텐데요. 굳이 연락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 말은 당신이 떨어뜨린 유리구두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군요."


  강하게 나가자, 해린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짐짓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지갑이 어찌 되든 좋았다면, 테리어드가 부른 이 자리에 해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갑이란 것은 그 주인의 신분과 사적인 부분까지 짐작하게 해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안에 들어 있는 신분증은 물론이요, 신용카드로 개인정보도 알 수 있으며 소지한 현금으로는 금전 상황도 알 수 있었다. 신데렐라에게 있어 유리구두가, 왕자님과 자신의 관계를 증명하는 소중한 물건이었듯이.

  신데렐라.

  그녀는 자신을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 그 호칭은 해린에게 더 어울렸다. 해린의 지갑을 가지고 온 소매치기 아이를 추궁해 보니, 어떤 카페에서 해린이 깜박 잊고 간 지갑을 자기가 슬쩍했다고 말했었다. 그녀가 떨어뜨린 유리구두를 주운 사람은 왕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마녀에게서 돌려받으려고 필사적이었어요.

  존재할 리 없는 동화에 한 줄을 추가했다. 이 이야기는 마녀의 승리로 끝날까, 신데렐라의 승리로 끝날까. 잠시 시덥잖은 생각을 하던 테리어드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이 위험한 거래일지도 모른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정체가 어찌되었든, 자신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상대는 헤니르의 관계자였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탓하던 테리어드의 머릿속에, 아직도 품에 갖고 있는 편지의 존재가 떠올랐다. 좀 더 자세한 조사를 해보기 위해 찢어 버리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것. 그리고 눈앞의 여자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기억해 낸 순간 테리어드는 변명을 쉽게 찾아냈다.


  "스토커에게서 나를 지켜주는 것."


  '스토커?' 하고 의아해 하는 해린의 얼굴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노스트라의 관계자를 헤니르의 관계자가 경호해야 하는, 삼류 코미디와도 같은 상황이 펼쳐졌으니까. 하지만 그 촌극을, 해린은 기꺼이 제 몸으로 연기해 보일 생각이었나 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갑 안에 있는 물건을 보지 말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제는 지갑을 돌려받고 싶다는 마음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테리어드도 그 안에 있는 물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갑 자체가 중요했다. 이해린의 물건이라고 인식되어 있는 이 지갑 자체가.


  "그럼 계약은 성립됐군요. 지금이 세 시니까, 다섯 시까지 펍으로 오세요. 사흘 뒤 새벽 2시까지, 당신은 가수로서의 나만 지키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불만스런 표정 하지 말아요. 이 커피도 내가 사는 거잖아요. ……나는 갈 데가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어차피 그럴 기분도 아니겠지만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운터에서 그들을 살피고 있던 종업원이 냉장고에서 마켓 오의 비닐봉지를 꺼내 가지고 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테리어드는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이제 이걸로 점장의 지나친 걱정도 사라지겠지 하는― 그녀 답지 않게 상당히 긍정적인 판단이었다.



**



  사흘간, 끈질기게 꽃만이 배달되어 왔다. 카드가 더 이상 꽂혀 있지 않았던 것이 석연찮았고, 실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경우 스토커의 흔적은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꽃보다는 카드에 더 많이 남아 있으리라. 하지만 사흘 전, 해린을 고용하고 니콜라이의 집에 다녀오면서 그녀는 카드를 버렸다. 같은 것이 또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수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흑장미 다발을 만지작거리는 테리어드의 뒤로 해린이 다가왔다.


  "경호의 의미가 없군요."

  "그러게요."


  그녀의 경호는, 솔직히 100점 만점에 1000점을 줘도 모자랄 정도로 완벽했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예외였지만, 정말 어디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대기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옆에 있었으며, 화장실에 갈 때는 먼저 들어가 상태를 체크한 뒤 들여보냈고 '벨'이 '테리어드'가 되는 그 순간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키는 것은 가수로서의 나 뿐'이라는 테리어드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점장의 걱정도 가뿐히 사라진 듯, 그는 꽃다발을 대기실로 가져오면서도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실력의 경호원을 어디서 데려왔냐며 싱글벙글이었다. 좀 지나친 칭찬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다가 거울 너머로 해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굳어진 표정이 테리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살의를 모를 정도로 테리어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의 얼굴은 경호원이 아니군요."


  나 참. 속으로 칭찬하자마자 이 꼴이라니. 아무래도 해린과는 뭔가 잘 풀리지 않을 운명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리어드의 지적을 해린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만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입니다."


  프로답지 않은 행동을 지적당해 기분이 안 좋아진 건지, 아니면 아직 살의를 다스리지 못한 것인지, 사과하는 해린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하긴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오늘로 해린과의 사흘이 끝난다. 시계를 바라보며 슬슬 나갈 시간이라 생각했을 때 점장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린은 약간 거리를 두어 걸었다. 그녀의 굳어진 얼굴이 어둠 속에 섞여들었다. 지극히 냉정한 경호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해린의 걸음걸이는 마치 로봇 같았다. '나를 지켜라'는 명령을 입력당해, 그것만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가진 로봇. 그런 해린을 보는 건 재미가 없었다. 처음 하루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아이러니를 즐길 수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흥미는 떨어졌다. 오히려 생사를 건 전투에서 나이프를 치켜든 해린이 좀 더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제 적에게 약점을 잡혀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던 그 모습이 더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청곡이 무대로 전달되어 왔다. 종이 위의 단정한 글씨는 이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테리어드에게 지극히 불쾌한 감정만을 상기시켰던 그 필체가, 이번에는 약간의 즐거움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당신의 그림자. 그녀는 내 옆에서 일하면서, 그 시간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바로 피아노 반주자에게 곡을 돌리고, 테리어드는 마이크를 잡았다. 입구 근처에서 팔짱을 낀 해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명과 시끄러운 소리 속에 해린의 마음을 그리 쉽게 읽을 수는 없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난 감상적인 이유로 당신을 사랑해요

  I hope you do believe me

  난 당신이 나를 정말로 믿었으면 좋겠어요

  I'll give you my heart

  난 당신께 내 마음을 드릴 거예요


  I love you and you alone were meant for me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혼자만이 나를 위한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Please give your loving heart to me and say we'll never part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내게 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 말해주세요


  지나치게 달콤한 노래였다.

  해린에게도,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



  "계약은 이제 끝입니다."

  "네, 수고했어요."


  지갑을 건네주자, 해린은 그것을 재빨리 낚아챘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주머니 속에 바로 그것을 넣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별 중요하지 않은 척 하고 있겠지만, 초조해 하고 있다는 게 바로 보였다. 가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계약 종료' 라는 선언에 홀가분해졌는지 해린은 재빨리 대기실을 벗어났다. 세게 닫히는 문을 보면서 테리어드는 클렌징 크림을 잡았다. 화장을 지우고 '테리어드'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경호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지간히 초조했나 보지? 새삼스레 들여다 보지 않은 그 지갑 안이 궁금해졌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헤니르와 어떻게 관계 되어 있는지 증명하는 서류 같은 것은 물론이요, 돈도 그리 많이 들어 있지 않았다(단, 그건 소매치기 아이가 제멋대로 써버려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체 뭘 감추고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라던가.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에 테리어드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이해린이 그럴 리가 없었다(애초에 사진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애초에 테리어드는 지갑 안에 그리 중요한 것을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담을 만한 중요한 것이 없었다. 쓰디쓴 추억만을 떠올리게 할 사진은 전부, 언더 씨티 밖에 있는 그 집과 병원에 버리고 왔다. 벨이 그 생을 마감하고 땅에 묻힐 때, 친절한 간호사들이 전부 관 안에 넣어 주었으리라. 어디 있을지 모를 무덤을 파헤치지 않는 한 테리어드에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노스트라에 들어오고 나서는 사진 찍히는 것을 특히 피했고, 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소중한 사람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도, 그저 눈으로만 담았고 마음에만 보관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고 있다가, 테리어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린도 단순히 자신의 물건이 숙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게 싫었을 것이라고, 그런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뒤로 천천히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에 테리어드는 해린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 화장을 지우기 전까지는 경호원. 그 조항을 그녀가 이제야 떠올린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제 눈앞에서 반짝이는 나이프를 보았다.

  큰 소리와 함께 나이프가 화장대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약이라도 맞은 듯 눈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편지의 존재를 떠올렸다. 나이프가 드레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끈이 끊어져 드레스가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침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열렬한 고백을 쓰기에 어디의 문학 청년인 줄 알았더니……."


  어느 쪽이든 받아줄 마음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남자의 공격이 날아오기 전 테리어드는 허벅지에 감춰둔 제 무기를 꺼내려 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한 명의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것으로 남자의 숨을 끊었으리라. 그 상황에 끼어든 해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남자를 밀치고 테리어드의 앞을 막아섰다. 나이프가 휘둘러졌고 피가 튀었다. 그것이 여자의 목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테리어드가 알았을 때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해린의 나이프를 맞고 쓰러진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해린은, 경호원이 아닌 '이해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기실이 엉망이 됐군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왜 미안해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여기엔 무슨 일인가요? 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에 해린은 남자를 처리하기 위해 한 발자국 움직였다. 살려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손을 뻗는데 열린 문으로 점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미스 티아! 다급한 듯 그녀를 부르는 점장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언제나 한 발자국 늦게 나타나는 그에게, 원인을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구급상자를 가져와요."


  점장은 명령에 충실했다. 구급상자를 받아든 테리어드는 해린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얌전히 있어요. '명령'하고 몸을 숙여 피를 닦았다.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해린은 그 시간조차도 불편한 듯 보였다. 해린의 치료까지 직접 해 준 것은, 엄밀히 말하면 보답이었다. 테리어드를 막아서고 스토커를 퇴치해준 것은 일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해린의 호의였다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호의를 보였으니 이쪽 역시 호의로 대답해주는 게 옳다는 생각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다. 목에 밴드까지 붙여 주자 얌전히 있던 해린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듣는 말로는 정말 낯설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해린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청곡 잘 들었어요. ……취소할 수 있었는데도 불러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 말씀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테리어드는 구급상자를 닫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혹은 흔적이라. 절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추측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곡을 선정한 이유를 물어볼까 망설이는 사이에 해린이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린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테리어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작별인사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해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마지막 곡을 다시 한 번 흥얼거리는 테리어드는 아직도 반창고 포장지를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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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