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4.
緑間真太郎x赤司征十郎
[9시쯤, 역에 도착해. 기다릴게. 약속 시간을 넘기더라도, 네가 올 때까지, 계속.]
“신쨩, 어디 피곤한 데 있어?”
타카오 카즈나리의 지적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제야, 제가 공을 든 채 골대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겸연쩍게 손을 내렸다. 신- 쨩? 불안한 듯, 그러면서도 그 낌새를 미도리마에게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목소리로 타카오가 미도리마의 눈앞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신 들어? 이거 몇 개게? 그런 타카오의 ‘배려’ 에도 미도리마는 쓴웃음을 짓거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등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듯, 혹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가장하여 비키라는 것이다, 라고 냉정하게 말해주는 편이 미도리마 신타로답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답지 않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면 타카오는 백이면 백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터였고, 신임 주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미도리마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미야지 유우야는 분명 감독에게 보고부터 해야겠다며 그 호들갑에 편승할 게 분명했다. 미도리마는 자신이 원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도, 남에게 ‘걱정’ 이라는 이름의 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 문제다. 혹은, 심적인 문제. 자신 개인의 문제가 부 전체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분란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타카오는 ‘쳇, 걱정해서 손해 봤네’ 라며 입술을 대자로 내밀고는 저 멀리 가버렸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도리마는 다시 포즈를 잡고, 골대를 향해 슛을 쏘았다. 부드럽게 링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은 그의 컨트롤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발치로 굴러온 공을 주워들며 미도리마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꿈인가?
아니면, 환상?
타카오가 걱정하며 말을 걸기 직전까지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의 의식이 체육관이 아닌, 수수께끼의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곳은 빛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어두캄캄한 공간이었다. 그러다 그 어둠을 가르고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어디선가 불씨가 피어오른다. 희미한 불빛으로 시작해 점차 밝아지는 그 공간이 길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촛불 불빛이 어지럽게 섞인 공간 속에 빛이 날 리 없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빛을 발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회색 셔츠 목깃에 새하얀 냅킨을 정성스레 꽂은 채 정갈한 동작으로 은식기를 움직이는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아카시 세이쥬로.
‘방금 먹고 있었던 것은…… 샐러드, 겠지.’
미도리마의 아에 앉은 아카시 세이쥬로는 진갈색 테두리가 선명한 상아색 접시 위에 청명한 색의 야채를 가득 쌓아 놓고서 포크로 그것을 찍어 한 입 한 입 넣고 있었다. 적막이 깔린 공간 안에는 아카시가 포크로 야채를 찍는 소리나 간혹 접시를 긁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 입 야채를 넣고 꼭꼭 씹어 삼키면, 또 한 입 야채를 먹는다. 양손잡이인 아카시는 왼손으로도 포크를 능숙하게 다룬다. 아무 말 없이 야채를 입에 넣어 씹고, 삼키고, 다시 포크를 움직이는 동작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미도리마가 타카오의 목소리로 그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 아카시는 접시에, 포크에, 야채에,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럼에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한 주홍빛의 프렌치 드레싱이 한가득 묻은 브로콜리를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 탓에, 아카시가 그것을 어떻게 입에 넣고 무슨 표정을 지으며 씹어 삼켰는지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 그지없을 정도다.
‘……아니, 아쉽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 광경인데, 다음 장면을 궁금해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어.’
미도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워든 공을 들고 다시 슛을 쏘는 자리에 섰다. 골대를 마주하고 있는 힘껏 점프해 던진 슛은, 평소보다 1cm 정도 크게 빗나가 아슬아슬하게 링을 통과했다.
* * *
아카시 세이쥬로의 식사 장면을 꿈에서 보게 된 것은 닷새 전의 일이었다. 아니, 윈터컵 결승전이 끝난 지 3주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까. 고교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적의 시합을 두 눈에 새겨넣었던 당시의 충격도 어느새 다소 흐릿해지고, 오오츠보와 미야지, 키무라를 필두로 한 슈토쿠 고교 농구부 3학년들의 은퇴식과 세대교체 연습경기까지 모두 끝나 겨울방학도 이미 끝난 뒤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 목욕을 하고, 다음날 있을 수업을 대비해 그 날분의 공부까지 모두 끝낸 미도리마는 메일이 들어왔다는, 핸드폰의 안내등을 무시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해 빠져든 꿈의 세계에서 미도리마는 식사하는 아카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배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어둠 속에 놓인 기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과 끝단에 자신과 아카시가 앉아 있었다. 셔츠 목깃에 냅킨을 꽂고서 식기를 집어 든 아카시는 상아색 그릇 위에 놓인, 붉은 빛 감도는 거위 간을 알맞게 썰어 한 입 물었다. 매우 부드러운 음식인 듯 입에 넣고 씹어 삼키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촛불 너머로 오물오물 움직이는 아카시의 작고 붉은 입술을 본 순간의 충격- 그것의 정체를 미도리마는,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침에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 본 건 대체 무엇이었지. 나는 무엇을 보고, 그것에 무엇을 느낀 거지? 그리고 그 의문은, 안경을 쓴 미도리마가 반사적으로 확인해 본 핸드폰 화면 속 짧은 메시지에 순식간에 지워졌다.
[오는 1월 31일, 테츠 군의 생일에 모두 테이코 중학교 근처에서 만나지 않을래? 오랜만에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모모이 사츠키]
그것이 시작이었다.
미도리마는 그 다음 날도 아카시의 꿈을 꾸었다. 두 번째 꿈에서 아카시의 앞에는 수프가 나와 있었다. 아카시는 첫 번째 꿈에서 전채 요리가 놓여 있던 접시와 같은 디자인의 볼에, 진한 크림색의 수프를 가득 담아두고는 한 숟갈씩 떠먹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면 그것이 어떤 수프인지 더 알기 쉬웠을 테지만, 식탁 앞에서 예의 없는 행동임을 감안하면서도 코를 킁킁대 보았을 때 미도리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공간은 시각과 청각 외의 감각은 모조리 차단된 모양이었다. 당황을 금치 못하는 미도리마의 맞은편에서 아카시는 크림색 수프를 한 숟갈 떠서는 한참 동안 후후 불어가며 식히다가 겨우 한 입씩 삼키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카시의 그런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아카시는 마치 자신이 먹고 있는 모든 음식이-아카시의 주변 환경을 생각해 봤을 때 무척 고급 요리일 것이 분명함에도-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맛을 가진 요리라도 되는 듯, 감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상을 쓴 것도 미간을 찌푸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묵묵한 표정과 함께 진행되는 아카시의 ‘식사’는 식사가 아니라 마치 고행과도 같아 보였다.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눈을 뜬 그날,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 미도리마는 키세 료타로부터의 메일을 받았다.
[미도리맛치, 31일 동창회 올 검까? 난 좀 늦을 거 같아서 큰일이에요- 쿠로콧치 생일 축하해줘야 하는데! 아, 선물은 뭐 살까요? 나는…….]
거기까지만 읽고, 지워버렸다.
설마 그런 꿈이 사흘이나 계속되겠냐는 뻔한 생각과, 아직 메인 요리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한참은 더 계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반반씩 겹쳐 맞이한 사흘째 밤, 아카시는 생각대로 생선 요리를 앞에 두고 앉았다. 메뉴는 해산물로 만든 찜처럼 보였다. 그날의 아카시는 이전까지의 식사보다 더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으로, 접시에 놓인 찜 요리의 이곳저곳을 티 나지 않게 뒤적여 가며 새우나 오징어만을 골라 먹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앉아 있는 곳은 테이블의 끝단이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카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위치였으나,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무엇을 골라내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맛을 더하기 위해 들어간 해조류를 골라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문득 그의 그런 식습관을 보고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했었던 잔소리 가떠올라,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입 밖에 올렸다.
—편식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아카시가 식기를 움직이는 아주 미세한 소음이 들릴 정도니 아카시라고 미도리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여전히 아무 미동 없이 심드렁하게 해산물을 골라 입에 넣을 뿐, 미도리마의 잔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카시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확인한 채 잠에서 깨어난 미도리마는 자신이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때 아카시가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잠시 후 떠오른 답은,
「괜찮아. 난 미도리마의 앞에서만 이러는 거니까.」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네 번째 꿈을 꿨을 때, 미도리마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 기묘한 꿈은 아카시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모양이었다. 풀코스로 치면 오늘은 메인 요리로군. 그 생각대로, 그날 밤 꿈속의 아카시는 스테이크를 씹고 있었다. 용케도 저 많은 요리가 다 위장으로 들어가는군. 저도 모르게 감탄한 것은, 쿠로코 테츠야만큼은 아니었어도 아카시 역시 상당한 소식가라는 사실을 미도리마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인 요리쯤 되니 역시 위에 부담이 간 것인지 아카시의 식사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냄새는 맡지 못해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스테이크에서 떨어지는 육즙은 충분히 식욕을 자극하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표정 하나하나, 입술과 이빨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정신이 팔려 배고픔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다. 아니, 설령 배가 고팠다 하더라도 아카시의 얼굴을 보면 식욕이 생기다가도 사라질 판이었다. 그만큼 아카시는 이 ‘식사’ 시간이 지겨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왜, 저런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떠오른 의문에 미도리마는 의자를 좀 더 바싹 끌어다 앉았다. 어젯밤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오늘은 좀 더 큰 목소리로, 좀 더 분명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거다.
—아카시.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고깃점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카시의 손이 순간 멈칫한 것 같았다. 아니, 비록 그랬다 해도 그것은 미도리마의 눈으로는 차마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한 동요였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그 짧은 ‘동요’의 순간을 확신한 이유는 단 하나, 아카시가 목에 두른 냅킨에 육즙 섞인 스테이크 소스의 자국이 작은 원을 그리며 남았기 때문이었다. 제 냅킨에 소스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카시는 잠시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미도리마가 보는 앞에서 옆으로 내던졌다. 마치 그 순간만 슬로우 모션을 건 듯, 냅킨은 아주 천천히 펄럭이며 식탁 옆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아아, 저 냅킨은, 마치.
나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미도리마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안경을 쓰고, 미도리마는 버려진 아카시의 냅킨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모모이 사츠키로부터 두 번째의 메일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좋은 아침, 미도링! 저기, 저번에 말했던 동창회 말야, 못 오는 거야? 그럼 그렇다고 답장 줘. 지금 미도링 외에는 모두 대답해줬단 말야. 기다릴게!]
그 메일을 보고 미도리마는, 나 외에 전부 대답했다면, 아카시도 말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 * *
그리고 닷새째가 되는 오늘, 정확히는 어젯밤, 미도리마는 일부러 잠을 자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활 리듬을 망치는 행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모모이에게서 온 메일엔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사려 깊은 모모이니만큼 분명 미도리마의 사정을 생각해서 기다려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문제의 동창회는 바로 내일이다. 언제까지고 메일에 답을 하지 않으면 분명 전화가 걸려 올 것이었다. 적어도 그 ‘동창회’에 갈지 말지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아카시의 꿈을 꾸는 것도, 그 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런데 설마 연습 중에 졸아버릴 줄이야…….’
어쨌든 오늘 꾼 꿈을 보아하니, 아카시의 식사는 거의 끝이 난 모양이다. 남은 것은 디저트와 와인 정도겠지만, 미성년인 아카시가 와인을 마실 리 없다. 식사는 아마 오늘 밤 꿀 ‘디저트’ 로 끝이겠지. 내일이 바로 쿠로코 테츠야의 생일이자, 그 ‘동창회’ 당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유 있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가방 안의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휴식 시간에 살짝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모모이가 정한 동창회 시각은 내일 아침 11시다. 미도리마를 제외한 전원이 온다고도 했다.
그래. 아카시 세이쥬로도 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시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면 미도리마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동창회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참석할 아카시를 보는 것도, 그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 꿈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망설이게 만드는 것일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꿈이 날 이렇게 만든 건가?
대체 왜?
그저 아카시가 식사를 하고 있는 걸 내가 보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 꿈은 내게 무얼 전하려고 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미도리마는,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제 안의 어떤 감정이 아카시 세이쥬로와의 재회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꿈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고 아카시를 만나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 그건 안 될 말이라는 것이다.’
결국 꿈을 마주하는 수밖에 답이 없는 것일까.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모모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마 못 갈 것 같다.]
* * *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디저트 접시를 앞에 두고 앉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맞은편에서, 미도리마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아카시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늘로 이 식사가 끝난다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알아내 주마. 그런 각오로 미도리마가 노려보고 있는 디저트 접시에는 몽블랑이 올라와 있었다. 아카시는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티스푼을 집어들고,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크림을 살짝 떠서 입에 넣었다. 티스푼을 문 입술은 어쩐지 처음 이 꿈을 꾼 날보다 훨씬 붉게 보였다. 연한 갈색의 크림과 부드러운 케이크를 한번에 뜬 아카시가 그것을 입에 넣는 순간, 또다시 슬로우 모션이 걸렸다. 새빨간 혀가 수저를 휘감듯이 입 안으로 끌어들여, 티스푼의 오목한 선을 따라 입술이 훑고 지나간다. 크림을 빨아먹듯 입안에 넣은 케이크를 음미하고, 삼키고, 입술에 살짝 묻은 크림의 잔해를 혀가 살짝 핥고 지나갔다. 그 광경에 미도리마는 퍼뜩, 처음으로 이 꿈을 꾸었을 때 아카시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고- 그리고, 이번에는 그 정체마저도 확실히 깨달았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수프 냄새를 맡으려 할 때는 전혀 기동하지 않았던 후각이, 왠지 지금은 민감하기 짝이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몽블랑에서 나는 단내. 그것을 입안 가득 문 아카시 세이쥬로의 입술에서 풍기는 단내.
아, 그것이다.
나는.
미도리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넘어지는 소리에도 아카시는 미동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그대로 아카시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아카시. 불러보았지만 아카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지금 나는 이렇게 생생하게 네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아카시의 턱을 붙들고, 제 쪽으로 거칠게 돌렸다. 놀란 듯 미도리마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미도리마의 눈을, 코를, 입술을, 천천히 그 안에 담았다. 그래, 아카시. 너는- 나를 이 자리에 앉혀놓고,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내가 찾아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턱을 추켜올렸다. 드러난 붉은 입술에는 몽블랑의 크림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을 떴을 때 미도리마는 핸드폰의 불빛을 통해 메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모이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어제 ‘가지 못하겠다’고 한 미도리마의 메일에 아쉬움 가득한 답장을 보내왔었다. 타카오일 리도 없다. 오늘은 주말이라 학교도 쉬고, 농구부 연습도 없는 날이다. 그럼, 발신자는 누구일까. 꿈 탓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미도리마에게는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열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아카시 세이쥬로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기다란 서양식 테이블의 끝단과 끝단에 자신과 그가 마주앉아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 채, 그를 제 손으로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든 어리석은 친애의 대상. 그는 자신이 따라 준 붉은 빛 액체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자, 식사는 끝났어.
아카시는 턱을 괴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식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의 기다림의 시간도 이걸로 끝이다. 그 결말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카시 세이쥬로가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끝이다. 모두 끝인 것이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가 결론을 내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할 이 순간.
—있지, 미도리마. 그건 내 피야.
그래, 그건 내 피이자, 너를 원하고 원했던 내 감정의 찌꺼기야. 아카시 세이쥬로는 웃었다.
자, 너는 그것을.
—어때? 마실 수 있겠어?
아카시 세이쥬로는 눈앞의 상대를 조롱하듯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아직 망설이고 있을 테니까. 자신을- 아카시 세이쥬로를 뛰어넘겠다고, 그에게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고, 그렇게 선언했던 자신의 약속에 묶여,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겁쟁이이다.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투쟁심인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의지인지도 모르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미도리마 신타로.
그러나 그는 아카시의 예상과는 달리, 잔을 집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붉은 액체를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놀라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된 아카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웃었다.
“날 얕보지 말라는 것이다, 아카시.”
아, 그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 살점 한 덩이, 피 한 방울, 또 하나의 인격까지, 모두-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100번 달성표의 스타트는 역시 최애커플이 끊어줘야 제맛! ㅇㅅ< 물론 녹적은 스타트 안 끊어도 이 달성표의 반 이상을 채울 게 뻔하긴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책으로 내볼까- 싶어서 예전부터 구상해두고 있었던 건데 아무리 봐도 책 내용으로 하긴 짧고(복붙해 봤더니 A5 8~10장 분량 나옴) 그렇다고 살 더 붙이기도 애매한 이야기고 만화 스토리로 구상하자니 그려주실 분이 없어서(mm) 짧게나마 써서 1번 타자를 끊어보았다. 손으로 썼더니 공책 4페이지 분량이 나왔는데(물론 글씨가 작고 엉망진창인 것도 고려해야 함) 간만에 하는 손연성이라 애매했다고 한다...
전개나 상징 같은 걸 넣어도 다분히 설명해 주는 내 글치고는 상당히 불친절... 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는데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유. 일단 여기는 후기니까 밝혀두자면 아카시 세이쥬로의 저 고행과도 같은 식사는, 자신을 쓰러뜨리겠다고 선언한 미도리마가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기까지 기다리는 과정이었기에 아무리 맛있는 요리('투쟁심'으로 대표되는 미도리마의 진심)가 나와도 하나도 즐겁지 않고,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어서 그저 기계적으로 흡수할 뿐이었던 4년간의 아카시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미도리마가 짝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니에요! 사실은 아카시가 하고 있었거든요! 녹적은 왠지 그런 구도가 좋다. 이전까지 사랑이라는 감정, 연애감정이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고 자랐던 아카시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달리고 마는... 네 취향타는 구도죠 압니다. 덧붙여서 미도리마는 되게 늦게 아카시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지만, 한 번 깨닫게 되면 인사를 다해서 거기 매달릴 성격이기 때문에 녹적은 결국 쌍방향 의존의 완전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
덧붙여서 윈터컵 결승전이 끝나고 쿠로코 생일에 키세키즈가 다같이 모이기까지의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이야기는 존재증명이라는 장편으로 따로 쓸 생각이긴 한데, 이 이야기도 그 시기가 배경이라 조금 애매한 감이 없지않아 있기는 함. 물론 존재증명은 애초에 이거랑 주제가 다르지만. 어쨌든 녹적은 윈터컵 끝나고 고교 2학년 때부터 원거리연애 시작해서 해피엔딩 맞이해라~~ 마지막에는 결혼해라~~ 두번해라 세번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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