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에 해당되는 글 57건

  1. 2013.09.13 [UnderCity] DEAD END?
  2. 2013.09.13 [UnderCity] Extraordinary
  3. 2013.09.13 [UnderCity] Shooting
  4. 2013.09.13 [UnderCity] Affinity · the Strong
  5. 2013.09.13 [UnderCity] Affinity · the mastery
  6. 2013.09.13 [UnderCity] One-Act Play
  7. 2013.09.13 [UnderCity] No Reason

Mission 02.








#1. 


  "그래서,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기려고 해."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새삼. 난 자신이 믿지 못하는 부하에겐 이런 말은 안 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연한 남자의 목소리는 또 골치 아픈 일을 말했다. 전화를 검과 동시에 남자가 보내준 명단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여섯 개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섬뜩하게도 그 이름들을 수놓은 색은 빨강이었다. 막 인쇄되어 나온 종이는 따뜻했고 잉크는 손에 묻어났지만, 테리어드는 굳이 그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개중 두 명은 그녀도 아는 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던 건 와일드캣 혼자인가? 후안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소가 나왔다. 그는 테리어드가 알고 있는 어소시에이트들 중에서도 일을 참 잘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 능력이 가져온 정보와 그로 인해 발생한 상황은 그녀를 한없이 귀찮게 만들었다. 미간이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녀는 무릎 위에 펼쳐뒀던 지도 위에 잉크 묻은 손가락을 얹었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는 이미 바싹 말라 지도에는 묻어나지 않았지만, 당일이 되면 다른 것이 이 장소에 번지리라. 그때의 순간을 머릿속에 천천히 시뮬레이션하면서,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상상했다. '그들'의 비명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찔했다. 심장에 꽂은 칼을 점점 몸 안쪽으로 찔러넣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그녀의 손에 죽어간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와는 4년이 넘게 함께 일하면서,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나 이야기를 잔뜩 함께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죽어가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녹색 눈동자가 가슴에 깊게 남아, 갑자기 가슴을 짙게 짓눌렀다. ―미스 티아.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꾸짖듯 들려오는 카포레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계속 어두운 생각만 하고 있었으리라. 예, 카포.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벽에 걸려 있는 자켓을 쥐었다. 나이프 네 자루가 들어 있는 자켓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웠다. 묵직한 자켓을 몸에 걸치자 나이프들이 서로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그락. 참 유쾌한 느낌의 형용사였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가벼운 목소리가 테리어드의 귀를 스쳤다.


  "자네에게 선물한 나이프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비싸게 구한 거거든."




#2.


  죄송합니다, 카포.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바라보면서 테리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작정 총부터 쏴대는 상대가 눈앞에 있으면 이렇게 사용하는 게 정답이다.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전장'에서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상대였다. 사실, 아직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지 원래대로라면 벌써 질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애초에 타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 임무로 알게 된 자 외의 타인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은 테리어드의 성격상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성격임에도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겐 쉽게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총을 들고 덤벼오기에 방심하고 있었더니 나이프를 던져서 제 어깨에 피를 냈다. 살짝 스친 정도여서 나이프를 휘두르는 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어깨끈이 끊어져 드레스가 흘러내리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제 겉모습을 신경 쓰다간 눈앞의 여자를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 아니었어도 테리어드는 벌써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테리어드가 펍의 가수 벨이라고 증명하는 사진과 필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걸로 자신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안위는 그렇다치고, 이곳― 몬도 카네가 노스트라의 소유라는 사실을 헤니르에 알릴 수는 없었다. 처리하고, 돌아간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도로 홀스터에 돌려놓고, 새 나이프를 꺼냈다. 상대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미소지은 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그녀는 힘껏 발을 내딛어, 앞으로 나아갔다.




#3.


  총성이 컨테이너가 잔뜩 늘어선 부둣가에 울렸다. 아무리 범죄자를 상대하고 있다지만 바로 발포하다니, 미군도 진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을 끌기'는 커녕 오히려 당하고 말지도 모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암담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브로커에게서 무기를 건네받는 임무로 부두에 왔다가 미군을 발견한 지 세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관이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는지 옆에 선 어소시에이트가 그녀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불안을 해소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리어드는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의 어소시에이트를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카포레짐에게서 들은 지령을 머릿속에 되살리며 그녀는 나이프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이런 현장에서 총을 전혀 쓸 수 없는 자신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기서 세 팀으로 갈라진다. 제 1팀은 와일드캣, 네게 맡기지. 몇 명을 선발해서 창고 쪽으로 이동해. 네 임무는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제 2팀은 저격반. 한 사람이…… 그래, 당신이 가서 반대쪽 컨테이너에서 발을 묶도록 해. 모든 타이밍은 내가 지시하지. 제 3팀은 운반을 맡는다."

  "하지만 저격하라고 해도 무기가 없습니다만……?"

  "비상사태니까, 물건 중에 하나를 꺼내 쓰도록 해. 라이플 정도는 다룰 수 있을 거 아냐?"


  평소보다 차갑고 딱딱한 명령이었다. 개의치 않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후안뿐이었다. 그와는 임무를 수행하러 나오기 이전부터 상의했던 것이 있었다. 그가 유능하며, 명령대로 움직여 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 테리어드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아까부터 나이프 대신 꽉 쥐고 있는 핸드폰이 울리기를.

  후안이 어소시에이트 세 명을 데리고 창고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 역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저격이라는 큰 임무를 떠맡게 된 어소시에이트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한심하기는. 오히려 활약할 찬스라 생각하면 될 텐데. 뭐,

  ―애초에 활약할 틈도 주지 않겠지만.

  저격수가 자리를 잡자 후안의 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숨어 있던 무리가 튀어나오면서 일제히 흩어지자, 미군들이 분산되어 그들을 따라갔다. 테리어드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레 테리어드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 티아, 적이 저렇게 흩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불리합니다. 잘못하면 저격수의 위치가 눈에 띨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와일드캣에게 지시를 내려서 저격 시기가 될 때까지 총격전을 벌이는 정도로―"

  "착각하지 마세요. 와일드캣은 내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입 다물고 지켜보기나 하세요."


  차가운 시선을 주자 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앗차 싶어 얼굴을 옆으로 돌렸지만, 상대는 상관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했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약간의 분노도 깃들어 있었다. 저보다 어린데다, 여자인 테리어드의 악의 섞인 명령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리라. 쯧. 테리어드는 혀를 찼다. 어차피 길지 않을 목숨이니 집착은 버리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앗, 하고 두 명의 남자가 혀를 차는 게 들렸다. 위쪽에서는 그들의 동향이 훤히 보였다. 후안 조의 세 사람이 자신들을 따라오는 미군을 따돌리고 다시 창고에 모이는 참이었다. 저게 미스 티아의 작전이었습니까? 하는 질문엔, 아까와 달리 존경심이 섞여 있었다. 테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저것은 후안의 작전이었겠지 하고 생각했다. 부하의 공적을 가로채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점점 이 고착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빨리……."

  "예?"


  제발, 카포.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마침 벨소리가 울렸다. 예, 카포. 그 대답에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리하자고― 그 나른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카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테리어드를 바라보는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는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리라.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집어넣는 것과 동시에 나이프를 두 개 꺼내,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목에 찔러넣었다. 그들의 단말마는 억, 단 한 마디였다.

  정말 짧게도 끝나 버린 그들의 인생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컨테이너 위에서 뛰어내렸다.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혀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를 냈지만 테리어드는 지극히 냉정했다. 창고 안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 명의 표정이 변했다. 숨어서 지시를 내려야 할 최고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 한 사람, 후안만큼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랬다.


  "카포께 연락이 왔다."


  이 말만 해두면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대로, 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한 정 꺼냈다.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어소시에이트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는 걸 보고 테리어드는 창고를 나섰다. 총성을 들은 미군이 몰려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4.


  가까이서 본 해린의 눈은, 적어도 테리어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깔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는 묵묵히 해린의 목을 노렸다. 핏줄이 선명히 드러난 하얀 목에서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피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이 아닌 열. 피가 끓어 얼굴을 붉게 만드는 열기와는 다른. 순간 테리어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직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에 지독히 자존심이 상했으나, 내심 안심했다. 기왕이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분명 테리어드의 머릿속에도 있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지 않은 그 이유가, 자신과 해린에게 있어 조금 달랐을 뿐.

  테리어드는 제 쪽에서 거리를 벌렸다. 해린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띠었지만 생각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두 다리를 벌려 착지하자 드레스 사이로 투척용 나이프가 우수수 떨어졌다. 해린이 테리어드를 향해 총구를 치켜든 것과 나이프 여덟 자루가 한꺼번에 해린을 노리고 날아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5.


  같은 시각, 테리어드의 지시를 받고 저격을 준비하고 있던 어소시에이트는 괜히 주변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지시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10분 정도 몸을 차가운 컨테이너에 밀착하고 있으면 어깨가 삐걱거려서 쏠래야 쏠 수가 없게 된다. 젠장, 그런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는 여자라니.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내며 삐걱거리는 어깨를 살짝 가다듬었을 때였다. 갑자기 강한 힘이 그의 머리를 눌렀다. 윽,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라이플을 놓쳤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줄도 놓쳐버린 셈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를 떠올리려 했다. 미군 중 누구 하나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소리없이 뒤쪽으로―


  "안 되죠. 아무리 저격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자기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언제나 주변에 신경을 쓸 것. ―저격수의 행동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는 제 시선 끝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다. 남자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누른 채 그 몸 위에 걸터앉은 테리어드는 제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댔다. 미, 미스 티아,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는 물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속삭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여기서 죽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분을 밝히고 투항하겠습니까?"

  "시, 신분……?"

  "그래요. 당신의 그, 벌레 같은 조직 이름을 대라는 뜻입니다."


  남자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차가운 나이프가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듯 빛났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잔혹하다. 한 번 정도 같이 일해본 적이 있었지만, 남자인데다 시체를 수없이 봐온 자신도 흠칫 놀랄 만큼의 잔인한 살해 방식을 취했다. 노스트라의 상어. 그 이빨이 이번엔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도 같은 꼴을 당했을 거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6.


  총알이 맞춘 것은 테리어드도 그녀의 나이프들도 아니었다. 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제 옆에 있는, 건물이라면 어디든 설치되어 있는 소화기임을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뿌드득 이를 갈며 나이프를 손에 쥐는데, 흰 연기 속에서 날아온 총알이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튕겨냈다. 이후 해린이 취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왼손을 제 머리로, 오른손을 가터에 돌려놓았던 나이프로 옮겼다. 금색 실을 한 줌 손에 쥔 순간 구둣발이 튀어나와 테리어드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급소에서 비껴나간 곳을 얻어맞아, 테리어드는 벽으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하얀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해린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볼 일 없다 생각했던 적은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테리어드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해린은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들이댔다.


  "이걸로 체크메이트예요, 신데렐라. 이제 어쩔 건가요?"

  "……글쎄요, 아직 체크메이트는 이르죠."


 테리어드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해린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금색 실― 아니, 머리카락? 그 정체를 깨달았어도 해린의 시야는 일순간 가려졌다. 그리고 그 일순간만으로도 테리어드는 충분했다. 틈을 노려 해린의 가슴을 힘차게 걷어찬 테리어드는 벽과 해린 사이에서 몸을 빼어 튕겨져 날아간 나이프를 주웠다. 공격은 적중했으나, 해린의 데미지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까 테리어드가 잘라낸 제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해린의 시선이 잠시 그것을 향했다가, 테리어드의 짧아진 머리카락 끝으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됐네요."

  "미용실에 가서 손질하면 돼요."

  "가발을 쓰시기 편하겠는걸요."

  "그러게요."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의 대화가 오고간 뒤, 총알과 나이프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7.


  테리어드는 시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미군은 저격수를 포함한 네 사람이 투항하자 더 이상 적이 없다고 굳게 믿은 모양이었다. 시간을 벌 때도 후안이나 자신은 뒤에 숨어 있고 되도록이면 그들이 나서도록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입을 모아 이곳에서 무기 밀매를 하던 것은 노스트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직이라 말하고 있을 터였다. 네 명의 증언이면 신빙성이 있다. 만약 배신하고 엉뚱한 말을 입에 올릴 경우엔 당장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들에겐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된 것이다. 후안이 창고에서 사라진 것을 파악하고 테리어드 역시 몸을 피했다. 그 날 임무의 마무리는 류상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뿐이니, 후안은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분명 매우 장난스런 문자메시지를 보냈겠지.

  오늘 임무에는 테리어드와 후안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 중에서 이 비밀 작전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테리어드와 후안 두 사람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테리어드에게 있어 남은 일곱 명 중 믿을 사람은 후안 한 명뿐이었다. 후안을 제외한 여섯 명의 이름은 오늘 아침 테리어드가 받은 명단에, 단 하나의 공통점에 묶여 실려 있었다. 그 공통점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배신자'.

  그 여섯 명 중 네 사람은 다른 조직에서 노스트라에 들어온 스파이였고, 나머지 즉 테리어드가 죽인 두 사람은 원래 노스트라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 좀 더 큰 이익을 위해 제 신분과 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긴, 진짜 '배신자'들이었다. 그것도 노스트라의 가장 큰 적인 헤니르가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은 조직. 후안이 회의에서 보고한 사실들― 미군이 무기 밀매 루트에 주목하기 시작한 일, 몇몇 브로커의 행동이 이상해졌던 일들의 주모자는 바로 그 조직이었다.신분증명서가 든 지갑은 이미 테리어드가 회수한 뒤였다. 아마 두 사람의 시체는 저들의 동료로, 자수하자는 말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한 것처럼 되어 있으리라.


  '……여하튼, 임무 완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오케이 사인이 내려졌어도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바쁠 것이다. 대신 메시지만 한 통 보내놓고 테리어드는 죽은 자들의 지갑 내용물을 꺼냈다. 한 명의 지갑엔 정말 돈밖에 없었고, 나머지 한 명의 지갑엔 운전면허증과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죽인 남자는 자신과 똑닮은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은,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라이터를 꺼내 운전면허증을 태운 뒤에도 테리어드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제이나도 가지고 있었지. 환하게 웃고 있는 남동생의 사진을. 그때도, 그 사진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아들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겨 놓고는, 사진을 찢었다. 사진 조각이 테리어드의 손에서 바람을 향해 흩어졌다. 그 사진도 이렇게 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 청년의 얼굴은 이미 외우고 있는데.

  짧은 체념과 회한을 안고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후안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기 위함이었다.




#8.


  "미스 티아!"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점장의 발소리에 해린은 총을 거두었다. 물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테리어드는 여전히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해린은 정말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품에서 필름과 라이터가 나왔다. 해린의 손끝에서 타들어가는 필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부터 필름을 태웁니다' 하고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무척 눈에 거슬렸다. 물론 그녀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테리어드에게 보내 온 도전장과 사진에 복사본이 없다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이게 문제의 필름입니다. 헤니르에는 알리지 않을 거예요."


  그 말로 적어도 눈앞의 여자가 노스트라와 헤니르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고, 자신의 정체도 알고 있고, 헤니르 쪽에 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도 큰 수확이겠지. 그래서 테리어드는 굳이 해린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해린도 즐거웠다는 말만 남긴 채 깔끔하게 뒤로 돌아섰다.


  "그러니 안심하고 노래하세요, 신데렐라."


  또각, 또각, 또각. 단정한 발소리가 사라지자 테리어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달려온 점장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귀에 닿질 않았다. 신데렐라, 신데렐라라. 해린이 남기고 간 마지막 단어만 반복하며, 테리어드는 제 손에 들린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12시가 지난 지 꽤 됐으니, 이제 마법은 풀렸겠지. 그녀에게 걸려 있던 것은 무슨 마법일까.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는 집으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간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데리러 온다. 하지만 그 왕자가 가지고 오는 것은 유리구두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목숨을 끊어놓을 비수이리라. 사진으로 본 두 명의 소년. 오늘 죽인 남자의 아들과, 제이나의 남동생. 그들 중 누구라도 복수하러 온다면 기꺼이 맞이해줄 생각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얌전히 죽어줄지 아닐지는, 테리어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짧아진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잘라버린 머리에 당연히 미련은 없다. 길게 자란 머리는 동경했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줄만한 상대는 없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목에 닿아, 맥이 그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두근, 두근, 두근. 아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리어드는 나이프를 품 안에 돌려놓았다.


  "It's not dead end……."


  아직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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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Mission 01.







  "그전에 일단 앉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후안을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나름대로 친절을 베푼다고 한 일이었는데, 카포레짐이 앞에 있다 보니 절로 표정을 굳히는 바람에 오히려 더 긴장시킨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눈 딱 감고' 앉으려다가 제 무릎에 앉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눈앞에서 류상과 니콜라이가 웃음을 터트리자, 테리어드는 얌전히 그를 들어 제 자리에 앉혀주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한 웃음이었겠지만, 후안의 표정은 테이블 전체에 흐르는, 미묘하게 긴장된 분위기에 경직되어 있었다. 가엾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솔져가 된 지 4년차인 테리어드는 이제 카포레짐인 류상의 회의 진행 방식도, 가끔씩 치고 들어오며 진지한 농담을 하는 니콜라이의 태도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 이 크루의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괴로움을 지금의 후안도 겪고 있는 것이리라. 긴장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 줘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던 테리어드의 생각을 회의로 돌려놓은 건 류상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우선은 들고양이가 물어온 정보부터 들어볼까?"




**




  "아까는 정말, 정- 말 실례했습니다, 누님!"

  "됐어. 긴장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 ……그리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이제 적당히 코드네임으로 불러줬으면 하는데."

  "에이, 왜 그러십니까. 이 호칭이 더 정감있고 좋잖아요. 아, 싫으시면 그만둘게요!"

  "싫은 건 아니야."


  애초에, 테리어드는 자신보다 어린 존재들에게 꽤나 상냥했다. 정확히는 상냥하게 굴려고 하는 편이었다. 남자를 기피하는 그녀의, 알 수 없는 현상도 사실은 연상의 남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인상이 차가워서 그런 건지 가까이 하려는 존재들은 적었다. 그러니 후안의 이 싹싹한 태도는 그녀에게도 꽤 안심이 되었다. 잠시 테리어드의 옆에 서서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사교성 멘트를 던지던 후안은 테리어드의 잔잔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그럼 용서하신 걸로 아는 겁니다? 라고 말하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테리어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었다. 아직도 스파클링이 선명한 샴페인이었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좋았다. 술이 지나치게 들어가면 사람은 방심하게 된다. 그건 펍에서 4년을 보내면서 테리어드가 얻은 절대적이고, 결코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 가만히 발걸음을 옮기자 드레스 자락이 발목에 스쳤다. 또 이런 불편한 옷을 입게 될 줄이야. 허벅지에 찬 가터와 거기 꽂힌 나이프 세 자루는 무심하게도, 테리어드가 입고 있는 에메랄드빛 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어소시에이트들의 시선을 피한 채 칵테일 잔에 조심스레 입술을 갖다댔을 때, 툭 하고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건드렸다. 칵테일 잔에 선명하게 남은 입술 자국을 장갑 낀 엄지손가락으로 지우면서, 테리어드는 자신에게 이런 복장을 하도록 명령한 직속 상관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쏟을 뻔 했잖아요, 카포."




**




  문제는 산더미 같았다. 후안이 가져온 정보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의 긴장을 풀어주자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테리어드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확실한 건가? 그렇게 묻는 류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무기상을 하고 있는 류상의 걱정은 테리어드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후안의 정보 수집 능력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테리어드는 꼼짝없이 그를 길거리의 소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를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후안 같은 상대에게라면 제아무리 군기가 바싹 선 사람이라도 쉽게 경계를 풀고 말리라. 오히려 그들 크루가 이 정도로 빠르게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이 테이블에서 후안을 의심할 자는 없었다. 류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턱을 괴고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작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준 후안은 입을 가만히 다물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긴장해서 깨물은 듯 약간 부르튼 입술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나중에 립밤이라도 건네 줄까.


  "그럼, 대책을 내어 보지."


  정적 끝에 류상이 입을 열었다. 후안은 한시름 놓은 듯 부르튼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그 역시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빙빙 돌고 있을 터였고, 옆에 앉은 니콜라이 역시 그럴 터였다. 물론 테리어드도 그랬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무기 밀수는 엄연한 범법. 아무리 범법적인 일을 일상처럼 하는 마피아일지라도 '노스트라' 라는 '기업'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것은 금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급한 사항일수록 생각을 정리하는 건 되도록이면 빠르게. ―를 신조로 삼고 있는 테리어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바로 글로 정리해 입을 열었다.


  "이 사안에서 만만히 볼 게 못 되는 것들 중 하나는 브로커와의 접선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우선 무기를 들여올 수 없으니까요. 밀매 루트에 시선을 돌렸다는 건, 이름난 브로커들에게는 거의 감시가 붙어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렇지, 와일드캣 Wildcat?"

  "아, 넵. 그건 거의 확실합니다."

  "게다가 몇몇 브로커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들에게서 정보가 새어나가면, 카포에게 바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배신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감시하에 둘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저희의 영역으로 거래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글쎄. 겁에 질린 토끼가 호랑이 굴로 순순히 기어들어올까?"


  니콜라이의 입에서 나온 반대 의견은, 그의 평소 말투가 그래서 그랬지 결코 비꼬려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나름 선배로서의 충고였다. 그는 어쩌면 테리어드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읽었는지도 몰랐다. 옛날부터, 그런 점에 있어선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입을 떼었다.


  "노스트라 간부들 외에는 누구도, '몬도 카네' 가 노스트라의 소유라는 걸 모르니까요."




**




  "잘 어울려. 역시 명령은 하고 볼 일이군."

  "덕분에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만."

  "자네는 그래도 괜찮아. 우리 크루의 꽃이니까."


  하긴, 가시가 좀 많지만.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테리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상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난끼 많고 기본적으로 웃는 낯을 유지하는 카포레짐은, 테리어드에겐 제일 대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녀가 속한 크루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소시에이트 두 사람을 제외하면 전부 그런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그들끼리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가능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여자인데다 싹싹함을 갖추지 못한 테리어드로선 그들의 화제에 끼어드는 건 조금 어렵기도 했다. 만약 넷이서 노래방이라도 간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탬버린을 치거나 음료수 심부름을 하고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라는 게, 류상이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힘일 터였다.


  "펍에서는 쓸데없는 서비스 정신 발휘하느라고 고생하지? 드레스도 야한 것만 입어야 하고 말야. 뭐, 어울리긴 하겠지만. 일단 지금 이 장소에선 점잔 빼고 있어도 괜찮네. 그러라고 그나마 노출이 덜한 걸로 골라서 입혀 놨으니까."

  "예, 안 그래도 덕분에 목이 다 아프네요. 너무 목을 뻣뻣하게 세워서 그런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지자 핫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은 류상은 잠깐 콘실리에리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언제 들어도 사람 좋은 웃음소리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새로 솔져로 승급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율리아 세스트라, 지아Zia. 공적을 인정받아 어소시에이트에서 솔져가 된 셈인데다, 성별도 같으니 좋은 말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축하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 파티의 주연 비슷한 몸이니만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혹시 날 찾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까 류상이 어깨를 건드렸을 때보다 더 큰 동요였다. 뒤를 홱 돌아보는 바람에 그의 옷에 샴페인을 쏟을 뻔했다. 황급히 잔을 붙잡은 덕에 그 안에 든 칵테일은 단 1mm도 흘리지 않았지만, 니콜라이는 마치 샴페인 날벼락이라도 맞은 양 어쿠쿠쿠, 하면서 과장된 동작으로 뒤로 물러섰다. 놀랐잖아요.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그는 웃었다.


  "이것 참, 실례. 하지만 자네는 젊으니까 말야, 이 정도로 심장 마비를 일으키지는 말아달라고. 드레스 입은 아가씨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그녀는 독을 마시지도 않았고 심장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죽었을까? 우리는 이 사실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알고 보니 그녀의 코르셋이 너무 허리를 졸라매서 질식사한 거였다! ―하는 싸구려 전개는 사양이야."

  "저야말로 갑자기 죽는 건 사양입니다."


  부탁이니까 법의학 드라마 일을 현실로 가지고 오지 말아달라고,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할 뻔했다.




**




  좋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톡톡, 하고 니콜라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지막히 속삭인다고 하긴 했지만, 좁은 테이블에 정적까지 흐르고 있어서 류상이나 후안의 귀에도 들렸을 터였다. 니콜라이는 아까 전,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임시루트를 쓰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낸 참이었다. 후안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금 미군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을 메인 루트를 그대로 이용하는 건 위험하다는 지극히 타당한 판단을 기초로 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테리어드는 방금, 그의 의견에 살을 덧붙여 그 루트 중 하나에 함정을 파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시선을 임시 쪽으로 돌리자는 건가?"

  "예. 저희가 정규로 이용하고 있는 루트를 A, 임시로 이용하는 루트 중 하나를 B라고 치고, A를 통한 거래가 마치 B에서 있었던 것처럼 조작을 해놓는 겁니다. 효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A에 대한 감시의 눈은 어느 정도 사라지겠지요."

  "좋은 방법이지만, B 루트를 A 루트처럼 꾸민다는 건 결국 경찰에게 틈을 보여준다는 소리지? 그를 위해 잃어야 할 손해도 상정하고서 얘기한 건가?"

  "물론입니다, 카포.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류상이 이 제안을 솔깃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니콜라이도 후안도 류상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이것으로 끝내지. 나올 만한 방안은 다 나온 것 같군."


  긍정적이라는 건지, 부정적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답안이었지만, 니콜라이가 이쪽을 보며 씩 웃는 게 보였다. 턱을 괸 채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모양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He means, nothing bad. 나쁘지 않다는 뜻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So do I.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에게 듣는 칭찬은 언제나 그녀의 어깨를 조금은, 으쓱하게 만들었다.




**




  "넥타이가 비뚤어졌어요."

  "아, 괜찮아. 내버려둬. 나이 먹어 잘 차려 입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래봤자 마흔여섯이에요.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아무리 설쳐봤자 나이 든 건 나이 든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누가 들으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아 대화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7년 전부터 그랬다. 새삼스런 일이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어, 하는 말을 던졌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푸석푸석한 피부나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한 주름은 그를 좀 더 심술궂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딱히 그런 성격도 아닌데, 오해가 생긴다는 건 피곤한 일이라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는 말해도 심술궂은 건 맞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꼬투리를 잡아서 놀리곤 하는 성격은, 아무리 익숙해져 있어도 조금 짖궂다고는 생각하니까. 그와 어울려서 임무를 수행하던 7년 동안, 온갖 일이란 일은 다 겪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또한 재미있었다. 괜히 그때를 생각해내자 테리어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충동을 입밖으로 툭, 하고 내뱉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네."

  "뭐야, 그런 드레스 입고? 그거, 여기 있던 거 아냐? 냄새 배면 큰일이잖아."

  "무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그래, 좀 참으라고. 폐암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젊은 애는 오래오래 살아야지?"

  "……암으로는 안 죽어요."


  종양은 이미 들어냈다. 아니, 종양이 자리잡고 있던 부분을 포함한 전부를 들어냈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건, 이곳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그저 자리를 대체하듯 존재할 뿐, 그 안에 무언가를 품을 수도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니콜라이는, 보기 드물게 입을 다물었다. 그 무덤덤한 배려 때문인지 흡연 충동이 더 심하게 들었다. 결국 테리어드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다 비우고는 뒤로 돌아섰다.


  "뭐야, 역시 피우러 가는 거냐?"

  "이만 돌아가겠어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고. 카포에게 먼저 간다고 전해주세요. 로빈에게도 안부인사 부탁하고요."

  "아, 그래. 이 늙은 몸 기꺼이 움직여 메신저가 되어주마."


  잘 가라. 짖궂은 웃음과 함께 니콜라이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다른 재미있는 것을 찾아 가 버린 것이리라. 뒤로 돌아서면서 테리어드는 일단 옆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핀부터 떼어냈다. 장갑을 벗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드레스룸에 몸을 옮겼다. 더 이상 드레스는 입고 싶지 않았다. 진저리가 날 정도는 아니었고 드레스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여자의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조금 다급하다 싶을 정도의 손놀림으로 옷을 척척 갈아입은 그녀는 넥타이 끈을 조이려다가, 손을 놓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 느긋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래, 보는 사람은 없지. 셔츠 위에 그대로 자켓만 걸쳐입고 그녀는 드레스룸을 나섰다. 또각,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 위에 울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 건물을 나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자켓을 열고, 안주머니에 있는 철제 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서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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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Mission 0.






  총은 싫다.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도, 방아쇠를 당겼을 때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도, 머리에 구멍이 뚫린 것 외엔 죽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시체도. 시체라면 시체답게, 정말로 죽은 것처럼, 그렇게 잔인한 모양이었으면 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아서의 시체를 보았을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체 앞에서 멍하니 눈물만 흘리고 있는 벨을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무릎을 꿇었다. 짙은 피 냄새와 바닥에 흩어진 오물과 벨의 눈물이 속을 뒤집어놨다.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에 벨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그녀가 쥔 총이 언제 나를 향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서만큼이나 나를 죽이고 싶었으리라.

  엄마 Mom.

  떨리는 목소리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벨은 무너져 내렸다.







  "벨, 벨? 집에 가야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테리어드는 눈을 떴다. 제이나는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뭣 때문에 잠을 그렇게 오래 자? 어제 잠 설쳤어? 순수하게 웃는 그녀는 테리어드의 의상 담당이었다. 가발까지 벗고 잠들 거였으면 옷을 갈아입지. 자, 갈아입어. 테리어드는 제이나의 손에서 옷을 받아들었다. 그녀에 대한 진실을 알았을 때 테리어드는, 세상이 뭔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이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제이나는 여전히 귀엽게 웃고 있었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옷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무릎에 올려둔 가발을 들었다. 하나의 밧줄처럼 땋아진 가발을 보고 제이나가 눈을 굴렸다. 어머, 벨. 가발은 왜 땋았어? 웨이브라면 내가 넣어 줄 텐데.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는 그녀는 테리어드가 가질 수 없었던 소녀다움과 귀여움을 지니고 있는 스물셋의 처녀였다. 돈을 모아서 시티 밖에 계신 어머니에게 부칠 거야. 그거 알아? 그 돈으로 내 동생이 학교에 들어간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녀가 털어놓는 꿈들은 테리어드에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꼈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테리어드는 고개를 들어 제이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제이나는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제이나.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급한 얘기가 아니면, 내일 해주면 안 될까? 나 이제부터 그이와 식사라서. 알지? 전에 네 노래 들으러 왔었던―"

  "건축 기사이자 헤니르의 간부인 스프링 말이지. 알고 있어."


  조직의 이름이 나오자 제이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천진난만하던 두 눈에 어린 것이 공포임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대에 설 때 신었던 10cm짜리 하이힐을 신은 그대로였다. 160cm도 채 안 되는 제이나는 머리 바로 아래에 있었다. 팔을 뻗어 어깨를 잡자 흠칫 떨었다. 제이나. 그렇게 부르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으, 응……?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향해 테리어드는 최후의 선언을 해버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여자는, 남자에게 빠져서 친의를 배신하는 사람이야."


  테리어드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발을 빠르게 제이나의 목에 휘어감았다. 컥, 하는 단말마 비슷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밝았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두 눈이 위아래로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입에서 침이 흘렀다. 그 귀여웠던 얼굴이 악몽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테리어드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저 힘을 주어, 졸랐다. 컥, 큭, 커헉……. 신음을 흘리던 제이나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되고 나서야 테리어드는 그녀의 목에서 가발을 풀어헤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제이나는 어깨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당연하다.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만 졸랐으니까. 그녀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자 떨리는 손이 어깨를 잡았다.


  "미안, 총으로 단번에 끝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총을 쓸 줄 몰라. 쓰고 싶지도 않고."

  "어…… 어으…… 어떻게……."

  "원래대로라면 너는 조직으로 끌려 갔어야 했어. 하지만 보스께서 인정을 베풀어 주셨지. 난 널 내 손으로 죽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걸렸다면 네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몰라."

  "시, 싫어…… 살려, 커헉, 줘……."


  테리어드는 벌어진 드레스 틈으로 손을 넣었다. 다리에 차고 있는 벨트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오직 제이나를 위해 어제 새로 산 물건이었다. 곧게 뻗은 칼날과 칼자루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꽤 고급품인 나이프였다. 기억나, 제이나? 내 대기실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왔을 때, 너는 다이아몬드에 깔려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다면 원이 없을 거라고 말했었지. 그래서 골랐어. 테리어드는 손을 뻗어 제이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너는 울면 예쁘지 않아.


  "Good Night, 제이나. Sweet Dream."


  그 작은 목에서 어떻게 그리 많은 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새빨갛게 물든 장갑을 벗고, 화장을 지울 때 사용하는 티슈로 손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티슈를 몇 장 더 뽑아 얼굴에 칠한 분을 거의 다 벗겨냈을 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 티아,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들어온 서너 명의 남자들은 손에 침낭을 하나 들고 있었다. 두 명이 침낭 안에 제이나를 능숙하게 옮겨담았다. 그들의 리더격 되는 사내가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수고랄 것도 없었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가련하고 나약한 여자였다. 힐을 벗고 제 옷을 챙겨든 다음 옷을 갈아입는 칸으로 들어갔다. 가슴을 꼭 조이는 드레스는 답답했다. 그러나 드레스를 벗었어도 답답함은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이상했다. 사람을 죽여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더욱.

  노스트라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자일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노스트라 조직 소유 펍에서 일하는, 한 싸구려 가수의 화장을 전담해 주는, 솜씨 없고 가난하고 돈에 고픈 여자라도 묵계를 지켜야 할 의무는 있었다. 제이나에게 다리를 절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노모와 대학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려고 하는 남동생이 있다는 것도, 그들의 생계가 오직 그녀가 벌어오는 돈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도, 가족들에게 실종으로 처리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노스트라에서 단 1g의 가치도 갖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니 노스트라에게는 간부들의 정보를 일부 전달받았을 헤니르의 조직원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노스트라의 이름 아래 운영되는 펍에 몸담고 있는 이상, 그녀는 노스트라에서 일하는 여자였고 노스트라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테리어드는 제이나를 죽였다. 조직의 명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을 죽였다. 제이나를 싫어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호감과 연민을 지니고 있었다면 모를까. 제이나가 배신자이니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분노나 살의가 끓어올랐던 것도 아니었다. 미소가 밝고, 미래에 대한 꿈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이 거리 어디에나 있는 보통 아가씨. 그래서 많이, 좋아했었다. 자신에게는 갖지 못한 것을 많이 갖고 있었던 처녀를 아꼈다. 그런 상대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 여인은 테리어드를 죽였어야 했다. 젊었을 적 자신의 모습을 빼닮은 딸, 그 모습으로 제 아비를 홀리고 제 행복을 빼앗아가고 이제는 제대로 된 정신까지도 유지할 수 없게 만든 궁극적인 원인을, 총 한 방으로 정리해 버릴 수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그때 테리어드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한 명의 가엾은 소녀였으니까.


  "미스 티아, 차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천막 밖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귀찮았다. 셔츠 한 장에 팬츠만 입고 막을 젖히자 걱정스런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그렇게 요구하자 남자는 바로 선글라스를 썼다. 다들, 다들 그랬다. 벨이 자신의 남편을 쏘아 죽이고 미쳐버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테리어드를 동정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나서도 그랬다. 어떻게 저런 짐승 같은 놈이, 괜찮니, 아가? 벨도 가엾지, 어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제 자식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걱정과 동정, 경멸 섞인 말을 들으면서 테리어드는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시선이 쏟아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서와 내가 가해자라면,

  벨은 피해자인데.

  테리어드는 가발을 집었다. 땋은 머리를 고정시켜 뒀던 끈을 풀자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손에서 떨어졌다. 평소에는 가발이 흐트러지면 언제나 제이나가 빗어줬지만, 오늘부터는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가발을 마네킹 얼굴에 걸어놓고 테리어드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로 아직도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귀찮아. 그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평소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끝내면 택시로 돌아갈 테니 흔적이나 제대로 처리해줘요."

 "아, 알겠습니다."


  남자가 허겁지겁 대기실을 나가고 나자, 테리어드는 혼자 남았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피 냄새와 오물 자국이 선명한, 탁한 공기였다. 창문조차 없는 작은 방. 불만 끄면 어린 시절 자신의 방과 똑같을 것 같았다.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벨이 앉아 있었다. 권총을 꼭 쥐고, 자기 무릎 바로 앞에 쓰러진 아서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테리어드는 빗을 집었다. 가발을 빗어내렸다. 제이나의 반항의 흔적이 몇 올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계속 가발을 빗겼다. 가발은 단정하고 깔끔한 윤기를 되찾았지만 테리어드의 얼굴을 비춰줄 수는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쪽 눈에서 나와 볼을 타고 흐르는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기회가 없어진 셈이었으니까.

  벨, 왜 나를 쏘지 않았어?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녀에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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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수고했어요, 벨! 같이 살면서 노래는 많이 들어봤지만,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하는 걸 보니까 또 다르네? 와, 진짜 감탄했어! 멋졌어!" 

  "그만 칭찬해요, 제이나. 부끄러우니까." 

  "얼굴색 하나 안 붉히고 그런 말 해도 신뢰가 안 가." 

 

  투덜거리며 얼굴에 붙은 분을 조금씩 지워주는 제이나를 보면서 테리어드는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게 웃었다. 퍼프에 클렌징 크림을 잔뜩 묻힌 그녀는, 한 통에 200달러 하는 고급 파운데이션이 아깝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점장도 이상해요. 갈색 피부가 유색인종을 생각나게 한다니, 대체 언제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나 그 지당한 원망은 사실 점장이 아닌 테리어드에게 쏟아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이 가게의 영업방침과 가수의 피부를 희게 만든다는 생각은 테리어드가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유색인종이란 웃긴 이유가 아니라, 그녀가 이 펍의 실제 주인이자 노스트라의 솔져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미안, 하고 속으로만 사과하고 테리어드는 장갑을 벗었다. 장갑 위로만 바른 파운데이션이 바싹 말라 있었다.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익숙해지면 괜잖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위장. 가만히 그 단어를 입술 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이것이 과연 필요한 일일까. 노스트라에 들어와서, 스물두 살의 처녀에겐 과분할 만한 힘을 이미 손에 넣었는데. 조직에 들어온 지 2년만에 솔져가 된 그녀를 보고 특례라 말하며, 그녀가 보스에게 뭔가 수를 썼다고 확신하는 조직원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출세의 원인을 물으면 해줄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만큼 많이, 죽였노라고. 

  테리어드 W. 메저즈라는 강자의 발밑에는 수많은 약자의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실례합니다." 

 

  순간 감상에 빠져들 뻔한 테리어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나가 당황하며, 이리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힘으로는 뿌리치지 못할 거라 생각해 도와주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은 테리어드에겐 익숙하고도 반가운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테리어드를 보고 제이나는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가발을 테리어드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거꾸로 씌우는 바람에 목이 돌아간 듯 기괴한 형상이 되어버렸다. 

 

  "나서면 안 돼요, 벨! 이 술취한 아저씬 내가 상대할 테니까 당신은 옷이나 갈아입어요!" 

  "아저씨라니 너무한걸. 그야 뭐, 이미 아저씨가 아니라 늙은이긴 하지만, 술이 취한 건 아니라네. 아, 아니면 그냥 척 봐도 서 있는 게 위태로워 보이는 건가? 아아, 나이 들었단 건 서운하구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걸 보면 아직 현역인걸요."

  "그래?"

  "예. 적어도 제 눈에는." 

 

  웃음기 섞인 테리어드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이나는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 아는 사람이예요? 가발을 벗은 테리어드가 씩 웃고, 남자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연거푸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제이나에게 남자는 흐뭇한 미소로만 답했다. 제이나의 나이대는 딱 그의 딸쯤 되었을 것이다.


  "미안, 제이나. 먼저 돌아가요. 아니, 오늘부턴 별거였던가?"

  "아뇨, 오늘 하루종일 이삿짐 센터랑 연락이 안 돼서…… 아직 짐은 우리 집에 있는데."

  "내일 집으로 갈게요."


  제이나는, 솔직히 말해 테리어드와 눈앞의 남자가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싶어하던 눈치였지만, 고용주가 저리 말하는데다 아까 실수한 것도 있어서인지 그녀는 평소의 싹싹한 태도를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클렌징 도구만 내려놓고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이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택시비까지 쥐어줬으니 밤길이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위안 삼기로 했다.


  "오실 거라면 연락 한 통은 주시지 그러셨어요."

  "서프라이즈 파티!"

  "……주책이시네요."

  "어. 그 앞에 '나이 먹고' 는 생략했지, 너."


  그는 천에 싼 병을 보여주었다. 비쌌다고. 고급 럼주를 건네주는 그의 입가엔 언제나처럼 미소가 만연했다. 솜씨 좀 볼까, 아가씨 Kitty. 그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애 취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미안해, 아가씨 Kitty. 젊고 예쁘장한데다 매력까지 갖춘 아가씨를 죽이는 건 정말 싫은데 말이지, 이 아저씨처럼 나이를 먹으면 윗사람이 너무 무섭게 보이는 법이야. 우리 보스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아가씨가 목격자라서 어쩔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그래서, 지금 저를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어…… 그렇긴 한데, 아가씨. 이런 상황이면 보통 여자애들처럼 좀 겁 먹고, 비명 정도는 질러주지 않으려나. 동정심이 들어서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그럴 거였으면 진작에 살려줬겠죠. 소녀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삼키며 남자의 총구를 바라보았다. 한 번 가운에 닦았다고는 해도, 그 총에는 더러운 자가 토해낸 피와 타액이 아직 묻어 있었다. 그 사실이 꺼려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에게 유린당했을 때 소녀의 가슴에는 그보다 더러운 것도 묻어 있곤 했었다. 그래서 소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권총의 총구를 손으로 잡았다. 어어, 아가씨. 그거 잘못하다가 손 박살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충고도 듣질 않았다. 총. 남자는 이것으로 의사를 단번에 죽였다. 소녀에게 있어서, 소녀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강자를 너무도 쉽게 죽였다. 그것은 겨우 스무 살이 되는 소녀에게, 그 이상 있을 수 없는 강자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권총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무엇을 느꼈을까. 지금이 되어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말의 동정 비슷한 것을 느꼈음은 확실했다. 총구가 막혀 잘못 쓰면 제 손도 박살날 그 총 외에도 다른 무기를 잔뜩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굳이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아가씨, 살아 있고 싶어?"

  "……그렇다기보단, 죽을 수 없어요."

  "좋아, 그럼 내가 이제 기회를 세 번 줄게. 뭐든 묻고 싶은 걸 물어봐. 그 질문에 난 거짓말하지 않고 제대로 대답할 거야. 그럼 내 대답을 잘 듣고 날 솔깃하게 만들어봐. 내가 널 살려 줄 마음이 들도록 해봐. 대신, 질문을 잘 골라야 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좋아요."


  소녀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녹색 눈동자가, 이전에 소녀를 바라보던 남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눈을 하고 있었기에, 믿었다. 굳게 믿고,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소녀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아차린 남자는, 벌써 주름이 조금씩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소녀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기로 했다. 입이 움직이는 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눈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첫 번째.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나름대로 감미롭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건 어디서 넣었어요?"

  "우리 조직."

  "저 남자는 왜 죽었죠?"

  "아아, 정보를 빼돌렸어. 우리 조직이랑 손을 잡고 장기 밀매를 하고 있었거든. 조직의 통로, 비슷한 거였고. 그런데 그 정보가 헤니르…… 우리 상대 조직에 넘어갔어. 브로커가 정보를 사가지고 왔나봐. 30만 달러밖에 안 줬다고, 매우 싸게 팔았다고는 하는데, 뭐. 저 남자가 넘겼든 그렇지 않았든, 정보가 샌 이상 우리 조직엔 큰 손해지. 내 임무는 배신자를 제거하고, 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회수해 오는 것. 이상. 마지막은 좀 더 잘 골라야 될 거 같아, 아가씨. 여태까지의 두 질문은 재미없었거든."


  재미있을 거예요. 소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날 당신 보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나요?"


  그 말을 한 순간 소녀는, 갓 스무 살이 되었고 약자인데다가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소녀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가 되었다.





  "아아, 정말, 그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 아니, 어린애 티도 못 벗은 여자애가 말이지. 갑자기 조직에 넣어달라는 거야. 하, 이렇게 웃긴 얘기가 어딨어."

  "솔져 데뷔를 축하해 주러 오셨다더니…… 재미없는 과거 얘길 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만 같네요."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는 거야. 그때도 아름다운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너무 변해서 무서울 정도다. 세월이란 무서워. 이 늙은이한테는 특히."

  "그러니까, 아직 늙진 않으셨어요."

  "한창 때의 아가씨가 섹시한 옷차림을 하고 앉아 있는데 전혀 꼴리지 않는다는 게 이미 늙었단 증거야."


  제게는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마운걸요.

  테리어드는 슬쩍 미소지으며, 투명 막대기로 젓고 있던 칵테일 잔을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사 가지고 온 럼 외에는 재료가 그리 좋지 않아서, 맛있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그래도 남자는 전혀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테리어드가 가장 좋아하는 럼을 사 가지고 온 것도, 일부러 테리어드가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어디까지나 솔져가 된 그녀를 '축하'하려는 의미였다. 그 이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니콜라이 페드로프는, 상대가 자신에게 뭔가를 원하면 언제나 그 기대치를 배반하는 남자였다.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스무 살의 테리어드에게, 자신을 조직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는 아무리 니콜라이라도 깜짝 놀란 듯했다. 그럴 만했을 것이다. 죽음을 직면한 여자의 발버둥이라기엔,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을 테니까.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약간 찌푸리고, 제가 쥐고 있는 여자의 목숨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총을 원래 하려던 것처럼 죽어 나자빠진 자의 몸 위에 던졌다. 내가 왜 그래야 되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테리어드는 이미 니콜라이가 제 마지막 질문을 마음에 들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망설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테리어드는 다시 한 번 단서를 풀어주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정보는 내가 알고 있어요. 저 남자의 밀매품과, 거래 코스와, 주둔지가 어디고, 주로 거래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니콜라이는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테리어드는 결정타를 날렸다.


  그 정보를 브로커에게, 고작 30만 달러를 주고 팔아넘긴 게 바로 나니까요.


  그 날 이후 니콜라이는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나와 함께 언더시티로 가자. 테리어드는 그 손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숙직실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정리했다. 정리를 끝내고 나자, 테리어드에게 남은 건 작은 배낭 하나 정도였다. 집을 팔았다. 노부부에게서 받은 25만 달러는 전부 통장에 넣었다. 자리를 잡으면 돈을 입금할게요. 테리어드는 믿을 수 있는 수간호사에게 통장을 맡겼다. 테리어드가 아는 여자들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다. 자리를 잡으면 더 입금할게요. 벨의 몸이 회복되면 요양원 수속을 밟아주세요. 간호사들은 테리어드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들은 테리어드가 이제부터 몸을 담그려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몰랐다. 다만 진심으로 테리어드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가장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벨은, 처음 테리어드가 헤어져서 살아야겠다고 말했을 때 이렇게 물었다. 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벨이 괴로울 테니까. 테리어드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 대답을 벨이 납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곁에 있어주던 소녀가 이제는 그 자리를 진심으로 떠나길 바란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벨은 테리어드를 잡지 않았다. 잡았더라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제 어미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리어드는 브로커에게서 받은 돈도 통장에 넣었다. 테리어드는 그 통장을 그대로 니콜라이에게 건네주었다. 니콜라이는 그 돈을 받았다. 그가 그 돈을 조직에 갖다 주었는지, 아니면 자기 것으로 했는지는 몰랐다. 테리어드는 물어볼 기회를 잃었고, 니콜라이는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대답해 주질 않았다.


  "아, 맛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너무 늦게까지 있어도 실례가 될 테고."

  "아뇨, 전 상관없는데……."

  "내가 상관 있어."


  매력적인 아가씨는 심장에 안 좋다고들 하잖아? 씩 웃으면서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여태까지 테리어드가 니콜라이에게서 본 적 없던, 적어도 그가 테리어드를 향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던, 씁쓸함과 아주 약간의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중년 남자가 흔히 짓는 과거에의 향수와도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걸 알기에 테리어드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순식간에 안개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 잘 지내게, '미스 티아'. 소집장에서 만나지."


  그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운 채 니콜라이가 악수를 청했을 때, 테리어드는 그제야,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았다. 자신은 그를 향해,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요구했었다. 아가씨Kitty 라고 부르지 말아요. 니콜라이는 그 요구에 대한 대답만큼은 제대로 해 준 셈이었다. 그것만큼은. 그래서 테리어드는 니콜라이의 손을 잡는 대신, 스무 살의 갓 여자가 된 소녀로 돌아와 웃었다.


  "네, 다음에 또 만나요. ……니콜라이 씨."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테리어드는 아직도 그의 코드네임을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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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오늘도 날씨가 좋아, 벨."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여인은 침대에 앉아서, 링겔 바늘이 꽂힌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소녀는 커튼을 걷었다. 따스한 햇살이 여인의 고운 목덜미에 쏟아졌다. 어머, 눈부셔. 중얼거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소녀는 침대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오늘 날씨는 굉장히 따뜻하대. 내일부턴 다시 추워지지만. 그러자 여인은 뜨개질감에서 시선을 떼고 소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하고 되묻는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아름다웠다. 소녀는 여인의 그런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드디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어. 나와, 벨과, 단둘이. 웃으면서 소녀는 여인의 손을 잡았다. 벨, 우리 같이 산책할까? 하지만 나는 움직이기가 불편한걸. 괜찮아! 내가 지금 당장 나가서 휠체어 빌려올게! 그러자 여인은 웃었다. 그래 주겠니? 그녀의 상냥한 웃음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여인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언제나 소녀에게는 기쁘고, 행복했다. 소녀는 밖으로 나가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부탁했다. 담당 간호사의 도움으로 조심스레 여인의 몸을 휠체어로 옮긴 소녀는 휠체어를 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녀올게요! 소녀의 밝은 목소리는 간호사들을 기쁘게 했다. 여인이 앉은 휠체어를 끌고 소녀가 앞을 지나가면 간호사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정말 닮은 모녀네요, 하고 속삭였다. 아주 옛날부터 그런 칭찬을 들으면 가슴이 따뜻했고, 무척 행복했다. 들었어, 벨? 우리가 닮았대. 그러자 여인도 환하게 웃었다. 그런 모양이구나. 그녀가 아까부터 뜨고 있는 것은 목도리였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기 전에 만들어야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여인은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 없는 허밍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해, 듣기 좋았다. 소녀는 꽤 길어진 목도리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마침 며칠 뒤는 소녀가 성인이 되는 생일이었다. 소녀는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은 좀 어때?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물론이지. 테리가 날 아주 잘 돌봐 주잖니."

  "나, 지금 집을 알아보고 있어. 예전 집보다는 좁고 가전도구도 많지 않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우리 즐겁게 지내자. 예전처럼 같이 케이크도 굽고, 즐겁게 웃고,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그래, 이젠 말릴 사람도 없어. 나, 다시 피아노 학원에 다닐래. 내가 반주할 테니까 벨은 노래를 불러.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노래하자. 어때?"

  "응, 그래. 멋지겠구나."

  "이제 우리 둘뿐이지만…… 난 이제 성인이니까…… 내가 돌봐줄게. 여태껏 벨이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그렇게 해줄게. 응? 엄마Mom."


  그렇게 말하면서 여인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소녀는 여인이 지은 경악한 표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가 다시 미소 지으며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보인 건 웃고 있는 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소녀가 기대했던 흐뭇한, 그리고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 의아함이 공존한 웃음이었다.


  "엄마?"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소녀는 자신의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테리, 농담하지 말아. 나는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걸. 아, 하지만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

  "뭐……?"

  "그렇구나, 테리한테는 아직 말해주지 않았었지? 아서가 사실, 프로포즈 하려고 한다는 것 같아. 그런데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난 빨리 반지를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런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 정말,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살 수가 없다니까……."


  천천히 여인에게서 손을 떼고 소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옆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소녀의 눈앞에 있는 건 소녀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여자였다.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소녀는 제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안 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 한 단어였다. 안 돼 No. 세상에서 제일 상냥하고 따스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생각났다. 남자의 커다란 손에는 분홍색의 키티가 그려진 딸기 사탕이 놓여 있었다. 소녀에게 사탕을 내밀며 남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테리. 이리 오렴.


  "벨……?"

  "그런데, 아서는 내가 병원에 입원한 건 알고 있니? 알겠지? 그야, 알고 있을 거야. 테리, 네가 알려줬을 테니까. 너희 둘은…… '특별히'…… 친한 사이잖니."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소녀에게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인의 푸른 눈동자, 그 양 눈동자 중 한 쪽에서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Why. 여인의 입술이 그 모양을 그리자 소녀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소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왜 그래, 벨.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 여인은 제가 휠체어 바퀴를 돌려 소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Alley Cat 도둑고양이. 자신에게 분노밖에 드러내지 않는 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소녀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응급실 침대 위였다. 간호사 몇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과로래,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메저즈 양, 어머니 병원비 마련하는 게 그렇게 힘드니? 간호사들이 이번 약값은 돈을 좀 모았으니까, 혼자 노력하지 말고 힘내렴. 평소에는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을 자상한 말이었지만 소녀는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벨, 은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간호사는 여인이 이미 병실에 돌아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네가 쓰러지고 나서 어머니도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셨단다. 하지만 소녀는 간호사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진위를 따지는 것보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닥터 크롬웰은 어디에 계세요?"







  여어, 메저즈 양. 정신은 들었나?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원장, 닥터 크롬웰은 소녀의 얼굴에 경악과 슬픔이 깃들어 있는 걸 보고, 살에 눌려 가느다란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그 반응만으로도 소녀는 원장이 무척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닥터, 벨이, 닥터…….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제 몸도 파르르 떨렸다. 크롬웰은 소녀에게 자리를 권했고, 따뜻한 커피를 권했고, 심호흡을 하라고 말하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겨우 진정된 소녀는 자신의 고통과, 그 순간 받았던 충격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그런 소녀를 크롬웰은 따스한 눈동자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가 쓰러지고 나서, 벨도, 아파했다고, 들었는데."

  "음……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았어, 매저즈 양. 미세스 매저즈는 자네가 쓰러진 걸 보고, 그, 마치, 광인처럼 웃어댔다네. 그러다가 탈진해서 쓰러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닥터, 벨이…… 저를 못 알아봤어요. 제가 엄마Mom, 라고 부르니까…… 무슨 소리, 냐고……."

  "음…… 그런가. 이건 아주 희귀한 현상이야. 나도 미세스 매저즈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눠봤다네. 하지만 매저즈 양, 자네의 어머니 머릿속에서, '테리어드'라는 존재가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야. 그건 알아둬야 해."

  "하지만, 이상, 했는, 걸요. 간호사, 들이, 닮았다고…… 저와 벨을 닮았다고 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기뻐했는데……."


  소녀를 대할 때마다 여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소녀는 그 반응을,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거동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자신을 돌봐주는 다 큰 딸을 기특해하는 거라고. 하지만. 소녀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지만, 벨은 그게 아니었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떨리고 있었다. 벨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질문에 크롬웰은 대답했다. 딸이 아닌 다른 존재겠지. 자신을 닮았다고 해도 의아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정도니…… 아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거나, 아, 정신 연령도 어려진 듯하니, 쌍둥이 자매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


  '……아, 그래서였구나.'


  여인이 여인의 남편과 결혼한 건,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였다. 소녀도 이제 곧 스물이 된다. 여인이 아마 그 남편에게 가장 사랑받았을 그 나이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소녀는 간신히 이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한 소녀의 그 얼굴을 크롬웰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해한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벨의 여동생, 같은 존재로 계속 지내면, 벨과 제 사이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겠죠? 제가 벨에게 최대한 맞춰 주면, 벨의 정신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거죠? 소녀의 그 간절한 말에 의사는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소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웠다.


  "다만…… 몸에는 이상이 있지."


  그러나 간신히 평화를 찾은 소녀의 귓속에는 다시 잔인한 선고가 찾아들었다. 벨이 갖고 있었던 종양 말일세, 몇 년 전보다 악화되었어. 지금은 자궁까지 번진 상태일세. 소녀는 잔을 떨어뜨렸다. 플라스틱으로 된 튼튼한 잔이라 깨지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들었던 커피는 바닥에 흩뿌려져 소녀의 갈색 어그부츠를 더 진하게 만들었다. 왜, 왜요? 그건 다 나은 게 아니었나요? 그러자 크롬웰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찾아왔을 때 종양을 제거하지 않은 게 문제였던 거겠지. 억지로라도 수술을 시켰어야 했는데, 제 집 사정에 그건 무리라고 미세스 매저즈가 사정을 했어. 남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야. 쯧쯧, 하고 크롬웰은 혀를 차며 책상 서랍에서 차트를 꺼냈다. 엑스레이로 촬영한 사진의 새하얀 자궁 속에, 새까맣고 끔찍한 덩어리들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벨의 자궁 상태인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남편Her husband. 인간 같지도 않은 아서를 위해서 벨은 자신의 건강을 희생했다. 그 대가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과, 세상에서 가장 아꼈던 딸의 배신이었다.

  소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을 수 있나요? 그 목소리에 가득찬 결의에 크롬웰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고말고. 그는 소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수술해서 종양을 들어내면 된단다. 소녀는 물었다. 수술비는 얼마나 되나요? 크롬웰은, 손가락을 세 개 들어 보였다. 30만 달러라는 뜻이었다. 소녀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통장의 잔액과 자신이 지금 당장 변통할 수 있는 돈을 계산했다. 그러나 그 절반인 15만 달러 이상의 계산은 나오질 않았다. 절망에 빠져 파랗게 변해가는 소녀의 얼굴에 크롬웰은 다시 소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수술 날짜를 잡아놓지. 종양이 발견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 게 좋아. 수술비 이야기는 수술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하, 하지만, 닥터. 제겐 변통할 수 있는 돈이 없어요. 어떻게든 모아봐도, 15만 정도밖에……."

  "괜찮네. 절반은 내가 부담할 테니까. 오랫동안 지켜봐 와서 그런지, 내게는 미세스 매저즈가 딸로, 자네가 손녀로 느껴질 정도야. 종양도 많이 번지지 않았으니 성공률도 높네. 자네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크롬웰은 웃었다. 소녀에겐 눈앞의, 빈말로도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 여인이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이, 소녀의 판단을 아주 약간 흐리게 했다. 소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크롬웰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눈을 크게 뜰 줄 몰랐고, 자신의 은인을 의심하거나 주의 깊게 살필 줄 몰랐으며, 자신의 결정이 자신을 괴롭게 만들 거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원장실을 나와 소녀는 바로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안에서 여인은 뜨개질감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아마 저 목도리는 소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하는 이에게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보다는 절망하지 않았다. 소녀는 잠든 여인의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 벨. 나는 테리어드 트랭크스로 살아가도 괜찮아. 벨의 여동생, 벨의 유일한 가족, 벨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게. 괜찮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괜찮아, 괜찮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소녀는, 사실은 여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소녀는 아르바이트를 늘렸다. 크롬웰이 15만 달러를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 정도로 그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이 소녀의 생각이었다. 간호사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여인의 간호를 부탁한 뒤, 소녀는 밤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답답하게 가리는 주유소의 제복을 입고, 주유소 로고가 새겨진 장갑을 끼고 일했다. 호스를 주유구에 밀어넣는 데도 익숙해졌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병원으로 돌아와 보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자고 있었다. 소녀는 숙직 간호사들의 샤워실을 빌려 씻었고, 그들이 이용하는 무인 세탁기로 옷을 빨아 입었다. 간호사들은 모두 친절했다. 소녀의 옷을 빨아 숙직실에 같이 널어 주었으며, 소녀를 위해 언제나 푹신푹신한 잠자리와 따뜻한 이불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소녀는 제가 혼자 살고 있던 원룸을 팔았다. 6만 달러가 손에 들어왔다. 턱없이 작은 돈이었지만, 소녀가 모은 돈은 15만을 넘어 20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소녀는 자신이 성인이 되는 날을 주유소 휴게실에서 졸면서 보냈다.

  여인의 수술 날짜는 소녀의 스무 번째 생일로부터 정확히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여인의 수술 날, 소녀는 주유소 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병원으로 왔다. 아홉 시가 지난 시간, 크롬웰은 지친 얼굴을 하고 소녀에게 수술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여인의 몸에서 떼어냈다는 시커먼 종양 덩어리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마치 새까만 태아 같았다. 소녀는 종양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통장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무과에 가서 여태까지 모은 17만 달러를 우선 낼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닥터. 30만 달러까지 아직 13만이나 되는 돈이 남았어요. 그건…… 반 년 정도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소녀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소녀에게는 아직, 예전에 살던 집이 남아 있었다. 40만 달러 가까이 하던 그 집은 살인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20만 달러 이하까지 가격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 집이 팔리면 수술비는 백 퍼센트 충당할 수 있었다. 소녀는 집이 팔릴 것을 믿고 있었다. 소녀의 집을 사겠다고 나선 한 중년 부부는 소녀의 사정을 동정하여, 부동산에서 제시한 20만 달러에 5만 달러를 더 얹어주겠다고까지 했다. 소녀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돈을 내는 건 급한 일이 아니야. 자, 자. 일단 앉아보게."


  이제는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더 낼 필요는 없네. 나는 돈을 기다리지 않을 거고, 자네가 가져와 봤자 받지도 않을 거야. 어이쿠, 반론은 안 해도 돼. 자네의 반론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고작 스무 살 되는 소녀는 그렇게도 어리석었다.


  "사실은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매저즈 양.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꺼비 같은 얼굴에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위에서부터 소녀를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아까 벨에게서 도려낸 종양처럼 끔찍했다. 소녀는, 어릴 적의 경험으로 인해 그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그럴 리가 없다, 는 안일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왜 그러세요? 소녀의, 제 포획물의 어리석은 질문에 의사는 웃었다. 나는 말이야.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을 살아왔어. 나이가 벌써 육십이 다 되어 가.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은밀한 곳만 40년 가까이 보아왔어. 그러다 보니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군. 이 나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은 건 그 때문이야. 그 어떤 미녀를 봐도 감흥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소녀는 그 말에 동조하지도,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도 '위험할 것 같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와 달리 의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자네를 보면, 자네를 보고 있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여기가 두근두근 뛴다고나 할까? 의사는 제 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살짝 얹었다가, 손을 다시 소녀에게 뻗었다. 소녀의 손목을 잡고 들어올린 의사는 소녀의 작고 거칠어진 손을 제 사타구니로 가져다 댔다. 정색하는 소녀에게 의사는 또다른 지옥을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나를 발기시켜 줬으면 해."


  당황하여 소녀는 의사에게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가 소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깨끗해진 여인의 자궁 사진과, 보란듯이 소녀에게 보여준 종양 덩어리와, 통장에 들어 있는 17만 달러의 돈 같은 것.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더러워. 하지만 의사는 소녀의 그 중얼거림을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은혜 갚기'의 금액을 읊고 있었다. 한 번에, 만 달러 정도면 어떤가? 세워 주고, 가게 해 주게. 내게 쾌락이란 게 뭔지 가르쳐주게. 응? 그 정도면 결코 나쁘지 않은 거래야. 어딜 봐도 나쁜 거래였지만, 소녀에게는 이제 반문할 힘은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소녀는 처음으로 펠라치오란 것을 해보았다.






  여인의 건강은 계속 좋아지고 있었다. 소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안색은 밝아졌고 혈색도 좋아졌다. 간호사들도, 여인이 평소보다 밥을 잘 먹고 있다며 좋아했다. 여인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피곤에 지친 소녀가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서 와, 테리.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맞아주는 여인에게 소녀는 약한 미소밖에 지어 줄 수 없었다. 소녀에게는, 여인에게 반드시 말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무서워, 벨.'


  소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소녀였을 시절, 여인은 소녀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엄마, 무서워.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파고들면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었다. 소녀가 보았다는 유령이나 귀신 이야기도 웃지 않고 들어주었다.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그런 건 이제 무섭지 않아. 하지만 그 따스한 한 마디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었다. 지켜달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건 귀신도 유령도 물리쳐 주었던 강하고 상냥한 엄마가 아니라,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데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여인이었다. 소녀는 울었다. 속으로만 울었다. 몇천 번도 몇만 번도 더 울었다. 자신을 낳아준 그 자궁 위에 엎드려서 몇 번이고 울었다. 그러면 여인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테리. 엄마가 있잖니.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지옥 속에 빠져 사는 소녀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대신 여인에게 말했다.


  "벨, 벨이 퇴원하면, 작은 집을 구해서 같이 살자."

  "그래, 그래."

  "방 하나짜리 집이어도 괜찮아. 거기에 침대를 두 개 들여놓고, 가운데엔 화장대를 놓자. 아 참, 벨은 밤에 불 끄는 걸 무서워하니까, 잠 잘 때만 켤 수 있도록 스탠드도 놓아둬야겠다."

  "그래, 그래."

  "부엌은 그리 크지 않아도 돼. 예쁜 주방도구를 여러 개 마련해서 같이 요리도 하자."

  "그래, 그래."

  "거실엔 작고 귀여운 피아노를 들여놓을까 해. 평일엔 바쁘게 일하겠지만, 휴일에는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자. 나, 피아노 학원에 다닐게. 일하는 틈틈이 가르쳐 주실 분이 있을 거야."

  "그래, 그래."

  "근처에 공원이 있는 집이면 참 좋겠다. 날씨가 좋은 날엔 같이 산책도 나가게."


  소녀는 기계 인형처럼 똑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여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엄마라고 부르지 않을게. 다시는. 벨은 나의 언니이자 가족이자 내 가장 소중한 사람. 그것뿐이라고 생각할게. 벨이 원하지 않는다면, 딸이 되지 않을게. 나는 벨의 딸이 아니어도 좋아.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어 줘.


  "혼자 두지 마……."


  소녀는 훌쩍훌쩍 울었다. 병원복이 눈물로 젖어가는 것을, 여인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옳지, 너무 많이 울면 안 돼요. 그 자상한 목소리는, 딸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차가운 말이나 원망의 말이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인을 재우고 나면 찾아올 호출이나, 어둡고 컴컴한 원장실의 분위기나, 거기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이나, 그 빛이 반사되어 가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의사의 은 안경테도, 너무너무 싫었다. 하지만, 테리, 나 졸려, 하는 여인의 무심한 말은 소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의 시간마저도 깨부숴 놓았다. 응, 자자, 자장가 불러 줄까? 어떤 노래가 좋아? 여인은 입을 열었다. Goodbye. 곡명을 듣고 소녀는 웃었다. 자장가로 그런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 마. 그래도 그 노래가 좋은걸. 여인의 고집에 소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and I know how hard you try

You deserve to have so much more

I can feel your hurt and I sympathize

and I'll never criticize all you ever meant to my life

난 당신의 눈에 고인 아픔을 볼 수 있고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을만 해요

난 당신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고 동감할 거예요

그리고 내 삶에 커다란 존재였던 당신을 나무라진 않겠어요


I don't want to let you down

I don't want to lead you on

I don't want to hold you back from where you might belong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겠어요


You would never ask me why my heart is so disguised

I just can't live a lie anymore

I would rather hurt myself than to ever make you cry

there's nothing left to say

But goodbye…….

왜 저의 본심을 숨겼느냐고 당신은 묻지 않을 거에요

난 그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뿐이에요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상처입히겠어요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안녕…….


  끔찍하게도 소녀는 목소리마저도 제 어머니의 것을 닮아있었다.





  '빚'이 8만 달러 정도 남았을 때 의사는, 원장실은 간호사가 언제 올지 몰라 위험하다며 제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정말로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렇게 의사의 집에 드나들게 되면서, 소녀는 자신이 모르던 의사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의사의 서재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비밀번호를 맞춰 놓은 서류 금고였다. 매우 소중한 것이 들어있는 듯, 의사는 몇 번이고 그것을 열고 닫으며 안의 물건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소녀는 의사의 침대에 누워 의사의 손동작, 바늘의 움직임, 달칵거리는 소리를 기억했다. 의사의 정액으로 더러워진 손을 시트에 닦고, 의사가 목욕하는 사이 그것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그 서류에는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가득했다. 간liver, 혈액blood, 신장kidney, 폐lungs, 심장the hearts, 장기intestines. 그러나 그것이 매우 중요한, 그리고 돈이 되는 서류라는 것은 알았다.

  전환점.

  그것은 매우 빨리 찾아왔다.

  의사의 금고를 몰래 열어본 지 사흘 뒤, 소녀는 30만 달러라는 돈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손에 넣었다. 그 중에서 13만 달러를 서류가방에 넣고, 소녀는 원장실을 찾았다. 의사는 자기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녀가 자신을 찾아온 사실에 대해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소녀는 서류가방을 의사에게 밀어놓고, 돈이에요, 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닥터가 제게 빌려주신 돈. 소녀와 의사 사이의 빚이 3만 달러 정도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소녀는 당황해 하는 의사를 보며, 왠지 모를 쾌감도 느꼈다. 소녀는 가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 했던 건 신세진 병원비와 은혜 갚기라고 쳐두겠어요. 벨의 퇴원 수속을 밟아 주세요.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어요. 소녀는 의기양양했다. 소녀는 자신이 의사에게 이겼다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가. 이제 병원비로는 자네를 잡아두지 못하게 되었군."


  그러나 의사는 매우 씁쓸하다는 듯 말하더니, 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갑 안에서 무척 소중한 보물을 꺼내는 듯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녀는 자신의 안색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슨 사진인지는 굳이 의사가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는 젊고 예쁘고, 또 호신술까지 배웠어. 매우 영리하기도 하고. 그거라면 어떤 직장을 가도 열심히 일할 거고, 어딜 가서도 예쁨받을 거고, 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겠지. 나지막한 의사의 목소리는 또다른 절망을 담고 있었다. 안타까워. 내가 그런 미래에 똥물을 끼얹게 되다니. 의사가 돌려 보여준 사진 속에 찍혀 있는 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몸과 얼굴에 정액을 묻힌 채 잠들어 있는 소녀가 찍혀 있었다. 격렬한 정사가 끝난 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위하는 걸 도와주었을 뿐, 성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누구 하나 이해하지 못할 만한 사진이었다. 그건 정말, 협박용으로는 최상급의 사진이었다. 소녀가 자리에 주저앉은 걸 보고, 의사는 웃었다. 우리 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네. 특별히 자네의 생일로 해봤지. 좀 더 누르기 쉽겠지? 거룩한 악마는 소녀에게 절망을 말했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도 소녀는 의사의 집에 갔다. 여인은 병원 침대에서 여전히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와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다가, 소녀에게 한 잔을 권했다. 성인이니, 술도 마실 수 있어야지. 그 이상한 논리를 거부할 힘은 이제 소녀에겐 없었다. 소녀는 의사가 건넨 와인 한 잔을 바로 들이켰다. 그 푸른 눈동자에 절망 외의 다른 빛은 보이지 않는데도, 의사는 마냥 즐거워했다. 자,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 가운 끈을 푸르는 걸 보고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지옥이다. 그 서류를 발견한 순간,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순간, 소녀는 자신의 모든 괴로움이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의사가 옷을 벗고 제 앞에 서기를 기다렸다.

  딩동.

  소녀의 지옥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현관 벨 소리에 의사는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는 잠시 벨소리를 무시할지 나갈지에 대한 망설임이 보였다. 여하튼 그 얼굴에는 자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눈치 챈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의사는 결국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뒤뚱거리며 침실 밖으로 나간 의사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아니, 당신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뱉은 의사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소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렸다. 소녀는 천천히 침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순간.

  탕.

  소음기도 달지 않은, 조심성 없는 총성과 함께 의사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쑤셔넣었던 탓에, 총구는 의사의 타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으엑, 더러운 냄새. 중얼거린 남자는 총을 의사의 몸 위에 던져 버리려다가, 침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혀를 차고 남자는 총구를 의사의 가운에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소녀의 앞으로 다가와,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에 총구를 갖다댔다.


  "미안해, 아가씨. 젊고 예쁘장한데다 매력까지 갖춘 아가씨를 죽이는 건 정말 싫은데 말이지, 이 아저씨처럼 나이를 먹으면 윗사람이 너무 무섭게 보이는 법이야. 우리 보스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아가씨가 목격자라서 어쩔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그 남자가, 니콜라이 페드로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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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1. 메이크업



  "웬만한 준비는 다 됐고…… 피부색이랑 가발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벨. 따로 좋아하는 색이 있으면 드레스 고르는 데는 반영하게 해줄게요."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정말, 그 딱딱한 말투 어떻게 좀 해봐요. 겉만 보면 천상 여잔데, 속은 완전히 사내라니까?"


  재잘거리는 상대를 테리어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이나 로티넬. 2년 전 미용학원을 갓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다가 점장의 눈에 띠어 이 펍을 거쳐간 많은 여가수들의 메이크업을 맡아온, 나름대로 '프로'를 자부하는 어린 소녀. 올해 열아홉이 된다는 그녀는, 스물둘인 테리어드가 보기에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러는 자신도 저번 달에야 겨우 갓 노스트라의 정식 조직원으로 인정받아 어소시에이트를 면했으니 어린애이긴 했다. 테리어드는 노스트라의 구역인 이 펍을 실제로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점장은 지배인일 뿐이고, 실제 이 가게에 오고가는 노스트라의 간부들과 그들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보호할 책임은 전부 테리어드에게 있었다. 스물둘의 처녀에겐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지만, 테리어드는 결코 그것으로 기죽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이 처녀가 낯선 사람을 앞에 두고도 전혀 꺼려하는 기색이 없듯이.

  일주일 전 테리어드는 점장에게서 제이나를 소개받았다. 두 사람이서 같이 지내면서, 앞으로 일해야 할 때의 주의점이라던가 하는 얘기를 나눠봐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테리어드를 혼자 상대하는 게 어지간히 껄끄러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테리어드 자신도 남자가 눈 앞에서 껄쩍대는 걸 보느니 차라리 여자와 대화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결국 테리어드는 그날부러 제이나의 집에 들어가, 그녀가 갖고 있는 수많은 컬렉션을 뒤지며 무대 위에서의 컨셉을 골랐다. 가발 샘플 사진을 보고 가발을 고르고, 여러 가지 분을 찍어 발라보며 하나를 택하고, 샵을 돌아다니며 드레스를 주문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갈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단 하나, 예명을 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벨. 테리어드가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오늘의 드레스는 골이 많이 파여 있으니까, 가슴이랑 등에도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로 해요. 그나저나, 일주일에 한 통씩 새로 사야 될 기세네. 점장님한테 준비 비용 올려달라고 해야겠다."


  파운데이션을 퍼프에 묻히며 제이나가 한 말에 테리어드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녀는 굳이 점장에게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일 돈을 받을 때쯤 되면 봉투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 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펍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운영자는 테리어드였지 점장이 아니었다. 눈을 살짝 감은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목과 가슴까지 빼놓지 않고 바르니 파운데이션 통이 가벼워졌다며 제이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메이크업을 완성한 채 가발을 쓰는 테리어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제이나가 잠깐, 하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눈은 어쩔 거예요? 그걸 안 정했네."

  "렌즈를 낄 필요가 있나요? 그럼 바로 준비시킬 생각인데요."

  "음…… 가발이랑 옷은 컨셉에 맞춰서 막 최고급품으로 사진 않았으니까, 사실 어색한 티가 나더라도 렌즈는 안 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음, 역시 그냥 내버려둬요. 그 눈, 색이 바다 같아서 굉장히 예쁜걸. 게다가 난, 딱 봐도 아, 변장하고 있구나, 란 걸 알 수 있지만 노래를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 같은 매혹적인 컨셉으로 가고 싶다고요. 아시겠어요?"


  대충은 파악했다. 테리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나는 만족한 듯 파우더를 얼굴에 톡톡 두드린 뒤, 살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와아, 하고 그녀가 감탄사를 뱉는 걸 보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자 제이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표정만 지으면 귀여울 텐데- 라는 소리는, 자기보다 세 살 어린 여자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작품을 완성시켜 놓고 힐을 갖다주며 제이나는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키가 크면서 왜 또 힐을 신느냐던지, 이런 걸 신고 한 시간동안 노래할 수 있겠냐느니. 일주일 내내 같이 지내면서 집안에서 힐만 신고 있었으니, 테리어드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처음 제이나가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였을 때는, 그저 운동을 해뒀기 때문이라고 답해두었다. 사실 호신술도 운동이긴 하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 몸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스물두 살의 여자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튼튼할 정도로.


  "아아, 미인이라 좋겠다. 누굴 닮은 거예요? 역시 어머니? 아니면 반전으로 아버지라던가!"

  "어머니예요. ……어머니를 닮았단 소리만 듣고 자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테리어드가 벨을 쏙 빼닮은 것은 저주스러운 삶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그날 사건의 당사자는 테리어드 혼자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아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면 테리어드의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을 것이다. 벨과 똑같은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워 노스트라에 들어오고 나서 제 살을 갈색으로 태웠지만, 그래도 이목구비만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제 가장 소중한 사람과 똑같았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테리어드는, 자신이 아직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 그럼 벨! 준비 됐어요? 이제 나가도 되겠죠?"

  "얼마든지."






#2. 선물



  와인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고급 주류점의, 늘어선 와인들을 한 병 한 병 들어보며 테리어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보스의 생일 선물로 어떤 것이 제일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술을 사러 온 참이었다. 선물을 고민하면서 술을 사는 게 좋겠다고 충고해준 선배 어소시에이트는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악의가 있어서였다기보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모습에 홀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옳을 터였다. 카운터에 서 있는 젊은 여자 종업원까지,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날씬한 몸매로 술을 이리저리 들었다 놨다 하는 테리어드를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당연했다.

  와인 종류는 짜증이 날 정도로 다양했다. 달콤한 와인, 씁쓸한 와인. 이탈리아 와인, 프랑스 와인, 칠레 와인. 보스는 나이도 있는데다 이탈리아인이니, 이탈리아의 씁쓸한 와인이 나을지도 모른다. 코너에서 적당히 하나를 골라 잡았다. Giusto di Notri. 노트리의 성자. 이름이 거창한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에게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되는 어린아이를 조직원으로 받아주고, 또래 여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실어준 사람. 테리어드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스는 성역이었다. 카운터에 병을 가지고 가 지갑을 열었다. 와인 값과, 테리어드 자신이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기 위해 구매한 몇 가지 음료를 합쳐 8만 달러라는 거금이 한꺼번에 지갑에서 빠져나갔다. 이날을 위해 돈을 모은 것이라 테리어드 본인은 별로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어소시에이트가 놀라, 아무리 보스의 생일이지만 그런 고가의 와인, 괜찮겠어? 하고 물었다. 자기가 돈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괜한 간섭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리어드는 남자가 제 어깨에 슬쩍 올려놓은 손을 치웠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테리어드는 이런 남자가 싫었다. 제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면서 욕심만 많은 자. 보스의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3분의 1, 아니면 7분의 1, 100분의 1이라도 좋으니까. 세상에는 성실한 남자가 거의 없었고 테리어드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을 만한 신사는 더욱더 없었다. 남자를 무시하고 가게를 빠르게 나와 택시를 잡는데, 테리어드는 이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느꼈다. 배가 또 아팠다. 생리가 끝난 지 이틀째인데도 계속 아리는 것이,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의 생일이 지나고 나면 병원에 가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제 행선지를 말했다. 선물을 보내 놓고, 보스의 생일을 축하하며 작은 케이크를 사다 놓고 칵테일을 만들어 마실 생각이었다. 칵테일을 위해 키우던 민트 허브 잎은 상큼한 향기를 자랑하며 테리어드의 작은 방 안에서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었다.

  적어도 그 날의 그녀에게는.





#3. Brave



  사전을 뒤져가며 가사를 종이에 옮겨 적는 가수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테리어드는 아직 가발도 벗지 않은 채 그렇게 가사 적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달쯤 전, 이제는 절판되었다고 생각했던 이 가수의 앨범을 어렵게 구한 건 좋았지만 정작 가사가 일본어였던지라, 그걸 영어로 옮겨 적는 일만도 큰일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본 적도 없고, 그 나라 말을 해본 적도 없는 테리어드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단어가 가득했다. 이렇게 가사를 번역하다 보면, 동서양에서 가사에 쓰는 단어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동양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가사를 완전히 영어로 옮기는 일은 아마 불가능하겠지. 그나마 이 가수의 노래 가사에는 영어가 많아서 번역하기는 편한 축이었다. 종이에 가득 적힌 가사를 제 입으로 읊어본다.


  "When I was darkness at that time, I cry at room's corner with shook lips.

  (내가 어둠 속에 있었을 때, 나는 방 한 구석에서 입술을 떨며 울었어)

As I wriggle and wriggle, hurts keep hurt me. Our promise broken, and hurt me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상처는 나를 찔러오고, 우리의 약속은 부서져서 나를 아프게 해)……."


  그러나 몇 줄 읽다 말고, 테리어드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이렇게 번역한다 할지라도, 음에 맞춰서 부를 일이 걱정이었다. 그냥 일본어를 배워서 집에서만 중얼거릴까. 어차피 록 사운드여서 펍에서는 부르지 못할 곡이었다. 가만히 만년필을 돌려 보다가 손에서 떨어뜨리고, 테리어드는 장갑을 벗었다. 화장을 오랫동안 지우지 않아 피부가 당겨왔다. 막 클렌징 티슈를 손에 쥐는데 대기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점장은, 아직 그녀가 화장을 지우지 않은 것을 보고 화색을 했다.


  "미스 티아, 죄송하지만 무대에 한 번만 더 올라가 줄 수 없겠습니까? 다들 앵콜을 요구하셔서."

  "……오늘만 해도 벌써 다섯 곡을 불렀어요. 계약 위반인데요."

  "제발, 미스 티아. 그런 차가운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이 펍이 잘못되면 미스 티아, 당신에게도 손해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점장이 이 펍의 존재에 더 매달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부탁을 무시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가사가 적힌 종이를 가방 안에 쑤셔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볍게 파우더만 두드리고 다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를 보고 환호하는 손님들이 보였다. 오늘은 또 이렇게 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비스 정신이 다분한 말을 건네고 고개를 숙인 뒤, 테리어드는 마이크에 입술을 갖다댔다. 마지막에 불렀던, 딱 한 노래만 부르겠어요. 하는 요구에 점장이 납득했으니 한 번만 더 목에 힘을 주면 될 것이다. 오늘의 마지막 서비스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It's a new day, New day and it's evident

You must've been heaven sent

Something we should be hesitant

새로운 날, 새로운 날이야

넌 분명히 하늘이 보내준 사람이야

가끔 우리는 망설이지만


But I'm not at all

Just feeling more confident

Just using my common sense

Just trusting that I'm lovin' it

하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아

그저 좀 더 자신감을 가져

그저 상식에 따르도록 해

그저 믿어보는 거야, 좋아하기 때문에


I can't refuse an offer so benevolent can't assume he's gonna use me

And after him never call again

나는 그런 호의적인 제안은 거절할 수 없고, 그가 날 이용할 거라 단정할 수도 없어

그런다면 그는 다신 전화해 주지 않겠지


Don't be afraid, don't be afraid

This is your day, this is your day

겁먹지 마, 겁먹지 마

오늘은 널 위한 날이야, 널 위한 날이라고


It's time to be brave, say I'm not afraid

Not anymore I used to be calm

Now the temperature's changed, it just ain't the same

I'm not afraid I'm not afraid

용감해져야 할 때야, 두렵지 않다고 말해

무관심했던 때는 이제 없어

이젠 분위기가 달라졌어, 예전과는 달라


'Cause I've become brave

As the light of day straight into a cave to show me the way

That I might be saved now I'm turning the page

Thanks to the power of love I can love

Because I am brave

왜냐하면 난 용감해지고 있으니까

내게 동굴 속에서도 안전한 빛을 가르쳐 줄 햇빛이 있어

그것이 나를 구해주니까,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돼

사랑의 힘 덕분에 사랑도 할 수 있어

왜냐면 나는 용감하니까


I'm brave

I'm brave…….

난 용감해

난 용감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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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


  아빠는 뭔가를 부탁하려고 할 때면 테리에게 언제나 사탕을 주었다. 아빠가 주는 딸기맛 사탕은 매우 달콤했고 아주 약간 상큼한 맛도 났다. 테리는 그 사탕을 무척 좋아했고, 아빠가 줄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걸 받았다. 그래도 그걸 받는 것이 옳은 일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였다. 테리의 주변에 있는 여자아이들은 누구도 테리처럼 아빠와 가깝지 않았다. 친구들은 매일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거나 하지 않았고,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아서 아빠와만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아빠의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아빠의 품에 꼭 안겨서 자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어린애라고 놀리는 것이 속이 상해, 그날 집에 돌아온 테리는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나, 오늘부턴 아빠랑 같이 안 잘래. 방에서 혼자서 잘래. 그렇게 말하자 아빠는 무서운 얼굴을 했다.

  그 날 테리는 처음으로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



  쿠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내렸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테리어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계단 위쪽에 있던 조직원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따라 내려왔다. 내게 저 남자의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차가운 말투에 조직원은 죄송합니다, 하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알았으면 빨리 그 면상을 치우세요. 그 명령에 조직원이 남자를 도로 끌고 올라가자 비명 소리가 텅 빈 계단을 메웠다. 테리어드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그 짧은 순간에, 남자의 몸을 사정없이 짓밟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입도 막아버릴 걸 그랬나…….'


  그 날.

  뺨을 맞았다.

  왜? 라고 묻자, 아서는, 네가 나빠, 라고 말했다. 아빠 말 잘 듣겠다고, 아빠하고 약속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때린 딸의 뺨을 상냥하게 감쌌다. 그러면 아빠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 말이, 어릴 때에는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죄송해요. 그러자 아서는 흐뭇하게 웃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또 다른 조직원 한 사람이 층계참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밖에서 망을 보라고 지시한 조직원이었다. 무슨 일이죠, 하고 묻자 조직원― 릭은 보스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연락이 왔습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처리하고 귀환하시라고…….

  "알겠습니다. 거기, 그 남자를 이리로 데리고 오세요."


  인간을 짓밟는 소리가 멈췄다. 얼굴과 옷이 피범벅이 되어, 평소의 여유 있던 웃음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남자가 끌려 내려왔다. 세 칸 위의 계단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남자는 비틀거리며 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살아는 있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쉽게 죽음을 택하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테리어드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남자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담배 연기를 얼굴에 뿜자 그는 어린애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에겐 그런 표정을 지을 자격이 없다. 담배를 그 얼굴에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감추고, 테리어드는 입을 열었다.


  "미스터 심슨. 미안하지만, 당신의 목숨은 오늘로 끝입니다. 내게 '살려달라'고 해도 소용 없습니다. 조직이 당신을 처리하라고 했으니까요. 조직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으, 으으……."

  "그 전에 질문이 있는데…… 제대로 대답할 수 있겠어요?"


  심슨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을 열성적으로 끄덕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 자포자기하자는 식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했는데 아직 이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테리어드 W. 메저즈. 자신의 타겟에게 잔인한 죽음을 선사하기로 유명한 노스트라의 상어를 자극해서 일찍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겠지.


  "누가 손수건을. 입을 막아주세요. 비명은 듣고 싶지 않군요."


  옆에 서 있던 조직원이 제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단단히 재갈을 물렸다. 읍, 읍, 하고 필사적으로 산소를 찾아 헤매는 남자에게 여전히 연민의 감정은 없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하겠어요. 성실하게 대답해 준다면……. 테리어드는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새 담배를 꺼냈다.


  "성실히 대답해준다면, 즉사로 끝내드리지요."


  그 말에 남자의 눈에 절망이 깃드는 게 보였다. '살려주겠다'는 말이 나올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체념하고 고개를 떨구는 남자를 무시하고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으로 연기를 뿜었다.


  "그럼 질문을 하겠어요. ……어째서 그런 여자애에게 손을 댔습니까?"


  그 질문에 조직원들의 시선이 바로 테리어드에게 쏠렸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남자가 잡혀와 조직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조직에서 맡겨둔 가게의 돈을 상습적으로 횡령하다 들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솔져들 중 하필이면 테리어드가 그를 '처리'하는 역을 맡게 된 것은 이 남자가 저지른, 조직에서는 어찌 되든 좋지만 테리어드 개인적으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 때문이었다. 덤덤하게 자네가 가게, 라고 말하던 보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테리어드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의 가게엔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당신이 돈을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가 잔뜩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단순히 청소부 여자아이였어요. 열 살짜리였죠? 당신은 그 아이를 돈으로 유혹해서, 당신의 말을 무조건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제 할머니에겐 정성을 다하고 있고, 그 할머니는 아이가 벌어오는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것이…… '사랑' 인가요?"


  '사랑'이라고 했다. 아서는 소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계속 속삭였다.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할까요. 그 아이는 행복했습니다. 상냥한 아버지에, 따뜻한 엄마가 있어서. 주변 사람들은 전부 그 아이에게, 너는 엄마를 닮았구나, 라고 말했죠. 엄마를 닮아 귀엽고, 상냥하고, 예쁜 여자가 될 거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아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어요. 엄마가 너무 좋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 됐지요."


  후우, 하고, 한숨과 함께 연기를 뿜어냈다. 왜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조직원들도 왜 갑자기 테리어드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테리어드는 그를 무시했다.

  갑자기, 모든 일이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났다. 의사는, 이제 더 이상 벨이 아이를 가질 수 없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안길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질에 심각한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성관계를 지속했다가는 증세가 점점 더 심각해질 거라고 했다. 아내의 증상을 듣고 아서는 울었다. 벨은 아서보다 더 많이 울었다. 아서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들에겐 테리가 있어, 그 아이가 있으면 돼. 벨은 감동했다. 남편이 자신을 용서해 주었으니까.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그를 만족시켜줄 수도 없는 자신을 용서했으니까. 남편을 좀 더, 더 많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벨이 없어도 괜찮았다.

  왜냐면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아내를, 자신이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랑했던 소녀 벨 트랭크스와 똑 닮은 딸이 옆에 있었으니까.


   "그 여자애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아니, 알았어도 견뎠겠죠. 아버지를 좋아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안아주는 것도 좋았으니까. 어깨를 만지는 것도, 그 작은 젖가슴을 큰 손으로 꽉 쥐는 것도 싫지 않았으니까. 아빠가 제 몸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것이나 제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것이 나쁜 일이란 걸 몰랐으니까. 뭘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가 좋았으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어요. 아버지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해 본 반항에 뺨을 맞은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던 거죠."


  그 날, 처음으로 아서에게 짓밟혔다.


  "슬픈 이야기죠? 내 이야기 속 여자아이도, 당신이 손을 댄 여자아이도, 겨우 열 살이었어요. 아직 어린아이.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그러니까, 이야기 속의 아버지도 당신도 그 여자아이들을 짓밟을 수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아요?"


  아빠Daddy, 피가 나. 그렇게 말하며 울던 소녀를 아서는 감싸 안았다. 괜찮아. 여자라면 누구나 다 나는 거란다. 아직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니? 그래그래, 울지 마라. 아빠가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그 대신 다른 걸로 해보자. 그렇게 소녀를 달래어 아직도 소녀의 피로 물든 제 성기를 보여주었다. 봐, 아빠도 아프단다. 정상이 아니지? 아빠도 아파…….


  "자, 이제 슬슬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어째서죠? 왜 그 애에게 손을 댔죠? '사랑했으니까' 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단순히 욕망을 풀 상대였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미스터 심슨? 대답하세요."

  "미, 미스 티아."

  "뭐죠?"

  "재갈을 풀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아, 잊고 있었네요. 풀어주세요."


  제 입을 막고 있던 재갈에서 해방된 남자는 담배 연기 섞인 공기를 다시 마음껏 들이마셨다. 옳은 선택이었다. 이제와서 간접흡연을 피하려 해봤자, 폐암으로 죽는 것보다 더 빨리 생을 마감할 테니까. 자, 미스터 심슨. 대답해주세요. 테리어드는 남자의 눈앞에 제 얼굴을 들이댔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성욕을 자극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남자는 세상 최고의 공포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어서 대답해보세요. 나를 납득시켜보세요, 어서.


  "나, 나, 나는……."

  "그래요, 당신은."

  "주, 주, 주…… 죽, 고, 싶지, 않습니다…… 사, 살…… 살려, 주세요…… 제발……."


  실망했다. 테리어드는 몸을 일으켰다. 더는 필요 없어요. 그렇게 선언하자 조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절망에 물든 비명을 지르는 걸 듣고 있자니, 릭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희가 처리할 테니 돌아가 계시겠습니까? 테리어드는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 테리어드는 분명, 제대로 대답하면 즉사로 끝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답이 시원찮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배 한 대가 거의 다 타들어갈 때까지 남자에게 가해지는 린치를 보고 있다가, 테리어드는 손을 들어 조직원들의 발길질을 멈추게 했다. 그들이 옆으로 물러서자 그녀는 제 자켓 속에서 나이프 세 자루를 꺼냈다.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힐로 밟아 바닥에 쓰러뜨린 뒤, 나이프를 어깨에 세게 꽂았다.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역겨운 들렸다. 테리어드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보자 릭이 손수건으로 다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작업은 수월했다. 테리어드는 손에 힘을 주고, 나이프 두 자루를 한꺼번에 천천히 그의 가슴을 향해 끌어내렸다. 피가 튀고 그녀와 남자를 둘러싼 자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깨에서부터 배까지 V자의 상흔이 남았을 때 남자의 목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나이프를 그대로 몸에 박아 놓고, 테리어드는 제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처리하세요."





  벨은 아무것도 몰랐다. 딸이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들이 무슨 관계였는지, 전혀 몰랐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앞둔 날이었다. 갑자기 생리가 오지 않게 된 딸을 걱정하여, 벨은 싫다는 딸을 끌고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는 착잡하게 말했다. 임신이군요. 2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벨은, 눈물을 흘렸다. 누가? 그런 질문은 필요 없었다. 당연하다. 그녀의 딸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여자 고등학교에 들어갔었다. 그 집에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제 엄마가 모든 것을 알았음을 깨닫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지워주세요, 라고 말하는 벨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 울지 마요. 엄마, 엄마, 엄마. ……미안해요, 내가 잘못한 거죠? 그 너무도 당연한 질문에 벨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괜찮아. 나쁜 건 네가 아니야. 소녀는 엄마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지만, 아서는 소녀가 임신한 아이가 없어져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군, 하고 말한 뒤, 또 자신의 딸을 방으로 들였다. 그건 순전히 소녀의 잘못이었다. 옷을 벗으라고 말하면 벗는다. 이쪽으로 와, 라고 하면 온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고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테리는 그런 여자아이였다. 아버지가 좋았으니까.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싫었으니까. 맞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날.

  탕, 하는 총성과 함께 모든 것이 전부 끝났을 때.


  -……엄마Mom?


  그렇게 불렀을 때 벨은 울었다―


  "미스 티아. 시체를 처분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저……."

  "뭐죠?"

  "아까의 이야기……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그런 게 신경쓰이나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시선을 릭에게 돌렸다. 릭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아, 아니요, 하고 말했다. 일부러 옅게 칠한 립스틱이 담배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데 욕정을 느끼다니, 이상한 남자였다. 테리어드는 릭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솔져와 어소시에이트를 차별할 생각은 없어요. 노스트라의 이름 아래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

  "하지만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자신이 제거될 수도 있다, 는 걸…… 알아두시는 게 좋겠군요."


  그건 경고의 말이었다. 그래도 릭은 포기하지 않았는지 굳어진 얼굴로 테리어드의 곁을 서성였다.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걸까, 이 남자는. 짜증날 정도로 질린 기분이 들어, 테리어드는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이야기를 돌려야 했다. 다른 이야기. 다른 이야기를 찾자. 그러다가 테리어드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간 것은, 갈색 머리카락이 무척 매력있는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 이름이 릴리라고 했었죠."


  아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도.


  "보수는 해…… 주었나요."

  "예, 돈을 조금."

  "조금? 얼마나?"

  "그, 저…… 미스터 심슨의 재산, 을, 반 정도. 아, 그, 그러니까, 나머지 반은 조직에서 몰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져서……,"

  "……아뇨, 그 자의 재산은 전부 조직에 넘겨주세요. 보상…… 은, 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으론 보상되지 못한다. 산산조각난 소녀의 미래도, 슬픔도, 괴로움도,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 아이는 평생 아픔을 딛고 살아야만 한다. 그래도 쓰러질 수 없겠지. 자신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할머니가 있는 이상, 이제는 우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못하게 될 것이다. 죽을 수도 없이 살아가는 목숨. 그런 생을 강요한 자를 아무리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하고 싶어도, 이미 늦었다.


  "부탁이니까 먼저 돌아가요. 날 혼자 내버려 둬요."

  "아, 알겠습니다……."


  릭이 층계참을 나간 것을 확인하자 몸에 힘이 풀렸다. 아직 남자의 피가 남아 있는 계단에 주저앉아, 테리어드는 팔에 얼굴을 묻었다.

  싫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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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