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1.
"그래서,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기려고 해."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새삼. 난 자신이 믿지 못하는 부하에겐 이런 말은 안 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연한 남자의 목소리는 또 골치 아픈 일을 말했다. 전화를 검과 동시에 남자가 보내준 명단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여섯 개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섬뜩하게도 그 이름들을 수놓은 색은 빨강이었다. 막 인쇄되어 나온 종이는 따뜻했고 잉크는 손에 묻어났지만, 테리어드는 굳이 그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개중 두 명은 그녀도 아는 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 전부를 파악하고 있었던 건 와일드캣 혼자인가? 후안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소가 나왔다. 그는 테리어드가 알고 있는 어소시에이트들 중에서도 일을 참 잘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 능력이 가져온 정보와 그로 인해 발생한 상황은 그녀를 한없이 귀찮게 만들었다. 미간이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녀는 무릎 위에 펼쳐뒀던 지도 위에 잉크 묻은 손가락을 얹었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는 이미 바싹 말라 지도에는 묻어나지 않았지만, 당일이 되면 다른 것이 이 장소에 번지리라. 그때의 순간을 머릿속에 천천히 시뮬레이션하면서,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상상했다. '그들'의 비명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찔했다. 심장에 꽂은 칼을 점점 몸 안쪽으로 찔러넣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그녀의 손에 죽어간 여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와는 4년이 넘게 함께 일하면서,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나 이야기를 잔뜩 함께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죽어가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녹색 눈동자가 가슴에 깊게 남아, 갑자기 가슴을 짙게 짓눌렀다. ―미스 티아.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꾸짖듯 들려오는 카포레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계속 어두운 생각만 하고 있었으리라. 예, 카포.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벽에 걸려 있는 자켓을 쥐었다. 나이프 네 자루가 들어 있는 자켓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웠다. 묵직한 자켓을 몸에 걸치자 나이프들이 서로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그락. 참 유쾌한 느낌의 형용사였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가벼운 목소리가 테리어드의 귀를 스쳤다.
"자네에게 선물한 나이프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비싸게 구한 거거든."
#2.
죄송합니다, 카포.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바라보면서 테리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작정 총부터 쏴대는 상대가 눈앞에 있으면 이렇게 사용하는 게 정답이다.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전장'에서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상대였다. 사실, 아직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지 원래대로라면 벌써 질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애초에 타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 임무로 알게 된 자 외의 타인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은 테리어드의 성격상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성격임에도 제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겐 쉽게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총을 들고 덤벼오기에 방심하고 있었더니 나이프를 던져서 제 어깨에 피를 냈다. 살짝 스친 정도여서 나이프를 휘두르는 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어깨끈이 끊어져 드레스가 흘러내리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제 겉모습을 신경 쓰다간 눈앞의 여자를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 아니었어도 테리어드는 벌써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테리어드가 펍의 가수 벨이라고 증명하는 사진과 필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걸로 자신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안위는 그렇다치고, 이곳― 몬도 카네가 노스트라의 소유라는 사실을 헤니르에 알릴 수는 없었다. 처리하고, 돌아간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도로 홀스터에 돌려놓고, 새 나이프를 꺼냈다. 상대가 그녀의 그런 행동에 미소지은 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그녀는 힘껏 발을 내딛어, 앞으로 나아갔다.
#3.
총성이 컨테이너가 잔뜩 늘어선 부둣가에 울렸다. 아무리 범죄자를 상대하고 있다지만 바로 발포하다니, 미군도 진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을 끌기'는 커녕 오히려 당하고 말지도 모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암담함만 더해질 뿐이었다. 브로커에게서 무기를 건네받는 임무로 부두에 왔다가 미군을 발견한 지 세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관이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는지 옆에 선 어소시에이트가 그녀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불안을 해소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리어드는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의 어소시에이트를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카포레짐에게서 들은 지령을 머릿속에 되살리며 그녀는 나이프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이런 현장에서 총을 전혀 쓸 수 없는 자신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기서 세 팀으로 갈라진다. 제 1팀은 와일드캣, 네게 맡기지. 몇 명을 선발해서 창고 쪽으로 이동해. 네 임무는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제 2팀은 저격반. 한 사람이…… 그래, 당신이 가서 반대쪽 컨테이너에서 발을 묶도록 해. 모든 타이밍은 내가 지시하지. 제 3팀은 운반을 맡는다."
"하지만 저격하라고 해도 무기가 없습니다만……?"
"비상사태니까, 물건 중에 하나를 꺼내 쓰도록 해. 라이플 정도는 다룰 수 있을 거 아냐?"
평소보다 차갑고 딱딱한 명령이었다. 개의치 않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후안뿐이었다. 그와는 임무를 수행하러 나오기 이전부터 상의했던 것이 있었다. 그가 유능하며, 명령대로 움직여 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 테리어드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아까부터 나이프 대신 꽉 쥐고 있는 핸드폰이 울리기를.
후안이 어소시에이트 세 명을 데리고 창고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 역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저격이라는 큰 임무를 떠맡게 된 어소시에이트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한심하기는. 오히려 활약할 찬스라 생각하면 될 텐데. 뭐,
―애초에 활약할 틈도 주지 않겠지만.
저격수가 자리를 잡자 후안의 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숨어 있던 무리가 튀어나오면서 일제히 흩어지자, 미군들이 분산되어 그들을 따라갔다. 테리어드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레 테리어드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 티아, 적이 저렇게 흩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불리합니다. 잘못하면 저격수의 위치가 눈에 띨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와일드캣에게 지시를 내려서 저격 시기가 될 때까지 총격전을 벌이는 정도로―"
"착각하지 마세요. 와일드캣은 내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입 다물고 지켜보기나 하세요."
차가운 시선을 주자 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앗차 싶어 얼굴을 옆으로 돌렸지만, 상대는 상관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했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약간의 분노도 깃들어 있었다. 저보다 어린데다, 여자인 테리어드의 악의 섞인 명령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리라. 쯧. 테리어드는 혀를 찼다. 어차피 길지 않을 목숨이니 집착은 버리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앗, 하고 두 명의 남자가 혀를 차는 게 들렸다. 위쪽에서는 그들의 동향이 훤히 보였다. 후안 조의 세 사람이 자신들을 따라오는 미군을 따돌리고 다시 창고에 모이는 참이었다. 저게 미스 티아의 작전이었습니까? 하는 질문엔, 아까와 달리 존경심이 섞여 있었다. 테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저것은 후안의 작전이었겠지 하고 생각했다. 부하의 공적을 가로채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점점 이 고착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빨리……."
"예?"
제발, 카포.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마침 벨소리가 울렸다. 예, 카포. 그 대답에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리하자고― 그 나른한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카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테리어드를 바라보는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는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리라.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집어넣는 것과 동시에 나이프를 두 개 꺼내,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목에 찔러넣었다. 그들의 단말마는 억, 단 한 마디였다.
정말 짧게도 끝나 버린 그들의 인생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컨테이너 위에서 뛰어내렸다. 구두굽이 바닥과 부딪혀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를 냈지만 테리어드는 지극히 냉정했다. 창고 안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 명의 표정이 변했다. 숨어서 지시를 내려야 할 최고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 한 사람, 후안만큼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랬다.
"카포께 연락이 왔다."
이 말만 해두면 이해하겠지, 하는 생각대로, 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한 정 꺼냈다.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어소시에이트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는 걸 보고 테리어드는 창고를 나섰다. 총성을 들은 미군이 몰려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4.
가까이서 본 해린의 눈은, 적어도 테리어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깔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는 묵묵히 해린의 목을 노렸다. 핏줄이 선명히 드러난 하얀 목에서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피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이 아닌 열. 피가 끓어 얼굴을 붉게 만드는 열기와는 다른. 순간 테리어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직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에 지독히 자존심이 상했으나, 내심 안심했다. 기왕이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분명 테리어드의 머릿속에도 있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지 않은 그 이유가, 자신과 해린에게 있어 조금 달랐을 뿐.
테리어드는 제 쪽에서 거리를 벌렸다. 해린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띠었지만 생각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두 다리를 벌려 착지하자 드레스 사이로 투척용 나이프가 우수수 떨어졌다. 해린이 테리어드를 향해 총구를 치켜든 것과 나이프 여덟 자루가 한꺼번에 해린을 노리고 날아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5.
같은 시각, 테리어드의 지시를 받고 저격을 준비하고 있던 어소시에이트는 괜히 주변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지시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10분 정도 몸을 차가운 컨테이너에 밀착하고 있으면 어깨가 삐걱거려서 쏠래야 쏠 수가 없게 된다. 젠장, 그런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는 여자라니.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내며 삐걱거리는 어깨를 살짝 가다듬었을 때였다. 갑자기 강한 힘이 그의 머리를 눌렀다. 윽,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라이플을 놓쳤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줄도 놓쳐버린 셈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를 떠올리려 했다. 미군 중 누구 하나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소리없이 뒤쪽으로―
"안 되죠. 아무리 저격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자기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언제나 주변에 신경을 쓸 것. ―저격수의 행동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는 제 시선 끝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다. 남자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누른 채 그 몸 위에 걸터앉은 테리어드는 제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댔다. 미, 미스 티아,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는 물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속삭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여기서 죽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분을 밝히고 투항하겠습니까?"
"시, 신분……?"
"그래요. 당신의 그, 벌레 같은 조직 이름을 대라는 뜻입니다."
남자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차가운 나이프가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듯 빛났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잔혹하다. 한 번 정도 같이 일해본 적이 있었지만, 남자인데다 시체를 수없이 봐온 자신도 흠칫 놀랄 만큼의 잔인한 살해 방식을 취했다. 노스트라의 상어. 그 이빨이 이번엔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도 같은 꼴을 당했을 거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6.
총알이 맞춘 것은 테리어드도 그녀의 나이프들도 아니었다. 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제 옆에 있는, 건물이라면 어디든 설치되어 있는 소화기임을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뿌드득 이를 갈며 나이프를 손에 쥐는데, 흰 연기 속에서 날아온 총알이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튕겨냈다. 이후 해린이 취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테리어드는 왼손을 제 머리로, 오른손을 가터에 돌려놓았던 나이프로 옮겼다. 금색 실을 한 줌 손에 쥔 순간 구둣발이 튀어나와 테리어드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급소에서 비껴나간 곳을 얻어맞아, 테리어드는 벽으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하얀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해린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볼 일 없다 생각했던 적은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테리어드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해린은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들이댔다.
"이걸로 체크메이트예요, 신데렐라. 이제 어쩔 건가요?"
"……글쎄요, 아직 체크메이트는 이르죠."
테리어드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해린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금색 실― 아니, 머리카락? 그 정체를 깨달았어도 해린의 시야는 일순간 가려졌다. 그리고 그 일순간만으로도 테리어드는 충분했다. 틈을 노려 해린의 가슴을 힘차게 걷어찬 테리어드는 벽과 해린 사이에서 몸을 빼어 튕겨져 날아간 나이프를 주웠다. 공격은 적중했으나, 해린의 데미지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까 테리어드가 잘라낸 제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해린의 시선이 잠시 그것을 향했다가, 테리어드의 짧아진 머리카락 끝으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됐네요."
"미용실에 가서 손질하면 돼요."
"가발을 쓰시기 편하겠는걸요."
"그러게요."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의 대화가 오고간 뒤, 총알과 나이프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7.
테리어드는 시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미군은 저격수를 포함한 네 사람이 투항하자 더 이상 적이 없다고 굳게 믿은 모양이었다. 시간을 벌 때도 후안이나 자신은 뒤에 숨어 있고 되도록이면 그들이 나서도록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입을 모아 이곳에서 무기 밀매를 하던 것은 노스트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직이라 말하고 있을 터였다. 네 명의 증언이면 신빙성이 있다. 만약 배신하고 엉뚱한 말을 입에 올릴 경우엔 당장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들에겐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된 것이다. 후안이 창고에서 사라진 것을 파악하고 테리어드 역시 몸을 피했다. 그 날 임무의 마무리는 류상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뿐이니, 후안은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분명 매우 장난스런 문자메시지를 보냈겠지.
오늘 임무에는 테리어드와 후안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 중에서 이 비밀 작전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테리어드와 후안 두 사람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테리어드에게 있어 남은 일곱 명 중 믿을 사람은 후안 한 명뿐이었다. 후안을 제외한 여섯 명의 이름은 오늘 아침 테리어드가 받은 명단에, 단 하나의 공통점에 묶여 실려 있었다. 그 공통점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배신자'.
그 여섯 명 중 네 사람은 다른 조직에서 노스트라에 들어온 스파이였고, 나머지 즉 테리어드가 죽인 두 사람은 원래 노스트라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 좀 더 큰 이익을 위해 제 신분과 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긴, 진짜 '배신자'들이었다. 그것도 노스트라의 가장 큰 적인 헤니르가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은 조직. 후안이 회의에서 보고한 사실들― 미군이 무기 밀매 루트에 주목하기 시작한 일, 몇몇 브로커의 행동이 이상해졌던 일들의 주모자는 바로 그 조직이었다.신분증명서가 든 지갑은 이미 테리어드가 회수한 뒤였다. 아마 두 사람의 시체는 저들의 동료로, 자수하자는 말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한 것처럼 되어 있으리라.
'……여하튼, 임무 완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오케이 사인이 내려졌어도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바쁠 것이다. 대신 메시지만 한 통 보내놓고 테리어드는 죽은 자들의 지갑 내용물을 꺼냈다. 한 명의 지갑엔 정말 돈밖에 없었고, 나머지 한 명의 지갑엔 운전면허증과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죽인 남자는 자신과 똑닮은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은,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라이터를 꺼내 운전면허증을 태운 뒤에도 테리어드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제이나도 가지고 있었지. 환하게 웃고 있는 남동생의 사진을. 그때도, 그 사진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아들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겨 놓고는, 사진을 찢었다. 사진 조각이 테리어드의 손에서 바람을 향해 흩어졌다. 그 사진도 이렇게 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 청년의 얼굴은 이미 외우고 있는데.
짧은 체념과 회한을 안고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후안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기 위함이었다.
#8.
"미스 티아!"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점장의 발소리에 해린은 총을 거두었다. 물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테리어드는 여전히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해린은 정말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품에서 필름과 라이터가 나왔다. 해린의 손끝에서 타들어가는 필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부터 필름을 태웁니다' 하고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무척 눈에 거슬렸다. 물론 그녀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테리어드에게 보내 온 도전장과 사진에 복사본이 없다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이게 문제의 필름입니다. 헤니르에는 알리지 않을 거예요."
그 말로 적어도 눈앞의 여자가 노스트라와 헤니르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고, 자신의 정체도 알고 있고, 헤니르 쪽에 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도 큰 수확이겠지. 그래서 테리어드는 굳이 해린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해린도 즐거웠다는 말만 남긴 채 깔끔하게 뒤로 돌아섰다.
"그러니 안심하고 노래하세요, 신데렐라."
또각, 또각, 또각. 단정한 발소리가 사라지자 테리어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달려온 점장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귀에 닿질 않았다. 신데렐라, 신데렐라라. 해린이 남기고 간 마지막 단어만 반복하며, 테리어드는 제 손에 들린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12시가 지난 지 꽤 됐으니, 이제 마법은 풀렸겠지. 그녀에게 걸려 있던 것은 무슨 마법일까.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는 집으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간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데리러 온다. 하지만 그 왕자가 가지고 오는 것은 유리구두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목숨을 끊어놓을 비수이리라. 사진으로 본 두 명의 소년. 오늘 죽인 남자의 아들과, 제이나의 남동생. 그들 중 누구라도 복수하러 온다면 기꺼이 맞이해줄 생각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얌전히 죽어줄지 아닐지는, 테리어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짧아진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잘라버린 머리에 당연히 미련은 없다. 길게 자란 머리는 동경했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줄만한 상대는 없는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목에 닿아, 맥이 그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두근, 두근, 두근. 아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리어드는 나이프를 품 안에 돌려놓았다.
"It's not dead end……."
아직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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