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날씨가 좋아, 벨."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여인은 침대에 앉아서, 링겔 바늘이 꽂힌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소녀는 커튼을 걷었다. 따스한 햇살이 여인의 고운 목덜미에 쏟아졌다. 어머, 눈부셔. 중얼거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소녀는 침대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오늘 날씨는 굉장히 따뜻하대. 내일부턴 다시 추워지지만. 그러자 여인은 뜨개질감에서 시선을 떼고 소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하고 되묻는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아름다웠다. 소녀는 여인의 그런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드디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어. 나와, 벨과, 단둘이. 웃으면서 소녀는 여인의 손을 잡았다. 벨, 우리 같이 산책할까? 하지만 나는 움직이기가 불편한걸. 괜찮아! 내가 지금 당장 나가서 휠체어 빌려올게! 그러자 여인은 웃었다. 그래 주겠니? 그녀의 상냥한 웃음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여인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언제나 소녀에게는 기쁘고, 행복했다. 소녀는 밖으로 나가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부탁했다. 담당 간호사의 도움으로 조심스레 여인의 몸을 휠체어로 옮긴 소녀는 휠체어를 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녀올게요! 소녀의 밝은 목소리는 간호사들을 기쁘게 했다. 여인이 앉은 휠체어를 끌고 소녀가 앞을 지나가면 간호사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정말 닮은 모녀네요, 하고 속삭였다. 아주 옛날부터 그런 칭찬을 들으면 가슴이 따뜻했고, 무척 행복했다. 들었어, 벨? 우리가 닮았대. 그러자 여인도 환하게 웃었다. 그런 모양이구나. 그녀가 아까부터 뜨고 있는 것은 목도리였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기 전에 만들어야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여인은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 없는 허밍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해, 듣기 좋았다. 소녀는 꽤 길어진 목도리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마침 며칠 뒤는 소녀가 성인이 되는 생일이었다. 소녀는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은 좀 어때?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물론이지. 테리가 날 아주 잘 돌봐 주잖니."
"나, 지금 집을 알아보고 있어. 예전 집보다는 좁고 가전도구도 많지 않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우리 즐겁게 지내자. 예전처럼 같이 케이크도 굽고, 즐겁게 웃고,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그래, 이젠 말릴 사람도 없어. 나, 다시 피아노 학원에 다닐래. 내가 반주할 테니까 벨은 노래를 불러.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노래하자. 어때?"
"응, 그래. 멋지겠구나."
"이제 우리 둘뿐이지만…… 난 이제 성인이니까…… 내가 돌봐줄게. 여태껏 벨이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그렇게 해줄게. 응? 엄마Mom."
그렇게 말하면서 여인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소녀는 여인이 지은 경악한 표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가 다시 미소 지으며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보인 건 웃고 있는 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소녀가 기대했던 흐뭇한, 그리고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 의아함이 공존한 웃음이었다.
"엄마?"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소녀는 자신의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테리, 농담하지 말아. 나는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걸. 아, 하지만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
"뭐……?"
"그렇구나, 테리한테는 아직 말해주지 않았었지? 아서가 사실, 프로포즈 하려고 한다는 것 같아. 그런데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난 빨리 반지를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런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 정말,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살 수가 없다니까……."
천천히 여인에게서 손을 떼고 소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옆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소녀의 눈앞에 있는 건 소녀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여자였다.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소녀는 제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안 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 한 단어였다. 안 돼 No. 세상에서 제일 상냥하고 따스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생각났다. 남자의 커다란 손에는 분홍색의 키티가 그려진 딸기 사탕이 놓여 있었다. 소녀에게 사탕을 내밀며 남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테리. 이리 오렴.
"벨……?"
"그런데, 아서는 내가 병원에 입원한 건 알고 있니? 알겠지? 그야, 알고 있을 거야. 테리, 네가 알려줬을 테니까. 너희 둘은…… '특별히'…… 친한 사이잖니."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소녀에게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인의 푸른 눈동자, 그 양 눈동자 중 한 쪽에서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Why. 여인의 입술이 그 모양을 그리자 소녀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소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왜 그래, 벨.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 여인은 제가 휠체어 바퀴를 돌려 소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Alley Cat 도둑고양이. 자신에게 분노밖에 드러내지 않는 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소녀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응급실 침대 위였다. 간호사 몇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과로래,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메저즈 양, 어머니 병원비 마련하는 게 그렇게 힘드니? 간호사들이 이번 약값은 돈을 좀 모았으니까, 혼자 노력하지 말고 힘내렴. 평소에는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을 자상한 말이었지만 소녀는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벨, 은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간호사는 여인이 이미 병실에 돌아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네가 쓰러지고 나서 어머니도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셨단다. 하지만 소녀는 간호사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진위를 따지는 것보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닥터 크롬웰은 어디에 계세요?"
‥
여어, 메저즈 양. 정신은 들었나?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원장, 닥터 크롬웰은 소녀의 얼굴에 경악과 슬픔이 깃들어 있는 걸 보고, 살에 눌려 가느다란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그 반응만으로도 소녀는 원장이 무척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닥터, 벨이, 닥터…….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제 몸도 파르르 떨렸다. 크롬웰은 소녀에게 자리를 권했고, 따뜻한 커피를 권했고, 심호흡을 하라고 말하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겨우 진정된 소녀는 자신의 고통과, 그 순간 받았던 충격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그런 소녀를 크롬웰은 따스한 눈동자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가 쓰러지고 나서, 벨도, 아파했다고, 들었는데."
"음……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았어, 매저즈 양. 미세스 매저즈는 자네가 쓰러진 걸 보고, 그, 마치, 광인처럼 웃어댔다네. 그러다가 탈진해서 쓰러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닥터, 벨이…… 저를 못 알아봤어요. 제가 엄마Mom, 라고 부르니까…… 무슨 소리, 냐고……."
"음…… 그런가. 이건 아주 희귀한 현상이야. 나도 미세스 매저즈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눠봤다네. 하지만 매저즈 양, 자네의 어머니 머릿속에서, '테리어드'라는 존재가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야. 그건 알아둬야 해."
"하지만, 이상, 했는, 걸요. 간호사, 들이, 닮았다고…… 저와 벨을 닮았다고 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기뻐했는데……."
소녀를 대할 때마다 여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소녀는 그 반응을,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거동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자신을 돌봐주는 다 큰 딸을 기특해하는 거라고. 하지만. 소녀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지만, 벨은 그게 아니었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떨리고 있었다. 벨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질문에 크롬웰은 대답했다. 딸이 아닌 다른 존재겠지. 자신을 닮았다고 해도 의아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정도니…… 아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거나, 아, 정신 연령도 어려진 듯하니, 쌍둥이 자매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
'……아, 그래서였구나.'
여인이 여인의 남편과 결혼한 건,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였다. 소녀도 이제 곧 스물이 된다. 여인이 아마 그 남편에게 가장 사랑받았을 그 나이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소녀는 간신히 이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한 소녀의 그 얼굴을 크롬웰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해한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벨의 여동생, 같은 존재로 계속 지내면, 벨과 제 사이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겠죠? 제가 벨에게 최대한 맞춰 주면, 벨의 정신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거죠? 소녀의 그 간절한 말에 의사는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소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웠다.
"다만…… 몸에는 이상이 있지."
그러나 간신히 평화를 찾은 소녀의 귓속에는 다시 잔인한 선고가 찾아들었다. 벨이 갖고 있었던 종양 말일세, 몇 년 전보다 악화되었어. 지금은 자궁까지 번진 상태일세. 소녀는 잔을 떨어뜨렸다. 플라스틱으로 된 튼튼한 잔이라 깨지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들었던 커피는 바닥에 흩뿌려져 소녀의 갈색 어그부츠를 더 진하게 만들었다. 왜, 왜요? 그건 다 나은 게 아니었나요? 그러자 크롬웰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찾아왔을 때 종양을 제거하지 않은 게 문제였던 거겠지. 억지로라도 수술을 시켰어야 했는데, 제 집 사정에 그건 무리라고 미세스 매저즈가 사정을 했어. 남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야. 쯧쯧, 하고 크롬웰은 혀를 차며 책상 서랍에서 차트를 꺼냈다. 엑스레이로 촬영한 사진의 새하얀 자궁 속에, 새까맣고 끔찍한 덩어리들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벨의 자궁 상태인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남편Her husband. 인간 같지도 않은 아서를 위해서 벨은 자신의 건강을 희생했다. 그 대가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과, 세상에서 가장 아꼈던 딸의 배신이었다.
소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을 수 있나요? 그 목소리에 가득찬 결의에 크롬웰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고말고. 그는 소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수술해서 종양을 들어내면 된단다. 소녀는 물었다. 수술비는 얼마나 되나요? 크롬웰은, 손가락을 세 개 들어 보였다. 30만 달러라는 뜻이었다. 소녀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통장의 잔액과 자신이 지금 당장 변통할 수 있는 돈을 계산했다. 그러나 그 절반인 15만 달러 이상의 계산은 나오질 않았다. 절망에 빠져 파랗게 변해가는 소녀의 얼굴에 크롬웰은 다시 소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수술 날짜를 잡아놓지. 종양이 발견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 게 좋아. 수술비 이야기는 수술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하, 하지만, 닥터. 제겐 변통할 수 있는 돈이 없어요. 어떻게든 모아봐도, 15만 정도밖에……."
"괜찮네. 절반은 내가 부담할 테니까. 오랫동안 지켜봐 와서 그런지, 내게는 미세스 매저즈가 딸로, 자네가 손녀로 느껴질 정도야. 종양도 많이 번지지 않았으니 성공률도 높네. 자네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크롬웰은 웃었다. 소녀에겐 눈앞의, 빈말로도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 여인이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이, 소녀의 판단을 아주 약간 흐리게 했다. 소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크롬웰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눈을 크게 뜰 줄 몰랐고, 자신의 은인을 의심하거나 주의 깊게 살필 줄 몰랐으며, 자신의 결정이 자신을 괴롭게 만들 거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원장실을 나와 소녀는 바로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안에서 여인은 뜨개질감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아마 저 목도리는 소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하는 이에게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보다는 절망하지 않았다. 소녀는 잠든 여인의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 벨. 나는 테리어드 트랭크스로 살아가도 괜찮아. 벨의 여동생, 벨의 유일한 가족, 벨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게. 괜찮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괜찮아, 괜찮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소녀는, 사실은 여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소녀는 아르바이트를 늘렸다. 크롬웰이 15만 달러를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 정도로 그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이 소녀의 생각이었다. 간호사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여인의 간호를 부탁한 뒤, 소녀는 밤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답답하게 가리는 주유소의 제복을 입고, 주유소 로고가 새겨진 장갑을 끼고 일했다. 호스를 주유구에 밀어넣는 데도 익숙해졌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병원으로 돌아와 보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자고 있었다. 소녀는 숙직 간호사들의 샤워실을 빌려 씻었고, 그들이 이용하는 무인 세탁기로 옷을 빨아 입었다. 간호사들은 모두 친절했다. 소녀의 옷을 빨아 숙직실에 같이 널어 주었으며, 소녀를 위해 언제나 푹신푹신한 잠자리와 따뜻한 이불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소녀는 제가 혼자 살고 있던 원룸을 팔았다. 6만 달러가 손에 들어왔다. 턱없이 작은 돈이었지만, 소녀가 모은 돈은 15만을 넘어 20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소녀는 자신이 성인이 되는 날을 주유소 휴게실에서 졸면서 보냈다.
여인의 수술 날짜는 소녀의 스무 번째 생일로부터 정확히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여인의 수술 날, 소녀는 주유소 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병원으로 왔다. 아홉 시가 지난 시간, 크롬웰은 지친 얼굴을 하고 소녀에게 수술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여인의 몸에서 떼어냈다는 시커먼 종양 덩어리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마치 새까만 태아 같았다. 소녀는 종양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통장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무과에 가서 여태까지 모은 17만 달러를 우선 낼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닥터. 30만 달러까지 아직 13만이나 되는 돈이 남았어요. 그건…… 반 년 정도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소녀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소녀에게는 아직, 예전에 살던 집이 남아 있었다. 40만 달러 가까이 하던 그 집은 살인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20만 달러 이하까지 가격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 집이 팔리면 수술비는 백 퍼센트 충당할 수 있었다. 소녀는 집이 팔릴 것을 믿고 있었다. 소녀의 집을 사겠다고 나선 한 중년 부부는 소녀의 사정을 동정하여, 부동산에서 제시한 20만 달러에 5만 달러를 더 얹어주겠다고까지 했다. 소녀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돈을 내는 건 급한 일이 아니야. 자, 자. 일단 앉아보게."
이제는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더 낼 필요는 없네. 나는 돈을 기다리지 않을 거고, 자네가 가져와 봤자 받지도 않을 거야. 어이쿠, 반론은 안 해도 돼. 자네의 반론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고작 스무 살 되는 소녀는 그렇게도 어리석었다.
"사실은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매저즈 양.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꺼비 같은 얼굴에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위에서부터 소녀를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아까 벨에게서 도려낸 종양처럼 끔찍했다. 소녀는, 어릴 적의 경험으로 인해 그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그럴 리가 없다, 는 안일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왜 그러세요? 소녀의, 제 포획물의 어리석은 질문에 의사는 웃었다. 나는 말이야.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을 살아왔어. 나이가 벌써 육십이 다 되어 가.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은밀한 곳만 40년 가까이 보아왔어. 그러다 보니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군. 이 나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은 건 그 때문이야. 그 어떤 미녀를 봐도 감흥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소녀는 그 말에 동조하지도,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도 '위험할 것 같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와 달리 의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자네를 보면, 자네를 보고 있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여기가 두근두근 뛴다고나 할까? 의사는 제 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살짝 얹었다가, 손을 다시 소녀에게 뻗었다. 소녀의 손목을 잡고 들어올린 의사는 소녀의 작고 거칠어진 손을 제 사타구니로 가져다 댔다. 정색하는 소녀에게 의사는 또다른 지옥을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나를 발기시켜 줬으면 해."
당황하여 소녀는 의사에게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가 소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깨끗해진 여인의 자궁 사진과, 보란듯이 소녀에게 보여준 종양 덩어리와, 통장에 들어 있는 17만 달러의 돈 같은 것.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더러워. 하지만 의사는 소녀의 그 중얼거림을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은혜 갚기'의 금액을 읊고 있었다. 한 번에, 만 달러 정도면 어떤가? 세워 주고, 가게 해 주게. 내게 쾌락이란 게 뭔지 가르쳐주게. 응? 그 정도면 결코 나쁘지 않은 거래야. 어딜 봐도 나쁜 거래였지만, 소녀에게는 이제 반문할 힘은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소녀는 처음으로 펠라치오란 것을 해보았다.
‥
여인의 건강은 계속 좋아지고 있었다. 소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안색은 밝아졌고 혈색도 좋아졌다. 간호사들도, 여인이 평소보다 밥을 잘 먹고 있다며 좋아했다. 여인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피곤에 지친 소녀가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서 와, 테리.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맞아주는 여인에게 소녀는 약한 미소밖에 지어 줄 수 없었다. 소녀에게는, 여인에게 반드시 말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무서워, 벨.'
소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소녀였을 시절, 여인은 소녀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엄마, 무서워.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파고들면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었다. 소녀가 보았다는 유령이나 귀신 이야기도 웃지 않고 들어주었다.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그런 건 이제 무섭지 않아. 하지만 그 따스한 한 마디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었다. 지켜달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건 귀신도 유령도 물리쳐 주었던 강하고 상냥한 엄마가 아니라,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데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여인이었다. 소녀는 울었다. 속으로만 울었다. 몇천 번도 몇만 번도 더 울었다. 자신을 낳아준 그 자궁 위에 엎드려서 몇 번이고 울었다. 그러면 여인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테리. 엄마가 있잖니.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지옥 속에 빠져 사는 소녀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대신 여인에게 말했다.
"벨, 벨이 퇴원하면, 작은 집을 구해서 같이 살자."
"그래, 그래."
"방 하나짜리 집이어도 괜찮아. 거기에 침대를 두 개 들여놓고, 가운데엔 화장대를 놓자. 아 참, 벨은 밤에 불 끄는 걸 무서워하니까, 잠 잘 때만 켤 수 있도록 스탠드도 놓아둬야겠다."
"그래, 그래."
"부엌은 그리 크지 않아도 돼. 예쁜 주방도구를 여러 개 마련해서 같이 요리도 하자."
"그래, 그래."
"거실엔 작고 귀여운 피아노를 들여놓을까 해. 평일엔 바쁘게 일하겠지만, 휴일에는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자. 나, 피아노 학원에 다닐게. 일하는 틈틈이 가르쳐 주실 분이 있을 거야."
"그래, 그래."
"근처에 공원이 있는 집이면 참 좋겠다. 날씨가 좋은 날엔 같이 산책도 나가게."
소녀는 기계 인형처럼 똑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여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엄마라고 부르지 않을게. 다시는. 벨은 나의 언니이자 가족이자 내 가장 소중한 사람. 그것뿐이라고 생각할게. 벨이 원하지 않는다면, 딸이 되지 않을게. 나는 벨의 딸이 아니어도 좋아.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어 줘.
"혼자 두지 마……."
소녀는 훌쩍훌쩍 울었다. 병원복이 눈물로 젖어가는 것을, 여인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옳지, 너무 많이 울면 안 돼요. 그 자상한 목소리는, 딸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차가운 말이나 원망의 말이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인을 재우고 나면 찾아올 호출이나, 어둡고 컴컴한 원장실의 분위기나, 거기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이나, 그 빛이 반사되어 가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의사의 은 안경테도, 너무너무 싫었다. 하지만, 테리, 나 졸려, 하는 여인의 무심한 말은 소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의 시간마저도 깨부숴 놓았다. 응, 자자, 자장가 불러 줄까? 어떤 노래가 좋아? 여인은 입을 열었다. Goodbye. 곡명을 듣고 소녀는 웃었다. 자장가로 그런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 마. 그래도 그 노래가 좋은걸. 여인의 고집에 소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and I know how hard you try
You deserve to have so much more
I can feel your hurt and I sympathize
and I'll never criticize all you ever meant to my life
난 당신의 눈에 고인 아픔을 볼 수 있고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을만 해요
난 당신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고 동감할 거예요
그리고 내 삶에 커다란 존재였던 당신을 나무라진 않겠어요
I don't want to let you down
I don't want to lead you on
I don't want to hold you back from where you might belong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겠어요
You would never ask me why my heart is so disguised
I just can't live a lie anymore
I would rather hurt myself than to ever make you cry
there's nothing left to say
But goodbye…….
왜 저의 본심을 숨겼느냐고 당신은 묻지 않을 거에요
난 그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뿐이에요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상처입히겠어요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안녕…….
끔찍하게도 소녀는 목소리마저도 제 어머니의 것을 닮아있었다.
‥
'빚'이 8만 달러 정도 남았을 때 의사는, 원장실은 간호사가 언제 올지 몰라 위험하다며 제 집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정말로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렇게 의사의 집에 드나들게 되면서, 소녀는 자신이 모르던 의사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의사의 서재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비밀번호를 맞춰 놓은 서류 금고였다. 매우 소중한 것이 들어있는 듯, 의사는 몇 번이고 그것을 열고 닫으며 안의 물건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소녀는 의사의 침대에 누워 의사의 손동작, 바늘의 움직임, 달칵거리는 소리를 기억했다. 의사의 정액으로 더러워진 손을 시트에 닦고, 의사가 목욕하는 사이 그것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그 서류에는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가득했다. 간liver, 혈액blood, 신장kidney, 폐lungs, 심장the hearts, 장기intestines. 그러나 그것이 매우 중요한, 그리고 돈이 되는 서류라는 것은 알았다.
전환점.
그것은 매우 빨리 찾아왔다.
의사의 금고를 몰래 열어본 지 사흘 뒤, 소녀는 30만 달러라는 돈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손에 넣었다. 그 중에서 13만 달러를 서류가방에 넣고, 소녀는 원장실을 찾았다. 의사는 자기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녀가 자신을 찾아온 사실에 대해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소녀는 서류가방을 의사에게 밀어놓고, 돈이에요, 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닥터가 제게 빌려주신 돈. 소녀와 의사 사이의 빚이 3만 달러 정도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소녀는 당황해 하는 의사를 보며, 왠지 모를 쾌감도 느꼈다. 소녀는 가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 했던 건 신세진 병원비와 은혜 갚기라고 쳐두겠어요. 벨의 퇴원 수속을 밟아 주세요.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어요. 소녀는 의기양양했다. 소녀는 자신이 의사에게 이겼다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가. 이제 병원비로는 자네를 잡아두지 못하게 되었군."
그러나 의사는 매우 씁쓸하다는 듯 말하더니, 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갑 안에서 무척 소중한 보물을 꺼내는 듯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소녀는 자신의 안색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슨 사진인지는 굳이 의사가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는 젊고 예쁘고, 또 호신술까지 배웠어. 매우 영리하기도 하고. 그거라면 어떤 직장을 가도 열심히 일할 거고, 어딜 가서도 예쁨받을 거고, 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겠지. 나지막한 의사의 목소리는 또다른 절망을 담고 있었다. 안타까워. 내가 그런 미래에 똥물을 끼얹게 되다니. 의사가 돌려 보여준 사진 속에 찍혀 있는 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몸과 얼굴에 정액을 묻힌 채 잠들어 있는 소녀가 찍혀 있었다. 격렬한 정사가 끝난 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위하는 걸 도와주었을 뿐, 성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누구 하나 이해하지 못할 만한 사진이었다. 그건 정말, 협박용으로는 최상급의 사진이었다. 소녀가 자리에 주저앉은 걸 보고, 의사는 웃었다. 우리 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네. 특별히 자네의 생일로 해봤지. 좀 더 누르기 쉽겠지? 거룩한 악마는 소녀에게 절망을 말했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도 소녀는 의사의 집에 갔다. 여인은 병원 침대에서 여전히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와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다가, 소녀에게 한 잔을 권했다. 성인이니, 술도 마실 수 있어야지. 그 이상한 논리를 거부할 힘은 이제 소녀에겐 없었다. 소녀는 의사가 건넨 와인 한 잔을 바로 들이켰다. 그 푸른 눈동자에 절망 외의 다른 빛은 보이지 않는데도, 의사는 마냥 즐거워했다. 자,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 가운 끈을 푸르는 걸 보고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지옥이다. 그 서류를 발견한 순간,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순간, 소녀는 자신의 모든 괴로움이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의사가 옷을 벗고 제 앞에 서기를 기다렸다.
딩동.
소녀의 지옥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현관 벨 소리에 의사는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는 잠시 벨소리를 무시할지 나갈지에 대한 망설임이 보였다. 여하튼 그 얼굴에는 자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눈치 챈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의사는 결국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뒤뚱거리며 침실 밖으로 나간 의사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아니, 당신은?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뱉은 의사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소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렸다. 소녀는 천천히 침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순간.
탕.
소음기도 달지 않은, 조심성 없는 총성과 함께 의사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쑤셔넣었던 탓에, 총구는 의사의 타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으엑, 더러운 냄새. 중얼거린 남자는 총을 의사의 몸 위에 던져 버리려다가, 침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혀를 차고 남자는 총구를 의사의 가운에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소녀의 앞으로 다가와,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에 총구를 갖다댔다.
"미안해, 아가씨. 젊고 예쁘장한데다 매력까지 갖춘 아가씨를 죽이는 건 정말 싫은데 말이지, 이 아저씨처럼 나이를 먹으면 윗사람이 너무 무섭게 보이는 법이야. 우리 보스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아가씨가 목격자라서 어쩔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그 남자가, 니콜라이 페드로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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