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요, 벨! 같이 살면서 노래는 많이 들어봤지만,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하는 걸 보니까 또 다르네? 와, 진짜 감탄했어! 멋졌어!"
"그만 칭찬해요, 제이나. 부끄러우니까."
"얼굴색 하나 안 붉히고 그런 말 해도 신뢰가 안 가."
투덜거리며 얼굴에 붙은 분을 조금씩 지워주는 제이나를 보면서 테리어드는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게 웃었다. 퍼프에 클렌징 크림을 잔뜩 묻힌 그녀는, 한 통에 200달러 하는 고급 파운데이션이 아깝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점장도 이상해요. 갈색 피부가 유색인종을 생각나게 한다니, 대체 언제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나 그 지당한 원망은 사실 점장이 아닌 테리어드에게 쏟아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이 가게의 영업방침과 가수의 피부를 희게 만든다는 생각은 테리어드가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유색인종이란 웃긴 이유가 아니라, 그녀가 이 펍의 실제 주인이자 노스트라의 솔져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미안, 하고 속으로만 사과하고 테리어드는 장갑을 벗었다. 장갑 위로만 바른 파운데이션이 바싹 말라 있었다.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익숙해지면 괜잖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위장. 가만히 그 단어를 입술 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이것이 과연 필요한 일일까. 노스트라에 들어와서, 스물두 살의 처녀에겐 과분할 만한 힘을 이미 손에 넣었는데. 조직에 들어온 지 2년만에 솔져가 된 그녀를 보고 특례라 말하며, 그녀가 보스에게 뭔가 수를 썼다고 확신하는 조직원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출세의 원인을 물으면 해줄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만큼 많이, 죽였노라고.
테리어드 W. 메저즈라는 강자의 발밑에는 수많은 약자의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실례합니다."
순간 감상에 빠져들 뻔한 테리어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나가 당황하며, 이리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힘으로는 뿌리치지 못할 거라 생각해 도와주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은 테리어드에겐 익숙하고도 반가운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테리어드를 보고 제이나는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가발을 테리어드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거꾸로 씌우는 바람에 목이 돌아간 듯 기괴한 형상이 되어버렸다.
"나서면 안 돼요, 벨! 이 술취한 아저씬 내가 상대할 테니까 당신은 옷이나 갈아입어요!"
"아저씨라니 너무한걸. 그야 뭐, 이미 아저씨가 아니라 늙은이긴 하지만, 술이 취한 건 아니라네. 아, 아니면 그냥 척 봐도 서 있는 게 위태로워 보이는 건가? 아아, 나이 들었단 건 서운하구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걸 보면 아직 현역인걸요."
"그래?"
"예. 적어도 제 눈에는."
웃음기 섞인 테리어드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이나는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 아는 사람이예요? 가발을 벗은 테리어드가 씩 웃고, 남자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연거푸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제이나에게 남자는 흐뭇한 미소로만 답했다. 제이나의 나이대는 딱 그의 딸쯤 되었을 것이다.
"미안, 제이나. 먼저 돌아가요. 아니, 오늘부턴 별거였던가?"
"아뇨, 오늘 하루종일 이삿짐 센터랑 연락이 안 돼서…… 아직 짐은 우리 집에 있는데."
"내일 집으로 갈게요."
제이나는, 솔직히 말해 테리어드와 눈앞의 남자가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싶어하던 눈치였지만, 고용주가 저리 말하는데다 아까 실수한 것도 있어서인지 그녀는 평소의 싹싹한 태도를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클렌징 도구만 내려놓고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이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택시비까지 쥐어줬으니 밤길이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위안 삼기로 했다.
"오실 거라면 연락 한 통은 주시지 그러셨어요."
"서프라이즈 파티!"
"……주책이시네요."
"어. 그 앞에 '나이 먹고' 는 생략했지, 너."
그는 천에 싼 병을 보여주었다. 비쌌다고. 고급 럼주를 건네주는 그의 입가엔 언제나처럼 미소가 만연했다. 솜씨 좀 볼까, 아가씨 Kitty. 그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애 취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
"미안해, 아가씨 Kitty. 젊고 예쁘장한데다 매력까지 갖춘 아가씨를 죽이는 건 정말 싫은데 말이지, 이 아저씨처럼 나이를 먹으면 윗사람이 너무 무섭게 보이는 법이야. 우리 보스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아가씨가 목격자라서 어쩔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그래서, 지금 저를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어…… 그렇긴 한데, 아가씨. 이런 상황이면 보통 여자애들처럼 좀 겁 먹고, 비명 정도는 질러주지 않으려나. 동정심이 들어서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그럴 거였으면 진작에 살려줬겠죠. 소녀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삼키며 남자의 총구를 바라보았다. 한 번 가운에 닦았다고는 해도, 그 총에는 더러운 자가 토해낸 피와 타액이 아직 묻어 있었다. 그 사실이 꺼려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에게 유린당했을 때 소녀의 가슴에는 그보다 더러운 것도 묻어 있곤 했었다. 그래서 소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권총의 총구를 손으로 잡았다. 어어, 아가씨. 그거 잘못하다가 손 박살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충고도 듣질 않았다. 총. 남자는 이것으로 의사를 단번에 죽였다. 소녀에게 있어서, 소녀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강자를 너무도 쉽게 죽였다. 그것은 겨우 스무 살이 되는 소녀에게, 그 이상 있을 수 없는 강자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권총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무엇을 느꼈을까. 지금이 되어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말의 동정 비슷한 것을 느꼈음은 확실했다. 총구가 막혀 잘못 쓰면 제 손도 박살날 그 총 외에도 다른 무기를 잔뜩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굳이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아가씨, 살아 있고 싶어?"
"……그렇다기보단, 죽을 수 없어요."
"좋아, 그럼 내가 이제 기회를 세 번 줄게. 뭐든 묻고 싶은 걸 물어봐. 그 질문에 난 거짓말하지 않고 제대로 대답할 거야. 그럼 내 대답을 잘 듣고 날 솔깃하게 만들어봐. 내가 널 살려 줄 마음이 들도록 해봐. 대신, 질문을 잘 골라야 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좋아요."
소녀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녹색 눈동자가, 이전에 소녀를 바라보던 남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눈을 하고 있었기에, 믿었다. 굳게 믿고,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소녀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아차린 남자는, 벌써 주름이 조금씩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소녀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기로 했다. 입이 움직이는 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눈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첫 번째.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나름대로 감미롭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건 어디서 넣었어요?"
"우리 조직."
"저 남자는 왜 죽었죠?"
"아아, 정보를 빼돌렸어. 우리 조직이랑 손을 잡고 장기 밀매를 하고 있었거든. 조직의 통로, 비슷한 거였고. 그런데 그 정보가 헤니르…… 우리 상대 조직에 넘어갔어. 브로커가 정보를 사가지고 왔나봐. 30만 달러밖에 안 줬다고, 매우 싸게 팔았다고는 하는데, 뭐. 저 남자가 넘겼든 그렇지 않았든, 정보가 샌 이상 우리 조직엔 큰 손해지. 내 임무는 배신자를 제거하고, 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회수해 오는 것. 이상. 마지막은 좀 더 잘 골라야 될 거 같아, 아가씨. 여태까지의 두 질문은 재미없었거든."
재미있을 거예요. 소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날 당신 보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나요?"
그 말을 한 순간 소녀는, 갓 스무 살이 되었고 약자인데다가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소녀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가 되었다.
⇔
"아아, 정말, 그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 아니, 어린애 티도 못 벗은 여자애가 말이지. 갑자기 조직에 넣어달라는 거야. 하, 이렇게 웃긴 얘기가 어딨어."
"솔져 데뷔를 축하해 주러 오셨다더니…… 재미없는 과거 얘길 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만 같네요."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는 거야. 그때도 아름다운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너무 변해서 무서울 정도다. 세월이란 무서워. 이 늙은이한테는 특히."
"그러니까, 아직 늙진 않으셨어요."
"한창 때의 아가씨가 섹시한 옷차림을 하고 앉아 있는데 전혀 꼴리지 않는다는 게 이미 늙었단 증거야."
제게는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마운걸요.
테리어드는 슬쩍 미소지으며, 투명 막대기로 젓고 있던 칵테일 잔을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사 가지고 온 럼 외에는 재료가 그리 좋지 않아서, 맛있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그래도 남자는 전혀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테리어드가 가장 좋아하는 럼을 사 가지고 온 것도, 일부러 테리어드가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어디까지나 솔져가 된 그녀를 '축하'하려는 의미였다. 그 이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니콜라이 페드로프는, 상대가 자신에게 뭔가를 원하면 언제나 그 기대치를 배반하는 남자였다.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스무 살의 테리어드에게, 자신을 조직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는 아무리 니콜라이라도 깜짝 놀란 듯했다. 그럴 만했을 것이다. 죽음을 직면한 여자의 발버둥이라기엔,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을 테니까.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약간 찌푸리고, 제가 쥐고 있는 여자의 목숨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총을 원래 하려던 것처럼 죽어 나자빠진 자의 몸 위에 던졌다. 내가 왜 그래야 되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테리어드는 이미 니콜라이가 제 마지막 질문을 마음에 들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망설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테리어드는 다시 한 번 단서를 풀어주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정보는 내가 알고 있어요. 저 남자의 밀매품과, 거래 코스와, 주둔지가 어디고, 주로 거래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니콜라이는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테리어드는 결정타를 날렸다.
그 정보를 브로커에게, 고작 30만 달러를 주고 팔아넘긴 게 바로 나니까요.
그 날 이후 니콜라이는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나와 함께 언더시티로 가자. 테리어드는 그 손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숙직실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정리했다. 정리를 끝내고 나자, 테리어드에게 남은 건 작은 배낭 하나 정도였다. 집을 팔았다. 노부부에게서 받은 25만 달러는 전부 통장에 넣었다. 자리를 잡으면 돈을 입금할게요. 테리어드는 믿을 수 있는 수간호사에게 통장을 맡겼다. 테리어드가 아는 여자들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다. 자리를 잡으면 더 입금할게요. 벨의 몸이 회복되면 요양원 수속을 밟아주세요. 간호사들은 테리어드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들은 테리어드가 이제부터 몸을 담그려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몰랐다. 다만 진심으로 테리어드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가장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벨은, 처음 테리어드가 헤어져서 살아야겠다고 말했을 때 이렇게 물었다. 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벨이 괴로울 테니까. 테리어드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 대답을 벨이 납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곁에 있어주던 소녀가 이제는 그 자리를 진심으로 떠나길 바란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벨은 테리어드를 잡지 않았다. 잡았더라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제 어미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리어드는 브로커에게서 받은 돈도 통장에 넣었다. 테리어드는 그 통장을 그대로 니콜라이에게 건네주었다. 니콜라이는 그 돈을 받았다. 그가 그 돈을 조직에 갖다 주었는지, 아니면 자기 것으로 했는지는 몰랐다. 테리어드는 물어볼 기회를 잃었고, 니콜라이는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대답해 주질 않았다.
"아, 맛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너무 늦게까지 있어도 실례가 될 테고."
"아뇨, 전 상관없는데……."
"내가 상관 있어."
매력적인 아가씨는 심장에 안 좋다고들 하잖아? 씩 웃으면서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여태까지 테리어드가 니콜라이에게서 본 적 없던, 적어도 그가 테리어드를 향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던, 씁쓸함과 아주 약간의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중년 남자가 흔히 짓는 과거에의 향수와도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걸 알기에 테리어드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순식간에 안개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 잘 지내게, '미스 티아'. 소집장에서 만나지."
그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운 채 니콜라이가 악수를 청했을 때, 테리어드는 그제야,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았다. 자신은 그를 향해,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요구했었다. 아가씨Kitty 라고 부르지 말아요. 니콜라이는 그 요구에 대한 대답만큼은 제대로 해 준 셈이었다. 그것만큼은. 그래서 테리어드는 니콜라이의 손을 잡는 대신, 스무 살의 갓 여자가 된 소녀로 돌아와 웃었다.
"네, 다음에 또 만나요. ……니콜라이 씨."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테리어드는 아직도 그의 코드네임을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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