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방 안에 잔잔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알람은 설정해둔 적 없으니, 분명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게 분명했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굳이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막 잠에서 깨어나 무척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 새벽 다섯 시에 집에 들어왔다. 몬도 카네에서 나온 것은 펍이 문을 닫는 새벽 2시경이었으나, 이전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무기 밀매 루트에 대한 미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함정을 파는 작전을 위해 사전 회의를 가졌던 것이다. 미리 정해놓은 루트에 함정을 파놓고 일부러 꼬리를 밟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전이었어도 사소한 잘못 하나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테리어드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 결벽증과 비슷한 성격이 여태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피해를 끼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녀는 피곤함을 감수하고 회의에 참여했으며 늦게 귀가해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귀찮다는 듯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하자, 익숙한 숫자의 나열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고 앞머리를 쓸어올린 채, 그녀는 목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입을 떼자 친절하기 그지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귀를 찔렀다.
"안녕하세요, 성 버나드 병원 산부인과의 닥터 버넷입니다. 오늘이 정기 검사일인 건 알고 계시죠?"
"아…… 그랬나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자, 오늘 날짜 위에 붉은 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달력을 사서 체크할 때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즘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무기 밀매 루트에 미군이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함정을 판다는 일은, 솔져가 된 지 4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제안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리어드에게 맡겨버린 카포― 류상의 짖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테리어드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닥터. 제가 혹시 예약까지 잡았었나요?"
"아뇨, 사실 시간을 상의하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날짜는 잡았지만 그 날 시간이 될지 안 될지는 두고봐야 알 것 같다면서…… 그래서, 몇 시쯤 오시겠어요?"
테리어드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반. 들어온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잤으니 이제 일어날 때도 되었다. 한 시 반쯤, 어떨까요? 그렇게 묻자 수화기 너머에선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때 뵐게요, 하고 전화가 끊어지자 테리어드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만사 깔끔하고 단정하게 살 것 같다― 는 인상을 받을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 그녀이지만, 사적인 공간은 지극히 깨끗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방이 더러운 건 아니었다. 침대와 소파, TV를 포함해 그야말로 일반적인 '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제품만 갖춰진 집이라, 사실 더럽힐 만한 물건이 없기도 했다. 다만 싱크대 안에 칵테일 잔과 술병이 그대로 굴러다니고 있다거나, 아직 버리지 않은 쓰레기가 현관 앞에 세 봉지 정도 쌓여 있다거나 하는 점은 평소 테리어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시 파출부를 고용할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물론 자신의 집이 그림동화 속에 나오는 '예쁜 집'일 필요가 없어진 뒤로는 파출부 건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그래서인지 그녀는 집을 치워야 한다는 의무감도, 좀 더 깔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질 않았다.
싱크대에 뒹굴고 있는 컵들 중 아무 거나 잡아서 물로 씻어낸 뒤 냉장고를 열었다. 일주일 전에 산 오렌지 주스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선명한 노란빛이 유리잔에 가득 찼다가, 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 맛을 음미하다가 한 번 더 유리잔을 채웠다. 왠지 신 것이 마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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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버나드 병원 산부인과 소속, 닥터 리리아 버넷은, 7년 전부터 테리어드의 주치의였다. 그녀가 마피아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과 노스트라 소속인 것도 알고 있고, 예약 날짜를 잊어버릴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묵인해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거나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둥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하튼, 테리어드에게 있어서는 좋은 의사였다. 오늘도 약속한 한 시 반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는데도 아랑곳없이, 스스로 탄 맛없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테리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요, 하고 싱긋 웃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지시하에 검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처음 이 병원에 들어와 닥터 버넷을 만난 지 7년이 지나 몸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기에,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기 위해 테리어드는 제 몸을 스캔하는 기계 안에 들어가면서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제 눈앞에 닥쳐온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음, 상태는 아주 좋아요. 장기 착상도 순조롭게 잘 되었고…… 이젠 정말 1년에 한 번 정밀검사만 받으러 오면 되겠네요."
"다행이네요."
"뭐예요, 남의 일처럼 말하기는.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심한 복통이 오거나 하혈을 하게 되면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해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녀의 진심어린 충고에 테리어드는 미소로 답했다. 그 정도야 그녀가 일깨워주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테리어드에게 있어서 건강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이상 몸을 망쳐서 조직에 폐를 끼치는 것만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전에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는 꼬박 3주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퇴원한 뒤에도 여러 번 병원에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았어야 했기에, 테리어드는 순간 자신이 조직에서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걱정하기도 했었다.
"일단 처방되는 약을 좀 먹고, 일주일 뒤에 전화로 경과보고를 해 주세요. 그 안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병원으로 오면 되고요."
"걱정 마세요, 닥터. 벌써 몇 번째 듣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대꾸에 닥터 베넷은 쿡쿡 웃었다. 그야 그렇지요, 하고 대답하는 듯, 여전히 평온한 미소였다. 좀 더 담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테리어드는 그날 다섯 시 이전에 몬도 카네에 도착해야만 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간호사가 다음 환자의 소식을 알리러 와서, 테리어드는 자연스레 자켓을 들고 일어섰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닥터 베넷과 미소로 작별하고 병원의 복도를 걸었다. 또각, 또각, 또각, 하는 힐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간단한 검사였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평소처럼 신고 왔던 하이힐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무시한 채 발걸음을 떼었다. 7년 전 그날, 스무 살의 그녀가 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회색 실선이 그려진 검은 정장에 군청색 넥타이를 매고, 너무 굽이 낮아 소리조차 나지 않는 로퍼를 신고,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목표는 복도 끝에 있는 닥터 베넷의 사무실이었다. 그날 용건은 수술 날짜를 잡는 것이었다. 그 전날 닥터 베넷은, 안색이 창백해진 테리어드의 두 손을 꼭 잡고 최대한 빨리 수술하는 게 좋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가 해준 말은 7년이 지난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수 있었다. 진정해요, 매저즈 양. 분명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당신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해요. 당신은 아직 젊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해요― 누구의 말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공황상태였는데도, 어째서인지 살아야 한다는 닥터 베넷의 간절한 목소리만은 귀에 남았다.
테리어드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7년 전의 테리어드가 힘없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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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에 종양이 생겼어요."
닥터 베넷은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검사 결과를 선언했다. 결과를 들으면서도 테리어드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소리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차트는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 다른 사람의 것일 거야. 자신은 단순한 생리 불순이고, 생리통이 심해지는 건 피곤이 쌓였기 때문이고, 어제 갑자기 대량의 피를 쏟은 이유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제 손만 멍하니 보고 있는 테리어드의 어깨에, 닥터 베넷의 손이 닿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들어내기만 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그런 그녀의 말이 테리어드를 한 번 더,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발끝에서부터 차가워지는 자신의 몸에 테리어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입을 여는 자신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궁을 들어내야만 한다는 말이네요."
그 말에 닥터 베넷은 정말 슬픈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테리어드가 기대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말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테리어드는 제 몸이 진창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진득하고 차가운 것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손을 뻗어도 거절당할 것 같았다. 진흙이 눈과, 코와, 귀와, 입을 막았다. 볼 수도 숨을 쉴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살려달라는 말 한 마디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엄청난 절망이었다. 죽는다는 것 이상의 고통이었다. 테리어드는 눈을 질끈 감고,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을 세게 쥐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언더 시티로 이주한다 했을 때 미소를 지었던 한 명의 여인이었다. 테리어드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의 병명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받아야 하는 처방도.
"진정해요, 매저즈 양. 분명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당신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해요. 당신은 아직 젊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해요."
"살아야……."
그렇게 낮게 중얼거린 말에, 닥터 베넷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렇다느니, 기회가 있으니 앞으로 더 살 수 있을 거라느니, 지금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말이 제 환자의 한쪽 귀에서 다른 한쪽 귀로 빠져 사라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환자의 굳은 표정을 걱정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일주일 안에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좋겠군요. 언제 시간이 되죠? 최대한 당신의 시간에 맞출게요. 발견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빨리 상태를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일이나 모레는 어때요?"
"그건…… 안 돼요."
"안 된다니, 무슨 뜻이죠? 설마, 수술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바로 그 뜻이다. 테리어드는 주먹을 아까보다 더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닥터 베넷과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매저즈 양,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닥터 베넷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테리어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나이든 여의사의 얼굴에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게 보였다. 매저즈 양, 설마― 닥터 베넷이 그렇게 입술을 열었을 때 테리어드는 닥터 베넷의 진료실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병원을 뛰어나왔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두 개의 전화번호였다. 언더 시티 내에 있는 집 전화번호와, 언더 시티 바깥에 있는 병원의 전화번호. 핸드폰에 단축번호로 등록되어 있는 번호와, 너무나 자주 눌러봐서 외우고 있는 번호. 어느 쪽에 전화를 걸지 망설이던 테리어드는 병원 근처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천천히 외우고 있는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았고, 바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크롬웰 병원 산부인과입니다.
그 병원은 저주스럽게도, 아직 그 이름을 쓰고 있었다.
-
벨은 언제나 웃는 여자였다. 제가 남편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온, 그런 웃음이었으리라. 그리고 테리어드는 그녀의 공범이었다. 테리어드에게는 그녀의 웃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모든 과업을 그녀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웃어야 했다. 남편의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던 그날의 그녀는 더이상 없었다. 없어져야만 했다. 이후 자신이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벨은 웃고 있었다. 테리어드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미소를 지었는지. 벨의 뱃속에 잠들어 있는 그 무시무시한 병이, 그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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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을 칼로 휘저어 놓은 듯 아팠다. 한 번 '암'임을 자각하고 나니 고통이 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를 악물고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 테리어드는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테리어드가 놓치고 만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상대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로 미뤄볼 때 그녀는, 여성 병동에서 일하고 있던 밀리아인 것 같았다. 벨이 뭔가를 먹다 흘릴 때마다 짖궂게 대답하면서도 손수건을 한 번 움직여 모든 것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재주가 있는, 싹싹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테리어드가 떠나올 때쯤, 두 달 뒤에 원무과 직원인 스미스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으니 지금쯤은 밀리아 스미스가 되었으리라. 미소가 예쁜 여자였기에,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되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순간 동전이 다 떨어짐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전화부스를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테리어드의 머릿속에 있던 환영도 사라졌다. 뚜― 뚜― 뚜― 귀를 가득 메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녀는 잠시 두 팔을 감싸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검은 구름 같은 종양 앞에 테리어드는 무력했다. 그녀는 구원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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