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이크업



  "웬만한 준비는 다 됐고…… 피부색이랑 가발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벨. 따로 좋아하는 색이 있으면 드레스 고르는 데는 반영하게 해줄게요."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정말, 그 딱딱한 말투 어떻게 좀 해봐요. 겉만 보면 천상 여잔데, 속은 완전히 사내라니까?"


  재잘거리는 상대를 테리어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이나 로티넬. 2년 전 미용학원을 갓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다가 점장의 눈에 띠어 이 펍을 거쳐간 많은 여가수들의 메이크업을 맡아온, 나름대로 '프로'를 자부하는 어린 소녀. 올해 열아홉이 된다는 그녀는, 스물둘인 테리어드가 보기에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러는 자신도 저번 달에야 겨우 갓 노스트라의 정식 조직원으로 인정받아 어소시에이트를 면했으니 어린애이긴 했다. 테리어드는 노스트라의 구역인 이 펍을 실제로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점장은 지배인일 뿐이고, 실제 이 가게에 오고가는 노스트라의 간부들과 그들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보호할 책임은 전부 테리어드에게 있었다. 스물둘의 처녀에겐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지만, 테리어드는 결코 그것으로 기죽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이 처녀가 낯선 사람을 앞에 두고도 전혀 꺼려하는 기색이 없듯이.

  일주일 전 테리어드는 점장에게서 제이나를 소개받았다. 두 사람이서 같이 지내면서, 앞으로 일해야 할 때의 주의점이라던가 하는 얘기를 나눠봐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테리어드를 혼자 상대하는 게 어지간히 껄끄러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테리어드 자신도 남자가 눈 앞에서 껄쩍대는 걸 보느니 차라리 여자와 대화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결국 테리어드는 그날부러 제이나의 집에 들어가, 그녀가 갖고 있는 수많은 컬렉션을 뒤지며 무대 위에서의 컨셉을 골랐다. 가발 샘플 사진을 보고 가발을 고르고, 여러 가지 분을 찍어 발라보며 하나를 택하고, 샵을 돌아다니며 드레스를 주문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갈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단 하나, 예명을 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벨. 테리어드가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오늘의 드레스는 골이 많이 파여 있으니까, 가슴이랑 등에도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로 해요. 그나저나, 일주일에 한 통씩 새로 사야 될 기세네. 점장님한테 준비 비용 올려달라고 해야겠다."


  파운데이션을 퍼프에 묻히며 제이나가 한 말에 테리어드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녀는 굳이 점장에게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일 돈을 받을 때쯤 되면 봉투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 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펍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운영자는 테리어드였지 점장이 아니었다. 눈을 살짝 감은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목과 가슴까지 빼놓지 않고 바르니 파운데이션 통이 가벼워졌다며 제이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메이크업을 완성한 채 가발을 쓰는 테리어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제이나가 잠깐, 하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눈은 어쩔 거예요? 그걸 안 정했네."

  "렌즈를 낄 필요가 있나요? 그럼 바로 준비시킬 생각인데요."

  "음…… 가발이랑 옷은 컨셉에 맞춰서 막 최고급품으로 사진 않았으니까, 사실 어색한 티가 나더라도 렌즈는 안 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음, 역시 그냥 내버려둬요. 그 눈, 색이 바다 같아서 굉장히 예쁜걸. 게다가 난, 딱 봐도 아, 변장하고 있구나, 란 걸 알 수 있지만 노래를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 같은 매혹적인 컨셉으로 가고 싶다고요. 아시겠어요?"


  대충은 파악했다. 테리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나는 만족한 듯 파우더를 얼굴에 톡톡 두드린 뒤, 살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와아, 하고 그녀가 감탄사를 뱉는 걸 보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자 제이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표정만 지으면 귀여울 텐데- 라는 소리는, 자기보다 세 살 어린 여자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작품을 완성시켜 놓고 힐을 갖다주며 제이나는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키가 크면서 왜 또 힐을 신느냐던지, 이런 걸 신고 한 시간동안 노래할 수 있겠냐느니. 일주일 내내 같이 지내면서 집안에서 힐만 신고 있었으니, 테리어드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처음 제이나가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였을 때는, 그저 운동을 해뒀기 때문이라고 답해두었다. 사실 호신술도 운동이긴 하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 몸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스물두 살의 여자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튼튼할 정도로.


  "아아, 미인이라 좋겠다. 누굴 닮은 거예요? 역시 어머니? 아니면 반전으로 아버지라던가!"

  "어머니예요. ……어머니를 닮았단 소리만 듣고 자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테리어드가 벨을 쏙 빼닮은 것은 저주스러운 삶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그날 사건의 당사자는 테리어드 혼자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아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면 테리어드의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을 것이다. 벨과 똑같은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워 노스트라에 들어오고 나서 제 살을 갈색으로 태웠지만, 그래도 이목구비만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제 가장 소중한 사람과 똑같았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테리어드는, 자신이 아직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 그럼 벨! 준비 됐어요? 이제 나가도 되겠죠?"

  "얼마든지."






#2. 선물



  와인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고급 주류점의, 늘어선 와인들을 한 병 한 병 들어보며 테리어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보스의 생일 선물로 어떤 것이 제일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술을 사러 온 참이었다. 선물을 고민하면서 술을 사는 게 좋겠다고 충고해준 선배 어소시에이트는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악의가 있어서였다기보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모습에 홀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옳을 터였다. 카운터에 서 있는 젊은 여자 종업원까지,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날씬한 몸매로 술을 이리저리 들었다 놨다 하는 테리어드를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당연했다.

  와인 종류는 짜증이 날 정도로 다양했다. 달콤한 와인, 씁쓸한 와인. 이탈리아 와인, 프랑스 와인, 칠레 와인. 보스는 나이도 있는데다 이탈리아인이니, 이탈리아의 씁쓸한 와인이 나을지도 모른다. 코너에서 적당히 하나를 골라 잡았다. Giusto di Notri. 노트리의 성자. 이름이 거창한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에게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되는 어린아이를 조직원으로 받아주고, 또래 여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실어준 사람. 테리어드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스는 성역이었다. 카운터에 병을 가지고 가 지갑을 열었다. 와인 값과, 테리어드 자신이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기 위해 구매한 몇 가지 음료를 합쳐 8만 달러라는 거금이 한꺼번에 지갑에서 빠져나갔다. 이날을 위해 돈을 모은 것이라 테리어드 본인은 별로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어소시에이트가 놀라, 아무리 보스의 생일이지만 그런 고가의 와인, 괜찮겠어? 하고 물었다. 자기가 돈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괜한 간섭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리어드는 남자가 제 어깨에 슬쩍 올려놓은 손을 치웠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테리어드는 이런 남자가 싫었다. 제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면서 욕심만 많은 자. 보스의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3분의 1, 아니면 7분의 1, 100분의 1이라도 좋으니까. 세상에는 성실한 남자가 거의 없었고 테리어드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을 만한 신사는 더욱더 없었다. 남자를 무시하고 가게를 빠르게 나와 택시를 잡는데, 테리어드는 이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느꼈다. 배가 또 아팠다. 생리가 끝난 지 이틀째인데도 계속 아리는 것이,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의 생일이 지나고 나면 병원에 가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제 행선지를 말했다. 선물을 보내 놓고, 보스의 생일을 축하하며 작은 케이크를 사다 놓고 칵테일을 만들어 마실 생각이었다. 칵테일을 위해 키우던 민트 허브 잎은 상큼한 향기를 자랑하며 테리어드의 작은 방 안에서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었다.

  적어도 그 날의 그녀에게는.





#3. Brave



  사전을 뒤져가며 가사를 종이에 옮겨 적는 가수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테리어드는 아직 가발도 벗지 않은 채 그렇게 가사 적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달쯤 전, 이제는 절판되었다고 생각했던 이 가수의 앨범을 어렵게 구한 건 좋았지만 정작 가사가 일본어였던지라, 그걸 영어로 옮겨 적는 일만도 큰일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본 적도 없고, 그 나라 말을 해본 적도 없는 테리어드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단어가 가득했다. 이렇게 가사를 번역하다 보면, 동서양에서 가사에 쓰는 단어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동양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가사를 완전히 영어로 옮기는 일은 아마 불가능하겠지. 그나마 이 가수의 노래 가사에는 영어가 많아서 번역하기는 편한 축이었다. 종이에 가득 적힌 가사를 제 입으로 읊어본다.


  "When I was darkness at that time, I cry at room's corner with shook lips.

  (내가 어둠 속에 있었을 때, 나는 방 한 구석에서 입술을 떨며 울었어)

As I wriggle and wriggle, hurts keep hurt me. Our promise broken, and hurt me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상처는 나를 찔러오고, 우리의 약속은 부서져서 나를 아프게 해)……."


  그러나 몇 줄 읽다 말고, 테리어드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이렇게 번역한다 할지라도, 음에 맞춰서 부를 일이 걱정이었다. 그냥 일본어를 배워서 집에서만 중얼거릴까. 어차피 록 사운드여서 펍에서는 부르지 못할 곡이었다. 가만히 만년필을 돌려 보다가 손에서 떨어뜨리고, 테리어드는 장갑을 벗었다. 화장을 오랫동안 지우지 않아 피부가 당겨왔다. 막 클렌징 티슈를 손에 쥐는데 대기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점장은, 아직 그녀가 화장을 지우지 않은 것을 보고 화색을 했다.


  "미스 티아, 죄송하지만 무대에 한 번만 더 올라가 줄 수 없겠습니까? 다들 앵콜을 요구하셔서."

  "……오늘만 해도 벌써 다섯 곡을 불렀어요. 계약 위반인데요."

  "제발, 미스 티아. 그런 차가운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이 펍이 잘못되면 미스 티아, 당신에게도 손해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점장이 이 펍의 존재에 더 매달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부탁을 무시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테리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가사가 적힌 종이를 가방 안에 쑤셔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볍게 파우더만 두드리고 다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를 보고 환호하는 손님들이 보였다. 오늘은 또 이렇게 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비스 정신이 다분한 말을 건네고 고개를 숙인 뒤, 테리어드는 마이크에 입술을 갖다댔다. 마지막에 불렀던, 딱 한 노래만 부르겠어요. 하는 요구에 점장이 납득했으니 한 번만 더 목에 힘을 주면 될 것이다. 오늘의 마지막 서비스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It's a new day, New day and it's evident

You must've been heaven sent

Something we should be hesitant

새로운 날, 새로운 날이야

넌 분명히 하늘이 보내준 사람이야

가끔 우리는 망설이지만


But I'm not at all

Just feeling more confident

Just using my common sense

Just trusting that I'm lovin' it

하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아

그저 좀 더 자신감을 가져

그저 상식에 따르도록 해

그저 믿어보는 거야, 좋아하기 때문에


I can't refuse an offer so benevolent can't assume he's gonna use me

And after him never call again

나는 그런 호의적인 제안은 거절할 수 없고, 그가 날 이용할 거라 단정할 수도 없어

그런다면 그는 다신 전화해 주지 않겠지


Don't be afraid, don't be afraid

This is your day, this is your day

겁먹지 마, 겁먹지 마

오늘은 널 위한 날이야, 널 위한 날이라고


It's time to be brave, say I'm not afraid

Not anymore I used to be calm

Now the temperature's changed, it just ain't the same

I'm not afraid I'm not afraid

용감해져야 할 때야, 두렵지 않다고 말해

무관심했던 때는 이제 없어

이젠 분위기가 달라졌어, 예전과는 달라


'Cause I've become brave

As the light of day straight into a cave to show me the way

That I might be saved now I'm turning the page

Thanks to the power of love I can love

Because I am brave

왜냐하면 난 용감해지고 있으니까

내게 동굴 속에서도 안전한 빛을 가르쳐 줄 햇빛이 있어

그것이 나를 구해주니까,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돼

사랑의 힘 덕분에 사랑도 할 수 있어

왜냐면 나는 용감하니까


I'm brave

I'm brave…….

난 용감해

난 용감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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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紐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