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26.
緑間真太郎x赤司征十郎(♀)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천명’ 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인사를 다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그의 진인사대천명.
1. 어느 봄날의 장기대국
“오늘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거니 이해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사람을 앉혀 놓고 그렇게 굳어 있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죄송하지만, 무리입니다.”
융통성도 없어라. 시시하기는. 아카시 세이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눈앞에 앉아 있는 청년- 미도리마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주먹 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꼿꼿이 등을 세우고 앉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 청년은 얼마 전 그녀의 집에서 열린 홈파티-라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녀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는 파티였다-에서 아버지가 그녀에게 소개한 ‘놀이상대’ 였다. 그것은 즉 사교계에 데뷔한 이상 아카시 세이카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남녀 구분 없이 업무상대로만 보아야 했지만, 오직 이 청년만이 그런 ‘미래의 업무 파트너’와는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미도리마의 아버지는 오랜 시간 동안 아카시 가문의 주치의를 맡아 온 의사 가문의 현 당주였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후계자였다. 실제로 그가 그녀와 같은 대학 의학부에 수석으로 진학해 벌써부터 교수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재원이라는 정보를, 세이카는 결코 자신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준 적이 없던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의사란 원래부터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일상에 가장 깊게 연관하는 직업인만큼, 굳이 이 청년을 세이카에게 ‘놀이상대‘로 소개해 준 것은 그의 앞에서는 마음을 풀어 놓고 있어도 된다는 아버지의 배려인 것이다.
‘……라니, 웃기는 소리지. 아주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무슨 트집이 날아올 지 뻔히 보이는걸.’
아카시 가문은 아주 먼 옛날부터 정부의 주축에 있어 왔던 유명한 정치가 가문이다. 그 가문의 현 당주가 그녀의 아버지이고 그에게 세이카 외의 아이가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는 바로 세이카가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 안에서 단 한 번도 여성 당주를 인정해 본 적 없던 아카시 가문에서 세이카를 순순히 후계자로 인정해 줄 리 만무했으며 그녀의 힘이 되어주어야 할 아버지는 애석하게도 세이카의 소질을 시험하는 무리들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충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청년 역시 그러한 시험의 일관으로 세이카의 옆에 붙어 있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물론 청년 본인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지에 대해서, 세이카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처음 파티에서 그를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받은 그의 인상은 ‘강직함’ 그 자체. 단순히 그 자신의 아버지의, 그리고 세이카의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그녀의 말동무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뿐이지 그 뒤에 숨겨진 내밀한 음모 따위는 이 청년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었다. 아까부터 정직하게 세이카의 앞에 앉아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만 짧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틀림없으리라. 때문에 세이카는, 기껏 자신의 여가시간을 그녀에게 할애하고 있는 이 청년에게는 무척 미안한 말이지만, 이 상황이 상당히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말에 가시를 품고 자신의 틈을 찾아 찔러 보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대하기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저 강직하고 순수한 눈동자를 보면 도저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미없다’ 며 그를 쫓아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이카의 결점으로 처리된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며 찻잔을 어루만지던 세이카의 눈에 문득, 미도리마의 등 뒤에 장식된 자신의 장기판이 보였다. 저것을 이용하면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책을 잡히는 일도 없이 무사히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도리마 군, 장기는 좋아하나요?”
“좋아합니다.”
뜻밖의 즉답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는 여태껏 세이카가 들어 본 대답들-(나이를 묻는 질문에)“이제 곧 생일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열아홉입니다” (키가 아주 크다는 칭찬에)“고맙습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느냐는 핀잔에)“사교성이 좋지 않다는 평은 예전부터 들었습니다” 등등-중 가장 적극적이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저렇게 말할 정도니 아마 실력도 꽤 상당할 것이다. 그냥 시간만 때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재미있겠는걸. 세이카는 근처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그리고 아마 자신의 빈틈을 아버지에게 보고할 준비를 하고 있는- 하녀에게 손짓을 해 뒤편의 장기판을 가져오게 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수업의 일환으로 장기를 두곤 했답니다. 물론 그 상대는 대부분 어르신들이어서, 내 또래의 사람이 장기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봐요. 한 판, 둬 볼까요?”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경 너머 미도리마의 눈은 확실히 방금 전보다는 의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장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이 청년의 성격상 자신의 앞에서 허언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마는. 그리고 그 눈빛은 본의 아니게 아카시 세이카의 가슴속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녀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감정- 짓궂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집중하고 싶으니 나가 달라’는, 언제나 자신이 어른들의 장기 대국 상대를 할 때 내리던 명령을 자연스럽게 하녀에게 전달해 보는 눈을 없앤 세이카는 살짝 턱을 괸 채 미도리마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냥 대국을 하는 건 재미없죠. 사소한 내기를 하나 걸어 볼까요?”
“내기라니, 무슨……?”
“음, 그러면…… ‘그 무엇이든 이긴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 준다’는 어떨까요?”
순간 미도리마의 미간이 움찔하는 것을 세이카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말로 꺼내 놓고도 상당히 유치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또다른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었다. 눈앞의 이 청년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과연 무엇일까.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호기심을 살짝 뒤로 밀어둔 채 세이카는 판 위에 장기 패를 깔았다. 천천히 형태를 갖추는 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도리마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펼쳐질 대국에서의 전개? 아니면, 승자의 특권으로 그녀에게 요구할 어떠한 소원? 궁금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녀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세이카의 양보로 미도리마가 선을 잡았다. 장기에서의 가장 일반적인 전술인, 보를 움직여 상대의 진영으로 살짝 발을 들여놓는다는 방식을 미도리마는 전혀 택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차를 옮기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세이카는 그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임을 간파했다. 저렇게 성실한 얼굴을 한 사람들 중에는 꼭 한 명씩 있는 유형이다. 그러나 곤란하게도 미도리마 신타로는 지기 싫다는 생각과 의욕만이 앞서나가 지뢰를 밟고 마는 일반적인 바보들과는 다른 유형의 인간 같았다. 정말로 ‘심심풀이’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이카는 웃으며 말을 옮겼다.
한 번, 두 번, 그것이 반복되다 다섯 번, 열 번을 거쳐 전황이 점점 바뀌어갔다.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쌓이는 병사들의 목에 세이카는 생각보다 상황이 곤란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태껏 그녀와 대국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 정도까지 오래 버티는 사람은 미도리마가 처음이었다. 조금 얕봤나. 자신의 차례가 되어, 잠시 의자에 등을 붙이고 멀리서 전황을 바라보던 세이카는 결국 진짜 강자가 아니면 쓰지 않는 수- 본진 깊숙이 숨어 있던 왕을 움직여 전황을 제 편으로 끌어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한 수로 공격의 기세가 세이카 쪽으로 넘어가버린 것을 깨닫자 미도리마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방금 세이카가 했던 것처럼 멀리서 전황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졌다. 열아홉. 자신과 동갑인 나이의 청년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는 꽤나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이다. 그러고 보니 피아노를 쳤다고 했었던가? 대국이 끝나면 승자의 특권으로 하루 종일 피아노 연주나 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이카는 미도리마의 입에서 패배를 선언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쉽게 패해 주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술에서 뗀 손가락을 장기판으로 뻗어, 적진 앞으로 나선 세이카의 왕 앞을 계마로 치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놀랐다. 동요하지 않고 다음 수를 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리함의 끝자락이었던 전황의 반을 자신 쪽으로 끌어온 그 절묘한 수에는 제아무리 아카시 세이카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좀 어렵겠는걸.’
어쨌든 하녀를 내보낸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내기 운운하는 걸 들려주고 싶지 않아 그런 것뿐이었는데, 자신의 ‘놀이상대’일 뿐인 청년에게 틈을 보이고 마는 장면을 보여줬다가는 당장 서재로 불려갔을 게 뻔했다. 처음 대국을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세이카는 다소 즐거운 기분으로 다음 수를 전개했다. 결국 미도리마의 입에서 ‘졌습니다’ 라는 말을 끌어내기까지는 10분이라는 시간을 더 소요하고 말았다. 한 판을 따내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에 대해서는 ‘어차피 놀이상대이니 적당히 봐줬다’라는 변명을 둘러대면 되겠지만, 이 청년이 거기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세이카는 그 사실에 굴욕이나 분노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럼, 이제 제가 소원을 말할 차례네요.”
“……하명하시죠.”
넌 재미있어, 미도리마 신타로. 30분 전의 시시하다는 말은 철회해야겠네.
사뭇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도리마 쪽으로 세이카는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청년의 어깨가 움찔 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노골적인 변화에는 분명 세이카에게 위험이 될 만한 어떤 요소가 잠재워져 있었지만 세이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소원을 미도리마에게 전한 뒤의 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경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게 내 소원이에요. 아니, 소원이야. 어때? 쉽지?”
“……저를 편하게 대하고 싶으신 거라면 아가씨 혼자 하셔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안 돼. 너는 아버님이 내게 소개해 주신 ‘친구’ 잖아? 친구 사이에는 경어를 쓰면 안 되지. 좀 더 친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싫어.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들었단 말야, 신타로.”
그렇게 말하며 세이카는 여태껏 미도리마에게 보여줬던 것과는 그 성질 자체가 다른, 그러니까, 예의를 차려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순수한 미소-그것에는 뭇 남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릴 만한 매력이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는 일은 없었다-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에게 요구하고 싶었던 소원의 단편을 슬쩍 들여다볼 수 있었다.
“윽…….”
감탄인지 고통에 찬 신음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목소리를 내며, 미도리마가 세이카의 시선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법했는데, 심지어 옆으로 살짝 돌아간 그의 얼굴은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든 사실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단 하나였지만,
‘……뭐지, 이 반응은?’
정말 안타깝게도 아카시 세이카는 살아온 환경과 아버지의 철통같은 방어로 인해 지금 미도리마가 보여준 것 같은 반응, 혹은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감정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갑자기 얼굴을 붉힌 미도리마에 대해서도 ‘열이 올랐나?’ 라는, 그야말로 순정만화의 눈치 없는 여주인공이 할 법한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것이다, 세이카.”
미도리마 신타로의 붉어진 얼굴이 갖는 의미. 그것을 알아차렸다면 아카시 세이카는 그에게 느낀 흥미도 호감도 어김없이 내던져버린 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을 것이었고, 그 이상 이 청년과의 관계를 지속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청년이 그녀에게 드러내고 만 그 감정은 그녀가 19년 동안 아카시 가문의 반쪽짜리 후계자로 살아오면서 가장 경계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이카는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고, 그것은 결국 아카시 세이카가 저지른 인생 최대의 실수이기도 했다.
“……그런데, ‘-것이다’ 라니 굉장히 특이한 말투네.”
“예전부터 그런 말은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칠 생각은 없어.”
‘ ……역시 ‘융통성 없다’는 표현은 철회할 수 없을지도…….’
2. 여름의 계곡
대학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지만,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그리고 참여해야만 했던- 아카시 세이카에게 MT라는, 그야말로 대학생들의 놀이의 장이자 가장 즐거운 유흥거리는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요소였다. 대학이라는 곳은 원래 중학교, 고등학교보다는 분위기가 풀어져 있을지 몰라도 일단 교육의 장인만큼 지켜야 할 규율이 있고 조성되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세이카가 진학한 정치외교학과의 경우에는 그것이 훨씬 더 엄격한 분위기였고 때문에 다른 학생들만큼 ‘놀아 본’ 경험이 없는 세이카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훨씬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MT는 일단 학교 밖에서의 행사인 만큼 학생들의 경계가 다소 풀어져 있고, 이전까지는 단순한 대학 동기였던 이성을 새롭게 자각할 수도 있는 계기가 된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아카시 세이카는 학과 학생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다만 그녀가 아직 1학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MT에 참석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고,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산으로 바다로 흩어지는 동기들을 가만히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이유가 있다 해도, 스스로 참여를 거절해 놓고서 그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녀가 생각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여름은 한 차례의 장마가 지나간 뒤로부터는 유난히 날씨가 좋은 날이 연속되었고, 집이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것에 더 익숙해진 세이카라고 해도 가끔씩 자연으로 나가 심호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미도리마 신타로는, 바로 그런 세이카의 생각을 읽어낸 셈이다.
“이봐, 남이 낚시하는 곳의 상류에서 발장난 같은 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이 해수욕장이나 계곡 같은, 일반적인 대학생들이 고를 법한 장소가 아니라 미도리마 가문이 소유한 별장지의 조용한 산속 낚시터라는 것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성격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아카시 세이카는 도서관에서 해방된 기쁨과 아무리 봐도 자신이 할 일이 없는 낚시터에서 자연스레 느끼게 된 지루함을 다른 방식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심심하단 말이야. 나는 낚시를 할 줄도 모르고, 살아 있는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잔인한 취미도 없어.”
“그렇다고 남의 낚시를 방해하는 골치 아픈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심심하다니까. 정 그렇다면 신타로가 놀아 주면 되잖아?”
“설마 너하고 물장구라도 치라는 건가? 그런 소리가 너희 아버지 귀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책임 못 진다는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상당히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아카시 세이카는 그를 ‘친구’로 인정한 지 한 달 만에 그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세이카를 만나러 와 그녀와 장기 대국을 하던 미도리마는 어느 날 대국 도중 세이카에게, ‘어제 아버지와 너와의 만남에 대해 얘기했다’며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일종의 장기말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알려주었다. 고작 한 시간 정도의 대화였고 그의 아버지가 세이카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줄 리 만무했겠지만, 미도리마는 그 대화에서 세이카가 지금 얼마나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그녀가 ‘친구’라 칭한 자신의 존재가 그 위태로운 위치를 훨씬 크게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끌어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마운 점은, 그가 그녀의 ‘친구’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감시의 눈이 신경 쓰인다면, 책잡힐 일 없는 교제를 계속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한 미도리마는 그 뒤로도 세이카를 신사적으로, 그리고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덕분에 세이카는 ‘친구’라는 명목의 ‘미래 주치의’ 와의 상하관계를 흐트러뜨렸다는 평을 아버지, 혹은 친척들에게서 듣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이들의 그런 관계가 대학 사람들에게는 마치 ‘부잣집 아가씨와 하인’ 정도의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한 마디로 그러한 소문을 불식시켜 버렸다. 때문에 세이카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친절과 상냥함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즉 감시하는 사람들의 눈이 없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미도리마에게 어리광을 부릴 정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얌전히 낚시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투정을 부리듯 ‘놀아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게 될 정도였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날이 좀 더 선선해지면 근처 골프장에 데려가 주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승마도 좋겠군. 시내로 나가면 괜찮은 승마장이 하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참아라’. 신타로의 패턴은 이미 다 꿰뚫었어. 그렇게 설득하지 않아도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낚시나 즐겨.”
조금, 아니, 그녀를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누구나 놀랄 정도로 토라진 목소리를 내며 세이카는 미도리마에 대한 마지막 반항으로 잔잔했던 수면을 세게 한 번 걷어찼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자 미도리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입에서 잔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세이카가 자신의 상황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닌, 유달리 강했던 그 발길질로 인해 일어난 돌발사태 때문이었다.
“아, 샌들이……,”
물가에 앉아 첨벙대기 시작했을 때부터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던 세이카의 샌들 끈이 방금 전 물장구로 인한 흔들림 때문에 완전히 풀려 버렸던 것이었다. 즉 세이카의 샌들이 빠른 속도로 물을 타고 계곡 저편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세이카보다 미도리마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잡고 있던 낚싯대를 팽개치듯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낮은 수위였지만 미도리마의 청바지를 푹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당황한 세이카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미도리마는 한참을 걸어가, 간신히 바위에 걸린 세이카의 샌들을 무사히 구해 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걸어오는 미도리마의 얼굴에는 제아무리 세이카라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핀잔과 질책이 담겨 있었다. 무릎 위까지 푹 젖어 물가로 올라온 미도리마에게 세이카는 미안, 하고 짧게 사과했다.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이게 떠내려갔으면 꼼짝없이 내게 업혀서 돌아가야 할 판이었어.”
“……그건 정말 큰일이었겠는걸.”
“큰일이라고 생각했다면 두 번 다시 이런 바보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안해. 옷이 다 젖었네.”
“이 정도는 금방 마른다는 것이다. 그건 됐고, 발.”
“응?”
“도로 신어야 할 것 아니냐.”
“아, 으응…….”
내가 스스로 신을 수 있는데- 라는 말은 왠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이카는 바위 위-미도리마가 그 위에 손수건을 깔아주었다-에 앉은 채 미도리마 쪽으로 발을 내밀었고,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은 채 제 발을 잡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은 처음으로 아카시 세이카의 몸에 미도리마 신타로의 손가락이 닿은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 피아노를 쳐 와 단단한 굳은살이 생기고 메스를 다루는 탓에 섬세하기 그지없는 손가락이 세이카의 발을 단단히 잡고 그 위에 연한 녹색의 샌들을 신겼다. 끈까지 단단하게 매 준 미도리마는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세이카의 얼굴에서 그 진지한 눈을 멈추었다. 물론 세이카는 그것만으로는 그가 자신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를 좀 옮길까? 그늘이 있는 곳으로.”
“어? 왜? 저 자리가 낚시 포인트라며?”
“네 얼굴이 좀 달아올라 있다는 것이다. 햇빛이 너무 센 모양이군. 우리는 얌전히 낚시만 한 걸로 되어 있는데 얼굴이 타면 안 되지.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가 내민 손을 세이카는 아무 저항 없이 잡았다. 물에서 샌들을 건져 오느라 푹 젖어 있는 그 손을, 어째서인지 아무 거부감 없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 미도리마는 다른 손으로 자신이 내던진 낚싯대를 주워들고 천천히 강의 하류 쪽으로 걸어갔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미도리마를 이상하게 여길 틈도 없이- 세이카는 그 뒤 미도리마가 던진 한 마디에 모든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로군.”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는 슬쩍 웃었다.
그 웃음은 자신이 처음으로 느낀 위험 신호였다고, 이후 세이카는 회상하게 된다.
3.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가을
“반가워, 타카오 카즈미라고 해! 신쨩…… 아니, 미도리마 군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어.”
우습게도 아카시 세이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남녀 사이에 친구가 성립할 수 있는가’ 라는 명제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와 미도리마 신타로의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세이카는 그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세이카가 타카오 카즈미라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학생식당으로 이동하던 미도리마와 자신을 불러 세운 이 여자에게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도리마에게는, 그리고 카즈미에게는 그것이 매우 이상한 일인 듯, 미도리마는 잠시 곤란해하며 세이카의 시선-‘이 여자 누구야?’ 라는 의문이 담긴-을 피했고 카즈미는 미도리마보다도 훨씬 더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턱을 슬쩍 긁었다.
“어…… 이제야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공강?”
“아니, 원래는 수업 시간인 것이다. 교수님이 중요한 수술로 오늘 휴강 공지를 내셔서.”
“아, 역시?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이 시간이면 해부학 실습 수업 시간일 거 아니야.”
그것은 마치 미도리마의 시간표를 전부 꿰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자신 외에 그런 존재가 또 있었단 말인가. 그 생각에서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불쾌함에 세이카는 다시 미도리마를 슬쩍 노려보았지만 미도리마는 세이카의 그런 시선을 깨끗이 무시했다.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고, 특히 그것이 아카시 세이카의 기분이 되면 거의 100%의 명중률을 자랑했다. 그것은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이 ‘친구’로 지내 오면서 미도리마가 얻은 일종의 훈장 중 하나였던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불만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는 미도리마가 카즈미와의 대화를 중단할 기미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세이카를 무척이나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넌 무슨 일이냐.”
“매정하기도 하지. 내가 메일을 벌써 몇 통 보냈는지 알아? 자, 이거 돌려주려고.”
그렇게 말하며 타카오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소중하게 안고 있었던 공책을 미도리마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이 과거 시험공부를 하며 본 적이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전공 수업 노트라는 사실을 세이카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녀의 원인 모를 분노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자신의 전공 필기를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가 되면 얘기가 다르다. 미도리마는 자신의 모든 것에 인사를 다하는 성격인 만큼 남들의 몇 배를 더 공부했고 그런 노력의 흔적을 결코 남과 공유하지 않았다. 사교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도 학년 수석의 노트인 만큼 모두가 그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미도리마가 자신의 앞에서든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든 그것을 남에게 빌려주는 장면을 세이카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사소한 장면에 눈앞에 서 있는 타카오 카즈미라는 여자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학부에 이런 여자가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세이카의 기억력이라고 해도 100명이 넘는 의학부 1학년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미도리마의 교제범위를 생각해 보면- 아니, 그래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세이카가 미도리마를 만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미도리마 쪽에서 세이카를 찾아올 경우였고, 간혹 교수의 심부름을 받아 의학부 건물을 찾는 일은 있어도 거기서 미도리마의 얼굴 같은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하물며 ‘오늘 처음 만났다’고, 얼굴을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여자의 존재 따위를 알 게 뭔가. 점점 거칠어지는 생각은 세이카가 타카오 카즈미에게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서, 도움은 좀 되던가.”
“응, 덕분에 이번 레포트는 A+ 확정! 이게 다 신쨩 덕분이야. 땡큐!”
“타카오, 아무리 그래도 그 호칭은 좀…….”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가 세이카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것은 명백히 세이카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세이카의 기분은 단순히 ‘거스른’ 정도를 넘어 점점 악화되고만 있었다. 방금 전 자기소개를 했을 때도 튀어나왔던 ‘신쨩’ 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지적이고 어른스러운 이미지와 그 길을 반대로 하는 귀여운 호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만 아니라면 세이카는 ‘귀엽다’고 생각하며 풋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라-? 왜 그래, 신쨩? 새삼스레 내 앞에서 체면치레하려고? 고등학교 땐 아무 터치 안 하더니.”
“적어도 공식선상에서는 꼬박꼬박 ‘미도리마’ 라고 불렀으니 그랬지.”
“뭐야, 그게? 지금도 딱히 공식선상인 건 아니잖아.”
“어쨌든,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
“아…… 그건 그렇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세이카는 더 이상 곁눈질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대놓고 저를 향해 놀람의 시선을 보내는 세이카를, 미도리마는 아직도 끈질기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세이카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세이카에게 숨기겠다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취한 적 없던 필사적인 의지가 가득했다. 숨기다니, 무엇을? 이 여자와의 관계? 미도리마는 지금 ‘곤란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곤란함’은 타카오 카즈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모양이다. 순식간에 ‘제 3자’로 물러난 아카시 세이카에게는 절대 들킬 수 없는, 미도리마 신타로와 타카오 카즈미만의 감정. 그 정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세이카는, 왜인지 자신의 발밑이 순식간에 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그녀는 잠시 비틀거리며 미도리마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갑작스레 제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끼는 세이카를 보고 미도리마는 물론 카즈미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 사실은 노트 빌려준 대가로 밥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따가 미야지 선배 만나러 가야 해!”
그리고 허둥지둥 말을 잇는 카즈미의 모습에 세이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느끼고 있던 소외감의 벽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순식간에 ‘제 3자’는 아카시 세이카에서 타카오 카즈미로 변했다. 그 변해버린 공기에 결정타를 찍은 것은 카즈미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리고 신쨩이랑 같이 점심 먹는 걸 들켰다간 나, 한동안은 침대에서 못 나갈지도 모르고…….”
얼굴을 살짝 붉힌 카즈미의 모습과 ‘침대’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아무리 그 방면에 무지한 세이카라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전까지 세이카의 기분을 무척 불쾌하게 만들고 있던 어떠한 상상을 단번에 불식시켜 버리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당황하여 미도리마의 팔을 놓았다.
“어, 어쨌든 난 갈게! 밥 맛있게 먹어!”
그렇게 말한 뒤 카즈미는 재빨리 그들에게 등을 돌려 사라져갔다. 저 멀리서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모습과, 그 전화 상대가 고함을 지르기라도 했는지 과장되게 몸을 움츠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고 난 세이카는 해명을 요구하듯 미도리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 요구에 충실히 따라, 세이카가 바랐던 그대로의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음, 세이카. 저 녀석은 타카오 카즈미. 우리 학교 신문방송학과 1학년인데…… 이번 과제에 의학 관련 지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과제 노트를 빌려줬었다. 그리고…… 타카오의 남자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선배라는 것이다. 그 선배는 질투가 좀 심해. 우리들의 2년 선배라 졸업하고 나서도 나와 타카오가 같이 있을라치면 바로 찾아와서 일에 끼어들곤 했지. 거의 애처가 수준인 것이다.”
“남자친구…….”
“미야지 키요시라고, 우리 학교 약학부 3학년이다. 시오무라 교수님의 조수라서, 원래는 오늘 휴강된 수업에서 교수님을 돕곤 해.”
그래서 타카오 카즈미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수업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자 세이카는 솔직히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쾌해하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것에 대한 대답이 너무도 쉽게 튀어나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결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들려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길게 변명하고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사정 설명도 하지 않고 널 오랫동안 세워 뒀으니. 아무리 나라도 미안해진다는 것이다.”
“됐어. 배가 좀 고팠을 뿐이야.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하고 미도리마에게 재빨리 등을 보인 것은 결코 자신이 말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릿저릿하게, 자신의 심장을 조여 오는 뜻밖의 감정에 아카시 세이카는 최대한 빨리 학생식당 쪽을 향했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미도리마에게 지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필사적으로.
4.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겨울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못 듣지는 않았을 텐데.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서재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아카시 세이카는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간 충격을 도저히 완화할 수 없었다. 결혼? 결혼이라니. 물론 아카시 가문에 여자로 태어난 이상 대를 잇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녀는 아카시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대학을 졸업하면 자연스레 정계로 나가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자연스레 결혼이라는 화제가 떠오르는 것도 그녀가 2세 의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한 후의 이야기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이라니? 게다가-
“……대체 ‘누구’와 결혼하라는 말씀인가요?”
“방금 것보다 훨씬 더 바보 같은 질문이구나.”
“그것 참 죄송하군요. 하지만 전 물어야겠어요. 설마 아버님께서는 제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과 아카시 가문의 피를 섞으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아니면, 지금 당장 만나라고 하실 참인가요?”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냐?”
“모르니까 여쭤보고 있는 거잖아요!”
“어리석기는…… 그럼 내가 이 1년 간 아무 의미 없이 네 옆에 남자를 붙여 둔 줄 알았더냐?”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손이 진정되었다. 1년 간. 아카시 세이카의 옆에 있던 남자. 그 모든 단서를 조합했을 때 떠오르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미도리마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주치의로 우리 가문을 섬겨 왔지. 그것은 곧 그들이 우리의 아랫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지금 당주의 대에 와서는 완전히 그 위상이 달라졌어. 그 가문은 우리 가문에 견주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일본 의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우리 가문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가문과 상부상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신타로 군은 그 아버지보다 훨씬 더 존경받는 의사가 될 수 있는 재목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꿰뚫어보고는 있었어도 혹시 몰라 1년간 지켜보고는 있었다만, 그가 꺼려할 이유가 하등 없는 청년인 것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게다.”
“하, 하지만 신타로는…… 단순한 ‘친구’라고, 아버님께서…….”
“어리석기는. ‘친구’ 라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내가 널 순수하게 키우지는 않았을 텐데?”
거짓말이다. 아니면, 아주 질이 나쁜 꿈이거나. 세이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상황을 깨트려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위협적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에도 기꺼이 주먹을 날릴 각오였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때문에 그녀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아버지에게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니 신타로에게는 이 결정을 알리지 않으셨겠죠? 그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에요. 또 자기 가문의 뒤를 이어야 할 사람이기도 하죠. 결코 저희 가문의 데릴사위라는 직책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에요. 당장 거절당할 겁니다.”
“……역시 네게 집안을 완전히 맡길 수는 없겠구나. 어찌 이렇게 판단이 느려.”
“무슨…… 의미인가요, 그건.”
“너는 내가, 사윗감을 테스트하는 데 상대의 의지를 전혀 묻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느냐?”
……뭐라고?
“정 의심이 간다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느냐. 이 1년 간 네 옆을 따라다녔던 건 어째서였냐고 말이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리고 ‘데릴사위’ 같은 형식이 아니다. 그 집의 호적에 들어가는 건 너야.”
거짓말이지?
그 순간 세이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남겨진 아버지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든, 이후에 어떤 비난이 돌아오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와 미도리마가 있을 곳으로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재를 뛰쳐나와, 기사를 부를 틈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찾아간 미도리마의 자취방은 세이카가 이전에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였지만, 그 가운데 앉아 갑작스런 세이카의 방문을 맞이하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은 어떤 놀람과 동요 없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늦은 밤에 갑자기 무슨 일이느냐거나, 현관 비밀번호는 대체 어디서 알았느냐거나 하는 지극히 당연한 핀잔 정도는 주었을 텐데.
그리고 그 태도는 아카시 세이카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방금 전 아버지의 선언을 ‘진실‘ 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이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미도리마는 그 소름끼칠 정도로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세이카에게 다가왔다. 멈춰. 쌀쌀맞은 목소리로 선언하자 처음으로 미도리마의 얼굴에 감정의 흔들림이라는 것이 지나갔다. 그 감정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안타까움’ 으로 볼 수 있었겠지만, 세이카에게는 그것을 판단할 만한 이성은 없었다.
“방금……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너하고 결혼하라고 하시던데.”
“…….”
“그게 정말인지는 묻지 않을게. 네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으니까. 언제부터 그런 얘기가 오갔는지도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어. 나는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야.”
“세이카.”
“안 한다고.”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나는……,”
“안 한다고 했잖아! 누가 그 여자처럼 될 것 같아?!”
그 여자.
아카시 세이카의 어머니.
그녀는 구 화족의 영애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여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녀의 성장과정을 칭송했고, 그녀가 우수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우수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믿음은 그녀가 아카시 세이카의 아버지를 사랑한 순간 박살났다. 그녀는 아카시 가문에 시집 와 주부로 들어앉았고, 자신의 모든 재능을 물려줄 후계자로 ‘여자’를 낳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모든 가치는 끝이었다. 사실 그녀의 몸이 무척 약했고, 빛나는 재능에 묻혔을 뿐 실제로 사회의 평지풍파를 겪어내기에는 너무도 여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몰락’ 앞에 그저 변명이었다. 세이카를 낳은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이카 외의, 아카시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합당한 자격이 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시점에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을 아카시 세이카의 아버지라 해도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그래서 세이카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맹세했다.
난 어머니 같은 결혼은 하지 않아. 사랑 같은 것에도 빠지지 않아. 그것은 내 재능을 좀먹고, 나를 어머니처럼 그저 집 안에 박아놓을 사슬에 불과해.
“결혼 같은 건 무덤이야. 내 모든 것을 속박하고 짓누르는 굴레라고. 그런 걸 할 것 같아? 해야 한다 해도, 지금은 아니야. 내게 남편이라는 건 내가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단순히 우리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씨를 줄 뿐인 남자여야 해. 그리고…… 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그 누구에게도 끌려서는 안 돼. 너에게도 끌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안 돼.
“아버지의 결심은 확고해. 내 쪽에서 부술 수는 없어. 내게 그럴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고, 단번에 아버지와 친척들의 엉성한 신뢰를 잃게 돼. 난 그런 상황에서는 정계에 나갈 수조차 없어. 그러니까 네가 거절해. 그 말을 하려고 왔어.”
그 모든 말을, 세이카는 고개를 숙인 채 했다. 그것은 아카시 세이카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처음으로 해 보는 ‘비참한 부탁’ 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도리마에게 명령 비슷한 것을 하는 입장이었고, 어리광을 부릴지언정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태도로 보아 이 혼담은 이미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라는 요구는 미도리마에게 있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해 주어야만 했다. 언제나 아카시 세이카의 요구를 들어주었듯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도리마의 그 단호한 대답은 세이카가 방금 전까지 ‘당연하다’ 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을 부숴버리기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세이카는 처음으로 얼굴을 들어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안타까운 표정은 어디에도 없이, 그렇다고 이 방에 세이카가 막 들어왔을 때처럼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닌, 미도리마 신타로에게서 정말 ‘처음‘ 으로 보는 단호하고- 또한,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세이카가 그 공포에 대항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미도리마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처음으로 행사해 보는 직접적인 폭력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을 얽매려 하는 그 시선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다시 시선을 세이카에게 돌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내리치려는 세이카의 손목을 세게 붙잡아 그녀의 반항을 모조리 봉쇄해 버렸다.
“이…… 이거 놔! 아파!”
“다시 한 번 말해주지. 내 입에서 이 혼담을 깨겠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 거란 것이다.”
“대체 왜야? 우리 가문의 서포트 같은 게 없어도 너는 잘 해나갈 수 있어! 혼담을 거절한다고 해도 내 친구란 자리가 있는 이상…… 아니, 여태까지 쌓아 온 위치 때문에라도 절대로 의학계에서 외면당하거나 하지 않아! 네 재능은 아버지도 인정했다고! 굳이 내 남편이란 자리가 필요할 리가……,”
“하지만 그러면, 평생 널 손에 넣을 수 없을 테지.”
순간, 미도리마 신타로의 ‘친구’ 라는 위치가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친구’ 가 아니라, 그저 남자와 여자일 뿐인 관계였다. 제 손목을 세게 잡은 미도리마의 힘에서 세이카는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남자’. 그것도, 아카시 세이카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진-
아카시 세이카가 결코 반항할 수 없는 ‘남자’.
“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네게 빠져들었다. 너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너는 나를 아버지의 장기말로만 여기고 먼 곳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지. 그래서는 안 됐다는 것이다. 널 가지려면, 네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려면 ‘친구 놀음’이든 뭐든 어울려 주겠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다해 네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겠다고. 미안하지만 네 아버지의 속셈도, 네가 내게 느꼈을 우정 같은 감정도 아무 상관없었어. 이 1년은 네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기간일 뿐이었다. 이 혼담은 내가 인사를 다한 결과다. 포기할 것 같나?”
“신, 신타로.”
“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세이카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릎을 꿇지 못했던 것은 오직 미도리마의 손이 그녀를 세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타로가 이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었던가? 그런 의문은 이 힘 앞에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결국 세이카는 경악한 얼굴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그의 힘을 외면하려 애쓰는 것 외에는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내가…… 그걸 받아들일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어쩔 거냐? 내가 거절하지 않는 이상 이 혼담은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넌 내 아내가 될 거고, 평생을 나와 함께 살게 되겠지. 그게 네게는 그렇게 싫은 일인가?”
“결혼, 같은 건 싫다고…… 방금, 말했잖아. 난……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군. 너는 ‘나와 결혼하는’ 게 싫은 건가, 아니면 ‘결혼하는 것 자체’ 가 싫은 건가? 어느 쪽이지?”
그런 건. 세이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건, 정해져 있다. 그 답은 지금은 언제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 그 여름날 자신의 손을 잡고 슬쩍 웃어보였던 미도리마 신타로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타카오 카즈미와의 조우에서 확실해졌다. 단지 미도리마 신타로가 먼저, 그녀와 처음 만났던 1년 전의 봄에서부터 그 대답을 이미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끈거리며 가슴이 아팠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다. 경고와도 같은, 제 목숨을 위협하듯 착실히 목을 졸라 오는 소리. 그것을 울리게 하는 것은 미도리마가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들이 세이카에게 안겨준 트라우마도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현실도 아니었다.
“……후자야…….”
자신의 심장이, 어서 답을 내라며 아카시 세이카를 재촉하는 소리.
“나는…… 신타로를 좋아한단 말이야…….”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간혹 웃어줄 때는 가슴이 설렜고, 라이벌이라고 생각할 만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 존재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고, 오직 자신만이 그의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했다. 그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아카시 세이카가 여태까지 만들어 온 ‘자신’ 을 부숴버릴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멈추었다. 그것을 감추려 애썼다. 어머니처럼 무력하게 죽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것은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서 ‘결혼’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녀는 생각하고 말았다.
그 상대가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라면, 싫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모든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세이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개를 떨군 채 바닥으로 눈물방울을 떨구는 그녀를 미도리마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에서 그의 생일에 선물했던 향수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것을 바로 코끝으로 느끼고 나서야 세이카는 자신이 미도리마에게 끌어안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면 됐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기다릴 뿐이니까. 네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까지, 몇 년이고.”
“……그런 순간…… 평생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물론 얌전히 기다리겠다고는 안 했다. 정식으로 약혼하게 되면 네게 손을 뻗거나 널 만지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어지지. 손도 잡을 거고, 껴안아도 볼 거고, 키스도 할 거고, 네가 허락한다면 그 이상도 할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너도 마음이 움직이겠지.”
“결국 육탄공세를 하겠단 얘기잖아……? 멋없어…….”
“멋없는 건 이미 각오했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사를 다해서?”
“그래. 그리고, 천명도 기다려야지.”
진인사대천명. 이 남자의 좌우명.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우스꽝스러운 점괘를 매일 참고하고, 이상한 물건을 손에 들고 다니며,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을 아카시 세이카의 곁에 그저 ‘친구’ 로만 머물렀다. 세계정복이라는 허황된 목표가 있더라도 이 남자라면 인사를 다해 해내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내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까.
“신타로…….”
“응?”
“나는…… 만약 결혼한다면, 신타로가 좋아…….”
“……난 결코 네 손에 잡혀 휘둘리지도 않을 테고, 단순히 네게 씨를 뿌리는 존재로 있을 생각도 없는데?”
“상관없어. 신타로가 좋아. ……신타로 외의 사람은 싫어…….”
아니, 이미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처음 만난 그 봄날에, 이미.
미도리마의 손이 천천히 세이카의 얼굴을 감싸고 그녀의 눈물 어린 눈동자를 제게 향하게 만들었다. 세이카. 가만히 입을 연 미도리마가 뭔가를 요구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세이카는 그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 요구를 말로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살짝 감은 세이카의 얼굴로 입술을 내렸을 뿐이었다. 짧은 입맞춤 후 떨어진 입술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것은 분명히,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랑의 설렘.
“……그런데, 키스는 약혼한 다음에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건 키스가 아니라 ‘입맞춤’ 이니까 카운트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야, 그게.”
“실망했나?”
“……아냐, 됐어.”
행복하니까, 됐어.
5.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의 봄
“신타로. 중요한 얘기가 있어.”
“뭐냐, 진지한 얼굴을 하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하라는 것이다.”
“아직 결과가 발표되진 않았지만, 이번 지방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확률로 당선이 확정될 것 같아. 2세 의원의 시작이지.”
“아니, 난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매우 곤란해졌어. 당선되자마자 구설수에 오르게 생겼거든.”
“? 무슨 의미냐?”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새 여성의원, 그것도 그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라는 여자가 미혼모라는 소문이 퍼지면 큰일이잖아?”
“……뭐라고?”
“그러니까 나, 슬슬 신타로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
“해 줄 거지?”
“……세이카.”
“응.”
“……결혼하자는 것이다.”
“……응.”
그로부터 얼마 후-
미도리마 세이카라는 이름의 여성의원이 탄생했다.
'진인사대천명'.
모처 ts판에서 받은 리퀘스트로 쓴 의사 집안 아들 미도리마x정치가 집안 딸 세이카 연성.
사실은 1. 어느 봄날의 장기대국 과 2. 여름의 계곡 두 편 중 하나만 좀 길게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그냥 살 붙여서 다 쓸까 했음. 그리고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다. 어쩐지 녹적 특유의 분위기는 풍기지 않지만 내가 녹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카시의 유일한 이해자 미도리마' 와 '그런 미도리마에게 의지하는 아카시(세이카)'의 구도는 유지한 것 같으니 별 상관없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녹적에게 한도 끝도 없이 관대해지고 있는 내 자신을 느낀다...
부분별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1. 어느 봄날의 장기대국: 미도리마는 세이카를 좋아하지만 세이카는 미도리마를 한껏 얕보고 있는 상태. 아직 시작 전.
2. 여름의 계곡: 미도리마에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세이카. 덧붙여서 세이카한테 신발 신겨주는 미도리마. 이거 진심 정말로 보고 싶었음... 여자한테 구두 신겨주는 남자 진짜 로망이라...
3.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가을: 어디까지나 '친구' 인 미도리마와 타카오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세이카랑 미도리마 관계가 이상하다는 걸 지적하고+미도리마에 대한 감정 자각하는 세이카의 이야기. 동시에 궁ts고는 덤인데 내안의 미야지 선배는 진짜 의처증이라... 얘네 얘기도 조만간 써보고 싶다. 는 내일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4.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겨울: 이 얘기 생각했을 때부터 설정했던 아카시 모친 이야기에, 여자인데도 후계자 자리에 올라야 하고 그걸 바라지만 쉽게 안 되는 세이카를 재조명하면서+미도리마가 1. 에서 세이카가 봤던 것처럼 결코 얕봐서는 안 되는 놈이라는 걸 강조. 근데 첫눈에 반해놓고 이렇게까지 상황을 끌고 오다니 내 최애캐고 내가 썼지만 미도리마 진짜 무서운 놈이야...
5.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봄: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흘렀을 시점? 아직 서른 살은 안 됐지만 거의 될락말락하는 시점에서야 겨우 결혼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참고로 속도위반 맞음 미도리마 너 이자식^0^9m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잉야할 때는 어땠을지가 매우 궁금한 거시다... 요즘 나는 에로에 맛이 들렸다... 참고로 녹ts적이면 속도위반 결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빨리 결혼해. 결론은 이거.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녹ts적은 어서 결혼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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