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14.
緑間真太郎x赤司征十郎
갑작스레 찾아온 첫 패배는 소년에게 있어 치명적인 것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만인의 선망의 대상이자 섬기는 것이 당연한 존재였던 소년은 그 시합 하나로 재앙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의 대부분은 소년이 생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경멸의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 중에서 소년의 인생을 전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년의 아비가 패배의 소식을 접하고 던진 한 마디는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충분했다.
“겨우 농구 하나에 무릎을 꿇을 줄이야. 너를 철저히 믿고 키워 왔던 내 지난 시간이 헛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게 실망했다.”
저를 믿으셨던 적이 있으셨나요. 그런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소년은 애써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던져 봐야 저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는 단순한 반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아비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뒤집혀 자신을 둘러싸게 된 냉정한 시선도,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 최강자의 자리도, 그 짧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현실도 아니었다.
소년이 정말로 역겹다고, 경멸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 * *
“세이쨩! 등교한 거야?!”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낸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에 가장 큰 목소리로 환영인사를 던진 것은 역시나 미부치 레오였다. 체육관 가운데서 하야마 코타로와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미부치는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아카시의 모습을 보자마자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라, 제 눈앞의 아카시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거라 생각하는 듯 손부터 세게 붙잡았다. 마치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그 손에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레오.”
“미, 미안해!”
나지막한 아카시의 목소리에 미부치는 마치 세상이 무너져 버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아카시의 손을 놓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미부치의 얼굴은 굉장히 거슬렸다. 하지만 자신을 마치,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유리잔처럼 다루는 미부치의 태도는 지금 아카시가 처한 상황-모종의 이유로 일주일 만에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아카시는 얼굴에서 짜증을 최대한 지우려 애쓰며, 제 눈치를 살피기 여념이 없는 미부치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많이 걱정해 준 모양이구나. 고마워.”
“당연하지! 전화는 안 받지, 메일 답장은 안 오지, 등교도 안 했다고 그러지…… 내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갔는데!”
“아, 정말 그랬어.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 가슴이라도 있었으면 뻥 터져 버렸을지도 모르지.”
“고릴라는 입 좀 다물래?!”
러닝을 하고 들어온 것인지, 어느새 아카시의 뒤에 선 네부야 에이키치가 못 볼 꼴을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부치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얼굴도 아카시와 눈이 마주한 순간 지극히 유하게 풀어졌다. 아아. 순간 아카시는 눈을 감고 싶어졌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돌아왔다, 아카시. 저 녀석만큼은 아니지만 기다리고 있었어.”
“……고마워.”
전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러나 네부야나 미부치나 아카시의 그런 태도를 지극히 당연히 여긴다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 자신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아카시가 모를 리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다. 왜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하는가. 라쿠잔 고교의 패배는 전적으로 아카시의 책임이었다. 쓸데없는 재회극은 이제 됐으니 연습이나 속행하라고, 여느 때처럼 냉정한 주장의 가면을 쓰려던 찰나였다.
“저기, 아카시. 있잖아.”
여느 때와는 달리 소심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하야마 코타로가 다가왔다. 왜 환영 인사가 없었나 했더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하야마의 얼굴에 가득한 죄책감에 아카시는 제 위가 크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입을 열면 아침에 먹은 것-이라고 해 봐야 수프 한 그릇 정도였지만-을 모조리 체육관 바닥에 토해 내고 말 것 같았다. 아카시는 주먹을 꽉 쥔 채 하야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하야마는 그 시선을, 자신을 책망하는 눈이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아카시…… 나, 저번 시합에서 미스가 너무 많았지. 내가 졸라서 아카시가 중요한 역할을 맡겨 줬는데, 결국 카가미한테 뚫렸고…… 미안해, 다시는 그런 실수 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그만해. 됐으니까, 더 이상 사과하지 마.
목구멍에서 맴도는 그 말을 아카시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와 함께 애써 다시 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걸 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순간 저들의 저 시선은 더욱 강해질 것이었다.
“……됐어. 다음에 잘 하면 돼.”
망설임 끝에 간신히 던진 한 마디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의 파장은 다른 선택지를 택했을 때 나올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카시를 쳐다보는 하야마나, 울상에 그치지 않고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띠우는 미부치나,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네부야나, 제각기 그들이 아카시에게 보여 주고 있던 하나의 감정을 더욱 깊게 내비치고 있었다. 아카시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정.
아카시 세이쥬로가 지금, 제일 피하고 싶은 것.
“……미안한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
“어? 세이쨩,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다들…… 하던 걸 계속해.”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아카시는 도망치듯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천만다행인 것은 미부치가 그의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지금 모습이 얼마나 심각해 보이면 그 참견쟁이 미부치가 저를 따라오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카시는 그대로 가장 가까운 교사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반 학생들이 등교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던 덕분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서 가장 먼 칸을 골라 거칠게 잠금쇠를 잠그고 변기 뚜껑을 열자 참고 있었던 토기가 울컥 하고 목구멍을 넘어왔다. 위액에 반쯤 섞인 아침식사를 모조리 그 안에 토해 낸 아카시는 전신에 힘이 빠져 변기를 끌어안은 채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인가.
아카시 세이쥬로를 탓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사상과 작전을 믿고 1년 간 한 팀에서 뛰어 주었던 그들. 아카시는 그들에게 가장 최악의 패배를 선물했고, 그로 인한 비난을 마땅히 감수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카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일주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등교하면 만나버리고 만다. 마주해 버리고 만다. 패자로 전락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진 아카시 세이쥬로를 비참함의 나락까지 떨어뜨려 버리는 저 시선들을.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등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신이 일주일 째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듣지만 않았더라면. 순간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한, 그리고 ‘학교에는 나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자신에게 전한 집사가 미칠 듯이 증오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히스테릭하게 꾸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행동을 실행에 옮긴다면, 어김없이 집사의 동정 어린 시선이 따라오리라. 그는 아카시를 10년 넘게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비난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매도당하는 아카시를 동정하면 했지 외면할 사람은 아니었다.
‘체육관으로 가야…… 가야 해.’
그랬다. 그랬다가는 도리어 더 강한 동정의 눈빛을 받을 뿐이다. 최대한 태연한 척 하며, 자신이 첫 패배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언제나 당당하고 굳센 주장의 모습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카시 세이쥬로가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그런 생각으로 아카시는 간신히 무릎을 떼고 일어섰다. 자신의 비참함의 흔적을 모조리 변기 아래로 흘려보내고,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세면대에서 깨끗이 씻어 냈다. 모든 작업을 마친 후 마주한 거울에는 얼굴이 조금 젖었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냉정한, 하지만 여전히 지친 기색이 어려 있는, 너덜너덜해진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 *
결국 아카시는 체육관으로 가지 못했다. 간신히 만들어낸 가면을 쓰고 체육관 쪽으로 몸을 튼 순간 다시 토기가 치밀어 올라왔고, 이번에는 정말 위액뿐인 액체를 변기 안에 뱉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완전히 몸에 힘이 빠져버려서, 아카시는 미부치가 어떻게 생각할 지 빤히 알면서도 그에게 메일을 보내 급한 일이 생겨서 체육관에는 들를 수 없다고 전했다. 이에 관한 미부치의 답장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우린 괜찮으니까 몸조리 잘 해’ 같은, 여전히 동정으로만 점철된 문장이 가득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실로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쏟아질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농구부원들이 보여주는 동정 어린 시선들만큼이나 보기 싫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카시는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 교사라면 적어도 아카시의 사정이나 감정과는 관계없이 몸이 좋지 않아 찾아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 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금만 자겠다는 말을 하고 양호실 침대 위에 쓰러져 아카시는 베개 속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누가 나를 비난해 줄 수 있을까. 마유즈미 치히로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카시에게 완전히 도구로 이용당하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변변한 활약 하나 못했던 그라면, 자신을 이용하고 버린 아카시를 시니컬하고 철저하게 비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에게 전화를 걸거나 메일을 보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동정이 아닌 비난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모순된 마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카시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자존심과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이유로, 아카시는 쿠로코 테츠야에게도 연락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쿠로코라면 마유즈미보다 더욱 신랄하게 아카시를 비난할 자격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쿠로코 테츠야는 농구로 아카시를 이긴 것에서 그 모든 감정을 날려버린 것처럼도 보였다. 우승컵을 차지했을 때 카가미나 세이린의 동료들과 얼싸안고 그 기쁨을 함께하던 쿠로코의 눈에는 더 이상 아카시에 대한 악감정도,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아카시가 누려 오던 당연한 승리와는 완전히 그 길을 달리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테츠야의 성격이라면 오히려 날 동정할지도 모르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상대에게 용서와 동정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따져 보면 쿠로코는 라쿠잔 선수들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동정을 받는 건 싫다. 비난을 바라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도 싫다. 그런 제멋대로인 마음을 대체 누가 받아들여 줄 수 있을까. 아카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행동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 목소리가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아카시는 문득, 전에 없던 쑥스러운 표정으로 안경을 끌어올리던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물론 모른다. 난 에스퍼가 아냐. 다만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무슨 반응을 바라는지, 내게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네 눈을 보면 어느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은 건 언제였던가. 그 답으로 아카시는 하이자키 쇼고의 얼굴을 떠올려냈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사고뭉치. 팀에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이자키를 퇴출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옆에서 워낙 뚱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왜 그러냐고 물어본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는 않겠지만 불평 정도라면 용납해 주겠다는, 아카시치고는 상당한 ‘배려’가 담긴 그 말에 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나도 동의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아카시의 것과는 달리, 오싹할 정도의 냉정함이라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덤덤했다고 하면 될까. 아카시의 결정에는 토를 달지 않겠다는 ‘복종’ 보다는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동의’의 기색이 더 강했던 그의 목소리.
「이대로 간다면 하이자키는 확실히 팀에 마이너스가 되겠지. 그 녀석이 폭력 사건을 일으키거나 농구부 분위기를 흐리게 만들고 있어서가 아니다. 키세의 성장을 생각해 보면, 조만간 하이자키는 키세를 이겨낼 수 없게 될 테지. 그 때 그 녀석이 어떻게 폭주할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아카시가 하이자키를 내보내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 사실을 그에게 말로 전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하이자키와 키세의 1대 1 대결을 지켜보다가, ‘아직은 상대가 안 되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을 침묵으로 부정했을 뿐이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그는 아카시가 했던 생각을 읽어냈던 것이다.
신타로.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도리마 신타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야말로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렇게 만나고 싶지 않은, 아카시를 ‘동정하는 사람’의 대표주자가 아니냐고. 그것은 테이코 중학교 시절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에서 도출되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던 친구가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카시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미도리마는 분명히 그를 동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연, 그러한 제 감정을 겉으로 노출할 인간일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미도리마는 대책 없이 솔직한 인간이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일이라면 제아무리 남들 보기에 괴상한 일이라도 기꺼이 해냈고, 그랬기에 기인이라고 불렸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카시가 기억하는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가까이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아카시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미도리마라면 아카시의 얼굴만 봐도 알아줄지 모른다. 동정을 받기 이전에 비난을 받고 싶다는 아카시의 기분을. 자신을 비난해 마땅한 사람에게 정당한 비난을 받고, 편해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비참함을.
그래, 미도리마 신타로라면, 어쩌면-
“……바보 아냐?”
그렇게 생각해 버린 스스로에게, 아카시는 비웃음을 던졌다. 무슨 자신감인가. 미도리마 신타로는 더 이상 아카시 세이쥬로의 친구가 아니다. 아카시 스스로가 그를 적이라고 규정한 순간 미도리마는 늘 아카시의 적이었고, 그 이후 미도리마가 보여준 행동은 언제나 아카시의 마음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너에게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 그 말 하나하나는 곧 죽더라도 패배를 바라는 일은 없을 것이었던 아카시의 마음에 미도리마가 던지는 작은 돌멩이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 호수가 크게 파문을 일어, 그나마 남아 있던 정마저도 거센 파도로 덮어버렸다. 그런 것이 미도리마 신타로다. 그런 것이 아카시 세이쥬로다. 그들의 관계는 이제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미도리마 신타로라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믿고 있지 않았음에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뿐일까?
그저, 단순히 그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리맡에 놓아 둔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잡기 싫었던 핸드폰에 저절로 손이 향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 아카시는 자신이 여태껏 한 번도 인정해 본 적 없었던 단어를 실감했다.
운명.
메일이 왔다는 알림과 함께 그 밑에 뜬 이름은 분명히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름이었다. 어째서 그는 지금 메일을 보낸 것일까. 마침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우연이라는 단어로는 이 상황을 지칭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가 평소에 그렇게 소리 높여 말하고 다니던 ‘천명’ 인 것이다. 아카시는 핸드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이불을 제치고 일어나, 보건 교사가 놀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건실 밖을 뛰쳐나갔다.
『지금, 라쿠잔 고등학교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아카시는 교사를 뛰쳐나와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교문 앞으로 달려갔다. 저 너머에 희미하게, 바람에 흩날리는 미도리마의 녹색 머리칼이 보였다. 이건 꿈? 아니면, 현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아카시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보건실에서 미도리마의 메일을 받기 직전까지 차마 내리지 못했던 결론만이 가득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어.
동정도, 비난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돼.
그저.
숨을 헐떡이며 제 앞에 멈춰선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손이 뒤로 돌아가 있는 것이 왠지 신경 쓰였지만 그것보다는 갑작스런 뜀박질로 거세게 뛰고 있는 제 심장이 더 급했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을 때, 미도리마의 얼굴 대신 진한 향기를 풍기는 장미 꽃다발만이 아카시의 시야를 지배했다. 그 꽃다발을 잡고 있는 것은 분명히 미도리마의 손이었다.
“오늘 사수자리의 럭키 아이템이 장미더군. 한 송이만 사 오려고 했는데 점원이 억지로 묶어줬어. 럭키 아이템이라면 양이 많은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가져왔다는 것이다. 우선 받아라.”
억지로 꽃다발을 안겨 주는 미도리마의 행동에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꽃다발 쪽으로 손을 뻗었다. 넘겨받은 장미 꽃다발에서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시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라쿠잔 멤버들을 만났을 때의 구토할 것 같던 기분도, 아버지의 실망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절망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 오직 미도리마 신타로만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줄 수 있는 감정이 아카시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네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 지 오는 내내 생각했다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도 싶었고, 네가 보내고 있을 힘들 시간을 위로하고도 싶었고,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느냐며 화를 내고도 싶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어.”
그래, 신타로. 나는 그런 걸 너에게 바라지 않아. 아무 말도 필요 없어. 동정도, 비난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돼.
아카시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눈에는 그가 곧 소리 내어 말할 어떤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정도, 연민도, 비난도, 실망도. 아카시 세이쥬로를 괴롭게 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무엇도 없었다. 오직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던 일을 실행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시선.
아카시 세이쥬로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던 그것.
그리고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카시는 장미 꽃다발이 우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저 그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보고 싶었다, 아카시.”
'가장 듣고 싶었던 말'
6월 14일에 공개된 아카시 위로 합작 (링크) 에 제출했던 녹적.
대대적으로 멘붕이 예고되고 있는 아카시를 위로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보배로운 합작이었는데, 조금 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몸부림치다가 나온 결과. 윈터컵 결승전 결과에 대해 라쿠잔 멤버들이 깨끗이 승인하고((스포일러) 단 현재 본지 전개를 보면 전혀 그럴 거 같지 않다는 게 유머) 아카시를 위로하지만 아카시는 위로나 격려보다는 비난과 질책을 더 듣고 싶어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에게 대차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것이 괴롭다기보다는 난생 처음 받아 보는 동정의 시선이 더 괴로운 아카시를 쓰고 싶었다. 그야 그렇잖아. 아카시는 평생 동정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보통 윈터컵 결승전 이후의 녹적이 아카시가 멘붕한 걸 동정해서+예전의 좋아하던 마음을 포함해 아카시한테 잘해주는 미도리마로 전개된다면 이번에는 아카시에게 동정도 비난도 해주지 않는 미도리마, 그저 아카시에게 품었던 예전의 마음만을 가지고 아카시를 대하는 미도리마를 써서 아카시를 구원하는 걸 표현해 보고 싶었으나... 처절하게 실패한 거 같은 느낌은 왜 들까...
사실 일이 바빠서 합작 마감일에 급하게 쓴 글이라서 많이 생략된 글이라는 게 함정... 사실 이 글은 라쿠잔 멤버들이 보여주는 '위로와 격려' 파트와 쿠로코와 마유즈미가 보여줘야 할 '비난과 질책' 파트, 그리고 미도리마의 '진심' 파트 세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걸 균일하게 넣지 못한 것이었다... 나중에 세 개 다 꽉 채워 써서 배포본으로 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않아 있음. 그러니까 누가 부스 좀 빌려주셔요... 시름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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