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4.
帝光緑赤の日記念ログ
緑間真太郎x赤司征十郎
50.
소유&정기고 - 썸
최근 의문인 것
: “왜 그는 내 사람이 아니지?”
“너, 요즘 별로야.”
책상 너머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선언은 미도리마 신타로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상대가 눈앞에 있는 ‘그’ 존재라는 것이나 현재 그들이 하고 있는 일-어느새 일상의 단면이 되어 버린 방과 후의 짧은 장기 대국-을 고려해 본다면 굳이 그 내용이 미도리마가 이해하지 못할 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놀라기는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별로’ 라는, 자신에 대한 모종의 불만이라고도 볼 수 있는 상대의 말에 미도리마의 머리는 장기판 위의 제 패들을 어떻게 움직여 승리를 얻어낼 것이냐가 아니라 상대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를 해석하는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약 상대가 ‘그’ 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도리마 자신의 흥미를 이 대국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일종의 비겁한 수로 생각했겠지만, 적어도 그, 아카시 세이쥬로는 대국 중에 상대의 마음을 어지럽힐 만한 수는 쓰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러지 않아도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얼마든지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굳이 미도리마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눈을 깜박이면서 들고 있던 패를 천천히 전쟁터 안으로 내려놓았다.
“갑자기 뭐냐.”
“그냥.”
“내가 네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럼 뭐야. 그냥 화풀이를 하는 거냐?”
“아니.”
대화라고라도 부를 수 없는 짧은 말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아카시가 패를 장기판 위로 세게 내리꽂았다. 적장의 말을 쓰러뜨려 바닥에 널브러진 적장의 목 옆에 창을 꽂아 넣듯 강한 힘이었다. 공격 자체는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았으나, 그 수를 놓은 아카시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넌 대체 뭘 원하는 건데.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불만스레 흘깃, 한 번 쳐다보다가, 자신의 패를 옮겨 아주 소심한 대응을 하려 했다.
“……그 편지, 읽어봤어?”
그 때 미도리마의 머릿속에 또다시 아카시의 단어가 뛰어 들어왔다. 앞뒤 맥락이 없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단어였음에도 미도리마에게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주머니를 뒤져 연분홍색 편지봉투를 꺼낸다. 점심시간, 여느 때처럼 교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미도리마에게 한 여학생이 찾아와 수줍게 건네준 봉투였다. 아무리 연애 관련 세포가 죽어버린-참고로 이것은 키세의 표현이다- 미도리마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미도리마와 그 여학생만의 비밀이어야 할 그 순간을 아카시 세이쥬로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전 부실 문 앞에서 열쇠를 가져온 아카시와 마주한 직후에도 미도리마는 그 봉투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아까 봤어. 점심시간에. B반의 마야마하고. 그거, 뭐였어? 그러한 질문을 아카시가 왜 던졌으며 아카시는 왜 굳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에 대하여 미도리마는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한두 번 마주쳤을 뿐일 터인 여학생의 이름도, 그녀가 정성껏 썼을 편지도, 그 안에 담겨 있을 고백의 말도, 실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감정을, 그것도 아카시 세이쥬로와 공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카시는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관심도 없으리라고.
“당연히 대답해 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정성껏 써준 편지가 아니냐.”
“뭐라고 대답할 건데?”
“……너라면 어떻게 대답할 거지?”
아카시가 눈을 흘겼다. 고백을 받은 당사자는 너인데, 왜 내게 그런 걸 묻고 있느냐- 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다. 미도리마가 받은 고백의 답을 아카시가 정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알고 싶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라 아카시 세이쥬로의 답이.
전혀 예상도 못한 인물에게 고백 받았을 때의 아카시의 반응을.
“……몰라. 미도리마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면 되잖아.”
“난 지금 네 의견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왜 내 의견을 묻는데?”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친구에게 물어보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따악,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카시의 패가 장기판을 갈랐다. 장군. 날카로운 선언과 함께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니 미도리마가 순식간에 결말이 나 버린 장기판 위의 전황을 망연자실한 채 바라본 것은 결코, 통상 1074번째의 패배를 맞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도리마.”
“뭐냐.”
“그 말 싫다.”
“무슨 말?”
“……친구라는 말.”
“…….”
“잘 가. 내일 보자.”
문이 닫혔다. 아카시가 텅 빈 복도를 걷는 기품 있고 우아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갈 즈음에야 미도리마는 간신히, 자신의 본심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네가 내 마음 안에 있는 이상,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49.
빗줄기
갑자기 아카시 세이쥬로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 가지고 오지 않은 거냐?”
용기를 내어 그렇게 물었다. 질문에 고개를 든 아카시는, 갑자기 말을 건 미도리마에게 뜻밖이라는 듯의 눈빛을 보낸다. 네가 내게 말을 걸다니 별일이네. 양쪽의 색이 서로 다른 그 눈이 미도리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에 대고,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최근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아카시를 피한 것은 바로 미도리마 자신이었으니까. 이제 와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으응. 사물함 안에 넣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없었어. 기사에게 연락했으니까 교문 앞까지 올 거야.”
“……그런가.”
“왜? 신타로가 씌워 주려고?”
변해버린 호칭을 자연스레 입에 올리며 아카시는 웃는다. 입술만 움직여 짓는 미소는 미도리마의 기억 속 아카시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라 낯설었다. 그러니 저 미소를 본다고 해서 심장이 두근거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야 하는데. 미도리마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의 심장은 아까 전부터 그의 의지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저것은 아카시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알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성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신경에서 전해져 올 그 확실한 신호를 그의 심장은 확실히 무시하고 있었다.
“…….씌워 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말해라.”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씌워 주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
아카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두 번 정도 신호가 간 뒤, 공손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아카시 가문의 운전기사거나 집사,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친구’가 우산을 씌워 주기로 했으니 이전까지처럼 해도 된다는 아카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도리마는 우산을 펼쳐 들었다. 씌워 주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 없지만, 그런 것을 핑계 삼아 아카시를 무시해 버리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단어가 계속 맴돌아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친구’.
너와 내가, 친구라니.
“꽤나 큰 걸 가지고 다니네. 어차피 혼자 쓸 우산인데.”
“……키가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신타로, 이번 신체검사에서 190cm라고 나왔었지. 굉장하네. 입학할 때는 170대였는데.”
“그런 것을 일일이 기억하고 다니는 거냐.”
“응. 주장이니까.”
웃으며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옆에 섰다. 순간, 이전처럼 자연스레 팔짱을 낀 다음 옆에서 수줍게 웃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카시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보 같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 자신의 어리석음에 다시 한 번 상처받으며 미도리마는 우산을 세게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보폭에 맞춰 걷는다. 자신을 배려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미도리마의 행동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는 듯. 그런 아카시의 태도에 미도리마는 깊게 후회했다. 말을 건 것이 잘못이었다. 그냥 자연스레 작별인사를 건네고 아카시를 뒤로한 채 집으로 갔어야 했다. 테이코 중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그 동안 이렇게 납덩이가 걸린 기분을 유지해야만 하다니.
“여동생은 잘 지내?”
“그럭저럭. 얼마 전에는 발레 콩쿠르에서 상을 받아 왔더군.”
“그래? 몇 등?”
“1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 왜 갑자기 남의 여동생에 왜 관심을 보이는 거냐.”
“주장이니까.”
마치 그것 외에는 미도리마의 가족에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다는 듯 말하면서 아카시는 웃었다. 변해버린 뒤로 아카시는 웃음이 늘어났다. 그 웃음이 지금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가지고 있는 냉정함과 잔인함을 가려 주고 있었다. 적어도 미도리마 신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의 진짜 웃음이 어떤 것인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신에게는 그러한 위장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이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앞에서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지쳤다.
“최근 신타로는 말이 없어졌네.”
“원래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세도 아니고.”
“그래? 하지만 전에는 이것저것 떠들어댔잖아?”
내 앞에서만, 말이지.
아카시는 짧게 말하고 다시금 미도리마를 향해 웃어보였다. 미도리마는 이를 악물었다. 웃지 마. 웃지 마라. 내 앞에서 웃음을 보이지 마. 나는 이제 그 웃음에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으니까. 제발, 웃지 말아 줘. 고개를 돌려 아카시의 웃음을 피했다. 아카시는 그런 미도리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어떤 모습이던 자신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잔인한 말을 던져 미도리마 신타로를 상처 입히면 좋은지 고민하는 듯. 얼굴을 샅샅이 훑는 끈질기고도 잔인한 시선에 미도리마는 끝내 아카시를 바라보지 않았다.
“신타로, 그거 알아? 가을비는 몸에 차갑다고 해.”
“원래 비는 차갑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온천수가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 이상, 맞으면 감기에 걸리겠지.”
“그렇지?”
그렇게 말하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의 보폭보다 훨씬 크게 발을 내딛어 우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제 옆을 스쳐 지나가 빗속으로 달려 들어간 아카시의 모습에 미도리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카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카시를 부르짖으며 발을 뗀 미도리마는, 어느새 제 앞 저 멀리 선 아카시가 입술을 크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신타로. 입술이 그리는 자신의 낯선 이름에 미도리마의 발이 멈추었다. 신타로. 신타로! 아카시의 입모양은 어느새 큰 외침이 되어 미도리마의 귀에 꽂히고 있었다.
“미도리마.”
그리고 낯익은 호칭이 들려와, 미도리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미도리마. 미도리마. 미도리마! 저 멀리서 아카시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착각일까. 분명히 달라져 있을 아카시의 양쪽 눈 색이- 똑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도리마는 손에서 우산을 놓았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빗속을 달려 저 멀리 서 있는 아카시에게로 달려갔다. 쏟아져 내리는 비 아래에서 아카시의 푹 젖은 양쪽 어깨를 세게 붙잡았을 때.
“미도리마.”
아카시는 가증스럽게도, 양쪽 눈의 색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너는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그런 표정만 짓는구나.”
상냥하고, 상냥한 신타로. 아카시가 빗속에서 손을 뻗어 미도리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얼굴에 드러난 비웃음에 미도리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의 그 얼굴이, 미소가, 눈빛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너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는 정말로 나쁜 녀석이다. 아카시의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주고, 미도리마는 이를 갈았다.
“이런 장난이, 재미있나?”
“재미있어. 장난은 아니지만.”
“장난이건 아니건, 이런 짓은 그만둬.”
“어째서?”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헤어지자.
그렇게 말한 것은 아카시였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소중하게 여길 수 없고, 너 역시 나를 이전처럼 소중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카시는 그들이 이별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렇게 단정 지었다. 미도리마의 마음은, 감정은, 전혀 고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미도리마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언제나 그러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언제나 옳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내일 보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를 놓았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산은 줍지 않고서, 그대로 빗줄기 안을 걸어 자신의 갈 길을 간다. 아카시 세이쥬로를 등지고서. 그리고 미도리마의 등 뒤에 혼자 서 있는 아카시는.
“거짓말.”
언제나처럼 또다시, 잔인한 말을 한다.
“너는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못할 텐데.”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그 말이 옳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다음날 아침 멀쩡한 얼굴로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 몇 명 나오지 않은 농구부원들의 연습을 주도했다. 그러나 간혹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괴로움 섞인 잔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그 모든 것을 유일하게 본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기침 소리를 무시했다.
그러는 편이 그들에게는 좋았다.
48.
巡音ルカ - 完全性コンプレックス
“아버지에겐 말버릇이 있어.”
갑자기 꺼낸 아카시 세이쥬로의 한 마디는 막 움직이려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손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왜 여기서 아버지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거냐고, 당연하다는 듯 던지려던 질문이 멈추었다. 고개 들어 본 아카시의 얼굴은 그만큼 심각했고 진지했다. 갑작스레 꺼낸 이야기이기는 했어도 미도리마가 잠자코 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 정도의 기분은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패를 움직이려던 손을 떼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아카시의 얼굴을 응시했다. ‘말해봐라’는 제스처에 아카시가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에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카시는 옆에 놓인 음료수 캔-대국 전 미도리마가 단팥죽을 사 오면서 같이 사 온 밀크 티-의 테두리를 어루만지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밖에 집에 들어오지 않아. 어머니가 계셨을 때는 좀 더 자주 들어왔던 것 같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일까. 아니면 회사 일이 바쁜 걸지도 몰라. 회장이라는 건 그런 위치잖아. 만약 집에 들어오신다고 해도 나하고는 거의 아침에밖에 얼굴을 마주하지 않지만,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시는 날, 난 반드시 아버지와 마주앉아서 아침 식사를 해. 저녁 시간에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니까.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지. 솔직히 말해 그다지 할 이야기는 없어. 시합이 있거나, 시험이 있거나, 학교 내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물론 보고한다고 해서 별 중요한 말을 듣는 건 아냐. 그 흔한 칭찬 한 마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시험에서 1등을 했다던가, 전 과목 만점을 받았다던가, 시합에서 우승했다던가, 연습시합에서 압도적인 점수로 이겼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해. 그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표정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거든. 만약 내가 전과목 만점을 받지 못했다거나, 시합에서 지고 말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면 어느 정도는 반응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난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지.”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나면 아버지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늘 정해진 것처럼 한 마디를 해.”
“‘아카시 가문의 인간은 언제나 완벽해야 한다’.”
그게 아버지의 말버릇이야. 이야기를 끝내며 미소 짓고, 아카시는 손으로 어루만지던 밀크 티 캔을 잡아 그 안의 내용물을 단번에 비웠다. 문득 미도리마는 차가운 음료를 사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밀크 티가 뜨거운 것이었다면,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아카시는 괴로움을 삼키는 표정을 애써 감춰야만 했을 테니까. 그러한 ‘약점’은 아카시에게 있어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캔을 내려놓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반응을 보여 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뭔가, 쓸쓸한 이야기로군.”
“그래? 미도리마의 집은 어떤데?”
“나도 아버지를 자주 뵙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내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어머니가 전해 주시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의 반응은 전해 듣잖아?”
“나는 네가 그러하듯, 가족에게 자랑할 만한 성과는 잘 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도 늘 2등이고, 시합에서 이겼다 해도 그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네게 장기로 한 번이라도 이긴다면, 자랑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군.”
“그거 참 아쉽네.”
아카시의 그 웃음에 미도리마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웃음의 의미가, ‘네가 그런 것을 어머니에게 자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단정 짓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발언을 실제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미도리마는 불만을 표하는 대신 방금 전 옮기다 만 패를 옮기기로 했고, 미도리마의 손가락이 떨어진 뒤 아카시가 장기판 위로 손을 뻗었다. 서너 번 패가 오간 다음, 장기판에 드러난 결말을 보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숙였다.
“투료라는 것이다.”
“오늘도 재미있는 대국이었어.”
웃으며 아카시가 의자에 등을 기댄다. 그들의 대국은 진 사람이 패를 정리하여 다시 판을 만들기로 되어 있다. 그 말은 즉, 판을 만드는 사람이 늘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것을 의미했다. 패를 한데 모으다 말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하고 아카시의 눈이 미도리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얼굴을 향해 미도리마는 양팔을 벌려 보였다.
“이리 오라는 것이다.”
그 요구에 아카시는 잠시 두세 번 눈을 깜박였다. 그것은 아카시가 정말 놀랄 때가 아니면 잘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아카시는 곧 여유로운 웃음을 입가에 드리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도리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미도리마는 제 무릎 위에 올라온,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몸을 살짝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미도리마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아카시가 살며시 미도리마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참 이상하지. 난 아버지의 말대로 항상 완벽해야만 하고, 그를 위해서는 나 자신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감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데도 왠지 네 품에 안기면 마음이 편해져. 여기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건…… 내 입장에서는 참 반가운 말이라는 것이다.”
“후후. 그래, 미도리마의 그런 점을 좋아해.”
좋아해. 다시 한 번 중얼거리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등에 팔을 둘렀다. 품에 파묻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정리해 주며 미도리마는 자신이 정리하다 만 장기판에 고개를 돌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장기짝. 그 맨 위에 붉은 색의 왕이 올라와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고고한 왕. 과연 자신이 저 흔들리지 않는 왕좌를 부숴 버릴 날은 올 것인가?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저기, 미도리마.”
“뭐냐.”
“만약 내가 아버지에게…… 내가 누군가에게든 좋으니,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언제나 완벽해야만 하는 아카시 가문의 인간이 완벽해지지 않는 순간은, 아버지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그건…….”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라고, 생각 없이 말해버릴 뻔 했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그 순간 아카시 세이쥬로의 부친의 심정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심정에 비하면 더욱더. 그래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기만 했다.
“미도리마.”
“응?”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입술 사이에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던 말이 흘러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긋 웃으며 아카시가 다시 미도리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하얀 아카시의 귀가 약간 달아오른 것을 보고, 미도리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미도리마, 나는.
만약 누군가 내게 패배를 가르쳐 준다면,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
47.
단 것
“한 번쯤은 이걸 마셔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손에는 지금,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료가 들려 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마지바의 ‘M’ 마크가 찍힌 종이컵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과, 그 컵 위에 덮인 불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기대 가득한 눈으로 빨대를 문 아카시는 그 안에 들어 있을 새하얀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그리고는-
미도리마가 예상했던 대로, 무척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아.”
“……그야, 바닐라 셰이크니까.”
“응,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달잖아. 대체 설탕을 얼마나 집어넣은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카시는 뚜껑을 열어 컵 안에 가득한 바닐라 셰이크를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딱히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식성에 절대 맞지 않는 음료에 120엔을 써 버렸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후회하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쯧. 혀를 차며 미도리마는 자신이 들고 있던 아이스커피-아카시가 바닐라 셰이크를 살 때 옆에서 같이 샀던 것-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왜 그렇게 마셔 보고 싶었던 거냐.”
“하지만 쿠로코는 늘 맛있게 마시니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단 것을 당연하다는 듯 위에 집어넣는 그 녀석의 식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난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네. 이걸 어쩌지…….”
중얼거리며 아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셰이크를 버릴 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자주 보이는 쓰레기통이 하필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그 말이 딱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자신이 들고 있던 아이스커피를 아카시의 손에 쥐어 주고, 아카시가 들고 있던 컵을 바꿔 가져왔다. 아카시가 빨대를 무는 미도리마를 놀란 눈으로 바라본 것은 당연했다.
“미도리마, 단 것 싫어하지 않아?”
“싫어한다는 것이다. 단팥죽은 예외지만.”
“그런데 그걸 왜 마셔. 이리 줘.”
“괜찮아.”
“괜찮기는. 표정이 썩어들어가는데.”
“정말 괜찮다는 것이다. ……네가 마시던 거라면,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꿋꿋이 바닐라 셰이크를 입 안에 머금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아카시가 놀란 얼굴을 천천히 흐뭇함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아카시는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아이스커피를 몇 모금 마시다 말고, 입 안 가득한 단맛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미도리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미도리마.”
“뭐냐.”
“우리가 지금 키스하면, 어떤 맛이 날까?”
시험해 볼래?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서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천천히 몸을 숙이면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단 향기에 눈을 감았다.
이런 단맛이라면, 싫지 않아.
46.
아이컨택
-경축☆애니메이션 녹적 아이컨택★
최근 미도리마 신타로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잦다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생각한다.
문득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어 보면 언제나 미도리마가 저 멀리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곤 한다. 하지만 아카시가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혹시 뭔가 할 말이 있느냐는 제스쳐를 취하면, 미도리마는 늘 고개를 젓곤 하는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상식으로,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특정한 용건이 있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 텐데도, 미도리마는 정말 아무 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아카시를 대하는 것이다.
봐, 지금도.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눈으로-
“아카시 군, 아카시 군?”
“어? 아, 미안해, 쿠로코. 무슨 일이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는 쿠로코 테츠야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아카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척을 드러낸 채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어도 반응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제가 존재감이 옅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쿠로코의 두 눈에 가득 드러난 불만에 아카시는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닌데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고, 아카시는 완전히 쿠로코 쪽으로 돌아 섰다.
“청소가 다 끝났는데, 슬슬 정리하고 돌아갈 시간이 됐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 응. 그렇네. 난 오늘 코치에게 연습 보고를 해야 하니까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도 좋아.”
왠지 쿠로코에게 미안한 기분이 되어 아카시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쿠로코는 금방이라도 한숨을 내쉴 것 같은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쿠로코가 이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다. 아카시는 점점 더 민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다 미도리마 때문이다. 피어오르는 불만에 아카시는 다시 미도리마가 서 있던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새 미도리마는 가까이 다가온 키세와 뭔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 거리에서 그들의 대화가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카시는 그들의 대화에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키세의 입모양으로 봐서는 왠지 쿠로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야, 왜 미도리마와 쿠로코 이야기를 하지?
“아카시 군.”
“어, 응?”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도리마 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빨리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분명 미도리마 쪽일 텐데. -라고, 불만스레 목소리를 올릴 뻔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쿠로코의 덤덤한 표정이 ‘아카시가 미도리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쿠로코 테츠야의 성격상, 그가 이런 식으로 단정적인 표정을 짓는 데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아카시는 문득 그 이유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미도리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최근 계속 미도리마 군만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뭐?”
정말?
아카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색하게 깜박이는 자신의 눈꺼풀에 쿠로코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아니었습니까? 금방이라도 그렇게 되물을 것 같은 멍한 얼굴에 아카시는 계속해서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미도리마를 자주 쳐다봤어?”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미도리마 쪽에서 먼저 날 쳐다보니까, 나도…….”
“글쎄요. 옆에서 볼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습니다만…… 미도리마 군이 먼저 아카시 군을 쳐다볼 때도 있고, 아카시 군이 먼저 미도리마 군을 쳐다볼 때도 있습니다. 혹시 눈치 채지 못한 겁니까?”
“전혀…….”
애초에 자신이 미도리마를 계속 바라볼 이유가 없다. 아카시는 다시 미도리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새 키세와의 대화를 마치고 쿠로코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친 것을 느꼈다. 순간 피어오른 감정- ‘부끄러움’ 이라는 이름에, 아카시는 황급히 미도리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물론 몸은 그렇게 반응했지만 머리로는 계속해서 왜 자신이 이런 행동을 취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아카시 군이 하는 걸 보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만…….”
“생각나는 거? 뭔데?”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가르쳐 주겠습니다.”
“화내지 않을게.”
아니, 애초에 화를 낼 이유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시는 쿠로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라, 이상하다. 쿠로코와는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하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그런데, 왜 방금 전의 미도리마의 눈은-
“너희들이 그러는 걸 보고 있으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들 같습니다.”
“……뭐?”
“왜, 연애소설이나 순정만화에서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관심 있는 상대에게는 절로 시선이 가게 되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곤 하는 장면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방금 아카시 군의 반응은 정말 그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습니까? 착각이라면 정정해 두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내일 봐요.”
아카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을 만한 말을 남기고 쿠로코가 돌아섰다. 아오미네가 기다리고 있는 탈의실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보며 아카시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였다. 사랑에 빠진 소녀라니, 내가? 웃기지도 않아. 그것도 상대가 저 미도리마라고? 하지만 그렇게 냉정한 생각을 하는 한편, 천천히 뛰기 시작한 심장이 점점 심박수를 올려가는 것도 아카시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관심 있는 상대에게는 절로 시선이 가게 되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곤 하는- 연애소설이나 순정만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 그 장면을 쿠로코 테츠야는 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도리마 신타로도 그런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 생각과 함께 피어오른 감정의 이름을,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직 모른다.
45.
가리가리군
미도리마 신타로는 지금, 명백히 당황해하고 있다. 그 원인은 지금 자신의 입술 바로 앞으로 다가온, 연한 푸른색의 아이스크림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스크림의 막대기를 쥐고 있는 작은 손의 주인 때문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당황의 늪에 빠트린 장본인, 아카시 세이쥬로는, ‘왜 먹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로 미도리마를 빤히 응시했다.
“미도리마, 녹겠어.”
기다리다 지쳤는지 아카시가 입술을 삐죽였다. 실제로도 가리가리군 아래쪽에서 소다맛 액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아카시의 손을 타고 손목 안으로까지 흘러들어가고 있었기에, 미도리마는 더욱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이스크림이 녹는 걸 싫어한다면 당장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먹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다만.”
“응? 뭔데?”
“이건 대체 어떤 의미냐?”
“어떤 의미냐니?”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걸 먹으라고 하는 거냐. 혹시 가리가리군 소다맛에 질렸다던가, 혹시 뭐가 들어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게 먼저 먹어보라고 하는 거라던가, 혹은 이미 샀는데 먹을 마음이 없어져서 내게 양보하려고 하는 거라던가. 이유는 다양하게 있을 것 아니냐.”
“……그런 거 없는데.”
그런 게 없어? 미도리마의 머리는 더욱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말한 것 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던가? 왜 아카시 세이쥬로가 내게 자신의 음식을 양보하려고 드는 거지? 아니, 이걸 ‘양보’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가? 어딜 봐도 지금 이것은 ‘한 입 먹어 봐’ 라는 의미의 제스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도리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방금 전 다 먹어치운, 가리가리군 소다맛 아이스크림의 잔재를 손에 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소다맛이 어떤 맛인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 말이다!
“뭐야-? 아카칭, 아이스크림 먹기 싫어-? 그럼 나 줘-“
그 때 무라사키바라가 끼어들었다. 자연스레 아카시의 등에 매달려-“무거워, 무라사키바라.” 아카시가 한 마디 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당연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는 무라사키바라는 다섯 개의 아이스크림을 한번에 해치우고도 아직 성이 차지 않은 듯했다. 그래. 아이스크림을 양보하고 싶다면 무라사키바라도 있을 텐데, 왜 하필 나에게?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이스크림을 양보할 생각이라면 아카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라사키바라에게 그 막대기를 건네주리라. 그러나 아카시의 반응은 이랬다.
“무라사키바라, 방해하지 마.”
방해? 뭘? -이라는 의문은 미도리마 뿐 아니라 무라사키바라도 느꼈을 터다. 하지만 무라사키바라는, 평소 그의 성격-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을 생각해 볼 때 너무나도 쉽게 아카시의 아이스크림을 포기했다. 다시 말해, 체엣- 하고 혀를 차더니 아카시의 어깨에서 떨어져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자연스레 그 자리에는 아직도 아이스크림을 미도리마 쪽으로 들고 서 있는 아카시와 더욱더 영문을 알지 못하게 된 미도리마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미도리마. 빨리 먹어.”
“어, 아…… 그, 그래.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권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미도리마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숙여 아카시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다소 녹기는 했지만 아직도 아삭아삭한 얼음 알갱이가 미도리마의 입을 소다맛으로 물들였다. 자, 한 입 먹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아카시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아카시의 다음 행동을 살피던 미도리마는, 자신이 베어 문 그 부분을 혀로 살짝 핥으며 아카시가 던진 말에 아연실색하기에 이르렀다.
“좋아. 간접 키스 성공.”
“뭐……?!”
“정말, 둔해빠졌다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하지만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확실한 말을 남기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등을 돌려 막 편의점을 나오는 무라사키바라에게 다가갔다. 다시 엄격한 주장의 얼굴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는 잔소리를 시작하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가, 간접 키스……?’
그게 무슨 뜻이었더라?
잠시 멍하니 눈을 뜨고 아카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도리마는, 방금 전 자신이 깨물어 먹은 부분을 혀로 핥던 아카시의 모습을 떠올리고 어째서인지 자신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44.
퍼코트
“미도리마.”
“아, 아카시…….”
“나, 너무 더워…….”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 세이쥬로가 천천히 자신의 얼굴로 손을 뻗었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의 영혼이 산산이 분해되어 저 멀리로 흩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아카시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일단 그의 몸을 덮고 있는 퍼 코트가 그렇다. 옷을 잘 모르는 미도리마가 보아도 분명 무척 고급스러운 재질이고, 아카시의 집안이 상당한 부자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다. 그들은 분명히 여름 합숙을 와 있었다. 여름에 퍼 코트. 정말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래, 퍼 코트 아래의 아카시의 복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복장’ 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퍼 코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살결은 분명 하나의 사실만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카시는 지금, 맨몸 위에 퍼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아, 아카시, 왜 그러냐는 것이다…… 이, 이건 대체…….”
“미도리마…….”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그 몸 위에 천천히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자연스레 아카시의 몸을 붙든 채 몸이 뒤로 쏠리게 된 미도리마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아카시의 땀방울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이 걸친 얇은 잠옷 위로 아카시의 맨살이 닿아 더욱 선명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대체 이것은 무슨 상황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깜박일 뿐인 미도리마에게, 아카시가 무언가를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미도리마…… 이거, 너무 더워…….”
“다, 당연한 것이다, 여름에 그런 걸 입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러니까 미도리마…… 이거, 벗겨 줘…….”
“네, 네가 벗으면 된다는 것이다! 왜 내가…….!”
“미도리마가…… 미도리마가 벗겨 주지 않으면 안 돼. 벗겨 줘…… 지금 당장…… 나, 너무 더워서 참을 수가 없어…….”
“아, 아카시…… 이, 이러지 말라는 것이다. 대체 왜…….”
“벗겨 주지…… 않을 거야……?”
꿀꺽. 본능적으로 미도리마는 침을 삼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도리마는 천천히 아카시의 어깨로 팔을 뻗었다. 땀에 젖은 탓인지 묵직한 퍼 코트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끌어 내리자 역시나 땀에 젖어 있는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미도리마. 간절한 듯 더욱 간지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품에 제 몸을 맡겨 왔다.
“미도리마…… 나, 사실은…….”
삐삐삐삐삐삐삐삐삐-
머리 위에서 정신없이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눈을 번쩍 떴다.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몸 위에는 누가 덮어 놓았는지 모를 이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꿈, 이었나? 이마에서 땀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미도리마는 제 바로 옆에 누워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아카시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꾸, 꿈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아카시가,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지금이 현실이고, 방금 전까지 보던 것이 꿈임을 자각하자 미도리마는 몰려오는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숙였다. 미쳤지, 미쳤어! 멀쩡히 잘 자고 있는 친구를 옆자리에 두고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까지 생각하다 말고, 미도리마는 문득 이불 안에서 느껴진 묵직한 기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것이, 누구나 사춘기 때 경험한다는 그……
“으아아아아악!”
그 감각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미도리마는, 지금 상황에서 그것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아카시가 몸을 뒤척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뜬 아카시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천천히 이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응…… 시끄러워…… 뭐야, 대체……. 누구야, 방금 소리지른 거……? 미도리마, 너야?”
“…….”
“……미도리마? 왜 그래?”
“아카시…….”
“뭐야,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무슨 일 있어?”
“……미안하다는 것이다…….”
“응? 뭐가?”
“……나는 쓰레기인 것이다…….”
“?”
43.
콩깍지
-46. 아이컨택에서 이어집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래, 솔직히 말하자.
멋있다.
“……왜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거냐. 부담스럽잖아…….”
“아, 미안해.”
“전혀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다만…….”
불만스레, 하지만 약간 붉어진 얼굴로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제법 귀여운 부분도 있다. 최근 느낀 사실이지만, 미도리마 신타로는 성실하고 늘 덤덤하며 그렇기에 재미없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잠시 같이 지내 보면 그 인상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준다. 다만 표정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다. 무뚝뚝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찌푸려진 미간이 기분이 나쁠 때면 훨씬 더 일그러지고, 기분이 좋을 때는 약간 펴진다. 그 정도의 변화이다. 때문에 미도리마의 기분을 읽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하루의 대부분을 미도리마와 함께 보내는 자신, 아카시 세이쥬로 정도가 아니면 읽어내기 힘들 정도의 미세한 변화. 그것을 안다는 사실이 무척 뿌듯해지곤 한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에게, 미도리마의 표정 변화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겠지.
“에에-? 미도칭, 재미 없어- 언제나 똑같은 얼굴만 하고- 가끔은 짓눌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
아카시 자신 다음으로 미도리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무라사키바라가 저렇게 말할 정도이니,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똑같은 답이 돌아올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만이 아는 사실인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이 감정을 자각시켜 준 장본인인 쿠로코 테츠야에게 물어보면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괜히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쿠로코 테츠야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그 정도의 관심은 품고 있지 않으니까.
“미도리마는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쪽을 더 닮았어?”
“뭐냐, 갑자기.”
“그냥 궁금해져서.”
“글쎄…… 어느 쪽을 더 닮았냐고 물어봐도 나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속눈썹 같은 건 어머니 유전이고.”
별 것 아닌 질문에 이렇게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점이 또 좋다. 물론 미도리마의 성격상 누가 물어봐도 대답은 해 주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답을 내어 주는 상대는 오직 자신뿐이다. 그것은 바꿔 말해, 미도리마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자신 외에는 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응, 아주 좋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카시는 생글생글 웃어 보였고 미도리마는 그런 웃음이 낯선 듯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너, 대체 오늘따라 무슨 일인 것이냐.”
“응? 뭐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그렇다 치고…… 사람을 불러놓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니까 신경 쓰이잖아. 평소처럼 장기를 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이냐?”
“딱히 용건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닌데.”
“돌아가도 될까.”
“그건 안 돼.”
그러면 널 빤히 쳐다볼 수가 없게 되잖아.
“뭐냐, 대체.”
“용건이 필요하다면 지금 생각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 생각하는 거냐고!”
“아, 그래. 생각났다. 안경 벗은 모습이 보고 싶은데.”
“뭐?”
정말 어이없다는 듯 미도리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것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차이를 안다. 지금 미도리마가 짓고 있는 표정은 절대로 ‘험악한‘ 표정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한 부탁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겠지. 하지만 미도리마는 결국 안경을 벗을 것이다. 아카시는 안다.
“……네가 왜 그런 걸 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천천히 미도리마가 안경을 벗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안경테를 잡아 그것을 벗겨내는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천천히 그 진가를 드러낸 미도리마 신타로의 맨얼굴을 아카시 세이쥬로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감상으로 나온 것은, 와아, 하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때도 멋지다고는 생각했지만, 안경을 벗은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름답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미도리마. 약속 하나만 해 줘.”
“약속? 무슨 약속?”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안경 벗으면 안 돼.”
“뭐냐, 대체.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너를 볼 때마다 내 심장이 어떤 식으로 뛰는지도 모를 테니. 하지만, 미도리마. 내게는 그것이 무척 중요해. 너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해지는 건 싫어.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으면 쿠로코에게 물어봐.”
“갑자기 왜 여기서 쿠로코가 나오는 거냐.”
미도리마 신타로를 바라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다고, 쿠로코 테츠야는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42.
욕정
그는 내가, 차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사귀게 된 지 반 년은 넘은 연인끼리 키스 한 번 안 해볼 이유는 못 된다고 생각해.”
미도리마 신타로의 무릎 위를 타고 올라, 아카시 세이쥬로는 인상을 쓴다. 그러나 그의 시선 바로 아래에 있는 미도리마는 그 잘생긴 얼굴에 곤란함이라는 감정을 가득 띠운 채 아카시의 재촉하는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살짝 달아오른 듯 하면서도 자신의 유혹에는 전혀 동하지 않은 듯한 그의 얼굴에는 이번에도 아카시 세이쥬로의 제안을 원만하고 둥글게 거절하겠다는 의지가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아카시 역시 오늘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도리마가 도망칠 수 없는 장소를 찾아 일부러 그의 집까지 찾아왔을 정도다. 오늘은 반드시 포옹 이상의 것을 하고 말겠다고, 지금의 아카시는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상냥하다. 흔히 그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수식어인 ‘성실함’과 ‘엄격함’ 이라는 단어는 보통 그의 딱딱한 성격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그 성실함과 엄격함을 적용하는 상대가 자신의 ‘연인’이 되면 평소의 미도리마를 아는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자상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상대의 어리광을 들어준다. 졸리다고 하면 기꺼이 무릎을 내어주고,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메일을 보내면 ‘사왔다’ 면서 다음날 아침에 건네준다. 그뿐이 아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면 주도면밀하게 데이트 플랜을 짜 오는데다가 밖에 쉽게 나갈 수 없는 아카시를 위해 변명거리까지 준비해 준다. 잔소리가 하도 많아 몇몇 농구부원들에게는 ‘선도부 교사’라고 불리는 미도리마의 평소 모습을 생각해 보면 제 연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는 사실은 지극히 놀랍기 그지없다. 그것도 그의 진인사대천명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그러한 모습을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이 상황이 뿌듯하고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분명히 최상급의 연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불만인 것이 있다면, 애정표현이다.
원래 성격이 무뚝뚝한 탓인지, 아니면 아카시가 인생 최초의 연인인 탓인지,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을 잡는다거나 그를 껴안는다거나 입술을 맞추는 등의, 흔한 연인들의 애정표현을 최대한 삼간다.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이었고, 어느새 봄이 왔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행각- 그러니까, ‘진도’는 손을 잡는 것 이상을 나아가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의 연인인지, 아니면 이 관계가 단순히 ‘친구’의 연장선상인지 알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다른 일엔 적극적이면서 어째서 나를 만지는 일에는 소극적인 거냐고 물어보았을 때 미도리마는 그저 얼굴을 붉혔을 뿐이었다. 이것을 답답하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랑받고 있다’ 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자신을 바라볼 때 무척 부드러워지는 미도리마의 눈동자나 자신의 손을 잡을 때 급격히 뛰기 시작하는 미도리마의 심장,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의 따뜻한 음성 같은 것들.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카시는 벌써 화를 몇 번쯤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교제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헤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미도리마가 자신의 앞에서 어디까지나 초연한 태도를 유지할 때면 문득 불안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연인일까?
지금의 이 교제는, 단순히 ‘친한 친구’의 연장선상일 뿐인 것인가?
“오늘은 꼭 대답을 들어야겠어, 미도리마. 넌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
“다,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해.”
“그럼, 날 만지고 싶어?”
“만지……!”
“내가 싫지 않다면, 키스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야? 안 그래?”
다소 강요하는 말투가 되어 버린 것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초조함은 단순히 몸이 외롭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이 미도리마 신타로를 좋아하는 만큼, 미도리마 신타로 역시 자신에게 빠져 있다는 확신이.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억지를 부릴 생각이었다.
“난 미도리마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가뜩이나 남자끼리고,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이런 교제는 처음이잖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그냥…… 막연하게 불안해서……..”
필요하다면, 약간의 연기까지도 할 수 있다.
어느새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아카시를 보자 생각대로 미도리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까지 미도리마에게 온갖 어리광은 다 부려봤지만, 정작 이렇게 약해지는 모습만큼은 절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진심, 그리고 그것을 약간 과장해서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미도리마가 손을 뻗어 아카시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아카시는 일부러 그 손을 살짝 내리쳐 거부했다. 고집스레 제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아카시를 보고 미도리마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보. 뭐 하는 거야. 그럴 시간이 있으면 껴안아서 달래기라도 해 보라고.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과 그간 담아두고 있었던 서운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을 때였다.
“아카시.”
왠지 화가 난 듯, 낮게 가라앉은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에 아카시가 눈물을 닦아내던 손등을 치웠을 때였다. 불쑥 다가온 미도리마의 얼굴에 흠칫 놀랐을 때 어깨를 단단히 붙들렸다. 입술이 세게 부딪혔을 때 아카시는 두 눈을 채 감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는 반대로 눈을 질끈 감아 오히려 결연해 보이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두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입술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혀의 낯선 감촉에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천천히 몸이 뒤로 기울었다. 미도리마의 배 위에 앉아 있던 자세가 급격히 흐트러지면서 침대 위로 쓰러진 아카시는, 반사적으로 반항하기 위해 올라간 손이 미도리마에게 붙잡혀 침대에 고정되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느새 맞닿은 가슴 너머로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미도리마의 것이 아니었다. 다소 비정상적일 정도로 세게 뛰고 있는 그 심장은 분명 아카시 자신의 고동이었고, 오히려 미도리마의 심장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음…… 으읍, 후…….”
가까스로 호흡을 뱉어낸 것은 입술이 떨어진 직후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카시를 내려다보는 미도리마의 얼굴은, 호흡곤란과 갑작스런 해프닝으로 붉게 물든 아카시의 얼굴과 대비되어 너무도 침착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카시는 당황했다. 방금 내가 당한 게 뭐였지? 미도리마의 표정은 왜 저렇고? 어딜 봐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처음 키스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잖아? 각종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미도리마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숨결에는 아카시가 알지 못하는, 진득한 무언가가 숨어 있어 한 번 더 움찔하고 말았다.
“미도리……,”
“이래서 싫었다는 것이다. 네게 한 번이라도 닿으면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봐.”
“…….”
“네가 좋으냐고? 만지고 싶으냐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라고 말하면서,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가슴 위에 손을 댔다. 그 손가락 끝을 통해 노골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자신의 심장 박동을 아카시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왜 나는 이렇게 평정을 잃고 있는 걸까?
“사귀자는 제안은 네가 했지만, 사실은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다. 네가 좋다고, 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감히 너를…… 주제넘다는 걸 알면서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미도리마.”
“하지만 너나 나나 아직 어리다는 것이다. 네 말대로 이런 관계도 처음인데다, 남자끼리고. 나는 너를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고, 너는…… 이런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네게 닿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조금 더 길게 서로를 알 시간이 필요해.”
어느새 미도리마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아카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제 가슴 위에 닿아 있는 미도리마의 손을 가만히 잡고, 미도리마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을 향하기를 기다렸다. 안경 너머로 흔들리는, 하지만 방금 전의 욕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미도리마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뭘 웃는 거냐.”
“아니…… 풋, 후후후……..”
“웃지 말라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기나……,”
미도리마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의 손바닥을 자신의 심장 위로 가져간 탓이었다. 쿵, 쿵, 쿵, 쿵. 일정한 박동을 유지한 채, 하지만 평소보다는 확실히 급하게 뛰고 있는 아카시의 심장을 손으로 잡기라도 한 듯 미도리마의 안색이 변했다. 천천히, 창백하게 질려가는 미도리마의 얼굴에 아카시는 웃었다.
“들리지? 내 심장 소리.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고 있어. 준비가 필요하다는 네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던 간에 그 뒤에 찾아올 상황을 나 역시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야.”
“아카시.”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미도리마. 나는 네가 좋아. 그것만이 아니야. 네가 날 만졌으면 좋겠고, 네게 좀 더 깊이 닿고 싶어. 그러니까 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너라면, 네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으니까.”
그러니까.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못하면 그의 이성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방금 전의 키스…… 한 번만 더 해 줄래?”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웃으면서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미도리마의 손이 자신의 가슴 위에서 떨어져 나가, 어깨를 단단히 붙드는 것을 느꼈다. 등에 소름이 돋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뒤에 다가온 입술은 너무도 부드러웠고 거칠게 파고드는 혀는 너무도 뜨거워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처음으로,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욕정했다.
41.
휴일
“미도리맛치는 보통 휴일에 뭐 하고 지내요?”
키세 료타가 눈을 빛내며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약간 곤란해졌다. 휴일. 결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엔 달갑지 않은 주제이다. 괜히 시선을 피하며 미도리마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있는 쪽을 흘깃, 한 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받은 장본인은 분명히 ‘도와 달라‘는 미도리마의 말뜻을 인식했을 텐데도 태연하게 옆에 선 니지무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남의 휴일을 전부 날려버린 사람이 누군데.
“미도리맛치, 제 말 듣고 있어요?”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줘요-“
“별 거 없으니까. 음악을 듣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게 전부란 것이다.”
“에이, 뭐야. 재미없어.”
“바로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으니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풋,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발신원은 물론 아카시 세이쥬로가 서 있는 쪽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속으로만 불만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는 휴일에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었다. 키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 그 옆에 늘 아카시 세이쥬로가 있었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저 입 싼 녀석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간……,’
“기껏 비밀로 하고 있는 관계가 들통난다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
으악, 하고, 미도리마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느새 아카시가 코앞으로 다가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옆에 서 있었던 키세는 어느새 쿠로코와 아오미네에게 달려가 평소처럼 원온원을 외치고 있었다.
“너는…… 언제 독심술을 배웠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가끔 생각하는 걸 그대로 입 밖에 낸단 말이야. 방금 전에도 그랬던 거 몰랐어?”
“뭐, 뭐라고?! 저, 정말이냐?!”
“아니, 거짓말.”
이 녀석을 그냥……!
처음으로 아카시가 얄미워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원망하는 눈초리를 가득 담았다. 그 시선에도 아카시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깊게 한숨 쉬는 미도리마에게 아카시가 장난스럽게 또 한 번 복장이 뒤집어지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나하고 함께 보내는 휴일은 재미없어?”
“……그랬으면 당장 널 집으로 돌려보냈을 거다.”
“아, 그건 다행이네. 갑자기 쫓겨나지 않도록 몸 바쳐 노력할게.”
“뭣…… 아카시!”
아카시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미도리마가 새빨개진 얼굴로 아카시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을 때 아카시는 이미 후후후, 하고 짧게 웃으면서 미도리마의 곁을 떠난 뒤였다. 정말 정신없게 만드는 녀석이다. 무라사키바라 쪽으로 총총 걸어가는 아카시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말고, 미도리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 되겠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그 말, 반드시 책임지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결코 아카시에게는 들리지 않을 결심을 속으로 하면서, 미도리마 신타로는 다시금 생각하고 말았다.
아, 나의 연인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40.
한밤중의 전화
“보고 싶어, 신타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목소리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당장 널 만나러 나가기라도 하라는 거냐.”
그 목소리에 담긴 퉁명스러움에 아카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대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순간 기대했지만, 핸드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카시 세이쥬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갑네, 신타로는. 내가 라쿠잔으로 가게 된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나로서는 네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니까. 신타로를 내가, 아주 많이.”
“정말 그런 거라면 갑자기 이런 전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타로, 지금 날 민폐라고 생각하고 있지?”
차마 그렇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전쟁이다. 그 말을 했을 때의 아카시의 반응도,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집착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 반응에 대한 자신의 분노도, 결과적으로 일어나게 될 말싸움도, 그 말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느끼게 될 비참한 감정도, 미도리마는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아카시 세이쥬로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일을 스스로 크게 키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신타로의 생각은 대충 알아. 너를 적이라고 선언했으면서, 그 증거로 너와는 다른 학교에서 너와 다른 팀에 소속되기로 결정하기까지 했으면서, 네게 이런 말을 계속해서 하는 내 진위를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다.
“아니, 아니지. 오히려 파악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아?”
무척 정확해서, 굳이 수정을 해 줄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신타로는 날 잊지 못하겠지. 너는 날 좋아하니까. 이렇게라도 나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테니까.”
“……그건 네 바람일 뿐인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그래, 그렇지 않다. 이건 오히려 내 고집에 가깝다. 절대로 네게 다시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이런 상황에 처하고서도 아직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꼭꼭 숨기고만 싶은, 나의 고집이자 바람에 불과하다. 네 말이 모두 맞다, 아카시 세이쥬로. 너는, 변해버린 너는,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도저히 차지할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리고 만 너는,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애틋함을 전해주고 있다. 너와 함께 한 3년의 추억이 있는 이상,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테지.
“……늦은 밤에 실례했어. 이만 쉬도록 해. 다음에 만날 때는 코트 위가 되겠네.”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한걸. 그래도 연인인데 말이야.”
잘 자, 라고 말하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전화를 끊었다. 연인. 귓가를 맴도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미도리마는 가만히 그 단어를 중얼거려 보았다. 연인이라고 했지, 아카시. 정말로 너와 나는 그러한 사이인가? 그런 단어로 너와 나의 관계를 감히 정의 내려도 좋은 것인가? 네가 변해 버리고, 내가 너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만 끝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답은 ‘No’ 다.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천천히 버튼을 조작해 방금 전 녹음한 대화를 재생하면서, 미도리마 신타로가 듣는 것은 오직 한 마디였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신타로. 보고 싶어.
“……보고 싶다, 아카시.”
내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너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인사를 다해, 너와 마주할 것이다.
39.
갑작스런 충동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이러고 싶었어.”
그것은 갑자기 사람의 품에 뛰어들어 와락 안긴 사람이 할 만한 대사가 아니라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을 미도리마가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든 것이 이런 행동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뇌, 혹은 이성이라는 기관이 너무 많은 정보 처리량을 한탄하며 터져 버렸던 것이다. 물론 미도리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장본인-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의 등을 세게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미도리마의 가슴팍에 무언가를 바라듯- 그래, 마치 미도리마 쪽에서도 마주 안아 주기를 바라는 듯 얼굴을 살짝 문질렀을 뿐이었다. 덕분에 미도리마는 어정쩡하게 의자 옆으로 내리고 있던 손을 가까스로 아카시의 어깨로 옮길 수 있었다.
“미도리마의 와이셔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 라벤더야?”
“아, 으응. 어머니가 그 향을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난 미도리마라면 소나무 향 같은 게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도 꽤 좋네…….”
품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카시의 목소리는 유난히 가라앉은 데다 또 끝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도 쉽게 읽을 수 없는 아카시의 생각을 더욱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미도리마는 가만히 아카시가 말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갑자기 이러고 싶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순히 미도리마의 지론이었지만, 어떤 사람이 특정 행동을 취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이성적인 인간의 표본일 경우에는. 하지만 그 원인은 도저히 미도리마의 머리로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카시에게 굳이 질문을 던져 이 시간- 적어도 아카시 쪽에서는 ‘편안하다‘ 고 느끼고 있을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정했다.
“편안한…… 거냐?”
“응. 무척.”
“……그럼 좀 더 이러고 있으라는 것이다.”
“으응.”
그렇게 대답하고, 아카시는 마치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미도리마의 품에 그 얼굴을 살짝 비볐다. 그러더니 곧 색색대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피곤했던 건가. 가만히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도리마는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아카시, 나는, 네가 이렇게 내 품에서 쉬고 있는 이 순간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갑작스럽고, 평소의 네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아니……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니까 더욱, 그런 셈인가…….’
사실, 아카시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든 좋다. 그저 자신을, 미도리마 신타로를,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존재로 생각해만 준다면. 그렇다면 이런 일 정도는 앞으로 몇 번이고 일어나도 좋은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렇게 아카시 세이쥬로를-
38.
자해 Side. M
피 냄새가 난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카시 세이쥬로의 손목을 가린 리스트밴드를 노려보았다. 새까만 색이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이 냄새의 진원지는 거의 50%에 가까운 확률로 저것이다. 그리고 아카시는 그 손목을 자연스레 움직여 패를 하나 옮기고는 생긋 웃었다.
“자, 다음은 미도리마 차례야.”
그 미소를 보자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리 직설적 화법의 대가인 미도리마 신타로라고 해도 저렇게 웃는 아카시에게 다짜고짜, 왜 네게서 피 냄새가 나는 거냐고 물어볼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미도리마는 그 피 냄새에 대해 아카시를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고 얌전히 아카시의 수에 대응하는 것을 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도리마의 뇌는 판단하고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해를 하고 있다.
사실 그것을 깨달은 지는 꽤 되었다. 아카시의 필통 안에 들어 있는 커터 나이프가 늘 녹슬어 있다는 점이나, 원래는 새하얀 색을 유지해야 할 도신에 께름칙한 냄새를 풍기는 갈색 얼룩이 묻어 있다는 점이나, 결정적으로 아무도 없는 탈의실 안에서 아카시가 구급상자를 옆에 둔 채 커터 날을 제 손목에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점 등등, 오히려 왜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의 증거들이 여기저기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아카시는 그 사실을 남에게 그다지 숨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탈의실 안에서 자해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저 녀석이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는…… 뭐,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마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여러 가지 ‘사정’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부자간의 대화가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는 가정 사정이라던가,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한없이 완벽해 보이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더욱’ 완벽하도록 몰아붙이는 원흉이라던가, 자유분방하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 같은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원흉에게 얽매어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라던가, 그 외에도 남에게 설명하자면 한참의 시간을 필요로 할 그런 것들. 그렇기에 미도리마는 굳이 아카시가 그 이유에 대해 자신에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카시의 자유인 것이다. 제아무리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 3자’ 로서 아카시 세이쥬로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때문에 필연적으로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아카시.”
“응? 왜?”
하지만, 제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정도의 간섭은 해도 되겠지.
“……상처 소독은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미도리마가 조심스럽게 꺼낸 ‘간섭’의 말에 아카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발끈하지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도, 그렇다고 그 말에 놀라지도 않은 채, 가만히 미도리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응, 고마워.”
그 감사의 말 한 마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어버린 것일까.
미도리마는 의문을 품은 채 자신의 패를 움직여 대국을 진행시켰고, 아카시 역시 가만히 다음 수를 두면서 미도리마의 의도를 받아들였다.
지금의 그들은 겨우 그런 관계일 뿐이었다.
37.
패밀리 레스토랑
“이 레스토랑, ‘오늘의 추천 요리’ 같은 건 없어?”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렇게 말하며 메뉴판을 가리켰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주문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두 눈을 아무리 깜박여 봐도 아카시가 가리키는 것은 메뉴판이었고, 아무리 되새겨 봐도 방금 전 그가 말한 단어는 ‘오늘의 추천 요리’ 였다.
“……고작 패밀리 레스토랑에 왜 ‘오늘의 추천 요리’ 같은 게 있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레스토랑이잖아?”
“여기는 호텔 고급 레스토랑과는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제야 아카시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메뉴판을 바라보는 눈은 아직도 신기한 것을 보고 있는 양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실수다. 미도리마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를, 길거리 어디에나 있는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 데려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런 제안을 받아준 것부터가 잘못이었을지도…….’
미도리마가 말하는 ‘그런 제안’ 이란, 오늘 방과 후 부실에서 아카시가 갑작스레 꺼낸 이야기를 의미한다. 다섯 번 연속으로 이기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시작된 장기 내기는 언제나처럼 아카시의 압승이었고, 그 대가로 아카시가 꺼낸 ‘소원’은 바로 이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자주 가는 음식점에 데려가 줘.”
대체 ‘보통 사람’의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묻고 싶어지는 제안에 미도리마는 아연실색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고귀한 분위기나 그가 사용하는 최고급 생활용품들만 보아도 알겠지만, 상당한 부잣집 도련님이다. 미도리마 역시 어딜 가서 돈이 부족해 보이는 인상이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와 그의 뒤에 있는 아카시 가문의 부는 미도리마 집의 그것과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냥 평범하게, 또래 학생들이 자주 가는 곳으로 데리고 가면 되는 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마지바였지만, 그 선택지는 곧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손으로 햄버거를 잡고 먹는 모습이나 감자튀김을 입에 넣는 모습 같은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 뒤에도 라멘이나 규동 같은 ‘평범한’ 식사 메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아카시의 평소 생활을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결국 미도리마는 가장 평이하면서도 아카시의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택했던 것이었으나- 글러먹었다. 벌써부터 ‘오늘의 추천 요리’ 같은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다니.
“신기하네. 햄버그 스테이크가 고작 천 엔 대라니.”
저것 봐라.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녀석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단 말인가. 물론 햄버그는 대중적인 음식이고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천 엔이라는 금액은 평범한 중학생에게는 상당한 지출이다. 물론 아카시에게 햄버그 하나를 못 사 줄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안 좋지는 않았으나, 새삼스레 이 자리에서는 아카시 세이쥬로와 자신이 사용하는 금액의 단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자각하게 되어버린다. 내가 현금을 얼마나 가져왔더라. 키세가 나눠 준 쿠폰북 같은 걸 사용하면 왠지 비굴해 보일까. 마치 잘 보이고 싶은 상대와 처음 데이트하는 순진한 총각처럼,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보고 있는 ‘고가’의 음식들을 보며 지갑 안의 현금을 필사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보통 뭘 자주 먹어?”
“글쎄, 나도 자주 오는 편은 아니니까. 가끔 여동생이 뭘 먹고 싶다고 하면 가족끼리 오는 정도다.”
“그래? 그럼 여동생은 뭘 자주 먹어?”
“그 애는 아직 어리니까. 이쪽에 어린이 메뉴가 있다는 것이다. 주로 그걸…….”
“아, 이거 맛있어 보인다.”
사람이 말을 하고 있으면 끝까지 들으라는 것이다! -라고, 평소처럼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가리킨 메뉴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방금 전처럼 음식의 가격이 부담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카시가 가리킨 음식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준비되어 있는 대부분의 메뉴 중에서도 그나마 싼 가격의 메뉴였다.
‘어린이 햄버그’, 총 가격 440엔.
“……설마, 이걸 먹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돼?”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
네 이미지에 너무 안 어울린단 말이다.
앙증맞은 강아지 모양의 접시 위에 반쪽짜리 햄버그와 감자튀김, 오므라이스, 그리고 약간의 야채가 정성스레 담겨 있는 그 메뉴는 괴리감으로 따지자면 햄버거만큼이나 심각했다. 애초에 남자 중학생 둘이서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왜 어린이 메뉴 같은 걸 주문해야 하는 거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눈앞의 아카시가 너무도 신난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고, 결국 미도리마는 한숨을 푹 쉬고 종업원을 부르기 위해 벨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종업원이 와 주는 거야? 역시 레스토랑은 레스토랑이네.”
“……미리 말해두지만, 고급 레스토랑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보 같긴. 그럴 리가 없잖아. 일부러 ‘평범한 음식점‘을 찾아 들어왔는걸.”
어련히 그러시겠지요.
“주문은 정하셨나요?”
“새우 그라탕과 이…… 어, 어린이 햄버그 하나…… 그리고 드링크 바 2인으로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새우 그라탕과 어린이 햄버그, 드링크 바 2인 맞으십니까?”
굳이 확인할 것도 없는 메뉴니까 제발 어린이 햄버그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친절하기 짝이 없는 종업원은 잠시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던져 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저 웃음은 그냥 서비스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결코 날 비웃는 것이 아니다…… 산산조각 난 멘탈을 필사적으로 주워 모으는 미도리마의 앞에서 아카시는 눈을 또르르 굴리며 메뉴를 보고 있었다. 대체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벌써부터 두려워진 미도리마는 잔뜩 긴장한 채 아카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그런데 드링크 바는 뭐야? 디저트 메뉴에는 없는데?”
상상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주는 말에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아니, 아니, 침착해라, 미도리마 신타로. 아카시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엔 한 번도 와 본 적 없다. 드링크 바를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아카시의 등 뒤에 설치된 드링크 바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원하는 음료를 마음껏 골라 마실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는 것이다.”
“뭐야. 저기 있는 거, 서비스가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고급 레스토랑 수준의 서비스를 원하면 곤란하다고 했잖아.”
“기대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네. 그럼 잠시 다녀올까…… 저건 어떻게 하면 돼?”
“음료 주변에 컵이 있으니까 아무거나 따라 오면 된다는 것이다.”
“저게 말로만 듣던 셀프 서비스란 건가…… 알았어. 다녀올게.”
왠지 신이 난 얼굴로 아카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뜬 발걸음으로 드링크 바 앞에서 뭘 마실지 고민하는 아카시를 보면서 미도리마는 안경을 벗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푸우- 하고 짙은 한숨을 내뱉는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이젠 뭐든 좋으니 종류별로 다 마셔보겠다면서 음료수를 잔뜩 가지고 오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타협만 맴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기본 지식이 저 정도로 없었을 줄이야. 오늘의 식사 자리가 무조건 즐거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심각하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상식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 전개라면 식사 전에 에피타이저가 나오지 않는 것과 식사 후에 디저트가 나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역시 그런 의문이 전혀 들지 않을 만한 가게를 택하는 게 좋았을까.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늦어?’
설마 정말 종류별로 음료수를 다 뽑아 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기분에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시에게로 다가갔다. 커피 머신 앞에 선 아카시는 컵에 가득 찬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음료 다 나왔다고. 대체 무엇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는 거냐. 그 직후 아카시의 옆으로 다가선 미도리마의 눈에도 아카시가 보고 있던 광경이 들어왔다.
다정하게 마주앉아 있는 3인 가족.
어린이 햄버그 접시를 앞에 두고, 어린이용으로 준비된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나눠 든 어린아이. 아이의 옆에 앉아 입술을 휴지로 닦아 주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 그 맞은편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 동화책 삽화에나 나올 법한 그 아름다운 광경에, 어째서인지 아카시 세이쥬로는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미소는 너무도 씁쓸해 보여서, 미도리마는 그만 말을 거는 것도 잊어버렸다.
“……과연. 이래서 ‘패밀리‘ 레스토랑이구나. 참 좋네, 저런 풍경.”
“아카시.”
“처음 미도리마에게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 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참 좋은 어감이라고 생각했어. 왜일까. ……내가 평생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서, 어울리지도 않게 부러워했던 걸까?”
응? 미도리마. 작게 웃으면서 아카시가 미도리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순간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의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넓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 그의 앞에 놓인 것은 그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 햄버그의 접시로, 아카시는 그것을 앞에 둔 채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의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한, 쓸쓸한 광경.
“……패밀리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굳이 가족끼리 오는 장소만은 아니란 것이다. 혼자서 오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고, 친구들이나 연인끼리 오기도 하지.”
“그래?”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저런 풍경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여기 점원들도 그럴걸.”
그러니까, 아카시 세이쥬로가 저런 풍경을 부러워하며 쓸쓸하게 미소 지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미도리마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아카시 역시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내린 커피 잔을 들고 그의 손을 잡아끌어 그 정겨운 풍경에서 아카시의 시선을 떼어놓았다. 그들이 다시 테이블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가지고 왔고, 아카시의 앞에는 어린이 햄버그의 접시가 놓였다.
그 어색한 풍경 맞은편에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앉아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엽네, 이 접시.”
“맛도 있을 거다.”
“응, 맛있어 보여. 잘 먹겠습니다.”
웃으면서 아카시는 플라스틱 포크를 잡았다. 굳이 그걸 사용해서 먹지 않아도 되는데-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카시가 혼자 외롭게 어린이 햄버그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여, 미도리마는 제 몫의 그라탕 접시를 끌어당겼다.
“다음에.”
“응?”
“다음에 또…… 같이 오자는 것이다.”
“……응.”
36.
아직은 너무 이른 결혼반지
테이코 중학교로 가는 길에는, 여느 학교로 가는 길이 그러하듯, 작은 강이 흐르는 곳이 있다. 이름 모를 들꽃이 잔뜩 피어 있고 그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한가한 느낌의 부지.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그 날의 부담을 천천히 비워 없앤다거나 풀밭에 누워 여유를 만끽한다거나 하는 로맨틱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이곳에 가고 싶다고 하면 늘 따라와 주는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가 처음 그 장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런 곳을? 그러한 의문이 어째서 미도리마의 얼굴에 떠오르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과도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범인들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때문에 고귀한 존재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하지만 아카시는, 남들이었다면 귀찮은 감상이라고 생각했을 미도리마의 그 환상만큼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환상이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아카시 세이쥬로가 특별한 존재라는 증거라 할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어느 날 미도리마 신타로는 들꽃을 몇 송이 꺾어 잠시 주물거리더니, 그 결과물을 들고 아카시에게 다가왔다. 손을 내밀어 보라는 말에 그렇게 한 아카시는 제 손가락에 딱 맞는 사이즈의 꽃반지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끄러웠던지 미도리마는, 여동생에게 자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안경을 손가락으로 끌어올렸다.
「뭔가…… 굉장히 귀여운 걸 만들었네.」
「시끄럽다.」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해?」
「방금 말했잖아. 여동생에게 자주 만들어 준다고.」
「흐응…… 다른 여자에게 선물했던 물건을 나한테도 똑같이 만들어 준 거구나.」
「그,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동생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히던 미도리마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그 상대가 여동생이던 어머니이던 관계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모두 ‘아카시 세이쥬로를 제외하고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중요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는 없는 그러한 존재가 미도리마에게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아카시 세이쥬로가 얼마나 깊게 질투하고 있었는지를.
「……어쨌든, 이건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래? 어디가?」
「여동생에게 만들어 주는 것은 꽃을 잔뜩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봐라. 가운데에 꽃이 딱 하나 있잖아.」
「으음…… 그 설명만 들으면 여동생에게 만들어 주는 게 더 정성을 다한 것이라는 뜻처럼 들려.」
「너는 대체 왜 만사를 그렇게 삐딱하게 보는 거냐…….」
그야 네 여동생에게 질투하고 있기 때문이지- 라는 말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애매하게 웃었고, 미도리마는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결혼반지에는 보석을 잔뜩 박지 않는 법이란 것이다.」
「……확실히 본 적 없어…….」
「그렇지? 그러니까 그런 거다.」
「하지만 이거 시들거나 하지 않아? 말라서 비틀어지거나, 부서지거나 하면?」
「그 때는 또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진짜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그날의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운 말을 잔뜩 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아카시 역시 왠지 부끄러워졌었다. 언제나 솔직하고, ‘돌직구‘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미도리마 신타로. 그런 주제에 아카시가 얼굴을 붉히기도 전에 먼저 새빨개져서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하던 미도리마 신타로. 당시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고, 그에게 사랑받고 있는 자신은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꽃으로 만든 반지는 오래가지 않는다.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관계, 역시-
“……신타로는 거짓말쟁이야.”
너와 나는 이제 이걸로 끝이라고, 관계의 끝을 선언한 사람은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갑자기 아카시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연인이 되어 달라고 말했던 날처럼, 이별을 선언하는 미도리마의 목소리도 갑작스레 아카시를 찾아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눈에는 미래가 보였으며, 그 미래 안에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영원히 함께하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완전히 그에게 반기를 들고 떠나 버린 쿠로코 테츠야를 제외하면 테이코 중학교의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변화를 미도리마 신타로는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그 사실은 그를 지독히 지치게 만들었다. 아카시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원망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아카시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미도리마 신타로만큼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떠날 것이었다면, 이렇게 지독히도 아픈 감정을 아카시에게 주어서는 안 되었다-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 신타로…….”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 부지에서, 아카시는 웃었다. 그 웃음을 지켜봐 줄 상대는 이제 그의 옆에 없었고, 그 사실은 처음으로 아카시 세이쥬로를 무척 비참하게 만들었다.
35.
디저트
방금 전부터 아카시 세이쥬로는 무척이나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핑크색의 작은 캔을 바라보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안절부절못한 채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라는, 다소 비겁하게 들리면서도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변명 정도는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도 맴돌고 있었지만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음식을 입에 대고 말았다는 아카시의 표정을 보면 그 말을 하는 순간 원망 가득한 눈초리가 제 얼굴을 찌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결국, 미도리마는 입을 다문 채 아카시가 저 표정에 가장 걸맞는 반응을 입 밖으로 내뱉기를 기다렸다.
“최악…….”
그래, 저 반응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최악’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건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은, 어쨌든 지금의 아카시에게서 나올 수 있을 만한 반응이기는 했다. 제아무리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아카시 세이쥬로라 한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다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이제 거의 해탈한 눈빛으로, 창백한 얼굴로 입을 막고 있는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카시 쪽은 미도리마처럼 모든 것을 달관한 태도로는 있을 수 없었던지, 살짝 불만스런 눈초리로 미도리마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맛이 없었냐는 것이다.”
“……미도리마의 미각은 이상해.”
“윽……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하니까 이상하다고 말했을 뿐이야.”
돌려줄게, 하며 아카시가 자기가 마시던 캔을 그대로 미도리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뽑아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 버릴 수는 없다는, 눈물 나게 고마운 태도였다. 미도리마는 낮은 한숨과 함께 단팥죽 캔을 돌려받았다. 아카시는 여전히 입안의 오묘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지 굳어진 표정을 영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굳이 단팥죽을 마시고 싶다고 한 거냐.”
“미도리마가 늘 맛있게 마시니까 괜찮을 줄 알았지 뭐.”
“다른 걸로 뽑아다 줄까.”
“음…… 괜찮아. 참아볼게. 다른 걸 마시면 단팥죽한테 지는 기분이 들어서 싫어.”
이런 것에 승패를 따져봐야 의미 없다는 지극히 정당한 반론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미도리마는 간신히 그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차라리 사준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혀를 차며 단팥죽을 한 모금 삼킨 미도리마는 캔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카시의 얼굴을 보고 왠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단팥죽이 마시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아카시도 딱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는 얼굴. 그리고 그 호기심을 미도리마라면 해결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가득찬 시선.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려던 미도리마는 자신이 입술을 떼기도 전에 아카시가 제 목에 매달리는 것을 느끼고 혼비백산했다.
“자, 잠깐, 아카……,”
아카시의 입술이 미도리마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강하게 부딪혀 온 입술과 입안을 파고든 말캉한 감촉에 미도리마는 캔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야만 했다. 짧은 듯 길었던 키스가 끝나고 천천히 입술을 뗀 아카시는 아직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미도리마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이렇게 먹으면 꽤 맛있네.”
“너…….”
“잠깐, 한 모금만 더 마셔 볼래? 더 먹고 싶어.”
아카시의 눈매가 미도리마를 유혹하듯 살짝 휘어졌다. 정말 고약한 녀석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서는 자신의 반응이 어떤지 보려는 것이다. 누가 질 줄 알고. 미도리마는 손에 든 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아직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겨두고서 캔 안의 내용물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빈 캔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와 함께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방금 전 아카시가 한 것보다 강하게, 거칠게 맞부딪혀 온 입술에 아카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이 보였다. 아카시의 목을 감싸고 깊게 입술을 맞췄다. 자신에게 전염된 것일까. 아카시의 입 안에서도 단팥죽 맛이 났다.
“음, 응…….”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색기 어린 목소리에 몸 안의 어떤 기관이 반응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입술을 뗐다. 살짝 얼굴을 붉힌 아카시는, 그럼에도 부끄러움보다는 ‘기분 좋다‘는 솔직한 감정만을 드러낸 채 미도리마를 향해 다시 웃어보였다.
“맛있나?”
“응, 맛있어.”
한 번 더 할까?
붉게 물든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제안을 미도리마가 거절할 리 없었다.
34.
햇볕
테이코 중학교의 옥상은 원칙적으로 출입할 수 없다. 학원제 기간이거나 하는 특수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은. 특히 시험기간의 경우에는, 레벨이 높기로 유명한 시험에 대한 부담감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이유로 더욱 엄중히 감시받기 마련이다. 그렇게 잠긴 옥상 문의 열쇠는 수위실에 하나, 교무실에 하나가 있으며 그 모두가 교사들의 엄중한 관리 하에 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이냐…….’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의 옆에서 대자로 누워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분명 이 녀석이라면 수위든 교사든 구슬려서 열쇠를 가져오는 것쯤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교사 전원의 신뢰를 받고 있는데다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으니 자살소동을 일으킬 염려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출입금지인 옥상에 학생이 들어와 있는 풍경이라니. 불만이 많은 녀석이 보면 특별대우라느니 편애라느니 하는 소리가 나올 여지가 충분한 상황을 태연자약하게 연출하고 있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다소 질린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이야?”
“딱히 그런 표정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짓말.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표정이었는걸.”
“아니라고 했잖아.”
“뭐, 상관없어. 불만 한두 마디 정도는 들어줄게. 이렇게 햇살이 좋은걸.”
웃으며 아카시가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저 멀리 떠 있는 태양을 한 손에 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아니, 아카시 세이쥬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던 이카루스는 날개가 타 버려 떨어졌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의 등에 돋아날 날개는 태양조차 감히 태우지 못할 만큼 강력할 것이니까.
“가끔은 이런 일탈도 괜찮네. 따뜻해서 기분이 좋아. 여름이 되면 지나치게 뜨거워지겠지만.”
“지금도 뜨겁기는 뜨겁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아직 ‘기분 좋다’ 수준이야. 자, 미도리마도 누워 봐.”
“자, 잠깐! 잡아당기지 말라는 것…… 으악.”
아카시의 손에 이끌려 쓰러지듯 바닥에 누운 미도리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쿡쿡대며 웃는 아카시에게 눈을 흘긴 채 하늘을 보고 누웠다. 전신을 뜨겁게, 동시에 상냥하게 비추는 햇살은 아카시가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기분 좋은 느낌을 미도리마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조금 분하기는 하다. 이런 것도 아카시의 말대로라니. 그런 불만스런 생각도 들기는 했으나 잠시였다. 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테이코 중학교에서의 1년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날들 속에서 겨우 맞은 휴식인 것이다. 출입금지 공간인 옥상에 무단으로-아카시가 뭐라고 말하고 열쇠를 빌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미도리마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들어온 것은 확실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도리마는 간만에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까지 부정할 정도로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카시도 그걸 알고 있기에 미도리마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일까? 슬쩍 옆을 돌아보자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띄게 단정하고 온화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아카시의 얼굴. 이런 아카시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상대가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에 미도리마는 이유 모를 기쁨을 느꼈다.
“기분 좋아? 미도리마.”
“……뭐, 부정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뭐였더라? 햇살이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사람을 죽이고 싶어졌다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프란츠 카프카의 ‘비밀’ 말이냐.”
“아, 그래. 그거. 왠지 그 심정도 이해되지 않아?”
“그건 소설 이야기지. 아무리 햇살이 따뜻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고 싶어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뭐야, 미도리마는 감수성이 메말랐어.”
“햇살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하는 녀석에게서 감수성이 어쩌고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만.”
“그러니까 기분을 말하는 거야, 기분. 정말 사람을 죽이고 싶어질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단번에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할 생각인가 싶어 따라 몸을 일으킨 미도리마는, 어느새 난간 가까이로 다가가는 아카시를 보고 문득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저 녀석 설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미도리마가 한 가지의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는, 이미 아카시가 몸을 난간 너머로 내밀기 시작한 뒤였다.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미도리마는 황급히 아카시에게 달려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빠르게 아카시의 몸을 뒤로 잡아끈 반동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옥상 바닥에 널브러졌다.
“너, 너라는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뛰어내리기라도 할 줄 알았어?”
“당연하다는 것이다!”
“푸후후……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취하니까 하는 말 아니냐!”
“난 그 정도로 바보 같지 않아.”
“알아! 알고 있지만, 사람을 겁나게 하는 행동은 삼가란 것이다!”
“……미안.”
낮게 중얼거리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전까지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려고 하던 사람의 태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약한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차마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 옷깃을 세게 붙잡고 품에 파고드는 아카시를 느끼자마자 심장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게 뛰기 시작했기 때문도 있었다.
“아, 아카시. 일단 이거 놓고……,”
“미안,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줄래?”
“하지만…….”
“오래 붙잡고 있진 않을 테니까. 부탁해.”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들어줘야만 한다. 미도리마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카시가 제 품에 얼굴을 묻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는 분명 아카시에게도 들렸을 터인데, 아카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그제야 처음으로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실제로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어보는 게 좋을까.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곳을 찾아왔으며, 어째서 나를 같이 데리고 왔느냐고.
‘……아니야, 가만히 내버려 두자……‘
아카시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미도리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햇살이, 유난히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미도리마 신타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생각한다.
옥상에 올라왔을 때 분명 미도리마 신타로는 이카루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너무도 높고 고고한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날개가 모두 타 버려 추락한 자. 그는 과연 이카루스의 그 모습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신을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을까. 아카시 세이쥬로는 결코 추락하지 않는, 아니, 추락할 수 없는 태양이다. 그것은 아카시 가문에 태어난 자의 숙명이다. 아직 그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숨통을 하루하루 어떻게 조르고 있는지를 모르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과연 그 모든 진실을 알고서도 아카시에게 이기겠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 답은 알고 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결코 도전하는 것을 그만두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인사대천명.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소년의 모든 것이다. 그의 도전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목숨을, 삶의 가치를, 무시무시할 정도의 박력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아무리 햇살이 따뜻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고 싶어질 리 없다는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러나 아카시 세이쥬로의 머릿속에는, 그의 두 눈에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오는 그 날이 보이고 있었다. 언젠가 미도리마의 잘 벼린 칼날은 아카시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덤벼들 것이며, 아카시 자신은 그 칼날을 응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도전하는 자와 도전을 받는 자의 숙명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만약 네가 내 심장을 꿰뚫어 준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운명을 거스르는 것을 생각해 버린다.
언젠가 정말로 그런 날이 와서, 심장에서 피를 흘리며 미도리마 신타로의 품에 쓰러진다면- 그때는 가슴 벅찬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도리마…….’
정말 좋아해.
언젠가 내 숨통을 끊어놓으러 올 너를.
33.
안경
“다시는 벗지 마, 알았어?”
“아, 알았다는 것이다…….”
대체 아카시 세이쥬로는 왜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 미도리마 신타로는 생각한다. 잔뜩 토라진 얼굴로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손에 쥐어 준 것은, 방금 전까지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 위에 올라와 있던 미도리마의 안경이었다. 즉 그것을 먼저 벗긴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말이 되지만- 어째서인지 그 갑작스런 행동을 한 본인이 화를 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그런데 대체 뭐냔 말이다, 이 뒤바뀌어 버린 입장은.
“저…… 아카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만…….”
“뭔데.”
“내 안경은 갑자기 왜 벗긴 거냐?”
“…….”
그 질문에 아카시는 곤란하다는 듯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난생 처음이다. 아니, 처음인 수준이 아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왠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귀가 붉게 물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마치 머리칼의 색이 귀로 옮겨온 것처럼 아카시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것은 미도리마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미도리마는 따져 묻는 것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재촉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아카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로 써.”
“뭐?”
“안경, 도로 쓰라고. 영 다른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벗기질 말라는 것이다.
점점 미심쩍은 시선을 아카시에게 던지며 미도리마는 도로 안경을 썼다. 자,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말에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미도리마는 방금 전보다 더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귀만 붉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카시의 얼굴 전체에 드러난 붉은 빛은 미도리마는 물론 아카시 본인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분명 안경을 다시 썼는데도 아카시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도리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큰일이다. 저 얼굴이 전염된 모양이야. 미도리마는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슬쩍 손으로 쓸어 보면서, 곤란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카시를 딱 한 줄로 평가내리고 말았다.
귀엽다.
32.
자기부정
낡디 낡은 여관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먼지 냄새 나는 이불을 그 위에 깔고, 자신을 향해 팔을 벌려 보이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연인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긴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을 연인은 다정하게 끌어안아 준다. 어리광을 부리듯 목에 매달리면 크고 따스한 손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좋아해. 사랑해. 품 안에 안긴 채 자신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러한 말로 전하고, 연인은 그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몸을, 정말로 소중히 쓰다듬어 준다. 따스한 손. 상냥한 연인. 그 모든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자신-
요즘 아카시 세이쥬로는 매일, 그런 꿈을 꾼다.
“안녕, 신타로.”
“……그래.”
‘반가움’ 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인사에 답하고, 차갑게 그에게서 등을 보였다. 다소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 저 먼 곳으로 멀어져 가는 미도리마의 등을 아카시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크고 넓고, 분명 단단할 미도리마의 등. 요즘 아카시는 그 등을 볼 때마다 그리로 뛰어들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자신이 그렇게 했을 때 미도리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상, 도저히 그런 행동을 가벼운 마음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것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 찌푸려지는 미간, 냉정하게 자신의 몸을 밀쳐내는 손.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 ‘선언’을 정말로 실행에 옮길 생각이라면, 그러한 수순은 비단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선언’.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와의 ‘트러블’-물론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카시 한 사람뿐일 것이지만-이 있은 지 며칠 뒤,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부실을 찾았다. 미도리마의 뒤를 따라 막 부실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감히 자신을 오라가라 하는 미도리마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카시였지만, 창문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얼굴- 특히, 굳은 결심을 하고 있는 그 눈동자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딱히 그 눈동자에 압도당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들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지금부터 무슨 말을 꺼낼 것이며, 그 말을 하는 미도리마의 심정조차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헤어지자는 것이다, 아카시.」
그리고 그 말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예상 그대로였다. 다만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감히, 신타로 주제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결심을 굳힌 이상 자신이 몇 마디를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어느 하나 없다는 ‘진실’이 이미 눈앞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를 이전처럼 순수하게 좋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의 너는 내가 좋아했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야.」
「……꽤나 심한 평가를 내리네. 나는 나야.」
「아니, 너는 아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무언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전부터 미도리마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으므로, 아카시가 그런 판단을 내리는 데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는 것은 그저 분노와 비참함, 불쾌함뿐이었다. 아카시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싫은 사실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1년 전의 어느 날, 바로 이 장소에서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내 결심을 굳이 네게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이유는 없다.」
「딱히 네 결심 따위를 묻고 있는 게 아냐, 신타로. 생각해 봐. 난 지금 네게 거절당했어. 그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은 건 여태까지 연인‘이었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게다가,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화나게 만드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
「잘도 연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군. 지금의 네가 내게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나?」
「말했잖아. 나는 나야. 불과 며칠 전까지 네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야.」
「그러니까, 그건 네가 아니라고 아까부터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미도리마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를 낸 채 책상 위에 멈춰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분노와, 어쩌면 그가 당연하게 느껴야 했을 배신감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강력한 대답이었고,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추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미 끝나버린 상황에 힘을 뺄 정도로 아카시 세이쥬로는 한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미도리마의 발소리가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복도에 멈춰 서서 아카시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닦인 창문에는 자신의, 양쪽 색이 다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 눈이,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예전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저런 말을 하게 한 원인이리라.
“대체 이깟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하다는 건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아카시는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의 결심-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데 인사를 다하겠다는 그 결심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변화라는 것을. 그 단호함을, 결단력을, 과거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정말로 좋아했으며 그를 자신의 도피처로 삼았다.
그래. 과거의 아카시 세이쥬로.
“그러니까…… 그 꿈은 내 것이 아니야.”
미도리마 신타로를 놓치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에 불과하다.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을,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끊어내 버린 겁쟁이가. 아카시는 불쾌해, 라고 중얼거렸다. 건방지게, 어디서 나서는 거야. 넌 현실에서 도망쳤어. 내 안으로 피해버렸다고. 미도리마 신타로를 버리고, 그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상대인 내 안으로. 그렇다면 사랑을 바라지 말아야지. 건방져. 아주 건방지다고.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아카시는 등을 돌렸다. 복도를 혼자 걸어가는 자신의 발소리는 평소와 달리 매우 작았고, 가벼웠으며, 그 원인이 늘 제 옆에 있던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자각했을 때-
자신의 전신을 엄습하는 외로움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어졌다.
31.
메일
-지금 뭐 해?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무슨 책인데?
-쿠로코에게서 추천받은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썩 재미있진 않군.
-흐응…… 어쩐지 쿠로코하고 미도리마는 책 취향이 다를 것 같아.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
-그렇다. 쿠로코 녀석은 책이라면 뭐든지 읽는 편이고, 나는 취향이 뚜렷한 편이니까.
-아, 그래. 좋겠네.
-어째 묘하게 불만을 표하는 것 같다만.
-전혀.
-아니, 어딜 봐도 문장에서 불만이 뚝뚝 넘쳐흐르잖아.
-아니라니까.
-다 읽으면 네게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됐어.
(누가 책이 읽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그건 그렇고, 전에 빌려준 CD는 잘 들었어. 괜찮던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연주가 좋아서 자주 듣지.
-아, 그래? 무척 예쁘던데, 그 피아니스트.
(그래서 CD 받았을 때 기분이 좀 나빴다는 얘기는…… 자존심 상해서 못 하겠어.)
-피아노 연주에 외모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진지하게 하는 대답인 거야?)
-며칠 뒤에 콘서트를 연다는 것이다. 표가 있는데, 괜찮다면 같이 들으러 가지 않겠나?
-나하고 같이 가도 되겠어?
-무슨 소리야. 이런 걸 같이 갈 만한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것이냐.
(아, 정말…….)
-그렇다면 같이 가 줘도 좋아.
-왠지 말투가 기분 나쁜데.
-미도리마를 따라해 본 건데?
-무슨 소리! 난 그런 말투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그래. 알겠어. 그래서, 언젠데?
-다음 주 토요일인 것이다. 주말이라면 너도 시간이 되겠지?
-내가 문화생활을 좀 즐기겠다는데 집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미도리마와 같이 간다면 괜찮을 거야.
(뭐, 반대한다고 해도 나갈 거지만.)
-그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고맙게 생각한다면 제대로 에스코트 해. 이것저것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연주는 피아니스트가 하는 건데 내게 기대해서 어쩌려고.
(……이거 바보 아니야?)
-그럼 잘 자라.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
-응, 미도리마도.
“아…… 왠지 어깨에 힘이 빠져버린 기분이야.”
“데이트 하자는 말이 그렇게 안 나와?”
“미도리마 바보…….”
30.
초상화
“이번 수업의 과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존재’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든, 혹은 추상적인 이미지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독창적인 그림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왜 나야?”
“말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노을빛이 살짝 비쳐 들어오는 테이코 중학교의 농구부 부실에, 아카시 세이쥬로를 불러냈다. 그와의 사이에 캔버스를 두고 천천히 연필을 움직이면서 미도리마 신타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과제 내용을 듣고 나서 바로 아카시 세이쥬로를 떠올렸고 그리고 싶은 내용도 분명히 생각해 두었는데 정작 아카시를 마주하고 보니 제대로 풀리질 않았던 것이다. 잠시 연필을 이리 움직였다 저리 움직이기를 반복하고, 창가를 등지고 앉은 아카시에게 여러 가지 포즈를 요구해도 보았지만-물론 아카시는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따라주었다-정작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소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아카시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랬고, 무엇보다도 이번 과제의 소재로는 아카시 세이쥬로만한 것이 없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 풀리질 않는다. 새하얀 캔버스 위, 구도만 잡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카시의 윤곽에 미도리마는 안경을 벗고 손가락으로 콧등을 눌렀다.
“뭐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지?”
“아아…… 그리고 싶었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체 내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건데?”
“그냥…… 추상적인 이미지였던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난 미도리마가 그림을 그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1학년 때 선택수업은 음악이었지? 왜 바꿨어?”
“수업에 들어가면 반주자만 시켜대니까. 질렸다는 것이다.”
“미도리마의 입에서 ‘질렸다’는 말이 나오니까 왠지 신선해.”
“그런가?”
“그래. 뭐든 미도리마가 ‘질렸다’ 고 표현하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대표적으로 이것. 하면서, 아카시가 장기판을 들어 보였다. 하긴 계속 지면서도 아카시에게 꾸준히 도전하는 모습을 쭉 보여왔으니 저 반응도 이해가 간다. 너는 그것이 단순한 ‘승부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미도리마는 끙, 하고 혀를 차고 다시 안경을 썼다. 환하게 밝아진 시야 너머로,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가 보였다. 지난 1년 반 동안 누누이 보아 온 표정이다.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을,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상대를, 여유 있는 왕의 눈으로 바라보는 저 익숙한 표정. 혹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일까? 조금 더 새로운, 자기만 볼 수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표정이 필요한 걸까? 미도리마는 연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라는 아카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미도리마는 캔버스 앞을 벗어났다. 한 발 한 발 아카시의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아카시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손 가득 아카시의 부드러운 뺨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코앞에 보이는 아카시의 얼굴은 이제 놀람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 그래. 이 표정이다. 내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캔버스 위에 그리고 싶었던 너의 표정- 나로 말미암아 놀라고, 당황하고, 그 굳건한 왕좌가 흔들리는- 그런 표정.
다음 순간 미도리마는 그 얼굴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살짝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아카시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미도리마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갑자기 키스당한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추궁의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미도리마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한 행동을 직시하는 데는 생각 외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화들짝 놀라 아카시의 얼굴에서 손을 뗀 미도리마는 후다닥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런 미도리마를 보는 아카시의 얼굴에는 더 이상 여유 만만한 미소도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운 눈빛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당황스러움. 놀라움. 그런 감정만 드러나 있는 아카시의 얼굴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얼굴에 멍하니 홀려 있자니, 약간의 불만을- 그리고 또 약간의 당혹감을 담은 아카시의 목소리가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지금 네 반응은 내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게…… 미, 미안하다는 것이다. 갑자기 몸이-“
“……미도리마는 친구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이었구나.”
“아, 아니라는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단순한 친구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뭐?”
“……응?”
내,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본의 아니게 튀어나온 ‘본심’은, 조금 어색하기는 했어도 분명 고백으로 들을 수 있을 만한 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미도리마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빠르게 부실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 미도리마! 하고, 등 뒤에서 아카시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한 번 떨어진 발은 멈출 수가 없었다. 단번에 부실이 있는 층보다 두세 층 아래로 달려내려간 미도리마는 교사 현관 앞에서야 겨우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갑자기 아카시에게 키스하고, 고백으로 들릴 만한 말까지 해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는데. 내일부터 아카시의 얼굴을 또 어떻게 보라는 건가.
“나는…… 지상 최고의 바보인 것이다……“
텅 비어버린 부실과 홀로 남겨진 캔버스를 빤히 바라보면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던 거야? 왠지 고백 같은 것을 받았다는 자각은 있는데 정작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고백을 들은 사람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인 고백이라니. 아카시는 생애 첫 고백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린 데에 살짝 화가 났고, 미도리마가 결국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에 더욱 화가 났다. 그리고 그 기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도리마가 그리던 캔버스 안의 내용을 본 순간 절정에 달했다. 윤곽만 그려져 있을 뿐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캔버스. 그것은 왠지,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에 대해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만 같았다.
‘……나는 꽤 많이 보여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알아, 미도리마?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한 적이 없어. 나의 가족 이야기도, 나의 평소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그 모든 것에서 오는 부채감에 대해서도- 너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준 적이 없어. 그걸 모두 들은 만큼 너는 분명,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뭐야, 이러니까 마치……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잖아.’
키스하고, 고백하고, 도망친 쪽은 너인데, 왜 내가 이런 패배감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것일까.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렸고,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는 텅 빈 캔버스, 희미한 자신의 윤곽 위에, 짧은 문장 하나를 썼다. 이젤 위에 연필을 던져버리고 부실을 나간 아카시의 등 뒤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던지고 간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에 대한 아카시 세이쥬로의 ‘답’이 적혀 있었다.
‘-나를 좀 더 알아 줘.’
29.
감기
‘역시나…….’
펜 움직이는 소리나 책장 넘기는 소리, 간혹 잠에 빠진 학생-대표적으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아오미네 다이키-의 코 고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 한가한 자습 시간, 미도리마 신타로는 책이 아니라 창밖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막 체육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이렇게 말하면 미도리마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반 친구 몇 명에게 둘러싸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카시는, 평소의 그보다 훨씬 창백한 혈색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유난히 말수가 적고, 아침 연습 지시를 내릴 때도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던 데다, 입을 손으로 막거나 목을 만져 보거나 하는 행동 등등이.
틀림없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지금 감기에 걸려 있다.
‘저 녀석은 누가 지적하지 않으면 제 몸을 챙길 생각도 안 하니까 말이지…….’
한숨을 폭 쉬고 미도리마는 계속 아카시의 등을 시선으로 쫓았다. 눈이 나쁘다고는 하나 안경을 쓰면 웬만한 건 다 잘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아카시일 경우 미도리마의 시력은 결코 천리안 못지않은 힘을 자랑한다. 불만스런 시선으로 아카시를 쫓던 미도리마의 옆으로 한 여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그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저기, 미도리마 군, 물어볼 게 있는데.”
“아, 물어보라는 것이다.”
“아니, 사람을 쳐다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듣고 있다는 것이다. 물어보라니까.”
“잘 안 풀리는 문제가 있어서 그런데…… 저기, 미도리마 군?”
아, 방금 기침을 했다. 역시 감기로군. 최근 날이 풀려 따뜻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조금 쌀쌀하단 말이다. 오후에는 비가 올 예정이라고. 그런데도 무리해서 체육 수업을 나가다니 무슨 생각인 건가. 연습이 시작하기 전에 약 정도는 건네주는 게 좋을까-마침 오늘 게자리의 럭키 아이템은 감기약이었다-. 내가 약을 주면 너는 분명히 내 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냐거나, 걱정해 줘서 고맙다거나 하는 복장이 뒤집어질 말만 하겠지. 척보면 안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내가 무심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벌써 기침만 다섯 번째다. 주변 녀석들은 아카시를 전혀 보지 않고 있는 건가? 아니, 학생은 그렇다 치고 체육 선생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미도리마의 불만이 한계치를 돌파하는 것과, 그의 책상 옆에 선 여학생의 인내심이 한계치를 돌파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저기, 미도리마 군! 내 말 듣고 있……,”
“젠장!”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외침은 반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심지어는 앞자리에서 자고 있던 아오미네마저도 게슴츠레 눈을 뜨고 뭐, 뭐야? 하고 놀랐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미도리마 본인은 그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그는 그대로 반 학생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교실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 미도리마는 그대로 체육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운동장에 난입했다.
“아카시!”
뜻밖에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카시가 바로 미도리마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그 눈빛을 무시한 채 아카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놀란 채인 아카시의 손목을 붙잡자 피부에 생생하게 열이 전해져 왔다. 이런 몸 상태로 체육 수업에 나오다니!
“보건실에 가자는 것이다!”
“뭐?”
“됐으니까 따라와! 열이 펄펄 끓는 것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자, 잠깐, 미도리마?!”
아카시의 당황한 목소리와 저 멀리서 체육 선생이 지르는 고함 소리를 무시하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반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손의 힘이 아카시의 상태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나 하나 뿌리칠 힘도 없으면서 태연한 척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미도리마는 보건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마침 보건실 안에서 간식 타임에 열중하고 있던 보건 교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녀석, 감기 기운이 있습니다. 약을 주세요.”
“아, 그, 그래. 일단 들어오렴.”
“자, 잠깐, 미도리마…… 이건 놓고…….”
“부정할 생각은 말라는 것이다. 네 얼굴이 지금 얼마나 빨간지……,”
알기는 하는 거냐, 라는, 다음 말은 등 뒤에 선 아카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은 미도리마가 아는 아카시의 어떤 얼굴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둔해도 그것이 단순히 감기 기운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갑작스런 행동에 대해 깨달았고, 화들짝 놀라 약간의 비명과 함께 아카시의 손을 놓았다.
“미, 미안하다는 것이다…….”
“아, 아니야…….”
심장이 시끄럽게 뛰었다. 이상하다, 손을 잡은 것만으로 감기가 옮았을 리 없는데. 그런데 왜 내 얼굴까지 화끈거리는 거지. 당황한 미도리마는 그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아카시의 반응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뭔가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황급히 아카시의 등을 보건실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자 난감해하는 듯한 아카시의 시선이 미도리마의 얼굴을 조심스레 쫓았다.
“뭐, 뭘 보고 있는 거냐. 얼른 들어가서 약이나 받아.”
“아, 으응……. 그런데 미도리마, 수업은?”
“자, 자습이라는 것이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니? 얼른 교실로 돌아가!”
다행히도 날카로운 보건 교사의 목소리가 그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시켜 주었다. 혼이 났다는 사실보다는 이 자리를 피할 구실이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보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온 아카시의 목소리가 미도리마의 발목을 다시 붙잡았다.
“아, 미도리마. 기다려.”
“뭐, 뭐냐.”
“저…… 고마워.”
“돼, 됐다는 것이다. 인사치레 따위. 약 먹고 점심 시간까지 푹 자라는 것이다. 데, 데리러 올 테니까.”
“으응…….”
황급히 보건실을 나온 미도리마는 문을 닫고서,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에게 질문을 한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그녀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는 감정이 피어오른 것도 그때로, 그는 황급히 교실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음에 감사하면서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28.
일탈
“이 자식들이 진짜, 또 튀었어?! 대체 이게 몇 번째야?!”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가 사용하는 체육관에서 니지무라 슈조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어느 평화로운 봄날이었다. 몸을 풀고서 막 연습에 들어가려던 1군 멤버들은 잔뜩 성나 있는 니지무라의 표정에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또냐’ 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그가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원인은 주로 두 가지로, 하나는 농구부 전원의 골칫거리인 하이자키 쇼고가 사고를 쳤을 때이다. 그러나 그 사고뭉치는 저번 달 현재 주장의 ‘권고’로 인해 농구부를 나간 뒤였기에, 필연적으로 니지무라가 화를 내는 이유는 두 번째에 속한다. 바로 그 ‘현재 주장’인 아카시 세이쥬로와 그의 서포트를 맡고 있는 부주장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연습을 빠지고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농구부 주장인 아카시와 부주장인 미도리마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곧 농구부 연습 전체에 혼란이 찾아온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을 알기에 니지무라는 저번 달 주장을 은퇴해 놓고서도 앞장서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쿠로코, 너 뭐 들은 거 없냐?”
“글쎄요. 늘 그렇듯이 이유도 행선지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카시 군으로부터 니지무라 선배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군요.”
“뭔데?”
“‘언제나 그렇지만 연습 총괄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이 자식이 그냥…… 돌아오면 가만 안 둘 거다!”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동시에 모습을 감추는 일은 사실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카시가 다음 대 주장이 되고 미도리마가 부주장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확정된 뒤부터 그들은 2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모습을 감췄던 것이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금부터 계산하면 통상 열 번 정도는 될까. 그러니 니지무라가 분개하고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니지무라에게 혼이 나면서도 그들은 ‘도망’을 그만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농구부의 모두가 궁금해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쿠로코 테츠야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었지만, 일부러 말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니지무라에게 말하면 분명 폭발할 것이 분명했는데다가 쿠로코 본인이 그들과 포지션이 겹치지도 않고 연습 파트너도 각각 다른 상황이니 딱히 두 사람이 없다고 해서 피해를 보는 점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유’가 그들 두 사람이 택한 것치고는 조금 유치한 점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 니지무라 선배 무서워- 쿠로칭, 정말 아무것도 몰라?”
“무라사키바라 군이 모르는 이유를 제가 알고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 두 사람하고 제일 친한 건 너잖아요.”
“하지만- 친하다고는 해도 같은 반도 아니고- 게다가 나 요즘 왠지 소외된 기분이고-“
하긴 그럴 것이다. 만약 무라사키바라까지 데리고 사라졌다면 니지무라는 현재 주장의 권한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니까.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쿠로코는 외로워하는 듯 손가락을 빠는 무라사키바라에게 약간의 동정을 느끼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친구인 무라사키바라 군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됐어- 그런 위로 받아봐야 기쁘지 않은 걸-“
“마이우봉 사 드릴게요.”
“앗, 정말? 역시 쿠로칭이 최고야-“
괜찮아요. 그 값은 제대로 두 사람 지갑에 청구할 생각이니까요. 무라사키바라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쿠로코는 이 자리에 없는 미도리마와 아카시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은-’
“니지무라 선배, 지금쯤 갈갈이 날뛰고 있겠지.”
“재미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걸 뭐. 내일이 되면 그럴싸한 변명 한두 개 정도는 생각날 거야.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오지 말지 그랬어?”
“……말은 잘 한다. 안 간다고 했어도 억지로 끌고 왔을 녀석이.”
혀를 차는 미도리마를 흘깃 바라보며 아카시는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미도리마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전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두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관계- 흔히 ‘연인’이라 불리는 굴레에 매여 있는 이상은.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또 뭐냐.”
“주말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외출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데이트하려면 이런 식으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잖아.”
“뭘 새삼스레.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일로 일일이 사과하는 것도 너답지 않아.”
미도리마는 다소 쑥스러운지 안경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손만은 꼭 잡고 있는 모습에 왠지 흐뭇해져 아카시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하고 웃었다. 미도리마의 이런 행동에 가슴 설레는 것은 아카시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늘은 어디로 데려가줄 거야?”
“글쎄…… 사람이 좀 없을 만한 곳으로 가볼까?”
“사람 없는 데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엉큼해.”
“무, 무슨 소리냐! 네가 사람이 많은 곳은 싫다고 저번에-“
“장난이야, 장난. 그렇게 정색하지 마. 정말 엉큼한 생각을 한 것 같잖아.”
“아카시!”
“장난이라니까? 얼른 가자. 시간이 얼마 없잖아.”
아카시는 웃으며 미도리마의 손을 세게 쥐었다. 그 행동에 미도리마 역시 솔직하게 얼굴을 붉히고,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다.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손. 꽉 잡고 있는 이 손에서 느껴지는 고동이 좋았다. 그래, 내게는 이것만 있으면 돼.
“미도리마.”
“왜?”
“이 손, 놓지 마.”
내게는 이것만 있으면 되니까.
생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도리마는 다시금 진지한 눈빛을 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의 대답- ‘물론이지’ 라는 그 굳은 의지에 아카시는 안심했다.
아아,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 손에 쥐고 있다.
27.
자해 side. A
-38. 자해 side. M에서 이어집니다.
「한심하기는. 조금 더 잘 할 수는 없는 거냐?」
처음으로 아카시 세이쥬로가 제 손목에 칼날을 댄 날은, 그런 말을 아버지에게서 들은 날이었다. 그 날 아카시는 난생 처음으로 ‘정답’을 맞추는 데 실패했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겨우 풀 수 있을 만한 문제에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가 제대로 답을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틀린 것은 그 한 문제뿐이었다. ‘거의 완벽’ 했을 답안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그러니 아카시가 일부러 칼날을 쥘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제 손목에 날을 가져다 댔다.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거나 하는, 여느 마음 약한 사람들이 할 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처도 매우 얕았다. 새하얀 피부 위에 그어진 붉은 선에서 몇 방울의 피가 뚝, 뚝, 떨어졌을 뿐. 그마저도 휴지를 가져다 댄 지 얼마 되지 않아 멈추었기에, 아카시는 그 흔적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그날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은밀한 행위는 그 뒤에도 몇 번씩 계속되었다. 트리거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완벽’ 이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즉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는 일조차 드문 아버지와의 만남이 있은 뒤에는 늘 그런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생활에 대한 보고가 끝나고 칭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품평이 이어진 뒤에 늘 아버지는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아카시 가문의 인간은,」
“‘그 어떤 분야에서든 완벽해야 한다’.”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그 말을 아버지는 고장 난 오르골처럼 몇 번씩 반복했고 그 때마다 아카시는 칼날을 제 손목에 가져다 댔다.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아버지가 강요하는 ‘완벽’에 상처를 내는 행위. 자신의 자해행위가 그 행동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는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제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아카시 가문의 ‘완벽함’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그 말에 반항하듯이.
“……피가 멈추질 않네…….”
제 손목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피를 아카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왠지 한층 더 깊은 상처를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왜일까. 오늘도 아버지에게 똑같은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한 말을 들은 건 아니었는데. 가만히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던 아카시는 어느 순간 아아, 하고 그 원인을 자각했다. 오늘 부실에서 마주앉아 장기를 두던 도중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들은 말 때문이다.
「소독은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감추려는 생각은 없었다. 연습할 때는 리스트밴드를 착용하고 상처가 잘 보이지 않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기보다는 그저 주변에서 질문이 쏟아지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상처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런 충동을 일일이 설명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미도리마에게는.
미도리마는, 흔히 둔하다는 평을 듣지만, 아카시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눈치가 빠르기로는 농구부 안에서 1, 2위를 다툴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에 관한 일이라면 농구부 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알아차리곤 한다. 혹시라도 미도리마가 자신에게 자해를 하고 있는지 물어봤더라면 아카시는 솔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따라 상처를 깊게 낸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미도리마가 이유를 묻지 않은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의 일거수일투족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된 원인,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된 동기, 그러한 것을 늘 알고 싶어했고 먼저 물어보았다. 자신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며 그 가정에서 자신이 늘 무엇을 요구당하고 있는지를 아카시 스스로 털어놓은 상대도 미도리마가 유일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틀림없이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카시의 자해행위의 원인은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분명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이 아카시에게 폐를 끼칠 것이라 생각했거나, 혹은 이전에 들은 아카시의 사정으로부터 추리해 낸 것이리라.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고. 어쨌든 미도리마가 질문하지 않을 만한 이유는 산더미처럼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 또한 이해도 한다. 그럼에도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
너에게라면 모두 털어놓아도 좋았어-
“미도리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 말하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단정한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그렇다고 네 몸에 그런 짓을 하는 건 옳지 않다’ 는 정론을 펼칠까? 아니면, 동정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혀를 찰까? 그것도 아니면, 나를 안타깝게 여겨 줄까? 누구도 모르는 상처를 몸에 내는 것으로밖에는 ‘반항’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그 어떤 반응이든 좋았다.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생각이.
아카시는 피가 나는 손목 위에 대충 휴지를 감아 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메일함 맨 위에 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메일-단순히 다음 날 연습에 대한 질문이 담긴-을 바라보며,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꽤 오래 이어진 고민 끝에 아카시가 택한 것은, 아무 내용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바보 같지. 이 순간 난,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어.
나를 걱정하고 나를 염려하는, 내게 동정어린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네 모습을.
‘이래서야 원, ‘완벽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겠네.’
피식 웃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핸드폰을 닫았다. 문득,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의지하게 되면 자신의 ‘완벽함‘ 역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약한 생각이 아카시의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런 동기로 그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26.
첫 번째 투료
‘너도 참 질리질 않는다’ 라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말한다.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대체 어떤 기분으로 들어야 좋을지 모를 그 말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불만스레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어차피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사실은 1+1이 2라는 사실만큼이나 명백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절대적 진리 앞 미도리마의 위치를 말해보자면 1+1이 3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학자 정도 될까. 한 마디로 말해 ‘덧없는 짓’ 이라는 뜻이었지만, 미도리마는 결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포기할 줄 모르고 절대적인 진리에 도전하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약간의 ‘여흥’을 위해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가만히 시선을 내려 미도리마 신타로와 자신의 가운데 놓인 장기판을 바라본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냈고, 그 시간 동안 미도리마는 대체 몇 번의 투료를 외친 것일까. 이제는 세는 것조차 허무할 그 숫자들을, 아마도 미도리마는 일일이 세고 있으리라.
‘일기라도 쓸 기세지, 미도리마라면.’
책상 앞에 앉아 그날의 일기에 패배의 기록을 꼼꼼히 새겨 넣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모습을 상상하자 왠지 웃음이 나와, 아카시는 그 행동이 실례임을 알면서도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마의 미간이 방금 전보다 훨씬 찌푸려졌음은 물론이다. 자, 자, 너무 그러지 마, 미도리마. 너무 화내지 말고, 정해진 네 대사를 던져야지.
“한 번 더 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저 말만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미도리마의 취미가 장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벌써 1년 전의 일로, 무척 시덥잖은 사건이 계기였다. 미도리마가 그날의 럭키 아이템으로 가지고 온 장기짝을 본 아카시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혹시 장기 둘 줄 아느냐’란 질문을 던졌고, 미도리마는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어른스러운-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애늙은이처럼 보이겠지만- 취미를 자신 외의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카시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이 장기 외에도 체스나 바둑, 오셀로 등의 보드게임 전반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잠시 장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다음 날 방과 후 부실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끔 되었으며, 또래 친구와 장기를 두는 것이 처음인 탓에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아카시를 향해 미도리마는 안경을 끌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나는,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군.」
「걱정 마, 미도리마. 나 역시 ‘진다’ 는 사실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카시의 여유만만한 대답에 미도리마는 괜히 잘난 척을 한 것이 겸연쩍어진 듯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직후 시작된 대국에서 그는 자신의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미도리마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솔직하고 담백한 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몇 분 전의 자신을 그 아카시가 스스로 부정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 미도리마의 수는 날카롭게 상대의 품을 파고들어 승리를 쟁취하려 드는 무모함을 담고 있었다. 평소의 고요함과는 대비될 정도의 저돌적인 공격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정신을 빨리 차리고 대책을 단단히 세운 덕에 상대를 얕봐 패배하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정말로 위험한 상대였다.
또 두고 싶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에 아카시가 약간의 기대를 품고서 미도리마를 바라보았을 때, 무시무시할 정도로 굳어진 그의 표정에 아카시는 멈칫했다. 누구에게도 져 본 적 없다는 말을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지금의 대국은 미도리마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대국이었을 것이고, 자존심으로는 농구부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미도리마인 만큼 그 사실이 그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주었음은 분명했다. 이런, 내가 너무 심했나. 아카시는 혀를 찼다. 친구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시작한 장기 대국인만큼 조금 더 즐기면서 두었으면 좋았을 걸. 그런 식으로 아카시가 뼈저리게 후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시는 몇 번이고, 자신에게 도전했다 패배한 자들의 말로를 보아왔다.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아카시의 실력을 인정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혹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카시의 실력 자체를 부정하며 그에게서 스스로 멀어져가거나. 그리고 지금 눈앞의 미도리마의 반응은 후자에 가까웠다. 미도리마는 두 번 다시 자신의 상대를 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재미있었는데. 아카시는 약간 침울해진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순식간에 부실 안에 패배한 자도 승리한 자도 우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상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아카시.」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을 때, 아카시는 속으로 그의 반응을 상상했다. 미도리마는는 어떤 핑계를 대며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할까? 혹은, 연습을 성실히 하지 않는 다른 부원들을 대할 때처럼 차갑게 분개할까? 그것도 아니면- 여태까지 받아 본 최악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리던 아카시의 생각을 멈춘 것은 미도리마의 다음 한 마디였다.
「미안한데, 한 번 더 상대해 줄 수 있겠나?」
「……어?」
「그러니까,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더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부활동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겠지?」
「어, 으응…….」
「그럼 내가 판을 정리하지. 그 동안 음료수라도 뽑아 오라는 것이다. 내 몫은 됐어.」
그제야 고개를 든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굳어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평소의 침착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돌아온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에 아카시는 눈을 한두 번 깜박였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눈앞의 미도리마는 덤덤히 판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도리마…… 괜찮아?」
「뭐가 말이냐.」
「방금 전에 기분…… 굉장히 안 좋아 보였는데.」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지. ……하지만 승부의 결과를 무시해버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둬도 괜찮은 거야?」
아카시의 반신반의한 목소리에 미도리마의 의아한 시선이 따라왔다. 안경 너머의 그 두 눈이 ‘그게 왜?‘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아, 아카시는 재빨리 자신이 여태까지 하던 생각을 부정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 사실에 자신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기뻐지는 것을 느끼고, 아카시는 괜히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미도리마는 달라. 미도리마는 다르니까.
「아카시? 왜 그러냐는 것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
「천천히 다녀오라는 것이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간 것은, 원인 모를 감정이 눈물샘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자신에게 도전할 기회를 청하는 그 당연한 말이 왜 이렇게 심금을 울린 것일까. 세면대 앞에서 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면서, 아카시는 그 눈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야만 했다.
그럼, 괜찮은 거야?
앞으로도 전력을 다해 널 상대해도 괜찮은 거야?
나는 이제- 누군가 내게 도전한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아카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이냐.”
“어? 아, 미안해. 잠시 딴 생각을 했어.”
“나 참…… 상대를 앞에 두고 딴 짓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례야.”
“미안, 미안.”
그 날의 감동을 떠올리자 다시금 가슴이 벅차올라, 아카시는 또다시 나오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이 끈질기고 포기를 모르는 성실함이 자신의 심장을 뒤흔들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가져다주게 된 것이.
“……난 미도리마가 참 좋아.”
“뭐……,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어라, 부끄러워하네.”
“시, 시끄럽다는 것이다! 됐으니까 대국에 집중해라!”
“알았어. 너무 화내지 마.”
웃으며, 아카시는 장기판의 말을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미도리마가 또 이어서 말을 움직여 준다. 이 대국의 끝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그는 반드시 말해 줄 것이다. ‘한 번 더’ 라는, 가슴 설레는 말을.
25.
감기약
“싫어.”
“싫어도 먹으라는 것이다.”
“……싫어.”
“아카시.”
한숨을 푹 쉬며 미도리마는 눈앞의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대체 누구냐, 이 녀석을 이렇게 어리광쟁이로 만든 건. 나인가? 정말로 나란 말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든 미도리마 앞에서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정체란 다름아닌 알약이었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던 아카시는 계속되는 미도리마의 권유에도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농구부 연습과 공부로 정신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것을 도저히 핑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바쁘다는 녀석이 왜 나와의 장기 대국은 늘 하는 거냐. 그렇게 묻자 아카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은 평일 데이트 대신이니 당연히 거를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감동해서 물러나 줄 줄 알았다면 오산인 것이다. 결국 미도리마는 주말에 데이트를 핑계 삼아 아카시를 제 아버지의 병원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했고-아카시가 ‘속았다’면서 화를 낸 것은 물론이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진단과 사흘치의 약봉지를 받아내었다. 이걸로 이 녀석의 감기 기운도 다소 사그러들겠지. 약국을 나오면서 미도리마는 안심했지만, 약 봉지를 들고 있는 아카시의 표정은 영 풀어질 줄 몰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억지로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으나, 이게 웬걸, 아카시의 불만은 다른 데 있었다.
그렇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약을 먹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점심시간에 다른 녀석들 앞에선 잘만 먹더니, 왜 이제 와서 싫다는 거냐.”
“그땐 그냥 눈 딱 감고 삼켰을 뿐이야.”
“그럼 이번에도 눈 딱 감고 삼키라는 것이다.”
“싫어. 알약은 먹기 불편하단 말이야. 목에 걸리고.”
“그러면 분해해서 가루로 먹던가.”
“혀에 달라붙는 감촉이 싫은걸.”
“그럼, 물에 타 줄까?”
“그것도 싫어. 쓴맛이 너무 강하게 나잖아.”
“……그냥 약을 먹기 싫은 거라고 말하지 그러냐.”
“응, 정말 싫어.”
“네가 무슨 다섯 살짜리 어린애냐! 아니, 요즘엔 어린애도 약 먹기 싫다는 반항은 안 한다는 것이다!”
“미도리마가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으면서.”
끝까지 한 마디도 안 질 생각이다. 머리가 한층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카시의 감기를 치료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화병으로 쓰러지겠다.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자신의 앞에서만 마음껏 보여주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당연한 특권이겠지만, 지금 이것은 특권이라기보단 그저 어린애 뒤치다꺼리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미도리마가 끙, 하고 한숨을 쉬자 아카시는 이를 포기 선언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남은 심각한데 그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말란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카시의 행동이 괘씸해, 미도리마는 어떻게 하면 제 손의 약을 아카시에게 먹일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끔 되었다. 억지로 입 안에 밀어넣고 삼킬 때까지 손으로 입을 막아버릴까. 아니, 이 녀석이라면 약이 다 녹을 때까지 삼키지 않고 버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입 안이 쓰다며 불평을 늘어놓겠지. 어떤 방법을 쓰던 뒷감당은 고스란히 미도리마의 몫이 된다.
“점심 때 약은 먹었으니 상관없잖아. 그냥 버려.”
“그렇게 돈을 땅에 버리고 싶은 거냐…….”
“내가 번 돈도 아닌데 뭐 어때.”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들으면 폭발할 만한 발언이군. 저렇게 막가는 이유를 대기 시작했다는 건, 아카시의 어리광이 극에 달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인이라고 해서 저 녀석의 고집을 전부 들어준 내가 바보였다. 깊게 후회하며, 미도리마는 손 안의 약과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카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별 수 없다.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책임은 내가 질 수밖에. 굳게 결심하고, 미도리마는 약을 제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뜻밖의 행동에 깜짝 놀란 듯한 아카시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입술을 맞추고, 그 입술이 다물리기 전에 아카시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은 미도리마는 제 혀 위에서 구르던 알약을 아카시의 혀 위로 옮겼다. 읍, 하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카시가 알약을 삼킬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미도리마의 혀가 제 입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자 아카시는 손으로 미도리마를 밀쳐 내려고 했지만 체력적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아카시와의 첫 키스에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완강하게 반항하던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혀를 더 깊숙히 집어넣자 놀라서 떴던 눈을 본능적으로 질끈 감았다. 두 사람의 타액이 정신없이 뒤섞이는 와중, 드디어 입안에 있던 약이 아카시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그 타이밍에 맞춰 입술을 떼자마자 아카시는 콜록, 하고 잔기침을 내뱉었지만 미도리마는 태연히 제 입술을 닦을 뿐이었다. 쓴맛 나는 키스였다.
“콜록, 콜록, 으…… 미도리마, 너무한 거 아니야?”
“너무하다는 건 벌써 30분째 내 속을 썩인 너한테나 어울리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키스하는 게 어디 있어. 으…… 입 안이 써.”
“약이니까.”
“키스는 달콤해야만 한단 말이야.”
“사탕이라도 줄까? 마침 오늘의 럭키 아이템이 목캔디인 것이다.”
“됐어. 그건 달지 않잖아.”
투덜대며 아카시가 입술을 어루만졌다. 정말로 토라진 듯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 내심 미안해졌지만 그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카시는 절대 약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약을 먹인 뒤의 불만을 감당하는 건 미도리마의 몫이었다.
“갑자기 당하는 게 싫으면 앞으로 약을 꼬박꼬박 먹으라는 것이다.”
“바보야? 누가 싫다고 했어?”
“쓴맛 나는 키스는 싫은 거 아니었나?”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이게 버릇이 되면 어떡할 거야?”
“그 때는 할 수 없지. ……앞으로도 그렇게 먹여주는 수밖에.”
아카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에 미도리마는 이렇게 놀라는 아카시를 보는 건 사귀자고 고백한 이후 처음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조금 유쾌해졌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미도리마를 보며 아카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불만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소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그럼 남은 사흘 분, 모조리 미도리마가 책임져 줘.”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19금 로그이므로 따로 빼서 포스팅합니다.
23.
한밤중의 메일 (feat. …자니?)
-미도리마, 뭐 해?
-아직 12시는 안 됐는데.
-답장 좀 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단 말야.
-미도리마? 메일 읽고 있어?
-미도리마, 답장 좀 하라니까?
-미도리마.
-미도리마?
-미도리마.
-…자니?
“아- 카- 시-! 이건 다 뭐냐는 것이다!”
“……흥.”
“흥, 이 아니야! 그 시간에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이게 대체 몇 번째냐! 할 말이 있었으면 저녁에 메일을 보냈으면 됐잖아!”
“하지만 그러면 실험이 되질 않잖아.”
“실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 것이냐.”
“……미도리마는 몰라도 돼.”
어디 한 번 평생 고민해 보라지, 바보.
입술을 삐죽이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미도리마에게서 등을 돌렸다. 뒤에서는 아직 얘기가 안 끝났다며 미도리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아카시의 신경이라면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매일 밤 12시 전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유지되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바이오리듬. 그것은 그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고 있는 자신의 좌우명, ‘진인사대천명’의 한 증거였으며, 그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깨본 적 없던 습관이기도 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카시 세이쥬로가 보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러한 습관을 깰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아무래도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아닌 모양이네.’
너는 언제쯤이면 알아줄까. 이 내가,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행동을 태연자약하게 저지를 정도로 네게 진심이라는 사실을.
22.
반찬
“그러고 보니 오늘 3학년 선배에게 잠옷 색이 무슨 색이냐는 질문을 받았어.”
푸읍, 하고, 마시다 만 단팥죽을 허공에 분사하는 예의 없는 짓을 해 버린 것은 결코 미도리마 신타로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그 말은 충격적인 일 그 자체였으나, 적어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대국 도중에 산통을 깨는 짓을 한 미도리마를 원망스레 바라보며, 대체 왜 그러냐는- 미도리마의 입장에서는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 질문을 태연하게 던졌다.
“왜,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것이다, 그 선배는!”
“글쎄. 반찬거리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반……!”
그런 말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는 것이 그야말로 아카시답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미도리마의 정신은 멀쩡하게 돌아가질 않았다. 아니, 돌아갈 리 없었다. 물론 한창 나이인 중학생이 성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아오미네 다이키가 어제 서점에서 산 그라비아 잡지를 부원들과 돌려보는 행동 같은 것이 아무리 미도리마 본인의 윤리관과 맞지 않았어도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고 넘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반찬’이라는 노골적인 단어가-물론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다분히 함축적인 단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아오미네가 아닌 아카시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종합하자면, 미도리마는 그 단어가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순간 간신히 되찾았던 평정을 다시 잃고 꼴사납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입을 막고 기침을 삼키는 미도리마를 아카시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너, 너는 이게 괜찮게 보이냐는 것이다…….”
“응, 안 괜찮아 보이네.”
답을 알고 있으면 묻지나 말 것이지. 아카시의 태연자약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괜찮으냐는 그 질문에 미도리마를 한 번쯤 놀려먹겠다는 장난스러운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은 뻔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장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기침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또 한 번의 클린 히트를 날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미도리마는 평소 뭘로 해?”
“뭐, 뭘로……?”
“모른 척하기는. 아까까지 우리가 하고 있던 이야기의 주제가 뭐였지?”
그야 물론 ‘반찬’ 이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바라는 것이 그러한 대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슨 대답을 하던간에 아카시의 놀림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걸 해본 적은 없다고 솔직히 말해도 그럴 리 없다며 놀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지어내 말하면 그 대답에 따라 또 다른 놀림이 찾아올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아카시도 미도리마가 여기까지 생각할 것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일부러 미도리마를 놀려 보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성격이 고약한 녀석이라는 것이다. 혀를 차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뭔가 없을까. 아카시에게 놀림 받지 않을 만한,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아카시를 놀라게 할 만한 대답이. 고민하는 미도리마의 앞에서 아카시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왜인지, 그 미소를 얼굴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다.
“……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거짓 답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여태까지 망상거리를 만들어서 자위를 하는, 여느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해 봤을 법한 행동을 정말로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아카시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만 던진 답이었다. 예상대로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부실 안에 찾아온 침묵에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놀란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도리어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반문하는 아카시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네 얼굴이 붉어지냐는 것이다!”
“……이 상황에선…… 당연한 거 아니야?”
“그야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만…….”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니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꽤 경멸스러운 시선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방금 전 3학년 선배의 이야기를 할 때 아카시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그런데, 뭔가, 저 반응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는 아카시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미도리마 앞에서 아카시는 턱에 손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명백히 미도리마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몸짓이었다.
“……미도리마는 때로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짓을 해.”
“미, 미안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그렇지만…… 사실인데 어떡하라고.”
이제 와서 그냥 해 본 말이라는 변명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다. 결국 미도리마는 뻔뻔하게 그 거짓을 밀고 가기로 결심했고, 본의 아니게 미도리마 신타로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치며 아카시의 붉어진 얼굴을 감상했다.
“……바보.”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건 큰일이다. 그냥 해 본 말일 뿐이고,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거짓말’ 이라는 걸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당장 오늘 밤에라도, 꿈에 저 얼굴이 나올 것만 같다.
21.
소등
“그래서, 내일 연습은 키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1군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게 보여. 본인은 체력에는 자신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하지만, 오늘 저녁에도 봤지? 식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지쳤잖아. 마치 몇 달 전의 쿠로코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물론 밥 먹다가 기절하지 않은 만큼 쿠로코보다는 체력이 낫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기껏 합숙까지 왔으니까 맞춤형 연습으로 케어를 좀 해 줘야 할 것 같아. 내가 키세와 쿠로코를 집중적으로 단련시킬 테니, 미도리마는 다른 사람들을 맡아 줘. 아, 그리고 무라사키바라는 최근 게을러졌으니까 운동장을 좀 돌게 하고, 아오미네는…….”
“-잠깐, 아카시.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응? 왜?”
“제발 잠 좀 자자는 것이다.”
내뱉어 놓고서, 미도리마는 아차 싶었다. 왠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12시면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미도리마의 바이오리듬 상 제한시간이 고작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당한 조바심을 그에게 안겨주기 충분했으나,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아카시를 보자 괜히 미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슬쩍 아카시 쪽을 돌아보자, 그는 아직도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만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말간 눈동자에 더욱 미안해졌다.
‘아니, 확실히 미안하긴 하지만, 벌써 30분 째란 말이다…….’
30분 전, 미도리마는 방의 불을 껐다. 그건 ‘이제 자자’는 미도리마 나름대로의 신호였고, 아카시 역시 그걸 아는 듯 불을 끄는 미도리마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을 끄고 30분 째, 아카시는 계속해서 미도리마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불을 끄기 직전까지 하던 회의 내용을 확인하듯 되풀이하더니, 얼추 정리가 끝났다 싶었을 즈음 합숙 첫날의 연습에 대한 피드백을 시작했다. 그것마저 끝날 즈음이 되자, 이번에는 키세의 화제를 꺼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아카시가 왜 이렇게 끈질기게 말을 거는지도 알 법했다.
이번에 선택한 합숙소는 방이 작은 탓에 1군 멤버 전원이 잘 수는 없었고, 자연스레 2인 1조로 팀을 짜게 되었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주장과 부주장의 회의를 빌미로 아카시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전부 합숙을 떠나기 전 회의를 끝낸 상태였으므로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으로 확실해졌다. 아카시는.
“혹시 아카시…… 어두운 방에서 자는 게 싫은 거냐?”
“…….”
아카시는 그 질문에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 경우 ‘그렇다’가 정답일 것이다.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나름대로의 자존심이겠지. 확실히 아카시가 아니더라도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나 돼서 불 꺼진 방에서 자는 게 싫다니. 쯧. 혀를 차고 미도리마는 아카시 쪽으로 돌아누웠다. 여전히 고집스레 시선을 천장에만 두고 있는 아카시는 끝까지 미도리마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다.
“만약 어두운 게 무서운 거라면, 이쪽으로 와서 붙어 자라는 것이다.”
“…….”
“걱정 마라.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원한다면 등을 돌려주지. 다만 12시 전에는 좀 잤으면 좋겠다.”
제아무리 아카시의 사정을 이해한다 해도 여태까지 충실하게 지켜온 바이오리듬을 깰 수는 없다. 그것은 미도리마에게 있어 오하아사를 매일 챙겨보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선택을 완전히 아카시에게 맡기고 미도리마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카시가 ‘이제 제발 자자’는 미도리마의 의도를 이해하고 애써서 잠을 청하던, 혹은 정말로 이불 안에 들어오던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은 잘 수 있으니까. 이제 채 5분도 남지 않은 취침 시간을 속으로 되뇌어보며 눈을 감던 미도리마는 뒤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설마 정말 이불 안에 들어올 생각인가? 하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등에 얼굴을 기대 왔다. 순간 두근, 하고 심장에서 느껴진 고동을 미도리마는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미안. ……고마워.”
그런 상황에서 아카시의 그 말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는 심장 소리에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가슴 위를 그러모아 쥐었다. 이상하다. 분명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뛰지. 대체 왜. 고민하는 사이 제한 시간인 12시는 순식간에 지나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미도리마의 등에 기댄 아카시만 색색대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래서야 상황이 완전히 반대가 된 것 아닌가. 당황하면서도 미도리마는 차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잠에 빠져든 아카시의 숨소리가 들리는 한, 아마 밤이 새도록-
‘대, 대체 내가 어떻게 돼버린 거지……?!’
누구도 답을 내려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미도리마는 제 심장에게 계속해서 멈춰줄 것을 부탁했지만,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쉬이 진정되어 주질 않았다. 마치 심장에 통하는 회로가 부서지기라도 한 듯.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것을 부숴버리기라도 한 듯-
20.
풀이 죽어서
대체 뭐야? 하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불만스레 생각한다. 그 원인은 학교를 나오기 전부터 무언가에 토라진 듯 자신에게서 살짝 떨어져, 묵묵히 걷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면 될 것을. 내가 뭘 잘못했나?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미도리마가 저런 태도를 보일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흘깃 뒤를 쳐다보았으나 미도리마는 아카시와 눈을 마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뒤에서 걷고 있는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불만을 가졌다기보다는 마치, 풀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긴 아카시가 뭔가 잘못을 했다면 미도리마는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지적했을 것이다. 원체 그런 성격의 소유자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저 태도는 뭐냔 말이다. 평소 미도리마와 집에 돌아갈 때는 역이 왜 이렇게 학교에서 가까운지 불만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다. 그것은 즉 헤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이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생각하다가, 아카시는 자리에 멈춰 섰다. 고민하기보다는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도리마.”
“뭐냐.”
“대체 왜 그래, 너?”
미도리마는 그 질문을 듣고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기가 죽은 표정이다. 적어도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은 아니다. 확신과 함께 또 다른 궁금증이 비집고 올라왔다. 그렇다면 미도리마는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고, 표정은 다 죽어가고. 어디 아파? 아니면 피곤해? 오늘 연습이 그렇게 힘들었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대체 뭔데?”
이제 곧 역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기 전까지는 미도리마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길을 막아서서 자신을 쏘아보는 아카시의 시선에 미도리마는 다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 얼핏 과묵해 보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선을 피해본 적 없던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대답을 피하고 있다. 너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오히려 걱정스러워져서,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다시 한 번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아카시는 다음 순간 일어난,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굳어져 버렸다. 가까이 다가선 아카시의 어깨에 미도리마가 손을 뻗어 갑자기 품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그런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둘이 부실에 있을 때 외엔 보여주지 않았던 미도리마인지라 아카시의 당황스러움은 이제 하늘을 찔러 우주로 날아가 버릴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왠지 평소 아카시를 끌어안을 때보다 팔힘이 강하다. 그 힘에는 ‘적극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절박함‘이 있었고, 때문에 아카시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왜 이러냐는 추궁보다는 저도 모르게 미도리마의 등에 팔을 두르는 것을 택했다.
“미도리마…… 정말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그저, 뭔데?”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뜻밖인 소리였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다니? 자존심과 자신감으로 치자면 농구부의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뜻밖의 상황에 눈을 깜박이는 아카시의 머리 위에서 미도리마는 천천히 자신의 ‘한심함’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오늘 교문을 나서기 전에 니지무라 선배를 만났었잖나.”
왜 여기서 니지무라 슈조의 이름이 나오는지도 모른 채 아카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니지무라와는 만났다. 또 연습을 땡땡이치고 학교에서 놀고 있던 하이자키를 발견한 니지무라는 무섭게 화를 내며 그의 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발견한 아카시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몇 대 팰 기세였다. 평소라면 아카시도 그 상황을 그냥 지나쳤곘지만, 아무리 군기를 잡기 위한 일이라지만 교내 폭력은 위험하다 싶어서 ‘이제 그만두고 집에 가라’는 말을 최대한 돌려 말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냐는 말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미도리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해결해주었다.
“……그만 질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질투?”
질투라니. 대체 그 대화-“니지무라 선배, 벌은 체육관에서 부탁드립니다.” “어? 오냐, 알았다.”-의 어디에 ‘질투’라는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부분에서 질투를 한 건데?”
“너와 니지무라 선배가…….”
“나하고 선배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미도리마의 답은 아카시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심장을 뛰게 하는 답이었다. 미도리마 특유의 그 진지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만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을까. 고작 그거라고?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아카시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누가-특히 이 상황의 원인이었을 니지무라가-들었으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을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럼…… 아무하고도 말하지 말까?”
“…….”
“미도리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결코 아카시 세이쥬로를 고립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미도리마는 흔히 ‘집착’이 심하다고들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인에게 바라듯 자신 외의 다른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를 바랄만한 성정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농구부 부주장이라는 아카시의 포지션 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질투해 버리고 말았다. 미도리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한심하다’고 표현한 거구나.
아카시는 피식 웃고 미도리마의 품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건 미도리마야.”
“…….”
“정말로, 미도리마가 제일 좋아.”
그 말에 미도리마가 천천히 아카시를 떼어놓았다.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얼굴은 약간 붉은 빛을 띠고서, 그럼에도 평소의 진지한 눈빛만은 잃지 않은 까닭에, 너무도 멋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이없어 할 평가이긴 하지만. 생긋 웃으면서 아카시는 생각했다.
지금 이곳이 길거리가 아니었다면 키스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멋있는 얼굴이라고.
19.
할 수 없다
“아카시!”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팔을 세게 휘어 잡혔다. 뒤로 몸이 젖혀지고, 익숙한 섬유유연제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제 머리 위에서 휴우, 하고 짧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상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두 눈을 험악하게 뜨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슬쩍 흘렸다.
“……신타로가 잡아 준 거야? 고마워.”
솔직하게 감사의 뜻을 전하자, 미도리마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저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입에서 솔직한 감사의 말이 나온 것 때문에? 아니면, 이 아카시 세이쥬로를 저도 모르게 붙잡아 버린 반사적인 행동 때문에? 어느 쪽이든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드러난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물론 그 즐거움도 미도리마가 퉁명스레 제 팔을 뿌리친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계단 끝에서 갑자기 사람을 밀치면 위험해.”
“그걸 잘 아는 녀석이 책을 읽으면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단 말이냐.”
“나를 걱정하는 누구누구 씨가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아, 아닌가? 그 누구누구 씨가 걱정한 건 내가 아니라, 내 몸인가? 분명 ‘너 혼자만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잔소리를 할 참이지?”
아카시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짓궂은 말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말에 미도리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물들었다. 아카시가 아무런 배려 없이 ‘현실’을 미도리마에게 들이댄 탓이다. 아마 미도리마 신타로는 ‘현실’ 따위는 보고 싶지 않을 테지. 눈앞에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더 이상 이전까지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라는 사실 따위는. 그런 미도리마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입을 열어 현실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아카시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젠 그걸 지적당할 때인가? 그런 생각에 빙그레 웃는 아카시에게서, 미도리마는 아무 대꾸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노골적인 거절의 표시에, 방금 전까지 무척 좋았던 아카시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쪽으로 가면 교실이야. 부실로 가는 거 아니었어?”
“뭘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실에는 들를 생각이 없어.”
그렇겠지. 그가 이 길을 걷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아카시 세이쥬로가 이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타로는 역시 둔감하네. 오랜만에 같이 대국이나 하자는 뜻인데, 그렇게 몰라?”
“……안 한다.”
“승부를 하기도 전에 도망치다니 신타로답지 않아.”
“…….”
“아니면 그건가? ‘너와는’ 안 한다, 라는 뜻?”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웃음 섞인 말에 미도리마는 발끈한 듯 홱 아카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직후 아카시가 취하고 있는 모션을 보고서 얼굴 가득 경악의 빛을 띄웠다. 그 얼굴을 만끽하면서 아카시는 제 팔을 더 크게 벌렸다. 당장이라도 계단 아래로 그 몸을 던져버릴 기세에 미도리마의 몸이 아카시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트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정말이지, 재미있어. 너는 정말 내 예상대로의 행동만 취하는구나. 웃으면서, 아카시는 아무 걱정 없이 제 몸을 뒤로 눕혔다. 그건 무모한 짓이 아니었다. 애초에 아카시는 자신이 계단 아래로 굴러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도리마의 손이 그를 붙잡을 것이다.
봐, 이렇게.
잠시 후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품에 완전히 끌어안긴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말 필사적으로 아카시를 붙든 미도리마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얼굴에서 즐거움 이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았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분노를 담아, 금방이라도 아카시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을 뿐이었다.
“너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날 놀리는 건가?”
“내 쪽에서도 물어볼게.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날 붙잡는 거지?”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굳게 닫힌 입술에서 응당히 나왔어야 할 대답을 아카시는 알고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를, 언젠가 ‘진짜’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몸을 다치게 할 수 없으니까. 자신이 무척 사랑했고, 인사를 다해 지켜 온 그 존재를 외면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지금 눈앞에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곁을 맴돌고, 자신이 사랑한 그 존재에게 아주 작은 상처라도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런 행동을 쭉 반복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네가 그렇게 필사적인 걸 보면 놀리고 싶어져. 네가 사랑한 이 얼굴이 너를 조롱하고 시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게 너무 궁금해.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이런 충동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겠지, 신타로.”
웃으면서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언젠가 만져본 적 있었던 미도리마의 얼굴은, 그때보다 훨씬 수척하고 말라 있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거칠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 밑에는 어렴풋이 검은 자국마저 남아 있었다.
“내 걱정…… 아니, ‘진짜’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걱정으로 잠도 못 이루는 거야? 정해져 있는 바이오리듬을 깨는 건 네 진인사대천명에 상당한 상처를 입히는 일일 텐데.”
“너…….”
“정말 사랑했구나?”
피식, 하고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비웃음이 결정적이었으리라. 미도리마는 더는 감출 수 없는 분노 어린 얼굴로 아카시의 손을 홱 잡아챘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 얼굴에 왠지 키스를 해 주고 싶다는 감정이 흘러넘쳤다. 이건 진짜 아카시 세이쥬로의 감정일까? 아니면, 이 나의 감정? 어느 쪽이던 간에 지금 여기서 아카시가 키스를 하면 미도리마는 정말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아, 보고 싶어지는데. 너의 화가 난 얼굴은- 대체 얼마나 멋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미도리마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려던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제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그 사이 미도리마의 손이 아카시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입술을 깊게 맞췄다. 설마 키스하는 쪽이 미도리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아카시는 입술 사이로 파고든 혀를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화가 나려고 하는 건 어째서일까.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아카시 세이쥬로’ 에게 키스하는 너를 보고, 역시나 기분 나쁘다고 느낀 걸까? 아니면- 질투? 설마, 이 내가? 또 하나의 나에게? 원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머릿속에만 가득 차오른 의문에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입술을 뗄 때까지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했다. 어느새 상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쪽은 아카시, 태연한 눈을 하고 있는 쪽은 미도리마가 되었다. 뭐야, 이게. 왜 입장이 바뀐 거지. 화를 내. 내 무신경함에, 잔인함에, 너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 태도에.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 를 미워하면 되는 거야.
“……나는 네가 방금 전부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진짜’ 라느니, ‘이 몸’ 이라느니, 마치 별개의 인간처럼.”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설마,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네가 사랑했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야. 어린애처럼 네 품에서 안식을 찾고, 네가 제 뒤를 따라오는 것을 기뻐하고, 네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사실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착각했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와는 달라. 그는 내 안으로 도망쳤고, 너는 그 모든 장면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한 사람 중 하나지. 그런 네가 모를 리 없어. 내가 이전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그리고-
“진짜? 가짜? 또 하나의 너? 그딴 건 아무 상관없다는 것이다. 너는 아카시 세이쥬로. 내가 반드시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유일한 상대, 그리고 내가 인사를 다해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해 준 존재.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냐…….”
그만둬.
“난 달라. 나는…….”
나는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야. 그런 연약한 존재와는 달라. 나는, 나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너를, 다시는.
“너는 너다. 완벽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허술하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 시험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네가 위험할 때는 내가 반드시 달려올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그런 아카시 세이쥬로는 너 한 사람뿐이다.”
미도리마의 손이 아카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더는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러워져,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아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카시의 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금 그의 뒤를 따라올 것이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뒤를.
‘그만해.’
그런 건, 이제 싫어.
‘그만둬.’
네 품에 안겨 있으면 또다시 생각나려고 해. 완벽하지 못했던, 모질지 못했던, 그랬기에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그런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제 없어. 그 날 내 안에서 죽었어. 너는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야, 신타로.
그래서 나는, 그런 너를.
“널…….”
아, 안 되겠다. 역시 말할 수 없어.
그런 너를 다시는- 좋아하지 않을 생각이라고는, 도저히.
18.
질투심 유발
“……저기.”
“왜 부르세요, 선배?”
“나 아까부터 등이 따끔따끔한 게, 엄청 신경 쓰이거든?”
“아, 그래요? 잘 됐네요.”
이 자식이 진짜.
당장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니지무라 슈조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그가 주먹이나 딱밤을 내지르지 않고 아까부터 계속 취하고 있던 자세- 상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자세를 풀지는 못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상대가 아카시 세이쥬로, 즉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현 주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3학년이라지만 이미 주장 자리에서 물러난 자신이 부원들의 앞에서 현재 주장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주장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상대가 가뜩이나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구가 작고 동안인지라 신입부원들에게는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아카시이니만큼 더더욱.
“그래서, 이건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되는 건데?”
“글쎄요. 되도록이면 오래요.”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주장의 위상이고 뭐고 화를 내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근질근질한 손을 참으며 니지무라는 필사적으로 학교 근처 게임센터의 펀칭머신을 떠올렸다. 돌아가는 길에 한 번 하고 가자.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손을 휘두르고 말 것 같으니까. 태연한 얼굴로 차트를 넘기는 아카시에게서 시선을 떼고 슬쩍 제 등 뒤를 살폈다. 골대 바로 근처에서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 연습 파트너인 무라사키바라 아츠시가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을 방관한 채 이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미도리마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정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다.
‘대체 이 자식들, 무슨 사이야?’
다시 아카시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가 답을 줄 리가 만무했다. 이런 태도를 굳이 취하는 걸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는 문제긴 하지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자신은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후배에게 마구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후배와 저 무섭기 그지없는 후배의 연애- 속된 말로 ‘밀당’ 에.
“야, 하나만 묻자. 왜 나냐? 이런 건 눈치 빠른 쿠로코나 너하고 친한 무라사키바라한테 부탁해 보지?”
“그건 안 돼요. 선배가 제일 효과가 좋거든요.”
“효과아?”
이제는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가 차서 어깨동무를 한 손을 풀 뻔했다. 니지무라가 그런 충동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시는 왠지 들뜬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미도리마는 선배에게 콤플렉스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작년까진 선배가 주장이고 제가 부주장이어서 그런 건가? 유난히 요즘 선배와 있었을 때 얘기를 자주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희생자로 선택되셨다 이거냐?”
“부탁드립니다. 미도리마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얼굴을 꼭 한 번쯤 보고 싶었거든요.”
“너 그러다가 미도리마한테 차여도 난 모른다.”
“그럴 리가. 1년간 지켜보시고도 모르시겠어요?”
“차일 리 없다 이거냐? 하긴 저 녀석은 별 쓸데없는 데도 인사를 다하는 놈이었지.”
“그것도 그렇고, 제가 얌전히 차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한 니지무라가 길게 한숨을 쉬자 아카시는 쿡쿡 하고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에 니지무라는 진심으로 미도리마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안 됐다, 미도리마. 이런 녀석에게 붙잡혔으니, 넌 아마 평생을 이 페이스에 휘둘리겠지. 이제 보니 소유욕도 장난 아닌 것 같은데.
‘불쌍한 놈 같으니라고…….’
“미도리마 군, 표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만. 그렇게 두 사람이 신경 쓰입니까?”
쿠로코의 질문에 미도리마는 잠시 아카시와 니지무라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은,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쿠로코에게도 약간의 공포를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아카시 군, 살해당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은 분명 집착도 무시무시할 걸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질투를 유발해 보려는 거 아니겠어요? 오히려 귀여운데요.”
“……그쯤은 안다는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까? 그럼 굳이 장단을 맞춰 줄 필요는 없을 텐데요. 네가 그럴수록 아카시 군은 더 심하게 행동할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그걸로 아카시가 즐거워한다면 됐어.”
아아, 알 만하군요. 아카시 군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건 좋지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요. 흘깃 니지무라와 아카시 쪽을 쳐다보며, 쿠로코는 진심으로 아카시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안 됐네요, 아카시 군. 이런 사람에게 붙잡혔으니, 너는 분명 헤어 나올 수 없게 되겠지요. 상대의 어리광을 다 받아주면서 소유욕만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상태라니요.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고…….’
17.
갑자기 생긴 휴식시간
식사 도중 아버지에게서 갑자기 주말에 시간을 내라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로부터의 ‘명령’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고 새삼스레 그것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건네준 것을 본 순간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클래식 콘서트 티켓이었다. 거래처에서 받은 것으로, 시간을 내 한 번 들러서 감상을 들려주기로 했다고 한다. 이걸 자신에게 주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 대신 콘서트에 참석해, 아버지가 거래처에 보고할 수 있도록 감상을 만들어 놓으라는 의미이다. 당연히 비서에게 시켜야 할 만한 일을 아들에게 명령하는 아버지의 무심함을 탓하기보다,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를 구실로 삼으면 주말에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랬는데. 왜 나는 지금 혼자 콘서트장에 앉아 있을까.
「주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곤란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부터 이미 그의 답을 알아차렸지만, 왠지 입은 제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티켓이 두 장이어서. 아버지는 못 가신다고 하고, 버리기는 아깝고, 아버지의 비서 같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도 싫고. 반대로 미도리마는 클래식 콘서트장 같은 곳에 가도 아무 무리 없을 것 같거든. 피아노 좋아하잖아? 같이 가자.」
지금 떠올려 보면 정말 비참한 제안이었다 싶다. 곤란해하는 미도리마의 표정에서 바로 주말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도, 굳이 말을 이어 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음……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날은 볼일이 있어서…….」
「정말 중요한 볼일이야? 빠질 수는 없어?」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왜 말을 안 하겠냐는 것이다.」
하긴, 그렇지. 그럴 만도 하다. 볼일이 있는 시간대가 주말이라면, 미도리마의 그 볼일은 50%의 확률로 가족에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최근 동생이 발레를 시작했다고 했지. 동생의 발레 발표회일까? 아니면, 간만의 골든 위크이니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가려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가족과의 일을 제쳐놓고 자신을 택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 아쉽네. 꼭 미도리마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꼭 그 날이 아니면 안 되는 거냐?」
「날짜가 지정된 티켓이라. VIP석이거든.」
그 말에 미도리마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그에게 VIP석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목에서 손이 튀어나올 정도로 탐나는 것일 게 분명했으니까. 그 때문에 마지막으로, 혹시나 자신을 택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깐 하고야 말았다.
「정말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거절이었다.
‘그렇게까지 매달릴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예상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깊게 실망하고 만 자신이 한심스럽다. 덕분에 홀을 가득 메운 훌륭한 연주가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분명 아버지는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할 것이다. 집중하자, 집중.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잖아. 아카시의 이성은 분명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분명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끝까지 무슨 볼일인지는 물어보지 못했었지. 들어봐야 속만 상할 게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가 된다. 물어봤더라면 미도리마는 답을 해 주었을 것이고, 그러면 이 재미없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을. 적어도 미도리마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에 대한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게다.
‘청승맞기는.’
피식 웃으며 아카시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연주자에게 기립박수를 치는 다른 관객들 틈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큰일이다. 연주는 끝났는데, 대체 얼마나 훌륭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이런 큰 홀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인데다 기립박수까지 받았으니 실력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뭐라고 말을 지어내나.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콘서트를 빌미로 아버지가 허락한 휴식시간은 오늘 밤 10시까지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보고서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만 할 것이다.
‘미도리마는 지금쯤…….’
또다시 피어오르는 한심한 생각을, 두세 번 고개를 저어 떨쳐낸 아카시는 핸드폰 전원을 켰다. 대기화면이 뜨자마자 메일이 도착했다는 안내가 떠올랐다. 메일의 발신자는- 미도리마 신타로. 제안을 거절해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그것은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아카시는 핸드폰을 그대로 재킷 주머니에 넣고 콘서트장을 나오는 사람들 틈에 섞였다. 그럼, 어딜 갈까. 근처 호텔에 있는 카페라도 들어갈까.
‘……어?’
그리고 아카시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콘서트홀 1층의 로비에 서서,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익숙한 장신의 인영.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고 손으로 문질러도 봤지만 아카시에겐 그 인영이 아무리 봐도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콘서트 내내 미도리마에 대한 생각을 해서, 시신경이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런 우문은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을 때 들려온 목소리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카시.”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마의 목소리. 자신을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두 눈. 대체 왜 이것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제 귀와 눈으로 직접 겪고도 실감이 나질 않아 천천히 미도리마에게 다가간 아카시는 자신이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연주는 잘 들었나? A석 티켓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면 들어갔을 텐데, 아쉽군.”
“미도리마, 왜 여기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오늘 점심 기차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아, 너한테는 말하지 않았었지. 어제 가족여행을 떠났는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나 먼저 올라온 거다.”
“나를 보러?”
“당연하다는 것이다.”
거짓말. 가족 여행까지 가 놓고서, 굳이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와 준 거라고? 아직도 제 앞에 있는 미도리마가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려,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는 보이지 않게 자신의 손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아무래도 정말 현실인 모양이다. 그런 답을 얻은 아카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무방비한 미도리마의 품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갑자기 제 허리를 껴안는 아카시의 모습에 미도리마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왠지 고개를 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야, 이렇게 얼굴이 새빨개졌는걸. 부끄러워서 보여줄 수 없어.
“……네가 이러는 걸 보니, 일부러 먼저 올라온 보람이 있었군.”
바보같이. 당연하잖아. 믿겨져? 나는 지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구.
“이제 어떻게 할까. 시간은 얼마나 있지?”
“……두 시간.”
“데이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군. 이제 어떻게 할까?”
“……우선, 좀 안아 줘.”
그 무리한 요구에 미도리마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는 두 팔에 아카시는 비로소 지금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고마워. 작게 중얼거린 말이 미도리마에게도 닿았는지, 머리 위에서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16.
비상구
비상구
: [명] 화재나 지진 등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때에 급히 대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한 출입구.
쾅.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카시 세이쥬로의 두 팔이 강하게 미도리마 신타로의 등을 감싸안았다. 미도리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학교에 마련된 비상계단은 여느 다른 건물들이 그러하듯 불이 꺼져 있어,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아카시의 지금 심정이 어떤지는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자신의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감정과는 동일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처음 아카시가 이런 행위를 요구해 온 건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을 때였다. 세 문제, 아니, 네 문제였던가. 그 정도의 차이로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이기는 것을 실패했다. 전교 2등이라는,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내두르며 부러워할 등수를 보면서도 미도리마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번 중간고사를 위해 평소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주말의 음악 감상 시간까지 줄여가며 공부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카시를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실망을 느끼며 옆에 서 있던 아카시를 돌아본 미도리마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교 1등. 모든 성적은 만점. 그런 결과를 보면서도 아카시는 전혀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우울해 보였다. 그 우울한 얼굴의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아카시, 하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아카시는 고개를 들어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는 듯. 미도리마. 필사적인 목소리가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와 미도리마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하고 같이 가 줄래? 그렇게 말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필사적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아카시의 뒤를 따라온 미도리마는 비상구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거냐.’
차마 아카시에게는 할 수 없는 질문을 속으로만 던지면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카시가 더 깊이 미도리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제 손길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것만 같아 머리에서 손을 뗐을 때 가라앉은 아카시의 목소리가 미도리마의 귀를 스쳤다.
“하지 마…….”
“아,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손 떼지 마.”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손을 잡아끌어 제 머리에 도로 올려놓았다. 쓰다듬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정쩡하게 아카시의 정수리 위에 올라온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미도리마는 다시 아카시의 머릿결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처음 이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는 불에 탈 것처럼 뜨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뜨거운 것은 자신의 손 뿐이다. 아카시의 몸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끝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그 온도에 미도리마는 다시금, 방금 전의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가.
그 질문에, 미도리마 신타로 나름대로의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비상구로 끌고 오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다. 하나. 시험 결과가 나왔을 때. 둘. 장기 대국이 끝났을 때. 그 두 가지 상황의 공통점은 단 하나,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승리‘를 위협할 때라는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긴장하고 있다.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도전자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왕좌 바로 아래까지 다가오는 것에. 하지만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카시 세이쥬로는 대체 왜, 그 긴장을 미도리마 신타로의 품에 안겨 해결하려고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내게 달가운 답은 아니겠지.’
짧게 한숨을 쉬고 미도리마는 다른 한 손으로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요하기만 한 아카시의 심장 소리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네가 닿는 것만으로도, 네가 나를 찾는 것만으로도, 네가 내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너는 평생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주지는 않겠지. 그러기에 나는 너에게 너무도 위협적인 존재일 테니까.
하지만, 아카시. 그렇다면 너는 왜, 내게서 안식을 찾으려 드는 거지.
아마 평생 나오지 않을 답을 요구하며,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천천히 제 페이스를 되찾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쏟아지는 빛 속에서 다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부실로 돌아가자고 말할 순간을.
비상구는 원래 탈출을 위해 만들어진 문이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때를 대비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는 통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말로 그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비상구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해 탈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무시무시해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에는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기 마련이다. 방금 전까지 제 옆에서 웃고 있던 친구나 동료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구하고 말겠다는 욕구. 화재나 지진 현장에서 탈출하려던 사람들이 서로 밟아 죽이고 마는 끔찍 사고가 높은 빈도로 일어나는 것은 모두 그런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비상구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 그곳을 통해 탈출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므로.
그래, 미도리마. 너는 내게 그런 존재야.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네가 그 잘 벼린 투지의 창으로 내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너를 멀리할 수 없어. 너를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더는 내 본능이 그걸 거부하질 못해.
‘미안해…….’
미안해, 미도리마.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나는 네게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
15.
소년의 사진첩
“이, 이건 대체…….”
이변을 처음으로 자각한 것은 어느 봄날.
미도리마 신타로는, 제 핸드폰 안에 가득한 붉은 사진에 기겁하고 있었다. 대충 눈으로 훑어봐도 50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 사진들은 저마다 한 명의 모습을 담고 있었고, 그 대상은 의아한 표정을 한 채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년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찾다 말고 갑자기 굳어져 버린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은 여기…….”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쥔 채 그대로 아카시 쪽으로 화면을 돌려주었다. 핸드폰 화면 가득 드러난 것은 여동생의 사진이었다. 지난 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대기실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으로, 발레 콩쿠르 이야기를 했을 때 아카시가 ‘보고 싶다’고 말했기에 찾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요구로 미도리마를 당황하게 한 장본인은 원하던 사진을 눈에 담았음에도 왠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던 것이, 미도리마가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화면만 돌려주었던 까닭에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책상 앞으로 몸을 잔뜩 숙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보기 힘들다는 투덜거림을 그대로 입에 담았지만, 미도리마는 끝까지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아카시가 다른 사진을 찾아 -> 버튼을 누른다면. 그리고 사진첩에 가득 담겨 있는 그 사진들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다.
“이, 이제 됐냐는 것이다.”
“뭐…… 충분히 기뻐 보인다는 것까지는 알겠어.”
자기가 먼저 보고 싶다고 한 것치고는 왠지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미도리마에게는 그 상황의 어색함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카시의 관심에서 제 핸드폰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에,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몸을 일으켜 등을 꼿꼿이 세우자마자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수상해. 아카시의 두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제 잡담은 끝이야. 부활동 시간이 다 됐다는 것이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면 가자.”
다행히도 아카시는 아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활동이라는 새로운 화제에 미도리마의 핸드폰에 대한 관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아카시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여동생의 사진에서 -> 버튼을 누르자, 바로 화면 가득 아카시 세이쥬로의 얼굴이 떴다. 모든 사진이 아카시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옆모습을 찍은 것들이다. 아무래도 과거의 자신은 아카시 본인의 앞에서 아무런 동의 없이 바로 촬영 버튼을 누르는 건 실례라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많은 사진은 언제 다 찍었다는 거냐…….’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상당한 중증이다. 인간이 스스로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촬영 버튼을 눌러 아카시의 일거수일투족을 화면에 담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지? 게다가 사진으로 보는 아카시는 평소 그의 앞에 서면 느껴지는 위압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하고 온화해 보이는 모습뿐이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다거나, 얼굴에 가득 맺힌 땀을 닦고 있다거나, 혹독한 연습에 다소 늘어진 채 앉아 있다거나. 아, 그런가. 지금 여기 찍혀 있는 아카시는 평소 그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매 순간의 표정들이다. 그 공통점을 알아차린 순간 미도리마는 자신이 왜 그렇게 아카시의 사진을 찍어댔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카시.”
“응? 왜?”
아카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에 남은 아카시는 옅은 미소를 띠고 미도리마를 돌아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왜?‘ 하고 다시 물을 것 같은 생생한 모습. 사진을 저장하고 고개를 들자 아카시가 정해진 수순처럼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사진은 왜 찍었어?”
“……갖고 싶어서.”
“내 사진을? 왜?”
왜일까.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매 순간을 이렇게 보관해 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아카시의 얼굴에 살짝 드러났다 사라질 뿐인 순간순간의 모습들을. 대체 그런 충동이 어디서 오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저 너의 순간순간을, 가지고 싶었다.
14.
딸꾹질
“윽, 우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라는, 고작 중학교 2학년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닌 생각을 하면서 미도리마는 눈앞의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내 평생 아카시 세이쥬로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줄이야. 물론 미도리마의 이런 태연한 생각과는 달리 장본인인 아카시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코를 막은 채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그 호기심은 컵을 입술에서 뗀 직후 아카시에게서 흘러나온 괴로운 소리에 해결되었다.
“……멈추질 않는군, 딸꾹질.”
“으응…… 히끅. 숨도 참아봤고, 윽, 물도 지금 벌써 몇 잔짼지…… 으읏.”
“설탕을 한 숟갈 먹어본다는 방법도 있다만.”
“지금 설탕을…… 히끅, 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긴 그렇다. 미도리마는 납득한 채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물론 아카시의 딸꾹질하는 모습을 감상하느라 아까부터 한 글자도 읽고 있지는 않았지만.
점심시간이 끝나고 갑자기 시작된 아카시의 딸꾹질은 부활동 시간이 가까워 오도록 멈추지를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딸꾹질 소리 참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 아카시는 무척 괴로운 듯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미도리마에게는 입을 막고 수업을 듣는 아카시를 상상하다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리지 않도록 참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설마, 천하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딸꾹질 하나에 맥을 못 출 줄이야.
“이대로는…… 히끅. 부활동에 지장이 가겠지……? 히끅.”
“아오미네나 키세가 미친 듯이 웃어댈 게 눈에 보이는군.”
“그랬다간 당장…… 히끅. 운동장을 돌게 시킬 거야.”
“‘물 마시기’와 ‘숨 참기’까지는 해봤다고 했지? 제일 유명한 방법은 왜 쓰지 않는 거냐?”
“제일, 히끅, 유명한 방법이라니?”
“‘놀라게 하는 것’.”
“아아…… 그런데, 히끅, 웬만한 일에는 나, 윽, 그다지 놀라지 않잖아?”
순간 딸꾹질을 백 번 하면 죽는다는 도시전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점심시간부터 지금까지 쭉 계속되고 있으니 백 번은 진작 넘었겠지만. 그 이야기를 해 주면 어이없어서라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미도리마의 머릿속에 아카시를 놀라게 할 절호의 방법이 떠올랐다.
“그럼 나만 쓸 수 있는 치료법은 어떨까.”
“그게, 히끅, 뭔데?”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미도리마는 몸을 아카시 쪽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불쑥 다가온 미도리마의 얼굴에 아카시가 막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에, 미도리마는 눈을 감고 아카시의 입술에 살짝 입맞췄다. 입술을 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입술을 뗀 직후의 아카시는.
“어떠냐. 딸꾹질, 멈췄지?”
“……확실히.”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목과 입술을 만져보던 아카시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를 기점으로 천천히 아카시의 얼굴로 퍼져 나가는 붉은 빛깔에 미도리마는 안경을 끌어올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말 미도리마밖엔 쓸 수 없는 방법이네.”
“그렇다고 했잖나.”
“하지만 그건 구실이고, 그냥 단순히 키스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던 거 아니야?”
아카시가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책망하는 기색보다는, 이대로 미도리마에게 상황을 리드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모종의 고집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의도에 맞춰 주는 것 대신, 자신의 솔직한 기분을 말로 하는 것을 택했다.
“……그럴지도.”
“푸훗…… 방금 그 말에는 좀 놀랐어, 미도리마.”
“그래?”
“그런데 딸꾹질은 진정됐지만, 아무래도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자, 봐. 하면서,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손을 잡아끌어 제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두근…… 아무리 들어도 보통 사람의 심박수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아카시의 심장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바라보았고, 아카시는 그런 미도리마를 향해 수줍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걸 고치려면 또 다른 치료법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해줄래?”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미도리마는 눈을 살포시 감는 아카시에게로 다시 몸을 숙였다.
곤란하게도, 입술이 닿은 순간 그 고동이 제 심장에도 옮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3.
빚
“신타로, 50엔만 빌려줄래?”
뜻밖의 장소-학교 안에 설치된 자판기 앞-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싶었더니, 또다시 그런 생뚱맞은 제안을 들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주머니를 뒤져 꺼내 준 50엔 동전이 그대로 상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고마워, 라고 짧게 인사한 아카시 세이쥬로는 제 지갑을 열어 방금 전 미도리마가 건네준 것과는 다른 50엔 동전을 꺼내 그대로 자판기 안에 밀어 넣었다. 자판기에서 캔이 튀어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미도리마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돈이 있었으면서 빌려달라고 했던 거냐.”
“나한테 돈이 부족한 거 본 적 있어?”
“대체 이걸로 얼마짼지 알고나 있는 거냐.”
“뭐야, 고작 50엔 가지고. 지금 필요해? 갚아줄까?”
아카시가 지갑을 흔들어 보였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지갑 안에는 아마 동전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내 말은, 돈이 있으면 딱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굳이 부연설명 하지 않아도 제대로 그렇게 알아들었어.”
“그럼 그건 무슨 의미지?”
주머니를 가리킨 손가락에, 아카시는 빤히 그것을 바라볼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질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이렇다. 갑작스러운 행동과 말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놓고, 그 행동의 의미를 전혀 가르쳐 주질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시는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음료수와 거스름돈을 들고 미도리마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따 부실에서 봐. 작게 속삭인 그 말이 미도리마의 귓가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아카시의 등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복도 저 멀리로 걸어가는 아카시를 빤히 쳐다보다, 미도리마는 참고 있었던 기다란 한숨을 뱉으며 자판기에 기대섰다.
“뭐가 ‘무슨 의미지?’ 냐…….”
아카시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그 동안 매번 미도리마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아카시는 대답을 회피한 채 웃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 열 번이라도 계속되면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이상 화를 내거나,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거절의 말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으로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진 빚은 자그마치 300엔이다. 열 번이 다 뭐냐. 50번이 넘도록 아카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분명 문제는 있는 것이다. 아카시는 분명 그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다음에도 미도리마를 발견하면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미련이다. 그리고 끝까지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도- 아마 아직까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의미겠지.
미도리마는 또다른 50엔 동전을 자판기에 밀어 넣고 단팥죽을 꺼내 유유히 자판기 앞을 벗어났다. 어느새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된 50엔 동전들이 주머니에서 짤랑대는 소리가 났고, 그런 자신은 정말로 한심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12.
천명
“미도리마, 타월 좀 건네 줘.”
“미도리마, 나 저게 마시고 싶어.”
“미도리마, 이 책 읽어 줘.”
“미도리마, 피아노 쳐 줘.”
“미도리마.”
“-이제 적당히 좀 하라는 것이다.”
그 말에, 미도리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아카시가 왜? 하고 묻는 듯한 시선을 미도리마의 얼굴로 던졌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라고 묻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미도리마가 무엇을 불만스레 여기는지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아카시는, 당장 일어나라는 듯한 눈빛을 완강하게 보내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대체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이 정도의 일을 부끄러워하는 거야?”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네 쪽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대체 왜 그렇게 어리광이 심해진 거냐? 부주장이 된 뒤로 시도때도 없이 미도리마, 미도리마, 하고 부르질 않나,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부실에서 사람 무릎을 베고 태평하게 누워 있질 않나.”
“그야 미도리마가 다 받아주니까 그렇지.”
할 말 없음.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아카시의 말대로다. 최근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어리광을 지나치게 받아주어 아오미네나 하이자키 등의 다소 건방진 무리들에게 ‘보모’ 라는 굴욕적인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마 칠 할이 어리광을 부리는 아카시의 탓, 나머지 삼 할이 그것을 받아주고 마는 미도리마의 탓일 것이다. 하지만 7대 3이다. 어딜 봐도 잘못하고 있는 쪽은 아카시가 아닌가- 그런 억지 논리로, 미도리마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미도리마의 모습이, 자신의 말을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카시는 짧은 한숨을 뱉고 미도리마의 어깨에 살며시 제 어깨를 기댔다. 그러니까,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부실에서 이런 행동을 또- 하고 본능적으로 잔소리를 해 주려던 미도리마의 결심은 아카시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꺼내기 시작한 이야기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뭐, 사실 나라고 해서 이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야. 이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광고하고 다니는 셈이니까. 내 평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테지. 만의 하나라도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다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고-“
“그렇게 잘 알면 왜……“
“하지만 미도리마가 그렇게 해 주는 게 좋으니까.”
침묵. 그리고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아카시의 목소리가 다시 맴돌았다. 좋아해. 좋아해, 미도리마. 공교롭게도 그런 고백을 받은 장소 역시 부실이었다. 책상 맞은편에서 생긋 웃으며, 그러면서도 약간은 긴장한 기색으로 좋아해, 라고 말하던 어느 날의 아카시의 모습.
「미도리마라면, 뭐든지 받아줄 것 같았어.」
“참 좋은 거더라. 누군가에게 약간 억지 섞인 요구를 하고, 그 상대가 그걸 들어주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일이…… 그런 사소한 어리광이…… 여태까지 내게 그런 걸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왠지 자랑하고 싶어졌나 봐. 나는 이렇게 사랑 받고 있다고.”
「미도리마라면, 뭐든지 해 줄 것 같아서.」
「언제든지 날 도와 줄 수 있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외로울 때 옆에 있어 줄 것 같아서.」
그 대답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연인’이 아니라 ‘보모’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앞으로도 제 옆에 있으면서 제 요구를 모두 들어달라는 이기적인 부탁을 늘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 아카시 세이쥬로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고 마는 것처럼. 아마 그는 평생 그런 인생을 걸어가리라.
“그렇게 자랑이 하고 싶거든, 아예 전교생 앞에서 키스해 달라고 하지 그래.”
“화려하게 커밍아웃하자는 거야, 지금? 그런 걸 부탁하면, 해 줄 수는 있고?”
“확실히 뒷감당이 골치 아프겠군. ……골치 아프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왜 하필이면 내가 좋다는 거지?」
그런, 자신의 대답과는 아무 관계없는 질문을 던지면서까지 아카시의 심중을 확인하고, 그의 고백이 장난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미도리마는.
이유라면 뭐든지 좋았다.
「내겐 미도리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오직 그 말을, 원했다.
“지금 깨달은 거다만, 아카시. 네가 어리광쟁이가 된 건 결코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누구 탓인데?”
“운명 탓이지. 그런 인생을 살아온 너를 하필이면 내 앞에 던져놓은 운명.”
“정말 미도리마는 그 단어를 좋아하네. ……하지만, 최근엔 나도 그 단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
후훗. 짧게 웃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어깨에 손을 얹고 미도리마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의 운명이 말했다.
“전교생 앞에서는 할 필요 없으니까, 지금 여기서 키스해 줘.”
그것이 제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천명은 받든다.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좌우명이었다.
11.
별장
창문으로 희미하게 노을빛이 들어오는 작고 낡은 집. 녹슨 찻주전자. 방 안을 아름다운 선율로 채워주던 CD플레이어.
그 방의 모든 것을 만든 것은 바로 너였다.
“별장?”
여기가? -라고 묻고 싶은 것을 미도리마 신타로는 간신히 참아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무슨 질문을 던져도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별장이라면 별장이겠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 아카시의 뒤에 서서 미도리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집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어딜 봐도 ‘풍경’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광경이었다. 아니, 풍경이 소멸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부지라고 하기에 뭐라도 지어 놓았을 줄 알았는데, 주변은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텅 빈 대지 위에 아카시가 지금 문을 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작은 집 하나만이 서 있는 공간.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택한 휴식처였다.
“아, 됐다. 경첩이 낡았는지 잘 안 열린다니까.”
“용케도 열었다는 것이다…….”
“? 문을 못 열면 못 들어가잖아?”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짧게 웃은 아카시가 문을 열어주었다. 사람을 이미지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미도리마는 사실 이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과 교체해 휴가를 떠나는 관리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집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집 안에서 흘러나온 시큼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데서 하루를 보내겠다니, 아카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흘깃 옆을 돌아보았지만 짐을 내려놓는 아카시는 정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카시는 제 주변이 어지러워도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잘 알아차리지 못하곤 했다. 주변을 어지럽혀도 치워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쨌든, 낡아빠진 이 집과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존재는 마치 금반지를 신문지로 포장한 것 마냥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카시, 여기서 대체 뭘 할 생각이지?”
“우선 차부터 마시자. 미도리마는 뭐가 좋아? 다즐링이랑 얼 그레이가 있어.”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찬장에서 찻주전자를 꺼냈다. 뚜껑에는 먼지가 쌓여 있고 표면에는 녹이 슨 찻주전자는 도저히 차를 맛있게 우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전기포트를 가져오는 건데 그랬다. 후회하면서,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꺼낸 두 종류의 티백 중 다즐링을 골랐다. 다즐링은 밀크 티로 만들어 마시는 게 더 좋다고 하면 안 되겠지. 여기에 밀크 팬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다행히 아카시는 찻주전자에 바로 티백을 넣을 생각은 없는지, 이 빠진 두 개의 머그컵을 꺼내 티백을 하나씩 넣었다. 가끔은 티백 홍차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아카시에게서 시선을 떼고, 미도리마는 방 구석에 놓여 있는 방석을 두 장 꺼내 가득 쌓인 먼지를 깔끔하게 털어냈다.
“미도리마, 구석에 CD플레이어가 있거든. CD 가져왔으니까 틀어 줘.”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며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가방을 뒤져 CD를 꺼냈다. 어쩐지 낯익은 재킷이다 했더니, 얼마 전 자신이 아카시에게 선물한 CD였다.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카시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무렵, 동네의 음반 매장을 전부 뒤져서 찾아낸 CD였다. 그것을 받고 무척 좋아하던 아카시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아카시의 저택이라면 분명 더 좋은 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도 굳이 이걸 가져온 것은, 아카시 나름대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CD 삽입구의 먼지를 불어 내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서정적인 피아노곡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kiss the rain’…….”
“아하, 그런 제목이었구나. 몰랐네.”
어느새 차가 다 끓었는지 아카시가 머그컵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중 하나를 건네받은 미도리마는 머그컵에 그려져 있는 깜찍한 캐릭터 그림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딜 봐도 어린애가 쓰는 컵 아닌가. 이런 게 왜 여기에. 의문을 담아 아카시를 바라보았지만,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아니라 바닥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방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런 걸 왜 깔았어?”
“곰팡이 슨 바닥에 그냥 앉을 셈이냐.”
“그게 아니라. 방석은 하나면 충분하잖아.”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아카시는 발로 방석을 밀어 치우고는 미도리마의 무릎 위에 냉큼 앉아버렸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미도리마가 비명을 지르거나 아카시를 밀어내지 않은 것은 오로지 갓 끓여 뜨거운 홍차가 담긴 컵이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당황한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태연하게 미도리마의 어깨에 등을 기대고 홍차에 입술을 댔을 뿐이었다. 물론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아카시가 갓 끓인 홍차를 바로 마신다는 건 무리였는지 바로 입술을 떼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그런 행동에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차가 뜨겁다는 걸 잘 알면서도 굳이 입술을 댔다는 건, 아카시 나름대로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그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이 곡의 제목을 몰랐던 거냐? CD 재킷에도 써 있었는데.”
“몰라. 아직 안 들어봤거든.”
“기껏 선물을 줬더니 한다는 말이 그거냐…….”
“하지만 미도리마가 준 거잖아? 맨 처음 들을 땐 미도리마와 함께 하고 싶었어. 나도 열어보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살짝 찌푸린 아카시의 얼굴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쑥스러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더는 책망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웃고, 천천히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기분 좋은 듯 아카시가 눈을 살짝 감고 미도리마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이런 곳을 네가 ‘별장’ 으로 삼고 있었다니, 의외인 것이다.”
“꽤 오래된 집이지?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상태였어. 아, 그때는 관리인이 없어서 더했지. 처음 여기서 쉬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얼마나 싫은 표정을 했는지 몰라. 미도리마에게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어릴 때부터 왔던 곳이냐?”
“자주 오진 못하고, 아주 가끔. 외출 허가를 받았을 때만 왔었어.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락받아도 갈 데가 없었거든.”
가슴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카시가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그만큼 안타까웠다. 문득 처음 아카시 세이쥬로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만인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선 존재. 하지만 그가 올라서 있는 ‘승리’ 라는 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완벽함’이라는 벽은 타인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매우 쓸쓸해 보였더랬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부동산 투기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지어진 이 낡아빠진 집처럼.
‘그렇군. 그래서 너는 이곳으로 온 건가.’
이 집이, 너를 닮았기 때문에.
“찻주전자도, 머그컵도, 티백도, CD 플레이어도, 모두 내가 가져다 둔 거였어. 물론 본가에서 쓰는 걸 가져올 수는 없어서, 고용인들이 쓰다 버리려는 걸 가지고 온 거지만. 한동안 들르지 않았더니 먼지가 많이 쌓였네.”
“그렇군. 하지만 마음 편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 여기 들어올 때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는데.”
“하루 종일 같이 있을 곳이 있다면서 데리고 온 곳이 여기였으니 당연하지.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제법 귀하게 자란 몸이란 말이다.”
“하핫, 미도리마가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해.”
아카시가 머그컵을 내려놓고 미도리마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카시가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얼굴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이마에, 뺨에, 콧등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자 아카시가 후훗, 하고 짧게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웃음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그 탑에 매달려, 그 벽을 뛰어넘은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 사실이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아카시는 알고 있을까. 아니,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이 곳으로 미도리마를 데리고 온 것이다. 넓고 화려한 집의 어디에서도 안정을 취할 수 없었던, 때문에 본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아빠진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을 미도리마 신타로와 공유하기 위해서. 그것이 너무도 기뻤고, 행복했다.
“좋은 곡이네. 미도리마를 위해서 미니 피아노라도 들여놓을 걸 그랬나 봐.”
“이런 곳에서 콘서트를 여는 건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다. 듣고 싶다면 음악실에서 연주해주지. 낡은 피아노에선 좋은 곡을 들을 수 없어.”
“그래? 난 미도리마가 연주해 준다면 뭐라도 상관없는데.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만 쳐 줘도 좋아. ……응, 좋아.”
자신을 납득시키듯 중얼거리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입도 대지 않은 머그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미도리마 역시 아카시의 등에 손을 둘렀다. 가볍게 껴안은 아카시의 몸은 따뜻하고, 동시에 세게 끌어안으면 부서질 듯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미도리마. 내년에도 같이 와 줄래?”
“얼마든지.”
“그 다음 해에도?”
“그래.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네가 나를 옆에 두는 걸 허락해 준다면, 언제든지.”
그 말에 끌어안은 아카시의 어깨가 왠지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도리마는 입을 다문 채 그의 몸을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나는 너의 안식이다, 아카시. 그러니까, 그 자리를 나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
10.
미도리마 신타로의 하루
6:30 기상
이부자리를 개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6:50 아침식사(메뉴는 언제나 일식)
7:00 오하아사 방송을 확인하며 전날에 챙겨 둔 럭키 아이템을 점검
7:30 등교
7:45 교문 앞에서 아카시 세이쥬로와 조우, 이야기(주로 농구부 연습 관련)를 하며 교실로 이동
9:00 수업 시작(1교시)
9:50 수업 종료, 핸드폰으로 장기 대국
10:00 수업 시작(2교시)
10:50 수업 종료, 1교시에서 이어지는 장기 대국(결과는 패배)
이하 12:00까지 반복
12:10 아카시 세이쥬로와 식당으로 이동, 농구부원들과 조우
12:20 점심식사
쿠로코 테츠야의 핀잔-“미도리마 군은 분명 반은 아오미네 군과 함께인데, 늘 따로 오는군요. 너희들, 사이가 좀 좋아지면 어디가 덧납니까?”-
12:40 점심식사 끝, 3교시에서 이어지는 장기 대국(결과는 패배)
13:00 수업 시작(5교시)
13:50 수업 종료, 핸드폰으로 장기 대국
14:00 수업 시작(6교시)
14:50 수업 종료, 청소 시작
15:10 홈룸이 종료된 뒤 교무실로 이동, 농구부 부실 열쇠를 빌려 부실로 이동(간혹 열쇠가 없는 때도 있음), 이후 15:20까지 부실에서 아카시 세이쥬로를 기다림
15:20 간단한 대화(그날에 따라 다름)이후 장기 대국 시작
15:50 장기 대국 종료(결과는 패배) 이후 아카시 세이쥬로와 농구부 체육관으로 이동, 기초체력연습 이후 훈련 시작
18:30 부활동 종료, 탈의실에서 모두 함께 옷을 갈아입음
18:40 탈의실을 나가려는 찰나 아카시 세이쥬로의 호출을 받음
키세 료타의 투덜거림-“두 사람 정말 같이 안 가요? 오늘은 기껏 내가 아이스크림 쏘는데!”-
아오미네 다이키의 비웃음-“오늘‘도‘겠지. 너 오늘도 나한테 1on1 졌잖아?”-
또다시 이어지는 키세 료타의 투덜거림-“우씨! 내일은 이길 검다!”-
18:45 아카시 세이쥬로가 품에 안김
18:46 아카시 세이쥬로와 키스
18:47
아카시 세이쥬로의 고백-“정말 좋아해, 미도리마.”-
19:10 아카시 세이쥬로와 함께 교문을 나섬, 역까지 함께 걸어감
19:20 아카시 세이쥬로와 역에서 헤어짐, 다음 날의 럭키 아이템을 보충함
19:40 귀가 후 간단한 저녁식사
20:00 독서
아카시 세이쥬로의 메일-“잘 들어갔어? 늦게까지 붙들어둬서 미안해.”-
답장-“뭘 새삼스레. 하루이틀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동안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함
읽고 있던 책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잊어버림
21:00 예습 및 복습 시작
23:00 예습 및 복습 끝, 이후 목욕
23:30 취침 준비 후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메일-“잘 자라는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답장-“잘 자, 내일 만나.”-
23:40 취침 전 스트레칭
23:45 취침
그 모든 것이, 행복.
9.
학원제
“미도리마, 도와 줘-“
아카시의 이런 간절한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본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가 질질 끌고 오고 있는 커다란 자루에 기겁했다. 대체 이게 다 뭐냐는 것이다. 당황하여 아카시에게 다가가 자루를 건네받자, 간신히 고개를 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복장을 보고 폭소를 터트렸다.
“뭐야, 그게. 뭘 입고 있는 거야?”
“점성술 카페에서 준비해 준 로브라는 것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지. 사람들 많이 왔어? 힘들었겠네.”
“오하아사를 그대로 읽어줄 뿐이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이건 다 뭐냐.”
혀를 차며 열어본 자루에는 온갖 과자와 선물 상자가 보였다. 그 중 몇 가지는 눈에 익은 것이었다. 장기부, 바둑부, 체스부에서 경품으로 건 물건들이다. 왜 학원제에서 도장 깨기 같은 걸 하고 다니는 건지, 원. 혀를 차는데도 아카시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미소. 그래, 아카시 세이쥬로라면 납득이 간다. 애초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가 누군가에게 장기, 바둑, 체스 같은 것으로 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상대가 자신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다는 게 조금 비참한 일이기는 했지만.
“바둑이나 체스는 꽤 싱겁게 끝났는데, 의외로 장기부 부장이 제법 버티더라.”
“의외라니…… 그 선배는 프로 기사들 쪽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아, 어쩐지. 수가 묘하게 정석적이다 싶었어. 그래도 역시 아마추어던걸.”
“재미있었나?”
“응, 무척. ……아, 그래도 미도리마랑 둘 때만큼 재미있진 않았어.”
기분이 좋으라고 그냥 해 본 말인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미도리마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아카시가 끌고 가고 있던 자루를 어깨에 둘러멨다. 깜짝 놀란 듯 미도리마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얼굴에는 ‘내가 들 수 있었는데’ 하는 핀잔이 어려 있었지만, 그 핀잔에는 미도리마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는 기색도 동시에 섞여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미도리마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가하고 있는지, 아카시는 차마 알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뭐 해?”
“스탬프 랠리에 참가하고 있는 것 같더군. ……아까 쿠로코와 모모이에게 오늘의 럭키 아이템을 강탈당했다는 것이다. 도로 찾아왔지만.”
“대단한걸. 우승하고 싶어서 필사적인가 봐.”
“쿠로코는 원래 승부욕이 강한 녀석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모모이는 조금 의외였다는 것이다.”
“이 대회에는 특전이 있으니까.”
“농구화 말이냐? 굳이 챙겨 주지 않아도 아오미네는 좋은 걸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그걸 노리는 건 쿠로코 쪽. 모모이는 또 다른 특전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닐까?”
“또 다른 특전이라니?”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제법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이 대회에 커플로 나가 우승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 뭐라나.”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면, 지금쯤 허공에 분사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미도리마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사랑? 사랑이라니? 그런 소문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것 정도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설마 아카시 세이쥬로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의아함이 솔직하게 드러난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자 또 웃음이 나오는지 아카시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작게 웃었다. 아카시 나름대로는 미도리마를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당사자인 미도리마로서는 그 행동이 훨씬 더 부끄러웠다. 차라리 깔깔 웃어주면 좋을 것을. 아카시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미도리마도 많이 받지 않았어? 같이 스탬프 랠리에 나가달라는 제안. 나는 학원제 일주일 전부터 받았는데.”
“그야 그랬지만,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오늘 아침에야 니지무라 선배한테서 들었거든. 괜히 아까워지지 뭐야.”
“여학생들과 같이 안 나간 게 말이냐.”
약간의 비아냥이 담긴 목소리에 아카시가 다시 푸훗,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겸연쩍어진 미도리마가 시선을 돌리자, 아카시가 가만히 미도리마의 빈 손을 붙잡아 왔다.
“바보. 너한테 같이 나가자고 안 한 걸 후회했던 거라구.”
“……필요 없잖나, 그런 특전은.”
“응, 우리한테 그런 건 필요 없지.”
생긋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카시의 미소와 정면으로 마주하자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을 꼭 잡고, 그러면서도 주변의 시선을 약간씩 신경 쓰면서, 아카시와 마주쳤을 때부터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아카시…… 부실로 가지 않겠나?”
“응? 나야 괜찮지만, 카페에 돌아가 보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다. 애초에 객원 참가였으니,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미도리마치곤 무책임한 발언인걸. 인사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부턴 내게 인사를 다할 생각인가?”
대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질문을 입에 올리는 건 아카시의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그것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자신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 미도리마는 대답 대신 아카시의 손을 꼭 잡고 부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뒤를 따라오는 아카시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는 얼굴을, 숨결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8.
새로운 관계
“신타로,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할까?”
등 뒤에서 들린 아카시의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흠칫 놀라 돌아섰다.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동안 아카시는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달 전, 모든 부원들에게 ‘연습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폭탄선언을 한 뒤로 본인 역시 연습에 나오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던 것이다. 어쩌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낼라 치면 부원들의 연습을 그저 체크하기만 할 뿐 본인이 공을 잡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지금도 아카시는 연습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미도리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남의 연습을 방해하는 그 심보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동시에 ‘지금의’ 아카시가 자신에게 말을 걸 만한 사안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잡고 있던 공을 바구니에 돌려놓고는 아카시를 따라나섰다. 바로 코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카시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서 걷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착잡함은 탈의실에 들어와 문을 닫은 아카시가 자신의 눈을 바라본 순간 사라졌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얼굴은 새하얗고, 또한 붉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아카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의 존재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카시는- 다르다. 그 흔들림 없던 붉음은 어느새 ‘녹슬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것이다.”
“그게 말야, 오늘 이런 걸 받았어.”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하나의 흰 봉투였다. 그 봉투 위에 적혀 있는 글씨를 발견한 순간 미도리마는 할 말을 잃었다. ‘퇴부서’. 마치 그 주인의 체구를 상징하듯 작고, 동시에 그의 굳은 의지를 상징하듯 단호한 글씨는 쿠로코 테츠야의 것이었다.
“정말 테츠야답다니까. 이런 걸 굳이 써올 필요는 없었는데, ‘하이자키 군도 쓰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더라고. 하이자키 때와는 상황이 다른데 말이지.”
“……그래서 넌 뭐라고 말했지?”
“부원의 탈퇴를 나 혼자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코치님께 말씀드렸더니, 너하고 상의해 보라고 하셨어.”
“왜 나하고.”
“그야 네가 부주장이니까.”
부주장?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코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부주장’의 의견이 아카시에게 필요했는가. 물론 예전에는 그랬을 수도 있었다. 리더십이 있고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익숙한 아카시가 주장을, 그런 아카시를 보조할 능력이 되고 또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자신이 부주장을 맡아 이 2년간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를 이끌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지금의 자신은 이름만 부주장일 뿐, 모든 의사 결정권은 아카시에게 있지 않았는가.
“굳이 내 의견을 물어볼 것까지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겠네. 하지만 나는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야, 신타로. 어떻게 하면 이걸 원만하게 ‘거절할’ 수 있을지를 묻는 거지.”
미간이 움찔했다. 거절? 거절이라니. 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어 모습을 감추려는 사람을 붙잡겠다는 의미인가. 쿠로코 테츠야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쿠로코가 무슨 생각으로 저 퇴부서를 썼을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쿠로코를 붙잡으려는 거지? 정식 시합은 끝났다는 것이다. 지금 나가 봐야 은퇴를 한 달 정도 앞당길 뿐이야.”
“확실히 테츠야에게 이용가치는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이끄는 부에서 벌써 두 명의 탈퇴자가 나왔어.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지.”
“쿠로코의 의지는 어떻게 되지? 네가 신경 쓰는 건 네 자신의 명예욕뿐인가?”
“……묘하게 테츠야의 편을 드네, 신타로.”
순간 아카시의 두 눈에 스쳐 지나간 감정을 미도리마는 똑똑히 읽어낼 수 있었다. ‘질투’. 지금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와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고 만 단어. 그래서 미도리마는 당황했고, 그 바람에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한 발자국 제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묵인하고 말았다. 퇴부서를 도로 가방에 돌려놓은 아카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제 얼굴에 가득 담고서 미도리마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끌어안아 달라’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미도리마의 손은 아래를 향한 채 움직일 줄 몰랐고, 아카시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양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정색하지 마. 어차피 은퇴하게 될 테니, 굳이 지금 퇴부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쿠로코는…… 더는 이 부에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녀석을 붙잡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퇴부하던 퇴부하지 않던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테츠야도 연습에는 나오지 않고 있어.”
“이름뿐인 부원을 확보한다고 해서 네게 무슨 도움이 되지? 그냥 그 녀석을 놔주라는 것이다.”
“……너도 그렇게 떠나갈 생각이지?”
왜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 돌려진 것일까. 미도리마는 의아해했지만, 그 다음 순간 아카시가 취한 행동- 다짜고짜 제 품에 달려들어 등에 팔을 두르는 행위에 불만이 순식간에 목구멍 안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이었다.
“놓으라는 것이다, 아카시…….”
“왜 그래야 하지? 어서 마주 안아 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난 더 이상 너와는……,”
“바보구나, 신타로. 그런 말을 이 내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해?”
그럴 것이다. 미도리마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처음 아카시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아카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 당시의 미도리마는 그렇게 해석하고 그에게 등을 돌렸지만, 아카시가 진심으로 그것을 납득해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아카시가 그 동안 부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과도 아무런 대화를 시도하지 않으려 하기에 이대로 끝인 걸까 하는 희망을 잠시나마 품었을 뿐이었다.
“네가…… 네가 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건, 네 자신의 감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넌 그냥 자존심이 상할 뿐이야. 내게 거절당한 것이. 어차피 끝내야 할 관계라면 네 쪽에서 끝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남의 마음을 단정 짓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런 거,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차가운 말에 아카시가 고개를 들어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렇게 묻는 듯한 아카시의 눈동자에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아카시의 몸을 제게서 떼어놓았다.
“다시 말하지. 아카시,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거……,”
“‘인정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어’ 따위의 말은 듣지 않겠다. 나는 이제 너의 연인이 아니야. 네가 내게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끝났다. 너와 나는 앞으로 다른 길을 걸어갈 테고, 나는 너를 이기기 위해서만 인사를 다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계기를 만든 건 너다.”
정확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녹슬어 버린 눈동자다. 색이 바란 아카시의 왼쪽 눈동자는 그에게 천제의 눈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몰라도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존재를 빼앗아갔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공존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곁에 이전처럼은 존재할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했다. 아카시도 그런 사실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네게 필요 없는 존재야?”
“아니, 그 반대지. ‘내가’ 더는 네게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직 승리만을 원하는 그 눈동자에 더 이상 미도리마 신타로의 모습은 없었다. 미도리마는 더 이상 아카시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그의 기사가 아니었다. 슈토쿠 고등학교의 스카웃에 응해 진학을 결정해 버린 그 순간부터. 라쿠잔 고등학교로 가게 될 아카시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적일 뿐이었고, 그것은 반드시 찾아올 수밖에 없는 미래였다. 아카시는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다.
“……좋아, 신타로. 헤어지자.”
그러니 이별을 선언하는 이 말이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저 미도리마 신타로의 착각과 미련일 뿐이었다.
“테츠야의 퇴부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너는…… 가서 연습을 계속하도록 해.”
“그래. 그럼 이만 실례하지.”
아카시를 남겨두고 냉정하게 돌아서면서 미도리마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미련을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것이 끝났을 순간 찾아오게 될 아카시 세이쥬로와의 새로운 관계에, 인사를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카시. 너는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이겨서, 다시 맞이하러 오겠다는 것이다.”
문을 닫기 전 속삭인 진짜 결심을 아카시는 들었을까. 들었든, 듣지 못했든, 아카시 세이쥬로는 더 이상 미도리마 신타로를 잡지 않았다. 그것이 아카시가 내린 결정이라면 따라주겠다고 생각했다. 공이 가득 쌓인 바구니로 다시 발을 옮기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천천히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새로운 아카시 세이쥬로를 맞이하기 위한 과정으로 손을 뻗었다.
7.
익숙하지 않은 풍경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미도리마 신타로의 불만스런 목소리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웃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미도리마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데도 무척 새롭게 느껴졌다. 가만히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보려다가, 또 무슨 짓이냐고 지청구를 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물론 아카시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미도리마는 잔소리를 할 생각이 가득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왜, 키세나 쿠로코가 자주 하잖아. 연습에 지쳐서 체육관 바닥에 드러눕는 교양 없는 짓을.”
“그래서 그걸 왜 네가 하고 있냐는 거다. 피곤하다면 일찍 들어가서 쉬어.”
바보. 그런 게 아니야. 아카시는 피식 웃으며 미도리마에게 손을 뻗었다. 일으켜 세워 줘. 그런 무리한 요구에도 미도리마는 거절의 말을 뱉지 않은 채 그대로 아카시의 손을 잡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힘이 저 마른 몸의 어디서 나오는가 싶다. 미도리마가 끌어당긴 반동으로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선 아카시는 그대로 몸에 힘을 뺐다. 자연스레 그의 몸은 미도리마의 품으로 끌려들어왔다. 갑자기 제 가슴에 매달린 아카시를 보고 미도리마는 분명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아카시, 대체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냐? 보건실에 갈까?”
“아니야, 이건 그냥…… 나답지 않은 짓을 해보고 싶었어.”
“너답지 않은 짓?”
“미도리마의 발밑에서 미도리마를 올려다보는 거.”
“왜 그런 짓을.”
왜냐고? 그냥, 알고 싶었거든. ‘패배한다‘는 말을 흔히, ‘누군가의 발밑에 무릎 꿇는다’고 표현하고는 하니까. 비참하게 패배한 채 드러누워, 승자의 위치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 상대가 언젠가는 내게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고 공언한 너인 것은, 그냥, 너 외의 다른 사람은 올려다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런 말은 네게 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이 상하니까.
“어쨌든 이걸로 잘 알았어. 발밑에서 바라봐도 미도리마는 잘생겼구나.”
“무……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건!”
“나는 꽤나 눈이 높다는 이야기.”
“전혀 이해가 안 된다만…….”
“이해하지 않아도 좋아. 다른 뜻으로 착각한다 해도 상관없어. 그냥 지금은- 꼭 안아 줘.”
미도리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아카시의 요구에는 충실히 따라,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 자상함이 너무도 좋았다. 그런 사람에게라면 자신의 첫 패배를 주어도 좋겠다는, 아카시 세이쥬로답지 않은 생각을 해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도리마, 좋아한다고 말해 줄래?”
웃으면서 한 요구에, 미도리마는 얼굴을 붉혔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에서 어김없이 나오게 될 말을 기다리며 아카시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6.
계단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부실로 데리고 간 것은 수업이 모두 끝난 후, 해가 천천히 지려 할 무렵이었다.
창문으로 눈부신 빛이 들어와 눈을 찔렀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어깨는 너무도 작아, 최근 그보다 부쩍 커져 버린 미도리마 신타로의 몸을 햇빛에서 막아줄 수는 없었다. 나란히 걸어가면 될 것을, 굳이 미도리마의 앞에서 걷겠다는 고집을 부린 건 어쩌면 그 키 차이를 자각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카시가 한 생각치고는 쪼잔하기 그지없지만. 그런 생각을 막 했을 때 아카시의 발이 멈추었다. 계단을 완전히 올라서서 뒤로 돌아선 아카시는 아직 계단을 오르고 있는 미도리마에게 한 손을 뻗어 그의 발걸음을 저지했다.
“뭐야, 부실로 가자고 했던 것 아니었나?”
“여기서 얘기해도 충분해.”
“어디서든 해도 되는 이야기였다면 교실에서 하지 그랬어.”
“그럼 듣는 귀가 너무 많잖아.”
생긋 웃는 아카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도리마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기에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또 이런 어정쩡한 장소에서 말을 꺼내려 하는가. 영문을 모르는 미도리마로선 아카시가 입을 열기를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니지무라 선배와 이야길 했는데, 곧 주장 자리에서 은퇴할 생각이라고 하셨어. 아무래도 주장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긴 모양이야. 그래서 다음 연습 때 내가 정식으로 주장이 되는데, 부주장 건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리고 난 미도리마가 부주장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1학년에서 뽑지 않는 건가?”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에서는 부주장은 다음 주장을 맡을 재목을 한 학년 아래에서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카시도 그렇게 부주장이 되었고, 다음 대 부주장 역시 그렇게 정해지는 게 당연할 터였다. 그러나 아카시는 어깨를 슬쩍 으쓱해 보였다. 그런 원칙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그 제스처가 정말로 아카시답다고 생각했다.
“니지무라 선배가 ‘부주장은 네가 뽑아라’고 하셔서 한동안 1학년들을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물론 1학년 중에서도 실력 있는 부원들은 있지만, 누구 하나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있잖아? 그렇다고 부주장 없이 나 혼자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야.”
“그래서 택한 게 나냐.”
“아무리 눈을 뜨고 살펴봐도 미도리마만한 재목이 없는걸. 다들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나와 같은 생각일 거야. 그러니까, 미도리마. 내 제안을 받아주지 않겠어? 내 뒤에서 날 좀 도와줬으면 해.”
그제야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왜 이 장소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내 뒤에서’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아카시가 한, 미도리마 외에는 부주장 업무를 수행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건 아마 진심일 것이다. 아카시는 남을 평가하는 데 있어 누구보다 냉정하고 정확하다. 또 개인의 능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농구부의 풍조를 생각해 보면 아카시의 말대로 미도리마가 부주장이 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미도리마가 부주장의 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뒤에서 행동할 것- 즉, 아카시 세이쥬로는 1인자이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2인자라는 구도를 쭉 유지한 채 행동해 줄 것을 당부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미도리마는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카시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유치한 퍼포먼스다. 차라리 키 차이를 자각하는 게 싫어 앞서 걸어갔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굳이 저 눈부신 빛이 없더라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서 늘 눈부신 존재인데.
“좋다. 기껏 좋게 평가해 줬으니,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한시름 놨어.”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조건?”
별일이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갸웃한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계단 위로 성큼 올라오자 눈에 띠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가 당황한 것은 계단을 올라와 제 옆에 선 미도리마가 갑자기 손을 붙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주장이 되더라도 난 ‘네 뒤에서’는 일하지 않겠다. 나는 네 옆에 서서, 동등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 이 제안을 받아들이되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도전만큼은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적어도 미도리마에게만은 그러했다. 그리고 아카시는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들은 직후 얼굴을 살짝 붉히며 푸훗,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묻어나오는 쑥스러움은 말을 한 장본인인 미도리마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미도리마. 너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 열심히 쫓아와야 할 거야. 네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멈춰 서서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바라는 바인 것이다.”
“그럼, 이제 부실에 가서 장기나 한 판 둘까? 이번에도 도전할 거지?”
“물론이다.”
생긋 웃고 다시 앞서 걸어가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빠른 걸음으로 뒤쫓았다. 어차피 지금의 자신은 아카시의 등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그 앞에 서서 아카시에게 손을 내미는 날이 오겠지. 그날까지 인사를 다하겠다- 라는, 단순한 의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짐을 하며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옆에 섰다. 그런 자신을 흘깃 쳐다보며 미소 짓는 아카시는 어쩐지, 무척 기뻐 보였다.
5.
구실
-6. 계단에서 이어집니다.
「팀을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카시 세이쥬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솔직히 말해 아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1년 간 팀을 충실히 이끌어 준 선배가 그 자리를 자신에게 양보한다고 하는데도. 1년 간 니지무라의 옆에서 부주장으로 일했던 추억도 그 말을 들은 순간 태어난 설렘과 기쁨에는 이기지 못했다. 만약 아카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니지무라가 알았다면 ‘건방지다’면서 바로 딱밤이 날아왔겠지만, 다행히 아카시에게는 당시의 제 기분을 솔직하게-혹은 멍청하게- 털어놓지 않고 그저 니지무라를 배웅하기만 할 정도의 자제심은 있었다.
그 다음 순간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부주장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더랬다. 어떤 분야에서든 항상 완벽함을 보여야 한다는 아카시 가문의 가훈으로 미루어 볼 때, 아무리 농구부 자체의 원칙이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고작 2인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으리라. 갓 농구를 시작한 1학년이 1군 레귤러진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놀라운 일이 이미 한 번 일어난 것 정도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주장이 된다는 소식을 전해도 분명 아버지는 기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찬탈’이 아니라 ‘위임’ 이라는 형식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불행히 아카시는 이제 와서 그런 일에 실망할 정도로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무엇을 달성해도 ‘당연한 일’ 취급받을 것이 뻔한 상황인 만큼, 괜한 기대를 했다가 상처받는 건 아카시 쪽일 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이었다.
「……굉장하군.」
처음 미도리마와 장기 대국을 했을 때, 절묘한 수로 자신에게서 투료 선언을 받아낸 아카시에게 미도리마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이 그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소년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또 얼마나 제 실력을 자신하는지 알고 있었던 아카시는 솔직히 미도리마의 그 반응을 목도했을 때 당황했다. 이전까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지기 마련이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아카시의 능력을 ‘괴물‘ 이라 말하며 멀어지거나, 솔직하게 감탄하며 아카시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런 의미에서 미도리마의 그러한 반응은 명백히 후자였지만,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과 미도리마 신타로가 가장 달랐던 점은 그 다음 대사에 있었다.
「괜찮다면 한 번 더 도전해도 되겠나? 이번에는 이겨 보이겠다는 것이다.」
끝없는 투쟁심.
미도리마의 수는 하나하나가 무척 정석적이었다. 그야말로 장기 교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의 깔끔하고 정직한 수는 아카시처럼 여러 가지 복선을 깔아 가며 상대를 패배로 유도하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는 무척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시가 그날 거둔 것은 정말 압도적인 승리였고, 때문에 아카시는 솔직히 미도리마의 입에서 ‘한 번 더‘ 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아깝게 졌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아카시는 미도리마와의 두 번째 대국에 임했고, 투쟁심이 끓어오르지 못할 정도까지 미도리마를 압도하며 두 번째 승리를 거뒀다.
「음…… 솔직히 내 또래에서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녀석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졌어. 투료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카시가 생각한 반응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뒤가 달랐다.
「실력을 좀 더 쌓아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받아주겠나?」
그는 여태까지의 도전자들과는 다르다. 단순히 자존심이 강해서, 혹은 오기가 생겨서라고 하기에 미도리마는 너무도 간단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아카시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도전을 입에 올리는 그 모습은 아카시가 여태까지 만나 온 사람들 중 누구와도 달랐다. 미도리마의 제안에 아카시가 평소처럼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러고도 미도리마는 그런 아카시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대국을 되짚어 보며 감탄과 아쉬움을 연발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미도리마 신타로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정직한 태도로, 그 날 아카시 세이쥬로의 가슴에 제 존재를 새겨 넣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만약 미도리마가 부주장이 된다면 어떨까.’
그 자리에 서서 아카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부주장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미도리마 신타로는 뭐라고 말할까? 아카시에게 있어 부주장 자리는 그저 주장을 서포트하는 위치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자면 ‘2인자’ 일까. 항상 자신을 이기고 싶어 하고, 숙명처럼 자신에게 도전하는 미도리마에게 자신의 2인자로 있어 달라는 요청은 중대한 모욕이 아닐까? 미도리마의 성실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는 2인자의 자리를 받아들일까? 여태까지 미도리마가 보여줬던 강한 투쟁심은 그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카시는 처음으로, 그것이 무척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도리마의 반응도 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결국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불러냈다. 이제부터 생기게 될 자신과 미도리마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장소에서, 그가 그 의미를 파악해 주기를 바라며 부주장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좋다. 기껏 좋게 평가해 줬으니,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자, 보여줘.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조건?”
되묻자, 미도리마가 움직였다. 한 발자국을 떼어 아카시가 서 있는 곳으로 올라온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을 덥석 잡고, 진지함이 깃든 탓에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부주장이 되더라도 난 ‘네 뒤에서’ 는 일하지 않겠다. 나는 네 옆에 서서, 동등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순간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의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의 손을 꽉 쥔 미도리마의 손과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자신을 향한 투쟁심이- 왜였을까. 무척이나 달콤한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던 것이다.
‘너는,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그것은 답이 정해져 있는 의문이었다. 이것이 미도리마 신타로다. 정직하고, 동시에 우직하게, 자신이 정한 길을 걸어가는 존재. 그제야 아카시는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소년의 본질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했다. 미도리마의 이런 결심은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기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즉 평생, 그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기뻐 아카시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아카시를 보고 미도리마는 얼굴 가득한 진지함을 벗고 의아함을 살짝 얼굴에 떠올렸다. 저 눈을 보니 알겠다. 그는 자신이 아카시를 얼마나 기쁘게 만들었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미도리마. 너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 열심히 쫓아와야 할 거야. 네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멈춰 서서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바라는 바인 것이다.”
그래, 그것이다. 미도리마는 그 투쟁심을 꺼트려선 안 된다. 언제나 아카시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아카시의 뒤를 쫓아와 옆자리에 서야 한다. 비록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를 앞서 걸어가는 그 날은 평생 오지 않을 테지만,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가 자신의 뒤를 쫓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갈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미도리마와 나란히 부실로 걸어가며 아카시는 깨달았다. 부주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도,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알고 보면 그저- 미도리마 신타로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빠져 버린 걸까.’
다시 한 번 웃으며 아카시는, 아마 미도리마에게는 평생 전할 일 없을 자신의 진심을 마음속으로만 속삭였다.
좋아해, 미도리마. 그런 너를, 정말로.
4.
전철 안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연습 시합에 대한 상의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철 손잡이를 꽉 쥔 채 버티고 선 미도리마 신타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 옆에 선 아카시 세이쥬로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꽉 들어찬 평일 오후의 전철은, 제아무리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미도리마라도 견디기 힘든 공간이었다. 그러니 아카시라고 오죽했을까. 미도리마의 옆에 기대서서 넥타이를 헐겁게 푸는 아카시는 꽤나 불편한 표정이었다. 늘 차로 통학하는 아카시로선 이렇게 붐비는 전철에 탄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출발할 때는 꽤 여유 있는 편이었는데 말이지. 한숨을 쉬며 내릴 역이 얼마나 남았는지 점검하던 미도리마는 문득 아카시가 제 옷소매를 세게 쥐는 것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불편해서 견딜 수 없게 된 것일까? 일단 다음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제안을 아카시에게 하려던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시선으로 제 뒤를 흘깃흘깃 돌아보는 것을 눈치 챘다. 어쩐지 아카시가 유난히 불편해 한다는 인상을 받은 직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불쾌함으로 상기된 것과 함께 그의 뒤에 딱 붙어 서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남자의 얼굴은 한 번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의 음흉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설마. 천천히 시선을 아카시의 허리 아래로 내린 미도리마는 꽉꽉 들어차 있는 사람들의 틈 너머로 남자의 손이 아카시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그 치한인가.
“다음 정차 역은 OO앞, OO앞입니다. 내리실 문은…….”
마침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전철이 멈춰 서 문이 열리자 사람들 몇몇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생긴 틈을 타, 미도리마는 재빨리 남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남자는 고개를 들어 제 파렴치한 행동을 누가 저지했는지를 알아차리자 낭패를 봤다는 듯 미도리마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그런다고 미도리마가 남자를 용서해 줄 리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 그게…….”
“다음 역에서 같이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학생. 그러니까 나는…….”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아카시, 괜찮으냐.”
“으, 으응…….”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카시를 보고 남자는 훨씬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얼굴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목적은 아카시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었던 바지 정장 차림의 여성이었던 것 같았다. 설마 자신이 만지고 있던 것이 남자 중학생의 엉덩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고,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된 아카시는 수치심 때문인지 슬쩍 몸을 옮겨 미도리마의 등 뒤로 숨었다. 평소의 아카시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소극적인 태도가, 이 상황에 아카시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미도리마의 분노가 더욱 강해졌음은 물론이다. 혹시나 놓칠세라 남자의 손목을 더 세게 쥐려는 순간 전철이 홈으로 들어오면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아차 한 사이 남자가 재빨리 미도리마의 손을 뿌리쳤고, 미도리마가 다시 붙잡기도 전에 열린 전철 문을 통해 재빨리 빠져나가고 말았다.
“잠깐, 거기……!”
“미도리마.”
남자의 뒤를 따라 달려가려던 미도리마는 제 옷깃을 붙잡는 아카시의 손에 주춤했다. 그 사이 문은 닫혀버렸고, 치한은 어느새 미도리마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왜 말렸느냐고 따지려던 미도리마는 등 뒤에 선 아카시의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것을 알아차렸다. 아카시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쯧. 혀를 찼지만 이미 놓쳐버린 치한을 다시 붙잡을 길은 없었다. 결국 미도리마는 아카시 쪽으로 돌아서서 아카시와 사람들 사이의 벽이 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붙잡아 줬는데.”
“됐다는 것이다. 놓쳐버린 내가 잘못한 거야. 너는 이제 괜찮으냐?”
“응…… 나도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 알고 나니까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쩔 수 없지.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도착할 때까지 내가 이렇게 막아 줄 테니까.”
“……고마워.”
그렇게 중얼거린 아카시가 슬쩍 미도리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거냐는 당연한 핀잔은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카시를 보고 나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건 아카시일 것이다. 할 수 없지. 오늘은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 생각에 미도리마는 다른 손으로 아카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슴에 파묻힌 아카시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한 마디가 왠지 가슴을 벅차게 만든 것을 애써 무시하며.
너, 오늘 좀 멋있었어.
3.
혐오
“신타로, 여자친구라도 생겼니?”
밥을 한 젓가락 입에 넣다가 멈칫한 것은 어머니의 그 말 때문이었다. 지금 이게 밥이었으니 망정이지, 된장국이었더라면 아침부터 식탁을 더럽게 만들 뻔 했다. 간신히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고, 미도리마는 생글생글 웃는 어머니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애써 만들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요즘 들어서 언제나 기분이 좋더니, 오늘은 왠지 복잡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우리 아들을 누가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었을까~ 하니까~ 좋아하는 여자애라도 생겼나 해서!”
“너무 나가셨는데요.“
“게다가 어젠 늦게 들어오기까지 했잖니? 같은 학교 애가 빈혈을 일으켜서 집에 데려다줬다고 했지?”
그 말에 미도리마는 젓가락을 다소 급하게 내려놓고 말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동요하고 있음을 어머니에게 대놓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잘 보이진 않지만, 흔들린 표정도 숨기지 못하고 있으리라. 머릿속에 하나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창백한 표정으로 뻗어 온 손. 소매를 붙잡는 손. 그 손을 따라간 끝에는 어떤 것을 ‘요구’ 하는 장난스런 미소가 있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상상하니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 남은 이성이 변명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흥미진지한 얼굴을 한 어머니를 실망할 만한 말을 던졌다.
“제가 데려다 준 건 우리 농구부 주장입니다. ……남자애라고요.”
그래, 아카시 세이쥬로는 남자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남자라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어머, 그랬니? 난 빈혈이라길래 당연히 여자앤 줄 알았지. 그 애 몸이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니?”
“……그 녀석은 가끔씩 그렇게 무리를 합니다.”
얼버무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곤 해도 어머니에겐 이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반찬을 씹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머리가 어지럽다고 한 아카시를 업고 그의 집에 도착했을 즈음엔 빈혈 증상은 확실히 나아진 듯 보였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아프게 만들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황급히 돌아가려는 미도리마에게 아카시가 인사를 건넬 때의 일이었다. 내일 봐, 하고 말하는 아카시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기쁜 듯 들렸다. 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아카시의 맨션을 나오면서 미도리마는 강렬한 회한에 사로잡혔었다.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걸까.
왜 그랬을까.
왜.
“여하튼, 이제 늦게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끼쳐 드렸다면 죄송해요.”
“어머,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잖니. 친구가 아픈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렇죠.”
어머니는 모른다. 자신의 아들과 그 소년, 아카시 세이쥬로는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니다. 제아무리 둔하고 이성에 관심이 없는 미도리마라도 알고 있다. ‘친구’ 끼리는, 손을 잡지도 끌어안지도 키스하지도 않는다. 어제 했던 것처럼, 유혹하듯 끈적한 눈빛을 보내거나 그 눈빛에 흥분해 침대 위로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신은 어제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아카시와는 친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그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 외에 설명할 말이 존재하는가?
예를 들면, 연인?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 먹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서 더는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미도리마는 밥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의 걱정스런 눈빛이 그의 등 뒤를 따랐다. 다녀오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건넨 말은 자신의 목에서 나온 것 같지 않게 낮고 어두웠다.
“좋은 아침.”
등교하던 미도리마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어깨를 떤 것은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목이 메었다. 자신이야 이 상황이 께름칙해 그런 것이지만, 상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목이 아픈 것이리라.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을 한 아카시 세이쥬로가 뒤에 서 있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왜 그래?”
역시나 질문이 날아왔다. 제가 인사를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도리마가 대답을 하지 않다니 이상하다고 여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오히려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카시는 태연하기 그지없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만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라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 난 어제 일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양 태연하더니 갑자기 직구를 던져 온 것이다. 게다가 미도리마의 심정을 아주 정확하게 읽고 있다. 이렇게 사람의 빈틈을 찌르는 게 아카시답달까. 물론, 그런 얘기를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데에는 화도 좀 나지만서도.
“……신경 쓰고 있지 않다.”
“그래?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아까부터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라, 시치미를 떼려고?”
“시, 시치미를 떼다니. 그런 적 없다. 애초에…… 어제 있었다는 일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순간 정적이 찾아왔고, 미도리마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철렁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카시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아카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이름이 ‘실망’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이 손으로 변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아카시의 눈동자가 다시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절로 그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미도리마에게는 그 몇 배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 그럼 됐어. 이따 연습할 때 보자.”
이윽고 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아카시는 곧 걸음을 빨리 하여 미도리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도리마의 보폭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으니 뛰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제야 미도리마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했지?’
아카시는 어제 일을 끄집어내서 뭘 할 생각이었을까? 감상이라도 말해주길 바랐던 건가? 모른 척 한 제 태도도 좋지 않았지만, 아카시가 말을 꺼낸 것도 충분히 악질적이었다. 그런 근거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 생각하다가도,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있었던 일을 모른 척한 것은 도망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어제 있었던 일의 빌미를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미도리마 자신이기에.
‘애초에 그런 짓 하지 않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도리마는 이 문제가 시작된 시점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그에게 닿았던 날, 아카시는 그저 미도리마의 맞은편에서 장기를 두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른 건 하나도 없었다. 덤덤한 표정도 침착한 시선도 수가 막혔을 때 턱을 괴고 생각하는 버릇까지도. 다른 게 있다면 미도리마 자신의 시선이었다. 평소엔 아카시의 눈이나 손의 움직임을 읽고 수를 읽어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시선이 입술로 갔다. 평소보다 유난히 입술이 붉었던 건, 피로 탓인지 입술이 부르튼 아카시를 보고 모모이가 제 립밤을 발라보라고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어 곤란했다. 자신에게 있어 처음인 그 충동을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대국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면 신경 쓰지 않고 있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집중했는데도 미도리마에게 찾아온 건 패배라는 결말이었다. 아카시가 장군을 선언하는 순간 간신히 유지해 왔던 이성은 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아카시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아카시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키스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을 아카시는 탓하지도 이유를 추궁하지도 않았다는 것뿐이다.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교실을 뛰쳐 나갔으니까.
키스한 건 자신인데도 이 상황이 징그러워 견딜 수 없는 모순.
아카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피해자인 것 같은 모순.
그러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그날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고 아예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는 듯 행동했다. 그러자 미도리마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안심했다. 이제 자신이 그 일을 잊어버리면 이 일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거라고 다소 이기적인 생각도 했었다. 그 생각이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봤자 자신에게도 아카시에게도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충동은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좀 더 강렬한 것으로. 역시나 단둘이서 장기를 두던 때였다. 그날은 꽤 흐렸기에 교실은 좀 더 어두웠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에 많은 학생들이 집에 돌아간 참이었다. 아마 학교에 남아 있는 건 미도리마와 아카시, 두 사람 뿐이었으리라. 그 둘이 그렇게까지 늦게 남아 있었던 것은 하이자키가 일으킨 트러블을 처리하고 그에게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상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 기회에 그를 팀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미도리마와는 달리 아카시는 그를 대신할 전력이 아직 없다는 이유를 댔다. 결국 아카시의 의견대로 따르기로 결론이 나자, 자연스레 아카시가 대국을 청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전까지의 일을 곱씹어 볼 때 거절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쏟아지기 전에 집에 가는 게 좋겠다며 아카시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아쉬움에 미도리마는 아무 위화감 없이 동조할 수 있었다. 그래,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랬는데― 왜였는지 돌아갈 준비를 하다 말고 아카시와 눈이 마주쳤을 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입술이 닿고, 그것을 깊게 빠는 동안에 틈이 열리고, 그 안으로 혀를 얽고, 제 목에 매달린 아카시를 붙들기 위해 그의 뒤통수에 손을 얹었다. 자연스레 그들의 몸이 키가 작은 아카시 쪽으로 밀렸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동안에 책상을 쳤는지 덜커덩 하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장기짝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순식간에 사라진 혀와 입술의 감촉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미도리마가 당황한 것과 반대로, 갑자기 밀려나 오히려 더 놀라야 할 아카시는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조금 상처 받은 듯도 했다. 일반적인 반응과 다른 그 덤덤함이 오히려 아카시의 지금 심정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아카시가 자리에 앉아 장기짝을 줍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도리마가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장기짝을 다 주운 아카시는 장기판과 말을 제 가방에 집어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그 기묘한 충동과 두 차례에 얽힌 키스에 대해서는 아카시와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없던 일처럼 되어 버렸고 그 뒤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신입부원인 키세 료타가 들어오고 그 재능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그를 1군에 들이는 문제로 아카시와 회의를 거칠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회의를 하던 하지 않던 키세는 승급 테스트에 합격했을 것이고 순조롭게 1군 멤버가 되었을 것이므로, 굳이 아카시가 회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미도리마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었다. 아카시가 제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도 쉽게. 함께 있으면서 아카시는 좀 더 길게 이야기를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횟수가 늘었고, 큰 소리로 웃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 또 기겁하고 뿌리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고 입술을 대 버리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상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친구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은 엄연한 비정상이었다. 물론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신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제아무리 아카시가 아름답게 웃더라도, 그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자신이 하는 그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도, 그에게 빠져들어서는 안 되었다. 물론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거부하고 있었다. ‘좋아한다’ 는 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안 된다. 그 상대가 남자라면 더더욱 안 된다. 그 남자가 아카시 세이쥬로라면- 그것은- 정말, 안 된다.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제 결국 대형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건 분명…….’
키스하는 것만으로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에는 미도리마가 먼저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뻗은 것도 팔을 잡은 것도 뭔가를 원하는 듯 쳐다본 것도 아카시 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망설임 한 번 없이 그 어깨를 눌러 부실 책상 위로 쓰러뜨린 것은 잘못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부실 안에 아카시의 얼굴이 보였고, 왠지 답답해하는 그의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어 주었고,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위에 입술을 대었다.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게 하는 목소리. 그걸 막기 위해 키스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카시가 내고 있는 목소리가 직접 몸으로 흘러들어온 양, 목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한 흥분이 전신을 지배했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옷을 풀어헤치는 손이 빨라졌다. 옷을 벗기고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남자의 몸을 만지는 데도 별 저항은 없었다. 정신없이 키스하고, 핥고, 빨고, 만지고, 어느새 다리를 벌리고 그 안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지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험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기에, 아카시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했다. 어깨를 세게 쥐고 놓지 않는 손에서 그 아픔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건 질척질척한 욕망을 모두 토한 뒤, 아카시의 입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을 때였다. 제 몸 아래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아카시를 본 순간, 코트 위에서 반응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앗……,」
「윽……,」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고통에 찬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히 서로의 몸이 연결된 부분 때문이었다. 어둠에 가려서 보이진 않았지만 아직도 내벽의 감촉이 생생해서 미도리마는 전에 없이 당황했다. 미도리마가 그러고 있는 동안 침대 위의 아카시는 팔로 눈을 가린 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아카시의 몸 위에는 붉은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 전부를 내가 남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미도리마를 급습했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벗어나고만 싶었다. 몸을 급히 빼자 차가운 공기가 몸을 급습했다. 자신이 셔츠 외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미도리마가 바닥에 흩어진 교복을 황급히 줍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몸을 움츠린 아카시가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책망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왠지 슬픈 눈이었다. 그 눈에 담긴 게 체념이라는 걸 안 것은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아카시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를 뛰쳐나온 뒤였다. 역으로 걸어가면서 미도리마는 아까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아까 있었던 일은 꿈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바보같이 그것만을 계속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간단한데도.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여하튼 미도리마의 머릿속은 혼란을 수습하기에 그저 바빴다. 때문에, 부실에 혼자 남겨진 아카시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심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했을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나는 최악의 인간이다.
그런 자괴감에 빠진 미도리마에게 더 큰 문제가 찾아온 것은 그 날 오후의 일이 된다.
“미도리마, 좀 남아.”
아카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연습이 끝난 뒤였다. 그것이 다른 부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꺼낸 말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예상대로 키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두 사람의 얼굴을 쫓았다. 그런데도 안절부절못하는 건 미도리마 자신뿐이었다. 아카시는 부원들의 시선도 미도리마의 당혹스러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옷을 다 갈아입고 평상에 앉아 일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 주변의 공기만 싸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알았는지 다른 부원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평소 태도를 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빠르기로 옷을 다 갈아입은 아오미네가 아직 넥타이를 매고 있는 쿠로코를 잡아끌었고 그 뒤를 키세가 따랐다. 아직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무라사키바라를 모모이가 잡아끌어 데리고 나간 것을 마지막으로 부실은 텅 비었다. 하이자키라도 있었다면 아카시의 명령에 반항하며 끝까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아예 학교에 오지도 않았다. 때문에 미도리마는 제 눈앞의 현실을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아직도 시치미를 떼네. 나하고 네가 해야 되는 이야기라면 한 가지 정도밖에 없는 거 같은데.”
한숨을 쉬면서 아카시는 일지를 덮고, 미도리마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걸음을 뗐다. 아카시의 옆에 앉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여전히 덤덤한 시선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감정이, 아카시의 놀라운 인내심에 억눌려 눈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간신히 알게 된 모양이네. 지금 이 상황이, 네게도 그렇겠지만 내게도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는 걸. 말해두지만 어제 뒤처리하는 건 힘들었어. 오늘 아침 열이 내려서 망정이지, 학교도 못 나왔을지 몰라.”
“미…… 안.”
“사과는 이제 그만 듣고 싶은데. 네가 어제 일을 미안해하고 있다는 건 눈만 봐도 알아. 그것보다 좀 더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아카시의 눈이 미도리마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미도리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카시는 두 손으로 미도리마의 얼굴을 돌려놓고, 입술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했다. 그는 또 무언가를 요구해 올까. 이 눈을 하고 어제와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분명 뿌리칠 수 없다. 너무도 쉽게 이쪽의 벽을 뚫고 침투해 와, 자신의 모든 것을 손쉽게 파괴하는 마안의 일종 같은 것이었다.
천천히 손이 얼굴에서 떨어졌지만, 미도리마는 이제 아카시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희미한 미소가 아카시의 얼굴에 떠올랐다가, 다음 순간 진지함에 파묻혀 사라졌다.
“기회를 줄게. 선택은 네가 해.”
“선택……?”
“네가 시작한 이 관계를 계속할지, 아니면 이전처럼 돌아갈지를 정하라는 거야.”
아카시의 목소리는 귀를 유린한다. 낮으면서도 가라앉아 있지 않고, 본연의 청량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농염한 데가 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요구하는 ‘선택’ 은, 더는 미도리마가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미도리마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아카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넌 나를 어쩌고 싶은 거지?”
그 질문에 아카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난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을 뿐이야.”
한 마디로, 미도리마가 어떤 선택을 해도 책망하지 않겠으니 안심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본 순간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선택으로 인해 미도리마는 지독히 후회할 것이고, 자신에 대한 경멸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배덕감도 그 후회에 얽혀 미도리마를 평생 속박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싫었다.
눈앞의 존재를 놓는 것은 싫었다.
짧은 침묵 끝에 아카시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붉은 빛으로 그를 유혹하던 마안은 사라졌지만 그 효과는 아카시의 전신에 남아 있는 듯 했다. 그 얼굴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대면서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도망가고 싶다.
2.
만약의 세계 ver. 테이코
“안녕.”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생긋 미소 지어 보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또냐,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코 중학교에 딱 하나 있는 그랜드 피아노는 사용 순번이 정해져 있다. 테이코 중학교의 관현악부에는 콩쿠르를 대비해 연습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할 수 있는 예약 순번은 매일 꽉 차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미도리마의 순번 직전에는 분명 자신과 같은 콩쿠르에 나가는 2학년 여학생이 있었을 터였고, 미도리마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의 순번은 앞으로 10분 뒤에야 끝나게 되어 있었다.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런 아카시의 등장에 어색한 미소를 띠고 황급히 방을 나가는 여학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해둬야겠군. ‘어째서 아카시가 저지른 짓에 대한 뒷감당을 자신이 하느냐’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미도리마는 피아노실 문을 닫았다.
“넌 또 여기 무슨 일이냐.”
“내가 여기 오는 덴 별다른 이유가 없지.”
생긋 웃으며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두세 번 툭툭 쳤다. 전에 있던 학생을 쫓아내는 형태로 얻은 10분이라는 연습 시간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콩쿠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미도리마의 상식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즉, ‘와서 앉으라’는 그 명백한 제스처에 미도리마가 주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큼성큼 다가와 악보를 내려놓고 앉는 미도리마를 보면서 아카시는 생긋 웃었다. 등 뒤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끝까지 듣다가 갈 참이군. 아카시가 이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던 사실을 굳이 상기하면서 미도리마는 악보를 펼쳤지만, 그가 가장 먼저 연주할 곡은 콩쿠르 과제곡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음악이 듣고 싶어서 온 거냐.”
“네 자신을 CD 플레이어처럼 취급하는 말투는 좋지 않아.”
“그 정도까지 날 생각해 줬다니 눈물 나게 고맙군. 그래서, 무슨 곡.”
괜히 날 선 목소리로 반응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CD 플레이어처럼 취급하기 시작한 게 누군데’ 하는 사소한 불만이 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도리마의 반응을 무척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아카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악보를 미도리마의 앞에 내려놓았다. 미도리마가 오기 전부터 부실의 악보집을 뒤져 찾아두었던 모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연주를 들을 생각은 머릿속 가득한 모양이다. 물론 아카시가 이런 식으로 찾아와 연주를 청하는 것은 콩쿠르 연습 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다. 굳이 손을 풀기 위한 에튀드를 찾을 필요가 없고, 남에게 부탁받아 연주하는 만큼 훨씬 집중해 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게 뭐냐.”
“‘마제파’.”
“곡 이름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란 것이다.”
‘마제파’,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 4번을 말한다. 그 곡을 한 번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겠지만 도저히 ‘에튀드’ 수준으로 칠 수 있는 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선지 가득한 음표의 나열만 봐도 양손을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곡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곡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하는 곡이었다. 확실한 것은, 미도리마가 콩쿠르 과제곡으로 택한 드뷔시의 녹턴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곡이라는 사실이었다. 악보를 가득 메운 음표에 미도리마는 진저리를 쳤으나,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그런 반응을 보고서도 태연하게 웃으면서,
“조금 어렵긴 하지만, 미도리마라면 칠 수 있지?”
-따위의, 미도리마 신타로의 승부욕을 마구 자극하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늘 이렇다. 아카시가 저렇게 웃으면서 곡을 쳐 보라고 말하면, 그 곡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난해한 곡이어도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미도리마는 짧은 한숨과 함께 건반을 세게 눌렀다. 도입부부터 웅장하면서 빠른 선율을 자랑하는 곡은 ‘초절기교연습곡’ 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난이도를 자랑했다.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애를 쓰며 미도리마는 문득, 이 곡이 아카시 세이쥬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대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태도를.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부터 그랬다. 미도리마의 아버지가 아카시 가문의 주치의였다는 점 때문에 아카시는 입학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며 다짜고짜 복도에서 악수를 청해 왔었다. 물론 미도리마도 아카시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입학하기 전까지는그의 얼굴조차도 몰랐고, 아버지가 말한 아카시 가문의 자제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사실도 아카시가 신입생 대표로서 입학식에서 선서하는 것을 보고 난 뒤에 알았다. 그랬기에 갑자기 아카시가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 왔을 때 미도리마는 잠시 당황한 채 그날의 럭키 아이템-곰돌이 인형이었다-을 끌어안고 아카시와 아카시가 내민 손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와, 정말 손가락이 안 멈추네. 영상으로 찾아보고 놀라긴 했지만 정말 그 정도구나.”
“집중하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하라는 것이다.”
“네, 네.”
미리 영상까지 찾아봤다면 정말 악질이다. 곡이 어려운 것을 뻔히 알면서, 도저히 에튀드 수준으로 끝날 곡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으면서, 굳이 미도리마에게 연주하라며 가져온 것이. 쉴새없이 음을 따라가려 애를 쓰면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의도를 파악해 보려는 무의미한 생각을 반복했다. 그 탓에 음을 두세 개 건너뛰고 말았지만 아카시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이 ‘연주 중’ 이기 때문이지, 연주가 끝나고 난 뒤에는 미도리마가 바라지도 않았던 매서운 피드백을 날릴 것이다. 그야말로 사정없이. 아카시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미도리마는 자신이 마치 아카시가 이끌고 있는 농구팀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는 ‘양민학살’ 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의 강호팀으로, 농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미도리마조차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팀이었다. 그리고 그 팀을 이끄는 것이 바로 저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아카시는 1학년 때부터 부주장 자리를 차지하고 주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던 일화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미도리마는 딱 한 번, 아카시에게 빌렸던 책을 갖다 주러 체육관에 왔을 때 농구부의 연습을 본 적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부원들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이상한 점을 지적하던 아카시에게서는 미도리마가 알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악보를 내미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고, 그 괴리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근처에 있던 매니저에게 책을 떠넘기듯 맡기고 돌아온 기억이 있었다. 물론 그 다음날 부실에 모습을 드러낸 아카시는 또 생긋 웃으며 자신이 원하는 곡의 악보를 미도리마에게 내밀었고, 자신의 기억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그 모습에서야 미도리마는 이상하게 마음을 놓았다. 농구부에 있을 때의 아카시는 적응이 되질 않아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농구부원의 기분이 된다는 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이러니했다. 이런 복잡한 생각과 함께 미도리마가 연주를 마쳤을 때 아카시는 흐음, 하고 별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잘 치기는 했는데, 미묘하게 잡음이 많네. 나한텐 집중하고 싶으니 조용히 하라고 해 놓고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거야?”
딴 생각을 하면서 연주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미도리마는 시끄럽다는 것이다, 하는 반응으로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런 미도리마의 생각을 제 손바닥을 보듯 들여다보고 있을 아카시는 제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미도리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이, 좁다는 것이다.”
“뭐 어때. 다시 연주하기 시작할 땐 제대로 뒤에 가서 앉을 테니까. 그것보다, 집중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이나 해 봐.”
“변명이라니…….”
누가 들으면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피아노 선생인 줄로만 알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봐야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미도리마는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모두 표현했다. 그러나 아카시가 그런 반응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악보를 치우려는 미도리마의 손을 제지한 아카시는 ‘응? 무슨 생각 했어?’ 라면서 끝까지 미도리마의 답을 끌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이다.”
“중요해. 그걸 모르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해 주잖아.”
평가가 아니라 비판을 하고 싶은 듯 보이는데. 미도리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3년간 계속된 아카시의 방문 때문에 미도리마는 대충, 그가 어떨 때 피아노실로 자신을 찾아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농구부에서 뭔가 싫은 일이 있었거나, 자신의 그 엄격한 아버지에게 자신으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하지만 반항할 수는 없는-평가를 들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늘은 평가에 집착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후자겠지. 그렇다고 해서 미도리마가 아카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경우 물어봐도 아카시가 그에 대답해 주는 일은 없다시피 했으며, 솔직히 말해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사정에 자신이 필요 이상 간섭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관계는 친구라 부를 만한 것이었지만, 이 피아노실 밖에서의 교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교하고 난 뒤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노실에서 보내는 미도리마와는 아카시가 피아노실로 찾아오는 때 외에는 접점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 외의 단어로 그들을 표현할 말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교내에서 간혹 마주치는 아카시는 늘 농구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카시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자신의 집안 사정을 설명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미도리마는 잘 알지 못했지만, 처음 농구부 연습을 보고 온 이후부터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농구부 안에서 아카시는 언제나 절대적인 존재였고, 자신이 이끄는 팀의 일원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반면 ‘관계자‘의 가족인 미도리마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어리광이 허용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일반적인 ‘엄격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던지, 후계자인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무척 거대해 숨이 막힌다던지, 자신이 올리는 어떤 성과에도 만족할 줄 모른다던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카시는 늘 쓸쓸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고민을 털어놓고, 자신의 입장에 대해 하소연을 할 수 있는 관계. 이러한 관계에 ‘친구’ 외의 이름을 붙일 수나 있는 것인지 미도리마에게는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아카시 세이쥬로를 ‘친구’라 쉽게 칭할 수 없는 감정이,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분명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
순간, 아카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미도리마의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카시는 곧 시선을 미도리마에게서 돌렸다. 미도리마의 대답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옆으로 돌아간 아카시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미도리마는 당황한 채 부가설명을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다른 의미가 아니고…… 네가 왜 이런 곡을 일부러 가져왔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에튀드로 칠 곡이 아니고, 네가 그걸 모를 녀석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굳이 연주한 건 어째서야?”
“그야…… 쳐 달라고 가져온 곡이었으니까.”
“……그래서였어.”
이번에는 미도리마가 눈을 휘둥그레 뜰 차례였다. 그래서라니? 그 진위를 쉽게 알 수 없는 아카시의 한 마디는 미도리마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의문을 더 크게 만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도리마의 시선 너머로 아카시는 여전히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그래서’ 라는 말에 살을 덧붙였다.
“내가 아무리 어려운 곡을 가져와도, 네가 쳐 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일부러 가져온 거야.”
“…….”
“화났어?”
가만히 미도리마를 올려다보면서, 아카시가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이런 모습도 농구부에 있을 때의 아카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겠지.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그 모습에, 미도리마는 내심 성취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원인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확실히 쾌감 비슷한 것이 미도리마의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 모를 감정에 얼굴을 붉히며 미도리마는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일부러 끌어올렸다.
“내가 왜 화를 내겠냐는 것이다.”
“정말?”
“그래.”
새빨간 거짓말이다. 방금 전 악보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투덜댔으면서. 하지만 고작 10분 전에 미도리마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감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든 것은 분명히 아카시 세이쥬로의 불안한 시선이었다. 말하자면, 아카시를 불안한 채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도리마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결론에 달하기도 전에 아카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있지, 미도리마. 난 예전부터 너한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그런데 도저히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어느새 3학년이 되고 말았지. 어쩌면…… 평생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인데?”
“으응, 아니야. 아직은 안 되겠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하고 싶어했는지, 그 감정이 진실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이 잘 안 서.”
“뭐냐, 대체. 사람을 궁금하게 해 놓고……“
“미안,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 타이밍이라는 건 언제 오는 거냐.”
“으음…… 그래, 이번 콩쿠르가 끝난 뒤는 어떨까? 지금 네 머릿속에는 콩쿠르가 더 중요할 테니까.”
그렇지 않다, 고, 순간 말할 뻔했다. 콩쿠르는 분명 신경 쓰이고, 결전의 날까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아카시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가 더 신경 쓰일 것이라고. 하지만 미도리마가 그렇게 말하지 못한 것은 오직 아카시의 얼굴이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신이 재촉해서 그 말을 듣고자 한다면, 아카시는 분명히 달아나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마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찾아오는 이유와, 그 이유가 기반하고 있을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는 이 기묘한 밀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미도리마 신타로가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꼬박 3년을 기다렸으니, 며칠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알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콩쿠르를 보러 오겠다는 얘기가 되는군.”
“응, 좌석 마련해 줄래? 꽃다발 사 들고 갈게.”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꽃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축하받지 못할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는 않아. 방금 그 곡을 칠 수 있었으니까, 녹턴 정도는 쉽게 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미도리마의 실력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다소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얌전히 감상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아카시를 흘깃 쳐다본 뒤 미도리마는 리스트의 악보집을 의자 옆으로 내려놓았다. 연습이 끝나고 나면, 한 번 더 연주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완벽한 연주로. 아카시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살포시 감는 것을 확인한 뒤 미도리마는 녹턴의 악보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미도리마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악보를 노려보았다. 악보도, 피아노도, 그 날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데, 그 연주를 들어줄 사람만은 지금 그의 옆에 없다. 멍하니 건반에 손을 올려 처음 몇 소절을 연주해 보다 말고, 미도리마는 주먹을 세게 쥔 채 피아노 건반을 세게 내리쳤다. 귀를 찌르는 불협화음이 텅 빈 피아노실을 메웠다.
콩쿠르 날, 아카시 세이쥬로는 콩쿠르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연주를 끝내고 나서야 아카시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아카시를 위해 구해 주었던 정중앙의 좌석은 그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비어 있었다. 그 빈 좌석은 기쁜 듯 박수치는 부모님과 여동생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했고, 훌륭하게 연주를 마친 직후임에도 미도리마는 도저히 뿌듯해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의문을 품은 채 등교한 미도리마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농구부를 찾았다. 하지만 농구부실은, 언젠가 미도리마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중요한 시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임에도 농구부 주전 멤버들의 모습은 누구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지시를 내려야 할 아카시 역시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예전에 자신이 책의 전달을 부탁했던 매니저에게서 농구부에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 미도리마에게 리스트의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던 다음날 아카시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나선 농구부원 한 사람과 1대 1 시합을 했고, 그 대결에서 체격 차이로 인해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고 했다. 하지만 아카시는 지지 않았다. 패배를 목전에 둔 아카시가 갑자기 돌변해서 그 부원을 압도해 버리더니, 시합이 끝난 직후 부원들에게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연습하러 나오지 않아도 좋다’ 라는 선언을 했다는 것까지 들었을 때 미도리마는 그 당시 아카시가 느꼈을 감정의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만히 악보를 바라보았다. 악보의 맨 마지막 소절에는 불어로, 리스트가 이 곡을 쓰는 원안이 되었던 시의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었다. ‘I tombe enfin! …et se releve Roi!’ ‘그는 마침내 죽는다. …그리고 왕으로 부활한다!’ 그 구절 그대로였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알고 있었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패배를 목전에 둔 그 순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부활한 것이다. 자신의 가장 큰 목적인 ‘승리’, 그 외에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 냉혹한 왕으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깨달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번 다시 이 피아노실을 찾지 않을 것이다. 미도리마에게 갑자기 악보를 내밀어 연주해 달라며 웃는 일도 없을 것이고, 언젠가는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말을 해 주는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이 자신에게 ‘절망‘ 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드디어, 자신이 아카시 세이쥬로를 단순한 ‘친구’로는 생각할 수 없던 이유를 알았다.
“아카시.”
“기다리는 건 쉽다. 내게는 다른 해야 할 일이 많고, 그 일 모두에 인사를 다하다 보면 시간 따윈 순식간에 흘러가겠지.”
“그러니 기다릴 수는 있다. 네가 돌아와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돌아오는 걸까.”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
가만히 악보 끝의 문구를 손으로 쓸어보다가, 미도리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감춘 오열의 증거로, 한 방울의 눈물이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졌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 그 날의 하늘은 무척 맑고 아름다웠다.
1.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지난 3년을 회고하며
0.
우리들의 3년은, 짧은 순간순간마다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1.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야기
-너와 처음 만난 봄
“안녕, 난 아카시 세이쥬로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맥 빠지는 첫 인사네.”
고개를 갸웃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두 눈 가득한 자신에 대한 적의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적의는 순전히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신을 제치고 신입생 대표 자리에 섰기 때문이라는, 미도리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하기 그지없는 동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만의 하나라도 아카시가 원인을 물어본다면 죽어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아카시는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는 대신 미도리마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3년 동안 같은 팀에서 활동하게 될 거잖아? 잘 부탁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리려고 농구부에 들어온 것뿐이라서. 일단 올해까지만 활동할 생각이었는데.”
“후훗, 너한테 밀려서 1군에 들지 못한 1학년들이 들으면 무척 화를 낼만한 발언인걸.”
“그 녀석들의 열등감까지 내가 책임져 줘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 말도 맞기는 하지. 그래서, 내 악수는 안 받아줄 생각인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의 얼굴은 분명 짓궂은 미소가 자리하고는 있었지만, 만의 하나라도 미도리마가 악수를 거부한다면 좋은 반응을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협박이 깃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마지못해 아카시의 손을 잡고 살짝 악수한 뒤 재빨리 손을 떼었다. 어지간히 나한테 불만이 많은 모양이네. 중얼거리며 싱긋 웃어 보인 아카시는 그 ‘불만’의 원인을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미도리마에게 있어 정말 뜻밖이었던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도리마, 장기 좋아해?”
괜찮으면 오늘 방과 후에 대국 상대가 되어 주지 않을래? 그렇게 덧붙이며 웃는 아카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미도리마는 순간 자신의 옹졸함을 가슴 깊이 반성했다. 그래, 나에 대해 호의를 보여주는 상대에게 굳이 차가운 반응을 고수할 것까지는 없지- 그런 생각과 함께 ‘좋다’고 대답한 순간부터,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늪에 한 발을 내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날의 장기 대국은 다섯 판 모두 미도리마의 완패였으며, 그로 인해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투쟁심에 불이 붙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봄은 투쟁심으로 시작했다.
-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여름
“그러고 보면 나는 미도리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네 얘기를 좀 해봐.”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들고 있던 패를 장기판 위에 내려놓았다. 장군. 덤덤하게 승리를 선언하는 그 목소리는 방금 전 그가 한, ‘네 얘기를 해 봐’ 라는 요구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톤이었다. 새삼스레 눈앞의 소년에게는 승리를 선언하는 일이 일상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미도리마는 짜증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카시는 ‘승자의 특권으로 요구하는 거야’ 라며 미도리마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런 이유가 동반된 요구라면,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다.
“나는 7월 7일생 게자리에, B형이라는 것이다.”
“응, 그건 알고 있어.”
“AB형인 너와는 통하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지만, 정작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
“아, 그건 꽤 정확하네. 난 미도리마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의사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계시고,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여동생이 있어? 미도리마는 왠지 좋은 오빠일 것 같네.”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 예뻐하고는 있다는 것이다. 럭키 아이템도 매일 챙겨 주고 있지. 최근 동생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 내가 치던 때보다도 재능이 있어 보이니, 그 길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저번에 말해줬더니 고맙다며 웃었다는 것이다.”
“미도리마, 피아노 칠 줄 알아?”
“초등학생 때 잠시 배웠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론 치지 않았어.”
“그렇겐 말해도 꽤 괜찮은 실력일 것 같은걸. 다음에 한 번 들려줘.”
“방금 내 말 제대로 듣고 있었냐는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론 그만뒀다니까.”
“그럼 이건 어때? 그 대신 내가 내 이야기를 해 줄게.”
이건 무슨 억지 조건이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순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자신의 과거사와 미도리마의 피아노 연주를 교환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말릴 틈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어머니가 안 계셔.”
그리고 그 사실이 또한 충격적이었기에,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입을 연 순간부터 하고 있었던, 그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순식간에 뇌리에서 삭제하고 말았다. 뭐라고? 놀람을 굳이 감추지 않는 목소리로 묻자, 아카시가 풋, 하고 웃었다.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 난 형제도 없어서, 지금은 아버지와 둘이 살아. 아, 하지만 아버지는 일로 대부분 집에 없으니까, ‘같이 산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나하고 같이 사는 건 우리 집의 고용인들이지. 응. 그래서…… 미도리마가 말한 것 같은, 평온한 가정은 꽤 동경했었어.”
무슨 반응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아카시가 어떤 반응을 원하고 미도리마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이야기를 들어버렸고, 그 이야기에 걸맞는 반응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최대한, 동정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건…… 상당히 안타까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 아까는 그렇게 말했어도 나, 지금의 가정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내 감상이 그랬다고 말했을 뿐이야.”
“……역시 미도리마는 좋은 오빠일 것 같아.”
“그래?”
“응. 이렇게나 자상한걸.”
웃으며, 아카시는 장기짝을 끌어 모았다. 또 한 판 할 거지? 그 목소리에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왜였을까. 미도리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카시는 웃었다. 칸에 맞춰 장기짝을 하나씩 놓는 아카시의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도리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
“일주일 뒤, 제 2 음악실에서 보자는 것이다.”
“응?”
“피아노 연주. 내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도 괜찮다면, 거기서 해 주겠다.”
미도리마의 제안에 아카시가 말을 늘어놓다 말고 잠시 미도리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안경을 끌어올리자,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라면 ‘비웃음’ 이라고 생각해 불만을 늘어놓았을 그 웃음소리에는 방금 전 미도리마가 느꼈던 쓸쓸함이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아, 그랬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늘, 이런 식으로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짓곤 했다. 아마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겠지. 아카시는 자신의 가정에 불만이 없다고 말했지만, ‘만족한다’ 고는 말하지 않았다. 일에 바빠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 주변을 둘러싼 고용인들…… 열둘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황량한 가정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신은, 그런 아카시 세이쥬로를 처음으로 동정한 것이다. 그뿐일 것이다.
그들의 여름이 새로운 감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너의 변화를 처음 느낀 가을
“글쎄.”
순간 아카시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한 마디에 미도리마는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아니면, 땀 때문에 몸이 식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곧 미도리마는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인 원인이 그 무엇도 아님을 깨달았다. 두 눈 가득 비친 아카시의 진지한, 그리고 매우 냉정한 얼굴은, 방금 전 그가 체육관 안에서 쿠로코 테츠야라는 소년에게 보여주었던 자상하기 그지없는 말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래, 요약하자면- ‘무관심’.
“나는 계기를 만들어 줬을 뿐이야. 거기서 어떻게 해 나가느냐는 오직 그에게 달렸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기에 자리까지 피해 줬더니, 관심은 그 정도에서 그친 건가?”
“자리를 피해 주기는 무슨. 문 밖에서 모두 엿듣고 있었으면서.”
“어딜 봐도 재능이라곤 보이지 않는 녀석 아니냐. 그런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니 그랬지.”
“흐음…… 혹시, 질투한 거야?”
“? 거기서 왜 질투라는 결론이 나오지?”
“아, 그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여전히 수수께끼로 가득한, 그리고 어딘가 실망스러움이 담겨 있는 말을 뱉어 놓고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앞장서 걸어 나갔다. 그 서두르는 발걸음에는 왜인지, 방금 전까지의 여유롭던 목소리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급함이 숨어 있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대상이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었다면, 착각해 버린 게 부끄러워서 자리를 피한 것이라고 착각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미도리마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빠르게 해 아카시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야기했었지. 우리 팀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저 녀석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건 오직 그에게 달려 있다고 말이야. 뭐, 아오미네와 제법 호흡을 맞춘 것 같으니까, 그와 상담하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겠어?”
“역시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나도 판단을 보류하고 지켜보도록 하지.”
“……지금 생각한 건데, 미도리마는 은근히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네.”
“아아, 네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질투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왜 거기서 질투라는 이야기가 나와.”
“……비밀.”
생긋 웃으며, 아카시는 가방을 고쳐 맸다. 그 순간 아카시의 얼굴에 드러난 미소는 미도리마가 이전까지 본 것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했다. 어쩐지, 아카시 세이쥬로답지 않은 수줍음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미소. 하지만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미도리마 역시 슬쩍 미소를 보냈고, 그들 사이에는 이전에는 없던 훈훈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을이,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너와 처음 손을 잡았던 겨울
“그러고 보니 나, 점심시간에 봐 버렸어.”
“뭘 말이냐?”
또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라고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말을 옮겼다. 미도리마치고는 상당히 평이한 수를 놓은 셈이었지만, 아카시는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해 오지도 그 수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마치 눈앞의 대국보다는 방금 전 자신이 꺼낸 화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듯이. 그 사실도 뜻밖이었지만, 그 직후 아카시가 꺼낸 ‘자신이 본 장면‘에 미도리마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서실 뒤뜰에서 미도리마가 고백 받는 거.”
“……어쩌다가?”
“그냥, 우연히 창밖을 봤는데 눈에 띄었어.”
나는 그 시간에 네가 도서실에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는데. 미도리마는 눈을 깜박이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카시의 얼굴에 불만이 어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어도 기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체 뭐가 불만스러웠던 걸까. 설마 자신을 제치고 미도리마가 먼저 여학생에게 고백 받은 게 기분 나쁘다 생각할 리는 없을 테고-덧붙여, 미도리마는 모모이 사츠키를 통해 아카시가 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왕자님’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장난스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카시를 놀려 보고 싶다는 욕심 그대로의 추측을 말했다.
“질투한 건가?”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 중에서 굳이 질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과거 아카시가 그 단어로 자신을 놀려보려 한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니지무라 슈조와 연습하는 내내 붙어서 부원들의 연습상황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미도리마가 눈을 떼지 못했을 때나, 무라사키바라 아츠시가 땀에 젖은 채 아카시의 등에 매달리는 것을 미도리마가 떼어놓았을 때나, 아오미네 다이키가 끈질기게 1대1 승부를 청하는 것을 미도리마가 막아 주려 했을 때나, 쿠로코 테츠야가 패스의 지도를 부탁한다며 아카시를 불러내자 그 옆에 따라붙었을 때나, 그런 아주 사소한 상황들에서. 혹시 질투해? 이거, 지금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거야? 질투야? 마치 미도리마가 질투하기를 바라는 듯한 아카시의 말투에 아주 약간 질렸고, 그래서 아카시 역시 그런 상황에 한 번쯤은 처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리 좋은 아카시라면 미도리마가 왜 굳이 질투라는 단어를 꺼냈는지 알 것이고, 자신의 심술이 미도리마를 꽤나 곤란하게 만들었었다는 사실까지도 유추해 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시 세이쥬로의 대답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그런 믿음을 완전히 배신했다.
“……그래. 질투했어.”
설마 그렇게 순순히 인정해 버릴 줄이야. 오히려 아카시를 곯려 주려던 미도리마 쪽이 당황해 버리는 상황에서,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에서 미도리마는 ‘설마 아카시가 그 여학생을 좋아하는 건가’ 라는 헛스윙은 절대 날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카시가 질투한 대상은 자신이 아니다. 바로 그 여학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설마 아카시, 너 날 좋아하는 거냐?”
“좋아해.”
“……뭐?!”
“네가 물어봐 놓고 왜 네가 놀라는 거야.”
바보. 아카시가 덧붙이며 공격을 개시했다. 순식간에 졸 하나를 빼앗겨 버린 미도리마는 순식간에 아카시 쪽으로 흘러가 버린 장기판 위의 전황에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그를 당황하게 만든 건 분명 아카시 세이쥬로의 대답이었다. 좋아해? 아카시가, 나를? 설마, 그런 의미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대국을 계속하던 미도리마의 귀에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군. 맥없이 끝나 버린 대국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도리마의 귀에, 다시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어떤데?”
그 질문에서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말한 ‘좋아한다’의 의미가 결코 ‘친구로서’ 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카시의 고백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까지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도 질투했다는 것이다. 니지무라 선배에게, 무라사키바라에게, 아오미네에게, 쿠로코에게. 만약 네가 다른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나는 아마 그 상대에게도 질투를 하겠지.”
“그래서?”
아카시가 장기판 위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미도리마라도 그것이 악수를 청하는 제스쳐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 위에 그날의 럭키 아이템이었던 데이지 꽃을 한 송이 내려놓았다. 아카시가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겠지. 너는 꽃말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일 터다. 꽃을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계속 던지는 아카시의 손을 세게 잡고, 미도리마는 데이지의 꽃말을 입에 올렸다.
“……‘당신과 같은 마음이에요’.”
그들의 겨울로, 길었던 ‘친구’ 관계는 끝이 났다.
2. 아카시 세이쥬로의 이야기
-네가 감추고 있던 기분을 알아주었던 날
그날 아카시 세이쥬로는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일방적인 통보다. 정말로. 지금의 자신이 중학생이고, 농구부 연습이 끝난 뒤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망정이었지 성인이 된 뒤에도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 최악일 것이다. 하긴 그 때는 아버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키웠을 테지만. 어쨌든, 앞으로 세 시간 뒤에 아버지가 ‘잠시‘ 들를 예정이니 반드시 시간에 맞춰 귀가하라는 제 1비서의 통보는 아카시의 기분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카시의 이러한 불쾌함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우선 아카시 본인이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핸드폰을 꺼내지 않으려 애를 썼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사적인 일로 인해 부원들을 괴롭히는 주장은 주장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카시의 모습에 쿠로코 테츠야는 심지어 ‘아카시 군은 지치지도 않는군요’ 라며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거냐, 너.”
그런데, 왜 너는 알아버리는 걸까?
흘깃 미도리마 신타로를 바라보자, 그는 마치 ‘내게도 안 들킬 거라 생각했냐’는 듯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미도리마. 난 네가 모르는 줄 알았어. 자신의 연인이 평소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를 알고 있는 아카시로서는 미도리마의 그 눈빛에 그러한 감상 외에는 뱉을 수 없었다. 물론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미도리마는 무척 화를 내면서, 아카시가 도저히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운 말을 잔뜩 늘어놓았을 것이니까.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도 딱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서도.
“대단하네. 나, 제법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는데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거,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도 미도리마가 날 쭉 봐주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해석하고 자시고, 그냥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 이런 점이 말이다.
단순히 친구였던 관계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이후, 미도리마 신타로는 이전까지의 적개심이나-그 적개심의 원인이 단순히 성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아카시는 폭소를 감추지 못했다- 아카시에게 미약하게 거리를 두던 모습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것이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인사를 다하는 그의 성격 탓이라는 것을 아카시는 잘 알고 있었고 미도리마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놀라울 정도의 직구만 던져 오는 미도리마의 태도에는 사귀게 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가끔 당혹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으음…… 별 일 아니야.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해서.”
“아버지가? 최근 몇 달 동안 바빠서 얼굴 내비칠 시간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게 말이야. 아마 차가 데리러 올 것 같아. 눈에 띄는 건 싫은데, 귀찮아졌어.”
“확실히 그건 좀 곤란하겠군. 오늘은 이걸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가 꺼내 보인 것은 한 악보였다. 아, 설마. 악보집 앞에 적힌 제목으로 시선을 돌리는 아카시에게 미도리마는, 전에 네가 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곡이라며 짧게 한숨지었다.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 연습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더니, 아마 오늘 들려줄 생각으로 쭉 연습해 왔던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아카시는 사과의 말 대신 미도리마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아카시의 뜻을 읽고 바로 손을 잡아준 미도리마는, 무릎에 악보를 펼쳐 놓고 가만히 그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는 없었지만,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음의 나열은 아카시의 귀에 똑바로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진짜를 듣고 싶은걸. 내일이라도 괜찮을까?”
“그래, 언제든지.”
“고마워, 미도리마. 좋아해.”
“……나도다.”
-네가 옆자리에 누워 주었던 날
“웬일로 옥상에 아무도 없군.”
“그러게, 점심시간인데 말야.”
“뭐, 옥상을 통째로 전세 낸 것 같아서 좋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그늘에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그도 그렇군, 이라 대답하며 미도리마 역시 그 옆에 앉았다. 가볍게 불어 온 초여름의 바람이 미도리마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경테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진녹색의 머리칼에 시선을 주다가, 아카시는 도시락을 열었다. 고급 찬합에 담긴 아카시의 점심식사는 마치 고급 도시락 전문점에서 파는 것 같은 호화로운 반찬으로 가득했다. 학생 식당에서 식사하는 건 질렸다며 도시락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집사는 새벽부터 주방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요구에 응해 주는 건 좋지만, 적어도 메뉴는 학생이 먹기에 적당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했다. 이어서 미도리마가 도시락을 열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차이에 아카시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아침에 정성스레 싸 주었을 미도리마의 도시락은, 찰기가 도는 새하얀 쌀밥에 미니 햄버그, 절임 반찬, 야채볶음, 그리고 문어 모양으로 볶은 소시지까지 들어 있었다. 소박한 메뉴지만 영양 균형을 충분히 고려해 만든 것임을 잘 알 수 있었다. 미도리마의 일상생활 하나하나를 엿볼 때마다 느껴지는 가족의 사랑은, 세상에 부러운 것 없이 살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만큼은 언제나 특별한 것처럼 비춰졌다.
“미도리마의 도시락을 보니 왠지 식욕이 떨어졌어.”
“확실히 부담스러운 식단이긴 하군. 육류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그래도 맛있어 보이는걸.”
“방금 한 말과 정반대잖나…… 나 참.”
그러니까, 네 도시락이 아니라 내 도시락 때문에 그런 건데. 부루퉁해진 아카시가 불만을 말하기도 전에 미도리마가 미니 햄버그를 불쑥 내밀었다. 그럼 먹어보라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동자에 할 수 없이 입을 가져다 댔다. 햄버그에서 소스까지 전부 직접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사랑. 그래, 그런 맛이 나. 그것은 아주 맛있었지만, 동시에 서럽기도 했다. 햄버그를 씹는 이빨에서부터 위장에 그것을 채워 넣기까지 전부, 미도리마 신타로는 가지고 있고 자신은 가지지 못한 무언가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역시 입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았나?”
“아니, 맛있었어.”
전혀 설득력 없는 칭찬과 함께 아카시는 제 도시락 뚜껑을 닫고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갑작스런 아카시의 행동은 미도리마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듯, 머리 위에서 갑자기 왜 그러냐는 염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그런 게 아냐. 네 탓이 아닌데. 가만히 팔을 베고 누운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젓가락을 들지 않은 쪽의 손가락을 살짝 어루만졌다.
“미도리마, 옆에 잠깐만 누워 볼래?”
그 갑작스런 부탁에도 미도리마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제 도시락 뚜껑을 덮어 옆으로 밀어둔 채 아카시의 옆에 누운 미도리마는, 제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아카시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올라간 입술은 소지에서 엄지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마지막에는 손바닥까지 내려온 입술이 쪽, 하고 다소 큰 소리를 낸 뒤 떨어졌다.
“우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네가 웃는 게 보고 싶으니까.”
“……미도리마는…… 가끔 엄청나게 부끄러운 짓을 해.”
“그래서, 싫은가?”
“……그럴 수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대답답지 않은, 하지만 미도리마에게는 아마 충분했을 대답을 해 놓고 아카시는 가만히 미도리마의 품을 파고들었다.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아 준 미도리마의 손은 방금 전 맛본 미니 햄버그의 맛만큼이나 자상했고,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네가 품에서 재워 주었던 날
“아카시, 아카시.”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손에 아카시는 번쩍 눈을 떴다. 잠시 멍한 머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카시는 자신이 부실 책상에 엎드려 깜박 졸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쯧, 하고 혀를 찬 미도리마는 의자를 끌어와 아카시의 옆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단팥죽 캔을 들고 있었던 따뜻한 손가락이 아카시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지나갔다.
“어제 자지 않고 뭘 했느냐는 것이다.”
“시험공부.”
“누가 들으면 놀라겠군.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공부를? 하면서.”
“이번 영어 시험은 특별히 어려울 거라고 얼마 전 선생님에게 들었거든.”
“정말 그렇다면 아오미네와 키세가 걱정인데. 방과 후에 보충수업이라도 할까?”
“키세는 몰라도, 아오미네가 쉽게 나타나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쿠로코에게 데려오라고 시키라는 것이다. 아니면 모모이. 두 사람 모두 기꺼이 멱살을 잡고 끌고 와 줄 거다.”
“하긴…… 지금의 아오미네라도 시합에는 나가고 싶을 테니까. 그럼 그 때를 대비해서 공부나 좀 해 볼까?”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작게 기지개를 켰다. 정말로 보충수업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잠을 줄여야 할 것이다. 흔히들 아카시 세이쥬로가 어떠한 성과를 내는 것을 무척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다른 학생들 못지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처럼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작 아카시 본인은 ‘만의 하나‘ 라는 선택지를 늘 고려해야만 했다. 장기와 똑같다. 늘 다음 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대국을 진행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일에 대해 단단히 대비해놓지 않으면 만의 하나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상황을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카시의 노력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상대는, 자연스레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아카시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 해, 공부 안 할 거야?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을 슬쩍 던지자 미도리마는 의자를 살짝 뒤로 빼고 앉았다.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오히려 책상에서 멀어지는 저 행동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그런 아카시의 의문을 해결해 준 것은 다음 순간 미도리마가 취한 포즈였다. 양팔을 벌리고 아카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도리마는 딱 한 마디, 아카시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이리 오라는 것이다.”
“……뭐?”
“공부라면 한숨 잔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아. 재워 줄 테니 이리 와서 앉으라는 것이다.”
“앉으라니…… 네 무릎 위에? 무거울 텐데?”
“안 무거워. 그리고 너도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보다는 편할 테지.”
마치 아카시가 오지 않는다면 제 쪽에서 끌어당기겠다는 듯 말하는 미도리마는, 언제나 그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혀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진지하게 아카시를 제 무릎 위에서 재워주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시선이어서, 아카시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가볍게 미도리마의 품으로 뛰어든 아카시는, 놀라울 정도로 편안한 그 ‘의자’에 감탄하고 말았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마른 것 같아도 미도리마의 몸 여기저기에는 근육이 붙어 있다.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팔이 아카시를 끌어안았다. 마치 아끼는 인형을 안아들듯 한 손으로는 아카시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카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도리마는 무언가를 흥얼거렸다. 그것이, 자신이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할 때 듣는 오르골의 선율임을 깨달은 아카시는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아, 어떡하지.
심장이 두근거려서, 쉽게 잠들 수 없겠는걸.
-네가 좋아한다 말해 주었던 날
미도리마의 키는 어느새 제법 자라 있었다. 최근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자각은 했었지만, 설마 발돋움을 해도 닿지 않을 정도라니. 그것은 미도리마가 자란 만큼 자신이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아카시는 조금 서운한 마음으로 들어 올렸던 발꿈치를 살짝 내렸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미도리마는 눈을 떠 시무룩해진 아카시의 얼굴을 확인하자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첫 키스가 무산되는 건가. 미도리마가 부쩍 자라 버린 데 대한 서운함에 아쉬움이 더해져 아카시는 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문득, 아카시는 제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 미도리마의 팔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 몸이 위로 떠올랐다. 잠깐, 하고 그 행동을 저지하기도 전에 입술이 와 닿았다.
“읏…….”
진지하게 눈을 감은 미도리마의 얼굴을 천천히 눈꺼풀 너머로 간직하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자신의 손만큼이나 힘이 들어간 미도리마의 팔은 아카시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미도리마의 왼손이 아카시의 목을 받쳐 잡나 싶더니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었다. 입술을 맞대는 것으로 끝, 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전개는 예상외였다. 완전히 미도리마에게 붙잡힌 채 아카시는 그대로 자신을 개방해 버렸다. 혀가 섞이고 깊게 입술을 빨아들이는 달콤한 키스가 끝난 뒤, 하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카시는 그대로 미도리마의 품에 끌어안겼다. 귀 가득 미도리마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쾅, 쿵쾅, 쿵쾅 하고. 미도리마도 이렇게 심장이 뛰는 일이 있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한 사실인 것을, 왜 몰랐을까?
“아카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던 아카시의 귀에 미도리마의 떨리는 목소리가 뛰어 들어왔다. 영문 모를 물기를 머금은, 평소의 몇 배는 가라앉아 훨씬 농밀하게 들리는 미도리마의 목소리는 그의 심장 박동과 섞여들어 아카시의 얼굴을 새빨간 색으로 물들였다. 아카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른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끌어안은 손에 훨씬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좋아한다는 것이다.”
순간 몸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아카시의 모습에 미도리마가 당황하며 함께 몸을 숙여주었다. 아카시? 당황한 듯 그의 이름을 부른 미도리마는 더는 주체할 수 없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만 아카시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살짝 눈을 감은 그 잘생긴 얼굴에 다시 한 번 입술을 가져다 댔다가, 아카시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미도리마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그것은 그들이 연인이 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3.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이야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니야?”
차가운 말투와 냉정한 목소리, 그리고 약간의 비웃음. 눈앞에서 자신을 향한 냉소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저 모습은, 정말로 자신이 이전까지 알고 있던 아카시 세이쥬로인 것일까. 미도리마 신타로는 순간 이 현실이, 자신을 바라보는 저 존재가, 끔찍할 정도로 싫다고 생각했다.
“뭐, 네 쪽에서 먼저 말할 생각이 없다면 됐어. 내가 말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방금 전까지 저 혼자 두고 있었던 장기판 위에서 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온 아카시는 주먹 안에 든 그것을 미도리마 쪽으로 내밀었다. 마치 언젠가 본 장면 같다. 그때도 아카시가 먼저 손을 내밀었었지. 자신은 그 위에 그날의 럭키 아이템을 놓아 주었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카시도 미도리마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그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물건일 터다.
“팔 아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하며,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슬쩍 쳐다보았다. 웃음기 어린 흔적이라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눈초리에 미도리마는 천천히 제 손바닥을 아카시에게 내밀었다. 꽉 쥔 주먹이 그 위에 말을 떨어뜨렸을 때, 그 손을 잡아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을 잡아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언제나 그랬듯이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러면- 지금의 현실은 산산조각 나지 않을까.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들을 둘러싼 현실도 그대로였다. 가만히 아카시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선물.”
이별을 기념해서.
아카시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미도리마는 아주 잘 알았다. 손바닥 위에 놓인 말은 각행이었다. 체스로 치자면 비숍. 미도리마는 체스를 둘 줄 몰랐지만 장기는 둘 줄 알았고, 그래서 그 말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체스 말이 아닌 의미로는 주교를 뜻한다.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왕을 수호하던, 일종의 성직자.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위치였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아카시 세이쥬로는 왕이었으며, 그의 청춘의 신이었다. 충성도, 신앙심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최대한 보필하려 애썼고, 그 시간의 결과는 이처럼 차가운 배신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게 최선이었던 거냐.”
“응. 나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며칠 전,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전까지의 자신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의 인생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패배를 목전에 두고 그는 변하고 말았으며, 그것은 더 이상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관계가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승리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감정도, 아카시 스스로의 감정도. 오히려 그것은 승리를 추구하는 데 불필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고, 그것을 외면하면서까지 아카시에게 매달릴 정도로 비참하지도 않았다.
“……너는 정말 나쁜 녀석인 것이다.”
그런 잔인한 말을 뱉고 마는 자신에게, 아카시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표정도, 쓸쓸한 분위기도, 지금의 아카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말 그가 자신을 좋아했었는지, 수도 없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날의 아카시는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인지, 미도리마는 더 이상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나를 좋아했었나, 아카시.”
“……글쎄, 어떨 것 같아?”
‘좋아했었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런 길을 스스로 택하고 말았고,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런 아카시를 붙잡지 못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결코 바뀔 리 없는, 변화하지 않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너무도 잔인한 현실.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다. 이전부터 그는 아카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그가 이별을 바란다면, 가슴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이뤄줄 수 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져는 주겠지만, 내가 널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미도리마 신타로의 감정마저도 퇴색되어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타로의 그런 끈질긴 점,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었어. 몇 번이고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덤비는 근성 같은 거. 진인사대천명, 정말 너한테 어울리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걸 긍정적으로 볼 순 없을 것 같네.”
그럴 것이다. 절대적인 승리,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패배-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아버린 지금의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그를 이기겠다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결심 따위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존재가, 그의 도전 자체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굳건한 왕좌를 흔드는 거대한 파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각해 버린 이상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애’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미도리마는 제 손 안에 들어온 장기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대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던 아카시는, 그가 부실의 문을 연 순간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그 목소리는 미도리마의 귀에 정확하게 와 닿았고, 미도리마는 부실 문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매정하게 대해 주는 쪽이 내게는 더 편하니까.”
“……이기적이네.”
“네가 할 말이냐.”
“……그래, 알았어. 잘 가.”
그런 말을 하는 아카시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졌지만, 미도리마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유혹을 참아 넘겼다. 오르페우스는 지옥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에우리디케를 돌아본 탓에 비극을 맞이했다. 자신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미도리마는 굳게 결심한 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무거웠다.
「‘미도리마’.」
방을 나가기 직전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이제는 더는 듣지 못하게 될, 자신의 이름의 울림 때문에.
“……좋아했어.”
그리고 텅 빈 부실에서 아카시 세이쥬로가 흘린 마지막 감정의 말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닿지 않았다.
한줄 후기.
50. 서로의 감정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한 발을 내딛지 못해서, 혹은 내딛지 않아서, 관계가 답보 상태인 두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49. 미도리마가 들고 다니는 우산은 늘 아카시와 함께 쓰기 때문에 큰 사이즈입니다. 미도리마라면 헤어진 뒤에도 그 우산을 들고 다닐 것 같죠. 아마 평생.
48. 슈완님이 제시해 주신 곡입니다. 루카 노래 좋아했는데 최근 구미에 빠지는 바람에 제대로 못 찾았었네요. 그런데 정말 명곡입니다. 듣는 내내 아카시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47.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두 사람 다 단 것을 싫어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미도리마 한정으로 단팥죽은 예외.
46. 애니메이션 마지막화는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 왜 원작에도 없는 장면을 넣어주는가... 존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런 걸 썼습니다.
45. 아카시는 아마 저 뒤에 직접 키스해 주기를 바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마가 둔한 게 죄지...
44. 뎀즈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미도리마의 첫 몽정은 아카시를 강제로 범하는 꿈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뒤에 찾아오는 현타. 이 로그는 좀 개그성이지만 진지하게 그쪽 얘기도 써보고 싶다...
43. 소녀심 쩌는 아카시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솔직히 미도리마 잘생겼잖아요? (...)
42. 미도리마는 폭발하면 무서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카시는 그 폭발을 즐길 것 같습니다. 19금으로 쓰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했습니다.
41. 휴일을 함께 보내는 연인은 참 좋지요. 대체 미도리마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웃음)
40. 테이코 3학년의 엉망진창인 관계 속에서도 연인인 두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 뒤 미도리마는 졸업식 때 아카시에게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39. 이 로그에서의 두 사람은 아직 사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서로 껴안고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게 녹적이죠.
38. 사귀는 관계였다면 미도리마는 아마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어쨌든 이 소재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카시 로그에서 이어집니다.
37. 매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작업하고 있어서 소재로 삼아보았습니다. 근데 솔직히 어린이 메뉴 좀 맛있어 보이지 않나요? 참고로 이 로그에는 모종의 오류가 있는데, 바로 어린이 메뉴는 10살 이하의 어린아이 외에는 주문 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어린이 햄버그 아카시한테 먹이고 싶어서 저질렀어요... 죄송합니다...
36. 숭님과 망상하다 나온 소재입니다. 처음에는 꽃반지 끼워주며 노는 녹적이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암울해져서 당황했습니다.
35. 뎀즈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47번 로그에서 아카시가 먹었던 게 바닐라 셰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서 써봤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아카시가 단 것을 싫어하는 이상 단팥죽이라도 다를 건 없었겠죠. 미도리마한테는 특별하겠지만.
34. 루나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슈토쿠vs라쿠잔에서 미도리마가 이겼더라면 적어도 점프 본편에서 그렇게 망가지는 아카시는 없었을 텐데... 싶어서 썼습니다. 철저한 원작부정.
33. 하늘곰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미도리마의 진지한 얼굴에서 안경을 제거하면 잘생김이 배가 됩니다. 안 돼요. 안경은 써야 합니다. 저와 아카시의 심장을 위해서.
32. 자기가 잘못해 놓고 후회하는 공도 매력적이지만 왠지 녹적은 반대인 게 어울립니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와 다시 맺어지지 않는 이상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31. 솔직히 말해 미도리마를 상대할 때는 그냥 솔직하게 데이트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는 아카시가 보고 싶었습니다.
30. 이 일을 계기로 아카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도 미도리마는 아마 그 그림을 완성하지 못할 겁니다. 미도리마가 처음 그리고 싶었던 아카시의 이미지는 언제나 승리하는 자의 '고독함' 이었고, 미도리마가 옆에 있게 된 이상 아카시는 더는 고독하지 않으니까요.
29. 수많은 츤데레의 유형 중에서도 이 로그에 나온 츤데레가 미도리마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츤츤대면서도 챙길 건 다 챙겨주는...
28.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오직 상대가 있어서 하는 두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27. 이 소재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 아카시 아버지는 아카시 팬들의 공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소잿거리가 늘어나서 좋아하지만. (...)
26. 이 이야기에서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슬픈 뒷설정이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아하게 되겠지만요.
25. 하야히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미도리마 선생님의 첫 번째 환자는 어리광이 장난이 아니네요... 힘내요, 선생님. 귀엽잖아요! (웃음)
24. 19금이니까 따로 빼서 씁니다.
23. 미도리마는 아직 모릅니다. 아카시가 직접적으로 말을 해야 알겠지요.
22. 이 날 밤 미도리마의 반찬은 정말로 아카시였습니다. 언젠가는 그 얘기도 써보고 싶다... 아니 누가 그려주세요...
21. 어두운 걸 싫어하는 아카시가 모에입니다. 폐소공포증 같은 것도 있으면 참 좋겠다.
20. 리플레이스 5권 표지의 미도리마가 너무너무너무 맘에 안 들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썼습니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왜 그렇게 구부정하게 걷는 건데... 이런 게 아니면 납득이 안 돼...
19.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다' 라고 말한 원작의 미도리마를 대놓고 부정해보았다. 사실 아카시는 자신이 두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미도리마는 그것을 부정하는 녹적 구도도 매우 좋아합니다. 원작붕괴지만.
18. 쌍방향 소유욕이 쩌는데 어두운 분위기 말고 귀여운 분위기로 집착하는 녹적이 보고싶어서 썼습니다. 근데 니지무라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참고로 선배는 아카시에게 연애감정 같은 건 없습니다.
17. 미도리마는 분명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그런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그렇기에 아카시 역시 무척 소중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카시는 그런 미도리마에게 끌렸을 거고. 녹적 연애해라.
16. 비상구에 대한 생각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이 이야기를 쓰면서 당시 모국에서 일어난(그리고 아마 이 후기를 쓰는 도중에도 현재진행형일) 안타까운 사건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모든 소년 소녀들의 명복을 빕니다.
15. 본능적으로 상대의 사진을 찍어 저장하는 소재는 과거 개인지에서도 쓴 적 있습니다만, 그때는 아카시가 대상이었습니다. 미도리마라면 아카시의 평소 모습보다는 얼핏 보고 지나칠 만한 순간순간을 저장할 것 같고, 아카시는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미도리마의 모습을 하나하나 저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4. 가끔은 아카시를 놀라게 하는 미도리마가 좋습니다.
13. 이 시기의 미도리마는 혼란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아카시를 챙기고, 아카시는 그런 미도리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며 미도리마를 괴롭히는 구도가 거의 제 안에서는 공식이나 다름없는 듯... 참고로 저 빚은 나중에 갚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12. 미도리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당연한 아카시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11. 혹시 고교 녹적데이 로그를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익숙한 배경일지도.
10. 혹시 고교 녹적데이 로그를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익숙한 구성일지도. 하지만 쓴 것은 이쪽이 먼저입니다. 미도리마의 하루하루는 정말 규칙적인데, 그 안에 아카시의 모습이 빠짐없이 들어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9. 소설과 드라마CD의 내용을 반쯤 섞었습니다. 소설에서는 아오미네-쿠로코-키세-모모이 네 사람만 노을을 봤다는 게 신경쓰여서... 대체 화과자조는 어디에서 무얼 했단 말인가? 하는, 화과자조 팬덤에서 한 번쯤은 가져봤을 의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입니다. 네? 무라사키바라요? 어디에서 과자를 먹고 있지 않을까요? 그 드레스를 입고.
8. 원작에서 쿠로코는 퇴부서를 내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그렇게 써보았습니다. 당시 쿠로코가 하고 있던 생각을 진심으로 이해한 사람은 아카시의 변화를 가장 코앞에서 지켜본 미도리마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미도리마는 도망치지 않았던 만큼, 쿠로코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요.
7. 48번 로그에서 썼던 것처럼, 미도리마에게만큼은 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일순이라도 아카시가 했으면 어땠을지를 생각하다가 그만.
6. 미도리마가 부주장이 된 경위에 대해서는 원작에서 밝혀주지 않은 만큼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테이코 시절 '선배가 주장-후배 및 다음대 주장이 부주장' 이 원칙이었을 거라는 건 제안의 동인설정입니다만, 사실은 아카시가 테이코에 있어서 특별했던 게 아니라 미도리마가 아카시에게 있어서 특별했기를 바라는 마음이 표출됐을지도 모르겠네요.
5. 다른 주제로 준비하고 있던 로그였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56번의 연장선상일지도 몰라서 썼습니다. 오롯이 아카시에게만 특별한 미도리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76번 로그랑 은근히 겹치는 소재네요. 패배를 알고도 아카시에게 도전하는 미도리마... 좀 좋은 설정 같지 않나요.
4. 연이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해봤으니 이번엔 좀 달달하게. 참고로 이 스토리에서 아카시는 그날 전철을 처음 탄 것이었습니다. 이후로는 택시로만 이동했다는 돈지랄... 아니, 차마 웃을 수 없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3. 과거 썼던, 아카시를 경멸하면서도 아카시랑 관계를 맺는 미도리마... 이야기입니다. 원래는 결벽증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어요. 참고로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좋아합니다. 몸이라도 좋아... 뭐 그런 설정.
2. 생각해 보면 미도리마는 굳이 농구를 하지 않았어도 테이코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거 같은 느낌. 그래서 피아노를 계속 치게 해 보았습니다. 장래희망은 의사겠지만. 아카시의 경우에는 분명히 아버지가 강요해서 시작한 농구일 테니(테이코는 농구부를 제일 쳐주는 것 같은데 거기에 자기 아들이 없다니 인정할 수 없어! 같은 느낌으로...?) 아카시에게는 그대로 농구를 시켰고요. 사실 이 설정으로 맨 처음 생각했던 얘기는 아카시가 미도리마보고 농구부 들어오라고 계속 꼬시는 이야기였는데... 뭔가 시리어스한 느낌으로 빠지고 말았네요...
1. 테이코 녹적의 모든 이야기를 다 집어넣고 싶었는데 중학교 3학년에 와서는... 뭔가... 이 이야기는 다른 로그에서도 지겹게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으로 1-2학년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3학년에서 그 이야기가 모두 박살나는 구성을 취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별로 안 슬프다... 왜지... 난 슬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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