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4.
高校緑赤の日記念ログ
緑間真太郎x赤司征十郎
50.
[2ch] 미도리마 신타로「연인이 역강간 에로책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도리마「무서운 것이다…… 아카시, 무서운 것이다!」
아카시「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오버해?」
미도리마「내게 널 범하게 할 셈이냐……」
아카시「가끔은 괜찮지 않아?」
미도리마「진심이냐?!」
아카시「진심인데」
미도리마「그럼 그 책은 정말 네 것인 것이냐?」
아카시「다이키한테 받았어」
미도리마「범하게 할 셈인 거냐…… 엠페러 아이로 범하게 만들 셈이로군!」
아카시「눈 따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데?」
미도리마「자, 잠깐, 아카시. 진정해봐라. 너도 그럴 나이니까, 이런 거에 흥미를 갖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카시「딱히 긍정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미도리마「그런 책을 읽거나 보고 싶어지는 것도, 나쁜 일이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아카시「……저기, 신타로」
미도리마「왜, 왜 그러는 것이냐」
아카시「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야? 서운하게」
미도리마「무, 무섭단 말이다! 내게 널 범하게 만들 생각이잖나!」
아카시「범해지는 건 난데 왜 신타로가 겁을 내?」
미도리마「초 매니악한 방법으로 범하게 만들 생각이잖나!」
아카시「아니, 그러니까 어차피 내가 바텀이잖아?」
미도리마「텅 빈 교실 의자에 앉혀놓고『오늘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내가 다 해 줄게』라거나 그런 소리 하면서 범하게 할 거잖아」
아카시「대사 따오는 걸 보니 자세하게 읽었나 보구나, 신타로」
미도리마「『나 보고 섰어? 부끄러워하는 게 재미있네』같은 특유의 매니악한 말 공격 같은 거 할 셈이잖아」
아카시「어, 그거 괜찮네」
미도리마「『내가 무릎 위에서 신음하는 걸 보면 기분이 어때?』이런 소리 하면서 범할 셈이잖아」
아카시「대사 굉장히 리얼하게 뱉네, 진짜 자세히 읽었나 보구나」
미도리마「대체 그런 매니악한 말 공격은 어디서 배워왔냐는 것이다!」
아카시「딱히 배운 건 아닌데……」
미도리마「그, 그럼 본능이라는 것이냐……? 정말이냐……?」
아카시「그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걸?」
아카시「아니, 그것보다 아까 신타로가 말했던 거 같은 건 역강간물에서는 전혀 매니악한 범주가 아냐」
미도리마「……뭐?」
아카시「매니악하지 않거든, 전혀」
미도리마「……그, 그 정도는, 기본이란 거야?」
아카시「응, 기본」
미도리마「상큼한 목소리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솔직히 아까 그것도 상당히 심하다고 생각하는 걸 책에서 따온 거였다고!」
아카시「기억력이 좋은 거야, 아니면 정말 그걸 전부 외우는 거야?」
미도리마「내가 여태까지 해주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나……」
아카시「음, 사실 신타로는 다 좋은데 너무 자상해서 조금 심심해」
미도리마「상큼한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아카시…… 난 네가 점점 멀게 느껴진다」
아카시「물리적으로 그렇게 거리를 벌리면 나 상처 받는데」
미도리마「그, 그렇지만 범하게 할 생각이잖나」
아카시「글쎄, 어떡하지?」
미도리마「역시 교토와 도쿄의 거리 차이를 메우는 건 힘들었던 걸까……」
미도리마「신칸센 비용이 부담되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게 문제였나……」
아카시「왜 혼자서 심각한 분위기로 몰아가?」
미도리마「매번 할 때마다 최대한 기분 좋게 만들어주려고 했었는데……」
아카시「아, 기분은 좋았지. 하지만 그거 심심한 걸 싫어하는 바텀이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잔소리인데?」
미도리마「하, 하지만 플레이적인 견지에서 말하자면 탑의 손발을 묶는 것도 역시 일종의 흥분 포인트가 되나……?」
아카시「이쯤 되면 네가 더 밝히는 것처럼 보여」
미도리마「기, 기본이라면서?」
아카시「기본기가 충실해야 심화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미도리마「그, 그렇다면 역시 네 넥타이를 희생시켜서 내 손목을 묶는 건가……?」
아카시「그런데 괜히 협조적이다? 아까까지는 범할 거잖나! 하고 소리질렀으면서…… 나 상처받았다고?」
미도리마「아, 아니,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 그, 반항했다간 더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아카시「그러니까 바텀은 난데 왜 신타로가 겁을 내는 거야?」
미도리마「아카시, 내 얼굴을 보고 말해 봐라」
아카시「뭘?」
미도리마「『나는 연인과 역강간물을 찍고 싶지 않고 지금 성관계에 만족합니다』라고.」
아카시「싫어」
미도리마「일언지하에 거절이냐?!」
아카시「하지만 억지 발언은 할 수 없는걸」
미도리마「끄응……」
아카시「그러면 신타로가 말해봐.『나는 연인이 원하는 것을 해 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금 굴욕적이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미도리마「왜, 왜 나한테 시키는 것이냐!」
아카시「말 못한다는 건 역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지?」
미도리마「그, 그런 게 아니라!」
아카시「말하기 힘들면 됐어, 난 신타로가 거짓말을 하길 바라는 게 아니니까……」
미도리마「다 이해한다는 표정 짓지 말라는 것이다!」
아카시「네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내가 신타로의 취향을 이해하면 되니까……」
미도리마「왜 입장이 역전된 것이냐!」
아카시「나 참, 할 수 없네. 말해줄게. 뭐더라……『나는』……」
미도리마「『나는 연인과 역강간물을 찍고 싶지 않고』」
아카시「아, 그거였지.『나는 연인과 역강간』……」
미도리마「(불안) 왜 그러지?」
아카시「음, 일단 확인해 둘게」
미도리마「……뭔데?」
아카시「이『역강간물』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 거야?」
미도리마「왜, 왜 그걸 나한테 묻는 것이냐!」
아카시「하지만 의외로 너와 나 사이에 인식이 다를지도 모르잖아?」
미도리마「그, 그럼 너야말로『원하는 것』의 기준이 뭔데?」
아카시「신타로가 거칠게 안아 주는 것」
미도리마「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거냐!」
아카시「한 번쯤은 해줘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미도리마「으으…… 너의 취향은 정말 거시기한 것이다」
아카시「그 단어를 쉽게 입에 담는 신타로가 나보다 더 무서운걸」
아카시「그럼 조금씩 확인해 볼까? 신타로가 못 하겠다 싶은 걸 말해 봐」
미도리마「그,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못 한다』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게…… 네가 아까 그 선언을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건가」
아카시「아니 뭐 아마도…… 랄까, 타협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미도리마「그, 그런 것이냐?」
아카시「그런 거야.」
아카시「그럼『못 한다』의 기준 결정 스타트」
미도리마「우선은『기승위』!」
아카시「아웃」
미도리마「……응?!」
아카시「뭐야, 정말…… 이런 사소한 것부터 타협해야 하는 거야?」
미도리마「사, 사소한 것이라니!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카시「기승위 정도는 평범하게 하잖아, 체격차이 나는 커플이라면」
미도리마「아니, 그거야 하겠지만 우리는 한 적 없잖아」
아카시「우리가 한다거나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기준으로 기승위는 하잖아」
미도리마「그, 그야 하겠지만 말이지……」
아카시「잘 들어, 신타로. 그냥 기승위야. 별 의미 없이 그냥 기승위라고. 구속도 뭣도 없이 그냥 기승위야. 그렇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OK라고 했는걸」
미도리마「다, 당연하잖나! 그렇다기보다 손을 묶어놓고 기승위를 하자고 했으면 오히려 널 묶었을 거다……」
아카시「아, 그거 괜찮네. 넥타이 줄게, 묶어줄래?」
미도리마 (글렀어 이 녀석……)
미도리마「으-음…… 그건 됐고, 아까의 그 선언을 할 수 있겠나?」
아카시「응? 무슨 선언?」
미도리마「『나는 연인과 역강간물을 찍고 싶지 않고 지금 성관계에 만족합니다』 란 선언!」
아카시「싫어」
미도리마「조금은 더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아카시「내가 싫다는데 왜 억지로 강요하려 드는지 모르겠어…… 아, 그것도 플레이의 일종이라면 난 괜찮지만」
미도리마「그, 그렇게 되는 거냐?!」
아카시「그렇게 되는 거야」
미도리마「말도 안 돼…… 그렇게 은근슬쩍 범하게 할 생각인가?」
아카시「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카시「그러면 신타로는 아까 그 선언 해 줄 거야?」
미도리마「……」
아카시「어,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거야?」
미도리마「그것이……」
아카시「말해도 괜찮아, 신타로. 난 오히려 바라고 있으니까」
미도리마「……그게, 사실, 하고 싶은 것이다……」
아카시「(화색) 정말로?」
미도리마「미, 미안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이다!」
아카시「뭐야, 처음 했던 리액션이랑 전혀 다르잖아」
미도리마「미,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것이다!」
미도리마「하지만 아까 그…… 말로 공격하는 건 엄청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카시「역시 그 책 대사 외우고 있었던 거구나…… 바라던 일이긴 한데 왠지 무서워……」
미도리마「조용히 하라는 것이다! 범한다?!」
아카시「신타로, 그게 본성이었어……?」
미도리마「이, 일단 타협을 위한 질문」
미도리마「네게 있어서 기승위는?」
아카시「기본 체위」
미도리마「내 무릎은?」
아카시「앉고 싶어지네」
미도리마「네 넥타이론?」
아카시「손목 묶어 줄게」
미도리마「한 달에 한 번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그런 짓을 할 생각이냐?」
아카시「그것도 괜찮은데. 난 M이라서」
미도리마「!!!」
아카시「어, 얼굴 빨개졌다」
미도리마「아, 아카시, 너란 녀석은……! 진심이냐?! 진심으로 그런 말 하는 거냐?!」
아카시「진심이라니까 그러네. 계속 왈가왈부하면 무릎 위에 타서 안경 벗겨 버린다?」
미도리마「그건 또 뭐야?!」
아카시「자주 나오는 패턴」
미도리마「자주 나오는 패턴이라고?!」
아카시「신타로가 나한테 이것저것 장착시켜서 라쿠잔 부활동에 내보냈으면 좋겠어」
미도리마「무, 무엇인 것이냐, 갑자기!」
아카시「아, 미안. 신타로가 조금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본심이 나왔네」
미도리마「무섭다고! 그런 걸 안에 담아두고 있었는데다 대상이 자신이라니 무섭다고!」
아카시「내가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휴식 시간마다 영상통화로 보여줄게」
미도리마「그, 그만두라는 것이다……」
아카시「아, 못 참고 전화하는 건 방과 후로 해 줘. 집에 가면 목소리 뿐이라도 충실히 반응해 줄게」
미도리마「폰섹스까지 할 생각이냐?!」
아카시「그리고 나, 이런 플레이 하고는 싶은데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건 싫거든. 신타로한테만 보여줄 거야」
미도리마「어, 그건 조금 기쁘긴 한데…… 그, 그래도 당하는 게 네 자신이란 자각을 가져라!」
아카시「한 달만에 찾아온 신타로를 우리 교실 내 자리에 앉혀놓고 싶어」
아카시「신타로가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무릎 위에 탈 때 내 눈을 가려줘도 괜찮아」
아카시「신타로하고 목욕도 같이 하고 싶은데?」
미도리마「마지막 건 충분히 연인다운 행위인데도 무섭다!」
아카시「그렇게 됐으니까 다음부터 적당한 대사 가져와, 알았지?」
미도리마「뭐가 그렇게 된 거냐! 그것보다 갑자기 명령?!」
아카시「아, 미팅 시간 다 됐다. 난 이만 갈게」
미도리마「이 타이밍에 물러나다니 더 무서운 것이다! 적당한 대사라니 뭐란 것이냐!」
아카시「다음에 찾아오면 연락해」 (가버림)
미도리마「큰일인 것이다…… 분명 다음에 만나면 뭔가 해올 게 뻔하단 것이다……」
미도리마「진짜…… 진짜로 무섭다…… 엠페러 아이를 쓰면 해버려야 할 텐데……」
미도리마「아……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 아니, 괜찮을 리 없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미도리마「대체 무슨 대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냐……」
49.
책갈피
“어머, 세이쨩. 그게 뭐야? 귀엽다.”
미부치 레오의 목소리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물론 미부치가 ‘귀엽다‘고 말한 것이 칙칙한 갈색 겉표지를 씌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추리소설일 리는 없었다. 미부치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로 눈을 옮긴 아카시는 새하얀 종이와 함께 코팅된 네잎 클로버를 눈에 담았다. 구멍을 통해 붉은 끈이 연결된 작은 책갈피는 딱 미부치의 취향에 맞는 물건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카시 세이쥬로 본인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는 말이다.
“책갈피 처음 봐?”
“어머, 얘도 참. 그럴 리 없잖니. 그냥 세이쨩이 들고 다니기엔 조금 귀엽다 싶어서?”
“아, 맞아, 맞아. 아카시가 갖고 다니는 책갈피는 왠지 금 도금이 된 고급 책갈피일 거 같은 이미지야.”
어느새 미부치의 뒤로 다가온 하야마의 말에 아카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야마는 제법 날카롭다. 확실히 예전에는 그런 걸 썼었으니까. 이걸 선물받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미부치도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그 물건에 대한 그의 감상 역시 ‘정말 안 어울린다‘ 라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지.
“내가 이런 걸 들고 다니면 이상해?”
“아, 아냐아냐! 그럴 리 있겠니!”
“중학생 때부터 가지고 다니던 거라서. 버려야 된다는 건 알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네.”
“에- 왜? 아카시 이미지에 안 어울리긴 해도, 굳이 버릴 필요는 없잖아?”
하야마가 또다시 직접적으로 던진 말에 미부치가 눈치를 주며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그런 뜻일까.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입안이 텁텁했다. 왠지 단 것이 먹고 싶다. 그래, 그가 늘 마시던 것- 노인네 같다고 모두가 비웃었지만 꿋꿋이 손에 들고 다니던 그 단팥죽처럼.
“코타로 말이 맞아. 네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하잖아? 굳이 버릴 이유는 없어.”
“글쎄…….”
행운의 상징이라니. 아카시는 코웃음을 쳤다. 그 반대다. 이것은 불운의 상징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생각나 버리니까. 늘 럭키 아이템을 입에 달고 살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에게도 사수자리 럭키 아이템이라며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주었던 어떤 소년의 모습이. 이제 더는 그때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행운의 상징이라면, 레오가 가질래?”
“어? 아, 아냐! 물론 세이쨩이 쓰던 물건을 갖는다는 건 굉장한 영광이지만, 갖고 싶어서 말을 건 건 아니니까!”
“그래? 그럼 나 줘!”
“시끄러워, 코타로! 분위기 좀 읽지 못하겠니!”
어느새 소란스러워진 부실의 모습을 보고 아카시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그래,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닐지도 모르지. 이 책도 아직 다 읽지 못했으니까. 아카시는 책 사이에 책갈피를 도로 꽂았다. 그 모습을 보며 미부치가 살짝 아쉬운 시선을 던졌다. 정말로 책갈피가 갖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처럼의 아카시의 호의를 무시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으리라.
“자, 쉬는 시간은 여기서 끝. 연습 시작하자.”
언젠가는 버릴 날이 오겠지. 나에 대한 그의 호의의 증거도, 그 호의에 가슴 설렜던 그 옛날의 추억까지도.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신타로.
오래된 책을 펼쳤다. 숙제를 시작하기 전에 다소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그 책이었을까. 미도리마 신타로는, 책 한가운데 꽂혀 있는 물건을 보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차라리 조금 이른 시간이라도 공부를 할 걸 그랬다. 후회하면서, 미도리마는 네잎 클로버로 만들어진 책갈피를 꺼냈다. 언제였던가, 이것을 만든 게. 이제는 날짜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먼 옛날, 아직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 제 자리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사수자리의 럭키 아이템이 네잎 클로버라는 말에 조깅을 핑계로 공원에 나가 필사적으로 네잎 클로버를 찾았었더랬다. 그런데 왠지 하나를 찾고 나서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아카시 세이쥬로와 같은 물건을 가지고 싶었다.
너는 이것을 아직 가지고 있을까.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너에 대한 미련처럼.
48.
(사랑의) 라이벌
“네가 아카시 세이쥬로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정말 용감한 짓이었다고, 타카오 카즈나리는 회상한다. 하지만 말을 걸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선배들과 함께 보러 갔던 인터하이 준결승 시합에서, 결코 코트에 나오지 않고 묵묵히 선수 대기석을 지키고 있던 그 뒷모습을 본 순간부터 계속해서 들었던 충동이었다. 어쩌면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 충동의 동기가 되는 존재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까. 어쨌든 타카오는 그를 불러세웠고, 그, 아카시 세이쥬로는 흔들림 하나 없는 표정으로 타카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 가득한 여유에 왠지 화가 나서, 타카오는 시종일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아카시에게 자신의 용건을 전했다.
“신쨩…… 미도리마 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미도리마, 라는 이름에 그의 양옆에 서 있던 라쿠잔 선수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 중 한 명은 미도리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타카오를 노려보았지만, 왠지 타카오는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보다는 아카시의 덤덤한 표정이 더 무서웠다. 분명 이 이름에 느낀 바가 있었을 텐데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오싹했던 것이다. 아카시는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는 표정으로 선수들에게 먼저 버스로 가 있으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다. 자연스레 복도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빠르게 이야기를 본론으로 이끌어 가는 아카시의 행동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나,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이야기를 끝내자. 둘, 무슨 이야기가 나오던간에 나와는 관계 없다. 과연 '기적의 세대'의 전 주장이다. 마주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박이라니. 타카오는 긴장으로 침을 삼키고, 아카시의 의도에 충실히 따라 본론을 입에 올렸다.
“너 말야, 중학교 때 신쨩…… 미도리마와 사귀는 사이였지?”
살짝 아카시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네가’ 하느냐, 하는 의문과 그에 대한 불쾌함이 두 눈 가득 어려 있었다. 하긴 나라도 그랬겠지. 타카오는 아카시의 기분을 이해했으나, 납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타카오 카즈나리는 이 소년을.
“지금도 좋아해?”
“……그런 걸 왜 묻지?”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안 해주는 거야?”
“초면에 던지는 질문치고는 상당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흐음…… 대답을 피하는 건가?”
그 도발적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얼굴이 '무시무시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일그러진 것은. 타카오가 말을 걸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얼굴에 타카오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것이 타카오가 아카시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여유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일까, 잠시 후 아카시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원래의 얼굴로 표정을 되돌렸지만, 여전히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아카시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카시에게 저 정도의 불쾌함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타카오는 다소 유쾌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피어오르는 공포에, 이제는 만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으려 애를 썼다.
“타카오 카즈나리.”
“어?”
“슈토쿠 고등학교의 포인트 가드에, 신타로의 지금의 파트너. 같은 반에, 농구부에서도 유일한 1학년 주전 두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신타로와는 입학식 이래로 늘 붙어 다니지. 신쨩이라는 귀여운 호칭은 지금 처음 들었지만, 신타로는 그걸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는 것 같고.”
“나에 대해서 잘 아네.”
“슈토쿠 같은 강호의 선수들에 대해 조사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
“정말 그것뿐이야?”
그 질문에 간신히 열렸다고 생각했던 아카시의 입이 다시 굳게 닫혔다. 아차, 이건 실수였을까. 타카오는 미소를 살짝 일그러뜨렸고, 그것을 신호로 아카시가 다시 타카오에게서 등을 돌렸다. 잠깐, 그냥 가려고?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 아카시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던 타카오는, 자신의 손을 향해 던져진 아카시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그런 존재가 신타로의 옆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꽤나 불쾌해.”
“…….”
“네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럼 난 이만.”
성큼성큼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아카시의 등을 보면서 타카오는 뻗었던 손을 겸연쩍게 아래로 내렸다. 뭐야. 원하던 답을 들은 것 같은데, 이렇게 가슴 속 가득한 패배감이라니. 타카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뭐야. 너 역시 아직도 신쨩을 좋아한다는 거잖아?
“쳇…… 아직도 양방향이냐고.”
하지만 그 생각을 아카시에게 전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면 타카오 카즈나리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47.
갑작스런 방문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왜? 오면 안 돼?”
아니아니아니, 어딜 봐도 오면 안 되는 장소지. 게다가 그런 복장으로. 그렇게 당연한 태클을 걸려고 했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목소리 앞에 한풀 꺾이고 말았다. 평소 기인으로 불리며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당황하게 만든 원인은 아카시 세이쥬로, 중학생 때부터 연인이었다가 최근 다시 재결합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상대였으나- 그 얼굴을 보는 장소가 슈토쿠 고등학교의 정문이 되면, 상대에 대한 사랑은 당황스러움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들의 주변을 지나가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저마다 아카시의 교복을 보고 입을 모아 수근대고 있었다. 저거 봐, 미도리마 신타로가 라쿠잔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사람과 함께 있어. 엣, 정말? 라쿠잔이라면 작년 윈터컵에서 우리 농구부의 결승 진출을 막은 곳 아니었나? 미도리마는 농구부 아니었어? 그런데 왜- 같은 대화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나올 것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물론 한 번의 패배를 가지고 남의 감정을 왈가왈부하는 행위는 미도리마가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심정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특히 농구부 부원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위험하다. 현 농구부 주장인 타카오 카즈나리의 말을 빌자면, 가뜩이나 신입부원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상대‘로 인식되고 있는 판국에 적이었던 학교의 사람- 그것도 그 학교 농구부 주장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카시가 그것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일단 이 자리를 떠야 한다……!’
마치 슛을 쏠 때처럼 필사적이 되어 미도리마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카시를 데리고 갈 장소를 찾아헤맸지만, 길 한복판에 있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교문 근처에 숨을 장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도 상당한 시간을 걸어야만 나온다. 아니, 그 카페도 슈토쿠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니 결코 안전하지 않다. 아카시가 여기 왜 왔는지는 둘째치고, 우선 자리를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기로 한 미도리마는 왜 자신을 환영해 주지 않느냐며 불만이 상당한 아카시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어이- 신쨩-!”
하필이면 그 직후 이 상황을 크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원만하게 수습해 주지는 않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날 게자리의 운세가 12위였기 때문일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타카오 카즈나리는 분명 손을 붕붕 흔들며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아카시가 인사를 하기 위해 미도리마의 그늘에서 슬쩍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자 미도리마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것이다, 타카오……! 이 벌충은 반드시 할 테니까!’
타카오에게는 들리지 않을 사과를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고서,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목을 홱 잡아당겨 뛰기 시작했다. 자, 잠깐, 하고 당황한 목소리가 아카시의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기다려‘ 라는 말에 따라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타카오의 눈에 아카시가 띠기라도 한다면, 아니, 아카시를 본 타카오가 장난으로라도 졸업한 선배들에게 보고라도 한다면, 미도리마는 분명 신입부원들 앞에서 거센 기합을 받아야만 하리라. 일단 제 몸의 안전을 걱정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하는 미도리마의 뒤를, 아카시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랐다. 물론 미도리마는 앞으로 달려가는 데 벅차 제게 손목을 잡힌 아카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전철역 근처 골목으로 아카시를 끌고 들어온 미도리마는 그제야 간신히 멈춰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무릎에 손을 얹고 헉헉대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그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 놔줘, 신타로.”
“어? 아, 아아,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제야 민망함을 깨달은 미도리마가 황급히 손을 놓자, 아카시는 손목이 아팠는지 조심스레 손목을 주물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것을 제일 싫어했었지. 자신의 무례함에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어진 것도 잠시, 미도리마는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 아카시의 질문이 뛰어드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황급히 도망쳐야 할 정도로 잘못된 거야? 내가 너희 학교를 찾아온 게?”
왠지 실망스러운 듯한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아차 싶었다. 그제야 찬찬히 뜯어본 아카시의 얼굴에는 평소의 아카시를 대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함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교토에서 도쿄까지 일부러 찾아왔을 정도니 메일이나 전화로는 해결할 수 없는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그 용건을 듣기도 전에 억지로 다른 곳으로 끌고 왔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깊은 후회와 함께 미도리마가 어떻게 아카시의 기분을 달래 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아카시의 얼굴에 드리워진 상심은 점점 더 깊어지기만 했다.
“여, 연락…… 정도는 하고 오지 그랬나.”
“신타로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어.”
“미, 미안하다는 것이다. 당황해서 그만…….”
“됐어. 이해하니까. 나하고 함께 있는 걸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하겠지, 신타로의 입장에선.”
“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나도 쭉 만나고 싶었단 말이다!”
엉겁결에 소리친 말에 아카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미도리마 역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카시의 표정은 그것보다 더했다. 하긴, 지금의 그들은 ‘만나고 싶다‘는 말이 ‘당연한‘ 사이가 아니었다. 분명 중학교 시절에는 연인이었지만, 한 번 헤어진 후로 그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은 미도리마도 아카시도 아직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아카시는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굴 가득하던 상심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고 그것은 미도리마에게 있어 무척이나 달가운 일이었다. 어쨌든 방금 전 자신의 말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안도하며 손수건을 꺼낸 미도리마는 우선 아카시의 얼굴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방울을 천천히 닦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손수건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그 행동에 미도리마는 적지않아 당황했지만,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가 길거리 한복판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기에 누군가 볼 위험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 뒤로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러한 심장 박동은 과연 미도리마만의 것이었을까.
“일이 있어서 도쿄에 왔는데, 신타로가 보고 싶어서..... 그래서 말도 없이 왔어. 미안해.”
“괘, 괜찮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러 와서 기뻐?”
“다, 당연하지.”
“그럼 꼭 안아 줘.”
아카시는 예전, 미도리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처럼 포옹을 요구했다. 제 등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깊게 묻는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주저하면서도 천천히 끌어안았다. 땀 냄새가 날 텐데, 하는 걱정은 잠시 뒤의 이야기였지만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지금은 이 순간이 너무도 기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지금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 마음은 이전까지와 변함이 없고, 너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고.
‘……아니, 아니야…….’
지금은 그저 아카시를 끌어안은 채 있고 싶었다. 미도리마는 말을 삼킨 채 아카시를 더 깊게 제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제 머리에 닿는 미도리마의 입술에 아카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누군가 이 침묵을 깨고, 1년을 넘게 감춰 온 고백을 다시 입에 올릴 때까지.
46.
동반자살
-내가 죽을 때는, 옆에 있어 줄래?
옥상 난간 너머로 보이는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했던 상대는, 도저히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약한 말에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면 병원 원장의 아들이니만큼 ‘죽는다’는 말이 거슬렸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말에 무척 화를 냈었다. 고작 중학교 2학년짜리가 죽는다는 말을 입에 쉽게 담지 말라고, 약한 소리를 하는 시한부 환자를 꾸짖는 의사처럼. 그것은 아카시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다만 미도리마는 ‘그러겠다’ 라고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시절의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그렇게 쉽게 죽음을 택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동시에, 무척 실망했다.
“……너라면 같이 죽어 주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지.”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언제나 헌신적이었다. 부주장으로서,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리고, -두 사람밖에 모르는 사실이기는 했지만-연인으로서.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인간 자체가 원체 속을 알기 힘든 상대였는데다, 아카시가 그러한 감정을 보여줄 때는 오직 미도리마와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미도리마 신타로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품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자신의 연인이 자신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체 몇 번을 구원받았는지. ‘너를 이기겠다‘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서는 ‘너를 죽이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 선언을 끊임없이 반복해도 도저히 그 존재를 증오할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을 아카시가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래도, 신타로. 내 숨통을 끊어 놓은 존재는 네가 아니었어.
약 20분 전, 라쿠잔 고등학교와 세이린 고등학교의 윈터컵 결승전이 끝났다. 그러나 승리자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간신히 손에 넣은 쿠로코 테츠야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의 어깨에 기대어 아카시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승리하는 것은 신진대사와 다름없다고 늘 주장해 온 아카시 세이쥬로가 인생 최초의 패배를 맞이한 순간을, 쿠로코는 그렇게 동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아카시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아카시는 태연하게 쿠로코의 그 눈빛을 버텨내었다. 네 앞은 아니야. 내가 목숨을 끊는다면, 네 앞은 절대로 아니야. 너 외의 다른 사람도 아니야. 내 단말마를 지켜볼 자격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있어. 내가 마음을 주고, 잃는 것을 처음으로 두렵다고 생각한 존재.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면.
아카시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회장 앞에 서 있는 버스 안에는 패배를 맞이한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원들이 비탄에 빠져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럴 자격은 더 이상 아카시 세이쥬로에겐 없었다. 패배의 순간, 입학한 이래로 그저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농구부원들에게 아카시는 처음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아카시가 과거 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이었다. 문득 아카시의 잔혹함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한 마유즈미 치히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통쾌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을 일회용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잔인한 주장을, 그런 사상에 동조했던 부원들을, 그리고 그런 짓을 했는데도 결국 맞이하고 만 패배를. 원체 시니컬하고 네거티브한 성격의 소유자이니 그럴 법도 했다. 만약 그의 입에서 비난의 말 한 마디라도 들었다면, 결심하기는 좀 더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인생 최초의 패배를 맞이했다. 승리라는 신진대사가 부정당했다. 더는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 하지만.
최후의 순간은 역시 너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는데.
아카시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난간 너머로 던졌다. 잠시 후 바닥에 떨어져 깨질 핸드폰 사진첩 안에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사진이 가득했다. 그렇게 먼저 그를 보내고, 그 뒤를 따르는 형태라면 이상적이겠지. 핸드폰이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신호로, 아카시는 제 몸을 그 위로 기울였다. 나머지는 중력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다. 이만큼 간단한 자살 방법은 없다. 손목을 긋거나 약을 먹는 것보다 확실하다. 조금 아프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잠시일 거야. 아카시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아카시!”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그 모든 충동이 부정당했다.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그의 손목을 강한 힘이 잡아당겼다. 중력을 부정하는 인력. 그런 것을 태연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카시는 경악한 채 자신을 쳐다보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추궁하고 들 듯한 눈빛. 그것을 마주하자, 꼴사납게도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난간 너머에서 위태롭게 휘청이는 아카시의 몸을 미도리마가 잽싸게 받아 안았다. 그 강한 팔힘에 이끌려 아카시는 천천히 난간 너머로 끌려나왔다. 난간을 넘어가는 건 그렇게 힘들었는데, 다시 되돌아오는 건 왜 이렇게 쉬운 걸까.
아, 그렇다.
네가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 것이냐!”
네가 그 두 눈으로 나를 보고, 그 강인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날 얼마나 놀라게 해야 성에 차는 거냐! 살다살다 너 같은 바보는 처음 본다!”
“신타로.”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지금 네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
“신타로…….”
천천히 몸이 기울어져, 미도리마의 어깨에 닿았다. 힘없이 제 품으로 쓰러진 아카시를 보고 미도리마는 당황해 허공에 손을 내저었지만, 곧 천천히 아카시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아카시. 낮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자신의 심장을 어떻게 뛰게 만드는지 아카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온기를 마주한 순간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신…… 타로…….”
역시 너와 함께가 아니면 안 돼. 지금의 나는 살아 있을 가치를 상실했고, 내 모든 것이 앞으로 산산조각날 정도로 부정당할 게 분명한데도, 너와 함께가 아니면 죽을 수가 없어. 이런 감정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내게서 등을 돌렸던 그 날 전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 심장은 그것을 부정하고 마는 걸까.
“내가 죽을 때…… 옆에 있어 줄래?”
왜 또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네게 하고 마는 걸까. 네 대답은 정해져 있을 텐데. 그 이전의 어느 날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화를 낼 것이 뻔한데. 나는 그 이상의 대답을 왜 너에게 또 바라고 마는 걸까.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나에게 너는, 대체.
제 유니폼이 아카시의 눈물로 촉촉히 젖어가는 것을 미도리마는 아마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심장 위에 떨어지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비참함을, 미도리마라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그래 주기를 바랐고,
“……지금이 아니라 몇십 년 후의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그래 주겠다는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바라던 대답을 들었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45.
장래를 약속한 사이
“연인이야.”
그렇게 대답했을 때 미부치 레오의 얼굴이 정말로 볼만했던 탓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차마 그 앞에 ‘이전의‘ 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방금 전 미부치는 핸드폰 화면을 보며 빙그레 미소짓는 아카시를 보며 대체 메일 상대가 누군데 그렇게 행복해하느냐는 질문을 약간 토라진 말투로 던졌고, 그에 대한 아카시의 대답을 듣고 난 직후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물론 미부치가 왜 그렇게 경악하는지 아카시는 알지 못했지만, 대충 예상하건데 자신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정말 옛날 이야기다. 핸드폰 화면을 차지한 안부 메일의 주인인 미도리마 신타로는 확실히 과거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이었지만, 그것도 그들의 길이 완전히 갈라지기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저 과거에 연인 사이였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세세세세세, 세이쨩, 그, 뭐냐, 연인이라니, 그거, 언제부터……?”
“응? 중학생 때부터. 고백받은 건 1학년 말이었지만 정작 사귀기 시작한 건 2학년 때였고.”
“그, 그렇게 오래.....?”
그러니까 다 옛날 이야기라니까. -라고, 생각은 했어도 정작 입에 올리지 못한 것은 그 말을 들은 뒤 미부치의 반응이 가히 상상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했으면서 지금은 사귀지 않는 사이라는 사실을 들으면, 미부치는 도쿄까지 찾아가 미도리마의 멱살을 잡고도 남을 위인이었다-물론 그 행동의 원인이 되는 감정에 대해서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아카시는 중요한 사실은 쏙 뺀 채, 그저 미부치의 반응을 즐기기 위한 결정타를 날렸다.
“결혼하자는 말도 들은 적 있어.”
“겨, 겨, 결호온?!”
아, 새하얗게 질렸다. 레오가 저럴 때마다 반응이 정말 재미있다니까. 쿡쿡 웃으며 아카시는 아, 이제 그만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미부치의 반응이 재미있다 한들 ‘연인’ 이야기는 10분 이상 즐기고 싶은 화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 아카시, 나, 나중에, 그러니까, 너와 내가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여,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는……!
어울리지 않게 잔뜩 긴장해서 쏟아내던 그 말이 기억 속에 맴도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고 보니, 신타로 쪽에서는 기억하고 있을까?’
뭐, 변덕이라고 쳐 두자.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시는 메일함을 열었다.
“푸핫!”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가 주물럭대던 타카오 카즈나리의 입에서 원인 모를 폭소가 터져나오자 미도리마 신타로는 적잖아 당황했다. 뭐지, 저 녀석이 보고 웃을 만한 내용은 내 핸드폰 안엔 없을 텐데. 아니면, 키세에게 ‘죽어‘ 라고 냉정하게 대답한 메일이라도 본 것일까? 타카오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핸드폰 화면에 뜬 것을 확인하던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폭소를 이끌어낸 메일의 내용과 그 발신자를 본 순간 제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발신자의 이름은 아카시 세이쥬로. 그리고 메일의 내용은-
“시, 신쨩, 너 정말…… 푸흡, 이런 거 말한 적 있어……?”
“우, 웃지 말라는 것이다! 난 그때 진지했어!”
“푸하핫! 그러니까 뭐야, 진짜 말했다는 거잖아? 으아아, 로맨티스트다! 동네 사람들! 여기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있어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아니, 너희 둘이 사귀던 사이인 건 전에 들어서 알지만…… 푸하핫, 으아, 이거 정말 개그다! 올해의 토픽상감이야!”
“에이잇, 당장 내놓으라는 것이다!”
“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면서 잔뜩 폼 잡은 답장이라도 보내려고?”
“타카오-!”
폭소를 멈추지 못하는 타카오의 손에서 억지로 핸드폰을 빼앗은 미도리마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메일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신타로, 나한테 ‘결혼하자‘ 고 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
‘이 녀석은 왜 갑자기 이런 얘길…….’
아카시가 무슨 생각으로 그 화제를 꺼냈던간에, 결코 미도리마를 놀려 보려는 의도 이상의 것은 품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듯 상기된 채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아카시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도리마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대체 뭐냐! 난 정말로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고! 진심이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젠장.’
자신의 이런 말이 미도리마를 얼마나 흔들어 놓는지 아카시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알고도 이런 짓을 했다면 최악이고. 혀를 차며 주머니에 핸드폰을 돌려놓는 미도리마를 보면서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바로 답장을 쓰지 않는 것이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있잖아, 아카시는 뭐라고 대답했어?”
“……그런 건 왜 묻는 거냐.”
“다음에 메일로 놀려보려고!”
‘이 녀석, 아카시의 메일 주소는 대체 언제 물어본 거야…….’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부정해봐야 소용없겠지. 아카시에게서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든, 타카오는 원하는 답을 반드시 들어낼 것이었다. 제 친구의 그러한 성정에 대해서 미도리마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아카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황해서 제 입을 틀어막고도 남았을 그 때의 대답을 타카오에게 가르쳐 주고 말았다.
“‘나라도 괜찮다면’.”
“푸핫! 그게 뭐야, 너희 둘 다 진짜 쩌는 로맨티스트다!”
“시- 끄- 럽- 다- 는- 것- 이- 다-!”
한 대 쥐어박으려고 달려들자 타카오는 재빨리 그 손을 피하고서 까르르 웃으며, 결혼식엔 나도 불러 줘! 하고 외치고는 역 쪽으로 달려갔다. 하필이면 저 녀석에게 들켜가지고는. 한동안은 저걸로 끊임없이 놀림당하겠군. 제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듯해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미도리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보다, 아카시는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물어본 것일까.
라쿠잔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을 모르는 미도리마는 잠시, 주머니 안의 핸드폰을 꺼내 아카시에게 답장을 할 지 말지를 망설였다. 어떤 답을 하던간에 놀림으로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답을 하느냐, 마느냐, 어느 쪽이냐. 잠시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늘 그의 구세주가 되어 주었던 오하아사의 그날 운세- ‘자신의 생각에 솔직해지는 것이 좋다’ 였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고 중얼거리고서는, 결국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서 꺼낸 것이었다.
44.
넥타이
갑자기 무언가 제 목을 둘렀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정말 빈말하지 않고 살해당하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무릎 위에 올라타 그런 짓을 한 아카시 세이쥬로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이성을 찾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을 때 아카시가 한 답변- “그냥.“ 과는 도저히 매치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냥, 이라니…… 그게 갑자기 남의 집을 찾아와서 무릎을 점령한 녀석의 대사냐.”
“아니, 정말 그냥 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신타로는 넥타이가 잘 어울리지만, 가쿠란엔 넥타이를 맬 수 없으니까. 어울리지도 않고.”
말 나온 김에 이것도 벗자. 라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어깨 밑으로 가쿠란 상의를 벗겨 내렸다.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 행동에도 미도리마가 반항다운 반항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아카시의 심중을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는 패배감에 있었다. 원래도 잘 알기 힘든 녀석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더 심해진 것 같다. 지끈지끈 골치가 아파오는 와중에도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목에 두른 그것- 라쿠잔 고등학교 교복에 딸려 있는 감색 넥타이를 이리저리 묶어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목을 콱 조르며 날 죽이려는 건……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한 것은 하필 어젯밤 우연찮게도 그런 내용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었지, 딱히 아카시를 의심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변명을 해봐야 아카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어쨌든 미도리마의 솔직한 기분은 그러했다.
“으음, 이거 꽤 어렵네. 내 목에 매는 건 쉬운데.”
“넥타이가 맨 모습이 보고 싶은 거라면 내가…….”
“아니야, 내가 해 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넥타이 끈을 이리 잡아당겼다 저리 잡아당기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아카시의 손이 잘못 힘을 주어 제 목을 조르는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설마, 아카시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완전히 아카시의 손에 몸을 내맡긴 지 5분쯤 지났을까. 아카시는 결국 미도리마의 목에 넥타이를 단단히 매는 것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이제 됐냐.”
“아니, 하나 더 해보고 싶은 게 있어.”
“또 뭐야.”
“오늘 넥타이는 이 색이면 되겠죠? 여. 보.”
순간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무슨 뜻인지 생각하느라 미도리마는 30초라는 아까운 시간을 허공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그 단어의 위력은 강했고, 잠시 후 그 뜻을 깨달은 미도리마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고 말았다.
“아, 아, 아카시, 너, 너……!”
“매일 아침 출근하는 신타로의 넥타이를 내가 골라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생긋 웃어보인 아카시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그저 아카시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 품에 얼굴을 기댄 채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는 것 외에는.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반응이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아카시에게, 미도리마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생활을 하려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응, 그렇겠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같이 살자는 소리냐, 그건…….”
“그런 프로포즈는 신타로 쪽에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그렇다. 이런 말까지 들어 놓고 입을 다물고 있다니, 남자가 할 일이 아니지-물론 아카시도 남자지만-. 미도리마는 천천히 아카시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에게 그가 바라는 말을 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매일 아침 이렇게, 내게 넥타이를 매 달라는 것이다.”
“그럼, 신타로에게 어울리는 넥타이를 잔뜩 사야겠는걸.”
“마음대로 해.”
세상에 아카시 세이쥬로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감정도, 각오도, 모두 아카시 세이쥬로의 예상대로이다. 그런데도 그 사실에 전혀 불쾌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인가.
미도리마는 혀를 차고 아카시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기분 탓일까. 턱밑에서 아카시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43.
오지 않는 답변
-돌아가기 전에 모두 회장 앞에 모여 줘. 얼굴을 보고 할 얘기가 있어.
윈터컵 개막식이 끝난 후, ‘기적의 세대‘ 전원에게 보내는 메일을 작성하고 송신 버튼을 누른 아카시 세이쥬로는 잠시 후 핸드폰으로 하나둘씩 들어오는 답변을 하나하나 챙겨보았다.
-무슨 일임까? 아카싯치의 호출이라니 별일이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주세요. 저 선배한테 또 걷어차임다.
이건 키세 료타.
-귀찮게. 알았다.
이건 아오미네 다이키.
-으응- 도착하면 마이우봉 사 줘-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예.
쿠로코 테츠야.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답이 없다.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상식대로라면 그 사람은 제일 먼저 답을 보내야 할 상대였다. 그럼에도 답이 없다는 것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 아직 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다. 둘. 메일은 확인했고, 갈 마음이 없어 답장을 하지 않았다. 셋. 메일은 보았고 갈 마음도 있지만 일부러 답장을 하지 않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세 번째일 것이다. 그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쓸데없는 데서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승부욕을 불태우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상대가 아카시 세이쥬로일 때의 이야기이므로 역시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일 먼저 답장을 보내는 ‘특별함‘ 쪽을 더 바란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테츠야까지 답을 줬는데 네가 답이 없을 줄이야.’
피식 웃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돌려놓은 아카시는 옆에 선 미부치가 뭔가 말을 걸고 싶어 우물쭈물해하는 것을 느꼈다. 미부치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아마 아카시의 기분이 정말 나쁘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일 터다. 그 말은 즉, 아카시의 얼굴이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일까.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그날부터, 더 이상 자신이 미도리마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카시는 이전의 자신이 미도리마에게 품었던 한때의 열정같은 감정을 거의 접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저 미도리마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했었던 순수한 감정은 이미 사라졌지만, 미도리마에게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싫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인가?
‘……어린애 같아.’
자신의 행동을 냉정하게 한 마디로 평가하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미도리마 신타로의 옆에 있는 것을 가장 편하게 여겼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앞에서만큼은 확실히 어린애였다. 동생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책임감 강한 그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여태껏 제 가정에서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어리광‘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존재였고 그러한 자신의 상황에 결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만큼은 거리낌이 없었다. 넉넉히 돈이 차 있는 지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도리마에게 음료수를 사 달라고 졸라 보거나, 집에 가야 한다는 그를 붙잡고 몇 시간이고 장기 대국의 상대로 삼거나, 미도리마가 당황해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무릎에 눕거나 어깨에 기대곤 했다. 그 모든 것을 태연하게 받아주었던 미도리마 신타로는 과연, 아카시 세이쥬로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친구’? ……왠지 기분 나쁜데.
‘동생’? ……그건 ‘친구’ 보다 기분 나쁘다.
‘연인’?
‘……그건, ……불쾌해.’
세간에서는 그런 것을 연인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그들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미도리마 또한 그러했다. 흔히 오가는 사랑의 말이나 은밀한 속삭임조차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반짝일 수 있었던 관계. 그것이 테이코 중학교 당시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더 이상 우정의 대상이 아니며, 하물며 ‘특별함’ 이나 ‘소중함’ 이라는 단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 여지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버린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본인이었음에도- 아카시는 그 순간,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윈터컵 회장 앞에서 다른 ‘기적의 세대‘들 사이에 섞여 가위를 찰캉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뒤, 아카시 세이쥬로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자신은 얼마나 어린애 같은가, 하고.
42.
자기혐오
“역시 따라왔구나, 신타로.”
화장실 안까지 자신을 쫓아온 미도리마 신타로를 보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기양양한 그 표정에 미도리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뿐 반문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카시를 쫓아온 것은 사실이므로. 그것도 화장실이라는 장소까지.
“괜찮겠어? 이런 데 있어도.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히 ‘동료’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아카시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아직도 아카시의 손에 묻어 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물에 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한 장면 한 장면 눈에 담아두며 미도리마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런 건 상관없다. 물론 예고했던 시간보다-약 15분 정도- 늦게 돌아가면 오오츠보의 무거운 꾸중과 미야지의 빈정거림 섞인 협박, 타카오의 비웃음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겠지만 그것을 희생해서라도 아카시와 단둘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없잖아.”
“‘이야기’?”
그게 아닐 텐데. 중얼거리며 아카시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채 씻어내지 못한 머리카락을 모두 제거했다. 얼룩덜룩한 얼룩이 남은 그 손수건이 갖고 싶다는 한심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미도리마가 손톱이 손을 찌르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을 때 아카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미도리마 쪽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
“네가 남의 행운 아이템으로 그런 짓을 하니까…….”
“아하. 불만을 말해주러 오셨다? 하지만 이상하네. 그런 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해도 됐잖아?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은데. 료타는 뭣도 모르고 맞장구를 쳐 줬을 테고, 다이키도 혀를 찼을 거고, 테츠야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그 자리에서 내 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은 아츠시 정도? 물론 귀찮아서 입을 다물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미도리마 신타로는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였을 텐데. 덧붙이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아직 물기가 남은 손가락이 노골적인 감정을 담고 미도리마의 가슴 위를 어루만졌다.
“솔직해지자, 신타로. 네 용건은 그게 아니지?”
아니다.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화장실까지 따라들어올 필요가 없잖아.”
그것은 네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네 말대로…… 기껏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장소인데.”
나는- 너에게 해야 할 말이-
“그래서, 신타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뭘까?”
그 모든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카시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살짝 핥은 순간부터였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펴지면서 아카시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거칠게 부딪힌 입술을 아카시는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이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미래를 읽는 그의 눈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제 체중을 완전히 미도리마의 목에 싣고서 아카시는 잔인하게도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거칠게 휘감겨 오는 입술도, 제 입 안을 훑고 돌아다니는 혀도,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충동도.
“응…….”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에는 왠지 비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미도리마가 애써 무시해 오던 어떤 한 사실을 자각시키는 것이어서, 미도리마는 다소 거칠게 아카시를 제게서 떼어냈다. 갑자기 입술이 떨어져 나간 데 아카시가 잠시 토라진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순수한‘ 불만과는 그 성질 자체가 달랐다. 이전의 표정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키스에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단지 자신의 생각보다 빨리 미도리마가 떨어졌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낀 것이리라.
어느 쪽이든 불쾌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아카시가 아니라, 아카시의 그 얼굴을 보고 아주 잠시라도 ‘아쉽다‘는 생각을 해 버린 자기 자신이.
“‘그 날’ 이후로 신타로는 왠지 재미 없어졌어. 적극적이다 싶으면 바로 거리를 두고, 그렇다고 아예 연을 끊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애매한 관계가 취향이야?”
“우리 사이를 애매하게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네 태도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신타로에게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 너는 나의 적이고, 나는 너의 적이고, 우리는 코트 위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지만- 동시에 난 널 좋아해. 신타로가 날 안아 주는 것과, 키스해 주는 것과, 나에게 휘둘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아.”
“……그걸 변명이라고 늘어놓고 있는 거냐?”
“아니, ‘진심’이지.”
그렇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늘 진심만을 보여준다. 좋아한다는 말도, 너를 적으로 여기겠다는 말도, 그 어느 쪽이든 진심이다. 그것을 알기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지금의 관계를 괴롭게 여기며,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은.
“……이만 가겠다는 것이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넌 때론 정말 단순하다니까.”
아카시가 또다시 비웃음을 흘렸다. 저 웃음을 싫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너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포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소망이 평생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주먹을 쥐고 말을 잇는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반드시 널 이겨 주겠다는 것이다.”
정말 싫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라도 너를 되찾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가.
41.
세라복
“……푸흡.”
“우, 웃지 말라는 것이다!”
그 웃음은 상당한 충격을 미도리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야 이런 복장을 하고 있으니 비웃음 정도는 각오했었고, 실제로 교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타카오를 포함한 수많은 급우들이 속된 말로 ‘빵 터졌’으므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는 알 수도 있었다. 졸업한 농구부 선배들이 찾아와서 한참 폭소를 터트리는 사건 뒤로는 제법 신경도 무뎌져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카시 세이쥬로의 존재는 계산 밖이었던 모양이다.
“아, 미안해…… 그런데 꽤 잘 어울리네, 그…… 세라복.”
그렇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지금 세라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이런 복장을 하게 된 것은 슈토쿠 고등학교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축제가 문제였다. 미도리마의 반에서는 카페를 열기로 했다. 카페, 좋지. 가장 무난하고 학원제에도 어울리는 방안이다. 다만 문제는 종업원들의 복장이었다. 메이드와 집사 복장에서 시작해 동물 복장 등등의 방안이 거론된 끝에, 발안자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운 방안이 채택되었다. 바로 학생들이 남녀 교복을 바꿔 입고 서빙을 한다는 제안이었다. 하필이면 미도리마는 그 안건이 한참 논의되고 있었을 때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교실로 돌아와서 자신이 여학생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실에 남아 필사적으로 반대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그 우스꽝스러운 ‘유니폼’은 결정 사항이었다. 급우들이 열심히 고민한 결과 결정된 사항이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자. 반항을 포기하고 미도리마는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여학생의 교복을 빌려 입었다. 하지만 아카시에게 이런 꼴을 보일 거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급우들의 고민이고 뭐고 당장 옷을 벗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칭찬해 봐야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쁘지도 않아.”
“그래? 그럼 마음껏 웃어도 돼?”
“제발 그만둬 주길 바란다.”
“뭐야, 재미없게.”
“그것보다 너,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아, 카즈나리가 메일로 가르쳐 줬어. ‘슈토쿠 고등학교 학원제에서 재미있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라기에.”
“타카오, 역시 너였냐!”
불같이 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분노를 받아야 할 장본인은 잽싸게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 주문을 받는 중이었다. 분하게도 저 쪽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린다. 들뜬 여학생들이 옅게 화장까지 해 줬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아마 이 카페가 학원제에서 상을 받는다면 그 일등공신은 타카오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도리마가 타카오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연습 때 두고 보자. 이를 갈며 타카오의 등을 노려보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뚫어질 듯한 그 시선이 신경쓰이지 않을 리 없어서, 미도리마는 결국 아카시에게 돌아서서 종업원-웨이트리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미도리마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서하질 못했다-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손님. 주문은?”
“신타로를 테이크아웃하고 싶은데요.”
“저희 메뉴엔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건 여전하네. 쉬는 시간이 언제냐고 물어본 거잖아.”
“……5분 뒤엔 교대시간인 것이다.”
“그래? 그럼 5분 일찍 교대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카시는 막무가내로 미도리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설마 이대로 데리고 나갈 생각인가? 당황했지만 카페 안에는 아카시를 말려 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이 말린다고 해서 말을 들을 아카시도 아니었을뿐더러, 애시당초 라쿠잔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서 이 교실에 나타난 것 자체가 만인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결국 아카시의 팔에 이끌려 교실 밖으로 끌려나온 미도리마는-뒤에서 타카오가 “1시간 뒤에는 돌아와야 해!” 하며 무척 즐거운 듯 외쳤다-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떠나질 않는 아카시의 얼굴로 눈을 흘겼다. 이 녀석의 웃는 얼굴이 이렇게 미워지기는 난생 처음일 것이다.
“자, 그럼 데이트하자, 신타로.”
“이 꼴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뭐 어때. 이 복장이면 팔짱을 끼고 다녀도 자연스럽잖아?”
“자연스럽기는 뭐가 자연스럽다는 거냐! 어딜 봐도 남자 두 사람이잖아!”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난 신경 쓴다는 것이다!”
제발 사람의 기분을 좀 읽어라! -고, 불같이 화를 내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아카시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쉬었다. 평범한 복장이었다면 왠지 들뜬 아카시를 보면서 기분 좋을 법도 했건만, 모든 것이 비뚤어져 보이는 지금엔 할 말이 한 마디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네가 이런 걸 입어야 할 줄 알아라…….”
“흐응. 그거 기대되는걸.”
좋다. 그런 말을 한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다.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제 팔을 잡아끄는 아카시를 험악하게 노려본 것이었다.
40.
강박관념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것은 쉽다. 공을 단단히 붙잡고 서서, 골대와 내가 서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재빨리 재고, 그 원 안으로 공이 빨려들어가는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전신에 힘을 담아 공을 손에서 떠나보내면 그만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정확히 골대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요령이 생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신쨩- 이제 그만하고 가자. 자율연습도 좋지만, 벌써 두 시간 째야.”
뒤에서 들린 타카오 카즈나리의 이유 있는 불만에 미도리마는 바구니에서 또 새 공을 꺼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연습복을 갈아입은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가방이 놓인 곳에 앉아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라고 했는데. 땀을 닦기 위해 안경을 벗는데 문득 타카오가 앉아 있는 자리에 지금 여기 있을 수 없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한 번 보면 누구나 뇌리에 선명히 남을 색을 가진 소년.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빨강 그 자체인 존재. 땀을 닦아내고 안경을 다시 쓰자 그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미도리마는 텅 빈 그 장소에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 먼저 돌아가라는 것이다.”
“리어카는 어떡하고?”
“적당히 굴려 둬라. 돌아갈 땐 러닝할 거니까.”
“신쨩, 중요한 시합 전날인데 그렇게 몸 혹사하다간 쓰러진다?”
“걱정하지 않아도 내 페이스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고집스레 다시 골대로 시선을 돌린 미도리마의 모습에 타카오가 혀를 차고 일어섰다. 적당히 하고 집에 가! 하고 외치며 타카오가 체육관을 나가버리자 정말 미도리마 혼자만이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미도리마와 함께 그 존재의 잔상도 함께 남았다. 체육관에 혼자 남을 때마다 늘 들려오는 목소리. 모든 것에 승리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안고, 미도리마가 진인사대천명에 그러하듯 자신의 승리를 자신의 인생과도 같이 생각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한 목소리.
-그렇게 나한테 이기고 싶어?
“……당연하다는 것이다.”
-넌 정말 지치지도 않아.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런 것을 네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지쳤다. 난 널 이길 것이고, 네게 패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도 않아?
아, 이 질문은 ‘그’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다. 어느 날 타카오가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모든 것에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신쨩. 조금은 어깨의 힘을 뺄 필요도 있지 않을까? 타카오는 미도리마에 대한 걱정으로 그 말을 했겠지만, 미도리마에게 있어서는 그저 우스운 소리였다. 어깨의 힘을 빼라고? 무슨 소리. 그러고 있다간 슛을 성공시킬 수 없다. 나는 인사를 다했다, 그러니 내 슛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아. 나뭇잎은 녹색이고 우체통이 붉은 색인 것만큼 당연한 진리다.
-하지만, 신타로. 나뭇잎은 시들면 갈색이 되고, 우체통도 다른 색으로 칠하면 빨갛지 않아.
“예를 든 것뿐이다.”
-나뭇잎이 녹색인 것은 엽록소 때문이고, 우체통을 빨간 색으로 칠하는 건 그게 눈에 띄기 때문이지.
“궤변을 늘어놓지 마라. 어떤 이유에서든, 나뭇잎이 녹색인 것과 우체통이 빨간 색인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럼, 너와 내가 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 질문에 막 공을 잡고 점프하던 미도리마는 슛을 쏘지 않은 채 그대로 착지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는 두 사람의 환상이 보이고 있었다. 시선을 끄는 붉은 머리카락. 단정하고 깔끔한 이목구비.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두 눈의 색이었다. 한 명의 눈은 양쪽 다 피 같은 붉은색. 다른 한 쪽의 눈은-
“……아카시.”
-응, 미도리마.
-왜, 신타로?
“나는 너를 이겨야만 한다. 그것이 내 목표야. 하지만 지금 너는, 너희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내 삶의 이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어.”
-하지만, 미도리마.
-그러는 신타로, 너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삶의 이유를 빼앗는 행동이 아닌 거야?
농구공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미도리마는 제 손에 힘이 빠져 공을 놓쳐버린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자신을 현혹시키는 저 환영을 향해 공을 던져버렸을 것이고, 골대로 들어가듯 정확하게 움직인 공은 아무도 없는 체육관 벽을 세게 쳤을 것이다. 분노를 실었다면 벽에 구멍을 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 아카시. 인정하지. 나는 너의 인생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승리하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삼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너의 모든 것을 박살내려 하고 있어. 내가 승리하고 네가 패배하는 그 순간 나는 목적을 이루고, 너는 목적을 잃겠지. 알고 있다.
-미도리마.
-신타로.
-나를 좋아해?
“……좋아한다.”
그러니까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평생, 손에 넣을 수 없게 돼.
미도리마는 등을 돌리고 다시 공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밖에 보이지 않는 환영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제 앞에 선 골대를 향해 힘껏 뛰어 손을 뻗었다. 길고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원 안으로 깨끗이 빨려 들어갔고, 슛을 성공했음을 알리는 공 튀는 소리가 미도리마 신타로의 뒤에 선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아카시.
아카시, 아카시, 아카시.
나는 이렇게라도 너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이 무릎이 힘에 부쳐 꺾이고 손가락이 갈라져 피가 나 더는 시도할 수 없을 거라 여겨져도,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러한 결심만이,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의 증거.
39.
잠자는 숲속의 공주
“나 왔다는 것이다.”
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흔히 이런 환자에게 꼭 한 명쯤은 붙어있어야 할, 또한 그의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간병인의 모습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얼마 전 자신이 가지고 온 꽃이 꽃병 안에서 말라 죽어 있는 광경은 그 쓸쓸함을 더해주었다. 꽃이 이렇게 되도록 물을 갈아 주는 사람 한 명 없었던 것이다. 미도리마는 꽃병의 물을 갈고 새로 사 온 꽃을 꽂았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와야 하나. 이 방 안의 풍경을 더욱 더 쓸쓸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마 너는, 달가워하지 않겠지.
그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난생 처음의 패배가 찾아온 순간을, 아카시 세이쥬로는 코트 위에 가만히 선 채 맞이하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서로 얼싸안는 세이린 고등학교의 농구부 멤버들을 코트 위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며,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결코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라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견해밖에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인간의 속내를 미도리마 신타로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승리라는 건 신진대사, 패배라는 건 결코 찾아와서는 안 되는 것.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런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아카시 세이쥬로를 제외한 사람들의 인생 역시 그러하지 않았다. 아마 미도리마 신타로는 평생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젠..... 적당히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카시.”
침대 위에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긴 겨울이 지나가고, 슈토쿠 고등학교에서 맞는 2년째의 봄이 찾아오도록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아카시가 겨울 방학을 맞이해 간 라쿠잔 고등학교의 합숙 도중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미도리마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해 들었다. 그마저도 타카오가 라쿠잔의 미부치와 연락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것은 비참하게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아카시 세이쥬로와 ‘가장 친했다‘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이럴 정도였으니, 아마 쿠로코 테츠야를 포함해 그의 과거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무도 이 소식을 모를 것이다.
‘가장 친했다’ 라. 웃기지도 않아.
최근 미도리마 신타로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과연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를 알고 지낸 지난 4년 동안 미도리마는 몇 번이고 아카시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진 고고함은 그와 친교를 맺으면서 천천히 부서졌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앞에서는 무척이나 잘 웃었고, 간혹 미도리마의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축복받기 그지없었을 그 인생이 사실은 무척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오직 미도리마만이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카시가 자신에게 그러하듯 아카시에게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으리라 믿었다니, 자신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바보다. 이 상황이 가장 큰 증거이지 않은가. 이렇게 되기까지 혼자 고뇌하고, 수많은 비난의 시선과 말을 혼자 감당하고, 결국 힘에 부쳐 쓰러져 버린 아카시 세이쥬로를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끝까지, 적어도 네 눈을 뜨게 만드는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생각하는 나의 한심함이란.
“최근 난 여러 논문을 찾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 하지만…… 너를 깨울 만한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심한 얘기지. 의사를 지망하는 주제에, 정작 눈앞에 있는 환자 한 명을 구할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다니. 정말, 네 앞에 있으면 인사를 다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의문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는 나에게 더욱 특별했다. 인사를 다하면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공부도, 다들 입을 모아 기적의 기술이라고 말하는 정확한 슛도, 모두 피나는 노력을 통해 얻어냈다. 그래도 너라는 절대성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부정당했고, 나는 그것을 승복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 옆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못하겠지. 평생을 너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로 내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끝에 내가 달한 대답이 무엇일 것 같나? 아카시.”
당연하게도, 아카시의 답은 없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아카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차갑기 그지없는, 딱딱하게 말라 버린 입술에 살짝 입맞추고 떨어졌다. 잠들어 있는 공주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왕자의 키스 뿐이라는, 요즘 어린아이들은 누구도 믿지 않을 수많은 동화들. 지금의 미도리마 신타로는 바보같이 그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답마저 부정당하는 순간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아카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너의 왕자가 아닌 것이다.
“……돌아와라, 아카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인사를 다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리지 말아 줘.”
미도리마는 잠든 아카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또 오겠다는 것이다. 쓸쓸한 병실 안에 그 말만을 남기고 미도리마는 문을 닫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잠자는 공주의 관. 그 관의 뚜껑을 여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공주가 영원히 일어날 수 없도록 그 뚜껑에 못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만 한다.
사랑한다.
그렇게 너를, 사랑하고 있다.
38.
심리테스트
“당신은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배는 고프고 발은 부르터서, 더는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순간 저 멀리 불빛이 보입니다. 필사적으로 따라가 본 그 불빛은 어떤 집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 집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게 뭐야? 코타로.”
“심리테스트!”
환하게 웃으며 하야마 코타로가 읽고 있던 잡지를 들어 보였다. 월간 농구 같은 잡지에 왜 심리테스트가 실려 있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삼킨 채 아카시 세이쥬로는 하야마에게 눈을 흘겼다. 잠시 후면 연습이 시작되는데 아직도 그런 걸 읽고 있느냐는 힐난이 담긴 눈빛이었지만, 둔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인지 하야마는 계속해서 심리테스트를 읽었다.
“1. 막 저녁을 먹으려던 평화로운 가족. 2. 무언가 수상한 약을 만들고 있는 마녀. 3.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한 남자. 4. 꽁꽁 묶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 5. 아무것도 없다. -아카시는 이 중에 뭘 고를래?”
“뭐냐, 그건. 1번을 제외하면 정말 삭막한 풍경인데.”
“끼어들지 마! 나 네부야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하야마는 투덜거렸지만, 그에게는 안 됐게도 아카시의 감상은 네부야의 감상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했다. 마치 1번부터 5번까지의 보기를 맞추기 위해 아무렇게나 넣은 선택지인 것처럼, 1번만이 유난히 튄다. 오히려 그 선택지를 택하라고 유도하는 것처럼. 게다가, 정말 심리테스트에 등장하는 ‘나‘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1번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아니지, 5번만 아니라면 뭐든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카시는 어떤데?”
“……너무 수상쩍어서 고르고 싶지 않아. 대체 그런 걸로 뭘 알 수 있다는 거야.”
“에이, 재미없게- 그럼 답을 공개합니다! 이 심리테스트는 자신이 타인에게 부러워하는 것을 상징하는 테스트래. 1번은 상대의 인간관계, 2번은 상대의 성실함, 3번은 상대의 집념, 4번은 상대의 분위기, 5번은 부러워하는 것이 없다는 뜻!”
정말 말도 안 되는 심리테스트다.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사람의 얼굴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아카시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얼굴이었다.
“어때? 재미있지?”
“그딴 한심한 소릴 계속 할 생각이라면 나가서 운동장이나 돌아.”
“으와! 아카시, 너무해! 난 연습 전에 부실 분위기를 좀 재밌게 만들어 보려고 한 건데-”
“……네 의도가 어땠던 간에 내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아졌다는 건 확실해, 코타로.”
“에엥-? 대체 왜 기분이 나빠진 건데?”
그건. 아카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정말로 왜일까. 그 의문은 하야마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왜 기분이 나빠졌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 왜 하필, ‘자신이 타인에게 부러워하는 것’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그의 얼굴을-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을 떠올려 버린 것일까. 난 아무것도 부럽지 않아. 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모든 것을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성실함도, 그 빌어먹을 좌우명에 집착하면서 온갖 우스꽝스러운 물건들을 들고 다니는 점도,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너의 분위기도, 무엇 하나 부럽지 않아. 저 심리테스트가 정말로 맞다면 나는 5번을 택했어야 해. 내가 너를 부러워한다고? 코미디잖아.
적어도 내가 너를 갖고 싶었던 이유에는, 그런 것이 없었어.
그래, 신타로. 네 옆자리를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단순히 과거의 일일 뿐이야. 나는 더 이상 네 품에서 안식을 찾고 싶지도 않고,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겁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너와 나는 끝났어. 그걸 끝낸 건 너였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 그것으로 끝이야.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카시.
-좋아해. 네가 좋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인사를 다해서-
“……그만해.”
다시는 그런 목소리로 날 흔들지 마.
나지막히 중얼거린 한 마디에 하야마가 응? 뭐라고? 라며 반문했지만, 아카시는 제 귀에도 똑똑히 들려온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것이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신의 심장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필사적인 반항이었다.
37.
두 번째 단추
“이거, 나 줘.”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 세이쥬로가 들어보인 것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연실색해 바로 제 교복을 내려다보았다. 위에서부터 두 번째 단추가 없다. 대체 저건 언제 떼 갔느냔 것이다. 불만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아카시는 여유 있게 웃었다. 품에 안긴 틈을 타 교복 단추를 잽싸게 떼어내는 것 정도는 자신에게 있어 무척 쉽다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 여유로운 얼굴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비단 아카시의 돌발행동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었다. 아카시가 품에 달려들고 나서 교복 단추를 떼어내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 아카시가 제 품에 다시 안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어쩔 줄 몰라하던 몇 분 전의 자신에 대한 분노도 분명히 섞여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지만 일단 물어나 보겠다는 것이다. 대체 그건 왜 갖고 싶다는 거냐?”
“어라, 신타로, 혹시 몰라? 두 번째 단추는…….”
“심장에 가장 가까이 달려 있는 단추가 어쩌니 하는 얘기 말이냐.”
“그래, 그거.”
대체 그게 언제적 미신이냐. 요즘 여학생들도 그런 건 안 믿는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기가 차서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도쿄에 찾아왔다는 메일을 보내 사람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질 않나, 무슨 용건이냐고 물어보니 할 말이 있다면서 불러내지를 않나, 갑자기 사람을 끌어안아서 당황하게 만들더니 단추를 떼어내질 않나. 정말 오늘의 아카시는 알 수 없는 행동만을 한다. 그것도 아주 태연한 얼굴로. 아카시 세이쥬로가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그것은 여태까지 저질러 온 돌발행동 중에서도 으뜸이다.
“네가 그런 데 관심을 가지다니…….”
“왜, 이상해?”
“당연하지. 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대체 뭐냐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핀잔에 아카시가 살짝 눈을 흘겨 왔다. 도리어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에 미도리마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아카시는 토라진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반은 맞다니?”
“너도 눈이 있다면 내가 ‘소녀’는 아니란 사실을 잘 알 텐데. 아니면, 스커트라도 입어 줄까?”
마지막 한 마디는 명백히 비웃음이 담겨 있는 말이었지만 미도리마는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카시는 그렇게 말했다. ‘틀렸다’는 ‘반’은 방금 아카시가 말했다시피 아카시 세이쥬로가 ‘소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나머지 반은? ‘맞았다’는 그 ‘반’은?
-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내 ‘할 말’이 뭔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이네.”
“아, 아카시, 너 지금……”
“난 말이지, 신타로. 오늘 화해하려고 왔어.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흘려버리자는 소리는 안 하겠지만, 그 불만을 받아주는 건 우선 관계를 회복한 뒤의 일이야. 기억하지? 너와 내가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지난 3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여태까지 미도리마 신타로를 미도리마 신타로로 있게 한 모든 원동력은 그 3년간의 추억에서 나왔다. 자신의 옆에서 웃는 아카시 세이쥬로. 자신과 마주앉아 장기를 두는 아카시 세이쥬로. 자신에게 부의 일을 상의하고, ‘네가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야’ 라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아카시 세이쥬로.
-좋아해, 미도리마.
그렇게 말하며 부끄러운 듯 미소짓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든 것.
“다시 시작하자, 신타로.”
“무, 슨…….”
“난 역시 네가 좋아. 네가 없으면 안 돼. 너는 어때?”
아카시의 질문에 미도리마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잠깐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진 시야에는 여전히 아카시 세이쥬로가 서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언제나 가슴 설레게 만들었던 부끄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미도리마는 천천히 아카시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자신의 교복에 닿아, 라쿠잔 고등학교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떼어가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굉장히 멋진 대답이네.”
아카시는 웃었다. 그의 교복 단추가 들어 있는 주먹 속에, 온 세상을 다 집어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6.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러브레터
“미안해, 신쨩.”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사과부터 하고 나선 타카오 카즈나리의 모습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의아해져 눈을 깜박였다. 눈앞의 타카오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타카오가 조심스레 내민 편지봉투를 보고 알았다. 한 번 열린 흔적이 있는 새하얀 봉투 위에, 익숙한 달필로 ‘미도리마 신타로 앞’ 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편지.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손에서 재빨리 봉투를 낚아챘다. 봉투 안에는 단 한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미도리마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의 글씨가 가득했다.
“실례인 줄은 알면서도 왠지 궁금해서 읽어버렸어. 그런데…….”
타카오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 이유를, 편지의 맨 마지막 줄을 보고 알았다. 발신인의 이름이 없다. 정확히는, 차마 적지 못한 듯 몇 번이고 끈질기게 눌러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론 발신인의 이름을 감추고자 한 데 효과는 없었다. 편지지를 가득 메운 글씨는, 미도리마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글씨였다. 그의 성격을 상징하듯 날카롭기 그지없는 달필.
“그거…… 신쨩 앞으로 온 러브레터지? 내가 먼저 읽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
러브레터. 정말 그 말대로다. 편지의 내용은, 빙빙 돌려 말하고는 있었어도 정말 명백히 미도리마 신타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글이었다. ‘좋아한다’는 그 노골적인 한 마디가 없을 뿐이었다. 그제야 미도리마는 이 편지가 끼워져 있었을, 타카오에게 빌려준 그 소설이, 1년 전 윈터컵 결승전 이후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별 선물’ 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태연하게 ‘작별 선물’ 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에,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화가 나, 한 번 펼쳐보지도 않은 채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대로 잊어버린 책이었던 것이다.
왜 몰랐을까.
한 번이라도 펼쳐 봤더라면.
“.....신쨩?! 가, 갑자기 왜 그래?! 차라리 화를 내!”
“내가 뭘.”
“갑자기 우니까 하는 말 아냐!”
타카오의 그 말에서야 미도리마는 제 눈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눈물을 깨달았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내 보았을 때는, 더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홍수가 터져나오듯 눈물이 흘러나왔다. 결국 미도리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편지지 가득 들어가 있는 글씨를 더는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신타로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그 문장을 천천히 읽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왜냐. 왜 이제 와서야 알게 된 거냐. 나는 이제 이 문장을 읽을 자격이 없고, 그 문장을 쓴 너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없는데. 후회는 오열이 되어 터져나왔고, 그런 미도리마를 타카오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미도리마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정문을 5분 남겨둔 거리에서 편지지가 젖어 문드러질 때까지 울음을 그치질 못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9일 째 되는 날이었다.
35.
일시 휴전
“소개하죠. 아카시 세이쥬로 군입니다. 우리 병원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해 주신 아카시 그룹 회장님의 아드님이죠. 오늘은 회장님 대신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도내에 새로 생긴 종합병원의 공동 원장이 된 것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렸다. 경사스런 자리이니 기왕이면 가족 전원이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아버지의 옆에서 미도리마는 왠지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축하할 만한 자리였지만, 그는 이제 곧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별다른 걸림돌 없이 승승장구 해 온 슈토쿠 고등학교가 윈터컵 출전 후 처음으로 만난 난적, 라쿠잔 고등학교와의 준결승전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 갈 시간이 있다면 연습을 더 하고 싶다. 그 시합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아버지 앞에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미도리마는 어색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그 학교의 수장이 서 있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아카시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미도리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과 거의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카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카시가 입고 있는 턱시도는 고등학생이 된 지 거의 1년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 어린애 티를 못 벗은 얼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반면 아카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미도리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어보더니, 즐거움을 감추려고 애를 쓰는 듯 슬쩍 웃었다. 그래, 어차피 난 노안인 것이다. 약간 토라진 기분으로 미도리마는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는 아카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도리마 선생님.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아버님께서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아카시는, 내게는 뭐라고 말할까. 이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이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라며 자기소개를 할까? 아니면-
“그리고- 우리는 새삼스레 인사를 할 것도 없겠지? 미도리마 군.”
“……그렇군. 바로 얼마 전에 만났으니까.”
누가 들어도 초면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당황한 것은 자연스레 아카시를 그들에게 소개한 아버지의 동업자가 되었다. 아는 사이였나요? 그런 질문에 아카시는 웃으면서 정해진 답을 말했다.
“중학교 동창이에요. 같은 농구부 출신이었죠.”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런 데서 신타로를 만날 줄이야. 놀랐어.”
“그건 내 대사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놀랐어. 아버지에게 파티 참가객 명단을 받기는 했지만 대충 훑어봤을 뿐이었고, 미도리마 선생님의 이름을 봤을 때도 설마 신타로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재회에 건배.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슬쩍 미도리마 쪽으로 기울였지만 미도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들고 있는 잔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굳이 건배까지 할 기분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금의 ‘재회’는 전혀 달갑지 않다. 적어도, 며칠 뒤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와의 재회에는. 그런 미도리마의 기분을 읽었는지 아카시는 겸연쩍게 손을 내리고 잔을 천천히 흔들며 샴페인이 요동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아카시도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봤어, 윈터컵 시합 영상. 승승장구하고 있던데.”
“올해 윈터하이에서 우승을 차지한 학교 주장에게 듣고 싶은 대사는 아니로군.”
“내가 나간 시합도 아니었는걸.”
그랬겠지. 아오미네 다이키가 없는 토오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전혀 위협이 아니었을 게다. ‘쉽게 이기면 재미가 없다’ 는, 토오 학원 사람들이 들었다면 갈갈이 날뛰고도 남았을 말을 아카시가 했다는 사실 정도는 미도리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토쿠 고등학교는 다르다. 그곳에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있고, 그는 결코 아카시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분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두지, 이런 자리에서 시합 이야기를 하는 건.”
“그래…… 확실히 어울리진 않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 질문에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지금의 아카시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과거,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 가장 친한 친구로서 머무는 것이 지극히 간단했을 시절, 그들은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공통분모인 취미에서부터, 그 나이대 남학생들 사이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클래식에 관한 토론, 농구부 연습과 부원들의 실력 향상에 대한 의논,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품게 만든 계기였던 가족 이야기까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 지금은-
-언젠가는 내가 네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미도리마는 그 선언 외에는 아카시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할 만한 이야기가 없군.”
“그렇구나.”
“그러니까 난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그건 안 돼.”
아카시의 손이 돌아서는 미도리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아카시의 얼굴을 보았을 때 미도리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미도리마의 의지를 자근자근 밟아 없앨 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아카시는 왠지 필사적으로 미도리마를 붙들고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았고, 때문에 처량하게 보였다.
그래, 언제였던가, 처음으로 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그 날처럼.
“신타로가 가면 난 또 재미없는 어른들의 상대를 해야 해. 아버지 대신 왔으니 그것도 내 책무지만, 조금은 쉬고 싶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여기 있어 줘.”
“침묵을 지키면서 말이냐.”
“저 사람들의 인사치레보다는 그게 더 편해.”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살며시 미도리마의 등에 고개를 기댔다. 아카시가 이렇게 가까이, 심장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것은 테이코 중학교 졸업식 이후 처음이었다.
“일시 휴전하자, 신타로. 여기서 너와 피곤하게 으르렁대고 싶지는 않아.”
“……그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적’이라고 규정한 건 분명히 너 자신이었다.
“할 말이 없다면,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테이코 시절로 돌아가는 건 어때? 그때처럼, 아무 상관없는 대화라도 좋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웃으면서 보내고 싶어.”
그 시간에 등을 돌린 것은 분명히 네 쪽이었다.
“신타로가 원한다면, 예전처럼 널 대해도 좋아.”
내 감정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분명히 너였다.
“응? 미도리마-”
그 호칭이 들린 순간 미도리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강한 힘으로 아카시의 손을 뿌리쳤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아카시의 손은 그 반동으로 흔들린 잔에서 흘러넘친 샴페인으로 젖어 있었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미도리마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얼굴에는 분명히 상처라는 것이 깃들어 있었고, 그 상처를 만든 것은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노골적인 혐오의 표정이었다.
“……알았어. 그게 너의 아킬레스건이구나.”
“……그걸 만든 건 바로 너라는 것이다.”
“내가 뿌린 씨는 스스로 거둬라, 이거야? 여전히 신타로는 잔인하구나.”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제 입에서 나온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카시는 그렇지 않은 듯, 처절하게 고개를 저어 미도리마의 생각을 부정했다.
“지금의 관계에 상처입은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신타로. 그건 자만이야.”
“가해자는 너다. 내가 아니야.”
“정말 그럴까?”
“무슨 의미냐.”
“나라고 내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호의적일 수만은 없다는 의미야.”
아카시 세이쥬로의 생명줄.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승리하는 존재라는 사실 그 자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카시가 그렇게까지 몰릴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의 목 끝에 날카롭게 벼린 창을 갖다 대고 있다. 언젠가는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나는 언제라도 너의 목숨을 끊을 수 있으며, 또 인사를 다해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의 도전은 너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나. 그 정도의 의미를, 내게 품어 준 것인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어.”
“역시 너는 잔인해.”
“너 또한 마찬가지다.”
혼자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느냐고? 그건 오히려 미도리마가 아카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확실한 피해자였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갑작스런 변화, 그로 인해 산산조각나 버린 우정- 혹은 그 이상의 감정. 미도리마가 입은 피해는 그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승리하며, 언제나 미도리마 신타로의 위를 달려가며, 너는 도저히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선언을 저주처럼 되풀이하는 것. 그것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있어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진인사를 완전히 부정하는 한 마디였다. 그러니 너와 나의 사이에 일시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로는, 자신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깨부수려 하는 상대이기에.
“……잘 가라, 아카시. 윈터컵 준결승전에서 만나지.”
“……잘 가, 신타로.”
쓰게 웃는 아카시를 완전히 등지고 미도리마는 가족들에게로 발을 옮겼다. 이것이 미도리마 신타로가 택한, 아카시 세이쥬로와의 확실한 거리. 나는 이곳에, 너는 저곳에. 우리는 이제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인사를 다하고, 네가 그것을 차갑게 뿌리치는 동안에는.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직도 품고 있는 감정의, 아주 작은 증거였다.
34.
골든 위크
BGM: 이루마 - kiss the rain
“정말 저희들은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고 하잖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푹 쉬고 싶어. 다들 돌아가.”
짜증 섞인 반응에도 집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귀찮아, 아카시 세이쥬로는 들고 있던 가방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책 정도밖에 없는 작은 가방에서 왠지 둔탁한 소리가 난 것이 신경 쓰였다. 집사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완고하게 자신의 퇴장을 바라고 있는 아카시의 모습에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골든 위크, 아카시 세이쥬로는 ‘별장’ 에 짐을 풀었다. 말이 ‘별장’ 이지, 지금 아카시가 있는 곳은 아카시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부지에 지은 토지 관리인의 집이었다. 평소 그가 쓰는 방의 절반 정도 크기인 거실에, 침대 하나를 놓으면 꽉 들어차는 작은방이 있는 집. 간만의 휴일을 맞이해 푹 쉬고 싶다는 아카시에게 집사는 카루이자와에 있는 진짜 별장을 추천했지만, 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들로 가득할 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의 출입이 없는 한적한 곳이면 충분하다. 그런 생각으로 아카시는 자신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 낡은 집에 발을 들였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밖으로 나오자 창문 너머로 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두세 명의 고용인이 떠나는 소리였다. 애초에 이 좁은 집에서 시중이라니. 그런 건 필요 없는데. 싸구려 찻주전자에 물을 올린 아카시는 찬장을 뒤져 두세 장의 홍차 티백을 발굴해냈다. 자신이 이걸 ‘넣어둔’ 건 언제였더라.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만은 확실한데, 움직인 흔적 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물이 끓는 동안 뭘 할지 생각하다가, 아카시는 문득 제 가방 안에서 들렸던 둔탁한 소리를 떠올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열었다. 두세 권의 문고본 아래에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가 하나 깔려 있었다. 소리의 정체는 이것이었던가. 가방을 열어 케이스를 꺼낸 아카시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클래식 음악 CD를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걸 아직도 버리지 않았단 말이야? 한심하다.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선물 따위.
-네가 좋아할 만한 곡으로 골라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잘 포장된 CD 케이스를 건넨 것은 분명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생일도, 기념일도 아닌 날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사왔다는 말을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는 그 당당한 태도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순수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설마 연인에게 주는 첫 선물이 클래식 CD라니, 정말로 미도리마답다고 생각했었지. 잠시 CD를 바라보며 아카시는 고민했다. 적어도 이걸 틀면 이 삭막한 집의 분위기는 다소 바뀔 것이다.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아카시는 지금의 자신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감정을 감당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데, 부엌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낡아빠진 주전자가 물이 다 끓었다며 시위하는 소리였다. 엉겁결에 밖으로 나가 불을 끄느라 CD를 그대로 들고 나오고 말았다. 별 수 없지. 그냥 틀어보기로 하자. 거실에는 과거 아카시가 가져다 둔 CD 플레이어가 있었다. 관리인은 그것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먼지가 옅게 쌓여 있었다. 청소를 좀 더 깨끗하게 하라고 지시해야겠는걸. 생각하다가, 아카시는 웃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오지 않을 장소인 것을.
재생한 CD에서는 피아노곡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제목이 뭐였더라. 왠지 구슬픈 음의 나열과는 정반대로 상당히 로맨틱한 제목이었던 것 같지만, 아카시에게는 그 곡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제목을 떠올리면 그 순간, 그 제목을 아카시에게 가르쳐준 사람의 목소리도 떠오르고 말 것이다.
-좋은 곡이지?
그렇게 물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 같은 것이.
“……역시 틀지 말 걸 그랬어.”
장소를 잘못 골랐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래, 더는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없게 된 교토의 제 방에서 이 CD를 발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무 미련 없이 아카시는 케이스를 쓰레기통 안에 던져넣을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CD는 충실한 고용인의 손으로 처리되었을 것이고, 다시는 아카시를 번뇌케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비단 이 CD만이 아니었다. 이 장소에 있는 모든 것이 아카시를 괴롭게 만들었다. 찬장 안에 그대로 들어 있던 몇 장의 홍차 티백도, 이 집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CD플레이어도. 그것을 이 집에 들여놓은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본인이었고, 그런 그의 옆에는 이런 장소를 도피처로 고른 아카시를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날부터 이 집은 토지 관리인의 집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단 한 곳뿐인 그들의 은신처.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의 ‘별장’.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어.”
후회와 함께 아카시는 이 빠진 찻잔에 티백을 담그고 물을 부었다. 천천히 차오르는 홍차의 수면은 무척 뜨거웠고, 아카시의 눈에도 비슷한 것을 고이게 만들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카시는 점점 진한 색으로 물드는 홍차를 바라보았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없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별장은 너무도 쓸쓸했다.
33.
음성메시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음성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신쨩, 핸드폰 좀 봐. 메일 왔나 봐.”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다 말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돌렸다. 라커 안에 단정하게 넣어 둔 가방. 그 안에서 붉은 색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멋대로 남의 라커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지당한 핀잔에 타카오는 헤헤헤, 하고 웃었을 뿐 별다른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저 녀석의 저런 태도에도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쉬는 것으로 타카오에 대한 불만을 모두 정리하고, 셔츠에 팔을 끼워 넣었다. 이 시간에 메일을 보낼 만한 사람이 있던가? 오늘도 연습은 제 시간에 끝났으니 어머니가 자신을 찾는 건 아닐 것이고, 그나마 미도리마에게 메일을 보내주는 사람은 바로 옆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그걸 제외하고 생각나는 건 키세 료타가 가끔 보내는 용건 없는 메일-“오늘 날씨가 좋네요! 미도리맛치는 연습 열심히 하고 있슴까? 윈터컵에서 뒤쳐지지 않게 조심해요!”-정도인데. 셔츠 단추를 한 손으로 잠그며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열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메시지가 1통 들어와 있다는 창이 떴다. 다만 미도리마나 타카오의 생각처럼, 문자로 된 메일은 아니었다. 음성 메시지. 전화번호를 보니 공중전화이다.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3통 들어와 있다. 왜 하필이면 연습하는 시간에. 대체 누구일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여동생의 얼굴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여동생에겐 아직 핸드폰이 없다. 때문에 여동생은 오빠에게 할 말이 있으면 꼭 공중전화로 전화하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 번 걸어서 받질 않으면 어머니나 아버지 쪽으로 연락을 할 텐데. 설마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해진 나머지 미도리마는 가쿠란 윗도리를 챙겨 들어 부실을 나왔다-아직 옷을 다 갈아입지 못한 타카오가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무시했다-. 수신함을 열어 메시지를 불러오기 전까지 미도리마의 머릿속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규 메시지가 1통 있습니다. 메시지를 재생합니다.”
안내원의 낭랑한 목소리 이후 이어진 것은, 의외로 침묵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빗소리를 들어 보면 분명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짧은 숨소리만 들릴 뿐 말이 없다. 일단 여동생은 아닌 것 같아, 미도리마는 끈기 있게 상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무언 메시지. 기분이 나빠 지워버릴 법도 했는데, 어째서였을까. 적어도 미도리마가 아무 말도 없는 것에 질려 메시지를 지워버렸다면, 그 뒤에 찾아온 착잡한 시간을 겪지는 않아도 됐을 것을.
잠시 후 상대가 입을 열었다.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익숙한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이미 상대가 수화기 너머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도리마는 반사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메시지가 끊겼다. 녹음 시간이 다 된 것뿐이겠지만, 미도리마에게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상대가 전화를 끊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신쨩, 집에 안 가? 나 기다린 건 아닐 테고…… 뭐 하고 있었어?”
이윽고 탈의실에서 나온 타카오가 미도리마의 어깨를 툭 쳤고, 그 반동에 핸드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는 미도리마의 핸드폰을 보고 당황한 타카오가 핸드폰을 주우러 몸을 숙이는 것을 미도리마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타카오가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미도리마의 눈에는 왜인지 슈토쿠 고등학교 체육관의 풍경이 아니라 비가 오는 거리의 공중전화 박스였다. 그 안에 서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미도리마 신타로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수화기를 붙든 채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미도리마가 기억하는 상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그 자존심 때문에, 먼저 입을 여는 것은 패배하는 것에 가깝다는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차마 입을 쉽게 열지 못하는 가녀리고 가녀린 모습.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미도리마는 어떤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 교토의 날씨는 ‘맑음’ 이었다.
이틀째 비가 내리는 도쿄와는 다르게.
“어?! 신쨩, 어디 가!? 핸드폰 가져가!”
타카오가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자신이 타카오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체육관을 뛰어나갔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거냐. 그는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일부러 도쿄까지 올라와 놓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걸 위인이 아니다. 비를 그대로 맞으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간 미도리마는 길을 따라 놓여 있는 공중전화 박스가 비어 있는 것을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메시지가 녹음된 지 30분 가까운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것일 텐데도, 미도리마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학교 앞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역까지 달려오는 내내 미도리마는 그의 모습을 찾아 헤맸고, 결국은 그 어디에서도 상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젠장…….”
-안녕, 신타로. 미안해, 갑자기 전화해서.
“어디야…….”
-나, 신타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어디에 있는 거냐…….”
-신타로, 나…….
“아카시-!”
귓가에 남아 있는 그 우울한 목소리의 주인을, 미도리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른다고 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날 리 없었다. 그 정도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머리를, 어깨를, 온 몸을 적시는 차가운 빗줄기 안에서 미도리마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메시지 녹음이 종료되었습니다. 낭랑한 안내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 번 더 걸까? 동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카시는 결국 동전을 다시 지갑 안에 돌려놓았다. 도쿄 역으로 향하는 전철은 바로 앞에서 탈 수 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교토로 돌아가는 신칸센을 탈 수 없게 된다. 아카시의 행동은 그러한 판단의 결과였지만, 정작 판단을 내려 놓고서도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텅 빈 전화박스 안에서 아카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스듬이 세워 두었던 우산이 그의 등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고, 몸으로 천천히 전해져 오는 냉기에 두 팔을 감싸안은 채 아카시는 차마 녹음하지 못한 마지막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 신타로.”
32.
언젠가는 깨게 되어 있는 꿈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의 자신은 무척 따뜻하고 포근한 곳에 몸을 묻고, 코 끝을 상냥하게 간지럽히는 청량한 체취를 마음껏 느끼고 있다. 그것을 더욱 원하게 되어 얼굴을 문지르면, 단단하고 강인한 팔이 어깨를 꼭 끌어안아 온다. 따스하게 몸을 덥혀 주던 체온은 점점 더 올라가고, 이윽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목을 세게 졸라 온다.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괴롭다. 머리에서 위험 신호를 보낸다. 괴롭다. 괴롭다. 이대로 있다가는 언젠가 숨이 막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 품에 안겨 있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뿌리칠 수 없다. 그를 뿌리치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또다른 괴로움이다. 차갑고, 한시라도 쉴 새 없이 자신을 압박하는 늪 같은 외로움에 빠져 죽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이 안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낫다. 아주 잠시라도 숨을 연명하기 위해 품에서 얼굴을 들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의 품에서 살아 있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을 때.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본다.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여는 과거의 아카시 세이쥬로.
-그건, 내 거야.
알고 있어.
-그는 내 사람이야.
알고 있으니까 그만 해.
-너는 그에게 사랑받을 수 없어.
제발.
머리맡에서 정신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눈을 떴다. 땀에 흠뻑 젖은 잠옷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이불을 옆으로 젖히고 일어나자 똑똑, 하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가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용인이 와 있는 것이다. 들어오라는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아카시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커튼을 걷었다. 방으로 들어온 집사는 아카시가 식사를 어디서 할지를 확인하고, 식당에서 먹겠다는 대답을 듣고서는 방을 나갔다. 텅 빈 방에 혼자가 되어, 아카시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며칠 전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다소 낯설게 이마에 달라붙어 왔다. 악몽이다. 아카시는 지난밤의 꿈을 한 마디로 평가했다.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꿈에서까지 그의 모습을 보다니.
“네 소중한 물건을 맘대로 사용해서, 네가 저주를 건 걸까?”
피식 웃으며, 아카시는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 하지만 그 안에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차마 버리지 못했던 과거의 편린이 숨어 있었다. 아카시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몇 권 빼내고, 책장 벽에 붙여 두었던 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그 사진에는 전국대회 우승컵을 품에 안은 자신과, 그 주변을 둘러싼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부원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사진. 그 사진 속에서 그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옆에 선 아카시 세이쥬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변하기 이전의 자신이다. 가장 친했던 친구도,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를 지속해왔던 존재도 아니게 된 지금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더 이상 저런 시선을 그에게 받을 수 없다. 얼마 전 오랜만에 재회한 그의 눈에 자신을 향한 적대감 외의 것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부터 아카시는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또한 납득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또 하나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런 꿈을 보여주는 것은 그 아슬아슬한 감정의 발로다. 굳이 심리학적 근거를 들어 해설할 것까지도 없는 명확한 답변이다.
“부탁해.”
그럼에도 아카시는 입을 열어, 사진 속의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애원했다.
“어차피 깨게 될 꿈이니까, 조금만 더 꾸게 해 줘.”
결전의 날은 사흘 뒤. 슈토쿠 고등학교와의 윈터컵 준결승전.
그 날 코트 위에서 자신과 마주하게 될 미도리마 신타로의 적의 가득한 눈을 상상하면서, 아카시는 책장에 책을 도로 돌려놓았다.
31.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리
아, 눈이 마주쳤다. 타카오 카즈나리는 씹다 만 고기를 황급히 목구멍으로 삼키고 말았다. 아직 제대로 씹지 않아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 삼키는 게 꽤나 고역이었지만, 차마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날 데리고 온 거야, 신쨩. 불만스런 시선을 제 옆자리에서 식사하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 쪽으로 돌렸지만 정작 장본인은 태연하게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봤던 불안해하는 모습은 어딜 갔나 싶을 정도의 덤덤함이다. 때려주고 싶은걸. 생각하면서, 타카오는 그날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할 말이 있다고 불러내기에 뭔가 싶어 나와 봤더니, 미도리마는 기차표를 내밀며 ‘교토로 같이 가 달라’고 했다. 내가 교토엔 왜 가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은 그 뒤에 미도리마가 머뭇거리며 식사를 대접할 테니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을 입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미도리마와 반 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말도 된다. 결국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내민 기차표를 받아들고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도착한 교토 역에서 밖으로 나와 보니 새하얀 외제차-그것이 그 유명한 롤스로이스라는 사실을 타카오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가 달고 온 ‘덤’을 보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 적의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와의 첫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 내부는 세 사람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타카오는 식당으로 오는 내내 숨이 막혀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달려 도착한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카시가 미리 예약해 둔 것 같은 자리로 안내받아, 아카시를 마주하고 미도리마와 나란히 앉을 때까지만 해도 타카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마디, ‘돌아가고 싶어’ 만이 맴돌고 있었다.
“슈토쿠에서는 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네. ……좋은 친구도 생긴 것 같고.”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계속 이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타카오에게 불만스런 시선을 던지던 아카시는 차 안에서 어색하게 이루어진 자기소개에서부터 시작해 식사가 계속되는 내내 타카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아카시에게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친구’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미도리마의 친구’ 라는 단어 앞에 ‘갑작스레 끼어든’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데이트를 할 거면 혼자 오란 말이야. 왜 날 데리고 와서 이 사단을 벌이냐구. 원망스레 미도리마를 흘겨보았지만 그런다고 미도리마의 경직된 태도나 아카시의 매서운 시선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왜 화장실에 간다는 최후의 보루를 레스토랑 들어오자마자 사용했을까.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이 무서운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어 잠시 도망을 쳤었는데, 지금은 그 선택이 미치도록 후회스럽다. 타카오가 이 자리에 있으니 아카시도 타카오를 화제에 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타카오로서는 그 상황을 도저히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구든지 좋으니까 제발 날 좀 구해 줘. 속으로 애원하던 타카오는 순간 아카시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것을 보고, 제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화다. 전화가 왔다. 구세주시다!
“아, 미안해, 나 잠깐 통화하고 올게.”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잠시 실례할게!”
내가 미쳤냐, 빨리 돌아오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스토랑 밖으로 달려나간 타카오는 잠시 후 전화를 건 장본인인 미야지 키요시가 연습을 빼먹고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느냐는 무시무시한 잔소리를 퍼붓는 것을, 마치 천사의 목소리를 들은 양 경건하게 들었다.
“……쓸데없는 걸 달고 왔네.”
그 말에 미도리마의 미간이 움찔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모욕당한 것이 지독히도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 미간에 아카시는 스테이크를 썰던 손을 멈추었다.
“내가 보내준 표는 한 장이었을 텐데.”
“타카오의 표는 내 돈으로 샀다는 것이다.”
“그렇겠지. 제 돈을 내고서라도 따라와야겠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으니.”
“그걸 알면 분위기를 조금 더 누그러뜨리는 게 어떠냐.”
“지금 내가 그럴 정신이 있어 보여?”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는 목소리에도 미도리마는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아카시의 분노에 불을 붙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은 아카시가 화를 내야 할 상황이다. 물론 이쪽에서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긴 하지만, 바로 당일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니 레스토랑 예약을 세 명으로 바꿔 달라는 예의없는 요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상식적인 일을 무척 싫어하는, 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서. 그것은 즉 그 정도로 이 자리가 그에게 부담이었다는 말도 되었다.
“무슨 속셈이야?”
“그건 내가 할 질문인 것이다.”
“왜 신타로의 기분이 더 나빠 보이는 걸까? 신타로는 지금 이 상황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해?”
“네 행동도 상식을 이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기차표를 보내 와서 ‘시간을 내라’고 명령한 건 누구였지?”
“그게 그렇게 불쾌했다면 넌 왜 여기까지 왔지?”
“네 명령을 거절했을 때의 뒷감당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몰상식한 행동으로 날 화나게 했을 때의 뒷감당은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먼저 몰상식한 행동을 한 건 너였다는 것이다.”
어째 한 마디를 지질 않는다. 물론 아카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런 성격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고 그랬기에 타카오 카즈나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묵인한 것이지만, 기분이 상한 것은 제 쪽이 더할 것이라는 판단은 할 수 있었다.
“불쾌하다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네 멋대로 사람을 불러낸다면 난 다시 타카오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어.”
“폐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끌고 올 거라는 소린가? 신타로답지 않은걸. 아니면, 저 애에게 그 정도로 마음을 허락하고 있는 거야?”
“…….”
“그런 거야?”
“……네가 왜 그것에 분노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그럴 만한 사이였던가? -라는, 미도리마의 숨겨진 저의를 아카시도 명백히 읽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상대 옆에 오래 머물러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아카시는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아카시가 먼저 짐을 챙기기도 전에 미도리마가 제 코트와 타카오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오후 연습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다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얼굴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변했네, 신타로. 굉장히 무례해졌어. 이제 체면 차리는 건 그만두기로 한 건가?”
“네가 내게 그런 소리를 할 계제가 되는지부터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내뱉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서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레스토랑 밖으로 걸어나가는 그 뒷모습을 잡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카시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세게 쥐는 것으로 분노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손톱이 아프게 손바닥을 찔렀다.
“……아파.”
너와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아프다구, 신타로…….”
어째서 나는, 그 흔한 위로조차도 네게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일까.
“미안하다는 것이다.”
미도리마의 입에서 처음 나온 사과에 타카오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미도리마를 돌아보았다. 신칸센 창 밖의 풍경에 모든 정신을 쏟고 있는 미도리마는 어딜 봐도 ‘미안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정도로 미안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왠지 내가 방해한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 주길 바라고 데려온 거니까.”
“……그런데 신쨩은 굉장히 괴로워 보여.”
타카오의 그 말에 미도리마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방해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카시와 단둘이 식사하는 시간? 아니면, 아카시를 앞에 두면 저도 모르게 나와버릴지 모르는 진심? 어느 쪽이든 타카오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미도리마에게는 중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뭐, 별 수 없지. 에이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도 파트너의 의무니까. 타카오는 의자를 뒤로 빼고 누웠다. 미야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것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쿵쿵 울렸던 것이다. 나, 도쿄까지 좀 잘게. 그런 타카오의 말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여전히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때문에 타카오는 마땅히 했어야 할 경고를 미도리마에게 전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담아두다가 언젠가 터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타카오는 레스토랑에 혼자 남아 있을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어떤 심정일까. 굴욕감, 비참함, 분노, 그리고 배신감- 이 중에서 아카시 세이쥬로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을 감정은 무엇일까? 하지만 답이 무엇이든간에 자신에게 화풀이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솔직하게 생각하면서, 타카오는 눈을 감았다. 도쿄로 돌아가면, 미야지 선배한테 엄청 깨지겠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사과할 말을 생각해 두자.
같이 있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 진심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서투른 에이스를 위해.
30.
그의 일과
6:30 기상, 시계를 바라보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듬
6:45 노크 소리에 다시 기상, 잠이 깼음을 메이드에게 알림
7:00 몸단장을 마친 뒤 아침식사, 아버지가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음
7:20 라쿠잔 고등학교의 교문 앞까지 차를 타고 등교
7:25 체육관 앞에서 미부치 레오와 조우
7:30 아침 훈련 시작
8:30 아침 훈련 종료
8:45 교실에 착석,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분위기를 즐김
9:00 수업 시작(1교시)
9:50 수업 종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0:00 수업 시작(2교시)
10:50 수업 종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이하 12:00까지 반복
12:05 자신을 데리러 온 미부치 레오와 하야마 코타로를 따라 식당으로 향함
12:15 네부야 에이스케의 산더미같은 식판을 보며 점심식사
12:35 점심식사 끝,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2:40 교실로 돌아와 독서를 시작, 핸드폰은 꺼내 보지 않음
13:00 수업 시작(5교시)
13:50 수업 종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4:00 수업 시작(6교시)
14:50 수업 종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2통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로부터의 메일-“아카칭, 교토에서 한정 마이우봉을 판다는데 그거 좀 사주면 안 돼?”-
집사로부터의 메일-“회장님은 오늘 저녁 8시경 방문하십니다.”-
일희일비한 자신이 우스워짐
15:10 홈룸 뒤 학생회실로 향함, 처리할 안건이 산더미인 것을 확인, 안도
16:00 학생회 일을 끝내고 체육관으로 이동, 기초체력연습 이후 훈련 시작
18:30 훈련 종료, 부원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부 일지를 작성
18:40 같이 돌아가자는 미부치 레오의 권유를 거절
18:50 문단속을 마치고 감독에게 훈련 결과를 보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를 확인하고 탑승,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9:15 귀가 후 목욕, 간단한 저녁식사
19:20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9:30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19:40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이하의 행동을 20:00까지 반복
20:00 아버지의 방문을 받음, 아버지와의 티타임, 아버지의 질문-“학교 생활은 순조롭겠지? 무슨 일이든 미스가 있어서는 안 된다.”-을 받음, 마치 업무 지시 같다고 생각하면서 대답-“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습니다. 학생회 업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20:15 아버지의 서재를 나옴,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1통
하야마 코타로로부터의 메일-“아카시, 나 집에 일이 있어서 내일 아침 연습 늦을 거 같아! 미리 보고했으니까 화내지 말기!”-
하야마를 운동장으로 내쫓을 것을 결심
20:30 방에서 독서,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21:30 독서 끝,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음을 확인
21:35 침대에 드러누워 다음날 훈련 플랜을 점검
21:40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21:45 학교에서 내 준 과제 수행, 수학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음
22:00 동경대 수험 문제집을 펼쳐 공부 시작
22:30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23:30 문제집의 마지막 장을 끝냄, 핸드폰을 열어 미부치 레오에게 메일-“내일 문제집을 사러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수 있겠어?”-
23:35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1통
미부치 레오로부터의 답장-“세이쨩이 같이 가 달라면 얼마든지! 내일 봐♡”-
23:40 취침 준비,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23:45 침대에 누워 메일함을 거슬러 올라가 봄
마지막으로 보낸 메일-“개막식이 끝나면 대회장 앞으로 오도록 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확인, 답장은 없음
23:50 잠을 청함
23:55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기 시작함
0:00 잠이 오지 않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0:05 잠이 오지 않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0:10 잠이 오지 않음,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이하 1:00까지 반복
1:00 지쳐서 잠이 듬
3:20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남, 핸드폰을 확인, 착신 메일 0통
점점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 생각함
3:30 다시 잠을 청함
너의 메일이 없는 나의 하루는, 언제나 불행.
29.
의지
“레오, 이거 말인데…….”
“응? 뭐 말야, 세이쨩?”
순간 옆에서 들려온 미부치 레오의 목소리에 아카시는 책장의 책을 가리키던 손을 멈칫했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동작이었다. 바보 같아. 자조하며, 아카시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자 미부치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카시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납득해 준 모양이었다. 다시 제가 읽을 참고서를 찾는 미부치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카시는 제 손이 차마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참고서를 원망하듯 노려보다가,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책을 꺼내 달라고 요청했다.
예전에는, 높은 선반에 있는 책을 꺼내는 것 따위는 손쉬운 일이었다. 애써 손을 뻗으려는 노력이나 지금처럼 직원을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원하는 책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다 보면 늘 그의 옆에 있었던 존재가 책을 꺼내 보여주며 찾던 게 이게 맞느냐고 물어보았으니까. 그러면 아카시는 생긋 웃으며 고맙다고만 말하면 되었다.
“뭐야, 저 책이 읽고 싶었던 거였어? 그럼 꺼내달라고 하지 그랬어.”
“괜찮아, 레오. 그런 건 직원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정말이지- 세이쨩은 우리한테 의지하는 법도 좀 배워야 해.”
자신에게 부탁을 하지 않은 것이 어지간히 서운했던지 미부치 레오가 노골적으로 눈을 흘겼다. 평소 아카시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가하는 미부치에게서는 보기 드문 시선이었다. 미안, 하고 짧게 웃고, 아카시는 직원이 꺼내 준 참고서를 펼쳤다. 사실은, 부탁할 생각이었다. 손이 닿지 않아서 그러는데, 저 책 좀 꺼내 줄래? 그랬다면 미부치는 무척 기쁜 표정으로 아카시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상대가 하야마 코타로가 아닌 만큼, 키가 작으면 여러모로 불편하구나- 같은 기분 상할 말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카시가 미부치에게 부탁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존재를 의지하는 법 같은 건.
과거의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굳이 남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걸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앞질러 해 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의인 것처럼 행동했다.
언제였던가. 니지무라의 빠른 은퇴로 예상보다 반 년 이르게 아카시가 주장이 되었을 때, 미도리마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부주장이 되어도 괜찮겠나? 아카시.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부주장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전까지는, 니지무라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차기 주장감이 될 만한 1학년을 골라 부주장으로 삼았을 것이었다. 그건 비단 아카시의 생각이었기보다는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전통 같은 것이었고 아카시는 자신 역시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모든 생각을 뒤집어 버렸다. 자신이 부주장이 되는 것이, 아카시의 곁에서 아카시를 돕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미도리마의 질문은 농구부의 전통을 거절하라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을 아카시에게 선사했다.
-응, 미도리마. 잘 부탁해.
미도리마라면 그런 룰을 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도리마에게는 자신과 대등한, 혹은 그에 제일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농구부 내의 실질적인 2인자였으며 지난 1년 간 아카시의 바로 옆에서 아카시를 지켜봐 온 사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의존해도 될 것 같았다. 그에게라면 무엇이든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가 옆에 있으면 자신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보완해 온 몇 가지 결점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아직 170cm도 되지 않았던 키도, 학생회 일까지 겸업하는 바람에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너무도 많았던 주장의 안건도, 매일매일 쓰는 것이 사실은 귀찮다고 생각했던 부 일지도, 그리고, 완벽한 듯 하지만 사실은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아마저도.
그러니 미도리마 신타로가 곁에 없는 지금은, 모든 것을 다시 저 혼자서만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괜찮아, 레오.”
난 너희들에게는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아.
“내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내가 품는 감정은,
“하지만 그게 서운했다면 미안해.”
‘달라’.
“어, 어머! 아니야, 세이쨩! 서운하기는 무슨! 난 그런 세이쨩이 정말 좋은걸! 그냥 내가 세이쨩의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너는…… 때때로 무척 버거워 보이니까.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라고 물어보았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의 대답은 그러했다. 그는 만인이 완벽하다고 인정하고 떠받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유일한 헛점을 유일하게 알아차려 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결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그러한 기색이 미도리마의 눈에 조금이라도 드러났더라면 아카시는 바로 미도리마에게, 네 도움은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을 것이었다. 미도리마의 동기는 좀 더 단순한 것이었다. 그저,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 있어 주고 싶다는, 아카시를 향한 호의에 훨씬 가까운 감정.
그리고 그것은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마워.”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하기야?”
“그래, 알았어.”
미부치를 들뜨게 만들 거짓말로 답하며, 아카시는 문득 궁금해졌다. 더 이상 내 옆에 있지 않은 너는, 그럼에도 아직 내 옆에 있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다시, 네게 의지하고 싶어질 날이 올까?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하는 걸까?
‘……한심한 생각이네.’
자신의 진심을 그 한 마디로 평가하며, 아카시는 계산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엇이든 좋았다. 다른 일을 하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우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떨쳐내고 싶었다.
의지할 대상이 더는 없는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
28.
솔직하지 못한 사람
“다시 한 번 물을게. 여기 온 이유가 뭐라고?”
“……대불을 보고 싶어서.”
그 말을 진짜라고 받아들일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카시 세이쥬로는 진지하게,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의 상식을 의심했다. 이런 변명으로 자신이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미도리마 신타로는 정말 바보 멍청이인 것이다. 아니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정도로 ‘구실’이 부족했거나.
‘……아니지, 둘 다인가?’
갑자기 라쿠잔 고등학교 교문에 모습을 드러낸 미도리마 신타로는,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고 말하는 듯한 아카시의 놀란 눈동자를 덤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카시와 함께 하교하고 있던 미부치가 금방이라도 미도리마를 잡아먹을 듯 ‘너 여긴 왜 왔어?’ 라고 아카시의 의사를 대변해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저 서로를 쭉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너 장난하니? 대불을 보고 싶으면 절로 가야지 왜 여길 와?”
“레오, 진정해.”
“하지만, 세이쨩!”
“난 진정하라고 했어.”
딱 잘라 자신의 간섭을 배제해 버리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미부치가 흠칫 놀랐다. 최근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아카시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소란이 마치 없었던 일인 양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미부치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카시는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도리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신타로. 왜 절로 바로 안 가고 여길 온 거야?”
“……절로 가는 길을 모르겠어.”
“그럼 택시를 타면 되잖아.”
“조용히 해, 레오. 그래서, 나보고 안내해 달라고?”
“네가…… 시간이 난다면 말이지만.”
정말 허술하다. 어쩜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을까. 차라리 아카시가 그렇게 하듯이 ‘시간을 내라’고 딱 잘라 말하면 될 것을. 아무래도 미도리마는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것 자체가 무척 무례한 행동이라는 생각밖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너는 이렇게 서툰 면이 있는 사람이었지. 난 그런 면이 무척 답답하다고 예전부터 쭉 생각해 왔었고.
“……알았어, 같이 가.”
“엣, 세이쨩, 따라갈 거야? 저 말도 안 되는 이유에?”
“그 이유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해, 레오. 됐으니까 먼저 돌아가.”
단호한 거절의 말에 미부치는 무척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미도리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풀 죽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하는 미부치를 보며 미안해진 것도 잠시, 미부치가 사라져 버린 교문 앞에 미도리마와 단둘이 남게 되자 매정하게도 미부치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연습은 어쩌고 온 거야?”
“오늘은 개교 기념일이라는 것이다. 부원들이 만장일치로 ‘가족들과 보내고 싶다’고 말해서.”
“……그런데 왜 신타로는 집에 있지 않았어?”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물론 미도리마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카시가 바라는 것이 ‘진짜’ 그의 답이라는 사실도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카시는 잠자코 미도리마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네가 보고 싶어져서.”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던 대답을 들은 순간, 스스로 놀랄 정도로 뿌듯한 기분이 되어 환하게 웃었다.
27.
그늘에 숨어서
-아, 동전이 모자라. 어쩌지.
-그럼 지폐를 넣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5천 엔짜리밖에 없어.
-너라는 녀석은 정말…… 학교에 그런 큰돈을 가지고 올 이유가 어디 있느냔 것이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쯧…… 뭐가 먹고 싶은 거냐. 이번 한 번만 내가 내 주지.
그런 대화가 생각나 버렸다.
자판기에서 튀어나온 밀크 티 캔을 꺼내다가 문득 아카시 세이쥬로가 멈춰서고 만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왜 갑자기 그런 것이 생각나 버렸을까. 동전 반환구에서 동전을 회수하며 아카시는 바보 같아, 하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아카시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을 것이 뻔했다. 어서 대기실로 돌아가자. 쓸데없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런 생각에 몸을 일으키던 아카시의 귀에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빨리! 늦게 돌아가면 선배들한테 또 깨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은 순간 아카시는 반사적으로 자판기 옆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왜 내가 여기로 도망쳐 들어왔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명의 발소리가 자판기 앞에 멈추었다. 자판기가 두세 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한 개밖에 없었다면 제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아카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으리라. 아카시가 몸을 숨긴 곳에서 자판기 한 개 분량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자판기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정체는,
“으앗, 나 동전 안 갖고 왔어!”
타카오 카즈나리와,
“지폐는 안 갖고 온 거냐?”
미도리마 신타로.
“이번 달은 용돈이 쪼들려서 지폐는 가방 안에 싹 다 모아뒀단 말이야. 근데 지갑에 10엔짜리밖에 없어.”
“나 참…….”
얄궂게도 방금 전 아카시가 떠올려낸 기억과 거의 비슷한-물론 대화의 주체가 다른 만큼 대화의 내용도 상당히 차이는 났지만서도-대화가 들려왔다. 아카시는 슬쩍 자판기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어, 동전지갑을 열어보며 울상을 짓는 타카오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미도리마를 두 눈에 담았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윈터컵 대회장이었다-그들을 마주칠 것 정도는 예상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런 타이밍에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20분쯤 뒤에는 저들을 코트 위에서 마주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 내가 숨고 만 건 그래서야. 그런 게 틀림없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졸렬한 변명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아카시는 그들의 대화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신쨩, 이번 한 번만 좀 사주라! 내가 다음에 배로 갚을게!”
“거절한다. 이 자판기엔 단팥죽이 없어.”
“치사해! 그럼 100엔만 빌려줘!”
“어쩔 수 없는 녀석이군. 탈의실로 돌아가면 바로 갚아라.”
“에엣? 조금만 기다려줘! 용돈도 많이 받으면서 쪼잔하게!”
“안 사 준다.”
“죄송합니다, 미도리마 님! 부디 100엔만 주시옵소서!”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정말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화다. 소란스러워진 자판기 앞 풍경은 너무도 낯설었다. 과거, 미도리마 신타로의 주변에 저런 식으로 소란스러운 행동을 할 만한 사람은 키세 료타 정도였다. 그나마도 키세가 미도리마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탓에 미도리마는, 그리고 그의 옆에 늘 함께 있던 아카시는 이러한 소란스러움을 엿볼 만한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당연한’ 풍경이 아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매일매일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이제 저 풍경인 것이다. 무슨 일이든 밝게 행동하는 새로운 파트너가 옆에서 소란을 떨고 그런 소란을 냉정하게, 그러면서도 자상하게 정리해 주는 미도리마가 있는 풍경.
그리고 그 풍경에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리는 없었다.
‘……기분 나빠.’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부채감에 아카시는 처음으로 굴욕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숨어서, 왜 저들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아카시는 그늘에서 뛰쳐나가 저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세게 쥔 주먹이 아팠다. 나는 대체 무엇에 굴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저기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에? 저들에게 말을 걸 구실도 기회도 없다는 사실에? 미도리마 신타로를 둘러싼 새로운 풍경에?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여전히 소란이 계속되고 있는 자판기 앞에서 아카시는 발을 떼었다. 미도리마와 타카오의 귀에는 아마 아카시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마시지도 않은 밀크티 캔을 복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라쿠잔 고등학교의 대기실로 향하면서 아카시는 필사적으로 잠시 후 있을 슈토쿠 고등학교와의 시합만을 생각했다. 이 분노는, 굴욕감은, 거기서 풀어버리면 된다. 여느 때처럼 승리를 거머쥐고, 네 앞에서 태연하게 웃어 보이겠어. 그래, 그래야만 해.
왜냐면 나는, 네가 옆에 없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카시는 알지 못했다.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26.
만약의 세계 ver. 슈토쿠
“아카시, 잠깐 이리 와 봐라.”
“왜?”
“됐으니까 여기 서 봐.”
인상을 찌푸린 미도리마 신타로는 걱정스럽다는 듯 아카시 세이쥬로의 허리를 슬쩍 만져 보았다. 겉보기에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만져보니 알겠다. 이 녀석, 말랐어. 중학생 때보다 훨씬. 너 조금 마른 것 아니냐, 하고 묻자 아카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카시가 이렇게 답답하게 여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미도리마가 대체 뭘 걱정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카시, 너 또……,”
“아앗-! 신쨩이 아카시를 성추행하고 있어!”
순간 귀를 찌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당황한 채 아카시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소리를 지른 장본인인 타카오 카즈나리는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광경을 목도했다는 표정으로 미도리마와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입으로 막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폭소를 애써 참으며, 타카오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저 너머에 있는 3학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오츠보 선배! 미야지 선배! 제가 지금 성추행범을 잡았어요!”
“어, 어이, 타카오!”
“112, 112 불러요! 여기 성추행 현행범이-”
“너, 그 입 당장 다물라는 것이다!”
버럭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타카오의 입을 틀어막을 듯 덤벼들려던 미도리마는, 어느새 체육관 너머에서 공을 든 채 자신을 험악하게 노려보는 미야지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저 공의 행선지는 100% 자신의 얼굴이다. 이 팀의 사람들은 안경을 쓴 사람 얼굴을 향해 공을 던지면 상해치사에 해당한다는 상식을 거의 잊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결국 미도리마는 타카오에게 화를 내는 것을 그만두고 아직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카시의 손목을 냉큼 잡아끌었다.
“가자는 것이다, 아카시!”
“어? 어디로?”
“됐으니까 도망쳐!”
“아니, 난 잘못한 게 없는…… 잠깐, 미도리마!”
당황한 아카시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미도리마는 그것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체육관 밖을 향해 뛰었다. 그 다음 순간 미야지가 분노를 드러내며 던진 공이 미도리마가 서 있던 자리를 직격했으니, 미도리마의 판단은 정말로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이끌려 나온 아카시는 당황스러움과, 미도리마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 것에 대한 불쾌함을 얼굴 양쪽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 표정은 미도리마가 체육관 밖의 그늘로 숨어들어 안도의 한숨을 쉴 때까지도 사라질 줄 몰랐다.
“연습 도중에 갑자기 나오면 기합 받아, 미도리마.”
“그대로 있었다간 기합 수준이 아니라 병원에 실려갔을 것이다!”
“너 때문에 나도 기합을 받게 생겼잖아. 타카오한테 변명을 부탁해야겠어.”
혀를 차는 아카시는 방금 전까지 미도리마가 자신을 추궁하고 있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을 끊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불만스레 제 손목을 어루만지는 것이 끝나기를 기다려, 방금 전 타카오의 난입으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 또 잠을 못 자고 있는 거냐?”
그 질문에 아카시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는 의문 가득한 표정에 기가 막혔다. 설마 이 내가 그것도 못 알아차릴 줄 알았던 건가. 굳이 미도리마가 아니라, 누구라도 아카시의 얼굴을 한 번 본다면 아카시가 지난밤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오늘 아침 연습에서 아카시의 얼굴을 마주한 타카오도 뭔가 말하려다 말았으니, 슈토쿠 농구부 부원들은 모두 아카시가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실은 어제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셨거든.”
그리고 그 말로 어젯밤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을 인정한 아카시는,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1년 전,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와의 1대1 농구 대결에서 5대 0이라는 굴욕적인 점수로 패한 뒤 아카시 세이쥬로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혔다. 그동안 아카시가 내세우고 있었던 주장으로서의 권리가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은 물론이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에게는 ‘네게 실망했다’ 라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인생에서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 아카시가 지금처럼 평범한 행동을 취하기까지는 미도리마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한동안은 미도리마를 포함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던 아카시를 떠올려 보면 끔찍하기만 하다. ‘살아 있는 시체‘. 아카시의 상태는 그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미도리마의 설득으로 슈토쿠 고등학교에 함께 진학해 농구부에서 뛰고 있는 지금도, 아카시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능력으로 따지면 타카오보다 더 뛰어난 포인트 가드일 그가 아직 단 한 번도 정식 시합에 나가지 못한 것 역시 그 트라우마의 연장선상이었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
“도저히 못 자겠다는 걸 12시 지나서 깨달았거든. 그 때면 미도리마는 이미 자고 있었을 거잖아.”
“바보냐. 네 넋두리를 몇 시간 들어 준다고 내 생체리듬이 상하는 건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다. 언제나 12시 전에는 숙면하는 것이 습관이 된 몸은 한 시간이라도 취침 시간이 어긋나면 분명 과부하를 보였을 것이다. 힘 빠진 태도로 미야지에게 혼나는 사람은 미도리마가 되었겠지. 하지만 차라리 그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도리마는 눈앞의 아카시가 그저 안쓰러웠다. 언제나 승리의 길을 걸어가며 늘 빛나는 사람이었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몰락. 그 몰락이 없었더라면 그가 자신의 품에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미도리마는 그 날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날, 무라사키바라에게 아카시가 이겼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결과를 상상하는 무의미한 짓을 미도리마는 벌써 1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카시 역시, 마찬가지일까.
“……오늘은 우리 집에 오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젠 외출 제한 같은 것도 없잖아.”
“하지만…….”
“집에는 내가 전화해 두겠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여동생도 널 보고 싶어해.”
“하지만 저번 주에도 갔는데…… 가족들에게 폐가 되잖아.”
“걱정 마라. 전혀 민폐가 아니니까.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가족들도 다 알고 있는데 뭘.”
미도리마는 풀이 죽은 아카시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너무도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애처로운 자신의 연인. 그를 평생 옆에서 지켜주겠다고
맹세하고, 그 맹세를 가족들에게 고백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이 1년 동안 미도리마는 점점 썩어가는 아카시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카시를 떠날 수는 없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세상에 붙들어 놓는 것은 오직 미도리마 신타로의 존재 하나뿐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오늘은 내가 재워주겠다는 것이다.”
“훗…… 정말로? 다른 의미로 못 자게 만들려는 건 아니고?”
“안심해라. 참을 테니까.”
“글쎄, 여태까지의 전적을 보면 확신할 수 없는데. 안 그래, 성추행범?”
“너까지 그러기냐!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잖아!”
“미안, 타카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참는다니까. 참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푹 자라.”
“……응.”
그래, 그거면 된다. 너 자신을 놓아버리고, 더는 헤어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지만 않으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네게 인사를 다할 테니.
“……악몽이군.”
눈을 뜬 다음날 아침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조하며 나이트캡을 벗어던졌다. 이 꿈이 자신에게 전하려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런 꿈을 꾸면서까지도, 자신은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날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에게 패배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한심함에 진저리를 치며 미도리마는 이불을 걷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가르쳐 주는 것은 자신이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남은 것은 인사를 다해 그에게 도전하는 일 뿐.
그러니까, 너를 평생 지켜주겠다는 말은 그 때 해도 된다.
각오를 다지고 마음을 새롭게 한 뒤 미도리마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힌 순간부터 적막만이 맴도는 그 방에는 어딜 봐도 아카시 세이쥬로의 존재는 없었다.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현실이었다.
25.
만약의 세계 ver. 라쿠잔
“신타로, 나 좀 숨겨 줘.”
갑자기 음악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에, 악보를 끄적이고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안색이 변했다. 또냐, 하는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면서도 미도리마는 슬쩍 물러나 피아노 밑에 아카시가 숨을 틈을 만들어 주었다. 그가 마지못해 보인 ‘호의‘에 충실히 응해 피아노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자마자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미부치 레오는, 벌써 두 번째의 방해를 받은 미도리마가 불만스런 시선을 보내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세이쨩 못 봤어?!”
“여긴 안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쪽지만 남기고 연락이 안 된단 말이야.”
또 연습을 빠진 건가, 하고 불만스레 미도리마가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부탁을 거절하고 미부치에게 아카시의 소재를 보고할 정도로 잔인한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곧 시선을 거둔 미도리마는 다시 미부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차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정도의 성실한 얼굴로 답했다.
“혹시 옥상 같은 덴 가보셨습니까? 자주 가던데요.”
“당연히 가 봤지! 교실에도, 도서관에도, 부실에도 없으니까 여기 온 거 아냐! 너만 세이쨩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 줄래?”
확실히 그래, 레오. 넌 너무 잘 알아서 탈이라니까. 아카시는 미부치에게는 들리지 않고 미도리마에게는 들릴 정도의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미도리마가 다시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성격에 맞지 않는 거짓말까지 했는데 아카시가 그걸 비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미도리마의 머릿속에 아카시를 그대로 넘겨버릴지 말지 하는 고민이 맴도는 것을 아카시는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넌 전자를 택하겠지.
“어쨌든 여기는 안 왔습니다. 이제 그만 나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집중하고 있었던지라.”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네. 너희들은 다 그러니?”
“그 ‘너희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세이쨩을 제외한 ‘기적의 세대’지. 뭐야, 대체. 저번에 인터하이에서 만난 아오미네인가 하는 녀석도 엄청 거만을 떨고! ‘나를 이길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라고 하다가 결국 세이쨩한테 졌……,”
“죄송하지만 제가 그렇게 불렸던 건 옛날입니다.”
미도리마가 연필을 세게 쥐는 것이 보였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금방이라도 연필을 부숴 버릴 듯 손에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미부치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민망한 듯 헛기침을 살짝 하고는 아카시의 소재를 알면 메일 보내라는 말과 함께 음악실 문을 닫았다. 겨우 피아노 밑에서 나올 수 있게 된 아카시는 가만히 미도리마의 옆에 서서, 굴욕 가득한 시선으로 악보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을 즐겁게 관찰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완전한 패배를 인정한 지 1년. 그는 아카시가 지시하는 대로 라쿠잔 고등학교로 따라와, 농구를 그만두고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언젠가는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피아노부에 들기는 했으나, 그 실력을 살려 콩쿨에 나가거나 프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지난 3년 간 쭉 열중해 왔던 것에서 손을 놓았으니, 다른 것이라도 해서 제 마음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곡은 어디까지 썼어?”
“……한참 집중하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으니, 완성까진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중간까지라도 좋으니까 들려줘.”
“거절한다. 아직 곡이라고 할 수도 없어.”
“어차피 나한테 주려고 쓰는 곡이잖아?”
“……그래도 안 돼.”
최근의 미도리마는 작곡에 빠져 있다. 아니, 작곡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그렇게 보이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바보 같기는. 아카시는 속으로 그런 미도리마를 비웃었다. 네 투쟁심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고 해서, 내가 어떤 죄책감이라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난 오히려 지금의 상태에 무척 만족하고 있는 걸.
“그래, 그럼 그 곡은 됐으니까, 아무거나 연주해 줘. 신타로의 피아노가 듣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연습이나 해라. 다음 시합에 지장이 생기면 어떡하려고.”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건 바로 네 쪽이야, 신타로. 지장이라니? 그런 건 내게 있을 수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아니다. 누구보다도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끝없는 투쟁심을 불태우다 그 불씨를 결국 꺼트리고 아카시에게 굴복하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그 대가로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손에 넣었다. 그 사실이 아카시는 뿌듯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 그 자체를 부정하려 하던 자를 꺾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옆에 있어 줄 최상의 연인을 얻었다. 윈윈 전략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야, 신타로. 내 옆에 있는 건 네가 가장 바라던 거잖아? 그렇게 비웃어도, 미도리마 신타로는 이제 어떤 불만도 말하지 않는다. 완전히 패배를 인정했으므로.
“다이키와의 시합도, 예상보다 재미없었어.”
“그건 그 녀석이 부상을 당한 주제에 무리해서 시합에 나왔기 때문인 것이다.”
“만전의 상태였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조금 재미는 있었겠지만.”
비꼬듯 던진 말을 수긍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 미도리마는 연필을 필통 안에 넣고 악보집을 꺼내 아카시에게 연주해 줄 곡을 고르는 데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굳게 입을 다문 그 얼굴에서 ‘이 주제로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랬기에, 아카시는 굳이 미도리마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을 계속해서 입에 올렸다.
“만약 신타로가 계속 농구를 하고 있었다면 좀 더 재미있었을지도.”
“……그만해라.”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남을 놀리는 건 네 나쁜 버릇인 것이다.”
레오의 말이 맞아, 신타로. 넌 건방져. 완벽히 꺾이고 나서도 변함없는 그 말투라니.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말을 멈추기 위해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먼저 연주해 달라고 해 놓고 무슨 짓이냐. 금방이라도 그렇게 따지고 들 것 같은 눈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자존심이 한껏 담겨 있었다. 안 되겠어, 신타로.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욕심이 많아서 말이지. 이미 내게 굴복한 너인데, 그것보다도 더 완전한 굴복을 원하게 돼. 내가 시키는 대로, 내 욕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너를 원해.
“연주는 됐으니까, 키스해 줘.”
“아카시, 너 정말……”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네. 단둘이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잖아?”
“…….”
“자, 알아들었으면 말해 봐. 날 뭐라고 불러야 한댔지?”
“……세이쥬로.”
불만 가득한, 그러나 동시에 체념 역시 엿보이는 목소리로 미도리마가 자신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 정직한 목소리에 아카시는 만족스레 웃음을 띠고 미도리마의 무릎 위에 제 몸을 앉혔다. 목에 팔을 감고 생긋 웃어 보이자 천천히 미도리마의 몸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도련님. 아직…… 니까?
그 순간, 갑작스런 불협화음이 아카시의 만족스러운 기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벌써…… 입니다. 도련님?
뭐야, 방해하지 마. 지금 딱 좋은 순간이었는데.
-슬슬…… 않으면…… 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조금만 더 하면 손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이야. 방해하지 마. 날 가만히 내버려 둬.
-도련님, 죄송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하지 마.
날,
깨우지 마-
“도련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제 어깨를 흔드는 손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눈을 떴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집사가 침대 머리맡에 서 있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가 평소 아카시의 기상 시간을 훨씬 넘겼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집사가 걱정스레 괜찮으냐고 물어 왔다. 괜찮냐니. 지금 기분이 괜찮은 걸로 보여? 당장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고, 아카시는 손을 내저어 그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악몽이야.”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한 마디를 던지고, 아카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말 끔찍한 꿈이다. 꿈 속에서까지 너의 완전한 굴복은 받아낼 수 없다니. 흘깃, 책상 위에 장식된 미도리마 신타로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아직도 책상에 장식해 두고 있다는 사실이 진저리나게 싫다. 대체 너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 두 눈일까? 성실하기 그지없는 진지한 얼굴 가득한, 나를 향한 적의? 그것에 이렇게 흔들린다는 걸까? 코웃음을 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사진이 든 액자를 눕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두 눈동자를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그래, 그건 어차피 찾아오게 될 미래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고, 이내 자신을 위한 충실한 패자로 전락하는 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악몽이 아니야.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어 보일 테니까.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치고 방을 나가려다, 아카시는 눕혀 놓았던 액자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신타로. 하지만, 나는 그 꿈 속의 네가, 조금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바보 같아.”
내가 진짜로 바라는 게 뭔지도 모르다니.
24.
그것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
미도리마 신타로는 남들의 몇 배는 위험한 존재라고, 타카오 카즈나리는 생각한다. 그 위험함의 원인은 분명 그의 고결한 성격이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것 하나에만 시선을 주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다니.
“예- 342개 째 성공.”
이제는 감탄하는 기색도 없는 타카오의 목소리에 미도리마가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정말 무섭게도, ‘고작 342개밖에 안 던졌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어려 있었다. 뭐가 고작 342개야. 평소의 세 배는 던지고 있잖아, 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타카오는 팔을 쓸어내렸다. 정식 연습 시간이 끝나 이미 체육관 내의 난방도 끊겼는데, 교복을 단단히 입고 목도리와 장갑까지 착용한 타카오와 달리 미도리마는 아직도 반팔의 연습복 차림이었다. 평소에는 엄청 추위 타는 주제에 연습할 때만 혼자 여름으로 가버린다니까. 저러다 감기 걸리면 다음 시합은 어쩌려고. 성격에도 맞지 않는 잔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고 타카오는 미도리마가 343개째의 공을 쥐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기, 신쨩. 벌써 여덟 시가 넘었거든? 정말 500개 채울 생각이야?”
“난 먼저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우리. 네가 그러고 있는데 혼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됐으니까 돌아가라는 것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만하고 가자는 소리 안 할 테니까, 얼른 500개나 채우세요.”
비꼬자고 한 말이었는데, 미도리마는 또 우직하게 타카오에게서 등을 돌려 공을 잡았다. 500개 정도가 아니라 1000개를 채우겠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물론 시간상 그건 무리겠지만. 타카오는 한숨을 쉬며 어머니에게 오늘은 늦게 들어간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저 녀석, 집에 연락은 했나? 아까 전부터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는데. 알려줘 봐야 듣지 않을 테니 입을 다물기로 한 거지만.
‘그래도 이해는 한단 말이지…… 분명 다음 시합 때문에 저러는 거야.’
윈터컵 준결승전. 상대는 라쿠잔 고등학교.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부원들은 매년 시합에서 우승을 차지해 왔고 올해 인터하이에도 어김없이 우승컵을 거머쥔 고교 농구 최강의 팀과 준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솔직히 타카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단 한 사람, 미도리마 신타로만이 라쿠잔 고등학교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라쿠잔 고등학교에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있다.
솔직히 타카오는 아카시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미도리마를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 시합에서도 아카시는 벤치에서 지시를 내릴 뿐, 실제로 경기에 임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시합 비디오를 아무리 봐도 포인트가드라는 특성 상 그가 눈에 띠는 활약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기적의 세대의 주장’, 그리고 ‘라쿠잔 고등학교의 1학년 주장’ 이라는 두 호칭만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요소였다. 그것을 미도리마는, 코트에 기적의 세대가 나오지 않아 제 실력을 발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것만으로도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얼마나 강한 상대로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한때 그의 도전자였던 타카오는 조금 꽁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순수하게, 그저 인정할 뿐이다.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집착을.
사실 미도리마가 저렇게 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단 아카시 세이쥬로에 한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타카오는 처음 미도리마의 ‘집착’을 접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뭐야, 그거. 엄청나게 멋있잖아?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집중력이 나오는 거야? 그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생활 패턴을 일정하게 맞추고, 우스꽝스러운 점괘에 매달리고,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물건을 잘도 찾아서 들고 다니고, 미친 듯이 공을 던져대고, 손톱 하나 지키겠다고 테이프로 손가락을 칭칭 감고 다니고. 말로 하면 쉬워 보이지,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잖아? 시간도 돈도 장난아니게 들잖아, 그거? 난 도저히 따라할 수 없어. 진짜 멋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서워서 따라하고 싶지 않다.
‘그 녀석이 그렇게 좋은가? 차라리 직접 고백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건 아닌가. 타카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고백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의 마음을 받아줄 리 없다는 확신을 안고 있기에. 그래서 저렇게 공을 던지고, 끝없이 그에게 도전하는 일 외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 안쓰럽지만, 역시나 타카오에게는 조금 무서웠다. 저 애정을 받아들이는 상대는, 과연 미도리마를 어떻게 생각할까.
‘부디 짝사랑만은 아니길 빈다, 신쨩.’
노력하는 것으로밖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남자에게, 역시 그건 너무 비참할 테니까.
23.
헛돔
방과후 시간을 꼬박 할애한 연습 끝에 저녁이 왔다. 농구부원들이 저마다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 슈토쿠 고교의 농구부 체육관에, 한 명의 낯선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토쿠 고교의 체육관을 어슬렁거린다고는 하지만 그는 슈토쿠 고교의 학생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슈토쿠 고교의 교복인 가쿠란이 아니라 어딜 봐도 다른 학교 교복인 블레이저. 그리고 그 낯선 모습이 막 귀가하던 1학년 매니저의 눈에 띤 것은 그가 슈토쿠 고교 체육관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지 5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저어, 누구신가요?”
팔짱을 낀 채 슈토쿠 고교의 체육관 정경을 둘러보고 있던 그 남학생은, 자신을 향한 그 질문에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미소는 다가가던 매니저를 완전히 굳어버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그러면서도 그녀의 손발이 굳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학생의 양쪽 눈동자 색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른쪽 눈은 그의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비슷했고, 다른 한 쪽 눈은 그보다 색이 좀 옅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그 미소와 눈동자에 얼이 빠진 매니저에게 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쪽, 매니저인가요?”
“그런데요.”
“그럼 미도리마 신타로를 불러 주시겠어요? 난…… 아카시 세이쥬로라고 하는데.”
철썩, 하고 골대 그물이 출렁였다. 슛을 성공시키고 손등으로 땀을 닦는 미도리마에게 매니저 한 명이 달려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타올을 받아든 미도리마는 바로 안경을 벗고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은 가히 한 장의 화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멋있었다. 잠시 정신을 빼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타카오 카즈나리는 선배가 날린 공에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타카오, 너 임마! 정신을 어디 빼놓고 있냐!”
“죄, 죄송합니닷!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타카오가 그러거나 말거나, 미도리마는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공을 잡았다. 저렇게 피나는 연습을 하는 모습도 사실 미도리마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으나, 그가 여태까지 쏜 공이 대략 천 개도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타카오로선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윈터컵이 시작되고 나서 미도리마는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공만 던졌으나, 며칠 전 블록 결승전, 즉 실상의 윈터컵 준결승전이 결정된 뒤에는 단 한 개라도 슛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안 될 것처럼 공을 던져대고 있었다. 물론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준결승전 상대는 라쿠잔 고교. 여름에 열린 인터하이에서 당당하게 우승컵을 차지한 강호교다. 게다가 올해, 라쿠잔 고교에는 미도리마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한 명 있었다.
‘‘기적의 세대’의 주장…….’
이름만 들어봤지 만나본 적 없는 그 상대에 대해서, 타카오는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포지션도 자신과 같은 포인트 가드인 것도 그렇지만, 성격이나 통솔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미도리마와 친해지고 나서 안 것이지만, 그는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매우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한 마디로 전부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일 정도로. 게다가 시합하면서 만나본 ‘기적의 세대‘ 란 것들은 하나같이 미도리마 뺨치게 성격이 이상했다.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던 게 세이린의 쿠로코 테츠야였지만 그 역시 뭔가 달관한 태도를 보이는 게 타카오와는 영 맞지 않는 상대였다. 미도리마와 이 정도로 친해진 것도 그의 노력하는 모습을 타카오 자신이 인정했기 때문이었지 그 성격에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넷이나 더 있는데 그걸 한 손으로 주물렀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인물인 거야― 하는 게 타카오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며칠 뒤에는 라쿠잔 고교 대책으로 그들의 시합 비디오를 전부 몰아보게 되어 있다. 거기서 어차피 보게 될 터였지만, 사실 만날 수만 있다면 빨리 얼굴을 맞대고 싶었다. 그것으로 긴장을 몰아내는 것이 타카오의 플레이 스타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1학년 매니저 한 명이 바깥에서 뛰어들어왔다. 왠지 얼굴이 창백해져 있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는 점이 더더욱. 게다가 매니저는 골 연습을 하고 있는 미도리마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가 연습을 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법이어서 절로 시선이 쏠렸다. 선배가 자리를 뜬 틈을 타 미도리마 쪽으로 달려간 타카오의 귀에 매니저의 들뜬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미도리마 군, 아카시 세이쥬로란 사람이 찾아왔는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미도리마의 변화는, 타카오마저도 놀라게 할 정도로 극심했다. 매니저가 다가와서 말을 걸든 말든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던 미도리마의 표정이, 그 말을 듣자마자 싸늘하게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던진 공은 골대에 맞고 크게 튕겨나갔다. 타카오가 놀란 사이 미도리마는 그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매니저를 지나쳐 달려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주변에서 연습하던 선배들이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타카오는 황급히 체육관을 뛰쳐나가는 미도리마의 뒤를 따랐다. 곧 타카오의 시야에, 누군가의 앞에 멈춰선 미도리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쨩!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뛰쳐나가서……,”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을 건 순간, 타카오는 갑자기 제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미도리마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그가 이야기하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미도리마의 어깨 정도 오는 키에 늘씬한 몸을 지닌,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그 얼굴은 타카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영상 중 하나의 것과 정확하게 매치되었다. 미도리마가 슈토쿠 고교 농구부에 들어온 뒤 봤던 옛날 잡지에 실린 ‘기적의 세대’ 특집. 그 맨 앞에 당당하게 실려 있던 남학생이었다.
‘저 녀석이…… ‘기적의 세대’의 주장…….’
그 기에 타카오가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도리마의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순간 싸늘하게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미소로 전환했기에 알아볼 수 없었지만, 자신이 미도리마를 부른 순간 상대의 눈은 분명히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왜?’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타카오를 미도리마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야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소년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신타로의 친구?”
“아, 같은 농구부에 있는 타카오 카즈나리다. 너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테지.”
“아아, 네가 슈토쿠의 포인트 가드인. 반가워. 나는 아카시 세이쥬로. 신타로의 중학교 동창이야.”
“바, 반갑…… 습니다.”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써 버린 것은, 미소를 짓고 있어도 아카시의 눈에서 적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타카오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어째서 저렇게 차갑게 느껴지는지, 타카오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핫, 경어 같은 거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아, 그럼 나도 말을 높일게요.”
“아, 아니, 딱히 그렇지는……!”
“인사치레는 됐고. 넌 대체 무슨 일이냐.”
“으응,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슈토쿠가 이 주변에 있단 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신타로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아카시의 눈은 타카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지금이야 밝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지만, 입 부분만 가리면 정확하게 사람을 노려보는 얼굴이 된다는 걸 타카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신쨩은 바보 멍청이 아냐? 저 표정이 안 보이나?’
상대는 라쿠잔의 에이스다. 결승전이 결정된 이 시점에 슈토쿠에 나타난다는 건 정찰을 위해서인 게 뻔하다. 미도리마를 만나러 왔다는 것도 사실은 핑계에 불과하지, 미도리마를 핑계 삼아서 슈토쿠의 연습을 훔쳐보겠다는 속셈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연습하다 말고 그렇게 뛰쳐나가다니, 미도리마답지 않았다.
‘……어?’
정말로, 미도리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신쨩이…… 연습을 팽개치고 사람을 만나러 나가다니?’
게다가 그 절박한 표정이나 지금의 이 행동은, 아무리 봐도 타카오의 머릿속에 있던 미도리마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슈토쿠의 에이스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가 아닌, 테이코 중학교에 있을 시절의 미도리마 신타로인 것만 같았다.
순간 머릿속에, ‘싫다’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까 매니저한테 물어봤더니 연습은 끝났다고 했는데 아직 연습복 차림이네.”
“아아, 한시간 전부터는 자율 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구나. 난 오랜만에 신타로랑 돌아가 볼까 해서 온 건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연습을 중단하고 같이 돌아가자고는 할 수 없겠지?”
뒷짐을 진 아카시가 몸을 살짝 내밀고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흔들림을 느꼈다. 저건 수락할 셈이다. 미도리마가 입을 열어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타카오는 미도리마를 막아서고 자기가 대신 얘기하고 있었다.
“아, 그건 안 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줄래?”
“타카오?”
“신쨩은 매일 나랑 같이 집에 가거든. 게다가 오늘은 새 테이프도 사러 가야 하고.”
그러니까, 돌아가.
그 뒤에 생략된 말을 아카시가 모를 리 없었다. 생각대로 아카시의 얼굴에선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적의로 물들어 버린 얼굴에, 타카오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것이 ‘기적의 세대’의 박력인가? 아니면, 이 녀석만 가지고 있는 투기 같은 것일까? 하지만 지금 아카시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미도리마의 중학교 동창이라지만 아카시는 결승에서 싸울 상대였다. 상대 학교에게서 에이스를 지켜내는 건 1군 주전이기도 한 자신의 역할이었다.
“……타카오.”
하지만 타카오의 그 결심은 미도리마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완전히 깨져 버렸다.
“오늘은 먼저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도저히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에, 타카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마주한 미도리마의 눈은 매우 진지했다. 그리고 명백한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이 자리를 즉시 떠나라, 고 하는 경고도 담겨 있었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타카오는 그 감정을 차마 놓치고 말았다.
“그, 그래도, 신쨩…….”
“감독님께는 내가 지금 말씀드릴 테니까. 아카시, 넌 근처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씻고 올 테니까.”
“알았어.”
타카오의 목소리가 늘어졌지만, 미도리마는 완고했다. 체육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쫓아갈까 고민하는 타카오의 귀에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약속이 있었다는데 깨게 해서.”
“어? 그, 그게…….”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지?”
미소와 함께 날아온 말에 타카오는 아까 못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겨우 억제했지만, 눈앞의 소년이 지극히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뭐든지 다 알아. 눈만 봐도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뒤, 아카시는 한 번 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얼굴을 지배하는 미소는 이전까지의 것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의기양양한, 승자의 미소.
그 점을 눈치챈 타카오가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아카시는 그를 지나치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준결승전에서 보자. 너희 팀이 신타로를 얼마나 잘 살릴지 기대된다.”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의 말.
그것은 타카오의 전신을 차갑게 굳어지게 하기 충분했고, 아카시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타카오는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분함보다, 불쾌함보다, 공포가 더 강하게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신쨩- 이라고 불리는구나. 귀여운 애칭인데.”
“설마 너, 그걸 가지고 놀리려고 온 건 아니겠지.”
“그런 것 가지고 놀리진 않아, 신쨩.”
“역시 놀리러 온 거잖아.”
한숨을 쉬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미도리마는 똑바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슈토쿠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갑자기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후 있을 시합을 재미있게 할 만한 요소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 타카오를 그에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나중에 있을 준결승전에서는 분명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시는.
“별 거 아니야. 중학교 땐 내가 이름 부르는 것도 싫어했던 신타로가, 신쨩- 이라는 귀여운 호칭을 부르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조금 토라졌을 뿐이지.”
“뭐야, 그건.”
“굳이 따지자면…… 옛 애인의 오기?”
저런 사람이니까.
미소를 지으면서 아카시가 몸을 홱 돌려 미도리마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미도리마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으나,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이 지극히 덤덤하고 아무 감정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차갑게 분노하고 있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비수를 감추고 있는 아카시를, 그 외의 시선으로 쳐다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모든 미래를 읽고 있는 자신의 눈으로.
“신타로는 언제나 그래. 사귀고 있었을 때도,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지. 그런데 이상하지. 신타로가 이렇게 사람 쓸쓸하게 만드는 타입인데도 주변엔 자연스레 사람이 모인단 말야.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런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조금 꼴사납지만, 난 질투했었다고. 신타로가 슈토쿠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야. 그 매니저 여자애는 미도리마 신타로를 불러달라고 한 순간 표정이 변했고, 또 네 팀메이트도 널 무척 잘 따르고 있는 것 같고. ……하지만, 사실 그래서 더 기뻐. 신타로는 결국 날 택해서 나와 줬으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게 아냐.”
순간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카시의 얼굴에서 미소를 사라지게 했다. 미도리마는 처연한 표정으로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아직 미련을 갖는 건가.
대체, 나의 무엇에.
“내가 가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넌 타카오에게 뭔가 했겠지. 그래서 따라나온 것뿐이야.”
나는 이렇게 너를 밀어내는 말 외에는 하지 않을 생각인데도.
“……난 그렇게 문제아가 아냐. 너무하잖아.”
“남의 럭키 아이템을 초면인 사람에게 휘둘러서 상처까지 낸 녀석에겐 듣고 싶지 않아.”
“아직도 가위 일로 꽁해 있어? 쪼잔하기는.”
아카시는 웃었다. 그리고 바로 미도리마에게서 등을 보였다. 만약 그 타이밍에 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카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고, 그 액정에 뜨는 팀메이트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미도리마에게 얼굴을 돌려 웃어보였다.
“그럼 다음에 결승전에서 보자. 상대가 누구든 내가 손을 놓고 있을 리 없단 거, 잘 알고 있겠지?”
“네가 손을 놓고 경기하면 오히려 곤란해. 슈토쿠는 지금 라쿠잔 하나만을 보고 있으니까.”
“헤에……그건, 네가 날 꺾을 자리라서인가?”
“아니. 우리 팀이 라쿠잔을 꺾을 자리니까.”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 슈토쿠 고교의 팀메이트들의 얼굴이 스쳐지갔다. 아카시는 그 모든 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게 없었다. 특히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은 그의 특기 중 특기였다. 그래서 아카시는 눈앞에 서 있는 미도리마에게서, 자신에 대한 적의와 라이벌 의식 외에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음을 빠르게 깨닫고, 체념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곤란해.
“너희들은 전부 변해버렸구나. 나는 그대로인데.”
“그건 네가 패배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게 당연하단 공식을 뒤집어 엎어주겠어.”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승리하는 건 옳다. 나는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옳다. 이 법칙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기적의 세대’라도 불가능해.”
그렇게 선언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내버려둔 채 육교를 내려가, 달렸다. 미도리마에게 더 이상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너희들은 전부 변해버렸구나. 나는 그대로인데.」
그 쓸쓸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걸어오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미도리마는 테이핑한 자기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걸 처음 하라고 제안한 사람은 아카시였다. 평소에 다른 일로 손을 쓰다가 미묘한 감각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공을 만질 때와 씻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넘기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도, 그리고 아카시의 몸을 만질 때도. 테이핑한 손으로 만지면 간지럽고 기분 나쁘다고 하면서도 테이핑을 풀려고만 하면 그는 자신을 막았다. 자기 기분보다는 미도리마의 손가락 감각이 더 중요하다는 듯 웃었다.
그 순수했던 웃음에 다른 것이 끼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쿠로코가 나갈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 아마 자신들은,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지냈던 것이리라. 키세도, 아오미네도, 무라사키바라도, 변했다. 그 원인은 아마 ‘패배’. ‘기적의 세대’와 함께 뛸 때는 결코 맛보지 못했던 '패배감'이, 그들을 변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는 농구하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걸, 입밖으로 내어놓을 수 있다. 상대에게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게도 알게 해주고 싶다. 패배의 기분을. 승리의 압박감에서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욕심,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그 기분을. 그러면 아카시는 예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미도리마에게, 그 순수하고 애정으로 가득 찬 미소만을 보여줬던 때로. 그 미소를 다시 본 순간 자신은 분명 말하고 말 것이다.
‘……좋아한다. 그런 널,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카시가 요구했던 것만큼이나 강하고 애처로웠지만, 아카시의 천재성에 느꼈던 라이벌 의식과 위기감에 억눌려 함께 지내던 3년간 단 한 번도 전하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22.
신장차
“또 컸어?”
불만스런 아카시 세이쥬로의 목소리에는 주어가 없었다. 대체 뭐가 더 컸다고? 의아한 기분에 옆을 돌아본 미도리마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아카시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향해 길게 뻗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키 말인가. 가만히 며칠 전의 신체검사 결과를 떠올려 본다. 더는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걸로도 좋았지만, 결과표에 찍힌 ‘신장‘ 란에는 분명 200cm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년 사이에 5cm인가. 경이로운 성장 속도라며 타카오가 혀를 내두르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중학교 때 174cm에서 195cm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한 전적이 있는 미도리마에겐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너는 자라지 않은 거냐.”
“저번 신체검사 결과는 여전히 173cm. 아무래도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 같아.”
분해. 말하며, 아카시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최근 다시 감정 표현이 매우 풍부해진 아카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발전해, ‘토라짐’ 이라거나 ‘부끄러움’ 같은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게끔 되었다. 그러니, 그런 아카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움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뻗어 아카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미도리마는, 자신이 손을 올린 것을 눈치 챈 아카시가 고개를 다시 제 쪽으로 돌려 사나운 시선을 보낸 순간 공중에 손을 멈추고 말았다. 누가 봤더라면 무척 이상한 그림이었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거냐.”
“그야 신타로의 입장에서는 키가 커지면 좋겠지. 슈터에게 신장은 큰 무기야. 네 슛의 단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였지만, 키가 커지면 포물선이 작아지는 만큼 그 약점도 조금씩 줄어들 테고.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기분 나빠.”
“키 차이가 점점 심해지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바보네. 키 차이 따윈 어찌되든 상관없어. 20cm 이상이 되면 다 마찬가지야. 다만 목이 아파진단 말야. 지금도 올려다보기 얼마나 힘든데.”
그럴 것이다. 지금 아카시의 시선은 미도리마의 어깨보다 조금 아래에 있었다.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개를 위로 젖혀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그건 좀 불편하겠군.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던 미도리마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길 한가운데 멈춰 선 미도리마의 그 뜬금없는 행동에 아카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불안감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뭐 어때, 사람도 없는데. 저답지 않은 결론을 도출한 미도리마는 엉겁결에 따라 멈춰선 아카시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단숨에 그를 위로 들어올렸다.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 아카시의 입술에서 으악, 하고, 진심으로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뭐, 뭐하는 거야, 신타로! 내려줘!”
“목이 아프다면서? 이렇게 하면 아플 일 없다는 것이다.”
“너 바보 아냐?! 그렇다고 길 한복판에서 이게 무슨……!”
“너 요즘 제대로 먹고는 있는 거냐? 왜 이렇게 가벼워진 거냐.”
“내 말 듣고 있어? 내려달라니까!”
“윽……. 안경 쓴 사람 얼굴로 손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여전히 상식에서 벗어난 녀석이군.”
“네가 지금 상식을 논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해?! 됐으니까 내려달라고!”
이제 아카시는 정말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미도리마는 팔의 힘을 풀었다. 아무리 자신보다 작다고는 해도 역시 170을 넘는 남학생의 반항이라 그대로 들고 있기는 힘겨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아카시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팔을 아래로 내려 아카시의 시선을 자신과 똑같은 곳에 둔 미도리마는, 제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고 아카시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매우 즐겁게 감상했다.
“신타로, 너…….”
“좀 참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면에서 네 얼굴을 보기는 흔한 일이 아니라고.”
“……너, 정말 바보지?”
그런가 보다. 네 얼굴을 보기만 해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보가 아닐까. 씩 웃자, 아카시가 슬쩍 미도리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을 한 아카시의 팔이 미도리마의 목을 감싸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1.
최악
-23. 엇갈림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나’에게 진심이 아니었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세이쨩의 첫사랑은 누구야?”
그 순간 아카시 세이쥬로는, 눈을 빛내며 묻는 미부치 레오에게 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냐고 묻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일반 팀메이트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것을 물어볼 때에는 보통 그 답이 자신이기를 바라기 십상이나, 적어도 아카시가 알고 있는 미부치는 자신에 대한 아카시의 감정이 팀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단순한 호기심일까? 하지만 그런 뜬금없는 질문은 미부치라기보다 오히려 하야마에게 더 어울렸다. 결국 미부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아카시는 피식 웃고 미부치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물론 미부치의 얼굴에는 실망이 깃들었지만, 아카시는 의도가 뭐냐고 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나마 많이 참아 준 편이라고 생각했다.
첫사랑.
그것은 최근 아카시 세이쥬로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하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얼굴, 모범생의 상징인 안경, 그 너머에 생생히 빛을 발하고 있는 의지 굳은 눈동자, 뚜렷하고 단정한 이목구비. 미도리마 신타로는, 마치 아카시 세이쥬로를 위해 신이 만든 예술 작품 같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아카시는 처음으로 설렘이라는 것을 느꼈다. 항상 굳게 다물고 있어 웃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입술이 살짝 휘어져 자신을 향해 덤덤한 미소를 보낼 때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처럼 선명한, 귀에 똑바로 들어와 박히는 낮은 목소리와 또박또박한 발음 역시 아카시의 마음을 늘 편하게 만들었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앞에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늘 제 자신을 잊어버렸다. 그와 함께 있다면 행복 외의 다른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도리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단둘이 장기를 두던 부실에서 아카시가 한 질문은 분명 그런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뜬금없는 그 질문은 방금 전 미부치 레오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던진 것과도 그 기원을 비슷하게 두고 있었다. 미도리마의 주변에 여자는 없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바로 자신이며, 그는 늘 자신을 대할 때면 그 딱딱하고 성실한 태도를 조금 유연하게 바꾸고는 했다. 그래서 약간 기대했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묻는 그 눈동자가 다시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사람…… 없다는 것이다.
약간 머뭇거리며 던진 그 대답에는 아카시가 기대했던 것 같은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아 당황스럽다는 의지밖에 전해지질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의 수-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대답을 들은 게 아닌 이상 뭐든 좋았던 것이다. 승산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어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여태까지 패배란 없었던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자신이 다음에 던질 제안에 미도리마가 ‘거절‘ 이라는 답을 내놓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 나하고 사귈래?
-……뭐라고?
-난 미도리마를 좋아해. 항상 같이 있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나의 연인이었으면 좋겠어.
그 말을 하는 내내 아카시는 전혀 떨지 않았다. 고백하는 사람이 흔히 가진다는 긴장과 걱정 따위는 아카시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당황한 사람은 미도리마 혼자가 되었다.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진짜 ‘고백’ 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미도리마는 얼굴을 붉히고 눈동자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한 눈동자에 아카시는 피식 웃고 말았고, 미도리마는 왜 웃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흠칫 물러섰다. 이전처럼 마구 잔소리를 퍼부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진심이야. 진지하게 생각해줄래? 그 부탁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을 승낙한 이상 미도리마가 정말로 진지하게 이 일에 대해 고민할 거라는 확신대로, 다음날 아침 미도리마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침 연습 전 아카시를 따로 불러냈다.
-좋다는 것이다. 사귀자.
로맨틱하기는 커녕 세상이 곧 멸망한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아카시는 기뻐, 하고, 솔직히 제 심정을 털어놓은 뒤 웃었다.
하지만 그때.
미도리마 신타로가 ‘기쁨’ 보다는 ‘부담’ 이라는 감정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왜 자신은 알지 못했을까?
“내 첫사랑은…… 내 연인이었지만, 사실 날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응? 뭐라고? 하고, 반문한 미부치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마음을 주었는데, 그 마음에 진심으로 보답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아카시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보낸 3년 간, 미도리마 신타로와 늘 함께 보냈던 그 매일매일 동안,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결의에 찬 눈동자가, 항상 부르짖고 다니는 그 좌우명이, 자신에게 상냥하고 성실했던 태도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눈을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뻐. 신타로는 결국 날 택해서 나와 줬으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단호한 한 마디로 깨달았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단 한 번도 아카시 세이쥬로를 우선시한 적이 없었다. 그 진지했던 눈동자는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강적에 대한 투쟁심이 담겨 있었을 뿐이고, 간혹 얼굴에 드러나던 미소 역시 아카시에게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그의 옆에 있지 않은가. 그의 진짜 미소를 공유하고, 그의 진심을 파트너라는 위치에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그래서 늘 수수께끼였어. 왜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그러자고 했을까? 왜 내 옆에 머물러 줬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과거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무척 어리석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 에게 진심이 아니었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정말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좋아했다면,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좋아했던 만큼 아카시 세이쥬로를 좋아했다면, ‘적이 되자’는 제안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게다. 오랜 시간 품어 온 라이벌 의식이, 아카시 세이쥬로를 꺾을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이,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감정보다 더 크지는 않았을 게다. 뻔한 일이었다. 이치를 따져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첫사랑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대답하고, 아카시는 부활동 일지의 한 장을 뜯어냈다. 볼펜으로 가만히 써내려 갔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름을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혼자서만 그에게 열을 올렸던 과거 따위, 너무도 비참해서 버리고만 싶다. 저 종이처럼 형태가 있는 것이었다면, 당장 구겨서 버렸을 텐데.
“미, 미안해, 세이쨩.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괜찮아. 이미 끝난 일이야.”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의 ‘연애’는 끝나 있었다. 되새길수록 비참함밖에 주어주지 않는 그 결론을 머릿속 저편으로 치우고, 아카시는 일지에 다시 펜 끝을 대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는 그 의지에 미부치는 조심스레 부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조용해진 부실에 혼자 남아, 아카시는 생각했다.
최악이다.
20.
원거리 연애
BGM: DECO*27 - 恋距離遠愛 (원거리 연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넣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승리뿐이었던, 그랬기에 세상의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인생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은 없었다고. 그에게 승리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 무척 중요했지만, 실감은 나지 않는 무언가였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일까, 난 지금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무서워.”
한 달 만에 만난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손을 꼭 쥐고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만나고 싶어‘ 란 메일을 보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지극히 불안한 아카시의 정신 상태를. 미도리마는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은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 일까? 손을 마주잡아 주는 것? 불안해하는 그를 끌어안아 주는 것? 불안함을 계속해서 뱉어내는 그 입술에 키스하는 것?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미도리마가 택한 것은 ‘질문’ 이었다.
“그게 왜 무서운 것이냐.”
“……없어질까 봐.”
아카시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더욱 거세지는 불안감을, 미도리마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아카시 세이쥬로는 처음으로 패배를 겪었다. 항상 승리뿐이었던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새겨진 ‘패배’ 라는 흔적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실망‘을 고하는 아버지의 냉정한 목소리, 패배자로 전락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최근에는, 무조건적으로 그의 편이었던 팀메이트들 역시 어색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어떤 결과인지는,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쿠로코 테츠야나 그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라쿠잔의 멤버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오직 미도리마만이 그것을,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던 환자에게서 호흡기를 제거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그걸 제거한 손이 자신의 손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인공호흡이라도 해줄 수 있었는데.
미도리마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는, 방금 전 머릿속에 떠올랐던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이어서 실행했다. 아카시의 손을 세게 잡고, 그에 반응해 고개를 든 아카시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가, 제 품에서 다시 떼어놓은 뒤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놀람에 눈을 휘둥그레 뜬 아카시의 얼굴이 왜인지 보였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눈을 감았을 텐데. 마치 먼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위화감이 아니었다. 미도리마에게는 아카시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더 이상 망가지거나 초라해지지 않도록.
“오래 전부터 내게는 너뿐이었고, 지금도 너뿐인 것이다. 변하지 않아.
네가 나로 인해 숨을 쉴 수 있도록.
“……그럼 나, 신타로를 좋아해도 괜찮아?”
“얼마든지.”
“떠나거나 하지 않을 거야?”
“물론이다.”
“평생 옆에 있어 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죽어서라도.”
천천히 아카시의 눈물 고인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응, 신타로.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져 간다.
“나, 기다릴게.”
그제야 미도리마 신타로는 깨달았다. 자신과 아카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지금의 이 공간은.
“네가 ‘현실’ 에서도 그 말을 해 주기를, 계속.”
모두 꿈이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미도리마 신타로는 제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잡고 있었던 손이, 껴안았던 어깨의 떨림이, 키스했던 입술의 부드러움이, ‘현실’ 앞에서 찬찬히 부서져 사라진다. 몸을 일으켜 안경을 쓰며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아카시를 만나러 가자.
19.
억눌러 오고 있었던 것
BGM: GUMI - 天ノ弱 (천성의 겁쟁이)
내가 이전부터 쭉 생각하고 있었던 걸 말해줄까?
친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네가 그걸로 좋다면 나도 그래도 상관 없어.
쭉 비가 온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를, 아카시 세이쥬로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그는 이렇게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늘어났다. 어디에서 읽은 구절이었던가.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는 건 마음에 여유가 있거나, 허무한 것 중 하나라고. 자신은 어느 쪽일까. 적어도 전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최근 그의 일상은 ‘여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며칠 전 그는 농구를 그만두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에게서 ‘그만둬라’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분명히 윈터컵 결승전이다. 라쿠잔 고등학교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상대는 금방이라도 라쿠잔의, 아카시 세이쥬로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상대인 세이린 고등학교가 작년 들어 갑자기 강해진 신설 고등학교이고, 그 원인일 1학년 두 사람을 제외하면 그렇게 위협적인 상대가 아닐 것이라는 정보 정도는 아버지에게도 들어와 있었다. 한심하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쉽게 틈을 허락하라고 가르쳤더냐. 그 말만으로도, 만약 패배했더라면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 거야. 생각하면서, 아카시는 웃었다.
그의 팔 밑에는 아버지가 읽어보라며 준 회사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쓸데없는 데’ 정신을 팔지 말고 슬슬 후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버지. 제게 있어 농구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트 위에 있으면 적어도 맛볼 수 있었거든요.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그 눈동자 안에 언제까지나 내 모습이 비칠 거라는 실감이요.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알려 왔을 때 농구부원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지난 1년 간 자신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던, 동시에 빼앗아갔던 주장이 갑작스레 자리를 내놓는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을,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는 아카시를 이해해 줄 정도로 그들의 마음이 넗었던 것도 아니어서, 농구부를 나온 지금 아카시에게 그들과의 끈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미부치나 하야마 등이 점심을 같이 먹자며 찾아오는 일은 있었지만, 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올 만한 주제라고는 뻔했기에 아카시는 늘 그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최근 아카시는 늘 혼자 식사를 하고는 했다. 그것이 외롭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의 고독이 자신의 특별함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었다. 잠시 그걸 잊고 있었던 건, 그래. 내가 혼자 앉아 있으면 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혼자 내려가지 말고 메일이라도 보내라는 것이다. 또 교실에 갔다가 허탕 쳤잖아.
그렇게 말해주던 그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농구를 그만 둔 아카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도리마에게 있어 농구란, 학교가 떨어지는 바람에 더는 성적이나 장기로 그에게 승부를 걸 수 없는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이기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미도리마에게 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끈질긴 승부욕에는 아카시를 안심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을 선고한 것은 아카시도 미도리마도 아닌 제 3자였다.
“그래도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욕심일까…….”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집안 사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원체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니, 아카시가 농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바로 아버지를 이어 연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미도리마가 그것을 이해해 주는 것과, 이미 사라져 버린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농구가 없다면, 그들을 이을 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쓸쓸해…….”
왜 내 옆에는 네가 없을까. 나는 왜 너를 두고 와 버렸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 했던 승리였을까. 요즘 아카시는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는, 과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도망쳐 버렸던 그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게끔 되었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기회’- 자신에게 누군가 패배를 안겨준다는, 그리고 그 상대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될 것이라는, 이제는 소망으로도 둘 수 없는 감정의 끝자락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적’인 상태로 너와의 관계가 끝날 줄 알았다면, 마지막까지 너의 좋은 친구로 남는 것이 좋았을까. 오직 미도리마 신타로만이 안겨줄 수 있었던 ‘기대’를, 아카시는 다시는 품지 못한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도리마 신타로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런 인생을 택한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자신이었다. 그것에 아버지의 의지가 얼마나 개입되었던 간에.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카시는 묻어두고 있었던, 그리고 평생 전할 수 없는 말을, 비가 쏟아지는 창문 너머로 뱉었다.
“좋아해, 신타로. 하지만…….”
내게 적의만을 불태우는 너의 그 얼굴을, 목소리를, 감정을, 무척이나 좋아했어.
“……안녕.”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열어 마주한 한 문장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더 이상 억눌러 오던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
한계
-19. 억눌러 오고 있었던 것 에서 이어집니다.
한계다. 손을 떠난 공이 링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채 미도리마 신타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도리마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가 지금 던진 공은 벌써 500개를 거뜬히 넘어 있었다. 몇 번이고 같은 궤적을 그리며 링을 통과하는 미도리마의 정확한 슛은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미도리마 신타로의 자랑이자 의지였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어린아이에게 그 부모가, 열 밤만 자면 그것이 올 것이라며 달래 주는 것 같은, 애매한 희망. 이렇게 계속해서 공을 던지고, 점점 더 ‘완벽함‘ 에 가까운 슛을 쏠 수 있게 되면, 언젠가는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신쨩, 이거 좀 봐봐.
그 희망을 깨부순 것은 오늘 타카오 카즈나리가 가져다 준, 올해 인터하이 출전 고교의 선수 명단이었다. 그 중 미도리마가 관심 있게 볼 학교는 단 한 군데 뿐이었다. 라쿠잔 고등학교. 작년 윈터컵 준결승전에서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패배를 가져다 준 존재가 주장으로 군림하던 그곳. 하지만 그 존재의 이름은 명단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쿠잔 고등학교의 PG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3학년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주장으로는 작년 라쿠잔의 슈터였던 미부치 레오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이름은 후보 선수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미도리마는 제 발밑이 꺼지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그것은 윈터컵 결승전에서 아카시 세이쥬로가 우승을 지켜낸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더 크게 다가온 절망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이기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기회를 잡을 틈도 없이 그는 또 멀어져 간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도 미도리마의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카시…….
타카오의 목소리가 유달리 걱정스런 빛을 띠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아카시를 걱정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타카오가 걱정하고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명단을 보고 절망스런 표정을 짓는 미도리마였고, 그 걱정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미도리마 본인도 자신이 용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절망과는 달리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농구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 분명 정답일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아카시 세이쥬로의 인생 최고의 ‘걸림돌‘ 이 분명 입을 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도리마는 지금쯤 혼자 있을 아카시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 연습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교토로 달려갔을 것이다. 비록 문전박대당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좋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연습을 반복해 온 그의 몸은 그날도 부활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미도리마는 그렇게 했다. 비록 지금의 슛 연습 끝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한계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다시 그 사실을 실감했다. 몇 백 개, 몇 천 개, 몇 만 개의 공을 던져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 공이 모두 링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3점이 차곡차곡 쌓여 100점을 돌파하더라도,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었던 것-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패배를 가르쳐 주겠다는 목표가 좌절된 이상, 무슨 소용인가. 살아가며 미도리마를 단 한 번도 배신해 본 적 없었던 그의 좌우명, 진인사대천명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밧줄이 되어 미도리마의 목을 세게 죄고 있었다. 이제는 발버둥치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밧줄에서 손을 놓고, 그 조임이 제 목숨을 끊어놓기를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너와 나는 이제 이걸로 끝인 거냐, 아카시.
-승리를 바란다면 좀 더 냉정해져.
그 말을 듣고, 냉정하게 너에 대한 감정을 모두 버렸더라면 좋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네가 좋아서, 너의 모든 것이 갖고 싶어서, 너를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한계다.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내 눈에 담지 않으면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체육관 구석에 던져두었던 제 가방을 향해 뛰어갔다. 지금 미도리마 신타로를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충동뿐이었다. 아카시, 아카시, 아카시 세이쥬로. 핸드폰을 꺼낸 미도리마는 메일함을 열었다. 아카시와 주고받은 메일은 작년 윈터컵 개막식에 아카시가 일방적으로 보낸 메일 이후로는 완전히 끊겨 있었다. 싫다.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다. 나는, 너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미도리마가 쳐 넣은 메일의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보고 싶다, 아카시.
17.
불꽃놀이
이건 꿈인가?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리석게도 그런 것을 생각했으나, 제 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타인의 체온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었다. 가만히 옆을 돌아보면, 제 손을 꼭 잡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던지는 존재의 얼굴이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 그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미도리마는 다시금 생각했다.
이건, 꿈인가?
“저거 봐, 신타로. 예쁘다…….”
“그, 그래?”
“역시 불꽃놀이는 좋구나…… 이렇게 큰 걸 보는 건 오랜만이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형형색색의 불꽃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감탄 넘치는 목소리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지.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도리마는 필사적으로 아카시가 제 옆에 있는 이유를 떠올리려 했다. 갑자기 도쿄로 찾아온 아카시가 축제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왠지 큰 가방을 들고 왔다 싶었더니, 그 안에는 자신과 미도리마가 입을 유카타 두 벌이 곱게 개어져 들어가 있었다. 공원 화장실에서 유카타로 갈아입고 인파 속에 섞였을 때 아카시가 가만히 손을 잡아 왔다. 그때 차마 뿌리치지 못한 탓에, 벌써 10개가 넘는 불꽃이 올라갔는데도 계속 그 손을 잡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실이다.
“언…… 제가, 마지막이었느냔 것이다.”
“응? 뭐가?”
“그러니까…… 불꽃놀이를 본 게.”
“아, 그거. 혹시 기억해? 중학교 때 축제에 갔던 거. 그 때 했던 게 마지막이었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그날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인생에 있어 정말로 크나큰 사건이었다. 선향 불꽃을 들고 황홀하게 앉아 있던 모모이, 그 옆에서 미소짓고 있던 쿠로코, 그런 그들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르게 옆에서 소란을 피우던 무라사키바라와 아오미네, 키세.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에 담은 채 훈훈한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하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본 순간-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선향 불꽃놀이도 해보고 싶었어. 모모이가 테츠야의 옆에서 너무 즐겁게 하고 있었으니까 차마 손을 못 댔지만.”
“그, 그래?”
그럼 돌아가는 길에 사갈까- 하는 말을 입에 올리려던 미도리마에게 아카시가 결정타를 가했다.
“신타로와 마주앉아서, 그걸 해보고 싶었어.”
“뭐……?”
“그 날 말야, 왠지 얼굴이 따끔따끔해서 옆을 돌아봤거든? 그런데 신타로가 날 아주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뭐야. 다들 즐겁게 웃고 있는데, 혼자서 미소 하나 짓지 않고 말야. 기분이 나쁜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갑자기 고개를 돌렸잖아. 기억해?”
기억한다. 아카시를 빤히 쳐다보느라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10초 정도 늦게 자각한 탓에 나온 행동이었다.
“불꽃을 제외하면 주변이 캄캄했는데도, 왠지 네 얼굴이 붉어져 있었던 게 기억이 나. 그래서 알았지. 아아, 미도리마는 날 쳐다보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왜 날 그렇게 쳐다봤을까. 계속 생각했어. 생각했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다음 날 만난 너는 그대로여서, 그대로 잊고 말았지만.”
아카시가 불꽃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 기대 가득한 눈빛이, 이번에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미도리마는 깨달았다. 아카시가 기대하고 있던 것은, 다음에는 어떤 불꽃이 하늘을 수놓을까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답을 들으러 왔어.”
미도리마 신타로의, 말.
“그 날…… 네게 반한 건 나 혼자뿐인 걸까?”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계속 하고 싶었던 말.
“신타로…… 날 좋아하지?”
불꽃이 터졌다. 하늘을 수놓는 거대한 불꽃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숨어 중얼거린 고백은, 다행히도 아카시에게는 닿은 듯했다. 그 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한 미소가 아카시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미도리마는 방금 전부터 계속 참아 오던 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세게 끌어안은 아카시의 어깨는 따뜻했다.
행복했다.
16.
마시지도 않는 음료수
“아카시, 뭐 마실래?”
하야마 코타로의 갑작스런 질문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문득 자판기에 시선을 돌렸다. 난 자판기에서 나오는 싸구려 음료수는 안 마셔- 라고, 평소라면 대답했을 텐데. 왠지 모르게 손가락이 어떤 음료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음료수였는지는, 그 다음에 터져나온 하야마의 반응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에엑? 저런 걸 대체 무슨 맛으로 마셔?”
그렇겠지. 나도 늘 의문이었다. 달콤한 것인지 씁쓸한 것인지 영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이상한 음료수, 원래는 차갑게 해서 먹는 것이 절대 아닐 그 음료수를, 매번 120엔을 지불하며 꼬박꼬박 입에 대는 그의 특이한 식성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그의 쓸데없는 성실함의 발로였을 것이다. 매일 1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거나, 안경은 반드시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거나, 조심하기만 하면 부러질 일 없는 손톱을 매번 테이핑 테이프로 감싸거나, 하루의 운을 보장해 준다며 매일매일 이상한-혹은 매우 고가인-물건을 들고 다니는 그 특이함. 하야마가 뽑아 준 단팥죽의 차가움을 손으로 느끼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피식 웃었다. 그랬다. 너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의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중학생이 가지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좌우명을 행동 하나하나에서 실현하고 다니는 너의 그 성실함, 혹은 고지식함이. 반듯한 사람이라는 건 바로 너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반듯함. 그런 너를 내 것으로 만들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
“아카시…… 안 마셔?”
“안 마셔.”
“뭐야- 왜? 사람이 기껏 뽑아줬더니!”
“하지만 맛이 없는걸. 내가 좋아하는 단맛은 아냐.”
“그럼 왜 그걸 뽑아달라고 했어?”
글쎄, 왜일까. 그 이유는 아마- 적이 된 지금도, 미도리마 신타로를 잊지 못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어리석음일 게다.
15.
방해하지 마
“핸드폰 꺼.”
미도리마 신타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왜 그렇게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지 아카시는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까 전부터 끈질기게 울리는 저 전화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갑자기 도쿄로 찾아와 부활동에 가려는 그를 붙잡아두고 놓아 주지 않는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것.
“너,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내가 뭘.”
“내 입장을 좀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멍하니 서 있은 지 벌써 1시간 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어서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당장 돌아가라고?”
그게 한 달만에 만난 연인에 대한 태도인가. 아카시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미도리마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 저 차가운 태도도, 당황해하는 얼굴도 흔들리는 눈동자도,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도. 결국 아카시는 손을 뻗어 미도리마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어엇, 하고 당황한 미도리마가 다시 핸드폰을 빼앗아 오기 전에 배터리를 분리해 버렸다.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미도리마는 자연스레 정색했다. 금방이라도 분노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날 선 눈동자에 손을 뻗어,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억지로 맞부딪힌 입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아카시의 어깨를 잡고 그를 떼어낸 미도리마는 이제 당황함과 분노가 뒤섞여, 어떤 감정을 먼저 폭발시켜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해, 신타로.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아카시.”
“신타로는 날 만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나와 함께 있으면 기쁘지 않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널 보러 여기까지 왔잖아. 만나고 싶어서 왔어. 단둘이 있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럼 나만 봐. 나한테만 집중해 줘. 내가 여기 있어서 곤란하다는 표정 같은 건 짓지 마. 불쾌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다고!”
버럭 소리지르자, 미도리마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지배한 감정의 이름을 아카시는 알고 있었다. ‘안쓰러움‘.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제 품에 세게 안겨 온 아카시를, 미도리마는 마주 껴안아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나, 아카시는 손에 쥐고 있던 미도리마의 핸드폰을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런 거 없어.”
거짓말이다. 어쩐지 견딜 수 없이 초조해진다. 매일매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목을 조여 온다. 또 하나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이 속삭인다. 너는 이렇게 점점 더 망가져 갈 것이라고. 미도리마 신타로가 없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의 손을 놓고,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없이 외톨이에 가까운 모습이다. 받아주는 이 없이, 감싸주는 이 없이, 홀로 ‘승리’ 라는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외로운 자신. 지금 미도리마의 손을 놓고 그 길을 택해 버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사실에, 아카시는 견딜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어떤 존재이든 계속 좋아하겠다고 했잖아. 그럼 나만 봐. 내 옆에만 있어 줘.”
좋아해.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거 알아. 신타로에게는 나 외에도 소중한 존재가 잔뜩 있으니까.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 없어. 이제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너는 그렇지 않아. 그게 너무 싫어.”
좋아해.
“네 가족도, 친구도, 동료들도, 전부 필요 없었으면 좋겠어.”
좋아해, 신타로-
“왜 나와 널 갈라놓는 거야!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그 필사적인 외침에 미도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둘러 아카시의 몸을 자상하게 감싸안아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상냥한 손길이, 그 속에 숨어 있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아카시에게는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숨길 수 없어. 심장 소리로 다 알아차리고 마는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게는 분명 소중한 것이 많이 있지만, 너 역시 그 중 하나야.”
거짓말.
“내게는 네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이다.”
거짓말.
“네게 인사를 다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날 믿어 달라는 것이다.”
‘영원’ 이라는 말은 전부 거짓이란 사실을, 난 이미 경험했는걸.
“좋아한다, 아카시.”
하지만 그 거짓말이라도 없으면 아카시 세이쥬로는 살아갈 수 없다. 패배를 겪고 승리자의 길에서 벗어나, 아무 가치도 없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저 한 마디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독점욕만을 키워 간다. 조만간 내 이 마음은 너를 잡아먹고, 흔적도 없이 내 안에 담으려 하겠지.
“떠나지 마…….”
“그럴 일 없다는 것이다.”
“평생 나만 보고 있어 줘…….”
“내가 이렇게 좋아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날 놓으면 안 돼, 신타로…….”
나는 이제 네 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14.
밀회
“그래서 그 녀석이 말야, 신쨩 사진이 더 없느냐고 묻더라니까? 멋있어서 계속 보고 있고 싶대. 이거 그냥 뒀다간 큰일나겠다 싶어서 말해 줬지. 신쨩은 절- 대로 안 된다고! 애인이 있어도 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다정한 말 한 마디 안 해 줄 텐데다 무엇보다 그 럭키 아이템이 무진장 부끄럽다고 말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건…… 뭐, 괜찮지만, 마지막 말은 흘려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난 오빠로서 여동생의 장래를 순수하게 걱정했을 뿐이야, 순수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타카오 카즈나리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렇게 얄미운 말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친한 친구한테서 ‘여동생이 네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너만큼은 내 매제 삼고 싶지 않다’ 는 얘기를 갑자기 들어야 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을 좀 해 보라고. 불만스레 혀를 찼다. 하지만 ‘여동생을 걱정하는 좋은 오빠’에 도취되어 있는 파트너에게 ‘나도 흥미 없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에 그는 심성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별 수 없지. 생각하며 옆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걸어가고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팔을 잡아당겨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당황한 미도리마의 눈이 자신을 끌어당긴 상대를 발견한 순간 미도리마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려는 것을 깨닫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손가락을 입에 올려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건 매우 적절한 조치였는데, 방금 전까지 제 옆에서 걷고 있던 미도리마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타카오가 큰 소리로 미도리마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라, 신쨩?! 신쨩, 어디 갔어?! 내가 이렇게 말해서 삐친 거야, 지금? 신쨩!”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찾는 타카오에게 ‘누가 삐쳤다는 거냐, 지금!‘ 하고 소리치려는 미도리마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아카시는 타카오가 그들이 숨은 골목을 지나쳐 슈토쿠의 대기실로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타카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미도리마가 거칠게 아카시의 손을 제게서 떼어냈다. 당장이라도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소리치려는 듯한 미도리마의 말문을 막기 위해 그 품 안에 뛰어든 아카시는, 허둥대던 미도리마가 결국 추궁하는 것을 포기하고 제 어깨에 팔을 두르자 피식 웃고 말았다.
“너 말이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아무한테나 하지는 않으니까 안심해.”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한테나 이런 짓을 한다면 난 진작에 머리가 어떻게 됐을 거다.”
“질투해?”
“당연하다는 것이다.”
순순히 인정하는 걸 보니 미도리마 역시 갑작스런 아카시의 방문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거부당했다면 나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고 말았을 거야.
“난 앞으로 10분 뒤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만…….”
“시간은 많이 뺏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나도 부원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네 시합을 보러 온 참이라서.”
“……관중석에서 네 얼굴을 찾을 수고를 덜었군.”
“그건 좀 아깝네. 필사적으로 내가 어디 앉아 있는지 찾는 네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농담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번 시합 땐 졸업한 선배들이 온 것도 잊어버리고 널 찾다가 지청구를 먹었다고.”
“맞아, 그래서 그 날 나보고 메일 정도는 보내라고 화를 냈었지.”
하지만 아카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키세 료타만큼은 아니어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서프라이즈를 좋아했다. 미도리마의 놀란 얼굴은 더욱 좋아했다. 그래서 방금 전 골목으로 그를 끌어들였을 때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던 미도리마는 정말로 볼 맛이 있었다.
“다행이야. 안심했어.”
“뭐가?”
“타카오 카즈나리가 생각보다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알았거든.”
“듣고 있었던 거냐, 방금 전 얘기…….”
“텅 빈 복도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당연히 들리지. 걱정 마. 딱히 화가 난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 여자애에겐 공감하고 있는걸. 신타로를 멋있다고 생각했다니, 나하고 똑같잖아.”
“그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왜? 이렇게 멋진데. 특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네 얼굴은, 키 차이가 전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멋있어.”
웃으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도리마에게 은근히 키스를 기대했으나, 미도리마는 혀를 차며 다시 아카시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을 뿐이었다. 하긴, 상관없지. 시합이 끝나면 데이트를 할 테고, 데이트가 끝나고 교토로 돌아가기 전에는 키스해 줄 거다. 미도리마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끝난 뒤면 연인을 위해 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한다. 갑작스레 찾아와도 화를 내기보다는 감싸 안아주고, 일반적인 ‘다정함‘ 과는 거리가 멀어도 가슴이 따뜻해지기엔 충분한 말을 해 주고,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행복한 키스를 해 준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그런 연인이었다. 그러니 타카오 카즈나리는 자신의 여동생이 내심 원하고 있을 미도리마 신타로의 ‘연인’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게 해 줄 생각도 없지만.’
한 번 더 미도리마의 등을 세게 끌어안았다가, 살짝 아쉬움을 남기고 그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분명 이 순간 자신과 미도리마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향해 발돋움하여 살짝 볼에 입술을 맞추었다.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은 것을 시합에 집중하기 위해 애써 참아 넘기는 미도리마의 얼굴을 보면, 그의 진인사대천명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괜찮아. 지금 중요한 게 내가 아니라 시합이어도. 어차피 네 마음 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내가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
“시합 잘 해. 말할 것까지도 없겠지만, 이기고 와야 돼. 안 그러면 데이트 해 주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반드시 이겨야겠군.”
봐,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하는 걸. 아카시는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건, 정말이지 너 한 사람 뿐이야.
13.
너의 눈동자 속
BGM: 初音ミク - Anti Beat
지금 그들은, 빈말로도 로맨틱하다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 숨통을 끊어놓을 듯 목을 붙잡고 매달린 아카시 세이쥬로의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당장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전화를 걸었으리라. 그러나 미도리마 신타로는 전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힘껏 자신에게 매달린 그 손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아카시가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찢어져 버릴 듯 절절한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를 아카시에게서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1년 전,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아카시는 덤덤함 그 자체였다. 이별을 말하는 목소리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도, 살짝 일그러진 입술도, 아픔이나 괴로움보다는 오히려 후련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의 무엇이 그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너를, 그렇게나 괴롭게 만들었던 것인가. 이 1년 간 그것은 미도리마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 흔들림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목소리를 아카시가 뱉어냈다. 고개 숙인 채로도 똑바로 보이는,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아카시의 얼굴은 그것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는 미도리마가 보기에는 정말로 가슴 아픈 무언가였다. 아파한다. 너는 정말로 아파하고 있다. 다시 의문이 들었다. 대체 나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네게 휘둘리는 건 이제 싫어.”
그 말은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못할 말이었다. 친구로서, 부주장으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곁에 머물렀던 지난 3년 간 미도리마를 휘둘러 온 쪽은 언제나 아카시였다. 그 미도리마로도 차마 감당 못 할 정도의 어리광을 부리고, 가만히 있는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을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무슨 일이든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만 이끌어 가려 했으며, 결국에는 제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까지 꺼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무엇이든 양보했다. 딱 하나, 스스로의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카시에의 도전과 투쟁심마저도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절대적인 승리자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였다. 굳건하지 못한 승리의 탑 위에서 고독을 곱씹고 있던,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의문조차 품지 못했던 자에게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도전자란 위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유희 비슷한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아카시는 미도리마와의 장기 대국도, 성적 경쟁도, 며칠 전에 있었던 고교 윈터컵 준결승전마저도, 한치의 동요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임했다.
“‘승리를 원한다면, 좀 더 냉정해져.’ 얼마 전 네가 내게 해 준 말이었지.”
“……!”
“하지만 지금의 너는 전혀 냉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
대체, 무엇이. 나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괴롭고, 힘들고, 버틸 수 없어, 결국은 무너져 내리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인가. 미도리마는 그것이 묻고 싶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카시의 뒤를 쫓아가며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고, 그 목덜미를 잡아채려 잡아채려 발버둥쳤을 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랬다. 생애 첫 패배를 맛보고 절망하고 있을 아카시에게, 제발 무너지지 말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던 간에, 나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신타로는…… 아직도 날 좋아해?”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처음 너를 내 눈에 담은 순간부터 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혼자 고고한 곳에 서 있으면서도 외로워하고, 마음을 허락했다 싶다가도 거리를 두고,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너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지쳐서 포기해버렸을 아카시의 양면성이 오히려 미도리마에게는 발화제였다. 아카시가 자신을 거부할수록, 그가 승리에 연연할수록,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집착할 수 있었다. 그를 이기겠다는 자신의 마음 하나만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미도리마 신타로의 존재를 굳건히 만들어 준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사랑하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에 담기도 전에, 아카시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 대답을 막아버렸다.
“만약 ‘네 전부’ 라고 대답한다면, 난 죽고 싶어질 거야.”
“어째서……?”
나는 네게 인사를 다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아. 마치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돼. 너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기에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너는 평생 모르겠지. 네 그 말이, 그 올곧음이, 나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드는지 모르겠지.”
그 답은.
“나는 약하지 않아. 그렇게 믿고 있어. 하지만 너는 내가 모르고 있던 그 ‘약함’을 일깨워.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너에게라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지해도 될 거라고, 너를 특별한 존재로 삼고 그 안에 숨어버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 순간 나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가 돼. 네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네가 날 좋아하는 이유가 사라져 버려. 그렇다고 해서 널 밀어내도 마찬가지야. ‘네가 없다’는 결말에 도달하고 말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난 네가 싫어. 너를 좋아할 수 없어.”
나의 사랑이, 네게는 너무 무겁다. 태어나서부터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네 어깨에 내 사랑을 더하면, 너는 짓눌려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이 너의 답인가. 미도리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라고, 아카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특별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됐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마음 속에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마음 속에 미도리마 신타로가, 특별한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미도리마는 제 입에서 흘러나온 무언가를 자제하지 못했다. 그것을 들은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놀람으로 크게 떠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미도리마 신타로는-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널 좋아하고, 네게 인사를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이제 바뀌지 않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섬뜩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언제라도 내 품에 떨어져도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사랑이 정한 종착지였다.
12.
의지박약
추위가 전신을 엄습해 온다. 팔을 감싸안은 채 아카시 세이쥬로는 옆을 쳐다보았다. 아카시가 추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미도리마 신타로는 제가 입고 있던 교복 윗도리를 벗어주려는 듯 가방을 어깨에서 내렸다.
“됐어. 셔츠 한 장만 입으면 춥잖아.”
완강히 말해 보았지만 미도리마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제 어깨를 덮은 미도리마의 가쿠란 윗도리는, 한 쪽 어깨가 젖어 무거웠다.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지나치게 아카시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탓이다. 그 상냥함이 어깨를 짓눌러 오는 것을 느끼며 아카시는 팔에서 손을 뗐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손을 미도리마가 힘을 주어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남들이 봐.”
“다들 우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상관없어.”
그건 미도리마의 생각이다. 아카시에게는,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두 명의 남학생이 나란히 한 우산 아래에 서서 사이 좋게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경 쓰였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누구이던간에 아카시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 일어날 테였다. 타카오 카즈나리라면 호들갑을 떨며 아카시를 부끄럽게 만들 말-“으아, 배 아파! 너희 진짜 사이 좋다- 부럽다- 누군 특이한 에이스님 뒤치다꺼리 한답시고 올해도 솔로인데!”-을 부끄러움도 없이 외칠 것이고, 미부치 레오를 위시한 라쿠잔의 부원들이라면 정색한 채 아카시가 분노할 만한 말-“저 짐승이 지금 감히 누구 손을 잡아!” “겨우 손 잡은 거 가지고 짐승이니 뭐니 하는 건 심했다고 생각해, 레오 누나! 그런데 배알 꼴리긴 한다.” “들었냐? 길에서 소란 일어나기 전에 놓는 게 좋겠다.”-을 연이어 늘어놓을 것이고, 최근 아카시 세이쥬로를 쭉 감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람들이라면 아카시를 괴롭게 할 만한 보고-“도련님은 최근 중학교 시절 동창과 교제하기 시작하신 모양입니다. 다만 상대가 남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를 아버지에게 올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특히 세 번째가.
“네 손은 여전히 작군. 내 손도 꽤 큰 편이긴 하다만, 더 세게 잡았다간 부서져 버릴 것 같아 무서울 지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손이 닿은 순간 별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싫다는 표정 짓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 집 차가 보이면 바로 놓을 테니까.”
그러지 마.
“……아카시?”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카시는 그 자리에 멈춰 서 미도리마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이상한 광경일까. 빗속에서 사이 좋게 우산을 쓰고 손을 붙잡은 채, 한 사람의 어깨에 다른 한 사람이 얼굴을 묻고 있다. 누가 봐도 연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풍경. 그것을 연출하는 것은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두 명의 남학생. 이것으로 아버지에게서 이 교제를 당장 그만두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만한 구실은 충분히 갖추었다.
하지만.
나는 이 손을, 평생 놓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마는 자신의 약함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다시 한 번 경멸을 느끼고 말았다.
11.
행복의 정의
-미도리마는 행복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언제나처럼 뜬금없는 질문을,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그 당시 그들이 나누고 있었던 대화-시험을 망쳐 시합에 나가지 못할 뻔하고서도 키세 료타와 1on1을 즐기고 있는 아오미네 다이키를 보며 ‘저 녀석은 농구만 있으면 인생이 행복할 것 같군’ 이라고 미도리마가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를 생각해 보면 전혀 맥락 없는 말일지도 몰랐지만, 미도리마가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어떤 답을 해 주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아카시 세이쥬로의 지식 속에서 ‘행복‘ 이라는 단어가 말소된 게 아닌 이상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물어본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미도리마가 느끼고 있는 행복이 아카시의 공감을 살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도리마는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 자상한 어머니, 귀여운 여동생이 둘러싸인 평온한 가정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온 미도리마로서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분명 미도리마와는 양 극단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카시는 풍족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자신에게 부담 외의 것을 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고,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어머니는 어릴 적 여의었다. 자신이 자석의 N극이라면, 아카시는 S극이다. 미도리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망설이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가만히 턱을 괸 채 아오미네와 키세를 관찰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행복이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은 있어. 일단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 책을 읽다 말고, 장기판을 꺼내. 그리고 그 전 날 너와 했던 대국을 재현해 보는 거야. 미도리마는 이렇게 말을 옮겼었지. 정말 성격이 다 보이는 수야.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위험했던가. 간만에 진땀을 뺐었지. 그러다가 살짝 책상 위를 봐. 네 사진이 장식되어 있는 걸 보고 네 생각을 해. 내일은 무슨 얘기를 할까? 내일은 어떤 수로 날 놀라게 해 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웃음이 나. 아무도 날 부르지 않고, 아무도 날 찾지 않아. 너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돼. 그게 있으면, 그래, 나도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미도리마는 순수하게 기뻤다. 아카시가 자신을 호적수로 생각해 주는 것에, 아카시의 ‘행복’에 가장 가까운 순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처음에는 짝사랑으로 시작했던 그 감정이 어느새 이 정도로 커져 있었다는 것에. 기쁨으로 벅차오르려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미도리마는 오직 아카시를 기쁨으로 웃게 만들기 위해 그 답을 던졌었다.
“나 역시, 너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스테레오에서는 은은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흔들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단번에 매료시켜 버린 날과 다름없이,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그것이 있다.
“너도 그 문답을 기억하겠지.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네 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흔들의자를 사고, 네가 좋아하는 책과 장기판을 가져다 뒀어. 그리고…… 누구도 널 부르지 않아. 누구도 널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아카시 세이쥬로를 위한 ‘해방’의 공간. 그것을 만들기 위해 요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아직 학생인 미도리마에게 방을 빌려줄 만한 부동산은 쉽게 없었으나, 그 문제는 수험 공부를 위해 집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아버지를 보증인으로 내세워 간단히 해결했다. 고급 스테레오와 흔들의자는 용돈을 모아 해결할 수 있었다. 클래식 CD는 집에 산더미처럼 있었고 마침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음악 취향은 비슷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카시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는 것이 의외의 난제였지만, 자타공인 독서광인 쿠로코를 동원해 책장 한 가득 책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아마 아카시 세이쥬로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했던, 아카시 세이쥬로를 찾는 모든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누구도 널 부르지 않아. 누구도 널 찾지 않아. 너의 세계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그러니, 너는 행복하겠지?”
그 질문에, 뜻밖에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냉정한 목소리가 예상외였다. 그야 문제는 조금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없다. 앞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장기도 직접 둘 수 없다. 손이 묶여 있으니까. 하지만 귀는 트여 있고 입은 막지 않았다. 책이야 미도리마가 읽어주면 될 일이고, 장기의 말을 옮기는 것도 미도리마가 할 수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행복은 코앞에 있다. 잡으면 되는 것이다. 행복을, 그리고 그 행복을 가져다 줄 존재를.
“걱정하지 마라. 네가 행복해질 때까지, 인사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끈기가 넘쳐나고 고집이 세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네가 좋아하던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그러니, 얼마든지 그렇게 해 주겠다. 살짝 미소지으며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다가갔다. 흔들의자 위에 못박여 움직일 수 없는 아카시는 얌전히 미도리마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입술을 떼었을 때, 네가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하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그것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미친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10.
네가 모르는 이야기
안녕, 나는 타카오 카즈나리. 오늘은 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해.
내가 아는 그 사람은 말이야, 아주 강해. 흔들림 없는 곧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고,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려고 하지. 나는 고작 1년을 같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 사람이 노력으로 해내지 못한 것을 본 적이 없어. 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코트 반 정도가 전부였던 슛의 범위를 코트 전체로 늘리기까지 고작 두 달이 걸렸고, 그것이 백발백중 들어가게 되기까지는 또 한 달이 걸렸어. 고작 네 달 만에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고,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더라. 파트너라는 자리는 의외로 버거운 거더라고. 나는 그 사람에게 노력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배웠고, 그걸 바로 그 사람과 친해지는 데 써먹었어. 그 우스운 리어카를 2주일 정도 끌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슈토쿠 고교의 명물이 되어 있더라고. TV에도 나왔었는데, 혹시 봤으려나? 아, 미안해. 아침 방송의 시시한 쇼 프로그램 같은 건 안 보겠지, 너는. 그거 굉장히 쪽팔리긴 했는데, 뭐, 그래도 우리 학교 에이스님의 파트너이자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손에 넣은 것 자체는 뿌듯하더라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뭔지 우연히 알게 됐어. 윈터컵 대진표가 나왔을 때의 일이야. 같은 블록에 있는 어떤 학교- 아, 그래, 굳이 다른 말로 돌려 표현할 필요는 없겠다. 네가 다니는 학교, 그 라쿠잔 고등학교의 이름을 본 순간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이대로라면 준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선배들은 기가 막혀 하더라. 준결승전까지 우리가, 혹은 너희 학교가, 올라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라잖아. 미야지 선배가, 저 녀석의 건방진 정도는 제 예상 외라고 혀를 내두르는 걸 봤어. 키무라 선배네 경트럭으로 치어 버린다는 협박을 안 한 게 진짜 무서웠는데, 더 무서운 건 정말 그 말처럼 된 일이었어. 그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괴물이더라고. 정말 압도적인 점수차로 준결승전까지 올라왔거든. 너도 알고 있겠지? 시합 전에 상대 팀의 데이터를 보는 건 기본이니까. 너라면 아마 비디오로 떠 놓고 보지 않았을까?
이건 다른 얘긴데, 그 슛 쏘는 모습은 조금 멋있단 말야. 평소에는 멋있는 구석이 있기는커녕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할 꼴인데 말이야. 괜히 우리 팀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게 아니더라니까.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이 없으면 난 1군 레귤러로 편성되지는 못했을 거야. ‘기적의 세대’를 맞이한다는 건 그런 거라고 감독님이 말하시는데, 우리 팀의 모두가 동의해 버렸지 뭐야. 그 미야지 선배마저도 말야! 대단하지!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도, 못하고 있는 게 있더라고.
네게 이기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냐. 넌 정말 강했으니까. 시합해 보고 나서, 괜히 너를 대단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거든. 나는 PG로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네 발치에도 닿을 수 없을 거야. 신은 불공평하다니까. 농구도 그렇게 잘 하는데 성적은 늘 톱이고, 그것도 단 한 번도 만점을 놓쳐 본 적 없다면서? 그 사람의 성적표도 날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3년 내내 널 성적으로 이기지 못했다니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지. 데굴데굴 연필, 그거 효과 되게 좋았는데. 그것도 소용없었다는 얘기잖아. 물론 너와 성적으로 경쟁하는 동안에는 그걸 쓸 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아, 얘기가 성적으로 샜는데, 어쨌든 네가 대단하다는 얘기야. 그 사람이 너를 이기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너를 이기지 못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 불쾌하겠지만, 잠자코 계속 들어.
너와의 시합에서 진 뒤, 쪽팔린 얘기지만, 나 울어버렸어. 너무 분했거든. 나는, 우리 팀은, 그 사람은,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거든.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없다면, 그 노력은 분명히 결실을 맺었어야 했어. 그런데도 이기지 못했잖아. 정말 펑펑 울었어. 다들 날 달래는데,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분하다는 내 말에 동조하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어. 그게 이상해서 그 사람 쪽을 돌아봤는데 글쎄, 울고 있더라고. 칼로 찔러도 표정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말야. 그는 왜 울었을까? 나처럼, 네게 진 게 분해서? 자신의 노력이 부정당한 게 슬퍼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정말 그런 거였다면 이미 4년 전 네게 장기 대국으로 처음 졌을 때 울었겠지.
그 사람은 말야, 네가 너무 먼 곳으로 가버린 게 억울해서 운 거였어.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알거든. 그 사람에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 그 사람이 말하는 중학교 시절의 추억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어. 같은 학교, 농구부의 주장과 부주장, 가장 친한 친구- 그 단어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너에게는, 있다는 걸. 그건 정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관계였겠지. 연인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건 고작 1년 정도 옆에 머물렀던 내가 뛰어넘기에는 너무 커다란 장벽이어서, 그 사람이 아직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그 마음이 얼마나 큰지 깨달은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을 동정했어. 평소라면 결코 내 동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상대였는데도, 동정해 버렸다고. 가엾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너에게 진심인데, 그렇게 너밖에 보고 있지 않는데, 너는 정말 잔인한 말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더군. 냉정해지라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몰라. 너와의 대전이 정해진 날로부터 그 사람이 얼마나 눈을 빛내며 연습에 매진했는지. 그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패배를 알게 해 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사정을 잘 모르는 나도 그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고는 했어. 이 사람에게 이렇게 뜨거운 면이 있었구나. 차마 몰랐어. 이렇게 말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울었을 때 깨달았어. 아아, 저 녀석은 그렇게나, 아카시 세이쥬로를 사랑했구나.
여기까지 말하면 내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겠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너를 옭아매던 족쇄는 사라졌어. 너와 그 사람은, 신쨩은, 미도리마 신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그저 서로의 옆에 있기만 했어도 행복했던 시절로. 쓸데없는 경쟁심이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서로를 품에 안고 있었던 시절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그런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잡지 않는 널 이해할 수 없어. 그런 널 여전히 좋아하는, 언젠가는 약속을 지키고 말겠다면서 다시 의지를 불태우는 신쨩을 이해할 수 없어. 평생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왜 잡아주지 않는 거야? 널 위해 뻗고 있는 그 멋진 손을, 그 노력으로 얼룩진 손을, 왜 잡지 않는 거야? 신쨩은 늘 네 뒤에 있었어. 네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혹은 제 손에 네가 잡혀 주기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었어.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 널 좋아하니까. 네 옆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 왜 모르는 거야? 아니, 왜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런 신쨩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어.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어.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고. 왜 네 감정을 속이지? 왜?
화는, 그만 낼게.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쨩이야. 자신을 외면한, 그것으로 혼자 상처받아 온 네게 화를 내고, 끝내는 감싸안아 줄 사람은 신쨩 뿐이야. 그걸 깨달아. 외면하지 말아. 네 행복은 가까이에 있어.
행복해져, 아카시 세이쥬로.
미도리마 신타로를 행복하게 해 줘.
귓가에 맴도는 타카오 카즈나리의 외침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떨군 타카오 카즈나리는 평생 모를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감춰 오고 있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그래, 네가 옳아.”
그런 그를, 미도리마 신타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다면 나도 한 번쯤은 고려했겠지.”
사랑하고 있다. 그 손을 잡고 그 품에 안기면 행복해질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순간 손에 들어올 모든 것을 차지하고 그를 속박하고 싶어질 미래의 자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직 비참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미도리마 신타로를 선택할 용기도 없다.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것을 강요할 자격도 없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었기에. 그 사랑을 배반하고 거부해 왔기에.
그것은, 타카오 카즈나리도 미도리마 신타로도 모르는 아카시 세이쥬로만의 이야기.
9.
도주
“신타로, 잠깐…… 신타로!”
계속해서 불러도 미도리마 신타로의 등은 묵묵부답이었다. 막무가내로 제 손을 잡아끄는 미도리마에게 이끌려 하염없이 걸어가면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가 세게 붙잡고 있는 제 손을 빼려 애를 썼다. 그래도 미도리마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끌려가면서, 아카시는 자신이 방금 전 뛰쳐나와야만 했던 레스토랑을 돌아보았다. VIP 고객을 위한 로얄석에서, 10분 전까지 아카시의 앞에 앉아 있던 소녀는 분명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와 처음 만나는 날, 대화를 시작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갑작스레 난입한 남자가 약혼자를 끌고 사라졌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올 법한 장면이지만, 자신의 약혼자가 갑작스런 등장인물과 같은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 해프닝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면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거란 사실을 잘 알면서.
“신타로……,”
“시끄럽다는 것이다! 됐으니까 따라와!”
아, 정말로 화를 내고 있다. 아카시는 깨달았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미도리마가 많은 것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 물정 모르는 그 소녀, 아카시 세이쥬로의 미래의 정혼자 앞에서, 네 앞에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앉아 있는 소년을 자신이 4년 간 지켜봐왔고 5년째 되는 지금 간신히 손에 넣었으며 그것을 절대로 놓을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지금 당장이라도 본사 건물 회장실 안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다 이 해프닝에 대해 전해 들었을 아카시 세이쥬로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을 더 이상 속박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그래도 미도리마는 참고 있었다. 그것은 아카시의 입장을 이 이상 곤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정말로 미도리마 신타로다운 상황 판단이 작용한 결과였다.
“화 났어?”
“그럼 이 상황에서 화를 안 낼 거라고 생각……,”
“미안해.”
갑작스런 사과에,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만 따지고 보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아카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도 깨달은 듯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미도리마는 분함에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어떤 돌발 행동을 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지도 몰랐다.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만큼, 아카시도 미도리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 혼자, 조용히 모든 일을 감당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말…… 간신히 잡았다는 것이다.”
“응.”
“난 너무 오래 기다렸고, 그만큼 널 오래 기다리게 했어.”
“응.”
“그만큼 네게 인사를 다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너는 그걸 받아주었는데, 왜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한다는 거냐.”
“그래, 그건 너무…… 슬프고, 잔인한 일이지.”
미도리마가 자리에 멈춰섰다. 굳게 다문 그 입이, 제 손을 굳게 쥔 손아귀의 힘이, 자신이 정말로 바라고 있던 것을 말하리라는 사실을 아카시는 느꼈다. 그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뒤따라왔다. 막아야만 했다. 그 말을 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은, 그것을 도저히 거부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이대로 도망쳐버릴까.”
“어디로?”
“어디로든.”
“언제까지?”
“할 수 있다면 평생.”
하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좋아.”
미도리마가 그 말을 하는 것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자신도.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럴 순 없어. 우리가 조금 더 자라면. 너와 내가 이 한 몸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면.”
“……그게 언제라는 거냐.”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우린 아직 어리잖아. 너는 지금의 나를 책임질 수 없고, 나는 지금의 너를 무조건 따라갈 수 없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어른은 아니지만, 충동에 무조건 몸을 맡겨 버리는 어린애도 아니야. 너도 그건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나만 데리고 나온 것일 테고.
“나, 기다릴게. 신타로와 함께 떠날 수 있는 그 날까지.”
지금 당장은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러니까 반드시, 인사를 다해서, 꼭 나를 데리러 와 줘.”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미도리마는 그런 아카시를 끌어안지 않았다. 그래도, 아카시 세이쥬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미래로 발을 내딛겠다고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어떤 한 가지를 결심하면 끝까지 내달린다.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이 얼마나 큰 벽이던간에 무시하고 돌진한다. 그 대담함과 끈기를, 오직 자신만을 향한 진인사를, 그 외의 다른 길을 택하지 않는 자상함을.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다.
“……약속한다는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사랑의 도피를 떠나기까지, 앞으로 n일.
8.
추억의 일기장
왜 그런 것이 자신의 책장 안에 들어 있었을까. 아카시 세이쥬로는 일기장 표지에 적힌 자신의 것이 아닌 이름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일기‘. 깔끔하면서도 딱딱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글씨체가 공책의 신분을 정하고 있었다. 일기라. 정말로 그에게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다. 그러고 보니 매일 자율연습 메뉴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내용이라면 봐 봤자 재미없겠지. 아카시는 공책을 도로 책장 안에 꽂았다. 그리고 그 공책의 존재와, 그 공책의 원래 주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당시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렇게나 잔인한 인간이었다.
“우와, 신쨩! 이게 다 뭐야? 일기? 나 읽어 봐도 돼?”
“안 돼. 딴 짓 하지 말고 정리나 하라는 것이다.”
“5월 28일. 오늘은 아침 식사로 정어리조림과 된장국이 나왔다. 어제 저녁 메뉴와 똑같다. 어머니에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약을 사 가야지. 으아, 신쨩 효자다! 그런데 일기 내용이 무지막지하게 재미없어!”
“딴 짓 하지 말라니까!”
으르렁대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타카오 카즈나리의 손에서 공책을 낚아챘다. 내가 바보였다. 저 녀석에게 짐을 맡기면 이렇게 될 줄 뻔히 알고 있었는데. 한숨을 쉬며 미도리마는 타카오가 그 공책을 꺼낸 상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나 혼자서 정리하고 말겠다- 그런 결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타카오의 끈질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른 것을 정리하라는 미도리마의 지시에도 타카오는 굳이 공책이 가득 담긴 상자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보여줘 놓고 그냥 넘어가기 없기! 라고 말하는 듯한 그 기대 가득한 눈동자에 미도리마는 할 수 없이 타카오 쪽으로 상자를 살짝 돌려주었다.
“양이 장난 아니네…… 언제부터 썼던 거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무섭다- 난 일주일 이상 쓸 수가 없던데.”
타카오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상자 속에서 공책을 한 권씩 꺼내 공책 겉면에 빠짐없이 기록한 날짜를 보면서 어김없이 감탄사를 던졌다. 자신의 행동을 본 타카오가 저 정도로 감탄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미도리마는 이삿짐 정리가 늦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타카오가 공책 한 권 한 권에 시선을 주는 것을 가만히 묵인하기로 했다. 내용을 펼쳐보지만 않으면 된다. 일기에 적은 것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중에는 방금 타카오가 읽은 것처럼 정말 쓸데없는 내용을 적어 둔 것도 있었다. 한 줄이라도 좋으니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자는 결심에 충실한 것뿐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내용을 남이 읽는다는 것은 부끄러웠다.
“신쨩, 이거 다시 읽어 보거나 해?”
“가끔 시간이 나면. 추억을 되짚어 볼 수도 있어서 즐겁다는 것이다.”
“우와아, 이해 안 돼…… 어라? 이건 좀 많이 닳았네. 자주 읽었나 봐?”
그렇게 말하며 타카오가 흔들어 보인 것은 중학교 시절 썼던 일기장이었다. 그래, 어떻게 안 읽어볼 수 있겠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그 시절 전부 일어났는데.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미도리마 신타로도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 봐도 변함이 없는 일상의 궤적. 그 가운데에 있던,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
“어…… 그런데 신쨩, 한 권이 비는데.”
“그렇겠지.”
“없어진 거야? 시기상으로는…… 중학교 3학년 겨울이네.”
정확히는, 중학교 3학년 3학기에서 테이코 중학교 졸업식 전날까지의 일기일 것이다. 타카오가 ‘없어졌다‘고 표현한 그 일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미도리마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던 가라앉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린 듯한, 그러나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애쓰는,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는 목소리. 물리적인 거리만 아니었다면, 혹은, 만화책 속에서나 나오는 순간이동 능력이 있었다면, 미도리마는 그 존재를 당장 끌어안으러 갔을 터였다.
“……선물했다는 것이다.”
“어? 일기장을 선물해? 으아- 나라면 절대 받고 싶지 않아! 그거랑 별개로 좀 읽어 보고는 싶지만.”
“그 녀석에겐 그게 필요했으니까.”
“대체 누구한테 준 건데?”
“…….”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타카오에게의 대답 대신, 그날의 통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갑자기 미도리마에게 전화를 건 그는 다짜고짜 ‘내게 무엇이 남은 것 같으냐’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답을 맡기는 경우는 보통 스스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신의 의견을 묻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날의 것은 조금 특별했다. 한 번도 확신 없는 행동을 해본 적 없던 사람이었기에, 미도리마는 그가 당시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의 인생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두기 위한 원동력이 필요했다. 그 때 그 일기장의 존재를 떠올려 낸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테이코 중학교 졸업식, 열려 있던 그의 가방을 본 순간 피어오른 충동으로 무작정 일기장을 그 안에 쑤셔넣었던 날의 일을 기억해 내자 미도리마는 바로 물었다. 네 책장에 네 것이 아닌 물건이 꽂혀 있지는 않느냐고. 잠시 의아해하던 그는, 아,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가 그 일기장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음을 확신한 미도리마는 안도했다. 그거라면, 그 일기장 속에 적혀 있는 나의 말이라면, 혹시라도 너를 구원해 줄 지 모른다.
-읽어보라는 것이다.
-……왜 내가 네 일기를 읽어야 해.
-네가 물어봤으니까.
-…….
-네게 무엇이 남았느냐고, 물어봤으니까. 그 답이 거기 적혀 있을 거라는 것이다. 읽어봐라. 읽어보고, 답을 찾아. 찾으면…… 그걸 돌려주러 와라.
-나보고 일부러 도쿄까지 오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면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는 것이다. 착불이라도 상관없어. ……그럴 가치조차 못 느끼겠다면 버려도 된다.
-…….
-제발.
그 마지막 말을 뱉은 순간 전화가 끊겼기에, 미도리마는 자신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그에게 전해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마지막 희망의 동앗줄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그것을 붙잡고 위로 올라올지, 아니면 가위로 그것을 잘라 버릴지는 오직 그에게 달려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4년 전에도, 3년 전에도, 2년 전에도, 1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기다릴 뿐.
“그런데 남에게 줘 버리면 다시는 못 읽지 않아? 괜찮겠어? 신쨩의 소중한 추억이잖아.”
“괜찮다는 것이다. 내용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일기장에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적어 두었다. 점차 변해가는 그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의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점인- 아카시 세이쥬로만을 향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감정. 잊어버릴 리 없었다. 잊을 생각도 없다.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인간은 오직 그것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택배 왔나? 타카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미도리마는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택배는 모두 받았다. 이 이상 올 것은 없다. 온다면, 그것뿐이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전한 자신의 의지.
네게는, 내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너에게 등을 돌리고 너를 외면하더라도, 네가 한없이 고독을 느껴 절망적인 결말을 택하고 싶도록 만들더라도, 나만큼은 네 옆에 있다는.
미도리마는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터폰 너머에 있는 것은 우체부인가, 아니면 너인가. 수화기를 들까 말까 망설이는 타카오의 뒤로 다가선 미도리마는 인터폰 가득 비치는 붉은색을 보았다.
드디어, 닿았다.
7.
신경안정제
“요즘 약이 늘었더구나.”
아버지의 냉정한 목소리에 아카시는 스프를 뜨던 손을 멈추었다.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는 숟가락에서 뚝, 하고 노란 방울이 떨어졌다. 그게 다 누구 탓인지나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버지에게 원망스런 눈빛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타세 박사의 말을 들어 보니 꽤 강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던데.”
“괜찮습니다. 그런 약에 굴하지 않도록 키우신 건 아버지니까요.”
아카시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각종 중독성있는 약을 제 몸에 직접 주사해야만 했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지시였다. 모든 것에 완벽해야만 하는 아카시 가문의 사람은 약에 의존하거나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각종 약에 내성을 키우기 위해 억지로 하루에 세 번씩 주사를 맞았다. 약의 독성에 기절했다가 뺨을 맞고 일어나기를 몇 차례 반복했을 즈음에는 어떤 약을 주사해도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사이보그 같다. 때문에 지금도 아카시는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약 몇 알에 좌지우지될 몸이 아닌 것이다.
“불면증은 심각한 병이다. 고집부리지 말고 제대로 치료를 받아라.”
그것 참 눈물나게 고마운 말씀이로군요. 그 말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억누르고, 아카시는 스프를 한 입 삼켰다. 그 사이 차갑게 식어버린 스프는 뜨거운 것을 전혀 먹지 못하는 아카시에게도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것은 아버지의 저 눈동자와 말일지도 모른다. 아들을 염려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저 반응. 만의 하나라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냉정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한들, 저 눈동자로는 설득력이 없다. 순식간에 식욕이 떨어져 아카시는 스프만을 계속해서 입에 밀어넣었다. 맛도 잘 모르겠다. 아카시에게 스프를 먹는 것은 그저 정해진 양을 위 안에 밀어넣고 이 자리를 빨리 뜨기 위한 행위였다. 구토기가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아내고 아카시는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밀어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아카시를 아버지가 매서운 눈빛으로 저지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아들이 눈에 띄게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나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의 존재를 원망했다가, 그래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포기한다. 그런 일상의 반복에 아카시는 꽤나 지쳐 있었다.
“병원에 집어넣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러고 싶을 것이다. 패배를 몰라야 했던, 아카시 가문의 사람이기에 완벽해야 했던 자신의 아들이 평생 단 한 번 보인 ‘추태‘를 그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카시를 당장 제 앞에서 ‘치우지‘ 않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눈, 그 중에서도 특히 항상 아카시 그룹을 감시하고 있는 매스컴의 눈에 어떤 흠집도 잡히지 않으려면 어떤 헛점도 용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들이 반 년이 넘도록 3시간 이상을 자지 못한다는 보고를 주치의에게서 받았더라도. 그러니까, 걱정 같은 걸 하는 척 하지 마세요.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정신병자가 아니니까요.”
“세이쥬로.”
“머리가 아파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대화의 여지를 단칼에 잘라버리고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서 있던 집사가 그를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버지는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순조롭게 식당에서 빠져나온 아카시는 태연한 발걸음으로 제 방을 향하려 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식당을 벗어나기 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구토기가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제 방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가 방금 먹은 스프를 전부 토해 내고 나서야 아카시는 겨우 몸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변기에 물을 내려 자신의 비참함을 흘려버리고 힘없이 그 옆에 주저앉아, 텁텁한 입 안을 손가락으로 모조리 긁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와…… 줘.”
아, 또다. 또 그 말을 하게 된다.
“도와…… 도와 줘, 신타로…….”
입을 붙잡고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손 위에 무언가 겹쳐졌다. 아카시. 머릿속에 울리는 자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면, 그곳에는 아카시의 마음을 놀랄 정도로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이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아카시는 제 손을 감싸는 그의 체온과 자신을 향한 눈동자 가득한 염려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괜찮으냐.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나?
“침대까지는 갈 수 있어…….”
-가서 누우라는 것이다. 한 숨 자도록 해.
“응…….”
-어서 일어나라.
그 말에 바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화장실에서 나온 아카시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까지 터덜터덜 걸어가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출렁이는 매트리스에는 한 명의 무게밖에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침대에는 분명 두 명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불을 한데 그러모아 끌어안고 그리로 몸을 파묻자, 결코 느껴질 리 없는 그의 체향이 났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몸이,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냄새. 그 정체는 단순히 미도리마가 쓰는 향수를 이불 위에 잔뜩 뿌려 놓은 것뿐이지만, 아카시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꼴사납게 요동쳤던 마음이 가라앉아 간다.
“안아 줘…….”
중얼거리며, 아카시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환상의 손이 그의 등을 끌어안는다. 따뜻해. 결코 따뜻할 리 없는 이불 안에서 아카시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정말 그대로야. 신타로의 체온, 신타로의 냄새, 신타로의 팔…… 그러니까 나는 비참하지 않아.
비참하지 않아야 하는데.
“……뭐가…… 아니란 거야.”
-전 정신병자가 아니니까요.
“한심해…….”
약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었다. 내성이 생겨버린 몸은 보통 수면제로는 쉽게 잠들어 주지 않는다. 약 효과가 떨어지는 새벽 두 시쯤 눈을 뜨면, 아카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잠들기 위해서는, 살기 위해서는 이 미친 짓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미도리마의 이름을 부르면, 그의 환상이 아카시를 찾아와 상냥하게 감싸 안아 준다. 정말 미친 짓이다. 실제로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주제에. 아카시는 자조했다. 자신의 이 행동을 멈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방법도, 수단도, 아카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실제 미도리마 신타로를 만나면 된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그 품으로 뛰어들어, 등을 감싸안고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채 미도리마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면 그는 아카시를 감싸 안아줄 것이었다. 아카시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아카시의 외로움을 달래 줄 것이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런 인간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카시는 그 방법을 택해, 자신의 평온을 되찾는 것만은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기에.
그 온기가, 그 자상한 손길이, 언제까지나 제 옆에 머무를 것이라는 확신은 없기에.
자신에게 있어 단 하나의 ‘절대적인 것’ 이었던 ‘승리’가 무너진 시점에서, 아카시는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도, 자신을 찬양하는 주변의 사람들도, 자신을 그 수준까지 몰아붙였던 아버지의 억압도,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던 미도리마 신타로의 진인사도.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인간의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는 몸의 숨이 끊어져 버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나사가 풀려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는 태엽 인형처럼.
“신타로…….”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머리 위에서 그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아카시. 난 여기 있다는 것이다. 환상에 불과한 그 목소리에 아카시는 웃었다. 웃으면서, 저주받아 마땅할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좋아해…….”
-……나도다.
그렇게 대답해 주는 환상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원망스러워, 아카시는 이불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 조만간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럼에도 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6.
千石撫子 - もうそう♡エクスプレス (망상♡익스프레스)
아카시 세이쥬로. 15세. 12월 20일생. 사수자리. AB형. 신장 173cm. 체중 64kg.
좋아하는 음식, 탕두부. 좋아하는 소설, 미스테리 계열. 좋아하는 게임, 장기와 바둑과 체스. 좋아하는 음악, 클래식. 좋아하는 색, 붉은색.
좋아하는 사람.
미도리마 신타로.
갑자기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에 도쿄로 가는 신칸센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다음 정차역은 도쿄, 도쿄 역입니다. 그런 방송을 듣고 나서야 그를 만나는 것 외의 목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구실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도쿄 역에 내려 슈토쿠 고등학교 앞까지 가는 전철에 몸을 실으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생각했다. 그런 것을 일일이 생각해 내지 않고서는 그를 만나러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다소 귀찮았지만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하교 시간이 되었는지 학교 주변에는 그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은 저마다 다른 학교의 학생이 교내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익숙했기에 아카시는 아무 거리낌없이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지만, 슈토쿠 고등학교의 입학 안내서를 본 적이 있어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매끄러운 바닥에 농구공이 튀어오르는 익숙한 소리를 귀에 담으며 체육관 앞으로 들어섰을 때 시합 데이터에서 본 적 있었던 얼굴이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미야지 키요시였던가. 슈토쿠 고등학교의 스몰 포워드. 눈이 마주친 순간 미야지는 아카시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을 향해 빙긋 웃어주며 아카시는 자신의 목적을 입에 올렸다.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만나러 왔는데요.”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미도리마의 이름에 미야지는 방금 전보다 훨씬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도리마의 성격 상 아카시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만나고 싶어 도쿄까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그랬기에 저 놀란 반응 역시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미야지는 미안하지만, 하고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도리마라면 지금 없다.”
“없다니요?”
“1학년은 오늘 연습 시합에 갔어.”
아, 그런가. 성실하기로는 누구 못지 않은 그 미도리마가 연습을 빼먹을 리 없다. 변함없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새삼 감탄하며 아카시는 미야지에게 연습 시합이 열리는 곳의 장소를 들었다. 정찰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미야지가 아카시를 노려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정찰이라면 혼자서 오지 않는다. 매니저 정도는 동반하고 오겠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체육관을 뒤로한 아카시는 학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연습 시합이 열리는 장소는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앞으로 5분…… 아니, 많이 봐줬다. 10분 정도가 지나면 미도리마를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에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아카시는 택시 뒷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지금부터 윈터컵 준결승전, 슈토쿠 고교와 라쿠잔 고교의 시합을 시작합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휘슬이 울렸다. 하늘로 높게 떠오른 공을 붙잡은 것은 슈토쿠 쪽이었다. 공이 재빨리 타카오 카즈나리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아카시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은 예상대로 슛 자세를 취하는 미도리마의 손으로 옮겨졌다. 기선제압을 위한 첫 번째 슛은 미도리마의 주특기대로 코트 맨 끝에서 쏘아 올라왔다.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무서운 기세로 링을 통과하자 다시 휘슬이 울려퍼졌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라쿠잔 부원들의 가운데에서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험악한 눈빛으로 안경을 끌어올리며 미도리마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호오. 비웃음 섞인 감탄사를 입에 올린 것은 미도리마의 그 사나운 눈빛 때문이 아니었다. 똑바로 귀 안을 파고들었지만 마음에는 전달되지 않은 미도리마 신타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패배를.”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몇 번을 가르쳐 줘야 알까. 아카시는 미도리마에게는 보이지 않을 짧은 비웃음을 섞어 튀어오른 공을 인터셉트했다. 공을 잡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바로 타카오가 아카시의 앞을 가로막았다. 상대 팀 에이스이자 주장인 자신을 상대로, 같은 에이스인 미도리마가 아니라 타카오를 내보낸 것은 슈토쿠 측의 도발이었을 것이다. 입가 가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타카오의 얼굴을 벌레 보듯 살짝 노려본 뒤 공을 재빨리 바꿔잡아 그 옆을 통과했다. 소용없다. 타카오 카즈나리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막을 수 없다. 그를 뚫는 데는 10% 정도의 능력만 써도 충분하다. 슈토쿠의 가드를 재빨리 제쳐 공을 패스했다. 미부치의 손으로 넘어간 공이 빠르게 링을 통과했다. 동점이 되는 점수를 흘깃 쳐다보면서 아카시는 몸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슈토쿠 고등학교는 분명 강적이지만, 미도리마 신타로 외에는 신경 쓸 상대가 없다. 패를 보여주듯 조심스레 움직이다가, 단숨에 몰아붙인다. 시합에 임하기 전 감독과 부원들 앞에서 세운 작전대로 아카시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남들의 눈에는 마치 팽팽한 접전처럼 보였을 전반 시합이 끝나고 하프 타임이 찾아왔다. 벤치로 돌아가는 미도리마가 이를 갈며 또 무엇이라고 말했고, 아카시 역시 그에 본능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쭉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노.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라, 그의 옆에 당연히 붙어 있는 타카오 카즈나리를 향한 분노.
사실은, 내가 그 위치에 있고 싶었어. 신타로의 옆에 있고 싶었어. 파트너로 있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어째서 지금,
신타로와 적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던지면 분명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나‘를, ‘기적의 세대‘를 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카시 쪽이었다고.
하지만 그건 운명이잖아? 할 수 없는걸. 그러니까-
“잠들어라, 역전의 왕이여.”
너희들이 지금 여기서 내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도, 운명이야.
“진심이었나, 그 말.”
아카시의 기억에서 그 날은 마지막으로 미도리마와 ‘평화로운‘ 대화를 나눈 날이었다. 테이코 중학교의 졸업식 날. 쿠로코 테츠야를 제외한 전 농구부 레귤러진 전원을 체육관에 불러 놓고, 아카시는 앞으로 ‘기적의 세대‘를 자신의 적으로 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는 무표정하게 과자를 씹었고, 아오미네 다이키는 흥미 없다는 듯 하품을 했으며, 키세 료타는 슬쩍 그런 아오미네를 돌아보았다. 미도리마 신타로 쪽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표정으로 추측하지 않아도 미도리마의 말은 직접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부실에서 제 짐을 챙기고 있는 아카시를 찾아왔다. 너는 정말 어디까지나 내 예상대로지. 그래서 조금 재미없지만. 장기판을 짐 안으로 넣다 말고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똑바로 본 미도리마 신타로의 얼굴은, 분노나 흥분으로 가득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덤덤함 그 자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내가 그런 말을 할 거란 걸 너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걸.”
“네 두서없는 행동을 예상하는 건 내 특기인 것이다.”
“그렇네. 신타로의 그런 점이 좋아.”
생긋 웃으며 아카시는 장기판을 도로 열었다. 빼곡이 들어찬 마흔 개의 장기말은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3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제 이 장기판을 쓸 일은 없겠지. 가만히 그 안에서 한 개의 말을 빼내 들고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앞으로 다가갔다. 굳게 주먹을 쥔 그의 왼손을 들어, 테이핑 자국이 선명한 그 손 안에 장기말을 하나 쥐어주었다. 각행.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언제나 그런 말이었다.
“이건 선물. 이별을 기념해서.”
“상당히 일방적이군.”
“그럼 졸업 선물이라고 쳐 둘까?”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네게 하고 싶었던 말도 어차피 같은 것이니까.”
무슨 말? 아카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척 곤란한 사실을 깨달았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말한 ‘이별‘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헤어지자는 소리야?”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아카시는 웃었다. 헤어진다니? 너와 내가? 3년간 지속해 온 이,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관계를 오늘로 끝낸다고? 웃기지 마. 처음으로 미도리마라는 존재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아카시는 웃음으로 그것을 애써 포장했다. 그렇게 한 것은 미도리마의 태도가 너무도 덤덤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감정을 먼저 드러낸 쪽이 진다. 미도리마가 덤덤함으로 자신의 각오를 감싸고 있다면, 자신은 억지 웃음으로 분노를 지울 것이다.
“왜?”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안 될 게 뭐 있어? 신타로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신타로를 좋아하지. 연인이 되는 데 그 이상의 감정은 필요없다고 말한 건 분명 너야, 신타로.”
그랬다. 이 장소에서 미도리마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분명 미도리마는 그렇게 말했다.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올린 건 아카시였지만, 그 감정을 교제 신청으로까지 끌고 간 것은 미도리마였다. 친구로 있을 수 없는 이유를 대 보라는 아카시의 요구에-그 당시 아카시는 그 상황을 꽤나 즐기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한 대답이 그랬다. 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연인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아카시는 그 이유를 납득했고, 미도리마와의 연인관계를 받아들였다. 그랬으니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면, 좋아하는걸.
네가 어디에 있든, 앞으로 내 적이 될 수밖에 없든 간에, 널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인걸.
“나는 신타로의 연인이라는 포지션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널 적으로 보지 않을 수도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것이다.”
“안 돼. 이건 양보 못 해.”
“너는 진심이 아니야. 네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쎄, 어떨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직도 미도리마 신타로를 좋아하는지, 그의 어떤 면에 집착하는지. 하지만 여기서 포기해 버리기엔 너무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미도리마와 보낸 지난 3년이, 그에게 바친 3년간의 마음이, 자신을 향한 미도리마의 한결 같은 눈빛이. 그것으로 충분했기에,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앞에서 끝까지 미소를 지우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네 연인이야. 헤어지자는 말은 납득하지 않겠어.”
“아카시……!”
“좋아해, 신타로. 그 마음은 변함없어.”
그 말에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해도 아카시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카시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의 연인이든, 적이든, 미도리마에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카시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거기서 나오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투쟁심 정도는 얼마든지 끌어안을 수 있었다.
왜냐면, 내가 원하는 건.
뭐야?
아카시는 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연습 시합은 당연하게도 슈토쿠 고교의 압승이었다. 20점차를 거뜬히 뛰어넘는 점수차에 환하게 웃으며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하이파이브를 신청하는 타카오 카즈나리. 그리고 할 수 없다는 듯- 하지만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자신을 향한 그 손을 가볍게 내리쳐 주는 미도리마 신타로. 두 손이 마주친 순간 아카시는 분명히 보았다. 상대의 모든 것을 궤뚫어보는 그의 능력, 천제의 눈으로. 미도리마의 무뚝뚝하고 덤덤한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한 줄기의 미소.
왜, 네가 웃고 있지?
아카시가 기억하기에 미도리마는 자신의 승리에 기쁜 듯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농구란 자신의 진인사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지금에 와서는 아카시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터였다. 그런데- 피땀 흘려 얻어낸 승리가 정말로 값지다는 듯, 그 과정에서 겪은 희열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기쁘게 웃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네가 농구를 즐기고 있는 거야? 그건 네 진인사에 불과해.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기겠다는 진인사대천명의 수단. 고작 그것뿐인데, 너는 즐겁다는 거야? 새로운 파트너와 호흡을 맞춰 이뤄낸 성과가? 그 의문이 머리를 스친 순간, 아카시 세이쥬로의 안에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가 순식간에 변했다. 빠르게, 그리고 무척 잔인하게. 눈앞에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너. 내가 모르는 시간을 내가 모르는 상대와 보낸 너. 그런 신타로는 몰라.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싫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웃지 마. 나 외의 다른 포인트 가드와의 호흡에 기뻐하지 마. 그런 건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네가 아니야. 너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해. 나를 이기는 것만이 네 전부여야 해. 왜냐면 나는 네 그런 모습을 좋아했으니까.
“그런 건 싫어, 신타로.”
만족하지 마. 더 앞을 바라봐. 나는 네가 따라오리라 믿고, 네 앞을 힘차게 달려가고 있어. 나를 붙잡으려고 발버둥쳐. 내가 얼마나 많은 절망을 너에게 선사하더라도 좌절하지 마.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서, 내 뒤를 쫓아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좋아할 수가 없어.
어느새 아카시는 연습 시합 장소를 빠져나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학교를 걸어 교문으로 나가면서, 아카시는 난생 처음으로 패배감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그것을 패배감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모습 같은 것은. 그리고 그 현실 앞에 냉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굳히면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뱉어내지 않으려 애썼던- 하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마디를, 차갑게 내던졌다.
“신타로 같은 건, 정말 싫어.”
내 의도를, 목적을 벗어난 너 같은 건 싫어.
그러니까 되돌려 줄게. 나만을 바라보았던 너의 모습으로.
그렇게 결심한 순간 아카시는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은 미도리마 신타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충동이, 그의 즐거움과 기쁨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이, 사랑일 리가 없다.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 아카시는 어떠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망을 선사해 주겠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진인사를 부정하고, 그가 여태껏 느껴 왔던 희열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말겠다. 이후 있을 슈토쿠 고등학교와의 시합은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결심을 하며 발을 내딛는 아카시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거짓 미소마저 완전히 집어던져 버린 그의 얼굴은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를 소름끼치게 할 정도로 냉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며칠 뒤, 슈토쿠 고등학교와 라쿠잔 고등학교의 시합에서였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같은 건 더는 필요 없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뿐 전부 전부 전부 전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뿐
전부 전부 전부 전부
5.
각오
“묻겠는데, 미도리마는 만약 부주장이 된다면 뭘 하고 싶어?”
아카시의 갑작스런 질문에 미도리마는 마시던 단팥죽을 입술에서 떼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부주장? 내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미도리마의 동요를 아카시가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실은, 니지무라 선배가 주장 자리를 내게 물려주겠다는 말을 했어. 감독님이 부주장은 나보고 선발하래. 아카시의 부연 설명은 중요한 한 마디가 빠져 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을 보필할 부주장으로 미도리마 신타로를 골랐다는 그 한 마디. 마치 미도리마의 대답에 따라 그 선택지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은 네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나는 그걸 서포트해야겠지.”
“난 그런 뻔한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
그럼 무슨 대답을 바란 것일까. 미도리마는 가만히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괜히 아카시의 생각을 읽으려 발버둥치는 것보다 아카시가 입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임을 그는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에 아카시는 재미없어, 하고 심드렁하게 반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삼키지도 않았다.
“내가 농구부에 들어온 건 이곳의 이상이 내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야. 백전백승. 승리하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이고, 나는 주장으로 그들을 이끌 책무가 있어. 그래서 주장의 책임을 맡게 된 걸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미도리마. 너는.”
아카시는 만지작대던 장기말을 탁, 하고 소리내어 놓았다. 왕.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정말로 어울리는 패.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일까. 평범한 졸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아카시가 자신을 선택할 이유도 없었다.
“너는, 내 생각에 동의할 수 있겠어? 내가 바라보는 곳을 너 역시 똑같이 바라보고, 나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어?”
그제야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심중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다. 부주장이 되어 자신을 서포트할 생각이라면, 절대로 자신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고.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도전 의식을 품고 ‘주장’인 자신의 말에 일일이 반대하고 나서거나 대립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그것은 팀의 화합을 위해서가 아닌, 아카시 세이쥬로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그 모든 것을 읽은 순간, 어째서였을까. 미도리마는 순간 아카시에게 맞서겠다는 의지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처럼 장기 대국을 하고 성적 경쟁을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가장 중요한 곳에서 그의 반대편에 서서는 안 되겠다는.
“불안한가?”
“그다지. 다만 만의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굉장히 귀찮아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마지막 반항의 싹까지 완전히 잘라 버리는 한 마디에 미도리마는 할 말을 잃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주장인 이상 부주장이라는 자리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타인의 서포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도 분명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카시라는 왕 앞에 미도리마 신타로의 위치는, 그래. 마지막 공격을 위해 준비해 두고 있는 각행 정도일 것이다. 비참한 자리로군. 그런 생각이 순간 미도리마의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그보다 더한 충동이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의견을, 억지로 억누르면서까지 그 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충동.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 있고 싶다.
그 생각에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장기말을 만지작대는 아카시의 손을 잡았다. 뜬금없는 행동에 아카시가 두 눈을 크게 떴지만 미도리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 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말보다 더 강하고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미도리마는 얼마든지 자존심을 버릴 수 있었다.
“부주장이 되면, 네 옆에 머물 수 있겠지. 너와 같은 곳을 보고, 너를 따라 걸을 수 있겠지.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이든 쓰겠다.
“아카시,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네 옆에 있고 싶다.”
미도리마의 그 ‘고백’에, 아카시는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는 곧 자리를 잡았고,
이전까지의 위압적인 빛을 전부 지운 채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미도리마에게는 다소 의외이게도, 다소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고백에 아카시 세이쥬로가 동요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꽤…… 괜찮은 각오잖아, 미도리마.”
이윽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손을 세게 마주잡았다. 좋아, 그렇게 해.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바보처럼, 그날의 미도리마 신타로는 오직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손에 넣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신쨩, 뭐 해? 감독님이 물어보시잖아. 신쨩!”
타카오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을 때 미도리마는 퍼뜩 머나먼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로 되돌아왔다. 현재 그가 있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체육관 안에서는 슈토쿠의 감독과 다른 부원들이 전부 미도리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중요한 회의 시간에 딴짓을 하다니, 당장 파인애플로 머리를 때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미야지 키요시의 매서운 눈빛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부원들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미도리마를 걱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한 뒤 미도리마는 감독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기를 기다렸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어떤 선수냐고 물었다.”
아, 그랬다.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정신이 과거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심하기는. 자신을 꾸짖으며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다.
“강합니다. 보통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은 활약을 하기보다는 팀을 조율하고 움직이는 데 특화된 선수들이지만, 아카시에게 포지션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에이스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아카시에게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
“그 녀석은 자신이 승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노력이든 하죠. 원래 가지고 있는 신체 능력과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케이스입니다. 상당한 강적이죠. 분명 이번 시합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슈토쿠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작전을 몇 개씩 준비해 두고 있을 겁니다.”
으음, 하고 감독이 말끝을 흐렸다. 그를 둘러싼 부원들의 눈에는 저마다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상대는 라쿠잔 고등학교.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없이도 이번 인터하이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의 강호다. 거기에 방금 설명한 아카시의 강함이 더해진다면, 시합은 결코 만만치 않은 양상을 보일 것이었다. 그나마 수월하게 윈터컵 준결승전 티켓을 획득한 슈토쿠에게는 이번 시즌에 처음으로 만나는 강자라고 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미도리마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부원들을 둘러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질 생각은 없다. 지지 않겠다. 그것은 팀의 에이스가 반드시 지녀야 할 자신감이라는 덕목이었다. 덕분에 부원들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안색의 기운이 어렸고, 감독 역시 심각하게 굳혔던 얼굴을 풀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 뭔가 생각해 둔 방향은 있나?”
“있습니다.”
“좋다. 그러면 아카시 세이쥬로는 네게 맡기겠다. 뭐 필요한 게 따로 있으면 말해라.”
“타카오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없습니다.”
갑자기 지명당한 타카오가 옆에서 엑? 나? 하고 정색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미도리마도 감독도 이미 타카오의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좋아. 딱 잘라 대답한 감독은 바로 리스트를 넘겨 라쿠잔의 다른 선수로 화제를 돌렸다. 여전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카오에게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에게는 미안하게도 미도리마는 지금 타카오를 배려해 줄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는 다시 과거로,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말했던 ‘각오‘를 바꾸어 버렸던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를 이기겠다, 라…… 그 말은, 나하고 적이 되겠다는 거네.”
‘적’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먼저 쓴 사람은 아카시 쪽이었다. 하지만 미도리마의 생각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카시의 씁쓸한 표정과 시무룩한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었다. 대신 아카시를 도발하기에는 충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너는 내가 손을 놓고 있기를 바라나? 하나도 재미없을 텐데.”
“……확실히 그건 신타로답지 않지.”
아카시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언젠가 본 적 있었던 장기말을 만지작거리며 아카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아카시를 바라보며, 미도리마는 그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을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의 대결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아카시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미도리마와, 그것에 당황해하면서도 그에 맞는 대안을 찾기 위해 힘을 끌어내는 아카시.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결말이었다. 미도리마가 자신의 승리를 꿈꾸고 있듯, 아카시도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다는 듯 그려내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왔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먼저 발을 들인 것은 미도리마가 아니라 아카시 쪽이었으므로.
“나를 이기겠다는 건, 내가 모토로 삼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는 뜻이야.”
“알고 있다.”
“정말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어? 너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하는 거야. 내 삶의 이유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거라고.”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가 죽어도 상관없어?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날 보낼 자신이 있는 거야?”
그런 질문을 하는 아카시는, 과거의 팀메이트이자 자신에게 등을 돌린 미도리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언젠가, 자신의 곁에 있기 위해 고백의 말을 올렸던 미도리마였다. 너는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했어.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이건 배신이야. 자신을 바라보는 색 다른 두 눈동자가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을 미도리마는 알았다. 알았지만, 외면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기기 위해 인사를 다하겠다고 정한 자신의 각오는 그런 애처로운 눈동자가 부숴버리기엔 너무도 견고했다.
“네 숨이 끊어진다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설득할 수 없어. 내 의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포기해라. 그리고 나와 맞서. 내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부주장 자리를,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전까지 자신이 품어 왔던 아카시에 대한 경쟁심과 적의를 고백의 말 뒤에 숨겼다. 그것이 아카시의 옆에 있기 위한 미도리마 신타로의 각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차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지금도 똑같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카시를 이길 수 없다. 그를 이겨서, ‘처음으로 패배를 가르쳐 준다’는 언젠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신타로는,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네.”
“……그래. 나는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또 거짓말을 입에 올리고 만다. 자신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아카시의 실망스런 표정과 상처받은 눈빛을 외면하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을 위해서.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한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실을 나갔다. 닫혀버린 문과 멀어져 가는 아카시의 발소리가 미도리마의, 마지막 남은 양심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리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양심이 간신히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던졌다.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아카시.”
그것이 미도리마 신타로의 각오.
그리고, 오직 아카시 세이쥬로만을 위한 사랑.
4.
初音ミク - streaming heart
작은 방이 있다. 그 곳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아카시 세이쥬로와, 아카시 세이쥬로. 거울로 비춘 듯 똑 닮은 두 사람의 차이는 오직 한 쪽의 눈이 색 바랜 금색이라는 것 뿐이었다. 사랑해. 한 명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금빛을 향해 중얼거렸다. 응, 나도 사랑해. 다른 한 명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 금빛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너와 나는 늘 함께야.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완벽해. 두 명의 아카시 세이쥬로가 손을 마주 잡았다. 거울에 가까워지듯 천천히 눈앞의 입술을 향해 몸을 기울였을 때.
쾅.
그 세계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 아냐?”
눈앞에 서 있는 존재에게, 아카시 세이쥬로는 경멸과 비웃음을 가득 담은 미소를 던졌다. 그럼에도 눈앞의 존재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네가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 정도는 이미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두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아카시가 내심 바랐던 동정이나 연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동정해. 너를 버리고 간 나를, 수도 없이 잔인한 말로 너를 상처준 나를, 그렇게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던 완벽한 승리를 완전히 부정당한 나를, 동정해. 네가 그래준다면 나는 너를 정말로 증오할 수 있어.
“비참한 걸 좋아하나 봐. 여태까진 전혀 몰랐어. 그렇게 모진 말로 거절당해 놓고서도, 다시 나를 찾아올 마음이 들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네가 걱정됐으니까.”
“하.”
짧게 웃고서, 아카시는 그의 시선에서 눈을 돌렸다. 피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네 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연출한 움직임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아카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진지한 시선이 얼굴을 태워버릴 듯 내리꽂혀 와, 아카시는 점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그 말을 처음 했을 때부터 늘 그랬다.
“그래, 부정하진 않겠어. 네게 고백받았을 때, 나는 정말 기뻤어. 네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진지하게 ‘좋아한다’고 한 이상, 그것은 진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랜 시간 고민했을 테고, 망설이기도 했겠지. 하지만 마음이 정해진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았어. 그래서 너는 늘 내 옆에 있어줄 거라고 생각했지. 바보 같은 착각이었어.”
가슴속에 쭉 잠들어 있었던 또 하나의 자신이 눈을 뜬 날, 아카시 세이쥬로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쌓아야 하는 승리의 탑에는 동반자가 필요없다는 것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연인은 자신의 승리를 흔들기 위한 도전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카시에게 끊임없이 도전해 오지 않았다면 아카시의 감정은 그런 식으로 변질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카시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 이상 그와 함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 그가 옆에 있다면 분명 든든하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존재의 근본을 흔들어 놓을 위험도 늘 옆을 맴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난 너를 찬 거야. 너는 내게 있어 더는 필요없는 존재였으니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내겐 더 이상 네가 필요 없어, 신타로.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아카시였다. 언제나 제 옆에서 제 결심을 지탱해주며 다른 사람들을 관리해 주었던 부주장도, 몸을 묵직하게 짓눌러 오는 부담감에서 그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든든한 두 팔도, ‘좋아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며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 주었던 목소리도, 그 모든 것을 주었던 감정의 근본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혼자서도 설 수 있는 존재였으며, 오롯이 홀로 완전해야만 했다. 그런데 누군가를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아직 날 좋아할 수 있어?”
“좋아한다는 것이다.”
“신타로, 매저야? 아니면 바보?”
“내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 그런 평가를 들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으니까.”
평생 비참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감각은 모른다. 상대가 들려주는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 상대를 저버렸을 때도, 그 상대의 곁에 자신과는 전혀 다른 파트너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비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버린 것이다. 누가 주워가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의 냉정함이 상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꼈다.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을 차갑게 거절했을 때도, ‘충고’라는 이름의 벽으로 그의 감정이 이 이상 진행되는 것을 막으려 했을 때에도, 아카시 세이쥬로가 느낀 것은 오로지 승리감 하나뿐이었다. 나는 너를 이겼다.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었던 과거의 내 자신에게 이겼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고통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완벽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아카시는 그의 절박함을, 진심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상처 입으면서도 다시 일어서서 아카시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원동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야, 그건 이상하잖아.
나는 지금, 첫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해도 이렇게 힘든데.
“……거짓말이다.”
“뭐가?”
“이해할 수 없다면, 너는 왜 나를 찾아왔지?”
패배의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그럼에도 곧 입을 모아 ‘괜찮다’고 해 줄 동료들을 내버려 둔 채, 이제는 자신과 더 이상 관계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를.
“왜 내게 찾아와서, ‘아직도 나를 좋아하냐’ 는 질문을 던진 거지?”
“그건.”
그는 반드시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리의 기쁨에 몸부림치는 세이린 고교의 사람들을 축하해 주는 것 대신에, 첫 패배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자신을 찾아와 ‘괜찮으냐‘는 한 마디를 던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미도리마 신타로는 올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패배하더라도 너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미도리마에게 먼저 선언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미련을.
네가 나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그건…….”
너를 비참하게 만들어, 나를 싫어하게 만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적당히, 이 감정을 끊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건…….”
하지만 그 생각을 무엇 하나, 아카시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왜지. 그렇게 굳은 결심을 했는데. 이제는 전부 그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패배한 순간 너를 떠올리고 마는 약한 나와 작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에 여기까지 온 건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주먹을 휘둘러 미도리마의 얼굴을 친다면, 그는 자신을 포기해 줄까. 자신의 거절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등을 돌려 줄까.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 그건.
싫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갑자기 끌어안았다. 단단한 어깨가 얼굴에 부딪혔다. 그 순간 아카시는 똑똑히 보았다. 그의 어깨가 무언가로 젖어들어가는 것을. 그가 걸치고 있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주홍빛 체육복이 원래 색보다 더 선명한 색을 띠는 것을. 그제야 아카시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너를 놓지 않아. 포기하지 않아. 네가 몇 번이고 내게 벽을 세운다면, 인사를 다해 그걸 부술 뿐이다.”
“누가…… 그런 거 바랐다고…….”
“그럼 나를 뿌리쳐라. 네 의지가 그렇게 확고하다면, 나를 밀쳐내면 된다. 놓아줄 테니까.”
지금 누굴 바보로 알아. 아카시는 이를 악물었다. 밀쳐내 줄 테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쏟아부어 너를 상처입힐 테다. 다시는 나를 따라오겠다는 생각 따윈 품지 못하도록.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지워낼 수 있도록. 아카시는 주먹 쥔 손을 올렸다. 이것으로 얼굴을 치면 끝이다. 그러면 된다. 그러면-
“좋아한다, 아카시.”
그러면, 모두 끝낼 수 있을 텐데-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쭉 기다려 왔다. 좋아해.”
나는.
아카시는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굳게 쥔 주먹이 점점 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 손이, 단단히 자신을 감싸 안은 미도리마의 등을 끌어안는 것을 자각했다. 알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더 이상 그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신타로…….”
애처롭게 열린 입에서 눈물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신타로…….”
우리가 부서졌다.
지상 최고의 ‘적’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마음 안으로 침입했다.
기억해? 우리의 첫만남.
나는 단상 위에 서 있었고, 너는 수많은 학생들 틈에 섞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이상하게도 그 수많은 학생들 중 유난히 너의 얼굴이 눈에 띄었던 것이 기억나. 너는 그 진지하고 차가운 시선을 내게 보내며 모종의 적의 같은 것을 발산하고 있었지. 당시의 나는 그 눈빛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 여태까지 수도 없이 거쳐갔던 도전자들과 너는 완전히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지만, 왜였을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왠지 나는 너와 굉장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네 눈에서 보이는 건 한 번 패배한다고 해서 꺾일 것 같은 눈빛이 아니었거든. 호기심. 그래, 그 단어가 가장 옳은 표현 같아. 나는 네가 누구인지, 왜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앞으로 너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그 짧은 순간 몇 번이고 상상했어. 가장 좋은 친구로, 라이벌로,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줄 만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어. 그건 분명 내가 처음으로 ‘미래’를 이 눈으로 본 순간일 거야. 그 직감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 되지만- 요즘 나는 생각하곤 해. 그날 너를 만난 건 운명이었던 거야.
너라는 존재에게 사로잡혀 평생 벗어날 수 없을 운명.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아카시.”
문을 산산조각내고 제 눈앞에 나타난 운명의 상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카시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홀로 남겨진 또 하나의 자신이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저 손을 잡고 이곳을 나가면 너는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혼자서도 괜찮았던 너를 부정하고, 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거라고. 아카시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하지만 나는.
“이제, 너와는 작별하고 싶어.”
혼자로 있는 건 전혀 즐겁지 않으니까.
아카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도리마 신타로의 손을 잡았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끌어당기는 미도리마의 얼굴이 두 눈 가득 담겼다.
그 순간.
그는 세상 최고의 행복을 느꼈다.
3.
미도리마 신타로와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증언
1. 타카오 카즈나리
안녕- 연락 줘서 고마워! 가장 먼저 내 이름이 거론된다니 영광인데. 하지만 조금 의외다. 그 두 사람 일로 나한테 질문을 던진다면 당연히 신쨩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뜬금없이 아카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뭐, 이해해. 내가 신쨩에 대해 증언하면 너무 재미없지. 그럼 신쨩 얘기는 누구한테 물어볼 거야? 설마 라쿠잔의 사람들한테? 그만두는 게 좋을걸. 지금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신쨩을 어떻게 갈궈야 잘 갈군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데! 하하! 뭐 됐어. 그럼 시작한다.
아카시는…… 솔직히 말해 얼굴을 마주한 건 세 번 정도밖에 안 돼. 첫 번째는 당연히 윈터컵의 시합에서였고, 두 번째는 윈터컵이 끝난 합동 합숙에서였고, 세 번째는 아카시가 신쨩을 만나러 슈토쿠로 직접 왔을 때였지. 내 감상은 말야,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진다는 거였어.
처음 봤을 때 아카시는 정말 무시무시했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걸. 그 작은 몸에서-아, 이 얘기 아카시한테 직접 하면 안 돼. 나 혼난단 말야-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나하고 신쨩을 바라보는 눈조차 곱지 않았으니까. 그런 적의는 쿠로코 이후로 처음이었어. 아니, 상대가 아카시인만큼 쿠로코보다 훨씬 강한 적의였다고 봐도 좋겠지. 똑똑히 기억해. 그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올리고, 신쨩 옆에 누군가가 붙어 있다는 게 무지막지하게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날 노려보는데- 그건 정말 무서웠지. 거기가 시합이 진행될 코트 위가 아니었다면 당장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어. 게다가 공을 쥐고 내 앞으로 다가섰을 때는 말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 눈앞을 날아다니는 벌레처럼 날 보고 있더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당장 꺼져- 라고 말할 것 같았다고. 스피드나 기술도 그랬지만, 그 눈빛에 쫄아서 단번에 뚫려 버렸지. 선배들이 들으면 날 반쯤 죽여놓을 말이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카시가 날 어떻게 보는지 전혀 몰라서 그래. 시합 내내 날 노려보는 눈동자가 얼마나 무섭던지. 신쨩한테 패스하는 내내 심장에 구멍 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을 정도였다니까.
그런데 두 번째 봤을 때의 아카시는 조금 위태로워 보였지. 왜, 라쿠잔이 졌잖아. 나는 쿠로코랑 카가미한테 축하한다는 메일 보내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 옆에서 신쨩은 마치 제 일처럼 아카시를 걱정했던 게 인상에 남아서 똑바로 기억해. 아카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신쨩한테서 대략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법 심각하더라고. 그래도 합숙 때는, 자기가 팀을 이끌어야 하는 주장인 만큼 애써 꿋꿋하게 있으려는 게 보이더라고. 라쿠잔 레귤러들은 저마다 그런 아카시를 이해한다는 표정이었지만, 다른 부원들 시선도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고. 예전에 미야지 선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 그 라쿠잔 선수들이 주장으로 인정했을 정도니 실력이 대충 예상이 된다고. 하지만 그걸 통째로 부정당한 이상, 이전 같은 권위는 지닐 수 없었겠지. 그래도 선배들 이름을 턱턱 부르거나 거침없이 말을 놓는 건 아카시 나름대로의 자기 방어가 아니었을까. 이전처럼 ‘친위대‘ 같은 느낌은 안 났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했어. 응, 적어도 나는 말이야. 하지만 신쨩은…… 아, 신쨩 얘길 잠시 하는 건 봐줘. 어쨌든 신쨩은 연습하는 내내 아카시한테서 눈을 못 떼더라고. 아카시가 잘 지내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지켜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어. 반면 아카시는 한 번도 신쨩 쪽을 바라보질 않더라고. 옆에서 보고 있자니 참 안쓰럽더라. 너희는 대체 왜 그렇게 진전이 없는 건가 싶어서. 어쨌든 합숙은 그렇게 끝났는데…… 얼마 후에 아카시가 슈토쿠로 신쨩을 만나러 찾아왔어. 응, 그게 세 번째 만남.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쿠로코한테 메일로 들었는데, 그 날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동창회가 있었다면서? 같이 가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아카시가 찾아오겠다고 전화해서 신쨩이 당황했던 걸 기억해. 그 때의 아카시는…… 정말 불안해 보이더라고. 내가 합숙 장소에서 봤던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정말 전부 연기였구나 싶더라니까. 그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한 번의 패배쯤은 아카시에게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교문에 기대 서서 핸드폰을 꼭 쥐고 신쨩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표정. 하지만 정작 신쨩 얼굴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나도 신쨩도 그런 아카시를 보고 놀랐어.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 굳어진 반면 신쨩은 정색하고 아카시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는 점일까. 신쨩이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자마자 아카시가 고개를 홱 돌리는데, 뭐랄까…… 난 사람의 얼굴에서 그렇게 겁에 질린 기색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난 걸 직접 보는 사람의 표정이랄까. 신타로, 하고 신쨩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그야 무서웠겠지. 처음으로 자신을 패배로 이끈 상대를, 그 이후로 처음 만나는 셈이니까. 쿠로코는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랬지만 아카시는 그렇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말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 품에 와락 끌어안기는 게 말이 돼? 나 그거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 물론 제일 놀란 건 신쨩이었겠지만. 주변 시선이 따갑게 쏟아지는데 내가 다 민망하더라니까. 신쨩이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먼저 가겠다고 했는데, 그제야 아카시는 내가 신쨩이랑 같이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더라고. 불안한 눈으로 살짝 날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피하고 신쨩 품에 다시 숨어버렸어. 아카시한테 뭐라고 인사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으니 할 말 다 했지. 내가 인사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가버렸어. 신쨩이 손을 잡아끌고 아카시를 데려가는데,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 나중에 쿠로코한테 들어보니 그 두 사람, 동창회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일 것 같아서 아무 말 안 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뒤로 내가 아카시를 만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아. 그 날 뒤로 거의 매일같이 메일을 주고받고 있는 모양이니까. 신쨩은…… 조금씩 웃게 되었어. 아직 아카시가 어떻다거나 두 사람이 어떤 관계가 됐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내게 해 주지 않지만,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둘은 조금씩 변하고 있고, 점점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잘 될 거야. 응, 그렇게 믿어. 언젠가는 신쨩에게, 연인 자랑이 너무 심하다면서 놀려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
2. 미부치 레오
대체 왜 내가 그 마음에 안 드는 안경남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네. 너도 상식적으로 나한테는 세이쨩에 대한 걸 물어보란 말이야. 세이쨩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라면 날을 새서라도 들려줄 수 있다구!
뭐, 할 수 없지. 네가 흥미 있는 건 그런 게 아닐 테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어. 내가 그 멀대- 미도리마 신타로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오직 세이쨩의 입을 통해서 들은 사실 뿐이니까.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부주장으로 세이쨩 옆에 오래 머물렀다는 거랑, 세이쨩이 학교에서 가장 마음을 열고 가까이 대했던 친구라는 거랑, ……지금은 세이쨩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거 정도.
지켜봐 왔다면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이쨩,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 물론 우리들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는 애는 아니니까 참고 있었겠지만, 학교 내에서 세이쨩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거든. 한심한 소리지. 정작 세이쨩과 함께 싸워 온 우리들은 알고 있어. 세이쨩이 천재라는 제 호칭에 만족하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하는지. 나도 코타로도 에이키치도, 세이쨩의 그런 점을 존경하고 따르게 된 거니까. 한 번의 패배는 상관없어. 언제든 다시 세이쨩과 함께 코트에 설 수 있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세이쨩에게도 그렇게 말해줬지만, 안타깝게도 세이쨩은 그 말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야. 고맙다고 말하면서 웃어주기는 했지만 우리 앞에서 약한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지. 자기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저 짐작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언젠가 세이쨩이 우리에게 기대 온다면 그걸 받아줘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 금쪽같은 기회를 망할 놈의 안경남…… 아니, 미도리마 신타로가 빼앗아 가 버린 거야.
그 녀석에게 기대고 싶어진 세이쨩의 심정도 이해해. 우리가 세이쨩이랑 보낸 시간과 그 녀석이 세이쨩만 바라본 시간을 비하면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라는 건 분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듣자하니 그 녀석이 농구를 계속하는 이유는 오직 세이쨩을 이기기 위해서라면서? 농구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농구가 아니면 제 재능을 꽃피울 분야가 없는 것도 아니야. 그 정도로 진심이니까 세이쨩도 녀석을 의지한 거겠지.
그 날……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동창회가 있었던 날, 세이쨩은 걱정스런 기색으로 도쿄로 떠났어. 괜찮으냐고,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계속 메일을 보내 봐도 답장이 없어서 그 날 하루종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 그런데 다음 날 등교한 세이쨩 눈이 엄청나게 부어 있는 걸 본 순간 내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 봐. 그 세이쨩이 다음날 멀쩡한 얼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펑펑 운 거야. 대체 동창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란 심정으로 텟쨩한테…… 아, 세이린의 키요시 텟페이 말야. 그 녀석한테 메일을 보내서 따졌거든. 그랬더니 동창회에는 가지 않았다잖아. 그럼 대체 어디서 울었을까. 몇 번이고 묻고 싶었어. 세이쨩이 불쾌해할까봐 말을 못 꺼낸 것뿐이라고. 그 답을 알게 된 건 그 멀대가 라쿠잔을 찾아왔을 때야. 세이쨩이 걱정돼서 왔다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단번에 알겠더라고. 그날 세이쨩은 그 녀석을 찾아갔었다는 거. 그리고 동창회에 참석하는 대신 제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그 녀석에게 털어놓는 것을 택했다는 거. 속은 쓰렸지. 힘들었어. 나는, 코타로나 에이키치는, 세이쨩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한다는 건 세이린에게 진 것만큼이나 비참한 사실이었어.
그래도 괜찮아. 그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에게 의지할 수 있어서, 다시 세이쨩이 웃고 있잖아. 이전보다 훨씬 평온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는 태도도 전보다 훨씬 누그러지고 온화해졌어. 난 그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그 점 하나만큼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감사한다고 생각해.
3.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다들 말야- 아카칭이랑 미도칭이랑 나를 세트로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 미네칭이랑 키세칭이랑 쿠로칭이 붙어다녔던 것처럼, 우리 세 사람도 늘 함께였을 거라고. 하지만 나 그건 착각이라고 생각해.
미도칭은 일단 날 굉장히 귀찮아했던 것 같아. 물론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건 아니었고 그럴 사람도 아니었지만, 아카칭이랑 단둘이 있을 시간을 늘 내가 방해한다는 인식은 있었을 걸. 둘이 있는데 내가 찾아와서 아카칭한테 매달리거나 하면 왜 끼어드냐는 듯 불쾌하게 쳐다보기도 했고, 또 왔냐면서 짜증 내는 경우도 많았어. 반대로 아카칭은 나한테 굉장히 호의적이었지. 내가 매달리면 무겁다고 뿌리치기는 했지만 저리 가라고는 하지 않았고, 미도칭이랑 단둘이 있는 것만큼이나 내가 옆에 있으면 즐거워했어. 그게 마음에 들어서 괜히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끼어들고 그랬었어. 미도칭이 짜증을 내면 아카칭이 막아준다는 구도가 좋아서. 아카칭이 미도칭보다 나를 우선하고, 미도칭도 못 이기는 척 나를 받아주는 그 상황이 좋아서.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역시 그냥 방해꾼일 뿐이었어.
아카칭은 나한테 늘 자상했지만, 미도칭이랑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명확하게 나한테 거부 의사를 밝혔었어. 그 미도칭이 당황해하면서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다고 변호해줬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미도칭 역시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카칭을 말리지는 않았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나를 빼놓고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지, 난 아무것도 몰라. 지금도 모르겠어. 나를 물리쳐 놓고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대체 무슨 감정이 그 둘 사이를 오가고 있었을까.
그래도 말야, 난 그 두 사람을 좋아했어. 아빠처럼 엄격하면서 은근히 챙겨줄 건 다 챙겨주는 미도칭이랑, 엄마처럼 자상하면서도 엄격할 때는 엄격한 아카칭이. 그 두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형들이나 누나들이랑 있는 것보다 재미있었어. 그래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지금이 조금 아쉽기도 해. 그래도 난 괜찮아. 내 옆에는 무로칭이랑 마사코칭이랑 다른 사람들이 있고,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대화할 수 있으니까. 그냥 그 두 사람이 내 옆에 없는 것뿐이야. 내심 동창회 때 두 사람이랑 다시 만나서 이전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했어도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다고 생각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이니까, 두 사람이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아카칭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미도칭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늘 웃고 있기를 바라. 진심이야. 그리고 때때로, 나를 생각해 준다면 좋겠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여기까지야.
4. 니지무라 슈조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난 아카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부주장의, 더 나아가서는 주장의 역할을 맡기에 부족하지 않은 존재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의 지나칠 정도의 마이페이스라던가 힘든 일이 있어도 상담 하나 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은 싫어했어. 오히려 나는 미도리마 쪽이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딱딱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제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나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다 하는 점은 꽤 좋아했어. 실제로 바른 말만 하는 녀석이었고.
그래서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동창회가 있다고 했을 때 가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했었어. 미국에서 소식만 전해 들은 거지만, 내가 농구부에서 은퇴한 그 1년 간 농구부에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더라. 아카시는 변했고, 미도리마는 그런 아카시를 지켜보기만 했고. 아카시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어. 그 녀석은 나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승리를 원하고 있었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큼 주변 사람들한테 잔인한 말도 서슴지 않고 했으니까. 반면 미도리마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녀석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전부 말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특히 그 뭐냐? 111대 11 사건? 그걸 미도리마가 말리기는 커녕 그냥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정말 화가 났어. 당장 달려가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을 정도로. 근데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까 이해는 되더라. 미도리마에게는 아카시를 말릴 힘이 없었을 거란 걸. 부주장이라는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 녀석의 성격이 무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카시의 변화에 누구보다도 충격 받은 사람이 미도리마였기 때문이었을 거란 걸. 내가 아카시하고 같이 보낸 시간은 그 녀석에 비하면 별 거 아니겠지. 나는 아카시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냥 주장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키워내는 게 내 임무라는 생각으로만 아카시를 대했으니까. 하지만 그 동안 미도리마는 수많은 아카시를 봐 왔어. 어떤 안건에 그 녀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무엇을 보고 기뻐하고 무엇을 보고 슬퍼하는지, 가정 사정은 어떻고 농구부에 있는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도리마라면 전부 지켜봐 왔을 거야. 주변 사람들한테 무심하고 오직 제 진인사만 쫓는 놈이었지만, 아카시만큼은 예외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역시 동창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아카시한테는 이전처럼 잔소리를 하고, 미도리마에게는 포기하지 말라고 힘을 북돋아 주고 싶었어. 이미 은퇴해 버렸고 우리가 함께였던 테이코는 더 이상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선배의 역할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귀국해서 동창회에 나갔더니 그 두 녀석이 제멋대로 안 나오겠다고 했다더라. 쿠로코가 메일을 받고 어이없어했던 게 지금도 눈에 선명해. 물론 어이없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내가 기껏 만나러 와 줬더니 안면몰수하고 모습을 감춰? 용서 못할 일이었지. 당장 전화해서 튀어오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쿠로코 말로는 두 사람 다 핸드폰 전원을 꺼 놨다고 하더라고. 이것들이 진짜, 건방지기 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결국 두 놈 다 동창회엔 안 나타났지만, 난 결심했어. 언젠가 시간을 내서 그 두 녀석을 만나러 갈 거라고. 동창회 일부터 시작해서, 지난 1년 간 그 녀석들이 했던 얼빠진 행동들을 주먹으로 가르쳐 주겠다고.
그리고, 지나친 간섭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 녀석들이 같이 있는 걸 보면 뿌듯했다고. 늘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아카시의 허술한 부분을 미도리마가 지켜 주고, 수치심이라는 걸 전혀 못 느끼는 미도리마 대신 아카시가 부끄러워해 주고,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늘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제 3자인 나라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삶을 살길 바란다고, 진심으로 말이야. 물론 내가 말한다고 귀에 새겨 들을 놈들이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그 녀석들은 같이 있어야 해. 보기 좋잖아. 서로 좋아 죽는 연인들이 내가 아끼던 두 후배들이라는 건 조금 배알 꼴리겠지만서도.
아, 사람 좋다고 하지 마. 패주겠다는 건 진심이니까. 우선 미도리마는 날 만나면 안경부터 벗어야 할 테고, 아카시는 날 고소하지 않겠다는 각서부터 써야 할 거야. 그 녀석들을 감동시키는 건 우선 늘씬하게 패 주고, 이전까지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시킨 다음의 일이야.
얼른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너 역시 그렇지?
5. 쿠로코 테츠야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내가 생각하는 미도리마 군과, ……아카시 군에 대해서.
테이코에 있을 시절부터 느낀 거지만, 그 두 사람은 정말 별세계의 인간입니다. 우선 미도리마 군부터 그래요.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놈의 럭키 아이템들은. 길을 가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강렬한 물건들뿐이었죠.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웬 분무기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고요. 또 아카시 군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속으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라서 서민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른 걸까요? 때로 그 사람이 늘어놓는 엉뚱한 소리- 예를 들어서 가리가리군의 가격이 싼 것이 이해가 안 된다며 자본주의론을 늘어놓는 점이라던가, 마지바 같은 곳에서 햄버거를 손으로 먹는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점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만 나옵니다. 정말 끼리끼리 논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한 쌍이었어요.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그 두 사람을 나름대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오미네 군을 농구 선수로서 존경했다면, 그들 두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경했어요. 미도리마 군은 그렇게 이상한 몰골을 하는 이유가 오직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존경했고, 아카시 군은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해 일을 진행시키는 추진력과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넘쳐 흐른다는 점에서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있었을 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다들 짐작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카시 군에 대해서는, 한동안 좋은 감정이라곤 전혀 생각나지 않았을 정도로 실망했어요. 제가 존경했던 그 리더십이 결국은 승리에 대한 아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에요. 물론 지금은 그 생각이 편협했다는 걸 인정합니다. 아카시 군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테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어느 하나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것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무작정 비난하기만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아카시 군에게 사과하고 싶었어요.
아카시 군에게서 승리를 얻어낸 점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했다고 생각했고, 세이린의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도 진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행동이 아카시 군에게 상처를 주고 그의 위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그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 해야 했다고 지금도 생각해요. 그런데 아카시 군은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더군요. 동창회에 아카시 군이 나가지 못할 것이고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미도리마 군의 메일을 받았을 때, 실망하기보다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조금 분하기도 했죠. 모모이 씨에게 부탁해서 동창회를 주최한 것도, 전날까지 잠못 이루고 아카시 군에게 해줄 말을 생각했던 것도, 내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거든요. 또 아카시 군에게 사과를 하고 후련해지고 싶었던 이기심을 지적당한 기분도 들었고요. 아카시 군은 날 만나러 올 준비가 되지 않았고, 나 역시 무작정 아카시 군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려고 해요. 미도리마 군이라면 분명 아카시 군을,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까지 치유해 줄 수 있겠지요.
덧붙여서 이건 내 결심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나는 미도리마 군이 아카시 군의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그들 모두가 두 사람의 행복을 빌고 있어요. 다수결이라는 의사 결정 방식을 추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두 사람이 함께 있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아마 참에 가까운 명제겠지요. 아카시 세이쥬로의 옆에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있어야 하고,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도 아카시 세이쥬로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래서 감히,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건방지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굳이 입에 내어 말해보고 싶습니다.
미도리마 군, 아카시 군.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2.
이 세상에 단 둘 뿐이라면
BGM: 初音ミク - トリノコシティ (토리노코시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꿈을 꾸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날 아침.
세상이 멸망했다.
이상하게도 집이 조용했다. 지금 시간은 여섯 시 반. 평소대로라면 아버지가 새벽 출근을 하고 어머니는 그 준비를 돕느라 분주한 소리가 방 밖에서 들려와야 했을 것을,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들리질 않았다. 미도리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안경을 썼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일찍 출근했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잠시 외출했을 수도 있다. 별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가 적막만이 가득한 집 안을 보았을 때 미도리마는 처음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어머니? 아버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안방 문을 열어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았지만 부모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침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식탁에는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고, 설마 하는 생각에 열어본 여동생의 방에도 자고 있을 여동생의 모습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을 가득 품은 채 미도리마는 잠옷 차림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앞집에 사는 마에다 씨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에서 라디오 체조를 한다. 그러나 라디오 체조의 음악은 들려오지 않았고, 러닝셔츠에 복대를 맨 채 라디오 체조를 하는 마에다 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출근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아침을 알리는 참새 울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풍경만은 그대로인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보이질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싹함에 미도리마는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집 안의,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가 미도리마의 전신을 엄습했다. 미도리마가 부르르 떨리는 팔을 감싸안고 현관에서 몸을 움츠렸을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현관문 너머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실에 미도리마는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녕, 신타로.”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인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차를 내오자 아카시 세이쥬로는 고맙다며 생긋 웃어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왜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인 것일까.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미도리마는 자신이 아직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나이트캡마저 벗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방으로 뛰쳐들어간 미도리마는 제 옷장 안에도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밖에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분명 곱게 개어 헌옷함에 넣어 두었을 교복이, 1년 전 그것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처럼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의아했지만, 지금의 미도리마에게 다른 옷을 찾아볼 시간은 없었다. 결국 미도리마는 테이코의 교복을 입은 채 방 밖으로 나섰다. 아카시는 어느새 미도리마가 내온 차를 전부 마시고서는 소파에 멍하니 기대 앉아 미도리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시. 자신이 나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드러난 평온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미도리마는 더욱이 당황하면서도, 내심 자신이 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오싹함을 아카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어째서 아카시는 저렇게 덤덤한 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카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아카시,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뭐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지금 이 상황 말이다. 왜 아무도 없지? 사람이라곤 눈에 띄지를 않아. 그리고 교토에 있어야 할 네가 여기 나타났다. 이건…… 악몽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신타로답지 않은 결론이네. 미안하지만 이건 현실이야.”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흠칫하며 물러서던 미도리마는 그 손이 제 얼굴에 닿은 순간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고, 그 손이 제 볼을 세게 꼬집었을 때는 당황함과 아픔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런 미도리마를 보며 아카시는 생긋 웃을 뿐이었다. 봐, 꿈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려는 듯. 그럼,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이 세상에 너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라진, 지금 이 상황이?
“아카시…… 너,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설마. 당황하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네가 몰라서 그래. 분명 교토에 있는 내 방에서 잠들었을 텐데, 눈을 뜬 곳은 도쿄의 아카시 저택이었어. 고용인들은 아무도 없지, 아버지의 방이나 서재도 비어 있지, 회사로 전화해 봐도 전화가 걸리질 않아.”
“전화가 걸리질 않는다고……?”
그 말에 미도리마는 황급히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귀에 댄 순간 들려온 것은 무음, 그 자체였다. 다이얼을 아무리 눌러 봐도 전화기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전화선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데. 수화기를 든 채 망연자실한 미도리마의 옆에서 아카시가 그것 보라며 차를 다시 한 잔 따랐다. 그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소름이 돋았다. 아카시의 저 태연함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한 번 놀랐지만 곧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당황하지 마, 신타로.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아마 지금쯤 전화국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런…… 정말로 이 세계엔 너와 나밖에 없다는 거냐? 왜?”
“……글쎄, 왜일까.”
아카시가 찻잔에서 입을 떼고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아, 미도리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아카시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에 손을 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어떤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카시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차를 다 마시더니, 갑자기 미도리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 어디로?”
“여기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너와 단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장소로 가고 싶어.”
“대체 거기가 어딘데?”
“답은 뻔하잖아. 우리가 함께 있었던 장소가 ‘그 곳’ 외에 또 어디 있지?”
설마- 테이코 중학교의 농구부 부실 말인가. 미도리마가 그렇게 결론을 낸 순간 갑자기 그 주변의 배경이 바뀌었다. 익숙한 제 집의 거실은 자취를 감추고, 농구공 냄새가 짙게 남아 있는 부실의 풍경이 미도리마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이건 역시 꿈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미도리마의 손을 아카시가 다시 한 번 세게 꼬집었다. 아야. 비명을 지른 미도리마에게 아카시가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나도 비현실적이라곤 생각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 나도 그랬어. 집에서 나와서 너를 생각한 순간 바로 너희 집 앞으로 내 몸이 이동했단 말이야. 아니, 내 주변의 공간이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까.”
아카시의 그 말에 미도리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7시에 가까운 시간이니 학생들이 없는 건 당연했지만, 적어도 학교의 수위는 운동장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창밖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설마. 미도리마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읽은 적 있었던 소설의 배경이 떠올랐다. 세계가 멸망하고, 그 세계에 남은 것은 단 둘 뿐이라는 내용의 공상과학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의 주변 풍경은 적어도 ‘세상이 멸망했다’는 전제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어디 하나 망가진 것 없이, 사람들의 모습만이 사라진 그 공간은 소설에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오싹했다. 그제야 미도리마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 단 두 사람 뿐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여동생도, 슈토쿠 고교의 팀메이트들이나 테이코 중학교의 동창들도, 모두 사라졌다.
“말도 안 돼…….”
몸에 힘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냉정한 눈으로 쭉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모든 상황판단을 완료한 그 눈동자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상황만큼이나 오싹해,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을 차갑게 밀쳐냈다. 거부당한 아카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의 두 눈에 스쳐지나가는 서운함을 미도리마는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상황에서는 미도리마의 반응이 정상인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오랜만에 장기나 한 판 두지 않을래?”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냐.”
“뭐 어때. 오랜만이잖아. 나도 상대 없이 혼자 두는 건 이제 질렸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카시는 아무 사물함이나 열어 장기판을 꺼냈다. 왜 저런 게 농구부 부실에 있는 것인지,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태연하게 장기말을 늘어놓는 아카시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실 걸 뽑아오겠다고 하자 아카시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건넸다. 어차피 신타로, 돈 안 가지고 나왔잖아? 하는 그 말에는 부정할 말도 없어서, 미도리마는 얌전히 아카시의 지갑을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배경이 변하질 않아서, 직접 1층까지 내려가야 했다. 자판기도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과는 달리, 1층의 자판기에는 얌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돈을 넣자, 터치 패널에 불이 들어오는 음료수는 단 두 종류 뿐이었다. 미도리마 자신이 마시는 차가운 단팥죽과, 아카시가 즐겨 마시는 밀크 티. 시험삼아 다른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통할 리가 없어서, 미도리마는 결국 단팥죽과 밀크 티를 가지고 부실로 도로 올라왔다. 말을 늘어놓은 채 미도리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내미는 밀크 티 캔을 보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신타로의 식성은 정말 언제 봐도 특이하단 말이야.”
“쓸데없는 참견인 것이다.”
“상관없어. 그게 신타로다우니까.”
캔을 딴 아카시는 그것을 마시지 않고 제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뜨거운 것을 마시지 못하는 아카시가 늘 취하는 행동이었다. 자기가 마실 수 있는 온도가 될 때까지 가만히 음료수를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걸 고려해서 미도리마는 늘 차가운 밀크 티를 사 오곤 했었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자판기에 남아 있는 음료수는 어딜 봐도 이 세상의 유일한 생존자인 자신과 아카시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는데, 정작 아카시가 빠르게 마실 수 있는 차가운 밀크 티는 살 수 없었다. 왜일까. 그런 생각에 미도리마가 밀크 티를 노려보는 것을 아카시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후우. 순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배어나와, 미도리마는 밀크 티에서 아카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살짝 시선을 돌린 아카시는 어쩐지 실망한 기색이었다.
실망해? 무엇에?
“뭐 해? 시작하지 않고.”
“아, 알았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캔을 옆에 내려놓고 말을 하나 움직였다. 맞은편의 아카시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그 움직임에 대응했다. 한동안 부실 안에는 두 사람이 말을 옮기는 소리밖에 들려 오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테이코 중학교에 재적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입고 있는 옷이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이라는 점 역시 한몫을 했으리라. 장기말을 몇 번씩 옮기다 말고, 어느새 아카시 쪽으로 기울어 버린 정황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투료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꽤나 아슬아슬했네. 실력이 더 늘었구나, 신타로.”
“이긴 녀석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쁘지 않다는 것이다.”
“하하, 그 핀잔도 그대로야. ……다행이다.”
순간 아카시의 얼굴에 떠오른 안심 가득한 미소에 미도리마는 흠칫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태연하기 그지없었던 아카시가 처음으로 보여준 감정의 흔들림이었다. 정말로 아카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자신을 억압하던 아버지나 부담감만을 안겨주던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이렇게 마주앉아 장기를 둘 수 있는 미도리마만이 남아 있는 이 상황을- 두렵다기보다는 후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미도리마는 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아카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제 손을 붙잡는 미도리마를 아카시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 금방이라도 그렇게 물을 듯한 아카시의 눈동자를 본 순간 미도리마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위화감을 깨달았다.
아카시는 지금, 기뻐하고 있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가, 그리고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다.
“아카시…… 너 설마.”
그는 끊임없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현실이다, 현실이라고. 아무리 비현실적인 상황이 눈앞에 일어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그것은 현실이지 꿈이 아니라고. 마치 미도리마의 판단을, 이곳이 현실이라는 생각에 붙들어 두려는 듯. 그저 필사적으로.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 이상한 세계,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세계는- 혹시.
“네가…… 이 세계의 원인인가?”
아카시 세이쥬로의 어떤 소망에 의해 만들어진, 아카시 세이쥬로만의 세계가 아닐까.
“네가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린 건가?”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입으로는 놀랐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태도나, 이전과는 변함없는 미도리마의 말과 행동을 확인할 때마다 일일이 안심한 듯한 반응을 보이던 아카시 세이쥬로의 행동. 그것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든 세계에 미도리마라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 손님이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취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금 전의 밀크 티 사건도 그렇다. 아카시는 일부러 뜨거운 밀크 티를 준비해 놓고, 자신이 뜨거운 것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걸 아는 미도리마가 그것을 식혀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마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실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난 때때로 네가 너무 영리하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은 미도리마의 질문을 완전히 긍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세계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어. 몇 번이고 했었지. 아버지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무도 없는 세계를 만들어 놓고 혼자 장기를 둔 적이 있었어. 하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건 너무 재미없었어.”
-나도 상대 없이 혼자 두는 건 이제 질렸어.
그 말은 라쿠잔에서 장기 대국을 해 줄 상대가 없다는 것이 아닌, 텅 빈 세계에서 혼자 장기를 두는 게 질렸다는 의미였던가.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너와 함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어쩌면, 이게 정답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다고 내 가족이나 동료들까지 모조리 없애 버렸다는 건가!”
“그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야.”
딱 잘라 말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강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의미 없다, 의미 없다고.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추궁하고 있는 미도리마 신타로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미도리마가 느낀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세계인 거냐. 네게 마음대로 세상을 구성할 힘이 있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네게 상냥한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그건 어차피 거짓이잖아? 나중에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의 부채감을 나보고 감당하라는 거야?”
“그러면, 나는? 어차피 거짓이라면 나는 왜 이곳에 있지?”
“이 세계는 거짓이 아니니까.”
씁쓸하게 대답하고, 아카시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내 세계는 원래 이런 식이었어. 나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어.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실재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일 뿐이야.”
기대와, 부담과, 억압만이 가득한 세계.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현실은 이 삭막한 공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전까지의 세계에서 깨달았어. 그런 세계가 진짜라면, 내가 외로움을 느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그래서 너를 데려와 봤어. 네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고, 아카시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미도리마는 그 뜻을 읽어냈다. 확실히 아카시는 방금 전까지 안심하고 있었다. 미도리마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혹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며 일희일비하기는 했어도,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 앞에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앉아, 그 시절처럼 단둘이 장기를 두어 주는 상황에.
“안심해, 신타로. 내 힘으로는 이 세계를 24시간 이상 유지할 수 없어. 내일이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아카시……..”
“아니면, 지금 당장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다시 시작할래? 네 침대에서 눈을 뜨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등교할 준비를 마친 뒤 학교 근처에서 타카오 카즈나리와 합류하는- 그런 아침을 다시 보고 싶어?”
“그건…….”
당연히 그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삭막하고 오싹한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카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카시는 자신을 원해서, 오직 자신 한 사람만을 원해서 이런 세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상처받은 아카시를 두고, 현실로 돌아가도 되는 것일까? 미도리마는 대답을 망설였다. 주먹을 세게 쥐는 미도리마를 보며 아카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고민해 줄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양.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순간, 미도리마는 방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각오를 다시 자각했다.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은, 원래의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반적인 세계에서, 널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하지. 너를 이기기 위해 인사를 다한다는 것이다.”
1년 전, 미도리마 신타로는 바로 이 장소에서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패배를 가르쳐 줄 것을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아카시의 손을 스스로 놓았고, 그를 위해 인사를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그 결심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아카시와 함께 있어 봐야 행복하지 않다. 그것이 비록 24시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은 인스턴트 세계라도, 미도리마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해. 키워드는 네가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내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네가 그 말을 다시 한 번 한다면,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이라니. 이전에 했던 말을 가리키는 건가. 미도리마는 답을 구하듯 아카시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아카시의 입술이 그 이상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내가 아카시에게 할 말. 아카시가 이 ‘편안한’ 세계를 버리고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말. 그것이 무엇이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언젠가는 네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패배를.”
그 날, 아카시 세이쥬로와 결별하던 날, 미도리마 신타로가 했던 말.
그 날 피어난, 아카시 세이쥬로만을 위한 결심.
그 말을 입에 뱉은 순간 주변 풍경이 새하얗게 흐려졌다. 남은 것은 아직도 제 손을 잡고 있는 아카시와 그런 아카시를 빤히 바라보는 미도리마, 단 둘 뿐이었다. 정답이야. 웃으면서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도, 책상도, 장기판도 사라졌다. 그리고 아카시가 천천히 미도리마의 손을 놓고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문이 보였다. 미도리마의 집에 있는, 미도리마의 방 문과 똑같은 문이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미도리마는 천천히 아카시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하려다가 못한 말이 있었다.”
“무슨 말?”
“내가 너를 이기려는 건 단순한 투쟁심 때문이 아니다. 너를 이겨서..... 너를 다시 한 번 손에 넣으러 오겠다. 네가 안심하고 내 옆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만들어주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카시의, 상심 가득했던 두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설마 미도리마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그러다가, 아카시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어렸다.
“응.”
대답하는 아카시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였다.
“너무 늦으면 안 돼.”
그 대답을 듣고 미도리마는 문을 열었다. 쾅. 문을 닫은 순간 아카시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 침대와 잠옷이 보였다. 이것을 입고 다시 잠들면, 눈을 떴을 때는 현실이다.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기기 위해, 그를 데리러 가기 위해 인사를 다하는 나날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옷을 벗었다. 잠옷과 나이트캡을 걸치고 침대 위에 누워 안경을 벗었다.
“기다려라, 아카시.”
금방 데리러 갈 테니까.
결심하며,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후 자신이 눈을 뜰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을 뜬 순간 이 세계와, 혼자 남겨져 외로워하는 아카시에 대해서 모두 잊어버릴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 마음만은, 결심만은 변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꿈을 꾸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침대에서 눈을 뜬 날 아침.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1.
GUMI - シリョクケンサ (시력검사)
어느 날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한 통의 소포가 도착했다. 한 권의 두꺼운 책 정도 크기인 직사각형의 상자였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집 우편함에 직접 넣어두고 간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수신인- 미도리마 신타로의 이름은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기에,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상자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몇 겹으로 쌓아둔 완충제와 함께, 가죽으로 된 작은 케이스 하나가 들어 있었다. 미도리마는 그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쪽지와 함께, 은색 테가 영롱하게 빛나는 새 안경이 하나 들어 있었다. 미도리마는 쪽지를 펼쳤다. 수신인의 이름을 적은 글씨와 똑같은 글씨체로,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진짜 나를 찾아줘’.
“아카시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갑작스런 부탁을 받은 타카오 카즈나리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왜 굳이 내게 묻느냐‘는 의문에 더 가까웠으리라. 그럴 법도 했다. 상식적으로, 중학교 동창의 행방을 상대를 안 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그 외의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전화도, 메일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호를 바꿔버린 것 같아.”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물어봐야…….”
“넌 라쿠잔 선수들하고 연락처를 교환했잖나.”
“으음…… 그걸 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나도 일방적으로 받은 거라서. 잠깐만.”
타카오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검색하는 동안 미도리마는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땀이 찬 주먹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 여기. 그렇게 말하며 타카오가 건네 준 핸드폰에는 ‘미부치 레오‘라는 이름과 함께 미도리마에게 적의만을 드러냈던 라쿠잔 고교 슈터의 핸드폰 번호가 떠 있었다. 재빨리 그 주소를 눈으로 외운 미도리마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겨울 방학이다. 수업은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간신히 할 수 있었던 냉정한 판단대로,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절박함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아 버리는 바람에 미도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부치 레오는 절박하게 통화 상대가 신분을 밝혀 주기를 청하고 있었다.
“혹시 세이쨩? 세이쨩이야?”
그리고 그것이 아카시 세이쥬로를 칭하는 미부치 레오만의 호칭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미도리마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추측이 현실로 드러난 순간을 목도해야만 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사라졌다.
그 시기는 윈터컵 결승전이 라쿠잔 고등학교의 패배로 끝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실종을 수많은 사람들은 책임감이라고 규정했다. 1학년으로서는 유례 없는 인사로 쟁쟁한 선배들을 누른 뒤 신입생으로서는 유례 없는 인사로 학생회장 및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 주장 자리를 차지했던 그에게, 오랜 시간 윈터컵의 우승을 지켜왔던 라쿠잔 고등학교를 처음으로 패배의 길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실제로 학교 내에서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모양이다. 당장 이사회나 PTA,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카시를 향한 비난의 시선이 횡행하고 있었다. 감독을 맡고 있던 시로가네 에이지가 책임을 추궁당해 감독 자리에서 경질당한 것을 시작으로 아카시의 주변에서는 아카시가 주장을 사퇴하고 농구부에서 모습을 감춰 주기를 바라는 상황이 몇 번씩 연출되었다고 했다. 웃기지도 않아. 우리가 인정한다는데, 누가 감히 세이쨩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야! 미부치 레오는 분개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소수파였다. 그와 함께 1년을 보냈던 농구부원들 사이에서도 아카시를 무시하고 그에게 패배의 책임을 모두 돌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끝까지 그의 편을 들어준 것은 미부치와 하야마, 네부야 세 사람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부담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가엾은 세이쨩. 미부치의 그 감상에 미도리마는 99% 동의하고 있었다. 고작 한 번이다. 고작 한 번의 패배였고, 지기는 했어도 시합 내용이 라쿠잔의 명성을 먹칠할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 상황에 가장 고통스러워했을 사람은 역시 아카시 본인이었다. 삶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용납해 본 적 없던 그에게 인생 최초의 패배, 그것도 신예세력으로 등장한 세이린 고등학교에 의한 패배는 그 프라이드를 상처입히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현실이 아카시를 몰아붙이고, 그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아버지 역시 실망의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아카시가 실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고르고 만 것에 미도리마는 어떤 의문도 품지 못했다.
의문이었던 것은 단 하나.
아카시가 실종된 날, 미도리마의 집 우편함에 들어가 있던 소포 상자였다.
그 안에는 미도리마의 눈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도수 낮은 안경과, 의문만을 불러일으키는 아카시의 자필 쪽지 한 장만이 들어 있었다. 진짜 나를 찾아줘.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미부치 역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그는 최근 아카시가 무언가를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실종되기 며칠 전 도쿄로 가는 신칸센 표를 끊었었다는 단서만을 전해주었다. 아카시는 도쿄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란 말인가. 그 답 없는 상황에서도 미도리마는 자신이 아카시를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장 안경 케이스에 적힌 안경점으로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50대 후반의 여주인은 아카시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학생이 안경을 맞춰 갔다는 사실과 그 소포의 포장을 자신이 했다는 것까지는 알려주었지만 그 이상의 단서는 제공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누구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선물할 용도입니다‘ 라고 말했다면, 기쁜 마음으로 포장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었다. 미도리마가 그 다음으로 의지한 곳은 도쿄 외곽에 있는 아카시의 본가였지만, 아카시의 ‘친구’라 제 신분을 밝히고 면담을 요청하는 미도리마를 아카시의 아버지는 ‘바쁘다’는 한 마디로 묵살했다. 거기에는 갑자기 모습을 감춘 자신의 아들에 대한 걱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실패작’을 처분하는 공장장 같은 말투였다.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거기서도 미도리마는 단서를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 써 보고 도수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부터 쭉 책상 위에 두기만 했던 안경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꾸짖고 있었다. 뭘 하는 거냐, 미도리마 신타로. 네가 아카시의 옆에서 보낸 3년간은 대체 무엇이었던 건가. 너라면 당장 아카시를 찾아내서 실종의 원인을 묻고,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그를 위한 지난 1년이었고, 그를 위한 진인사대천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미도리마에게 답은 없었고 안경은 끊임없이 미도리마를 질책했다. 철저히 지켜왔던 바이오리듬이 흐트러지고 손가락의 테이핑을 갈지 않은 지 사흘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미도리마는 답보 상태였다. 아카시에 대한 걱정에 점점 말라가는 아들을 어머니가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녀 역시 답을 제시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이 흘러갔다. 눈을 감으면 아카시의 모습이 보였고, 눈을 뜨면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아줘. 날 찾아줘. 찾아줘……. 계속되는 환청과 환영에 미도리마의 정신이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미도리마에게, 한 통의 비통지 설정 전화가 걸려왔다.
“머리가 높아.”
그 선언과 동시에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의 무릎을 꿇린 존재를, 미도리마 신타로는 사람들 틈에 섞여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원들은 갑작스런 그의 변화와 순식간에 뒤집혀 버린 시합 상황에 경악하고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다른 의미에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저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필요없어‘. 언젠가 ‘그‘가 뱉었던 한 마디가 미도리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이자키 쇼고를, 전략상 더 이상 필요없는 말이라고 규정하던 냉정하기 짝이 없던 목소리. 다만 그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차가운 목소리를 향해 그 주인의 이름을 불렀을 때의 반응이었다.
“아카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붙잡은 미도리마에게, 그날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응? 왜 그래, 미도리마? 하고.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눈앞의 아카시를 돌려 세웠을 때 미도리마는 어리석게도 아직까지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는 미도리마가 의아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아카시가 지어 주기를.
“뭐야?”
하지만, 아니었다. 미도리마의 부름에 되돌아 선 아카시 세이쥬로는 너무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불쾌함의 원인은 방금 전 그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간 무라사키바라뿐 아니라,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미도리마에게도 있다는 듯했다. 뭐야, 남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마.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두 눈동자가 그런 기색을 띠고 있는 것에 놀라 미도리마는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뭐야, 불렀으면 뭔가 말을 해.”
“아카시, 너…….”
“그렇게 괴물 보듯 쳐다보지 마. 불쾌해.”
괴물. 아카시의 단어 선택은 정확했다. 그 말대로였다. 미도리마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테이코 중학교의 주장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인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라, 일그러진 형상을 한 승리의 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타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름의 울림에 미도리마는 뒤돌아서 자신의 손을 붙잡는 아카시를 저도 모르게 세게 뿌리쳤다. 떠밀린 반동으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아카시는 덤덤한 눈으로 미도리마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 상황에서 당연히 드러나야 할 놀람이라는 감정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파.”
“미,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게…….”
“됐어. 할 말이 없다면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어, 어딜 간다는 거냐! 아직 연습이-”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 하고 싶은 사람은 계속해도 좋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오지 않아도 좋고. 네가 연습을 빠질 리 없으니 네 선택은 전자겠지.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붙잡지 않을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아카시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 툭 털고서 미도리마에게 등을 보였다. 멀어져 가는 아카시의 등을 보면서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털어낸 먼지 속에 마치 자신의 감정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그 다음 날부터 아카시의 태도는 냉정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들의 일과였던 방과 후 장기 대국은 미도리마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중지되었고, 상태를 묻는 메일에도 답장은 없었다. 아카시의 교실로 찾아가 그를 만나려 하면, ‘바쁜 일이 있다’ 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직접 이별을 말하는 것보다도 잔인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잃었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건 아카시가 아니다. 내가 아는 아카시가 아니야.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 있었고, 나를 옆에 있도록 한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또 하나의 아카시라고. 그래서 나는 그 아카시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아카시에게 이기면, 이전의 아카시가 잠시라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미도리마는 아무 말 없는 전화를 붙잡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상대가 대답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자신의 그런 말을 계속해서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미도리마는 전화 상대가 아카시임을 확신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었다. 처음부터 너는 한 사람뿐이었어.”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태어나서부터 주어진 승리자의 길을 걷는 것 외에는 생존할 수단이 없었던 가엾은 존재. 그 거친 길을 걷는 이상 때로는 발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가시덤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끊임없이 맨발로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아카시 세이쥬로. 부담감에 지치고 억압에 절망해 가면서도 발을 멈출 수 없었던 아카시 세이쥬로. 그런 아카시여서 좋아했고, 그런 아카시여서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모두가,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미도리마 신타로마저도 변했다고 생각한 아카시 세이쥬로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카시는 아카시였다.
“아카시…… 어디 있는 거냐. 어디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냐. 말해달라는 것이다. 제발 뭐라고 좀 해 봐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까, 내게 가르쳐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해버린’ 아카시 세이쥬로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그의 패배를 눈앞에서 목도하고서도, 그가 절망하고 괴로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패배를 가르쳐 준 최초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쓸데없는 자존심에 절망해 아카시를 찾아가지 않은 것도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아카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도리마가 자신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한 감정에 한 점 흐트러진 것이 없다고 그 입으로 말해주기를 쭉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이전처럼 승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힘을 미도리마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미도리마에게 전해져 온 안경과 쪽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날 찾아 줘.
네 안에는 진짜 내가 있어.
네 눈에는 보이잖아. 내 마음의 비어버린 곳이.
“아카시…… 만나고 싶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뱉어낸 한 마디에도 수화기 너머의 아카시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가장 필요로 한 순간에는 나를 외면하더니, 왜 이제 와서? -라는 비난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찾아내겠다고 말하는 미도리마의 설득에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을까. 잠시 후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선택이 후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묵 끝에 작은 목소리로, 미도리마가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목소리로 아카시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미도리마 신타로.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면, 대체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진짜 나를 찾아 줘.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을 들으며, 미도리마는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아카시.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째서 그 동안 외면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도 너를, 너라는 존재를,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에 쭉 두고 있었던 도수 낮은 안경을 썼다. 그 순간 주변의 시야가 전부 흐려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길만은 선명히 보였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아카시 세이쥬로를 향한 길이다.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허락된 마지막 기회. 아카시 세이쥬로를 찾아내, 진짜 그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아카시의 마지막 목소리가 귀에 맴돈 순간 미도리마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신타로, 늦은 밤 어딜 가니? 어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현관문을 세게 닫는 것으로 답하고 미도리마는 길을 달렸다. 아카시에게로 이어지는 길. 진짜 아카시 세이쥬로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이어지는 길. 그 길을 달려가는 이상 자신은 아카시를 놓칠 리 없었다. 미도리마는 달렸다. 계속 달려서, 아카시 세이쥬로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결별했던 그 장소에 닿았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부실, 언제나 그들이 마주앉아 장기를 두던 그 책상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앉아 있었다. 늘 보아왔던 풍경. 테이코 중학교에 재적하던 시절, 미도리마는 방과 후 교실에서 모습을 감춘 아카시를 찾아 전교를 헤맬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오면 아카시를 만날 수 있었다. 장기판을 펼쳐 놓고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아카시를. 먼저 갈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불만스런 부탁에 아카시는 늘 이렇게 대답했었다.
-괜찮아. 내가 말하지 않아도 미도리마는 여기까지 날 찾아올 수 있잖아.
“아카시.”
이름을 부른 순간 그 등이 천천히 돌아섰다. 어서 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뻗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잘 찾아왔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미도리마는 발을 떼었다. 그가 취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그 사랑스러운 존재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아 주는 것. 그리고 여태껏 감춰왔던, 하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했던 한 마디를 하는 것.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진짜 아카시 세이쥬로를 눈앞에 두고,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아카시.”
흐려져서 보이지 않는다면
이 가슴에 손을 얹고 너에게 전할 테니까
진짜 나를.
한줄 후기.
50. 번역하는 과정에서 2ch 원문 찾느라고 고생했습니다. 솔직히 아카시는 침대 위에서는 지배당하는 거 좋아할 거 같지 않나요...
49. 아카시는 저 책갈피를 평생 버리지 못합니다. 미도리마는 저 책갈피를 만들어 준 날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
48. 요즘 녹<-고의 구도가 좋습니다. 타카오 미안...
47. 라쿠잔 교복을 입고 슈토쿠 앞에 서 있는 아카시는 참 눈치가 없는 건지 모에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둘 다인가?
46. 원작에서 아카시가 실제로 자살하려고 하는 게 보고 싶습니다... 물론 미도리마가 말려주러 오진 않겠죠. 젠장.
45. 미도리마가 '기억하고 있다' 고 답장을 보내면, 아카시는 '아직도 같은 마음이냐' 고 물을 겁니다. 그에 대한 답장은 없습니다.
44. 탸님이 제시해 주신 단어입니다. 솔직히 미도리마는 넥타이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43. 아카시가 카가미를 상처입힐 흉기로 굳이 미도리마의 럭키 아이템을 택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42. 바로 전 로그랑 시기가 겹치네요. 헤어졌으면서도 미도리마 갖고노는 아카시가 좋습니다... 힘내라 미도리마.
41. 사실 이건 에로 망상하면서 나온 소재입니다. 세라복 스커트 밑으로 힘이 잔뜩 들어간 장딴지를 자랑하며 아카시에게 흉기를 찔러대는 미도리ㅁ... 죄송합니다.
40. 백양님이 제시해 주신 시츄입니다. 라쿠잔과의 준결승전 전날 밤, 미도리마는 아마 잠을 못 이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카시는 어땠을까.
39. 아카시를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고 한다면, 미도리마는 왠지 그를 구하러 온 왕자님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그를 지켜보며 왕자가 되기를 염원하던 집사 같은 느낌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공주를 차지하는 게 굳이 왕자일 필요는 없죠.
38. 본 심리테스트의 항목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순전히 미도리마를 이미지로 썼습니다.
37. 제가 미도리마였다면 아카시한테서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이 온 순간 상황을 거의 파악했겠지만 실제의 미도리마에겐 무리겠죠. 분발해라...
36. 본 로그의 소재는 쿠사마 사카에 선생님의 <성냥팔이> <염소의 편지> 연작에서 따왔습니다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네요. 46번 로그에서 아카시가 미도리마의 개입 없이 정말로 자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서 썼습니다.
35. 미도리마와 아카시의 갈등은 솔직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일단 정설로는 쿠로코가 아카시의 승리를 부정하고 패배를 안겨준 뒤 멘탈은 치유해 주지 않고 떠나서, 미도리마가 대신 그 치유를 수행한다는 루트를 택하곤 있습니다만 과연 그게 제대로 갈등을 해결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
34. 앞뒤 사정이 많이 생략된 이야기입니다만, 미도리마의 흔적이 가득한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후회하는 아카시가 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참고로 이 '별장'을 이용했을 때의 이야기는 테이코 녹적데이 D-100 로그에서 이어집니다.
33. 서로 좋아하는 주제에 그동안 생긴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보니 차마 서로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훈훈한(?) 녹적이 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그냥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하면 바로 통할 마음인데 엇갈리는 게 너무 좋죠!
32. 오레카시-보쿠카시의 차이가 있고 없고는 녹적에서 참 좋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두 사람을 다른 인격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만(애초에 너무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녹적으로 가지고 오면 미도리마를 사이에 둔 아카시끼리의 신경전을 볼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쌍둥이였다면 모에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해봅니다...... 네 다음 원작파괴.
31. 백양님이 제시해 주신 시츄입니다. 언제나 아카시 때문에 상처받는 미도리마이니만큼 이번에는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상처 주는 걸 쓰고 싶었는데, 쓰고 나니 심한 말을 들은 아카시나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미도리마보다는 괜히 말려들고 만 타카오한테 제일 미안해지고 말았습니다.
30. 아카시의 일과는 정말 재미없고 덤덤한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마의 일과에 대한 이야기는 테이코 녹적데이 D-100 로그에서 이미 쓴 뒤라서, 나중에 이 두 편을 비교하며 읽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쪽을 읽어보시면 아카시가 왜 저렇게 메일에 집착하는지도 아실 수 있을 듯(웃음)
29. 언제나 미도리마가 부주장이란 설정이 의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선배 주장-후배 부주장(=차기 주장 후보) 구도가 편하고 효율적일 것 같은데요. 물론 작가가 저 좋으라고 넣어준 설정이라 믿고 줄기차게 써먹고는 있습니다만, 어쨌든, 누군가의 추천이 아닌 이상 미도리마가 부주장이라는 설정은 아카시가 감독들에게 미도리마를 추천했거나, 미도리마가 아카시에게 부주장이 되고 싶다고 먼저 말해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수께끼를 풀어줘요, 후지마키! 니지무라가 주장이고 아카시가 부주장이었던 건 그냥 아카시가 사스가해서인가요?
28. 미도리마는 솔직하지 못할 것 같지요. 특히 그것이 고교 시점이라면 더더욱. 아카시는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미도리마가 실행에 못 옮겨서 이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답답한 녹적도 좋아합니다. 뻘하지만 대불이라고 하면 미도리마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이 생각납니다(웃음)
27. 윈터컵 준결승전 전의 이야기. 최근 다시 읽었는데, 아카시가 미도리마 앞에서 여유롭다기보다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것이 영 신경 쓰여서 써봤습니다. 윈터컵 개막식 때는 그렇게 당당하게 미도리마한테 가위까지 빌렸는데 말이죠. 대체 그 적의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싶어서. 여담으로 이 이야기를 쓰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타카오의 대사를 치는 일이었습니다(웃음)
26. 원래 이 로그는 '만약의 세계' 라는 제목을 달아 놓고 둘 다 농구를 안 했을 경우의 녹적을 써서 테이코 녹적데이 로그 쪽에 넣으려고 했었습니다만... 그냥 시리즈로 쓰고 싶어져서 25번까지 이어놓았습니다. 그 녹적은 테이코 녹적데이 로그에서 봐주세요. 어쨌든 그날 아카시가 무라사키바라에게 패배했다면 원작에서 예정되어 있는 멘붕이 조금 더 빨리 왔었을 거고, 성숙하지 못한 나이인 만큼 더 괴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미도리마는 곁에 있어 줬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원작 시점에서 패배했을 때 아카시를 감싸 주는 방법과는 좀 다릅니다. 원작에서의 미도리마라면 제법 성장해 있는 상태라 이상적으로 아카시를 감싸주고 결국 평온을 되찾게 해 줄 수 있었겠지만, 이 설정에서는 아카시의 상처를 치유해 줬어야 했을 시점에서 미도리마는 여전히 예전의 미도리마였으니까요. 즉 상처를 묻어둔 채 여기까지 끌고 온 셈이 되니까 언젠가는 큰 사건이 하나 터져서 둘 다 크게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미도리마가 아카시 옆에 있어주는데다 타카오 같은 좋은 친구도 근처에 있으니 아예 망가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요. 어쨌든 이 설정 자체는 무척 마음에 들어서, 기회가 닿는다면 장편으로 써서 책을 내 보고 싶습니다. 번역하는 시간이 문제지만.
25. 이번엔 라쿠잔 편입니다. 미도리마가 아카시에게 패배를 인정했다면 농구를 그만둘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피아노를 치는 걸로 넣어보았습니다. 아카시는 즐겁겠지만, 미도리마는 속으로 썩어가겠죠. 제가 좋아하는 미도리마 신타로의 정체성도 무너지고요. 참 흥미있는 소재이긴 한데 쓰다가 제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이 로그로 그만두렵니다. 하지만 이 스토리로 간다면 분명 녹적은 파멸할 거라는 데 제가 지금 먹고 있는 감자튀김을 걸어도 좋습니다. 우선 미도리마가 못 버틸 거예요. 아카시가 승리에 도취되어 망가져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설정의 녹적이라면 아카시가 나중에 진짜 패배를 겪었을 때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위로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 싫어요.
24. 솔직히 제 최애캐지만 미도리마 무서워요. 이미 진인사대천명 자체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해서. 대체 3년 내내 지고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너 이기고 말겠음 하는 놈은... 원작에서 아카시의 '도전자' 포지션은 쿠로코가 차지하고 있지만 솔직히 전 쿠로코의 기적의 세대에 대한 적의는 토오 2차전 이후로 종료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그냥 라쿠잔이 이기느냐 세이린이 이기느냐의 '팀' 단위의 문제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개인에게 가장 근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상대는 역시 미도리마라고 생각해요. 미도리마가 주인공이었다면 아카시가 최종보스인 것도 납득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23. 과거 썼던 녹적+녹<-고 로그를 조금 수정했습니다. 아카시를 좋아하지 않는, 정확히는 아카시에게 연애감정이 없는 미도리마도 좋아해요. 아카시 혼자 일방적으로 감정을 몰아붙이는 관계 같은 거.
22. 22cm라는 녹적 신장차를 좋아합니다. 사실 테이코 쪽에 써도 될(사실은 그쪽에 더 어울리는) 로그였는데, 22cm 차이가 명확히 나는 시기는 고교라서 고교 녹적데이로 편성해 보았습니다. 그런 것치고 로그에선 미도리마가 자라버려서 27cm의 신장차가 됐지만... 뭐 어때요.
21. 23번 로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미도리마에게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미도리마를 놓지 않는 아카시의 이야기가 쓰고 싶었는데 쓰고 나니까 참... 아카시님이 아카시님이 아냐...
20. DECO*27님이 작곡하신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매드도 녹적으로 한번쯤 보고 싶은데 무리겠지... PV 속 두 사람이 마지막에 만났으니까, 분명 이 글 마지막의 미도리마 역시 아카시를 만나러 가서 진심을 고백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19. 처음 아마노쟈쿠를 들었을 때, 이건 정말 아카시가 미도리마에게 하는 말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라도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고, 미도리마에게 정말 넘칠 정도의 애정을 받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버리고 싶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하루빨리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아카시님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18. 19번 로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미도리마와 아카시를 연결하는 끈은 정말 농구 뿐이지만, 찾아본다면 얼마든지 끈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관계가 굳이 라이벌이나 적이나 친구일 필요는 없죠. 적의나 라이벌 의식을 버리면 남는 것은 정말 편하게 사랑할 수 있는 미래 뿐일 테니까.
17. 팬북의 미도리마 QnA나 소설 3권의 삽화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도리마는 그 날 아카시한테 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무라사키바라랑 키세랑 아오미네가 옆에서 소란스레 떠들고 있는데 잔소리를 안 하고 아카시만 보고 있어...? 두 사람 삽화만 떼어놓고 보면 정말 의미심장한 장면이거든요 그거. 녹적 좋아하시는 분들이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 해보지 않으셨을까?
16. 제 안의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곧 미도리마의 진인사대천명 그 자체니까요. 사실 제가 미도리마의 그 점을 좋아해서 아카시한테도 적용시키는 거 맞습니다만, 아카시 성격이나 판단력을 봐도 미도리마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을 거 같았어요. 덧붙여서 녹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곧 미도리마에게 반한 계기가 되고요.
15. 아카시가 패배를 알고 미도리마와 앙금을 푼 채 연인 관계가 되더라도, 그것이 곧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그에도 썼지만 미도리마에게는 아카시와 달리 소중한 것이 무척 많거든요. 특히 가족들의 경우, 미도리마밖에 볼 곳이 없어진 아카시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미도리마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게 되는 시점에 겨우 아카시의 상처가 회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녹적은 빨리 입적하는 것이 좋다. 두번해라 세번해라.
14. 화해하고 원거리 연애 시작한 당시의 녹적이라면 정식 데이트를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만날 경우가 많을 거 같습니다. 행동을 개시하는 건 늘 아카시지만 가끔 미도리마가 의표를 찔러주는 것도 좋아요. 언젠가는 써보고 싶음. 덧붙여서 저도 아카시와 비슷한 이유로 미도리마를 좋아합니다. 굳이 아카시가 아니어도 제 연인에게는 인사를 다할 거 같은 남자라서.
13. 미도리마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카시는 첫 패배 뒤 멘붕상태일 경우에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좋아합니다. 멘탈이 회복되면 두렵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할 거라는 게 제 생각. 다만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그 정도까지 망가지면 어쩐지 기뻐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12. 미도리마가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는 것, 미도리마가 제 옆에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지만 도저히 현실적인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아카시가 쓰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 중 더 현실적이고 냉정한 쪽은 역시 아카시겠죠. 아카시는 미도리마보다도 책임져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결국 미도리마를 택하고 마는 아카시. 라는 결말입니다.
11. 제가 얀데레를 참 좋아한다고 하는데요... 사실 미도리마처럼 멀쩡한(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결코 멀쩡하진 않지만) 놈이 사랑에 빠지면, 그리고 그걸로 맘고생 심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얘는 얀데레짓에도 인사를 다하겠죠. 그래서 무서운 거고요. 아카시가 붙잡힌 이상 저기서 나갈 방법은 아버지가 구하러 오는 길뿐인데, 미도리마가 하는 일이니 분명 철저하게 감춰놨을 거 같습니다. 그냥 그러고 살아! 라고 하면... 너무 무책임한가요...
10. 타카오의 입장에서 본 미도리마와 아카시... 가 테마입니다만, 실은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쓰는 사람이 저니까 당연한 거지만. 녹적이 맺어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아카시의 마음이겠죠. 미도리마는 아카시 받아줄 마음이 만만일 테고. 로그에서 쓴 것처럼 아카시에게도 미도리마에게 갈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테지만, 말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카시는 미도리마 좀 받아줘라... 애가 불쌍하지도 않니...
9. 두 사람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현실에 한 번은 좌절하는 녹적이 보고 싶었습니다. 녹적이 맺어질 경우 미도리마 가족들은 아카시 받아줄 거 같은데 아카시 아버지는 진짜 녹록치 않겠죠. 미도리마라면 그런거 신경 안쓸거 같지만. 그러니까 먼 미래에 이 둘은 정말 사랑의 도피를 합니다. 약속을 했으니 지킨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미도리마만 가족과 연락하는 상태인게 좋아요. 미도리마에게는 분명 가족이 아카시만큼 소중할 테니까요.
8. 부제는 ~너에게 닿기를~ 입니다. 장난 아니고 진짜. 미도리마는 3년 내내 아카시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을 테지만, 아카시가 변해버린 중학교 3학년의 지난 1년 동안 가장 강하고 짙게 아카시를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테이코 중학교 2학년까지의 2년은 아카시가 옆에 있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에 그다지 일기장에 쓸 얘기도 없었겠지만(그래도 물론 쓰긴 썼을 듯) 3학년의... 아카시가 변해버린 뒤의 몇 달은 내내 아카시 얘기만 썼을 것 같습니다. 아카시는 잘 생각해봐야 됩니다 저렇게 너 생각하는 사람 얼마 없어...
7. 예전 개인지로 낸 <말의 꽃> 에서 비슷한 설정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읽지 못하신 분들에겐 네타가 되려나... 하지만 아카시가 괴로움으로 떨고 있을 때 찾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카시의 인맥을 아무리 뒤져봐도 미도리마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더 쓸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6. 제가 녹적으로 꼭 보고 싶은 매드 TOP 3. 이 곡이 나왔을 때부터 연애 서큘레이션→망상 익스프레스로 넘어가는 매드 녹적으로 보고싶다고 몸부림쳤지만 아직도 실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일단 애니 3기가 나온다니까 그거 영상 가지고 하나 만들어볼까 싶어서 이것저것 계획 짜다가 글로 한 번 써보자 싶어서 편입해 봤습니다. 사실 이 로그 쓸 때까지만 해도 이게 제일 길었는데 뒤로 갈 수록 로그가 길어졌다는게 함정... 번역 죽어났다는게 함정...^^... 망상 익스프레스 공식 PV에서 나데코가 나레이션 하는 부분들이 너무 인상깊어서 그냥 로그에도 좀 넣어봤습니다. 맨 첫 번째 자기소개문이라던가.
5.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때로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 각오가 강하다면 강할수록.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의 양심이 찔리는 걸 막아보려는 미도리마의 이야기. 아카시는 이걸 듣고 상당히 상처받았을 것이고 미도리마도 그걸 알고 있지만, 자신의 각오를 위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입히기도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4. 제가 녹적으로 꼭 보고 싶은 매드 TOP 2... 제가 정말 데코니나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이분은 왜 제 심장을 직격시키는 노래만 만드는거죠? 매드를 보면 딱 느낌이 오레카시랑 보쿠카시+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누군가 의 구도라서 녹적으로 만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것도 망상 익스프레스처럼 매드 내용을 글로 옮겨본 건데, 그 매드 자체가 워낙 영상미가 강렬하다보니 그걸 다 글로 옮기기보다는 대략적인, 중요한 감정선만 옮겨보았습니다. 누가 좀 만들어주세요... 그 매드는 원작 편집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에요...
3. 많은 사람들이 녹적의 사랑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인물들한테 저를 대입시켜 놨네요.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미도리마랑 아카시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제가 그렇게 바라고 있어서인 거 같기도 하고... 타카오, 미부치, 무라사키바라, 쿠로코까지는 다 해놨는데 왠지 네명은 어색해서 니지무라 선배를 끼워넣었는데, 어쩌다보니 선배가 들어가있는 게 더 어색해진 케이스네요... 죄송해요 선배... 덧붙여서 이 인터뷰를 한 사람은 쿠로코라는 설정입니다. 타카오나 니지무라가 '너' 라고 하지 않고 '쿠로코' 라고 직접 언급한 부분은, 기록을 정리한 쿠로코가 독자들을 속여넘긴 셈이 되겠죠.
2. 한 번쯤 꼭 써보고 싶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인데 대체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분명 세계가 멸망한 건 맞는데 주변 건물과 풍경은 멀쩡하고 사람만 없는 이세계- 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 가져왔습니다. 본격 폐쇄공간! 하루히는 그걸 무자각으로 만들지만 아카시는 그걸 자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닐까 싶으네요. 글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글에 다 했으니, 읽어주신 분들은 분명 아실 거라 믿습니다. 덧붙여서 BGM은 40m님의 토리노코시티입니다. 마지막에 '혼자는 싫어, 곁에 있어줬으면 해' 라는 가사로 끝이 났으니 아카시의 곁에 미도리마를 데려와보았다! 같은 느낌입니다.
1. 제가 녹적으로 꼭 보고 싶은 매드 TOP 1. 40m님의 시력검사입니다. 이 노래 진짜 미친 듯이 좋아요 환장하겠음... 매드도 꽤나 유명하니 다들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생각해보면 갑자기 이중인격이 됐다는 설보다는, 아카시는 아카시일 뿐인데 다른 사람들 모두가 제 2의 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아카시한테 괜히 백안 뜨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미도리마도 그 중 하나. 아예 대놓고 아카시는 두명 있다고 말한 놈이니까요... 미도리마가 그 말을 후회하고, 진짜 아카시가 누구인지를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야기가 보고 싶었습니다.
쓰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해방이다!
는 무슨 테이코 녹적데이가 남았잖아....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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